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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은 승선할 때의 일은 아니며, 회고록에서도 언급했던 내용이다. 하선하여 관광회사를 경영할 할 때, 국제로타리클럽(RI : Rotary International) 회원으로 활동한 내용이지만, 외국과 연관된 사항이고 지금도 젊은 사람들에게는 참고가 될만한, 보람을 가졌던 사연이기에 여기서 좀 더 자세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국제로타리클럽(R.I)은 1905년 미국 시카고의 청년변호사였던 폴 해리스(Paul Harris)가 창립한 단체의 하나이다. 20세기 초, 거의 무법천지나 다름없던 미국의 시카고에서 변호사를 개업했을 때, 객지에서 개인적으로 너무나 외로운데 다 마음 놓고 사업 얘기를 나눌 친구조차 없는 데서 착안, 세 사람의 친구와 모여 ‘1직업1회원’제, 즉, 한 클럽에 같은 직업을 가진 회원이 없는 모임을 만든 것이 시초였다.
다양한 직업인들이 서로 의미 있고 소중한 아이디어를 교환하며 우정을 쌓고 인격을 수양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지금은 내용도 대폭 달라져 단순한 봉사단체로 바뀌어 버렸으나 세계 약 140여만 명의 회원으로 영역과 비전의 확대를 거듭하고 있다.
1991년 연말에 부산부전로타리클럽에 입회하자마자, 승선 중의 외국 경험과 외국어 실력(?)에다 과거 교직(敎職) 경험 등으로 일약 중임(重任) 맡았으며 특히 클럽의 국제행사를 많이 진행했었다.
그 RI 산하에 대학생을 위주로 한 로타랙트클럽(Rotaract Club)의 「청소년 한·일 친선교류」 사업이란 것이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1990년도 중반부터 2000년 초반에 걸쳐 국제로타리 부산/제주 지역인 3660지구(地區)에서 각 클럽이 지원하는 남녀 대학생들이 일본의 자매지구(姉妹地區)인 2700지구(福岡 : 후쿠오카)와 2720지구(大分:오이타), 2730지구(鹿児島: 카고시마) 등을 상호방문 교류하는 행사로 규모도, 의미도 컸었던 행사였다. 4~50여 명의 남녀 대학생을 인솔, 4박5일 일정으로 일본을 방문, 그곳 로타랙트회원들과 공식 · 비공식 행사와 회원끼리 홈스테이를 경험하는 것이었다.
지금이야 여권(旅券)은 누구나 쉽게 가질 수 있고, 대부분의 국가가 ‘NO VISA’이므로 해외여행에 문제가 없지만, 당시만 해도 여권을 갖는다는 것부터 여간한 일이 아니었고, 더구나 일본을 방문하기 위한 비자(visa) 발급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젊은 대학생들에게는 걸림돌도 많았다.
회사 여권담당 여직원이 일본영사관의 일본인 직원보다 한국인 직원을 더 미워했다는 사실은 시사(示唆)하는 바가 깊다. 진행 과정에서 일본의 상대방 담당자와는 주로 팩스를 통해 계획을 추진하고, 기획부터 인솔까지의 책임은 물론 행사 중의 공식행사 때는 공동사회(司會)도, 즉석 통역도 맡았고, 끝나면 참가자들의 소감을 책으로 엮어내기까지의 일을 일관되게 마무리 함으로써 끝이 나는 프로젝트였다.
당시는 일본에 대한 일반적 정보들이 거의 없었다. 정치적으로 보도되는 뉴스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평소 일본에 대한 한국 젊은이들의 사고(思考)는 식민지 시대의 과거사, 그것도 대부분 부정적인 것들을 그대로 듣고 배운 것만이 머리와 가슴속에 굳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패전(敗戰) 이후 그들이 어떻게 얼마나 발전했으며 지금의 일본 사회는 어떠하며 그들의 인식은 어떤지, 무엇을 먹고 사는지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우리의 젊은 대학생들에게도 궁금증이 가득했던 때이기도 했다. 더구나 그들이 상대하는 일본 로타랙트들은 거의가 단대(短大: 우리의 2년제) 졸업생이거나 직장인을 가진 사회인들이었다는 점도 특이한 점이었다. 그만큼 일본과 한국의 사회적 여건이 달랐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출발 전 오리엔테이션을 통해 이러한 문제점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궁금증에 대한 자료를 찾고 연구하라고 했다. 진지하게 대학생답게 조사하고 연구한 학생도 있었다. 행사를 마친 후의 일이지만 이러한 편견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그 가운데 몇 가지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1) 홈스테이
상대방을 아는 데는, 같은 집에서 같이 먹고 잠을 자 보는 것이 최상의 길이다. 카운터파터인 상대 로타랙트의 집에서 함께 보내는 홈스테이! 겨우 잠만 자고 나오는 정도의 머뭄이었지만 일본을 이해하는 데는 최상의 길이었다. 그들 가족들과의 만남도 있었고 집집마다 달랐던 아침 식사도 인상적이었다. 아마도 일본 가정에서 하룻밤 잔다는 것은 일생 단 한번의 경험이었을 것이다.
