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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장
조천영이 백산의 이름을 부르며 마지막 힘을 썼고 산파의 희열에 찬 외침소리가 백야평에 울려 퍼졌다.
노파의 눈에서 감동의 눈물이 흘러나왔다. 남편과 이웃 친지들의 죽음 속에서 태어난 생명이었다.
재빨리 탯줄을 끊어낸 노파가 아이를 위로 쳐들었다. 마치 죽어간 남편과 마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려는 행동 같아 보였다.
순간.
슈-아-악!
바위 위쪽으로부터 검은 방립을 쓴 인물이 아래쪽으로 뛰어내리며 무시무시한 도강을 뿌려댔다.
목표는 소운과 냉추렴이었지만, 새로 태어난 아이와 주변에 있는 아이들까지도 전부 도강의 영향권 내에 들어 있었다.
"안 돼!"
가장 먼저 흑의인을 발견하고 몸을 날린 이는 석두와 교대하기 위해 지친 몸을 일으키던 소살우였다.
소살우의 외침소리와 함께 같이 일어나고 있던 칼날, 도치, 쌍칼 등 그곳에 있던 광견조원 전원이 도강 속으로 뛰어들었다.
흑막 살수 중 서열 삼위인 사객의 지옥참마도법(地獄斬魔刀法)이었다. 영객과 같이 투입되었던 사객이 지금에서야 나타난 것이다.
금의위에 쫓기는 와중에도 자신들의 청부를 수행하고 있었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모든 이들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마음을 풀고 있을 때를 노린 암습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누구도 바위 위에 적이 숨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도강 속으로 뛰어든 소살우의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광경. 자신의 외침소리와 함께 갈태독이 조천영을 보호하기 위해 그의 몸을 포개는 모습과,
산파 옆에서 아이를 신기한 듯 쳐다보고 있던 요몽이 노파와 아이의 몸을 감싸는 모습이었다.
그럼 남은 이들은 남궁미령과 두 형수, 그리고 아이들밖에 없다.
두 줄기 도강이 그녀들의 목을 향해 쏘아져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조천영의 생사에 대한 걱정 때문에 그녀들도 완전히 무방비상태였다.
'씨펄!'
소살우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들고 있는 도(刀)로 막을 수 있는 강기는 한줄기밖에 없다. 선택을 해야만 했다.
'개새끼!'
재차 튀어나온 욕설을 씹어 삼킨 소살우가 두 사람 사이로 뛰어들며 양팔을 활짝 폈다.
오른손에 쥐고 있던 도에 의해서 도강이 퉁겨나가는 게 느껴지고, 동시에 붉게 변해 있던 왼쪽 팔에서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크-아-악!"
처절한 포효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핏빛 광풍(狂風)이 몰아쳤다. 백산이 도착한 것이었다.
화전민 마을에 도착한 백산은 경악하고 말았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십여 호의 집들은 이미 재가 되어버렸고 마을 사람들과 알 수 없는 자들의 살점, 시신들이 이곳저곳에 널려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광천뢰가 터진 흔적.
그때 백산의 귓가에 조천영의 애달픈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힘을 다 짜내서 백야평에 도착한 그의 눈에 들어온 광경은 이제 갓 태어난 소령이를 들어올리며 웃는 산파와 위에서 아래쪽으로 덮쳐가는 흑의인이었다.
자신이 아무리 빨라도 도달할 수 없는 거리.
쿠웅!
툭!
광견조원들이 뛰어드는 게 보였고 가슴속에서 무엇인가가 터져나갔다.
'베었다.'
사객(死客)이 내심으로 지르는 소리였다. 그의 도가 피륙을 잘라내는 느낌이 분명히 손을 타고 전해져왔던 거였다.
나머지 인물들에게 쏘아낸 강기는 그리 강한 것이 아니었다. 오직 미끼 둘에만 모든 힘을 다 쏟았고 한군데는 성공한 것 같았다.
나머지는 다음에 또 기회를 노리면 된다.
지금껏 상황을 지켜보건대 이들은 결코 자신들을 감시하거나 하지 못한다. 너무 많은 적들이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기회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이제 몸을 뺄 차례였다. 자신의 도를 막기 위해 뛰어들었던 자들은 아래쪽에 있는 아이들에 더 관심이 많았고 누구도 자신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
막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처절한 고함소리와 함께 무엇인가가 자신의 목을 잡아채는 것을 느꼈다.
