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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독서와 책에 대하여
1.
무지한 자가 부유한 사람이 되었을 때 비로소 무지는 인간의 품격을 떨어뜨린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과 궁핍에 얽매인다. 그의 경우에는 성과가 지식을 대신하므로 가난한 자는 성과를 내겠다는 생각에 몰두한다. 반면 무지한 부자는 단지 자신의 욕망에 따라서만 살아가며, 그런 자는 짐승과 같다. (413쪽)
2-1.
독서란 자기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대신 생각해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과정을 따라가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학생이 글쓰기를 배울 때 선생이 연필로 그어놓은 선을 따라 펜을 움직이는 것과 같다. 그것에 따라 책을 읽으면 우리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는다. 독자적 사고를 하다가 독서를 하면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머리는 책을 읽는 동안에는 타인의 생각이 뛰어노는 놀이터에 불과하다. (413쪽)
용수철이 다른 물체로부터 계속 압력을 받으면 탄력을 잃듯이, 다른 사람의 생각이 끊임없이 떠오르면 정신도 탄력을 잃고 만다. 음식을 너무 많이 섭취하면 위를 망치고 그 때문에 몸 전체를 해치는 것처럼, 정신도 자양분을 너무 많이 섭취하면 영양 과잉으로 질식해 버린다. 책을 많이 읽을수록 읽은 흔적이 정신에 그만큼 적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정신은 글씨를 지우지 않고 겹쳐서 써놓은 흑판처럼 되고 말아 읽은 것을 되새기지 못한다. (414쪽)
2-2.
저술가에게는 예컨대 설득력, 다양한 비유 능력, 비교의 재능, 표현의 대담성이나 신랄함, 간략함이나 우아, 경쾌, 그리고 기지, 대조의 수완, 간결한 표현과 소박함 등과 같은 특성이 있다. 그런데 이런 재능을 지닌 저술가의 책을 읽는다고 해서 우리가 그런 것을 획득할 수는 없다. (...) 독서는 우리 자신이 지닌 천부적 재능의 사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데, 이때는 언제나 천부의 재능이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반면에 이런 재능이 없으면 우리는 독서를 통해 오로지 차갑고 쓸모없는 수법만 배워 진부한 모방자가 된다. (415쪽)
3.
위생 경찰은 눈의 보호를 위해 활자의 크기에 최소한의 한도를 정해서 그것보다 작은 활자는 만들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것이 좋겠다(1818년 내가 베니스에 머물렀을 때는 아직 베니스 특유의 쇠사슬을 만들던 시절이었다. 가는 쇠사슬을 만드는 살마은 서른 살이 되면 실명할 것이ㅑ라고 어떤 금 대장장이가 내게 말했다.) (415-416쪽)
4.
지층이 지나간 세기의 생물을 차례로 보존하고 있는 것처럼 도서관의 서가도 과거의 오류와 그것이 서술된 글을 차례로 보존하고 있다. (416쪽)
5.
두꺼운 도서관 목록을 보면서 이 모든 책 중에 10년 후에는 읽힐 책이 단 한 권도 없으리라고 생각하면 누군들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겠는가. (416쪽)
6.
사람들은 모든 시대를 통틀어 최고의 작품 대신 항상 최신 작품만 읽기 때문에 저술가는 유통되는 이념의 좁은 범위에 갇혀 있고, 시대는 언제나 그 자신의 오물 속에 점점 깊이 파묻힌다. 그 때문에 우리의 독서법에서 보면 읽지 않는 기술이 극히 중요하다. 그 기술이란 늘 곧장 좀 더 많은 독자의 관심을 끄는 작품을 그 때문에라도 손에 쥐지 않는 데 있다. 가령 곧바로 독서계에 물의를 일으키고 출판되는 해에 몇 판을 찍고 그것으로 끝나는 정치적 팸플릿, 문학 팸플릿, 소설, 시 따위를 사보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항시 얼마 안 되더라도 일정 시간을 독서에 할애애 모든 시대와 민족을 막론하고 나머지 인류보다 위대하고 탁월한 정신의 소유자이기에 그 자체로 명성이, 자자한 작가가 쓴 작품만 읽도록 하라. 이런 작품만이 정말로 우리에게 교양과 가르침을 준다. 악서는 많이 읽게 되지만, 양서는 자주 읽지 못하는 법이다. 악서는 정신의 독약이라서 정신을 파멸시킨다. 양서를 읽기 위한 조건은 악서를 읽지 않는 것이다. 인생은 짧고 시간과 힘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417-418쪽)
7.
나는 이미 젊은 시절 슐레겔의 멋진 경구를 접하고, 그때부터 그것을 나의 좌우명으로 삼은 운명에 감사한다. "열심히 고전을 읽어라. 진정으로 참된 고전을! / 최근에 나온 글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니. 고전을 읽어라! 참으로 가장 오래된 고전을! 현대인이 칭찬하는 글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니([고대 연구]." (418쪽)
모든 시대와 모든 나라에서 배출된 온갖 종류의 더없이 고귀하고 극히 드문 정신의 소유자가 쓴 작품을 읽지 않고 방치하는 독자의 어리석은과 불합리함은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다. 그 대신 일반 독자는 단순히 갓 인쇄되고 잉크가 채 마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매일같이 나오는 평범한 졸작, 매년 파리 떼처럼 무수히 생겨나는 졸작을 읽으려고 한다. (419쪽)
8-1.
