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고시리즈.
마지막 때와 심판에 대한 경고
4) 노아의 때와 같이 - 먹고 마시고 장가가는 일상에 취해 망함
성경본문 : 마 24:37~39(참고, 누가복음 21:34-36 / 데살로니가전서 5:1-8 / 아모스 6:1)
24: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24: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24: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무감각이라는 죄
요즘 건강검진 받으러 가신 분들 계실 겁니다.
재밌는 게, 병원에서 제일 무서운 말이 "많이 아프셨을 텐데 왜 이제 오셨어요"라는 말이랍니다.
아팠는데 몰랐다는 거죠.
통증이 서서히 진행되면 몸이 거기에 적응해버려서, 정작 큰일이 나기 직전까지도 "그냥 좀 피곤한가 보다" 하고 넘어간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죄가 바로 이겁니다.
큰 죄를 지어서 벌 받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서서히 무뎌져서, 정작 중요한 것 앞에서 아무 느낌이 없어지는 죄, 무감각이라는 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첫째, 무감각은 무지가 아니라 마비입니다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님은 노아의 때를 예로 드십니다.
노아의 이웃들이 벌 받은 이유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면, 이건 좀 이상합니다.
먹고 마시고 결혼하는 건 하나님이 주신 좋은 것들이니까요.
진짜 문제는 그다음 구절에 있습니다.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여기 "깨닫지 못하였으니"는 헬라어로 우크 에그노산(οὐκ ἔγνωσαν)인데, 이 동사 기노스코(γινώσκω)는 단순한 정보 습득이 아니라 삶으로 실감하는 앎을 가리킵니다.
노아가 백 년 가까이 심판을 외쳤는데도, 이웃들에게 그 소리는 그냥 배경음이 되어버렸습니다.
몰랐던 게 아니라, 실감하지 못했던 겁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이걸 더 노골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해지고."
여기 "둔해지고"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바레도신(βαρηθῶσιν)인데, 원래 뜻은 "무거운 것에 눌려 짓눌리다"입니다.
마음이 짓눌려서 무뎌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 짓누르는 원인 중 하나가 "생활의 염려"(메림나이스 비오티카이스, μερίμναις βιωτικαῖς)라는 겁니다.
방탕이나 술취함처럼 눈에 띄는 죄만이 아니라, 그냥 먹고 사는 걱정, 이 평범한 일상의 무게가 우리 마음을 짓눌러 둔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겁니다.
둘째, 이 무감각은 성경 전체가 경고하는 죄입니다
이게 신약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모스 6장 1절,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시온에서 안일한 자와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
여기 "안일한 자"가 히브리어로 샤아난(שַׁאֲנַן)인데, 근심 없이 편안하고 태평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모스 시대 지도자들은 나라가 곧 무너질 상황인데도 태평했습니다.
위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위기를 느끼는 감각 자체가 죽어 있었던 겁니다.
바울도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그러면서 바울이 내리는 결론이 이겁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여기 "근신할지라"가 네포(νήφω)인데, 원래 술에 취하지 않은 맑은 정신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노아의 이웃도, 아모스 시대 지도자도, 데살로니가 성도들도, 다 같은 병을 앓을 위험 앞에 있었습니다.
위기가 눈앞에 있는데도 정신이 흐려져서 그걸 못 보는 병입니다.
이쯤 되면 조금 무겁습니다.
저도 이 부분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목회를 오래 하다 보면 은혜롭던 말씀도 익숙해지고, 눈물로 드리던 기도도 습관이 될 때가 있습니다.
신앙의 연조가 길수록 오히려 이 무감각이 더 조용히, 더 깊이 스며들 수 있습니다.
셋째, 그런데 이 경고 뒤에는 심판이 아니라 초청이 있습니다
여기서 멈추면 이 말씀은 그냥 겁주는 말씀이 됩니다.
"정신 차려, 안 그러면 큰일 난다."
하지만 이게 성경이 하려는 말의 전부가 아닙니다.
노아 이야기에서 심판만 있었던 게 아니라 방주가 있었습니다.
그 방주 문은 노아가 닫은 게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닫으셨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우리는 밤에 속하지 않았다"고 먼저 선언합니다.
이 선언이 명령보다 앞섭니다.
우리가 깨어 있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게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깨어 있으라고 부름받는 겁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무뎌진 마음을 정죄만 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에서 그 무감각의 값을 대신 지시고,
부활로 우리를 다시 살아 있는 감각으로 불러 깨우셨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정신을 차려서 자격을 갖추는 게 아니라, 이미 살리심을 받았기 때문에 깨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은혜가 우리 안에 만들어내는 반응입니다.
넷째, 그러면 오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거창한 결단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오늘, 하루 중 딱 한 순간을 정해서 밥 먹기 전이든, 잠자리에 들기 전이든
"주님, 제가 지금 어디에서 무뎌져 있습니까"라고 짧게 물어보십시오.
이번 주에는, 오래도록 습관처럼 드려온 기도나 예배 중에 하나를 골라서, 그 순서에서 정말로 마음을 담아 하나님 앞에 서보십시오.
익숙함을 깨는 데는 큰 사건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작은 정지 한 번이면 충분할 때가 많습니다.
이번 달에는, "요즘 내 신앙에서 무뎌진 부분이 있다면 어디일까." 무감각은 혼자서는 잘 안 보입니다. 옆 사람의 눈이 필요합니다.
결론
노아의 이웃도, 아모스의 지도자들도, 데살로니가의 몇몇 성도들도, 다 큰 죄를 짓다가 넘어진 게 아닙니다.
그냥 무뎌진 채로 하루하루를 살다가 준비 없이 그 날을 맞았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강한 결심이 아니라, 이미 우리를 깨우신 그 은혜를 오늘도 붙드는 것입니다.
무감각이 죄라면, 깨어 있음은 은혜에 대한 반응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