"커억!"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눈을 들어 전면을 쳐다보았다.
눈앞에 선명하게 보이는 검은 보석 두 개, 죽음의 광채가 쏟아져나오는 흑안(黑眼)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던 거였다.
흑색지안(黑色之眼) 일국(一國) 멸(滅)이라 했던 파멸안의 두 번째 단계가 현세했다.
사객의 목을 틀어쥐고 있던 백산의 오른손으로부터 사천비가 튀어나와 사객의 오른팔을 절단해버리고,
가볍게 들려진 왼손에서 운천비와 풍천비가 튀어나와 두 다리를 잘라버린다.
"으-으-으!
공포에 절어버린 사객은 자신의 팔다리가 없어졌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살려……."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소리였다.
살수가 되기 위해 인성을 죽이고 감정을 말살하는 훈련을 거쳤다지만, 절대적인 공포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오직 살고 싶다는, 살아야 한다는 욕망만이 솟구치는 것이었다.
"네깟 놈이, 천영이를……."
지독히도 차가운 저음이 백산의 입에서 끊어질 듯 이어지며 흘러나왔다.
백산의 팔목에서 튀어나와 붉은 빛을 발하며 허공을 유영하고 있던 사천비와 운천비, 그리고 풍천비가 위에서부터 시작하여 차례로 사객의 몸을 감기 시작했다.
빠르게 움직이지도 않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사객의 몸을 돌고 있던 세 개의 수천비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운천비는 사객의 심장 앞에, 사천비는 명치 부근으로, 마지막 풍천비는 단전 앞에 자리를 잡으며 몸속으로 파고들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다…죽…인…다!"
백산의 검은 눈에서 한줄기 묵광(墨光)이 번쩍이고 오른손에서 독천비가 튀어나오며 사객의 이마에 그대로 틀어박혔다.
독천비를 통해서 방출된 절대독에 의해 사객의 몸이 이마 쪽에서부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녹아내린 검은 독물이 팔 위로 흘러들며 자신의 옷을 태우고 있었으나 행동에는 변화가 없다.
이윽고 사객의 얼굴이 녹아서 사라짐과 동시에 두 손을 가볍게 앞으로 당기자, 뇌룡사에 의해서 감겨 있던 사객의 몸이 사등분으로 분리되며 바닥으로 흩어졌다.
손을 흔들어 독액을 털어냈음에도 백산의 팔에서는 검은빛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아직도 천목환에 남아 있던 천비비 때문이었다.
천비비에서도 백산의 눈과 같은 검은색 광망이 흘러나오며 팔목 전체를 묵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자신의 팔을 가만히 쳐다보던 백산의 얼굴이 천천히 설가장 인물들에게로 향했다.
"뭣들 하느냐? 활을 쏴라!"
갑작스런 백산의 출현과 그의 잔인한 행동에, 손을 놓고 멍한 표정으로 서 있던 부하들을 향해 설검후가 고함을 내질렀다.
이미 살인적인 광기에 도취된 설검후는 이성을 잃고 있었고, 아직도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비록 절반 정도의 부하들이 죽었지만 적도 역시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이 별로 없다.
더구나 살수처럼 보이는 놈의 암습 덕택에 대여섯 놈이 치명상을 입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새로 나타난 놈이 대단해 보이기는 하지만 수적으로 유리한 것은 자신들이다. 한 놈이 더 왔다 해서 바뀔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판단이었다.
설검후의 외침에 정신을 차린 설가장 궁수들이 다시 활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이번의 목표는 전부 백산이었다. 수십 수백의 화살이 백산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날아들었다.
텅! 텅! 텅!
백산의 몸에서부터 안개처럼 퍼져나간 붉은 기운이 화살을 퉁겨내고 열두 개의 비도가 사방으로 유형하며 춤을 추었다.
하늘을 향해서 곧추선 산발된 머리는 바람결에 일렁이듯 휘날리고 암흑색의 동공 두 개는 붉은 혈운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옮길 때마다 주변의 대기가 터져나갔다.
"큭큭큭!"
백산의 입에서 흘러나온 괴소는 메아리가 되었고 나직한 중얼거림은 노래가 되어 울린다.
"하늘에서 죽음의 비가 내리니! 천멸우(天滅雨)!"