어느 시대에나 상당히 낯설게 서로 나란히 존립하는 두 가지 형태의 저작물이 있다. 하나는 참된 저작물이고, 다른 하나는 겉보기만 그럴듯한 저작물이다. 참된 저작물은 영원한 저작물이 된다. 학문이나 시문학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 쓰인 참된 저작물은 진지하고 조용하지만 매우 더딘 발걸음을 한다. 그래서 이런 작품은 한 세기 동안 유럽에서 그의 한 다스도 나오지 않지만 영원히 존속한다. (419-420쪽)
8-2.
어떤 사람이 자기가 지금까지 읽은 것을 모두 간직하기를 바라는 것은 지금까지 자기가 먹은 것을 모두 체내에 담고 있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그가 먹은 것에 의해 육체적으로 살고, 읽은 것에 의해 정신적으로 살아서 현재의 자신이 되었다. 하지만 육체는 자신과 동질적인 것을 동화시키듯이, 누구나 자신이 흥미를 느끼는 것, 다시 말해 자신의 사고체계나 그것의 목적에 맞는 것만 간직할 것이다. (420쪽)
"반복은 연구의 어머니다." 중요한 책은 무엇이든 즉시 두 번 읽는 게 좋다. 그래야 사물의 맥락을 보다 잘 파악할 수 있고, 끝을 알고 있으면 처음 부분을 비로소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두 번째 읽을 때는 어떤 대목도 처음과 다른 분위기와 기분을 느끼므로, 다른 인상을 받는다. 그것은 어떤 대상을 다른 각도로 보는 것과 같다. (421쪽)
작품이란 어떤 정신의 진수다. 그 때문에 아무리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라 해도, 그 정신의 인간관계에 비해 항시 비교할 수 없이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고, 이 인간관계를 본질적으로 대체할 것이다. 따라서 작품은 정신을 훨씬 능가하고 앞지른다. (421쪽)
정신적 교양이 높아지면 더 이상 사람이 아닌 거의 책에서만 점차 즐거움을 발견할 것이다. 그렇지만 정신을 위한 청량제로는 옛 고전을 읽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고작 반시간이라 해도 고전 작가의 어떤 작품을 읽으면 곧 생기가 나고 홀가분해지고 정화되고 고양되고 힘이 생기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마치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신선한 물을 마시고 기분이 상쾌해지는 것과 같다. 이것은 고전어와 그것의 완벽함 때문일까? 또는 몇천 년이 지나도 작품이 훼손되지 않고 약화되지 않는 정신의 위대성 때문일까? 이 두 가지가 함께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421쪽)
두 가지 역사, 즉 정치의 역사와 문학과 예술의 역사가 있다. 전자는 의지의 역사이고, 후자는 지성의 역사다. 정치의 역사는 대개 불안과 두려움을 일으킨다. 다시 말해 정치사는 말할 수 없는 불안과 곤궁, 사기, 끔찍한 살인으로 가득 차 있다. 이에 반해 문예사는 잘못된 길을 헤매는 경우조차 고독한 지성처럼 어느 부분이나 즐겁고 명랑하다. 문예사의 주요 분야는 철학의 역사다. 사실 철학사는 다른 역사에까지 울려 퍼져, 거기서도 밑바탕에서 견해를 이끌어 가는 기본 저음이다. 다시 말해 철학사가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철학은 잘 이해하면 가장 강력한 현세적인 권력이기도 하지만 그 영향은 매우 서서히 나타난다. (422쪽)
* 398쪽에는 '기초 저음'이란 용어가 나옴. '기본 저음'과 같은 의미이며, 마루야마 마사오의 '집요 저음'에 준한 표현임. (박희택)
9.
인류의 행성의 궤도 위에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위대한 인물은 그때그때의 주전원(周轉圓, 140년경 프톨레마이오스가 제창한 천구 상의 잘못된 궤도)에 동참하지 않는다. 후세에 명성을 떨치는 많은 사람은 동시대인의 갈채를 받지 못하고, 반대로 오늘날 갈채를 받는 많은 사람은 후세에 무시된다는 것도 이런 점에서 설명된다. 그와 같은 주전원은 예컨대 최후에 헤겔이 희화화해 완성한 피히테와 셸링의 철학이다. 이러한 주전원은 마지막으로 칸트에 의해 그때까지 이어진 원주로부터 끊어졌다. 나는 나중에 칸트에서 끊긴 지점을 다시 받아들여 원주를 계속 이어 가려고 했다. (423쪽)
모든 시대와 모든 나라의 좋은 것과 참된 것이 그 시대를 지배하는 불합리며 열악한 것과 맞서 견뎌 내야 했던 저 끝없는 싸움을 우리 눈앞에 제시해 달라는 것이다. 인류에게 참된 빛을 던져 준 거의 모든 사람과 각종 예술 분야의 거의 모든 위대한 거장이 겪었을 순교자의 고난을 묘사해야 한다. 그들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세상의 인정과 관심을 받지 못하고 제자도 없이 가난과 비참함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간 반면,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형편없는 자들은 명성과 명예, 부를 얻은 경위를 우리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 (426쪽)
인류의 위대한 교육자들이 비록 비참하게 살았다 해도, 일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을 지탱해서, 마침내 그와 같은 고투가 끝났을 때 불멸의 월계관이 그에게 손짓하고, 최후의 순간에 다음과 같은 노랫소리도 울렸으면 한다. "무거운 갑옷은 날개옷으로 바뀌고, / 고통은 짧고, 즐거움은 영원하노라(실러, [오를레앙의 처녀] 제5막 14장)." (427쪽)
제11장 여성에 대하여
1.
