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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의 효실천에 관한 연구
【 논 문 요 약 】
효란 부모와 자식 사이의 질서를 밝힌 도덕규범으로, 자식이 부모에 대하여 경애의 마 음으로 행하는 모든 행위를 말한다. 인간이 지켜야할 근본인 예를 강조한 퇴계 이황은 예교육을 통한 선비 양성에서 효가 기본이 되는 것으로 보았다. 본 연구는 퇴계 이황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와 문집을 중심 으로 퇴계 이황의 효실천에 관한 내용을 살펴봄으로써 현대에 바람직한 효문화 수립에 목적을 두었다. 퇴계 이황은 경에 근본한 예의 바른 실천을 언급하였다. 퇴계 이황의 효 실천의 내용 은 퇴계가 평생동안 쓴 많은 편지 중에서 그의 맏아들인 준(1523년~1584년)에게 보낸 편지에서 가정의 크고 작은 온갖 일들에 언급되어 있는데 생활인으로서 그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었다. 퇴계 효의 실천내용으로 일상의 효와 사후의 효인 제례와 상례를 살펴보았다. 일상의 효는 자녀가 살아계신 부모에 대해서 행하는 일상생활에서의 효인데 퇴계는 어머니께 지극한 일상의 효를 실천했음을 알 수 있었다. 사후의 효인 제례는 기본적인 예를 제시 하면서 현실적 상황에 맞는 효실천을 강조하였다. 상례는 예에 어긋나지 않으면서 분수 에 지나침이 없도록 지극한 정성을 다하여 행동할 것을 당부하였다. 전통적인 효행의 모습은 현대사회에서 바라보는 시각과 환경에 따라 달라져야하고 행 위에 대한 존중은 인간의 본성 차원에서 다른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위기 극 복의 방안으로 전통 효문화는 현대적 의미로 재해석 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세계에 자랑할 만한 문화는 우리의 효 문화이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이웃을 공 경하며 가정을 바르게 세우고 자식에게 올바른 교육을 하여야 할 것이다. 모두 함께 살 수 있는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여 밝고 희망찬 사회를 열어가야 할 것이다. 아울러 21세 기에 한국인의 효 문화는 한국인의 오랜 전통문화와 미래사회의 효를 접목시킬 수 있는 심도있는 학문적인 성찰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주제어 : 효, 퇴계이황, 효실천, 일상의 효, 사후의 효
* 원광디지털대학교 차문화경영학과 교수, napolee0049@hanmail.net 이 논문은 2015년도 원광디지털대학교의 교비 지원에 의해서 수행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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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Ⅰ. 서 론
Ⅱ. 퇴계 이황의 예학성립과 전개
Ⅲ. 퇴계 이황의 효사상
Ⅳ. 퇴계 이황의 효 실천내용
Ⅴ. 결 론
Ⅰ. 서 론
한국을 ‘동방예의지국’이라 일컫는 것은 웃어른을 공경하며 형제간에 우애가 깊고 아랫사람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전통 속에서 공경심을 예로 표현하는 효가 생활의 근간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효란 부모와 자식 사 이의 질서를 밝힌 도덕규범으로 자식이 부모에 대하여 경애의 마음으로 행하는 모든 행위를 말한다. 가족이나 가문의 공동체인 혈연관계가 기반 이 된 우리나라에서는 효사상이 쉽게 뿌리 내릴 수 있었다. 공자는 “효가 모든 덕행의 기본이며 또한 교화의 근원이다1)”라고 말씀 하셨으니 효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 인류가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다. 지식기반의 정보화 사회인 21세기에는 서구문화의 무분별한 유입과 산 업화에 따른 물질만능주의, 가족이기주의, 사회소외현상에서 생기는 각종 탈선, 반인륜적인 행위로 기본적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인간성 상실이 이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핵가족제도의 변화로 가정에서의 기본예절
1) 『孝經』, 子曰 夫孝 德之本也 敎之所由生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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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등한시 되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실정에서 효의 이념과 행동양식을 새롭게 조명하고 효사상의 고취를 위한 실천의 당위성이 강 조되고 있다. 더불어 효를 우리의 생활윤리로 정립하고, 인성교육의 실천 방안으로서의 필요성도 제기되었다. 일례로 “효행장려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 국회 통과로 일부 지방자치단체들이 효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조 례를 제정하고 있다. 또한 효행교육은 학교에서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으 며 새로운 인성교육의 대안으로 활성화 하고 있다. 효사상이 추구하는 사회 공동체의 화목과 질서 윤리는 시대의 필수적 가치로 인식되고 있고, 효문화는 효행이라는 실천적 특성이 있어 한국문 화 속에서 더 체계화하여 독창적인 문화로 계승되어야 할 소중한 문화유 산이다. 인간이 지켜야할 근본인 예를 강조한 퇴계 이황은 예교육을 통한 선비 양성에서 효가 기본이 되는 것으로 보았다. 퇴계 이황의 사상에 대한 연 구는 다양한 방면에서 수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반면에 효에 대한 연구는 성리학이나 문학 등의 분야와 비교하면 아직은 미진한 실정이다. 본 연구는 퇴계 이황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와 문집을 중심으로 퇴계 이황의 효실천에 관한 내용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하여 전통의 효사상과 효행이 점차 퇴색되어가는 현대에 바람직한 효 문화 수립이 될 수 있기 를 기대한다.