손과 발에서 천비들이 사방으로 몰아치며, 검은 눈동자의 인간이 춤을 추고 있다. 살짝 들려진 다리에 연결된 빙천비가 전방을 향해 반원을 그린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멸하네! 생혼멸(生魂滅)!"
휘감아도는 왼손과 함께 생천비에서 붉은빛이 번쩍이며 사방으로 찔러간다.
"으-아악! 커-억!"
빙천비에 의해서 허리가 잘려진 설가장 인물들이 얼음 가루로 부서져 내리고 생천비에 의해서 이마가 뚫린 인물들은 마치 그 자리에 정지하듯 선 채로 죽어나간다.
덩실!
혈우신보와 연결된 백산의 손과 발놀림이 달려드는 흑의인들을 피하며 두 번째 마당을 시작했다.
"화염지옥이 탄생하니! 화염폭(火焰爆)!"
춤을 추기 위해서 들어올려진 다리에 연결되어 있던 화천비에서 사방을 태우는 극양의 기운이 쏟아지며 달려들던 인물들을 비롯하여
생천비에 의해서 이미 절명해 있는 인물들까지 전부 재로 만들어버리고 있었다.
"죽은 자의 영혼마저 파괴하네! 사혼파(死魂破)!"
오른팔이 앞으로 휘감아지자, 사천비가 전방을 찢어발기며 검이며 인간의 육신이며 할 것 없이 걸리는 모든 것을 잘라버리고 있었다.
별 위력도 없다 했던 혈뇌문(血雷門)의 무공이 흑색지안의 상태에서 발현되자 엄청난 위력으로 펼쳐지고,
단순한 시구(詩句) 같은 중얼거림이 천비로 이어지자 하늘의 기운이 솟구쳐나왔다.
지극히 무심한 저음의 노랫소리가 백야평에 울려 퍼지며 백산의 춤사위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혈운이 지나는 곳에는 어김없이 피와 잘린 육신이 남았다.
"천영아! 천영아, 정신 차려라! 소령이를, 소령이를 보란 말이다!"
"아이가, 아이가 울지 않아요!"
조천영을 애타게 부르는 갈태독의 울먹이는 목소리와 산파의 울부짖는 소리가 처연히 메아리쳐 울렸다.
사객의 공격에 내상을 입었는지 입가에 피를 흘리면서도 조천영의 온몸에다 추궁과혈(追宮過穴)을 하고 있었다.
소살우의 팔이 잘리고 그곳으로 뛰어들었던 광견조원들의 등짝이 갈라져서 하얀 뼈가 드러난 채 쓰러져 있음에도 돌볼 겨를이 없었다.
"핏빛 바람이 불어오니! 혈광풍(血光風)!"
갈태독이 조천영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는지 백산 주위의 혈광이 더욱더 진해지며 그의 몸이 무서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움직이는 몸을 따라서 날리던 풍천비에서 가공할 풍압이 쏟아져나오고 그 풍압에 휘말린 설가장 인물들의 몸이 찢겨지며 바람처럼 사방으로 흩날렸다.
"산천초목이 사라지네! 무한극(無限極)!"
이제는 백산의 움직임이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붉은 혈운에 감싸인 미쳐버린 바람(狂風)이 온 사방에 몰아치며 설가장의 인물들을 도살하고 다녔다.
인간이 아니었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이면 저런 모습을 보일 수가 없는 것이다.
단 일수에 십여 명의 인물들이 어육이 되어 쓰러지고 있음에도, 아무런 감정도 느낌도 없는지 또 다른 먹잇감을 찾은 검은 눈동자는 더욱 빛을 발한다.
백산의 절대적인 무위에 새파랗게 질려버린 설가장 인물들이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나고 있었으나 그것마저도 허락되지 않았다.
언제 쓰러졌는지, 자신의 목이 떨어졌는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하나씩 몸을 눕혀갔다. 아비규환 지옥도가 연출되고 있었다.
"저럴 수가……."
백산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설검후가 온몸을 부르르 떨며 중얼거렸다.
극단적인 공포,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공포였다. 어찌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의 몸이 저럴 수가 있단 말인가.
백산 앞에 있는 설가장의 인물들은 무인이 아니었다.
한겨울의 마른 갈대였다. 가벼운 손짓 한 번에 슬쩍 움직이는, 발길질 한 번에 힘없이 쓰러지는 메마른 갈대일 뿐이었다.