주이(1764~1846, 프랑스 극작가)의 몇 마디 말이 여성을 진정으로 찬미하는 것 같다. "여성이 없으면 우리는 인생의 초년에 도움을 받을 수 없을 것이고, 중년에는 즐거움이 없을 것이며, 만년에는 위로를 받지 못할 것이다." 바이런도 이와 같은 의미의 말을 희곡 [사르다나팔루스] 제1막 2장에서 좀 더 격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인간의 생명은 여성의 모태에서 비롯되며 / 그대가 처음으로 옹알거리는 말은 그녀가 가르쳤다. / 그대가 처음으로 흘린 눈물도 그녀가 닦아 주었으며 / 우리의 마지막 숨도 흔히 여성 곁에서 거두지만, / 그런데도 남성은 흔히 그렇듯 배려심이 부족해 / 이전에 자기를 인도해 준 여성이 임종을 맞을 때 / 옆에서 지켜 주지 않는다." 이 두편의 시는 모두 여성의 가치에 대한 올바른 입장을 드러낸다. (428-429쪽)
2.
여성은 남편에 대해 항상 참을성 있고 기분을 풀어 주는 반려자가가 되어야 한다. 매우 격렬한 고통과 즐거움, 힘쓰는 일은 여성의 몫이 아니고, 여성의 인생은 남성의 그것보다 조용하고 미미하며 평온하게 흘러가야 한다. 그렇다고 여성의 인생이 본질적으로 남자의 인생보다 더 행복하거나 불행한 것은 아니다. (429쪽)
3.
여성이 우리의 유아기에 유모나 교육자로 적합한 것은 그들 자신이 유치하고 멍청하며 근시안적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그들은 한평생 큰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는다. 여성은 어린아이와 참된 의미의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남성 사이에 있는 일종의 중간 단계다. (429쪽)
4.
자연은 소녀의 나머지 일생을 희생한 대가고 그녀에게 짧은 기간 동안 넘칠 듯한 아름다움과 매력, 풍만함을 부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소녀는 그 기간에 어떤 남성의 환상을 완전히 사로잡아 그로 하여금 어떤 형태로든지 성실하게 여자의 일생을 돌볼 수 있게 해준다. (...) 자연은 다른 모든 피조물에게 하듯 여성에게도 그들의 생존 확보에 필요한 무기와 도구를 마련해 주었다. 그것도 그러한 장비가 필요 한 기간에 한해서 말이다. 이 경우에도 우리는 흔히 그렇듯 자연의 절약주의를 엿볼 수 있다. (...) 그들이 정말 진지하게 여기는 일은 사랑과 정복이며, 그것과 관련되는 일인 화장이나 춤 같은 것이다. (429-430쪽)
5.
사물은 고상하고 완전할수록 늦게 천천히 성숙하는 법이다. 남성은 스물여덟 살 이전에 이성과 정신력이 완전히 성숙하는 일이 드물지만, 여성은 열여덟 살만 되면 성숙한다. 여성의 이성이 빠듯하게 적당한 것도 그 때문이다. 모든 여성은 평생 동안 어린이로 머무르고, 언제나 눈앞의 것만 보고 현재에 집착해, 사물의 가상을 실재로 여기며, 가장 중요한 일보다 하찮은 일을 더 좋아한다. (430쪽)
여성은 이성이 빈약하므로 그것이 가져다주는 단점뿐만 아니라 장점도 덜 누린다. 오히려 여성은 정신적 근시이기 때문에 직관적 오성이 가까이 있는 것은 예리하게 보지만 시야가 좁아서 멀리 있는 것은 잘 보지 못한다. 그 때문에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 즉 과거나 미래는 남성보다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이 훨씬 약하다. 여성이 훨씬 자주 가끔은 미친 듯이 낭비하는 성향도 그 때문이다. (431쪽)
여성은 이성이 미약하므로 현재의 일, 구체적인 사물, 직접 실재하는 것에 크게 영향을 받는 반면 추상적 사고, 확고부동한 원칙, 굳은 결의, 일반적으로 과거와 미래에 대한 고려, 눈앞에 없는 먼 곳에 대해서는 별로 좌우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은 1차적인 것, 주요한 것을 지녔다는 미덕이 있으나 2차적인 것, 즉 미덕에 가끔 필요한 수단이 부족하다. 이런 점에서 여성은 간은 있지만 쓸개가 없는 유기체에 비교할 수 있다. (432쪽)
6.