Ⅱ. 퇴계 이황의 예학성립과 전개
퇴계 이황은 경(敬)이 학문의 기초가 된다고 보았다. 작게는 개인의 도 덕을 확립시키는 수양의 기초가 되며, 넓게는 모든 사물의 이치를 통관 하는 의미를 지닌다고 하였다. 학문을 한다는 것은 곧 경(敬)을 일상생활 에서 실천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점에서 퇴계는 경(敬)의 실천 을 통해 지식과 학문의 실천을 겸비할 수 있다고 하였다. 경이란 형이상과 형이하를 통관하는 것으로 경의 일상적 수양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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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의 원리를 터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퇴계 이황은 “경은 성학을 시작하고 마치는 요체가 된다”고 하여, 경을 수양의 으뜸으로 삼았으며 경을 강조하는 지경의 수양론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퇴계의 경 사상은 인간의 순수한 도덕적 가치를 높이고 도덕 주체를 확립하려는 입장에서 나온 것이다.2) 이러한 관점에서 퇴계 이황의 생애, 예학 성립과 전개를 살펴보면 다 음과 같다.
1. 퇴계 이황의 생애
퇴계 이황(1501~1570)의 휘는 황(滉), 자는 경호(景浩)이며 1501년 11 월 25일 경북 안동군 도산면 온혜동에서 진보이씨 가문의 부친 이식(李 埴)과 모친 춘천 박씨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여덟 남매의 막내인 퇴계는 형이 여섯, 자씨(姉氏)가 한 분 있었는데 위로 두 분의 형과 자씨(姉氏) 는 전모 의성 김씨(前母 義城 金氏)의 소생이고 아래 다섯 분은 박씨 부 인에게서 태어났다. 퇴계는 생후 7개월만에 부친이 병으로 별세함으로 집안형편은 모부인 혼자서 농사와 양잠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어려운 형편에서 박씨로부터 매우 엄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퇴계는 자신의 성장에 영향을 많 이 끼친 분은 어머니였음을 모친의 묘갈명(墓碣銘)에다 기록해두었다. 모 부인 박씨가 퇴계를 잉태할 때 꿈에 공자(公子)가 대문에 와 있었다 하 여 태실(胎室)이 있는 온혜의 노송정(老松亭) 옛집 대문을 임성문(臨聖 門)이라 한다. 퇴계는 6세 때 학자의 법도를 갖추어 손윗사람에게는 공손하였다. 퇴 계의 행도(行道)는 성덕(成德)하기 위한 극기와 지경(持敬)에 중점을 두 었다고 할 수 있으며 사물의 처리나 응접하는데 있어서 단정하고 충직하 고 지성(至誠)을 다하려고 애썼다.
2) 도민재, 「퇴계예학사상의 특성」, 『유학연구』 19,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009, pp.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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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웃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움으로 학문에 입학하였다. 12세에 숙부인 송재 이우로부터 논어를 배웠으며 문리(文理)를 깨우치 고 이학과 학문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14세에 호학지인(好學之人)으로 성장하였으며, 16, 17세 때에는 학문에 전념하여 친구와 입산해서 동탑(同榻) 수학(修學)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8세에 이르러 우주를 관조하게 되었고, 안동부사 이현보가 유사(儒士) 대회를 열었을 때 참가하였다. 19세 때에는 학문의 심오한 경지에 까지 터득하였으며, 20세 때는 역 학공부에 몰입해서 침식을 잊고 독학으로 독파하였다. 주역의 이론은 산 학(算學), 과학(科學), 철학(哲學), 정치학(政治學), 문학(文學)의 기초를 이루었고, 후일 주자의 역학계몽(易學啓蒙)을 바로잡는 계몽전의(啓蒙傳 疑) 저술의 밑바탕이 되었다. 21세에는 김해 허씨와 혼인하여 23세 때 큰아들 준이 출생하였으며, 27세 때 둘째아들 채가 태어났으나 허씨 부인과 사별했고, 30세에 안동 권씨와 재혼하였으나 자식은 두지 않았다.3) 퇴계는 3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외교문서를 다루는 승문원 부정자로부 터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43세 성균관사성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걸었다. 43세에 성균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이 무렵부터 산림에 은퇴할 결의를 굳히고 을사사화 후 혼미한 정국에 환멸을 느껴 모든 관직을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46세 때에 재취부인 권씨상을 당하고 낙동강 상류 시냇가에 양진암을 짓고 자연을 벗하며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48세에는 홍문관응교에 제수되어 상경하였다가 외직을 지망하여 48세 에 단양군수가 되었다. 군수 재임 1년 만에 병을 이유로 고향에 돌아와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57세에 도산서당을 짓기 시작하여 4년 만에 완공하고 이로부터 서당에
3) 권오봉, 『퇴계학 입문서 예던길』, 우신출판사, 1988, pp.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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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거하면서 독서와 저술활동을 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학봉 김성일, 서 애 류성룡, 한강 정구 등 제자가 360여명에 이른다. 이후에도 공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를 거쳐 68세 우찬성이 될 때까지 부임과 사퇴를 거 듭하였다. 그는 도산서당에서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쓰다가 1570년 70세로 세상을 떠났다. 광해군 2년(1610)에 한휜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 회재 이 언적과 함께 조선시대 유현(儒賢)으로서 최초로 문묘에 종사되어 ‘동방 오현’으로 추앙되었으며 사림의 사표가 되었다. 위대한 성리학자이며 교 육자, 시인이었다.4) 이를 보면 퇴계 이황은 일찍 성리학에 뜻을 두고 독학으로 탐구하여 성리학의 대가가 되었으며 퇴계학파를 형성하여 후진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는 학자로서 웃어른에게는 공손하며 가정교육을 엄하게 받았던 어머니 께는 지극한 효자였다. 그의 일생은 관직에 뜻을 두기보다는 고향에서 독서와 저술활동을 하 며 실천을 중시하는 학문으로 일관하였다.
