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상반기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신인추천작품상 당선작
호모 아르텍스 외 2편 / 김혜선
이상한 기후 외 2편 / 김지율
호모 아르텍스 / 김혜선
마지막 전동차가 터널로 들어간다
부러진 손톱, 얼룩으로 더러워진 손이
전동차 의자에 널브러져 있다
짐승의 주린 뱃속 같은 소리를 지르고
동굴은 접혔다 펴진다
그는 햇살이 동굴 벽을
볼록하게 만지고 지날 때를 기다린다
마른 뼈 조각으로
놈의 심장이 뛰게 하고
살찐 뒷다리가 벽을 차고 튀어 오르게 해야 한다
벽에 붙은 놈을 향해 주술사는 춤을 추고
사람들 창을 던질 것이다
더 크고 살찐 놈의 뒷덜미에 창을 꽂아
주린 배를 채워야 한다
부르르 배터리 진동이 창끝처럼
마른 옆구리를 찌른다
오늘 그는 놈의 눈알을 돌려주었다
터널을 빠져나온 전동차가
마지막 역에 닿고 있다
문이 열리고
동굴 벽의 검은 소 떼가
그의 뒤를 따라온다
두근거리는 눈빛이 새겨진 벽 속으로
그가 들어서고 있다
*호모 아르텍스 : 예술인
아이비 시를 읽다 / 김혜선
아이비 화분 하나를 사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며칠 지나자 줄기를 늘어뜨리고 잎사귀가 눈을 틔우기 시작한다
‘오감도를 들여다보던 여장 남자 시코쿠는 죽음보다 깊은
사랑에 빠졌어 황금나무 아래선 책이 무거운 이유를 모르는
누가 울고 갔지 자전거 도둑은 흰 꽃을 입에 문 채 삼천리 자전거를
타고 푸르게 소멸해 가고 딱딱한 내 몸에 바다를 들이면 모든 기억은
종이처럼 얇아져 푸른 수첩을 찢는 거야 비는 백년 자작나무 숲에서
휘어져 본 적 없는 고요와 전쟁처럼 버린 봄을 견디다 수직으로
서서 죽었어 꽃 막대기로 뱀을 잡는 여자 뚜껑을 열어 뜨거운 뿌리를
가진 남자와 서른 잔치를 끝냈어‘
아이비 내려오면서 시를 읽기 시작한다
오늘 아침에는 잎 하나에 말 하나씩 달렸다
‘향수 플로베르 몽고반점 체게바라 햄릿 카프카 바늘
성냥갑 카스테라 오디션 그림자정부 장미의이름
구토 맛 성의미학 캐비닛 핑퐁 검은책‘
줄기가 바닥을 치고 땅의 반대편까지 은유를 탐한다
나도 얼른 ‘검은 잎’ 같은 입을 줄기에 매단다
해바라기 / 김혜선
꽃이 피고 나는 해바라기 밭을 밤낮 서성거렸다
가을이 되고 꽃도 잎도 물큰하게 물러서는 밤
칼 하나를 사서 목을 뎅겅뎅겅 베어 들고 왔다
물 없는 병에 담아
어둠이 드나드는 시간에 놓아 둔
머리들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큰 머리 하나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우르르 씨앗들이 개미떼처럼 달아났다
해질녘 인사동 수도약국 앞을 지나는데
길바닥에 깔린 붉은 보자기 위
청동 부처 머리가 발목을 잡는다
언젠지도 모르는 헤어진 몸 그림자가
신발 뒤꿈치를 훌떡훌떡 벗기며 따라온다
어두워 가는 골목이 노랗게 피기 시작한다
김혜선 시인
경남 통영 출생. ‘빈터’동인. 주소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고잔동.
이상한 기후 / 김지율
수면내시경 하는 날
의사는 뻔뻔한 수수께끼를 냈어
세상에 하나 있고 너에게 없지만
당신에게 두 개 있는 것이 무얼까요
나는 툰드라라고 했어
꿈은 도대체 몇 개의 가면을 쓰고 있는 거야
이불을 덮지 않은 날은 꿈도 시려
당신은 내 커트머리가 잘 어울린다고 했지
툰드라에 가면 머리를 자르고 멋지게 콧수염을 기르고 싶어
너의 그 많은 오늘 밤은 어디로 간 거니
빙하기의 오늘 밤 당신이 나를 유산시킨 밤
나는 벽을 보고 누워
툰드라의 기원 따윈 절대 생각하지 않았어
p35 이 지겨운 사진에서 어떻게 빠져나가지
p79 펭귄들이 전하는 뉴스들은 너무 지루해
p103 당신의 툰드라로 달려가고 있어
p153 부탁이야 나에게는 농담만 해줄래
백년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흘렀지만
딸꾹질은 멈추지 않는다
이제 툰드라의 사생활 따윈 관심 없어
내가 원하지 않아도 빙하는 줄줄 녹아내리잖아
그러게 이제 그 뻔한 수수께끼도 집어 치워
식욕을 위한 피어싱 / 김지율
붉은 입술들이
공중에 떠다니지
설탕을 먹으며 둥둥 구름이 되지
죽기 전에 탐스런 너를 먹어치워야 하고
나는 나의 재물이 되어야 하지
내 몸에서 자라는 토마토들은
너를 완벽하게 뚫을 수 있는 맛이야
마르고 깔깔한 맛
조각난 허리, 조각난 머리통
아직 녹지 않은 빨간 눈알까지
닥치는 대로
보이는 대로
먹어 치우고 있지
지루한 맛은 딱 질색이야
케첩같이 터트리고 싶은 맛
절대로 질문 같은 건 하지 않는 맛이 좋아
부숴진 야채 크래커를 숟가락으로 퍼먹으며
당근 주스에게 미안해라고 했어
집을 떠나면 항상 배가 고파
벨트 구멍들은 점점 조여오고
두 번째 구멍은 너무 답답하지
주방은 너무 깜깜하지
할머니라는 생선 / 김지율
그 옛날 할머니라는 생선이 있었다 지금도 살아 박스만한 얼음덩이 위에 누워 있다 뻐끔뻐끔 담배 피는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할머니 지금은 목요일 저녁이고 내일 아침은 맑을 거야 이젠 나쁜 짓 안 해 할머니 맘 놓고 얼음 위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얼어버려 할머니 유효기간이 지난 생선은 반값이야 하얀 트레이 위에 배를 깔고 누운 할머니 랩으로 싱싱하게 포장을 해도 냄새가 나, 썩은 조기 냄새가 나던 할머니 생선이라면 끔벅 죽던 할머니 아들 셋을 먼저 보내고 청승맞게 말 많던 할머니 짭쪼롬하게 간을 해서 노릇노릇 구워 먹을까 비늘을 살살 벗기고 지느러미를 치고 내장까지 꺼내 소금을 뿌려 젓갈을 담글까 내 피의 반인 할머니 모질고 독한 할머니 하루에도 열두 번씩 나도 피가 거꾸로 돌아 할머니 그래 이년아 나도 그러고 싶었겠냐 나도 그렇게 살고 싶었겠냐, 세일 중인 조기 한 두름 뒤집혀 꼬꾸라진 할머니 오늘 저녁 우리 집엔 냄새가 날 거야 분명히 수상한 비린내가 날 거야
김지율 시인
경남 진주 출생. 제58회 개천문학상 수상. 서울논술학원 원장. 화요문학회 회원.
* 심사위원 : 예심 _ 채선, 조해옥.
본심 _ 이수익, 원구식, 김유중.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2009년 3-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