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만에 다시 글을 씁니다. 비록 카페가 죽었어도~~~
인터넷을 뒤저도 안타깝게 서울탈환 전투관련 사진이 없어서 ~ 그냥 글로만 씁니다.
9월16일 정오, 해병 1사단 지휘부는 인천항 남동쪽에 지휘부를 설치합니다. 이때 때마침 일본 고베에서 정비를 마친 미해군 해병 7연대가 21일에 인천에 도착한다는 휘소식을 전달 받습니다.
그사이 공병대는 인천역에 있는 기차를 수리하여 부평까지 병력과 물자 수송할수 있도록 만듭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기차가 지나갈 부천과 부평을 확보하고 영등포까지 진격할 미군 1해병 연대는 험난한 전투를 치러야 했습니다.
17일 오전 제1해병연대의 선봉 M26 전차대는 지금의 송내일대에 민가를 은폐삼아 숨어 있던 T34/85 전차 한 대를 격파하면서, 다음 목표인 영등포를 향해 진격을 합니다.
중간에 소사 근처 낮은 언덕에 매복한 북한군 제18사단 22연대가 공격을 시작하며, 상륙작전 이후 최대의 격전을 치루기 시작합니다.
이때 1해병연대 2때대 소속 19세의 월터 모네건 일병의 바추카팀이 맹활약하며 전차 4대를 격파합니다.
하지만 미군 역시도 M26 전차 2대가 대전차 지뢰에 당합니다. 진격은 잠시 지체 되었지만, 공병대가 지뢰 제거 작업을 하면서 진격은 계속됩니다.
9월19일 1해병연대는 영등포 입구인 인양천 부분까지 진입합니다, 당시 서울의 유일한 한강이남의 영등포에는 서울 사수를 외치던 결의에찬 북한군이 방어를 하고 있었습니다.
9월20일 새벽 4시30분 T34/85 전차 5대를 앞세운 북한군 대대 하나가 자살폭탄 트럭까지 몰고 나와 해병1연대를 기습합니다. 이때 자살 트럭이 폭발! 하면서 양측은 치열한 전투를 시작합니다,
이때 앞서서 북한군 전차를 격파했던 모네건 일병이 포복으로 적 전차에 접근 물탱크뒤에 숨어 34 2대를 격파하고 3번째 전차를 조준하던중 남아있던 북한군 전차의 기총공격에 전사를 합니다.(후에 의회 명예 훈장을 받고 이야기는 1960년대 우리나라 교과서에 실렸다고 하네요)
백병전까지 벌어진 이날 전투에서 전차 4대 격파 1대 노획하였고, 부서진 전차와 북한군 시체를 치우고 다시 공격을 시작합니다.
이날의 공격으로 드디어 한강과 서울 시내를 바라볼수 있게 됩니다.
한편 9월 18일과 19일세 인천에 상륙한 미 7사단도 전선에 투입됩니다.그들의 주요 임무는 수원쪽으로 남하하여 제1해병사단의 남쪽 측면방어와 동시에 서울로 후퇴할 북한군읓 차단하며, 낙동강에서 치고 올라올 미8군과 한국군과 합류하는 것이었지만, 사단의 32연대에게는 서울 탈환작전에 참가를 시킵니다. 미국 육군과 한국군이 서울 탈환에 동참했다는 ‘정치적배려?’
자 이시점에 김일성이눈 뭘하고 있었느냐??
그냥 낙동간 전선에 몰ᄈᆞᆼ만 하고 있다가, 상황이 골때리게 되고 있다는걸 알게됩니다.
그때부터 부랴부랴 서울 방어에 필요한 부대를 끌어 모으는데, 철원지역에서 편성중이던 제25여단, 제 70,78연대,제9사단 87연대등등 2만명을 끌어 모으는데 상당수가 정예병이었습니다.
이렇게 되자,5일 이내의 서울 탈환 음..... 이거 힘들게 됐지요
전쟁 발발 3개월후인 9월25일 서울탈환 목표에 집착하며 언론 플레이까지 하고 있는 맥아더와 알몬드덕에 미 해병대는 개고생을 해야만 했습니다.
해병대의 한강 도하!
자... 19일 저녁 125m 높이의 행주산성 건너편에 포진한 제1 해병연대는 한국 해병 1연대 2대대와 함께 한강도하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저녁 8시에 해병대원 14명이 수영으로 한강을 건너갑니다. 정찰을 목적으로 보낸건데,,, "산꼭대기까지 가봤는데 북한군 없습니다?" 하는 보고를 했는데.. 이보고... 산중턱까지 간거를 산꼭대기로 착각... 이말 믿고 상륙용 장갑차 9대 끌고 당시 폭이 360미터도 안되는 한강 도하를 시작! 했지만.. 북한군 포병대의 포격을 맞고장갑차 2대를 잃고 실패합니다. 머 피해는 미비 했지만, 1해병 연대장 머레이는 “난 용납할수 없다. 새벽에 다시간다~~ 공군에 콜세어 띄우라고해!!!”