분노(忿怒).
광혈지옥비(狂血地獄匕)라 불리는 열두 개의 천비 중 철가의 한을 토해내서 만든 천비비의 마지막 비밀, 혈뇌문 무공의 최후 비밀은 깨달음도 뭐도 아니었다.
하늘을 태울 듯한 분노가 잠들어 있던 천살(天殺)의 기운을 완전하게 깨웠고, 천살성에 기인한 흉성이 수천비와 각천비를 통해서 뿌려지는 것이었다.
"검은 구름이 울부짖어! 묵운명(墨雲鳴)!"
우르릉!
"분노한 하늘이 소리치네! 분천뇌(奮天雷)!"
콰콰광!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을 울리는 단 한마디.
'죽여라, 죽여라. 살아 있는 것을 모두 죽여라.' 살아 있는 것을 모두 죽여라는 말만 울리고 있었다.
이미 이성이란 것도 없었다. 검은 동공에 들어오는 희미한 그림자들, 천영이를 해친 자들이고 이제 막 태어난 소령이를 죽인 자들이고 형제들을 공격한 자들이다.
저들을 다 죽여야만 이 갈증이 해소될 것이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피를 데우기 위해서는 살아 있는 인간의 뜨거운 피가 필요할 뿐이다. 심장을 터뜨리고 그 피로 몸을 씻어야 한다.
"모두 피해랏!"
결국 설검후의 입에서 후퇴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왔지만 이건 아니다.
정 안 되면 동귀어진을 해서라도 같이 죽고자 했다. 그러나 적은 단 한 명도 죽이지 못하고 괴물 같은 놈에게 일방적으로 도륙만 당하고 있다.
살고 싶다는 욕구가, 살아야 한다는 욕망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설검후의 외침소리에 백산의 공격을 피해 주춤거리며 물러나고 있던 설가장 무인들이 사방으로 몸을 날렸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백야평, 사방이 전부 트인 이곳에서 그들이 피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일출 속에 피어나는 것은 서러운 피무지개였다.
누구도 피할 수 없었다. 붉은 운무가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는 어김없이 도막난 육신이 남았다.
소림의 절세신공인 무상신법은 이미 불공(佛功)이 아니었다. 악마의 저주로 만들어진 사공(邪功)이었고 혈운을 피워내는 마공(魔功)이었다.
광활한 백야평의 이곳저곳에서 솟아나는 검은 보석은 지옥에서 산다는 야차의 눈빛이었다.
백야평을 누비는 것은 백산 혼자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피로 온몸을 씻었던 석두와, 사객의 암습에 당하지 않았던 광견조원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설가장 인물들을 도륙하고 다녔다.
그들도 조천영을 부르는 갈태독의 음성을, 산파의 울먹이는 목소리를 들었다.
힘을 얻고 난 후에, 처음으로 태어난 생명을 지키지도 못했고 자신들의 어머니 같은 조천영을 지키지도 못했다.
진기를 끌어올릴 때마다 화살 구멍에서 피가 솟구치고 있는데도 멈추질 않았다.
아니, 멈출 수가 없었다. 미쳐버린 사람은 백산만이 아니었다. 그들도 이미 미쳐 있었던 것이다.
백야평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은 백산과 석두, 그리고 광견조원들의 몸에서 쏟아져나온 혈무와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한 살기였다.
"으앙!"
"울었다, 울었어. 아이가 깨어났다!"
희열에 찬 산파의 외침소리가 울려 퍼지자 석두와 광견조원들의 동작이 일제히 멈췄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이가 깨어났다는 것이다. 그들의 얼굴에 기쁨의 빛이 떠올랐다.
그러나.
"크아악!"
멈추지 못하는 이가 있었다. 노파의 외침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더욱더 커진 괴성을 질러대는 이, 검은 동공의 백산이었다.
목을 쳐낸 인물로부터 솟구치는 피를 그대로 맞으며 다른 먹잇감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조금 전에 들었던 갈태독의 음성만이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천영아! 정신 차려라, 제발. 너 아니면 저 녀석을 말릴 사람이 없다. 소령이가 깨어났단 말이다, 천영아!"
갈태독이 계속해서 조천영을 주무르며 소리를 질렀다.
그도 파멸안의 비밀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분노였다.