2. 퇴계 이황의 예학 특징
조선 초에는 성리학이 실천궁행(實踐躬行)의 단계에서 머물지 않고 점 차 이론적인 탐구가 이루어지게 되면서, 그것을 구체화시키는데 예학이 라는 새로운 학문의 싹이 트기 시작하였다. 예란 이(理)를 구체화한 생활 방식이며 조선의 성리학이 이언적․서경덕․김인후 등을 통하여 전개되 었듯이 예학 또한 이들을 통하여 제기되었다. 이들의 학문적 성과를 수 용하여 조선조의 학문은 영남의 퇴계 이황과 기호의 율곡 이이, 구봉 송 익필 등이 각기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과 기발이승일송설(氣發理乘一送 說)을 주장하여 성리학의 기반을 수립하게 되었고, 이들을 통하여 예학 도 각기 영남과 기호 두 학파로 전개되었다. 이중 영남학파는 천리를 중
4) 국립문화재연구소, 『종가의 제례와 음식』 7, 월인, 2005, pp.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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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하고, 『심경』에 의거하여 학문의 방향을 바로잡아 이기론의 확립에 노력했다.5) 성리학적 세계관 형성의 매개가 되는 이․기의 원리적 관계를 토대로 현실인식과 대응자세를 규정하는 이해체계는, 조선 초 이래 간헐적으로 시도되기는 했으나 16세기 들어와서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구조화되기 시 작했다. 퇴계 이황의 예학은 경전에 근거한 정밀하면서도 폭넓은 고증과 훈고, 깊은 사색과 직접적인 체험에 근거하여 실천 가능한 예를 정립한 점에서 후학들의 귀감이 되었다. 예학과 심학은 상호 긴밀한 의존관계였으며, 그 의 심학은 유학의 수기치인의 본령을 유지하면서도 그 방법과 윈리는 정 일집중(精一執中)의 심법 또는 심성의 존양 등으로 귀결되는 학문이었다. 심학의 학문적 목적은 개인의 심신에 합례적 성향을 확고히 하는 것이므 로 예의 학습과 심성의 존양에 대한 철저한 체험위주의 공부를 중시하였 다.6) 퇴계 이황의 심법은 일신주체인 마음을 제어하는 경을 주로 삼았으며, 경은 예의 근본이다. 경은 일심을 주재(主宰)하고 단속하여 그 바탕을 잃 지 않게 한다. 경이 발현시킨 것이 예이며, 예는 모든 작위(作爲)에서 그 분수에 맞는 자리와 그 마땅함을 지켜주는 것이다. 예는 체행하고 실천 하여야 하는 것으로 마땅히 천리(踐履)하는 의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리는 예가 구체화된 문채(文彩)이다. 의는 사람의 바른 길이며 예로부 터 얻어진 효용이다. 그러므로 의를 행하면 예를 갈무리 하게 되는 것으 로, 의(義)와 예는 표리(表裏)가 되고 경과 의는 체용으로써 중절(中絶) 인 예를 통해서 구체화된다.7) 이를 보면 퇴계 이황은 경에 근본한 예의 바른 실천을 언급하였다. 경 은 시종을 일관하는 마음의 자세이므로 일심을 주재하는 것일 뿐만 아니 라 만사의 근본이다. 그러므로 경으로써 주체의 체득과 실천을 이루어
5) 배상현, 「퇴계 이황선생의 예학사상」, 『퇴계학보』 84-1, 퇴계학 연구원, 1995, pp.7-14. 6) 류권종, 「조선시대 퇴계학파의 예학사상에 관한 철학적 고찰」, 『퇴계학보』 102-1, 퇴계학연 구원, 1999, pp.35-39. 7) 김길령, 『불천위제례-영남지역을 중심으로』, 민속원, 2011, pp.3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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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야 한다고 보았다. 체득과 실천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마음과 이가 하 나가 된다는 의미이며, 경으로써 마음을 주재하여 자발적인 실현이 가능 해진다고 할 수 있다.