아침 식사 때 연어구이가 올랐는데 평소 좋아하지 않은 것이라 얼른 먹고 빈그릇을 상 밑에 숨겨 놓았는데 어머니는 좋아하는 줄 알고 더 갖다 줘서 혼이 났다고 선상(船上)의 소감 발표에서 하여 많은 동료들을 웃긴 자도 있었다.
「여행 내내 나의 흥미를 끌었던 것인 일본의 집들이었다. 비슷한 모양의 크고 작은 집들, 조그마한 화분이나 꽃과 나무들로 꾸며져 있는 작은 정원, 충분해 보이는 주차 시설, 열려 있는 대문, 낮은 담…. 외관상 일본의 집은 항상 누군가를 위해 열려 있는 듯 했고 따뜻하고 정겹게 보였다. (중략)
유미코(裕美子)의 집도 그런 느낌이었다. 일본사람들은 가족 외 타인들을 집에 머물게 하는 일이 드물다는 얘기를 들었던 터라 혹시 불편해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 했던 것도 잠시, 서슴없이 그리고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는 환대에 여행 전에 가졌던 불안감은 말끔히 사라지고 내 집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하루를 묵을 수 있었다.」
「과거에는 별 것 아니었던 일본, 그들의 성장을 두 눈으로 확인한 후로 내 생활신조는 ‘진보하지 않는 것은 퇴보한다’로 고쳤다」
「예전에 ‘이경규가 간다’는 프로그램에서 본 일본사람들의 정지선(停止線) 지키는 것이 생각나 직접 신호등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런데 정말 한 대의 차량도 예외없이 정지선을 지켜 차를 세우는 것이었다. 놀라움도 있었지만 우리나라의 부끄러움도 있었다.」
「쿠니코씨의 어머니는 처음 보는 나를 맞이하기 위해 한국어로 인사말까지 준비해 놓으셨다. ‘추운데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라면서 반겨주셨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를 알아듣지 못 했지만 그 마음씨가 너무 감사했다.」
「경제대국, 일본, 딱 기다려라, 코리아가 간다.」
「이러한 일본에 대해 결코 우리가 부러워하거나 감탄사만 낼 것이 아니라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국민 모두가 맡은 바 책임을 성실히 다해 간다면 충분히 일본을 능가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가진다.」
교류가 끝난 뒤 각자가 써낸 연수기(硏修記)에 씌여진 구절들이다. 그러나 그 시절의 대학생들이 지금은 많게는 50줄을 넘었지만 과연 우리가 일본을 능가하고 이기는 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2) 전문대 일어과(日語科) 학생의 변화
대부분이 일본을 처음 가보는 대학생들이라 호기심과 염려가 가득했다. 그렇지 않아도 일본은 자세히 모르면서도 과거 식민지 사실 등으로 무조건 일본에 대한 거부감이 앞섰던 시절이다. 반면에 젊은 그들 속에는 그만큼 호기심도 컸었음도 부인할 수 없었다.
팀 가운데는 일반 대학교나 전문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하는 학생이 가끔 있었는데, 일본말에 대한 동료들의 기대가 크다는 것을 알고는 부담이 되어 잠을 설친다는 학생도 있었다. 의사소통을 위해 ‘일어과 학생과 같은 조(組)에 있었으면….’하고 은근히 바라는 자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겨우 1~2년 동안 학교 책과 칠판을 통해 배운 것밖에 없는 데다 일본말은 거의 해본 적이 없다고 설레설레 양손을 내젓기부터 했다. 혹시라도 가서 누가 물으면 명색이 일본어과인데 막히면 그 낭패를 어쩌나 하는 염려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일본 현지에 닿고 보니 뜻밖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우선 거리의 간판이나 지하철역 이름 등에 보이는 수많은 한자(漢字)를 읽을 수 있는 사람과 못 읽는 사람의 표정부터 확연히 달라진다.