여성은 개체에 대한 의무는 이행하지 않았다 해도 종에 대한 의무는 충실히 이행했다고 마음속 깊이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종의 권리는 무한히 더 크다. 이러한 사정에 대해서는 나의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2권 44장에서 보다 자세히 설명해 두었다. (434쪽)
기본적으로 여성은 오직 종족의 번식을 위해서만 존재한다. 이 점이 여성의 숙명이기 때문에 그들은 대체로 개체보다는 종속 안에서 살아가며, 마음속으로 개체의 일보다 종속의 일을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한다. 이 때문에 여성의 전체 존재와 행동은 경박한 모습으로 나타나며, 여성의 성향은 일반적으로 남성의 성향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리하여 결혼생활에서 남녀 간에 의견 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은 거의 정상이라고 할 수 있다. (434쪽)
7.
남성은 천성적으로 서로에게 무관심하지만, 여성은 이미 날 때부터 서로에게 적의를 품고 있다. (...) 길에서 만나면 여성은 마치 겔프당과 기벨린당처럼 서로를 적대시한다. 또한 여성은 처음으로 다른 여성을 알게 될 때도 남성의 경우보다 더욱 부자연스럽고도 위선적으로 서로를 대하는 것이 확연히 눈에 뜬다. (434-435쪽)
남성의 경우에는 수백 가지의 요소가 저울에 오르지만, 여성의 경우에는 오직 한 가지 요소, 즉 어느 남자의 마음에 드느냐 하는 것만으로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435쪽)
8.
여성은 어떤 사물에 순전히 객관적 관심을 가질 수 없다. (...) 여성은 언제 어디서나 단순히 간접적으로, 즉 자신이 유일하게 직접 지배할 수 있는 남성을 통해 지배하도록 되어 있다. (...) 여성이 그 밖의 다른 것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언제나 단지 그런 척하는 단순한 우회적 수단에 불과하다. (435-436쪽)
자연이 인류를 두 개의 절반으로 나누었을 때 한가운데에 경계선을 긋지는 않았다. 이렇게 갈라진 양극에서 양극과 음극의 차이는 질에서뿐만 아니라 양에서도 존재한다. 고대인과 동방 민족은 여성을 이렇게 보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여성에서 적합한 위치를 옛 프랑스적인 정중한 태도와 몰취미한 여성 숭배에 젖은 우리보다 훨씬 올바로 인식했던 것이다. 이러한 여성 숭배는 기독교와 게르만적인 어리석음이 최고로 꽃피어난 것이다. (439쪽)
9.
일부일처제를 원칙으로 하는 유럽에서 남성이 결혼하다는 것은 자신의 권리를 절반으로 줄이고 의무는 배로 늘리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렇지만 법률이 여성에게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인정해 준다면 여성에게 남성의 이성도 함께 부여해야 했을 것이다. 반면에 법률이 여성에게 인정한 권리와 명예가 여성의 자연스러운 관계를 넘어설수록 실제로 이 혜택을 누리는 여성의 수가 줄어든다. (441쪽)
여성과 남성은 동등하지 않은데도 일부일처제와 이에 따르는 혼인법으로 여성을 남성과 완전히 동등하게 보아 여성에게 부자연스럽게도 유리한 위치가 부여된다. 그래서 현명하고 신중한 남성이 그토록 큰 희생을 치르면서 그토록 불공평한 계약을 맺는 것을 주저하는 현상을 종종 매우 자주 볼 수 있다. (...) 일부일처제를 실시하는 나라에서는 결혼한 여성의 수가 제한되어 수많은 여성이 생계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441쪽)
10.
여성의 허영은, 비록 그것이 남성의 허영보다 크지 않다고 해도, 전적으로 물질적인 측면, 즉 자신의 개인적인 아름다움에 치중하고 그다음에는 겉만 번지르르한 물건, 사치스러운 옷, 호사한 생활에 쏠리는 고약한 점이 있다. (445쪽)
제12장 교육에 대하여
1.
우리 지성의 본성에 따라 개념은 직관을 추상화해서 생긴다. 그러므로 직관이 개념보다 앞서 존재한다. 그런데 단순히 교사와 책에 대한 자신의 경험만 있는 사람의 경우가 그렇듯이, 실제로 이런 과정을 밟으면 인간은 각각의 개념이 어느 직관에 해당하고 어느 직관이 어떤 개념을 대변하는지 잘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은 두 가지를 정확히 알고 있으며, 그에 따라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올바로 처리한다. 우리는 이런 길을 자연스러운 교육이라고 부를 수 있다. (447쪽)
이와 달리 인위적 교육의 경우에는 구체적인 세계를 폭넓게 알기 전부터 미리 알려 주기와 가르침, 책을 통해 많은 개념이 머릿속에 잔뜩 주입된다. 경험이 이 모든 개념에 대한 직관을 나중에 가져다주어야 한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이 개념이 잘못 적용되어, 인간은 사물과 인간을 잘못 판단하고 잘못 보며 잘못 취급한다. 이런 인위적인 교육은 그릇된 머리를 가진 사람을 만든다. 그 때문에 우리는 젊은 시절 오랫동안 배우고 독서를 한 후에 때로는 편협하고 괴팍한 모습으로 세상에 나와서, 때로는 소심하게 때로는 건방지게 행동한다. 우리는 이제 머릿속에 가득 든 개념을 적용해 보려고 애쓰지만 거의 언제나 잘못 적용한다, 본말이 전도되어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기 때문이다. (447-448쪽)
2.