Ⅲ. 퇴계 이황의 효사상
퇴계 이황은 일상생활에서 모든 장소와 때에 실천해야 할 덕목으로 경 을 강조하는 지경의 수양론을 강조하였다. 경의 실천공부로서 예(禮)를 제시한다. 경신이란 공경하는 몸을 가짐이다. 몸을 잘 공경하는 것과 사 람을 공경하는 마음가짐도 효로써 여겨 중시 하였다. 사람은 마음을 오 로지 하여 일체의 잡념을 없애고 몸을 단정하고 엄숙히 하며 말은 안정 되게 하고 심신을 닦아 몸이 훼손이 없이 하는 것이 효가 되는 것이다.8) 공자 사상의 핵심인 인(仁)은 인간다움, 사람을 사랑하는 애인, 자신을 누르고 예로 돌아가게 하는 극기복례(克己復禮) 등으로 다양하게 정의된 다. 인은 인간의 근원적인 도덕 정감에 해당되고, 이를 가정에서 실천하 는 것이 부모에 대한 효이다. 맹자는 공자의 인사상을 계승하여 인의예지라는 네 가지 덕으로 확장 시키면서, 이를 선천적인 인간 본성으로 정의한다. 모든 사람이 이러한 덕을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음은 사단이라는 자연적인 마음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인은 사랑으로 나타나고 의(義)와 지(智)는 정의와 정직으로 나타나며, 예는 공경으로 표현되고, 악(樂)은 즐거움과 평화로 나타난다. 즉 효행을 통해 사랑, 정직, 정의, 공경, 자유, 평등, 내적 즐거 움이 나타난다고 하였다. 유교윤리에서 오륜사상은 핏줄 의식에 그 근본을 두고 있으며 그 중에 서 부자유친이라는 덕목이 강조되었다. 효는 전통적으로 가정에서부터 바탕을 이루며 한국인의 고유한 정서 속에 내재되어 있는 효사상은 공동
8) 한관일, 「효사상과 효문화 : 조선시대 소학의 효사상」, 『한국의 청소년 문화』 15, 한국청소 년문화학회, 2010,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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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의식이 기반이 되어 단결심을 이루게 된다.9) 이러한 효사상은 역사적 존재란 인간의 특수성을 배경으로 해서 생겨 난 사상이다. 따라서 효는 과거와 현재, 미래로 이어가는 윤리이고 자기 정체성을 확인해 주는 도덕이다. 그리하여 가정에서는 화목으로 나타나 고 사회로 확산이 되면 박애의 봉사정신이 되며, 국가로 확충이 되면 충 (忠)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효는 모든 행실의 근원이며, 인을 실 천하는 근본윤리이다. 더불어 사회윤리로서 민족애뿐만 아니라 인류애로 까지 발전하는 우리민족의 사상이며 국민정신교육으로 계승 발전되어야 할 사상이다. 그러므로 효 사상은 한국인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미풍양속이며 윤리적 덕목이다. 교육적 측면에서 보면 효가 직접적으로는 인격교육의 방법론적 원리가 되고 결과적으로는 지혜를 획득해가는 원리가 될 수 있 다.10) 퇴계 이황은 시속과 고례의 원칙 사이에서 나타나는 예제의 차이에 대 해, 기본적으로 의리에 합당한 예를 추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퇴계의 예 학사상은 『주자가례』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시속을 인정하는 측면이 있 다. 그러므로 퇴계 예학사상의 특성은 예의 기본적인 원칙을 벗어나지 않는 수준에서 사회의 관습을 인정하고, 이러한 관습에 따라 개인의 예 에 대한 실천의지를 강조하였다. 그는 예설에서 예를 적용할 때는 인정 을 우선하였는데 예란 인간도리의 근본을 이룬다는 기본인식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퇴계 이황은 예의를 알지 못하여 군신상하의 분 별이 없으며, 또 그 삶이 어리석고 미련하여 거의 금수와 다를 바 없으 므로 예는 사람과 금수를 구별하는 것이며 예를 알고 수행함으로써 인간 다움을 유지할 수 있다고 여겼다. 예법을 고수하기 위해 부모와 자식, 형 제간에 지켜야 할 도리를 저버리는 일을 극도로 경계했던 것이다. 이러 한 퇴계의 입장은 사람을 중시하는 인본적 사고에 바탕하고 있다.11)
9) 이미숙, 「제2부 한국인의 효사상 :『사자소학』에 내재된 효사상」, 『한국의 청소년 문화』 21, 한국청소년문화학회, 2013, p.95. 10) 심우섭, 「한국 전통문화 속의 효 사상」, 『유교문화연구』 14, 성균관대학교 유교문화연구소, 2009, pp.117-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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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의 『聖學十圖』에서 마음수양의 주체인 인간의 내면적인 심 (心)과 성(性)에 대해 밝히고, 성학(聖學)시종을 꿰뚫는 경의 실천을 나 타냈다. 즉, 퇴계는 마음수양의 요점을 심(心)과 성(性)의 구조, 학문 수 양법, 일상생활에서의 마음가짐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마음이 그 본래성을 발휘하기 위하여 지경(持敬)이 요구되었다.12) 이런 관점에서 퇴계는 『성학십도』의 중심사상으로 경을 밝히고 있 다. 경은 예의 근본이며 경이 발현시킨 것이 예이므로 경에 근본한 예의 바른 실천을 강조하였다. 특히 의리와 인정에 기반한 예와 실천을 권장 하였으며 효를 행하고자하는 자식의 뜻은 인정의 본질이며 예의 기본임 을 인지할 때 퇴계 이황의 효사상은 예가 기본이 된 실천을 강조하였다. 경의 실천은 곧 효를 다하는 것이다. 부모님을 대할 때의 마음자세는 곧 게 가지며 행동을 할 때는 공경과 정성된 마음으로 예로 받들며 걸음걸 이를 가볍게 하고 손은 공손하게 할 것을 언급하였다.
