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
특히, 진각종에서는 "옴마니 반메흠"만 하고,
천태종은 "관세음보살"만 하는데,
관세음보살이 옳은가? 옴마니반메훔이 옳은가?
[ 답변 ]
먼저 관세음보살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보통 '관세음보살'을 입으로 외우는
'칭명(稱名)'으로 관음신앙을 삼지만,
염불(念佛)은 글자 그대로 불·보살님을 '생각'하는 것이지
입으로만 외우는 게 아닙니다.
'념(念)'자(字)를 풀어보면,
'이제 금(今)''마음심(心)'입니다.
지금 마음이 부처인 게 '염불'이지
입으로는 명호를 부르면서 속으로 딴 생각을 하면
진정한 염불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법화경<관세음보살 보문품>에서도
'일심으로'라는 말로써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원각경에서는
관세음은 세상의 소리를 관(觀)함으로써 {觀音}
온전히 통함[圓通]'을 이룬 성자이므로, '
이근원통(耳根圓通) 관세음보살'이라 하고
그 분을 모신 법당을 '원통전'이라 칭하기도 합니다.
즉 세상의 소리를 지켜보는 '관법(灌法)'수행을
제시하고 있음이 '관음수행'입니다.
세상에는 헤일 수 없이 많은 소리가 있고
우리 또한 하루 종일 소리를 들으며 살아갑니다.
겨울 산사에는 세찬 바람소리,
고요한 밤에도 멀리 개들이 짖어대는 소리,
하늘엔 비행기 소리, 마음 속에서 망상떠는 소리,
좋은 소리, 싫은 소리 등....
이 모든 소리들은 무심히 지켜보는 수행,
듣기 싫다고 귀를 막지 않고 좋다고 귀기울이지 않고,
초연히 저 소리 듣는 자가 누구인지
바라보는 수행이 관법수행입니다.
즉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성품을 관하는 수행을 함으로써,
이 세상 소리를 다 알게 되는 이근원통'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니 관음의 성지인 “보타낙가”는
실로 우리의 '귓구멍'을 벗어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바로 우리 몸에 관음보살의 도량이 있고,
그 누구나 수행 정진할 수 있는 방법이
관음수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선관책진에서도 지철선사가 이르시길
“염불을 한 번 혹은 3,5,7편 하고 묵묵히 반문하라.
저 염불소리가 어느 곳에서 일어나는가?.....
염불하는 것이 이 누구인가? 를 참구하라 하시며
염불과 참선이 둘이 아님을 밝히신 것도 이러한 이유인 것입니다.
나의 본성이자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은 어디에 계실까? 하는 것이
관음주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옴마니반메훔}이란
보통 밀교에서 번역하기를
“연꽃 속의 보석이여 영원하소서” 라고 하는 바
우리 근본 불성이 영원함을 뜻하고 찬탄하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이 자신의 수행공덕을 이 여섯글자에
함축해 놓았다고 하는 바 이 주력을 하게 되면 그 공덕이
비교할 수 없이 수승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것은 어떤 명호이든지, 진언이든지
깊이 들어가 보면 스스로 저 염불소리가 일어나는 곳을 밝히게 되고,
소리 내고 듣는 것이 누구인가를 참구하게 됩니다.
그러하다면 관세음 보살이 옳은가? 아니면
그분의 공덕을 담은 “옴마니 반메훔”이 옳은가?의
답은 스스로 알게 될 것입니다.
- 수덕사 백련당에서 제현 합장 -
********* 참선납자에게 주는 게송 ****************
참선을 하는 데는 둔해서는 안되며
법도대로 행함에는 옛일을 참고하라
한 줄기 대쪽같이 곧은 마음[直心]이라면
갈림길의 괴로움은 만나지 않는다.
황룡(黃龍)의 삼관(三關)을 부딪쳐 부수고
운문(雲門)의 '보(普)'일구를 뽑아버렸건만
이 한 사람의 무뢰한은
여태껏 문밖을 나가지 않았노라.
*황룡 혜남(慧南)스님은 세 마디로 납자를 지도하시되,
"내 손은 어째서 부처님 손과 같은가?
내 다리는 어째서 나귀다리와 같은가?
사람마다 태어난 인연처가 있는데
어디가 그대들의 인연처인가? 하고는 다음과 같이 송했다.
태어난 인연처 끊길 때 나귀다리 드리우고
나귀다리 거둘 때 부처님 손 열린다.
참선하는 5호(湖) 납자에게 고하노니
세 관문 하나하나를 통과하여라.
*어떤 스님이 운문(雲門)스님에게 묻기를,
"무엇이 진정한 법안(法眼)입니까?하니,
"보(普)이니라" 하였다.
마하반야를이루고 깨우쳐 도의 안에
거하시기를 저자신과 더불어
간구 하나이다
열림과닫힘은 둘이 아니요
용과체 둘아님인데
시방세계모든것에 걸려지는 이것은 무엇인지...
나무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