모든 교육의 목표는 세계를 알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육의 주안점은 올바른 끝에서 세계를 알기 시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보여 주었듯이 이것은 모든 일에서 직관이 개념에 선행하며, 더욱이 보다 좁은 개념이 보다 넓은 개념에 선행한다는 사실에 주로 기인한다. 따라서 우리는 사물의 개념이 서로를 어떻게 전제하는지 질서 있게 가르쳐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순서를 건너뛰면 곧장 불충분한 개념이 생겨나고 여기서 그릇된 개념이 생겨나서, 결국 개인에게만 통용되는 비뚤어진 세계관이 생긴다. (448쪽)
교육자는 인식의 참으로 자연스러운 순서를 탐구하려 노력하고, 그런 다음 이런 순서에 따라 아이들에게 세계의 사물과 관계를 체계적으로 알려야 한다. (...) 아이들이 명확한 개념과 연결시키지 못하는 말을 사용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언제나 주요한 일은 직관을 개념에 앞서도록 해야지, 그것이 거꾸로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 아이의 정신은 아직 매우 빈약한 직관을 지니고 있는데, 사람들은 아이에게 개념이나 판단을 새겨 넣어 그야말로 선입견을 심어주는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아이는 먼저 직관과 경험으로 이런 완성된 장치를 취소한 대신 오히려 그것을 직관과 경험에 끼워 맞추려 한다. (449쪽)
* 아이들은 대체로 사물을 이해하려는 대신 말에 만족해서, 만약의 경우 그것으로 곤경을 헤치고 나아가기 위해 그 말을 암기하려는 좋지 않은 경향이 있다. 이런 경향은 나중에까지 남아, 많은 학자의 지식이란 단순한 말을 늘어놓은 것에 그치고 만다. (449쪽 주)
직관은 풍부하고 다방면에 관심을 가지므로, 간결성과 신속성이라는 면에서 모든 것을 곧 처리하는 추상적 개념에 필적할 수 없다. 따라서 직관이 먼저 선입견이 된 개념을 바로잡으려면 오랜 시일이 걸리거나 결코 바로잡을 수 없을 것이다. 직관이 자기 쪽에서 개념과 충돌할 경우 직관의 관점은 우선 일면적인 관점으로 배척되어 부정된다. 먼저 선입견이 된 개념에 손해가 되지 않도록 직관의 관점은 자신을 외면하고 눈을 감아 버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은 일생 동안 허튼 생각, 변덕, 심술, 망상, 선입견을 품고 다니며 그것이 결국 고정 관념으로 굳어 버린다. 이처럼 많은 사람은 모든 것을 다 만들어진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직관과 경험에서 자기 스스로 철저한 개념을 끄집어내려고 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 아니 무수히 많은 사람이 그토록 진부하고 피상적인 까닭은 바로 그 때문이다. (449-450쪽)
* 직관은 존덕성에, 개념은 도문학에 비견될 수 있음. (박희택)
어떤 개념도 직관을 매개로 하지 않고 주입되어서는 안 되며, 적어도 직관 없이 덮어 놓고 인증되어서는 안 된다. (...) 아이는 타인의 척도가 아닌 자기 자신의 척도로 사물을 측정하는 법을 배울 것이다. (...) 아이는 모든 점에서 원전으로 인생을 알게 해야지 미리 사본으로 알게 해서는 안 된다. 그 때문에 아이들에게 서둘러 책만 손에 쥐여 주는 대신 사물과 인간관계를 알게 해주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현실을 순수하게 파악하도록 이끌고, 언제나 개념을 현실 세계에서 직접 끄집어내 현실에 근거해 그 개념을 형성하도록 유념해야 한다. 그러나 개념을 현실이 아닌 다른 곳, 책이나 동화, 타인의 말에서 가져와, 그런 개념을 나중에 이미 만들어진 것으로 현실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환영으로 가득 찬 머리는 현실을 잘못 파악하거나 그런 환영에 따라 현실을 개조하려 헛되이 애써 마침내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도 미로에 빠져들 것이다. (450쪽)
세계와 현실 생활에서 얻는 나중의 교육은 주로 그런 잘못된 점을 가려내는 데 활용되어야 한다. 디오게네스의 [고문선집] 제6권 7장에서 "무엇을 습득하는 것이 가장 필요한지의 질문"에 안티스테네스가 "가장 나쁜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다"라고 대답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451쪽)
3.
