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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론 90
요한계시록 22:20-21
아멘 주 예수여
요한계시록 마지막 본문을 살펴보게 되었다. 요한계시록 강론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우리가 다시 확인하는 것은 흔히 하는 생각들처럼 요한계시록은 미래에 일어날 비밀을 암호 풀 듯이 풀어야 하는 책이 아니며, 또한 어떤 특정한 사람만 해석할 수 있는 신비한 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전체가 신비라면 신비라고 할 수 있겠지만 요한계시록만 특정하게 비밀스러운 책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비밀은 복음이고 곧 하나님 왕국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10:7, 엡 6:19).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눅 8:10)
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6-27)
그 비밀을 받은 자가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이다. 이런 점에서 요한계시록은 하늘의 비밀을 예수 그리스도로 밝히 보여주는 책이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요한계시록 서두를 이렇게 시작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계 1:1)
이 계시를 전달받은 요한 사도가 있었던 곳은 “밧모라 하는 섬”(1:9)이었다. 섬이란 바다로 차단되어 있는 곳이다. 바다가 상징하는 세상의 나라들, 곧 이방인들에 의해 차단된 세상에 있지만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계시로 주의 날 안에 들어가는 은혜에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1:9)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예수 안에 있는 환난과 왕국과 인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요한 사도는 하나님의 계시로 하늘의 비밀을 보는 주의 날 안에 있지만 현실적으로 몸은 밧모섬에 있기에 서신을 받는 교회들과 같은 환난 가운데 동참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은 환난을 통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우리 마음에 품고 새기도록 남기는 것이고, 인내로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빠져나갈 수 없도록 사로잡힌 상태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요한계시록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며 이 땅이 아니라 계시로 주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하나님의 언약이 온전히 성취되어 자기 백성들을 몸으로 만드심으로 머리가 되셨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서두에 ‘일곱 교회’를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어떻게 남기시느냐 하는 것이 핵심이다. 일곱이라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으로 일하심을 보여주신 것이다.
계시의 핵심은 하늘의 비밀을 드러냄으로 세상의 실체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늘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좌에 앉아 계시고 그 보좌를 중심으로 모든 일이 일어나며, 오직 보좌에 계신 분께만 영광이 돌려지고 있는 하늘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세상은 종말의 상태에 놓여 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는 하늘의 비밀을 품은 자이기에 세상의 현실을 보는 자가 아니라 하늘 보좌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자이다. 아니 하늘 보좌를 확인함으로 세상에서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죽는 것이다. 이것이 종말의 상태에 있는 교회된 자이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20절). “이것들”이란 요한계시록 전체를 가리키고, “증언하신 이”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1:2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19:10에서 “예수의 증언”이라고 말씀하고 또한 22:16에서도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라고 말씀하였으므로 요한계시록은 그 누구의 증언이 아닌 “충성된 증인”(1:5)이시고 “충성되고 참된 증인”(3:14)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이다.
요한계시록의 모든 말씀은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환상이고 말씀이다. 성경 말씀 전체도 마찬가지이다. 결코 어떤 개인의 이야기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비롯한 성경 전체가 보여주는 것은 ‘우리’에 관한 것이 아니고 ‘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오직 언약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이다.
그래서 “18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18-19절)라고 선언하셨던 것이다. 구약에서 모세를 통해 말씀하신 것과 다르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신 4:2 / 참고 신 12:32)
특히 요한계시록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내졌다. 그리고 모임 때 바울 사도를 비롯한 요한 사도의 서신들이 읽혀졌다. 그러기에 이 말씀은 모든 성도들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권위를 가지고 그 말씀에 어떤 것도 더하거나 제할 수 없다는 것은 증언하신 분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라고 말씀하였는데 여기서 “진실로”라는 말의 헬라어 ‘나이’는 확실하다는 뜻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속히 오리니”(3:11),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22:7, 12)라고 계속 강조하셨던 말씀이다. 이미 누차 나누었던 것처럼 미래에 오신다는 표현이 아니라 시제를 현재형으로 사용하여 ‘지금 신속하게 계속 오고 계신다’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찾아오셔서 신속하게 하나님의 아들들로, 교회로 만들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대체로 이 말씀을 예수님의 재림을 요청하는 의미로 해석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도 ‘마라나타’라는 인사를 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말의 헬라어 ‘에르쿠 퀴리에’는 아람어 ‘마라나 아타’를 번역한 것이고 고린도전서 16:22에서 헬라어 표현 ‘마라나다’는 아람어를 음역한 것이다.