일어과 학생은 “어어! 저기 지하철역(地下鐵驛)이 있네.” “저기는 약국(藥局)이고…” 하는 소리가 저절로 놀라움과 함께 나온다. 한자를 모르는 사람은 듣고 눈앞에 보면서도 무엇인지, 어딘지를 모른다. ‘낫 놓고 ㄱ자를 모른다’는 형상이다.
일본은 간판이나 안내판에 한자나 자국어(自國語)를 많이 쓰며 알파벳으로 된 것은 보기 드물었다. 영어로 표기하지 않고 자기들의 ‘가다가나(カタカナ)’로 쓴다. 한국인지 미국인지를 분간하지 못하는 우리와 다른 점이다.
한자문화권인 한국과 일본은 같은 한자를 쓰는 부분이 적지 않다. 예를 들면 지하철(地下鐵), 학교(學校), 교실(敎室), 경제(經濟), 문화(文化), 과학(科學) 등등을 우리와 같은 한자로 표시하고 있다. (초·중·고에서 한자 교육의 소홀한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라 생각하며, 그래서 지금도 한자를 모르는 자녀들을 가진 사람들에게 어릴 때부터 꼭 한자를 가르치라고 강조한다.)
여기서 출발할 때의 불안감이 달라진다. 비록 전문대학 재학 중이라며 자신감을 잃었던 학생이 비로소 자신감을 찾는 순간이다. 작은 앎이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처음 만난 낯선 일본인 상대방에게 “곤니치와. 아아아… 와타시와, 아아아, 김 또모우시마스.(안녕하세요. 저는 김 입니다.)”하며 더듬거리면서도 내뱉는 한 두 마디를 일본인이 알아듣는 데 신기함마져 느꼈다고 했다. 그걸 모르는 학생은 팍 기가 꺾인다. 영어로 몇 마디 건네 보지만, 이번에는 상대방이 영어를 알아듣지 못한다. 영어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일본사람이 한국보다 엄청 약하다는 사실을 몰랐었다.
“야! 김 군, 어때? 그래도 일본말 모른다고 할 거니?” 옆에서 건드리면 그제서야 얼굴을 펴며 꾸벅 허리를 굽히고는, “선생님 고맙습니다.”는 말이 나왔다.
마치고 돌아오는 선상(船上) 토론에서 “귀국하면 진짜로 일어(日語) 공부할 겁니다. 자신이 생깁니다.”는 각오를 밝히기도 했다. 그래서 몇 년 지나 당당히 일본으로 유학을 간 학생들도 있었다. 한편으로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일본어를 공부해야겠다는 각오를 굳힌 학생도 있었다.
(3) 일본인의 친절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일본에 대한 선입견은 ‘멀고도 가까운 나라’와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한 나라’라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갖고 있었지만 막상 현지를 가게 되었으니 먼저 저쪽의 사정을 조금이라도 더 알고 가야 한다는 사전 교육과 주위의 충고가 있었기에 나름대로 조사를 했다.
그 중에 하나가 ‘일본사람들은 친절하다’는 것이었다. 실지로 만나 보니 지나치다고 할 만큼 그랬다. 우리는 평소 친절에 대해서 일상에서 익숙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인들의 친절은 그들의 일상생활이기도 하다. 그들의 친절은 어찌 보면 얄미울 정도이다.
과연 이 친절이 진심인 걸까? 일종의 상술(商術)이 아닐까?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반일적(反日的)인 감정이 많은 편이라 어디까지나 일본인들의 친절을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뚜렷했다.
