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사진 한 장
서문순
혹독한 겨울을 뚫고 봄이왔다. 여기저기 벚꽃과 진달래가 꽃망울 터트렸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들불처럼 번졌다. 칠성 산에 자리한 뼈대만 앙상했던 나무도 푸른 물을 올리고 강물의 노랫소리도 둑을 만나면 더욱 경쾌해진다.
담장 밑에 쌓아놓은 화목보일러의 땔감 사이를 비집고 달래도 매운 내를 풍기며 하늘을 향해 고개를 바짝 쳐들었다. 이런 날 집안에 박혀 뒹굴뒹굴 공을 닮아가기보다 현관문 박차고 나가 자전거를 타고 둑길을 신나게 달리면 더 없이 좋겠다.
바퀴가 있는 거라면 나는 선수는 아니어도 겁내지 않고 잘 타는 편이다. 자동차, 경운기, 오토바이, 자전거 등.
그중에 자세의 균형을 필요로 하는 자전거를 배운 것은 국민학교(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나는 사회인이 되어 도시생활을 오래했음에도 잊어버리지 않고 노년의 길목에서 다시 두 바퀴의 질주본능을 즐기고 있다.
4남매의 홍일점이었던 나는 어릴 적부터 한 극성을 했다. 남편도 없이 우리를 키워 오신 어머니는 새벽 댓바람부터 일어나서는 함지박에 두부를 담아 머리에 이고 마을마다 다니며 장사를 하셨다. 어머니가 집을 비운사이 다섯 살 아래 남동생과 나는 흙으로 소꿉장난을 하거나 공기놀이를 하며 보냈다.
어느 날 우리가 세 들어 사는 안집 영희 아버님께서 영희의 새 자전거를 사왔다. 영희는 나보다 한 학년이 아래다. 영희를 불러 통사정해서 자전거를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단번에 거절당했다. 영희가 자전거를 배울 때 집요하게 그림자처럼 자전거 뒤를 따라다녔다. 그렇지만 한 번도 얻어 타지는 못했다. 포기를 몰랐던 나는 영희가 자전거 타는 것을 보고 눈썰미로 익혔다.
한마을에 사는 상천이네도 자전거가 있었다. 우편배달 일을 하시는 아버지의 중고자전거를 친구가 물려받았다. 새터 마을에서 가난으로 치면 막상막하였던 우리는 동변상련 때문이었는지 조르고 졸라 겨우 빌릴 수 있었다. 나는 틈만 나면 상천이네 집으로 달려가 자전거 타는 걸 배웠다. 처음에는 술 취한 사람처럼 삐뚤 삐뚤거리며 앞바퀴가 좌우로 심하게 움직였다.
겨우 자전거를 타게 되었을 때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도회지에 나가 가장노릇을 했던 큰오빠와 작은오빠가 작당(?)하여 여동생에게 중고자전거를 사주었다. 작은오빠도 면내에 있는 자전거점에서 허드레 일을 도우며 살림을 보태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거 같다.
자전거가 생기고 마을 고샅은 물론이고 면내를 다니며 바람의 결을 갈랐다. 그렇게 설치다 어떤 날은 하천에서 뒹굴고 어떤 날은 자전거를 타다 미처 핸들을 틀지 못해 전봇대에 대롱대롱 매달리기도 했다. 어머니의 한숨소리가 간간이 호롱불의 불빛을 흔들어 놓았다.
아직 자전거를 배우지 못한 막냇동생이 누나가 자전거 타는 모습을 보더니 뒤에 태워달라고 사정한다. 사람을 태워본 경험이 없었지만, 동생을 태우고 씽씽 달리는 멋진 누나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평지에서는 동생을 뒤에 태우고 페달을 밟아 전진할 힘이 부족했다.
문득 경사진 도로가 생각났다. 그때만 해도 도로에 차가 드물었다. 나는 경사진 도로로 가서 동생을 자전거 뒤에 태웠다. 계획한대로 자전거는 페달을 힘들게 돌리지 않아도 탄력을 받아 출발은 힘들지 않았다.
단발머리를 바람에 날리며 자전거는 잘 달리는 듯싶었다. 그러나 경사진 도로 중간을 넘어서기가 무섭게 자전거 핸들이 균형을 잃고 심하게 흔들렸다. 나는 너무 당황하여 브레이크 잡을 생각을 못하였다. 속도를 줄이지 못한 자전거는 물론이고 나와 동생은 아스팔트 위로 나뒹굴었다. 그 순간을 거짓말 손톱만큼 보태서 빛의 속도였다고 해두자.
동생과 나는 온몸으로 아스팔트 바닥을 쓸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동생은 이마에는 호두만한 혹이 생기고 머리에서는 피가 났다. 나는 다리와 얼굴만 긁혔다. 동생은 소리 내어 울었다. 나는 동생을 감언이설로 구워 삶으며 오늘일은 어머니한테 절대 비밀로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 뒤 나는 동생의 상처가 아물 때까지 동생 곁에 붙어 다니며 틈틈이 두 손을 비비거나 주먹을 쥐어 보이며 사정과 협박을 반복해야만 했다.
내 동생은 자전거에 얽힌 비밀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까? 오랫동안 가슴에 묵혀두었던 먼지 쌓인 추억하나를 상고대에 서릿발을 이고서야 다시 꺼내어본다.
나의 유년 가까운곳에서는 땅콩 같은 남매가 자전거를 끌며 경사진 곳을 찾아 걸어가고 있다. 재잘재잘 순박한 웃음소리가 검정고무신에 흥건하다.
첫댓글 기적의 도서관에서 수필공부를 시작했어요. 강의 주제가 자선전 쓰기인가봐요.
'어릴때 추억하나 써오기' 숙제를 내주었어요. 많은 생각이 떠올랐고 여러개를 써놓았어요.
그 중에 이걸 내볼까 합니다.
그시절 빛 바랜 사진 파노라마처럼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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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드립니다. 선생님의 사랑을 느낍니다.
그 순간을 거짓부렁 손톱만큼 첨가해 빛의 속도였다고 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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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을 거짓말 손톱만큼 보태서 빛의 속도였다고 해두자.
남동생은 자전거에 얽힌 비밀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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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동생은 자전거에 얽힌 그 비밀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까?
가슴속에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먼지 쌓인 추억하나를 상고대에 서릿발을 이고서 다시 꺼내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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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가슴에 묵혀두었던 먼지 쌓인 추억하나를 상고대에 서릿발을 이고서야 다시 꺼내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