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환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
개벽학의 제안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강성원 교무(1963~)는 2018년 가을학기에 필자가 담당한 〈원불교해석학〉 수업시간에 ‘개벽학’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하였다. 강교무에 의하면 ‘개벽학’은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우주를 하나의 생명체로 보고, 세계주의의 입장에서 남녀‧인종‧국가‧종교‧문화 등의 모든 차별과 불평등을 해소하고, 서로 열린 마음으로 소통하면서 자연과 더불어 하나 되는 지구공동체를 지향하는 학문”
이런 의미의 개벽학은 한반도에서는 19세기말~20세기초에 수운 최제우‧증산 강일순‧소태산 박중빈이 제창하였는데, 그 특징은 서구의 과학문명과 동양의 도덕문명의 병행 내지는 융합을 추구했다는 데에 있다고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개벽학’이라는 개념은, 2014년에 역사학자 이병한이 제시한 ‘개벽파’ 개념과 더불어[주1], 한국의 근대사상사를 새롭게 서술할 수 있는 획기적인 개념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종래에 ‘신종교’나 ‘민족종교’ 또는 ‘민중종교’로 불렸던 동학/천도교‧증산교‧원불교를 ‘종교’가 아닌 ‘학’으로 묶었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그리고 최근에 나온 ‘개벽종교’[주2]라는 개념이 서구적인 ‘철학-종교’의 범주를 적용한 범주라고 한다면, ‘개벽학’은 동아시아 전통의 ‘학’ 개념 - 가령 ‘수양학’ -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더욱 크다.
아울러 개벽학 개념을 사용하면, 조선후기~일제강점기의 사상사를 ‘실학에서 개벽학으로의 전환’이라는 식으로 ‘학’에서 ‘학’으로의 이동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더 나아가서 1920년대에 천도교에서 창간한 개벽이 서양의 학문과 문화를 소개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이 시기에 이르면 개벽학의 외연이 ‘본격적으로’ 서양학으로까지 확장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물론 조선후기의 이른바 실학자들은 이미 서양의 천문학이나 과학 등을 수용하기 시작했지만-).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최근에 모시는사람들의 박길수 대표는 ‘개벽파’의 입장을 담는 계간지를 만들자는 제안을 하였다. 과거에 전통과 현대가 유학의 입장에서 현대의 문제를 생각하고, 오늘날의 녹색평론이 생태의 관점에서 지속가능한 미래를 생각했다고 한다면, 개벽사상의 입장에서 우리의 근대를 다시 보고 현대를 진단하며 미래를 제시할 수 있는 저널을 만들자는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저널이 창간된다면 ‘개벽학’은 그곳에서 전개되리라 생각한다.
개벽대학의 선언
한편 지난 12월 6일에 원광대학교 신임총장으로 당선된 원불교사상연구원의 박맹수 원장은 필자와 개인적으로 나눈 대화에서 원광대학을 ‘개벽대학’으로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주3]. 박원장이 말하는 개벽대학의 키워드는 ‘현장‧창조‧변화’로 요약되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총장이라는 권위를 내던지고 학생과 직원이 있는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수평적인 대화를 나눈다. 둘째, 시대의 '변화'를 거부하지 말고 오히려 화두로 삼아 즐겁게 맞이한다. 셋째, '창조'하는 곳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으로 원광대학교를 새로움의 중심으로 만들어 나간다. 이런 진취적이고 창조적인 정신을 가진 ‘괴짜’ 청년 100명을 매년 배출해내면 그것이 바로 ‘개벽대학’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첫 번째의 ‘현장주의’는 원불교를 창시한 소태산이 말한 “<현실>로 나타나 있는 경전이야말로 큰 경전이다”고 한 ‘산 경전론’ 또는 ‘현실경전론’과 상통하는 생각이다[주4]. 실제로 소태산은 간척사업과 엿장수라는 경제활동에서 새로운 종교운동을 시작한 일종의 ‘민중실학자’였다[주5]. 아울러 “사건은 현장에서 일어난다”고 하는 〈춤추는 대수사선〉의 주인공 아오시마 형사의 말을 빌리면, “개벽은 현장에서 일어난다”고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시대의 변화를 거부하지 말자”는 말 역시 ‘현실경전론’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장자는 “경전이란 발이 남긴 발자국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여기서 ‘발’이 변화하는 ‘현실’을 비유한다면 ‘발자국’은 그 변화하는 현실에 대응하거나 설명하기 위해 만든 이론이나 체계 등을 가리킨다. 그런데 사람들은 과거의 현실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틀로 지금의 현실을 설명하거나 이해하려고 한다. 그래서 현실대응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처럼 특정한 이론체계나 가치관에 얽매여 있는 상태를 장자는 ‘성심’(成心)이라고 하였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정신의 식민지상태’(colonized mind)라고도 할 수 있다. 반면에 이러한 정신적 집착상태나 노예상태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허심’(虛心)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심’은 정신의 ‘집착’이나 ‘고착’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이 경우에 ‘개벽’이란 생각이 굳어지는 것을 끊임없이 부정하는 ‘마음 비움’ 또는 ‘자기부정’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창조하는 곳이야말로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은 중심을 하나의 지역이나 권력으로 보지 않고 활동이나 행위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즉 중심이 바깥에 고정적으로 있다는 생각을 버리는 데에서 시작되는 중심의 재발견인 것이다. 철학자 윤노빈은 신생철학(1974)에서 ‘하느님’은 ‘하는님’이라고 하였다. 신이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신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동학으로 말하면 모시는 행위가 신적인 행위가 되는 셈이다. 여기에서 ‘신’이 세계의 중심이자 우주의 창조를 상징한다면, 개벽학에서는 ‘개벽하는’ 곳이야말로 세계의 중심이자 성스러운 곳이고, 그런 젊은이들이 바로 ‘괴짜 청년’이자 ‘개벽의 일꾼’(김용옥)이 되는 셈이다.