일찍부터 머릿속에 흡수된 오류는 대체로 지우기 어렵고, 판단력은 가장 늦게 성숙한다. 그러므로 아이들이 16세가 될 때까지는 커다란 오류가 들어 있을 수도 있는 모든 가르침, 즉 온갖 철학이나 종교, 온갖 종류의 일반적 견해로부터 멀리하도록 해야 한다. 그 대신 오류가 있을 수 없는 수학이나, 오류가 있어도 그다지 위험하지 않은 어학이나 자연과학, 역사 등과 같은 과목을 가르쳐야 한다. 일반적으로 어떤 나이에서나 그 시기의 두뇌가 받아들일 수 있고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학문만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451쪽)
유년기와 청년기는 자료를 수집해 개별적인 것을 특수하게 근본적으로 알아 나가는 시기다. 반면에 일반적으로 판단은 아직 보류하고, 최종 설명은 뒤로 미루어야 한다. 판단을 내리려면 성숙하고 경험이 있어야 하므로, 판단력은 가만히 놔두고, 판단력에 선입견이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러다간 판단력이 영원히 마비되고 만다. (451쪽)
반면에 기억력은 청년기에 가장 왕성하고 오래가므로 이 시기에 그것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렇지만 세심하게 숙고해 극히 주도면밀하게 대상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 개인의 기억 능력은 언제나 한정되어 있어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만 기억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제외하는 것이 중요하다. (452쪽)
4.
인식 능력의 성숙, 즉 개개인에게서 인식 능력이 도달할 수 있는 완전성은 모든 추상적 개념과 직관적 파악 사이에 정확한 연결이 이루어진다는 데 존재한다. 그리하여 각각의 개념이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직관적 토대를 근거로 하며, 그럼으로써만 그 개념이 실질적 가치를 지닌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직관을 그것에 적합한 올바른 개념에 포함시킬 수 있다. 이러한 성숙은 오로지 경험과 때로는 시간의 소산이다. 우리는 직관적 인식과 추상적 인식을 따로 얻는 것이 보통이므로, 직관적 인식은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얻어지고, 추상적 인식은 타인의 좋고 나쁜 가르침과 전달에 의해 얻어진다. (...) 그러다가 개념과 직관이 점차 접근해 서로를 바로잡는다. 하지만 두 가지가 완전히 합쳐 하나가 되었을 때야 비로소 인식의 성숙이 이루어진다. (453쪽)
5.
실천적인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연구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정확하고 철저한 지식을 얻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지루한 연구이기도 하다. 그 연구는 인생의 늘그막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배울 수는 없다. (453-454쪽)
사물에 대한 인식 자체를 얻는 것도 꽤 어려운데 소설을 읽어 그 어려움이 배가된다. 소설은 현실에서 사실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사건의 과정과 인간이 취하는 태도의 과정을 묘사한다. 그런데 쉽게 믿는 청년은 이 소설을 사실로 마음속에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이제 단순히 소극적 무지 대신 그릇된 전제로 복잡하게 얽힌 관점이 적극적 오류로 등장한다. 이런 오류는 후에 심지어 경험 자체의 학교를 혼란시키고, 그 가르침을 거짓으로 보이게 한다. (454쪽)
제13장 비유, 파라벨, 우화
1.
오목 거울은 다양한 비유로 이용할 수 있다. 예컨대 자신의 힘을 한 곳에 집중시킨다는 점에서는 천재에 비유할 수 있다. (...) 반면에 우아하고 박식한 사람은 볼록 거울과 같다. 볼록 거울은 표면에 모든 대상을 동시에 태양의 축소된 상으로 보이게 하며, 그런 대상을 모든 방향으로 누구에게나 보이게 한다. 그런 반면 오목 거울은 한 방향에만 작용해 관찰자의 특정한 위치를 요구한다. (456쪽)
모든 진정한 예술 작품도 오목 거울에 비유할 수 있다. 그 작품이 원래 전달하려는 바가 자기 자신이 지각할 수 있는 자아나 경험적 내용이 아니라 자신의 바깥에 있는 한, 그리고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붙잡기 어려운 사물의 원래적 정신으로서 상상력에 의해서만 쫓아갈 수 있는 한 말이다. (456쪽)
절망적 사랑에 빠진 자도 자신의 무정한 애인을 경구 식으로 표현하면 오목 거울에 비유할 수 있다. 오목 거울은 애인처럼 번쩍거리고 불붙이고 빨아들이지만 자신은 냉정한 자세를 유지한다. (456-457쪽)
2-1.
스위스 산악 지대는 천재와 같다. 아름답고 숭고하지만, 영양이 풍부한 열매를 맺기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다. 반면에 포메른과 홀슈타인 습지는 비옥하고 기름지지만, 유익한 속물처럼 속되고 지루하다. (457쪽)
2-2.
눈앞의 이 광경에 아름다움과 매력을 선사하는 것은 그 꽃들뿐이다. 그러므로 어떤 점에서 보든 꽃들은 진지하고 유익하며 결실을 낳는 시민적 삶에서 시문학과 예술이 담당하는 역할을 한다. 그 때문에 꽃은 시문학과 예술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457쪽)
3.