Ⅳ. 퇴계 이황의 효 실천내용
효는 우리의 전통사회를 지탱해온 사회규범이며 기본적인 윤리이다. 효행은 마음가짐에서부터 시작되어 겉으로 나타나므로 항상 공손하며, 예의바르게 행동하고, 몸과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이다. 「論語」에는 “효는 부모가 살아 있을 때는 예로 섬기고, 돌아가 신 후 장사지낼 때도 예로써 모시고 예로써 지내야 한다.13)”고 하여 생 존하실 때 뿐 만 아니라 사후에도 예를 지키는 것이 곧 효의 실천이라 했다. 퇴계 이황의 학문적 성격은 실천이다. 퇴계는 학문적 이론에 몰두했지
11) 김미영, 「퇴계 예설을 통해본 예의 기본이념」, 『국학연구』 19, 한국국학진흥원, 2011, pp.706-707. 12) 이해영, 「이황의 수양론」, 『퇴계학』 7, 안동대학교, 1995, p.58. 13) 『논어』 위정편, 生事之以禮 死, 葬之以禮 祭之以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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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일상의 삶에서 실행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으면서 실천유학을 구현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이를 위해 거경궁리(居敬窮理)14)의 삶을 추구 했다. 효의 실천은 자녀가 건강하게 오래도록 살아가는 것을 절실히 바라는 부모의 마음에 부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부모마음을 안정 시키는 의미를 가지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기 본적인 과제를 해결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 보편적 가치가 인정된다.15) 효를 실천하는 방법은 거처하실 때는 행동을 삼가고 봉양할 때는 기쁨 으로 하고, 병환이 났을 때는 걱정하면서 치료하고, 돌아가실 때는 슬픔 을 감추지 말고 엄숙히 제사를 지내 어버이의 뜻을 잘 계승하고 그 사업 을 잘 발전시켜나가야 한다. 퇴계 이황의 효 실천의 내용은 퇴계가 평생동안 쓴 많은 편지 중에서 그의 맏아들인 준(1523-1584)에게 보낸 편지에서 가정의 크고 작은 온갖 일들에 언급되어 있는데 생활인으로서 그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다. 또 한 그는 자상하고 세밀하고 또 철저한 분이었다. 아들에게 공부를 열심 히 하여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입신출세 할 것을 권하기도 하고, 선비로 서 교양과 인품을 갖출 것을 권하기도 하였다. 살림살이와 대인관계에 있어서는 구체적인 행위준칙에 이르기까지 세밀하게 일러주었다.16) 퇴계 이황의 효 실천내용으로 편지글에서 일상의 효와 사후의 효인 제 례와 상례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일상의 효
일상의 효는 자녀가 살아계신 부모에 대해서 행하는 일상생활에서의 효이다. 전통시대에는 부모를 모시고 사는 자녀는 평소에 부모에게 출입
14) 거경궁리란 학문적으로 탐구한 것을 실천으로 체험해야만 비로소 참된 앎으로 이어진다는 이 치를 말한다. 15) 조남욱, 「전통적 효와 현대적 효」, 『효학연구』 10, 한국효학회, 2009, p.93. 16) 이황, 이장우․전일주 옮김, 『퇴계이황 아들에게 편지를 쓰다』, 연암서가, 2008,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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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고하여 부모를 안심시키고, 아침저녁으로 부모의 잠자리를 보살펴 드 리면서 그 안위를 살피는 것을 기본적인 효행으로 여기고 있다.17)
영지산 끊어진 기슭 곁에 새집 지었더니 그 모습 달팽이 간차 몸 겨우 감출 수 있네 북쪽으로는 낭떠러지 마음에 들지 않지만 남쪽으로 안개와 노을 휘감아 운치 넘쳐나네 아침저녁 어머님께 문안드리기 가까우니 좋을 뿐 어찌 방향에 따라 춥고 더움을 가리랴? 달 바라보고 산 쳐다보는 꿈 이루었으니 이밖에 어찌 좋고 나쁨을 저울질하랴?18)
위의 시의 내용을 보면 퇴계 이황은 서른의 나이에 권씨를 둘째부인으 로 맞아 그 이듬해 온혜 남쪽에 위치한 양곡(暘谷)에 지산와사(芝山蝸 舍)에서 신접살림을 차렸다. 새집은 겨우 몸을 의지할 수 있는 좁은 공 간이었지만 어머니 거처와 가까이 있어 문안드리기에 더 없이 좋은 곳이 었다. 이를 보면 퇴계는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 항시 즐겁게 생활할 수 있도록 뜻을 어기지 않으며, 안색을 부드럽게 하고 잠자리를 보살피고 정성껏 봉양하여 근심걱정 없이 살아가실 수 있도록 지극한 일상의 효를 실천했음을 알 수 있다.
2. 사후의 효
사후의 효는 상례와 제례를 이른다. 상례는 죽음을 맞이하고 보내는 예로 정에서 우러나오는 슬픔을 간직한 채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삼 가 근신하여 고인의 뜻을 기리게 된다. 제례는 돌아가신 조상에 관한 업 적을 기리고 자손들이 모여 서로간의 화합과 일체감을 조성하여 부모와
17) 한기범, 「한국사상 사학 : 대전의 효문화 전통과 효문화 인프라」, 『한국사상과 문화』 71, 한국효학회, 2014, p.120. 18) 김병일, 『퇴계처럼』, 한국국학진흥원, 2013,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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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족의 어른을 공경과 정성으로 대하는 효의 실천이다. 이러한 상례와 제례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상례
1546년, 46세, 명종 원년 초상에는 슬픔을 주로 하니 모든 일은 『가례(家禮)』를 참고로 하여 시속에서 행하는 바를 마땅히 물어, 힘써 조심하고 다른 사람과 의논하 여 나무람을 듣지 않도록 하는 것이 지극히 마땅하고 마땅할 것이다. 더구나 너희들은 모두 너희 어머니의 초상을 치르지 않았으니 이 초상 이 바로 너희 어머니의 초상이라는 마음으로 하면 저절로 삼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계모가 친모와 차이가 있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대개 뜻을 알지 못하여 경솔하게 하는 말로써 사람을 의(義)가 아닌 것에 빠지게 하는 것으로서 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19)
지금 서울의 사대부가 행하는 장례가 비록 다 예에 합당한 것은 아니 지만, 그래도 보아두어야 할 것이 많이 있다. 너희들이 만약 옛 법도에 도 미치지 못하고, 또 오늘날에 다른 사람의 나무람을 듣는다면 그 무 엇으로 몸을 바로 세우겠느냐? 다만 기력을 지나치게 사용하여 병이 나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도록 하여라. 한 마디 하건대 무릇 조문객이 오면 상주와 곡(哭)하는 하인은 모두 곡 을 하면서 조문객을 맞이하고, 또한 발인할 때까지 곡하는 소리가 그쳐 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은 모두 오늘날 시속의 예에 합당한 것이다. 이와 같은 등등의 일은 다른 일에 미루어 생각하고, 사람들에게 물어보 아 시행하도록 하여 부디 소홀하지 않도록 하여라.20)
이를 보면, 퇴계는 두 아들에게 권씨부인이 비록 계모이기는 하나 생 모에게 하듯이 적모복(嫡母服)을 입게 했으며 시묘살이도 시켰다. 또한 조문객이 오면 상주는 곡소리를 그치지 말기를 당부하였다. 이것을 보면 예에 합당한 것이 아니라도 시속에서 행하는 예는 다른 사람과 의논하여
19) 김병일, 『퇴계처럼』, 한국국학진흥원, 2013, pp.38-40. 20) 이황, 이장우․전일주 옮김, 『퇴계이황 아들에게 편지를 쓰다』, 연암서가, 2008,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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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하도록 하여야함을 제시하면서 속례도 통용되어야 함을 언급하였다.