지금껏 백산이 해왔던 행동으로 보아, 분노가 그의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되면 변했었다.
분노가 커질수록 힘은 더 강해졌고, 힘이 강해지면 이성은 사라졌다.
지금 백산의 상태가 파멸안의 증상을 가장 잘 설명해주고 있었다.
만일 그에게 이성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면 가장 먼저 조천영의 상태를 보러 왔어야 했다.
그러나 조천영이 있는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머릿속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직 살아 있는 생명체를 말살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설가장 인물들이 다 죽고 나면 그 다음은 자신들도 그의 목표가 될 수 있음이다.
'깨워야 한다. 깨우지 못하면 오직 죽음뿐이다.'
아니길 바라지만 최악의 경우에도 대비해야 하기에 갈태독의 손놀림이 더욱 빨라졌다. 백산이 마지막 인물의 목을 쥐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으음! 백…랑!"
갈태독의 노력에 하늘도 감동했는지 조천영이 미약한 신음을 흘리며 깨어났다.
"천영아! 정신이 드느냐? 오! 하늘이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갈태독이 하늘을 쳐다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하루 동안에 걸친 운명과의 싸움이었다.
자신의 백오십 년 세월보다 더 긴 시간이었다.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러나 결국 운명을 이겨냈다. 떠나가던 혼을 다시 되돌린 것이다.
"백랑은요?"
아이에 대해서는 차마 묻지를 못하고 백산만 찾았다.
"고생했다, 천영아. 소령이도 무사하다. 자, 봐라! 공주님이다, 이 녀석아."
백산에 대해서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소령이를 먼저 조천영의 품에 안겨주었다. 그녀의 심정을 잘 알기 때문에 취한 행동이었다.
자신이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인데 왜 궁금하지 않겠는가. 아마도 두려워서 묻지 못했을 것이다.
"오! 우리 아기, 소령아! 소령아……. 백랑은? 백랑은 어디 있어요!"
소령이를 안고 눈물을 흘리던 조천영이 갑자기 울부짖었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있는 이곳은 처음 있던 집이 아니다.
고개를 들어 백야평을 둘러보던 조천영이 기겁을 했다. 저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인물, 온통 혈광에 휩싸여 있는 백산의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주변에 널려 있는 무수한 시체들.
조천영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제 막 아이를 출산하고 실신했다 깨어난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솟구치는지 저 멀리 보이는 백산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백랑!"
백산을 부르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백-랑!"
달리고 있었다. 자신이 맨발이라는 것도 잊은 채 품속에는 갓 태어난 소령이를 안고서 백야평을 가로질러 백산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아직도 하체를 타고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자신이 살아났고 아이가 살았다. 미쳐버린 백산을 말려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황산에서 벌였던 살육을 또 시작했을 것이다.
얼었던 얼음이 다 깨져서 녹아버렸을 것이다. 분노에 모든 것을 맡겨버리고 자신도 버렸을 것이다. 잡아야 한다. 다시 예전으로 되돌려놓아야 한다.
백산을 외쳐 부르며 정신없이 달리고 있었다.
설검후의 목을 틀어쥐고 비도를 뿌리려던 백산의 행동이 처음으로 멈췄다.
검게 죽어버린 그의 머릿속에 백랑이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듣고 싶었던 목소리, 자신의 정신을 돌아오게 해주는 광명(光明)의 목소리였다.
"천영?"
자신도 모르게 설검후의 목을 놓으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백산의 눈에 보이는 장면 하나, 저 멀리서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희미한 동체가 있었다.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지만 발소리만 듣고도, 숨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다. 천영이었다.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중한 그녀였다.
그녀가 다시 살아온 것이다.
"죽인다! 이야얍!"
조천영을 쳐다보며 넋을 잃고 있는 백산의 등을 향해 설검후의 공격이 터졌다.
모든 것이 사라졌다. 설가장도 부하들도 오직 자신 한 명만 남겨두고 전부 떠났다. 더 이상 생에 대한 미련이 없다. 죽고 싶었다.
이미 자신이 상대가 되지 않음을 알지만 가장 편하게 죽는 방법일 것 같았다.
결국 설검후의 의도는 적중했다. 힘없이 늘어져 있는 줄로만 알았던 열두 개의 비도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솟아오르더니 설검후의 온몸을 난자해버렸다.
후두둑!