포장도로가 형편없는 독일 도시는 금과 보석으로 치장하고 있지만 더럽고 해진 옷을 입고 있는 여성과 같다. 도시를 이탈리아 도시처럼 장식하려거든 먼저 도로부터 이탈리아 도로처럼 만들라! (457-458쪽)
4.
파리를 가히 뻔뻔스러움과 만용의 상징으로 삼을 만하다. 다른 동물은 모두 인간을 무엇보다 꺼리며 이미 멀리서부터 인간을 피해 달아나는 반면 파리는 인간의 코 위에 앉기 때문이다. (458쪽)
5.
두 명의 중국인이 처음으로 극장 구경을 갔다. 한 사람은 무대의 기계 장치에 담긴 메커니즘을 파악하는 데 몰두 해, 결국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다른 사람은 언어를 모르지만 연극 작품의 의미를 알아내려고 했다. 전자는 천문학자와 같고, 후자는 철학자와 같다. (458쪽)
6.
실패하든 성공하든 내게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개체의 삶과 죽음에 대한 '능산적 자연'이나 모든 사물의 내적 본질의 고나계도 이와 마찬가지다. (458-459쪽)
* '능산적 자연'은 스피노자의 용어로서, 만물의 생산의 근원적 힘이 되는 자연을 말함. (458쪽 주)
7.
어떤 인간에게 실천되지 않고 다만 이론적으로만 존재하는 지혜는 색과 향기로 다른 식물을 흥겹게 하지만 열매를 맺지 않고 떨어지는 장미와 같다. 가시 없는 장미는 없지만, 장미 없는 가시는 많이 있다. (459쪽)
8-1.
전나무는 하늘에 다시 해가 빛날 때 되돌아오기 위해 우리 곁을 떠나는 다른 모든 나무, 식물, 곤충, 새와 달리 태양의 총애를 받으며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다. (459쪽)
8-2.
전나무가 대꾸했다. "하지만 겨울이 오면 너는 잎이 다 떨어지고 말겠지. 하지만 나는 그때도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있을 거야." (459쪽)
9.
세월이 흐르다 보면 전문가가 태어나는 법이다! 그 나무(조그만 참나무)는 다른 식물과 달리 결코 죽지 않는다. (460쪽)
10.
꽃이 이렇게 대답했다. "이 바보 같으니! 내가 남들에게 보이려고 꽃이 핀다고 생각하니? 다른 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꽃이 피는 거야. 내 마음에 들기 때문에 꽃이 피는 거야. 나의 즐거움과 나의 기쁨은 꽃이 핀다는데, 내가 존재하다는 데 있어." (460쪽)
11.
"하지만 난 태양이야. 그리고 난 태양이기 때문에 떠오르는 거야. 나를 볼 수 있는 자는 나를 보라." (461쪽)
12.
늙고 허연 어머니인 사막이 대답했다. "얘야, 만일 현재와 달리 내가 메마르고 처량한 사막이 아니라 꽃과 푸른 식물이며 생명으로 뒤덮여 있다면, 너는 멀리서 온 나그네가 칭찬하며 들려주는 오아시스, 혜택을 받은 지점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너는 그 자체로 보잘것없고 눈에 띄지도 않는 극히 작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꾹 참고 견뎌라. 그런 인내심이 네가 영예와 명성을 덛는 조건인 것이다." (460-461쪽)
13.
기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자는 자신이 올라가지 않고 지구가 아래로 점점 내려가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이 말에 동의하는 사람만이 이해하는 신비한 현상인 것이다. (462쪽)
14.
어느 인간의 위대함을 평가할 때 정신적인 위대함에는 물리적인 크기와 반대되는 법칙이 적용된다. 물리적인 크기는 멀리 있을수록 작아지지만, 정신적인 위대함은 그럴수록 더 커진다. (461쪽)
15.
푸른 자두나무 위에 맺힌 영롱한 이슬처럼 자연은 모든 사물에 아름다움이라는 허식을 부여했다. 화가와 시인은 이런 허식을 벗겨 내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그런 다음 그 허식을 쌓아 올려 우리가 편히 즐기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현실 생활로 들어가기도 전에 벌써 허식을 탐욕스럽게 빨아들인다. 하지만 우리가 나중에 현실 생활로 들어가면 이젠 자연이 부여한 아름다움이라는 허식이 우리 눈에 적나라하게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462쪽)
16.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존재해야 하지만 그것에 기대고 의지하기 위해 사방에서 몰려드는 욕구에 의해 곧 남용된다. 그러다가 마침내 가려지고 망쳐진다. (...) 아름다움과 자기 자신을 위해 추구되는 진리조차 예외가 아니다. (463쪽)
어디서나 오래지 않아 짐짓 그러한 목적에 도움을 주기 위해, 거기에서 생기는 수익을 차지하기 위해 거친 동물적 욕구가 슬며시 발생한다. 이것이 모든 분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거짓의 기원이다. 형태가 모두 다를지라도, 그것의 본질은 사물 자체에는 신경쓰지 않고 자기 자신의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물질적 목적을 위해 단순히 사물의 외관만 추구하는 데 있다. (463-464쪽)
17.