개벽하는 청년들
‘개벽대학’과 유사한 개념으로, 최근에 역사학자 이병한은 필자에게 ‘개벽학당’을 열자는 제안을 하였다. 새해부터 청소년학습공간인 ‘하자센터’에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동학 강좌를 개설하자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11월에 처음으로 가본 하자센터는 필자에게는 대단한 충격이었다. 청년들이 공주우금치 전적지를 답사하고, 그곳에서 시천주 주문에 곡을 붙여 노래를 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주문을 미신시하거나 배척하는 태도는 찾아볼 수 없었고, 오히려 k-pop과 같은 새로운 장르로 진화되고 있었다.
‘하자센터’라는 말 그대로 주도적으로 뭔가를 ‘하고 있는’ 청년들이었다. 모든 변화는 학습공동체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하자센터’와 ‘개벽학당’은 새로운 인문학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학도 이렇게 새로운 인문학운동의 거점으로 거듭났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것이 개벽대학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대학의 모습이 아닐까?
오늘날 한국사회는 청년들이 가장 암울한 세대로 그려지고 있다. 노인문제도 청년문제 못지 않게 심각하지만, 인생에서 가장 활기찬 시기가 청년기이기 때문에 그 암울함이 더할 것이다. 그러나 사회 곳곳을 들여다보면, 로드스콜라에서 활동하는 ‘공공하는 청년’들처럼, 진취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젊은이들도 의외로 많은 것 같다. 문제는 이들의 젊음과 패기를 이끌어줄 체계적인 사상이 없다는 점이다. 종래의 공부형이나 설교형 ‘학’이 아닌, 시천주 주문을 k-pop으로 현대화할 수 있는 상상력을 극대화 줄 수 있는 현대적 ‘학’ 말이다. 개벽학이 그러한 역할을 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출전) 《개벽신문》 80호(2018.12월호)
[주석]
(1) “향촌 사회를 이끌었던 농촌 지식인이 동학의 주축을 이루었다. 18세기의 개명이 19세기의 서세동점으로 개화파의 서학과 개벽파의 동학으로 분화했던 것이다. 개화파가 유학의 타파와 조선의 전복을 꾀했다면, 고종은 절대왕정의 이데올로기로 유학을 왜곡시켰고, 개벽파는 유학의 민중화를 통한 조선의 갱신을 도모했다. 유학을 고집하는 척사파와 서학을 맹종하는 개화파 사이에서 ‘제3의 길’을 모색했던 것이다. ‘내재적 민주화’의 맹아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가지 못한 길’이다.” 이병한, 〈동학은 ‘농민 전쟁’ 아닌 ‘유학 혁명’이다! [동아시아를 묻다] 2014: 갑오년 역사 논쟁〉, 《프레시안》, 2014.01.20. 강조는 인용자의 것.
(2)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근대 한국 개벽종교를 공공하다, 모시는사람들, 2018.
(3) 2018년 12월 21일에 원광대학교에서 있었던 원불교사상연구원 월례발표회 휴식시간.
(4)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대들 가운데 누가 능히 끊임없이 읽을 수 있는 경전을 발견하였는가? 세상 사람들은 사서삼경(四書三經)이나 팔만 장경이나 기타 교회의 서적들만이 경전인 줄로 알고 현실로 나타나 있는 큰 경전은 알지 못하나니 어찌 답답한 일이 아니리요. 사람이 만일 참된 정신을 가지고 본다면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도 경전 아님이 없나니, 눈을 뜨면 곧 경전을 볼 것이요, 귀를 기울이면 곧 경전을 들을 것이요, 말을 하면 곧 경전을 읽을 것이요, 동하면 곧 경전을 활용하여 언제 어디서나 조금도 끊임없이 경전이 전개되나니라. 무릇 경전이라 하는 것은 일과 이치의 두 가지를 밝혀 놓은 것이니, …
일과 이치가 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전체가 곧 일과 이치 그것이니 우리 인생은 일과 이치 가운데에 나서 일과 이치 가운데에 살다가 일과 이치 가운데에 죽고 다시 일과 이치 가운데에 나는 것이므로 일과 이치는 인생이 여의지 못할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며 세상은 일과 이치를 그대로 펴 놓은 경전이라, … 그렇다면 이것이 산 경전이 아니고 무엇이리요. 그러므로 나는 그대들에게 많고 번거한 모든 경전을 읽기 전에 먼저 이 현실로 나타나 있는 큰 경전을 잘 읽도록 부탁하노라.” (대종경 제3 수행품(修行品)」 23장)
(5) 조성환, 「여산 류병덕의 ‘원불교실학론’」, 한국종교 44집, 2018.
청년과 개벽_개벽신문 80호(2019년 12월호).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