1548년, 48세, 명종3년 네가 오게되면..... 소식(素食:계모의 상중이라 육식을 금함)을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식사 때가 되어서 너는 모름지기 다른 곳에서 먹도록 하고 육식을 하는 사람과 같이 식사하는 것은 옳지 않다. 아녀자들도 모두 소식하도록 일러라.
네 아내의 행차에 관해서는 채색 장식한 가마가 있다고 하나 이러한 것을 타고 오는 것은 상주로서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니, 다만 완전히 검은색 옻칠을 한 가마를 타도록하는 것이 무방할 것이다. 네 처가의 뜻이 반드시 큰 가마를 태워 보내고자 한다면 완전히 검은 옻칠을 하 고 채색과 장식이 없는 것을 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대개 비단으로 수를 놓거나 붉은 색이나 자주색, 금색 구슬장식은 모두 써서는 안 될 것이다. 마땅히 잘 살펴서 분수에 어긋남이 없게 하여라.
1551년, 51세, 명종6년 조상(弔喪)때의 예절 문상할 때에 술과 음식 대접을 받는 것은 예절이 아닌 것으로 되어있 다. 하물며 본가와 빈소에서 모두 민간의 금기 때문에 이러한 궤전(几 奠:제물을 갖추어 신에게 제사를 지냄)의 예절을 없애버린다면 나도 또 한 영전에 한 잔의 술도 드릴 수 없을 것이다.
1555년, 55세, 명종 10년 『예기』의 「증자문(曾子問)」편에 가로되 “초상이 겹친다면, 어느 것 을 먼저하고 어느 것을 뒤에 하여야 합니까? 라고 하니 공자께서 대답 하여 말씀하시기를 초상에는 가벼운 것을 먼저하고 무거운 것을 뒤에 한다”라고 하셨다. (원문의 주석: 만약 부모의 상이 한꺼번에 있다면 먼저 어머니를 장사 지내고 아버지를 뒤에 장사지낸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같은 날에 발인을 한다면 10일 또는 11일 중 에 너의 동생을 먼저 장사하는 것이 곧 가벼운 것을 먼저 한다는 뜻과 맞게 된다. 예에 또 이르기를, 제사를 지내는 것은 무거운 것을 먼저하고 가벼운 것을 뒤에 한다고 하였다. (원문의 주석) 말하자면 비록 가벼운 초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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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장사를 지내지만, 우제(虞祭:초우, 재우, 삼우의 총칭)는 무거운 초 상을 장사지내기를 기다려서 먼저 무거운 것을 우제를 지내고 가벼운 것을 나중에 우제를 지낸다) 우제는 또한 이러한 순서에 의거하여 행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21)
이를 보면 퇴계는 상례의 예를 행할 때 소식을 해야 함을 권하였으며 상주가 된 입장에서는 며느리에게 화려하게 채색 장식한 가마보다는 검 은색 옻칠을 한 가마를 타고 올 것을 제시하였다. 이것은 예에 어긋나지 않으면서 분수에 지나침이 없도록 지극한 정성을 다하여 행동할 것을 당 부하고 있다. 또한 문상할 때 민가의 금기 때문에 제물을 갖추지 못하고 제사를 지 내는 것은 자손으로서의 도리와 예를 지키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나 타내었다. 부모의 상이 한꺼번에 있으면 공자의 말씀을 빌어 가벼운 것을 먼저하 고 무거운 것을 뒤에 한다고 명시하면서 어머니의 장사를 먼저 지내고 아버지 장사를 뒤에 지낸다고 언급하였다. 그러나 제사를 지낼 때는 무 거운 것을 먼저하고 가벼운 것은 뒤에 한다고 하여 아버지 제사를 먼저 지내고 어머니 제사를 지내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2) 제례
제례란 돌아가신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제반의식 및 예절을 말한다. 본 연구에서는 제례를 행할 때 재계와 제물, 추석과 한식제사, 부인의 기 제대상범위에 관한 내용을 살펴본다.