두 남학생이 시험해 보기로 했다. 길가의 작은 가게에 들어가 껌 한 개를 사고 길을 물어보았다. 주인아주머니가 자기네 말만 하면서도 지도를 그려주고 상점 밖 길까지 따라 나와서 알아듣지는 못해도 상세하게 일러주었던 모양이다. 두 학생 중 하나는 과연 일본사람은 친절하다고 감탄했고 또 한 사람은 그러면서도 의심스럽다는 결론을 토론장에서 얘기한다. 친절한 것이 사실이 아닌 가식(假飾)이라고 받아들이는 학생이 더 많았다. 몸으로 눈으로 직접 체험하면서도…. 편견이란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4) 관습 · 문화의 차이 - 더치페이
그들과의 교류 중에는 자유스러운 시간을 주고는 일본 회원과 끼리끼리 개인적으로 어울려 보라고 했다. 잠깐 동안의 만남 속에서 그래도 젊음이 통했는지 일본 상대자가 한잔하러 가자고 하기에 기꺼이 따라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마칠 때 술값 계산은 각자 몫이라고 하자, 몹시 기분이 상했다고 한다. 먼저 가자고 한 사람이 술값 내는 것이 상식처럼 된 우리의 문화와 뚜렷한 차이점이다.
“처음 보는 사람, 그것도 외국인의 술 한 잔 공짜로 얻어먹으면 기분이 좋겠어?”
“그래도 자기가 먼저 가자고 했는데요.”
“처음 보는 사람한테 얻어먹고 나면 빚진 마음이 들지만 각자 내면 떳떳한 기분이겠지.”
‘더치페이’, 각자가 자기 몫을 지불하는 방식이 일본에서 정착된 지는 오래다. 역시 문화와 관습의 차이겠지만 긍정과 부정의 의견이 대립한다. 일부는 편리하고 합리적이라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서도 따라가서 술값을 내 것만은 끝내 서운한 모양이었다. 먼저 가자고 한 쪽이 돈을 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돌처럼 굳어버린 우리에게는 아무래도 인정하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젊을 때 많이 다녀라. 우리만의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말고, 어떤 세상에 어떤 삶이, 어떤 생각들이 존재하는지를 보고 느끼고 배우며 내 것으로 만들어라. 겉만 보지말고 속까지 알아라. 그것이 앞으로 자네들이 할 일 아니겠나. 여행을 통한 낯선 문화와 사람들과의 교류가 자네들 앞으로의 인생에 큰 참고가 될거야. 그것이 세계화의 첫걸음이기도 하지.” 사실은 이러한 것들이 청소년 교류의 목적이었다.
(5) 자유 시간
아침 9시부터 저녁 11시까지 하루 동안의 자유 시간을 허용하여, 하고 싶거나 가고 싶은 곳을 혼자서 해보고 가보라고 했다. 단, 약속 시간까지는 숙소로 돌아와야 한다는 조건으로 숙소의 전화번호 이름 등을 지참하게 하고 허락했다. 최악의 경우 파출소라도 찾아가면 된다는 것까지 일러주었다. “와아!” 하고 손뼉을 치며 호텔을 나섰다. 그들이 가장 바라던 순서다. 스마트폰 하나면 세계 곳곳의 지도와 언어 등이 빠삭한 지금과는 엄청난 격차가 있던 시기다. 불과 30년 전인데….
동행한 관계 로타리회원 중에는 사고(事故) 등을 염려하여 이 프로그램은 그만두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지만, 내가 굳게 믿는 바는 우리 대학생들의 이성(理性)과 지성(知性)이었다. 또 하나, 내가 아는 일본 사회는 자신이 먼저 비행(非行)을 저지르지 않는다면 어느 외국인이건 안전하게 보호하고 도움을 준다는 것이었다. 그런 사회가 일본이었다. 이런 사회를 우리 대학생들이 경험했으면 하는 것도 목적의 하나였다.
아무튼 무사히 마쳤다. 14시간. 정한 시간까지 어김없이 모두 귀가했다. 우선은 내가 먼저 안심했고 감사했다. 어떤 학생은 길을 물었던 일본사람이 잘 알아듣지 못하자 염려스러웠던지 택시를 태워주더라는 얘기를 부끄러운 듯이 한다. 종일을 혼자 다녔다는 한 여학생은 너무 좋은 경험이었다고 술회하면서 혼자서 해외여행을 꿈꾸어 왔는데 자신이 선다고 이런 기회를 만들어 준 데 대해 고마워했다.
