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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뿌리를 찾아서 스크랩 예산-은열공강민첨 장군묘殷列公姜民瞻將軍 , 은열공강민첨, 충남문화재자료 제319호
대산 강원기 추천 0 조회 108 18.08.10 07:1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은열공강민첨장군殷烈公姜民瞻將軍

충남문화재자료 제319호

충남 예산군 대술면 이티리 산34



은열공강민첨 장군

963(광종 14)1021(현종 12). 고려 전기의 장군.

강민첨(姜民瞻)고려사(高麗史)에는 진주 진강(晉康) 출신으로 되어 있으며,

1996년 경상남도 하동군에서 발간한 하동군지에는

 지금의 옥종 땅[현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출신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는 1906년 본래 진주 땅이던 옥종이 하동군에 속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강민첨(姜民瞻)은 뜻과 기상이 높고 성품이 강건하고 과감한 성품으로 알려져 있으며,

동여진과 거란 등의 외침을 물리치는 데 중요한 공적이 있다.

강민첨(姜民瞻)의 본관은 진주(晉州)진양(晉陽)이다.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에서 태어나 고려 목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1012(현종 3) 5월 동여진이 청하현(淸河縣)[현 경상북도 포항시 청하면]

영일현(迎日縣), 장기현(長鬐縣) 등지로 쳐들어오자

도부서(都部署)의 문연(文演), 이인택(李仁澤), 조자기(曺子奇) 등과 함께

안찰사로서 주군(州郡)의 병사들을 독려하여 격퇴하였다.

1018(현종 9) 거란의 소배압(蕭排押)10만의 병사를 이끌고 쳐들어오자

평장사 강감찬(姜邯贊)의 부장으로 흥화진(興化鎭)[현 평안북도 의주]에서 적을 크게 무찔렀다.

패배한 소배압의 군대가 곧장 개경으로 공격해 들어오자,

다시 이를 추격하여 자주(慈州)[현 평안도 자산]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 공을 인정받아 1019년 응양 상장군주국(鷹揚上將軍柱國)이 되고,

곧 이어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올라 추성치리 익대공신(推誠致理翊戴功臣)에 녹훈되었다.

이듬해인 1020년 지중추사 병부상서(知中樞事兵部尙書)가 되었다.

예산재

1021(현종 12)에 강민첨이 사망하자 조정에서 3일 동안 조회를 열지 않으며 태자 태부(太子太傅)로 추증하였다.

또한 아들 강단(姜旦)에게 녹(祿)과 벼슬을 주었다.

문종이 즉위 후 강민첨의 거란전 대승을 칭찬하는 교서를 내리고

공신각(功臣閣)에 초상을 그려 후대의 귀감이 되게 하였다.

옥종면 두양리에는 강민첨이 심었다고 전하는

두양리 은행나무[경상남도 기념물 69]와 사당인 두방영당, 재실인 두방재가 있으며,

영당 입구에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殷列公姜民瞻將軍事蹟碑

                                        은열공강민첨장군사적비













高麗推誠致理翊戴功臣 金紫興祿大夫兵部尙書 太子太師天水縣開國男 諡殷烈姜公民瞻之墓

고려추성치리익대공신 금자흥록대부병부상서 태자태사천수현개국남 시은열강공민첨지묘





高麗推誠致理翊戴功臣 金紫興祿大夫兵部尙書 門下侍郞上柱國天水縣開國男 諡殷烈姜公民瞻之墓

고려추성치리익대공신 금자흥록대부병부상서 문하시랑상주국천수현개국남 시은열강공민첨지묘





殷列公姜民瞻將軍 馬夫塚

은열공강민첨장군 마부총



殷列公姜民瞻將軍 馬

   은열공강민첨장군 말무덤



         강민첨姜民瞻

   자  강단姜旦 太子太師

   손  강항姜恒, 강보姜輔

증손  강정협姜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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