(1) 재계
1551년, 51세, 명종 6년 15일과 16일이 기일(忌日:〔증조부의〕제사 전날과 제사 당일)인데 잊
21) 이황, 이장우․전일주 옮김, 『퇴계이황 아들에게 편지를 쓰다』, 연암서가, 2008, pp.78-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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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으니 모름지기 마음에 새겨서 그때 가서 재계 하여라.
재계는 제사를 지내기 전에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경건하게 갖는 절차로서 심신을 정화하여 조상의 기운과 감통하기 위한 것이므로 재계 를 함으로서 공경과 정성된 마음으로 효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다. 이렇 듯 퇴계 이황도 효의 실천으로 재계할 것을 당부하였다.
(2) 제물
‘제사지내는 사람의 지위에 분등이 있으니, 제사지내는 예도 역시 그 분수에 따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오례의』의 규정은 역시 따르기 어려운 점이 있다. 찬품의 수량에 대해 포육, 식해, 과일은 엄청 나게 많고, 어육이나 반찬은 아주 적다. 인가에서 어육은 어디서나 구 할 수 있으므로 오히려 준비하기 쉽지만, 포육, 식해, 과일은 어찌 항상 많은 양을 마련해 둘 수 있겠는가? 내 생각에는 그 규정대로 모두 따 를 필요는 없고, 집안 형편에 따라 지내는 것도 무방할 것 같다. 다만 참월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제수의 그릇 수도 너무 번거롭게 할 것이 아니다. 번거로우면 모독이 되고 또 정결히 할 수도 없다.’22)
제례를 지낼 때 정성을 다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제물의 수 량은 집안의 형편에 따를 것을 이르면서 많은 가짓수의 제물보다는 무엇 보다 정성스러운 마음가짐이 중요함을 언급하였다. 위의 내용에서 퇴계 이황은 고례의 규정을 따르기 보다는 현실적 상황에 맞게 제사를 지낼 것을 권장하고 있다.
1548년, 48세, 명종 3년 대상(大祥:사람이 죽은 지 두 해 만에 지내는 제사)이 임박하였는데
22) 도민재, 「퇴계예학사상의 특성」, 『유학연구』 19,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009, pp.20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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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상은 이곳에서 준비하여 보내도록 할 것이나, 쌀과 밀가루는 형편 상 준비하기가 매우 어려우니 집안에서 모쪼록 준비할 수 있으면 보내 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비축한 것이 없을까 걱정이 되는구나. 신주(神 主)를 처음에는 여기로 모셔오려고 하였지만 다시 생각하니, 먼저 세상 을 떠난 사람의 신주는 모셔오지 않고 뒤에 간 사람의 신주하나만 모 셔온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되는구나. 두 신주를 함께 모셔온다면 이곳은 오래 머물 곳이 아니기 때문에 더더욱 마땅한 일이 아닌 것 같 구나.
이를 보면 제사를 모실 때 신주는 다른 지역으로 쉽게 이동하는 것이 아니므로 퇴계 이황은 임시로 옮기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 다.
1551년, 51세, 명종 6년 풍산에 다만 술과 과실만 올린 것은 과연 너무 보잘 것 없구나. 비록 떡을 갖추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23)
퇴계 이황은 권씨 부인과의 사이에 자녀를 두지 않았지만 처가의 딱한 사정을 외면할 수 없어 처조부모의 기제사, 묘사 등을 몸소 지내주었던 것이다. 제물은 제례의례에서 외적표현으로 마련하게 되는데 술과 과일 만으로 제물이 넉넉지 않은 제사이지만 무엇보다 정성을 다한 음식으로 올릴 것을 권하였다.
(3) 추석, 한식제사
1548년, 48세, 명종 3년 추석묘제(墓祭:산소에서 지내는 제사)가 가까이 다가오니, 더욱 염려가 되는구나. 관아의 쌀 대여섯 말을 되질하여 봉하여 두었다. 초10일경에 보낼 것이니 유익하게 사용하도록 하여라. 사당에 제사를 거행하는 것 을 도와서 처리하게 하고자 한다.
23) 이황, 이장우․전일주 옮김, 『퇴계이황 아들에게 편지를 쓰다』, 연암서가, 2008, pp.89-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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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1년, 51세, 명종 6년 수곡(樹谷)에 있는 할아버지 묘소의 제사는 우리 집에서 지내야 할 차 례라고 하는 구나. 다만 내가 오는 한식(寒食)날에 내려가서 참배하고 자하기 때문에, 한식날 제사 차례에 해당하는 집과 서로 바꾸어 지내고 자 하는데 어떠하냐고 형님 앞으로 편지로 아뢰었다.
1554년, 54세, 명종 9년 한식날 여러 곳의 제사는 어떻게 지냈느냐? 올 봄은 너무 궁핍하여 한 물건도 갖추어 올리는데 보내지 못했으니 한탄스럽다. 시절 제사〔時 祭〕는 이번 달 14일에 이미 여기에서 지냈다.24)
퇴계는 추석, 한식날의 제사는 산소에서 지내야 함을 명시하고 형편이 여의치 않아서 제사에 올릴 제물이 넉넉지 않음을 조상님께 송구스럽게 생각하며 한탄스러워 하고 있다.