어느 어머니가 자식들의 교육과 발전을 위해 이솝 우화를 읽어 주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곧장 어머니가 읽고 있던 책을 빼앗았다. 그러면서 장남이 매우 조숙하게 이런 말을 했다. "이건 우리가 읽을 책이 아닙니다. 너무 유치하고 말이 안 돼요! (...)." 이 희망적인 소년에게서 생각이 트인 미래의 합리주의자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464쪽)
18.
어느 추운 겨울날, 고슴도치들은 얼어 죽지 않기 위해 서로 바싹 달라붙어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그들의 가시가 서로를 찌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시 떨어졌다. 그러자 그들은 추위에 견딜 수 없어 다시 한 덩어리가 되었다. 그러자 가시가 서로를 찔러 그들은 다시 떨어졌다. 이와 같이 그들은 두 악 사이를 오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은 상대방의 가시를 견딜 수 있는 적당한 거리를 발견했다. (...)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은 서로 견딜 수 있는 적당한 간격을 발견했다. 그것이 바로 정중함과 예의다. 그러므로 그것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당신의 거리를 유지하라(Keep your distance)!"라는 말을 듣는 것이다. 그 결과 따뜻해지려는 서로의 욕망은 충족되지 않겠지만 가시에 찔리는 상황은 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적인 따뜻함이 많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고통과 괴로움을 주거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고통과 괴로움을 받지 않기 위해 사회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464-465쪽)
https://www.donga.com/news/Opinion/article/all/20240401/124268774/1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353291&cid=40942&categoryId=31531
제14장 몇 편의 시
1.
인간은 산문에서보다 운율과 운을 지닌 시에서 자신의 주관적 내면을 감히 좀 더 거리낌 없이 드러낸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철학의 가르침에서 보다 더 순수하게 인간적인, 더 개인적인 방식으로, 아무튼 전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전달해서, 바로 그 때문에 독자에게 더 친밀하게 다가간다. 그러므로 나는 만년에 내게 관심을 보이는 독자에게 제물을 바치는 심정으로 대체로 젊은 시절에 쓴 나의 습작 시 몇 편을 여기에 내놓는다. 나는 독자가 고마워할 것으로 기대한다. (466쪽)
낮, 낮, 나는 낮을 큰 소리로 알리려 한다!
밤과 유령은 낮을 피해 도망칠 것이다.
샛별이 벌써 아침을 알린다.
깊디깊은 골짜기도 이내 밝아진다.
세상은 광채와 색으로 뒤덮이고
무한히 먼 곳은 짙은 푸른색을 띠고 있다. (소네트, 467쪽)
의연하고 흔들림 없이 차분히,
그대, 기분을 풀어 주는 했살은! (...)
비통하고 불안에 찬 인생의
폭풍우 속에서 현자는 조용히 있다. (구름 속으로 비치는 햇살 폭풍우 속에서, 468쪽)
오래 품어 깊이 느낀 고통에서
나의 가슴속에서 솟아 나왔다.
그것을 붙잡으려 오래 애썼지.
허나 결국은 내가 성공할 것을 알지.
너희는 늘 마음먹은 대로 행동할지라도
작품의 생명은 해치지 못할 거야.
저지할 수는 있겠지만, 결코 없앨 수는 없을 거야.
후세는 내게 기념비를 세워 줄 것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시, 470쪽)
나는 그대가 있는 푸른 하늘을 쳐다보지만
그대는 푸른 하늘 저쪽으로 사라져 갔네.
나 홀로 여기 평범한 인간들 틈에 남아 있지만,
그대의 말, 그대의 책만이 오직 나의 위안이네.
그대 말에 담긴 정신으로 가득 찬 울림으로
황량한 마음에 생명을 불어넣으려 했지.
내 주위엔 온통 낯선 사람들뿐
세상은 활얄아혹 삶은 길다. (칸트에게, 미완성작, 471쪽)
검은 돌에 금을 문질러도
황금 조흔(條痕)은 남지 않았다.
모두들 '이건 진짜 금이 아니야!'라고 외쳤다.
사람들은 금을 더 못한 금 속에 던져 버렸다.
그 돌이 비록 색은 검어도
시금석이 아님이 후에 밝혀졌다.
이제 그 금은 다시 명예를 되찾았다.
진짜 돌만이 진짜 금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리디아의 돌 - 하나의 우화, 472쪽)
그대는 추종자가 생기기를 바라며
생각과 기지를 허비하려는가?!
그들에게 먹고 마실 좋은 것을 주렴.
그러면 떼 지어 그대를 쫓아올 텐데. (매력, 475쪽)
나는 이제 여정의 목적지에 지쳐 서 있다.
지친 머리는 월계관을 쓰고 있기도 힘들구나.
그래도 내가 했던 일을 기쁘게 돌아보는 것은,
누가 뭐라 하든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라. (피날레, 476쪽)
* 이 시에 대한 니체의 응답 시(1888)는 다음과 같음.
그가 가르친 것은 지나갔으나,
그가 살았던 것은 남으리라.
이 사람을 보라!
그는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았노라! (476쪽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