조각조각 떨어진 설검후의 몸이 바닥에 흩어졌다.
가문을 멸망시킨 자들에 대한 복수의 일념으로 지난 오 개월을 견디며 살았던 설검후의 죽음을 끝으로, 설가장의 모든 것이 사라졌다.
자식이 저질렀던 단순한 사건, 그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서 벌였던 일. 자신 정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행하고 있던 그런 방법으로 일을 처리했을 뿐이다.
사건에 대한 모든 것이 끝났었고 이미 잊혔던 일이었는데 그 사소한 일이라 생각했던 사건으로 해서 설가장이 멸문되고 만 것이다.
떨어지는 설검후의 시신을 뒤로하고 백산도 조천영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 순간은 자신이 엄청난 무공을 익히고 있어서 한순간이면 조천영의 앞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조차 잊었는지 조천영의 이름만 되뇌며 정신없이 달려나갔다.
눈물.
백산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네 살 이후로 말라버렸던 눈물샘이 터졌는지 그의 눈가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백랑!"
"고마워! 정말 고마워, 살아주어서……."
"응애응애!"
굳게 껴안은 두 사람 사이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 소령이, 소령아. 내가 아버지다, 소령아!"
조금씩 시력이 돌아오면서 아이와 조천영의 얼굴이 보이고 있었다.
왜 이리도 눈물이 흘러나오는 것인가. 검은 동공을 씻어내려는 듯 끊임없이 눈물이 쏟아져나왔다.
"괜찮아요?"
백산의 눈가에 눈물을 훔쳐내며 조천영이 물었다.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눈동자에서 검은빛이 조금씩 사라져가는 것이 그녀의 눈에도 확연히 보였다.
"괜찮지, 그럼. 가요!"
조천영을 번쩍 안아든 백산이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좋았다. 조천영이 살아났고 아이가 살아났는데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사라랑!
사라랑!
마주 잡은 손에서 들려오는 애명환의 울음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 * *
뇌룡현을 떠난 이후, 처음으로 백산과 광견조원들이 입을 닫았다.
일행이 침울해하면 누구든지 한 사람이 나서서 분위기를 바꾸곤 했던 이들이 굳어진 얼굴로 각자의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조장인 소살우가 왼팔을 잃었고 그와 같이 뛰어들었던 쌍칼과 도치 등이 사경을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거의 치명적이라 할 만큼 큰 부상을 당했지만 마을 아이들을 전부 구한 것도 아니었다. 열다섯 중 다섯이 희생되었다.
특히 태어난 아이와 노파를 몸으로 감쌌었던 요몽의 상처는 누구보다 컸다. 도강을 맨몸으로 받았던 그의 등은 거의 넝마 수준으로 변했고 지금까지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심하게 다친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일행도 온몸으로 화살을 막아내느라 성한 자는 아무도 없었지만 누구 하나 내색하지 못했다.
화살이 박혀 있던 자리를 지혈하고 마을을 수습하느라 묵묵히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마을 사람들의 시신을 한곳으로 모으고, 나무를 베어다 쉴 곳을 다시 만들면서 현실을 잊고자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자신들의 피해만 있었다면 이렇게까지는 아니었겠지만, 백여 명의 마을 사람들이 죽었다.
그리고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것은 자신들이 던진 광천뢰였기에 더욱더 견디기 힘들었던 거였다.
아무리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그 방법밖에 없었다고 하지만, 이 모든 일이 자신들의 방문으로 인해 일어난 일이기에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자신들의 아픔과 고통은 내색할 수가 없었다.
"괜찮냐?"
거의 모든 정리가 끝나고 일행이 쉬고 있을 때 백산이 소살우를 찾았다.
소살우를 쳐다보는 백산의 눈길에 아픔이 묻어나왔다. 냉추렴을 구하기 위해서 팔을 희생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형님!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소살우가 강렬한 눈빛으로 백산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형님 같으면 이 살우의 목숨과 팔을 선택하라면 어쩌겠소?"
"살우야……."
"대답해보시오."
"내 팔보다 너의 목숨이 더 중요하다."
"우린 가족이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이곳에 올 때까지만 해도 많은 말을 하고 싶었다. 고맙다는 말도 하고 싶었고 더 빨리 돌아오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소살우는 당연한 일일 뿐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더 나쁜 상황이었다면 목숨마저도 버렸을 것이기에 백산의 마음은 더 아팠다.