20일 아침 6시반 간단한 준비포격과 함께 다시한번 도하작전 시작합니다. 북한군의 사격은 맹렬했지만, 해병 3대대는 콜세어의 버프덕에 고지점령에 성공합니다. 이후 차레대로 작은 고지를 점령, 북한군은 시신 200남기고 도망~~
뒤이어 해병 2대대가 경의선 철길을 따라 진격하며 능곡역주변을 점령 망월산, 대덕산등의 주요 고지를 점령합니다.
한국 해병 2대대도 도하에 성공했고, 제5해병연대 3대대도 21일에 한강 도하를 합니다.이작전중에 총 21명의 전사자가 발생하긴 했습니다. (행주산성 가면 그때 도하작전 지점에 기념비와 해병대 상륙주정이전시돼 있고,지금도 이지역에서 공병대의 대규모 도하 훈련이 가끔씩 실시되고 있습니다.)
제5해병연대의 도하와 거의 같은 시간, 당시는 갈천이라 불리우던 지금의 안양천 변에 포진한
제1해병 연대는 20일 새벽 북한군의 역습을 격퇴하고 21일 오전 6시반 영등포 시가지 공격을 시작 합니다. 서울 ‘입성’의 해병대는 그만한 통행료를 지불해야 했지만, 일부 병사들은 한가지 전리품?을 노리고 있었으니, 지금은 아파트와 공원으로 바뀌었지만, 당시에는 일본이 건설한 맥주공장이 있었으니, 여기 점령해 시원한 맥주 한잔 노리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카스, 하이트로 상징되는 동양맥주와 조선맥주 이 일제시대 맥주공장을 이어 받은 것 되겠습니다. 아니 왜? 맥주 공장들이 영등포에??? 이때 당시에 나름 강남이라고 수질이 좋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영등포 공원가면 맥주 증류기가 지금도 전시되어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암튼 갈길 바쁜 해병대 제1연대 1대대 2대대는 좌우로 갈라저 안양천과 논바닦을 횡단하며, 안양천 죽방 전설?을 완성 시키는 치열한 전투를 펼칩니다. 물론 화력 지원 만땅받는 해병대가 하나씩 제압하며.. 앞으로 앞으로...
근데 이때 1대대 A 중대가 미친척 북한군을 우회하여 1.6키로를 침투하여 드디어 영등포 시내로 들어가 버립니다. 지금의 한강 잠수교남단에 다다른겁니다. 이에 맨붕에 빠진 북한군이 대규모 부대가 급습한걸로 착각 도주하기 시작하고, A중대는 죽방도로를 따라 가며 전투를 지속, 그와중에 A중대앞에 ~ 영등포 방어를 위한 북한군의 보급창고발견!!! 폭약으로 한방에 날려버리고, 인근 건물 수색중 어ᄄᅠᆫ 이유로 있었는지 모를 미제 포탄, 탄약, 의약품을 찾아내는 행운까지 찾아옵니다. 그날밤 중대원들은 개인호를 깊숙이 파고 다른 부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T34/85 5대가 공격을 해들어 옵니다... 그럼 A 중대의 행운은 여기서 끝이겠구나 싶었지만, 어라??? 보병 하나 없는 알탱크5대네??
3.5인치 바추카로 3대를 골로 보내버리고 2대는 도망~
이후 에비로 있던 3대대 마저 도착 더욱 강하게 영등포 방어하던 북한군을 몰아붙이기 시작합니다. 이때 포로로 잡혀있던 북한군 장교하나가 저항하는 북한군에게, 이부대는 너희들이 상대하기에 너무 강한 부대니 공격을 멈추라는 권유방송ᄁᆞ지 해버립니다. 결국 북한군은 22일 해뜨기전 영등포를 포기하고 철수를 합니다.
영등포 찍은 해병대 노량진을 점령, 한강 인도교 근처까지 탈환하며, 한강을 건너지 못한 멀쩡한 상태의 34/85 4대를 노획합니다.
용산에 있는 터널 모양의 철도정비소에 3~4대의 34/85가 매복되 있다는 보고를 받은 M26 전차대의 폴커티스 중위는 포격을 개시, 한강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보기드문 전차전에서 34/85 3대와 6문의 대전차 포를 파괴하는 압승을 거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