여기서 확인해야 하는 것은 우리 성경에 ‘재림’이라는 용어가 전혀 나오지 않는데 마치 성경의 용어인 것처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재림을 표현하는 헬라어 단어가 ‘파루시아’(마 24:3, 고전 15:23, 살전 4:15 등)인데 ‘출현, 오심, 현존, 있음, 강림’이라는 뜻이다. ‘파루시아’는 ‘~곁에, ~의 가까이’라는 뜻의 ‘파라’와 ‘있다, 존재하다’라는 뜻의 ‘에이미’의 합성어 ‘파레이미’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따라서 ‘파루시아’라는 단어에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 다시 오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 않고 ‘옆에 혹은 가까이에 존재한다’라는 뜻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오심’의 의미이다. 자기 백성에게 찾아오셔서 함께 하심이다. 그래서 ‘임마누엘’이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
임마누엘은 우리가 무슨 일이든 다 잘되도록 함께 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에 함께 하신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속 찾아오셔서 십자가의 길을 가게 만드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찾아오심의 은혜를 입은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전 것은 지나갔기에 첫 창조 세계의 시간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의미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 안은 묵시의 세계이다. 묵시란 영원의 세계이고 묵시를 아는 자는 영원 속에 있기에 첫 창조의 시간이나 역사는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속히 될 일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일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는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라고 선언하시는 말씀에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죽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찾아오심을 경험함으로 생명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아멘”은 히브리어 ‘아만’(확증하다, 지지하다, 뒷받침하다, 확립되다, 신실하다, 확실하다, 믿을만하다, 믿다, 확신하다)의 역어로 ‘진실로 그러하다, 믿는다’라는 뜻으로 진리에 대한 선언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언약의 말씀에 대한 확증으로 응답하는 말이었다(민 5:22, 신 27:15, 시 41:13, 렘 11:5, 28:6 등).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아멘의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이러므로 땅에서 자기를 위하여 복을 구하는 자는 진리(아멘)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 이는 이전 환난이 잊어졌고 내 눈 앞에 숨겨졌음이라(사 65:16)
결국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인간이 아무리 ‘아멘’을 외친다고 할지라도 진리이심을 드러내고 확증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아멘, 아멘’이라고 말씀하심으로 구약에서 언약으로 말씀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뜻으로 나타내셨다(우리 성경에는 “진실로 진실로”라고 번역하였다. 요 1:51, 3:3, 5, 11, 5:19, 24, 25, 6:26, 32, 47, 53, 8:34, 51, 58, 10:1, 7, 12:24, 13:16, 20, 21, 38, 14:12, 16:20, 23, 21:18). 그래서 “주 예수”라고 말씀한다. 헬라어 ‘퀴리오스’는 히브리어 ‘아도나이’의 역어로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오셨기 때문이다(행 2:21, 36).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21절). 요한계시록은 이 모든 것을 “주 예수의 은혜”로 마무리한다. 천지 창조도 은혜이고 종말도 은혜이기 때문이다. 혼돈과 공허, 흑암 가운데 있는 땅을 말씀으로 품은 하나님의 영이 일하려고 하셨던 그것을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셨다.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1-2)
그러므로 천지 창조와 종말의 과정에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만 생명 되는 것이 창조의 완성이고 우리는 십자가 앞에 나의 죄악을 토설할 뿐이다. 억울하고 힘든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나를 위한 그런 재림은 성경에 없다. 하늘에서 날마다 일방적으로 찾아오셔서 오직 자기 십자가만 남기시는 말씀을 성취하시는 은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자기 십자가의 길로 이끌어 말씀이 되게 하시는 은혜에 함몰되었는가? 아멘!!(20240908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