이들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는데, 무공을 가르친다는 명목 하에 고생시킨 것밖에 없는데 그들은 이미 가족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형님! 안휘성에서 동생들 이름을 지어올 때 말이요, 다른 애들은 전부 이름을 따로 지어왔는데 내 이름만 그대로였던 이유를 아시오?"
사실 백산도 그것이 궁금해서 조천영에게 물었지만 그녀는 웃으면서 소살우도 좋은 이름이라고만 했던 것이다.
그때는 조천영의 말에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는데 소살우는 그 이유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소살우는 내 별명이 아니고 이름이기 때문이었소. 어머니의 성을 쓰기는 했지만 부모가 지어준 이름말이오."
평생을 작명만 하고 살았던 사람이었기에 소살우가 별명이 아닌 이름이란 것을 바로 알아보았던 것이다.
"지금 내 나이가 서른이요, 어쩌면 우리 광풍대원 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을 거요."
먼 옛날을 회상하는지 소살우의 말소리가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고, 또 말할 수 없었던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창기였소, 그것도 하급창기."
그의 기억에는 항주(杭州)가 고향인 것 같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항주에서도 손꼽히는 대부호 가문의 장자였다.
그런데 그 집안에 문제가 있었다. 다섯 명의 첩이 있었음에도 딸만 여섯이 있었고 대(代)를 이어야 할 아들이 없었던 것이다.
집안 어른들의 성화에 견디다 못한 그의 아버지는 밖으로 나돌기 시작했다.
그때 소살우의 어머니를 만났다 한다. 술김에 창기와 하룻밤 잤던 것이 임신으로 이어졌고 태어난 아이가 소살우였다.
그때부터 어머니의 처지가 바뀌었다. 하급창기에서 대갓집 첩으로 들어앉게 된 것이었다.
대갓집의 장자로서 소살우는 모든 집안 어른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이 년을 보냈다. 그땐 몰랐지만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호강이었다.
그러나 소살우가 세 살이 되던 해에 모든 것이 변했다. 그동안 자식을 낳지 못했던 본처가 임신을 한 것이었다. 그리고 태어난 아이, 아들이었다.
동생이 태어나자마자 소살우와 그의 어머니는 노예들이 기거하는 곳으로 옮겨졌고 그 집안의 애물단지가 되었다.
세인들의 이목 때문에 차마 밖으로 내치지도 못하고 집에서 부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소살우가 사물을 인식하면서부터 본처와 나머지 첩들의 학대가 시작되었다. 무수히 많은 채찍질과 칼부림, 철들기 시작한 소살우에게는 너무나 큰 고통이었다.
왜 그런 대우를 받아야 되는지, 왜 자신을 미워하는지 알지도 못한 채 매일매일 그런 고통을 당하면서 살았다.
이유를 알게 된 것은 여섯 살 때였다. 학대에 견디다 못한 어머니가 출생의 비밀을 알려준 뒤 자살을 하고 말았다.
그녀의 생각에 자신만 없어지면 소살우에 대한 처우가 달라질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혼자 남은 소살우를 비밀리에 다른 집안의 노예로 팔아버린 것이었다.
그때부터 웃기 시작했다 한다. 주인들의 손에 맞지 않기 위해서 언제나 얼굴에 미소를 띠며 살아야 했다.
얼굴이 완전하게 웃는 모습이 된 것은 열두 살 때였다. 그때부터 탈출을 꿈꾸기 시작했고 더욱더 주인의 비유를 맞추며 살았다.
그리고 마침내 탈출, 팔 년간 노예 생활의 끝이었다.
"탈출을 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이 뭔지 아쇼? 그놈을 죽였소, 그때까지 내가 알고 있던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말이요.
그런데 말이요, 사람을 죽이고 있는 그 순간에도 웃음이 나옵디다. 동생이란 놈의 머리를 돌로 짓이기면서도 미친 듯이 웃고 있었단 말이오."
항주를 떠나 도망친 곳이 뇌룡현이었다 한다. 그에게 있어서 가족이란 발에 차이는 돌멩이보다 못한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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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보고갑니다
감사 합니다 즐독 허고 갑니다
고맙게 잘보고 있어요~~~
감사
감사합니다
즐감 합니다
감사ㅎ
그 친구의 인생도 참으로 안된 인생이구려
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