모두들 속이 후련한 듯한 표정들이었다. 보내놓고 하루종일 호텔에서 서성이며 기다리던 나는 그들보다 더 조마조마했었음은 나만이 숨긴 사실이었다. 이 작은 만남과 방문이 젊은 그들에게 큰 변화를 주었음은 후일 만든 기행문집에서도 잘 나타났다. 출발할 때 일본에 대한 선입견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달라졌다.
어떤 학생은 ‘독도(獨島)’ 문제를 꺼내 본 모양인데, 독도가 어디 있는지를 모르는 상대방이 많았다는데 놀라움보다 오히려 거짓이라는 반감을 불러일으켰지만, 그러나 그것이 사실임을 알고 또 한번 놀랐다고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라 생각하지만, 독도는 일본의 일반 서민들에게는 거의 관심 밖의 일이라는 사실이다. 정치가들이 그것도 자기네가 필요할 때만 들고나오는 일종의 방어무기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러한 결과를 본 지구(地區) 원로 지도자들은 이 프로젝트를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고 하여 1995년부터 2003년까지 지속해 왔는데, 그 다음해 지구총재인 P씨가 개인사정으로 인해 실행하지 못함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아쉬움이 있었다.
‘국제화 · 세계화’ 운운하는 행사가 빈번하게 열린 적이 있었다. 한국을 국제화하기 위해, ‘한국사람이 국제인이 될 수 있게…’ 라며, 막대한 시간과 돈을 소비해 왔고 하고 있다. 다양한 이벤트나 세미나, 심포지엄 등에서 ‘국제’를 말하고 있다. 국경에 가로막히는 일 없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종 · 문화 · 피부색 · 종교 등, 많은 ‘차이’에 방해되는 것들을 넘어 보다 친밀한 관계를 만들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그 차이를 넘는다는 것은 어렵우며, 쉽게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차라리 국경을 비롯한 모든 ‘차이’를 서로 인정하는 것이 편하다는 것이 내 경험이다. ‘차이’는 있어도 즐거울 때는 즐겁고, 슬픈 일은 누구라도 슬프다. 같은 인간으로서 즐거울 때나 기쁠 때에는 기쁨을, 괴로울 때나 슬플 때에는 아픔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서로 나누는 것. 이러한 것들은 ‘차이’와는 관계없다. 이를 위해 초·중·고 학생들의 한·일간 홈스테이를 실시, 그 효과를 확인했었다. 이것이야말로 국제화, 국제 이해의 출발점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런 생각이 없이 ‘모두 같다’라는 생각으로서는 국제화도, 국제 이해도 시작되지 않는다. 논어에 나오는 「군자(君子) 화이부동(和而不同), 소인(小人) 동이불화(同而不和)」 라 했듯이 ‘서로 다름(차이)를 인정하면서 하나를 이루자’는 것이 역시 군자(君子)의 덕(德)임을 깨닫는다.
첫댓글 국제로타리클럽은 회원이 되려면 자격도 문제지만 회비가 많이 든다고 알고 있습니다. 좀 여유가 있어야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프랑스와 일본이 영어로 소통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호텔도 객실료가 비싸지만 큰 호텔에 예약하여 투숙해야 영어로 소통이 되더군요.
일어는 히로가나 가다가나 배우다가 중단했습니다. 鹿児島: '카고시카'를 '카고시마'로 수정
바람직한 일을 하셨네요.
그 당시엔 열악한 한국으로선 꿈도 꾸지 못할 일을 로타랙트클럽에서 <미래의 한국인을 대비한>프로젝트였네요.
우리 세대만 해도 밥 먹고 살만하면 선진 국가를 답사하러 자제분들을 외국여행을 보내기도 했었지요.
전 밥 먹지는 못해도 일본과 중국은 필수 코스, 그 다음엔 미국으로 ...(ㅋ그 바람에 둘째 아들은 미국에 빼앗긴 셈)
#저희도 라이온스 자매결연으로 인한 행사로 일본. 중국에서 홈스테이 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인들의 친절과 사회성. 그리고 음식 문화를 제가 특히 선호하기 때문입니다요.ㅋ
현재 한국이 경제대국에 돌입했을지는 몰라도 사회성은 아직도 미흡. ㅠㅠ. 언제 철이 들려는지???
다방면으로 열심히 활동하시는 늑점이님이 존경스럽습니다.^^ 대사출신이면서 바람새의 동기니까 더욱 자랑스럽습니다.
健, 幸하십시요.
좋은 일을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