(4) 부인의 기제대상범위
‘여자가 시집을 가서 남편의 집에서 살면서 친정 부모의 기제사를 지내 는 것이 합당한가’에 대한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부인이 남편의 집에서 친정 어버이의 기제를 지낸다는 것은 예로서 부 당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이루어진 세속의 풍습을 갑자기 금지하기는 어려운 일이니, 만약 정침을 피해서 지낸다면 혹시 가할지도 모르겠다. 시부모가 살아 계신다면 더욱 편안하지 않을 것이다.’25)
위의 글을 보면 퇴계는 의리에 마땅한 예의 시행에 있어 예법의 기준 에 의거하여 부인이 친정부모 기제를 지낸다는 것은 부당한 것이라 하였 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 제사 지내는 장소를 다른 공간에서 지낼 것을 명시하면서 기본적인 예는 중시하고 있다. 이를 보면 돌아가신 부모에 대한 추모의 정은 일단 제사를 통해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나를 존
24) 이황, 이장우․전일주 옮김, 『퇴계이황 아들에게 편지를 쓰다』, 연암서가, 2008, pp.91-258. 25) 도민재, 「퇴계예학사상의 특성」, 『유학연구』 19,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009, pp.197-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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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하게끔 해주신 조상에 대해 그 은혜에 보답하는 효를 다하며 자손의 번영과 친족 간의 화목을 도모하게 되며 조상에 관한 교훈과 업적을 기 리고 자손들이 모여 서로 간에 화합을 이루는 계기가 된다.
Ⅴ. 결 론
전통사회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효문화는 오랜 세월에 걸쳐 인간의 가 치를 인식시키고 가족과 사회 구성원들 간의 질서를 공고히 하는 도의 적․교육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효문화가 점차 사라지고 있는 것은 새로운 환경에 따른 시대의 변화로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사회구조의 급격한 변화가 주된 원인이다. 도시화로 인한 부모와 자녀간의 별거, 물 질만능주의에 따른 비인격화현상, 핵가족화의 영향 등 복합적 원인으로 한국사회는 이제 전통적인 효 사상도 위기를 맞고 있다. 본 연구는 퇴계 이황의 효실천에 관한 내용을 살펴봄으로써 현대에 바 람직한 효문화 수립의 목적에 의거하여 결론은 다음과 같다. 퇴계 이황의 예학사상은 『주자가례』를 기본으로 하여 인본적 사고에 바탕을 두었다. 예의 기본적인 원칙을 벗어나지 않으며 사회의 관습을 인정하는 경에 근본한 예의 바른 실천을 강조하였다. 퇴계 이황의 효 실 천내용으로는 일상의 효로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를 실천했음을 알 수 있었다. 사후의 효인 상례에서는 예에 합당한 효의 실천을 강조하였으나 상황에 따라 시속에서 행하는 예도 통용됨을 언급하였다. 제례에서는 재 계를 함으로써 공경과 정성된 마음으로 효의 도리를 다할 것을 당부하였 다. 제물은 집안의 형편에 따를 것을 이르면서 정성스러운 마음가짐이 중요함을 언급하였다. 부인이 기제대상의 범위에 있어서 다른 공간에서 의 제례는 행할 수 있음을 제시하였다. 이처럼 효는 부모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사랑과 공경으로 부양하는 것 이다. 따라서 자녀는 자신에게 생명을 주신 부모를 공경하고 부양해야 하는 도덕적인 의무감을 지니고 있다. 나아가 부모와 나의 관계를 통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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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계승과 연속성으로 후손을 이어가는 자손보호의 기능도 있다. 이 것은 자신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부모님의 은혜에 대하여 근원적으로 갖게 되는 보은의 마음이며 인간으로서의 마땅한 도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귀중한 생명을 주신 부모님에 대한 존재와 은혜 그리고 사랑을 깨 달으며, 섬기고 부양해야 하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효는 덕행의 근본이 되어 가족의 해체를 막고 아동보호, 노 인부양 기능을 강화함으로써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해결하며, 반인륜적 사건들을 감소시켜줄 수 있는 가족 내 윤리 규범이다. 이러한 효는 어버 이와 자식 간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으뜸가는 도덕원리이며 하늘이 부여 한 본성으로 부자지간의 당연한 도리이므로 실천해야하는 도덕적 의무이 다. 이런 관점에서 현대사회에서는 전통적인 효행의 모습을 바라보는 시각 과 환경에 따라 달라져야하고 행위에 대한 존중은 인간의 본성 차원에서 다른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위기 극복의 방안으로 전통 효문 화는 현대적 의미로 재해석 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 효는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둘째, 부모의 은혜에 감사하며 효를 실천해야 한다. 셋째, 인간성을 회복하여 진실한 마음과 인간적 따뜻함을 되찾아야 한다. 넷째, 사람과의 만남에서 남을 존중할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하여 이타적인 마음과 희생 할 수 있는 인내가 요구되며 이러한 마음에서 효라는 덕목이 자라날 수 있는 기반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효는 바람직한 삶에 제시되는 실천적 과제이며 삶의 도리이 고 민족문화발전과 국가발전에 기여하는 실학이고 미래학이다. 특히, 현 대에서 효의 역할은 가족 간의 유대를 돈독히 하고 뿌리의식에 따른 효 사상을 재조명할 것이며 국제화․정보화 사회의 민족공동체 의식을 제고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재인식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세계에 자랑할 만한 문화는 우리의 효 문화이다. 부모에게 효 도하고 이웃을 공경하며 가정을 바르게 세우고 자식에게 올바른 교육을 하여야 할 것이다. 모두 함께 살 수 있는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여 밝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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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찬 사회를 열어가야 할 것이다. 아울러 21세기에 한국인의 효 문화 는 한국인의 오랜 전통문화와 미래사회의 효를 접목시킬 수 있는 심도있 는 학문적인 성찰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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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차문화·산업학 제2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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