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간 163.5]
살며생각하며
천도교 발상지(發祥地) 구미산
최정대-충의포 직접도훈, 코리아타임스 칼럼니스트
“복술 복술 최복술아, 타기싫은 집둥질(짚으로 엮은 호송수레)에, 넘기싫은 문경새재, 관원이 출동하여 이내몸이 잡혀가네, 사랑하는 처자는 부모에게 전장하고, 나는가네 나는가네, 서울관문 나는 가네, 땅보고 통곡하니 하늘도 탄식하도다. 몹시도다, 몹시도다 우리임금 몹시도다. 귀신이 시켰던가 하늘이 제시했던가, 하늘밑에서 10년공부하더니 이만하면 마쳤도다.” (1973년 5월 3일 조선일보, “「新羅의 얼」 半世紀”)
위 내용은 수운대신사께서 동학(천도교)을 창도 후 관원들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될 당시 부패한 조선왕조를 한탄하며 경주지방에서 애달프게 부른 노래가사이다.
이 가사는 구비(口碑)문학의 한 부분으로 약 160년 전 경주지방의 고노(古老)들로부터 구전된 것을 필자의 선친께서 정리하여 발표한 것이다. “복술(福述)”은 수운 선생의 아명(兒名)이다.
19세기 중엽 수구왕조의 구조적 모순 속에 있던 민중을 구제하고자 ‘나라 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자’는 보국안민(輔國安民)의 큰 기치(旗幟) 아래 인간의 존엄성을 구현한 새로운 종교가 출현하였다. 이는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인내천 사상에 근간을 둔 무극대도의 동학이다. 동학(천도교)은 1860년 4월 5일 경주시 현곡면 구미산 중턱에 있는 용담정에서 수운 최제우 선생이 창도했다, 동학이 설파(說破)한 “시천주(侍天主), 사인여천(事人如天), 인내천(人乃天)” 등의 인본사상(人本思想)은 당시 신분과 남녀노소를 초월하여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인간 존엄의 기치를 내세웠다. 또한 동학의 평등사상은 당시 쇠퇴한 조선왕조로부터 억압을 받던 민초들에게 새 희망을 주었다.
수운대신사는 1824년 구미산 자락에서 출생하여 동학을 창도 후 조선왕조의 박애와 탄압으로 1863년 혹세무민의 죄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1864년 순교 후 구미산에 안장되었다.
하지만, 역사는 항상 민중의 편에서 정당한 심판을 내리 듯 대신사는 국내외를 걸쳐 역사의 위인으로 평가 받아왔으며, 경주시도 2014년 “동학발상지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선생의 생가를 복원하는 등 선생의 위대한 생애를 재조명하고 있다.
신라 고도 경주에 우뚝 솟은 구미산은 시내에서 서북쪽으로 불과 10km 지점에 위치한 해발 594m의 명산으로 경개절승(景槪絶勝)한 경치를 뽐내고 있다. 이곳은 행정구역으로는 경북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에 해당한다. 현곡면은 금장다리를 건너 영천으로 가는 길목에 양쪽에 길게 늘어선 산 한 가운데 골짜기의 긴 평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하여 시내에서 바로 눈에 ‘나타나는(見) 골짜기(谷) 동네’라는 뜻으로 현곡(見谷)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구미산은 이산(伊山) 혹은 개비산(皆比山)이라고도 불리었으며, 진한(辰韓) 6촌의 하나인 무산대수촌장(茂山對樹村長)인 손씨의 시조 구예마(具禮馬)공이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온 곳이며 그 정기로 위인을 낳은 곳이라고도 전한다. 과거에 구무산으로도 불린 이 산은 옛날 큰 홍수로 인해 그 모형이 거북이 꼬리만큼만 남아서 구미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또한 이 산은 경주에서 산세가 보이고 큰 돌이 높이 솟아있기 때문에 마치 거북이나 용과 같은 형상이라고 전하여져 오는데, 정상에 올라보면 고대로부터 한발(旱魃)이 심할 때 기우제를 지냈던 기우처가 있고, 동해바다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거북모양의 산 왼쪽 어깨는 기사령(騎獅嶺)이며, 오른쪽 발꿈치는 비홍현(飛虹峴)이라 한다.
멀리 동쪽으로는 신라시대 영악(靈岳)이며, 겨레의 중보(重寶)인 석굴암과 불국사가 위치한 토함산이 있고, 서쪽으로는 신라 화랑들이 심신을 단련했던 단석산이 자리하고 있다. 남쪽으로는 신라불교의 영장(靈長)인 금오산(남산)이, 북쪽으로는 세속오계를 창안하여 화랑들을 가르쳤던 신라의 고승 원광법사가 말년을 보냈던 금곡사지와 유서깊은 금곡산이 있다.
구미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신라의 효자 손순(孫順)의 애절한 사연이 깃든 홍효사지(弘孝寺址)가 있는 인애산(仁厓山)이 있다. 또한 구미산 입구에 있는 금장대(金丈臺)는 유명한 신라시대 비석인 임신서기석이 발견된 곳이며, 신라 명장(明匠)이자 고승인 양지스님의 소거였던 석장사지 옛터이기도 하다.
이렇듯 옛 신라유물들과 청동기 시대의 귀중한 암각화 등이 구미산 근처에서 발견된 것을 보면 이 산 주위가 천심과 민심을 이어주는 역사의 명소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외에도 산 근처 오류리에 신라 제28대 진덕여왕릉, 나원리에 국보 제39호인 신라 5층 석탑이 장엄하게 서 있어 역사성을 자랑하고 있다.
이와 같이 역사성을 인정받아 구미산은 1972년 당시 최덕신 천도교 교령과 필자의 선친 최남주(고고학자) 선생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용담정 또한 정비되었다.
구미산의 국립공원 지정 반세기 후, 경주시는 역사문화도시조성사업으로 일환으로 '동학발상지 성역화 2차 사업'을 진행하였으며. 필자의 가족들도 2009년부터 경주시 역사문화도시조성사업 추진위원회에 참여하여 위 사업 추진에 적극 협조하였다. 그 결과 용담정 일대 포덕문을 포함하여 주변 탐방로가 정비되었고, 수운기념관 및 교육수련관도 설립되었다.
한편, 동학은 의암성사에 의해 ‘천도교(天道敎)’로 개칭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은 반봉건과 반외세를 외치며 평민의 권리를 회복하고자 했던 동양 최초의 농민혁명이었다. 비록 동학농민혁명이 당시의 세상을 바꾸지는 못했지만, 그 민주적·자주적 정신은 후대에 3·1운동으로 이어져 현재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경주는 신라의 천년고도로서 이 나라의 역사를 이끌어온 많은 위인들을 배출한 세계적인 문화도시이다. 또한 근대 민주주의의 발상지이자 3·1운동의 정신적 출발지이며, 동학 천도교의 성지(聖地)로 재조명받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