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해야 할 역사 시리즈 (4)
4월은 잔인한 달, 4월참변을 생각하며
사무국장 김종헌
4월입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제가 사는 남한산성에서 산길을 따라 내려오는 출근길마다 꽃잔치가 벌어진 것을 봅니다. 매년 새싹이 먼저 피고, 개나리, 진달래, 벚꽃 순서로 피던 꽃들이 올해는 한꺼번에 아우성입니다. 3월말까지 꽃샘추위가 만만찮아서인지 꽃소식이 없다가 4월의 따스한 봄 햇살이 터지자마자 키워왔던 생명들이 이때다 하고 울긋불긋 산과 들을 색칠을 하네요.
4월의 화려한 시절이 되면 왠지 모르게 떠오른 말이 있지요.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말이지요. 그 유래를 찾아 보았더니 T.S 엘리옷이란 영국시인의 ‘황무지’라는 시에서 기인했다고 합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기억과 욕망을 뒤섞으며,무딘 뿌리들을 봄비로 일깨우는.겨울은 우릴 포근히 해주었지,대지를 망각의 눈(雪)으로 덮어주며,한 작은 생명에 마른 감자를 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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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역설적이게도 새 생명을 키우는 4월을 비교하며 포근한 겨울을 기억합니다.
당시 시대의 배경인 1920년대라는 시대의 어려웠던 황무지 풍경의 한 자락을 비틀어 겨울을 뚫고 나가는 역동성에서도 겨울을 그리워하는 그 상황을 잔인하다고 했다고 생각됩니다. 4월하면 떠오르는 4.19혁명, 4.3 항쟁 등 4월에 유달리 근세사의 굴곡이 많았던 우리 상황이 오바랩되어 외국의 시임에도 우리 입에서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말을 입에 오르내리도록 하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4월하면 우리민족사에서 꼭 기억해야 할 역사가 하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일반 시민들은 거의 알지 못하는 비사에 가까운 사실인데 1920년에 러시아연해주에서 일본 군대가 한인촌을 습격하여 마을을 초토화시키고 300여명을 무차별 학살하고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여 처형시켰던 일입니다. 이 사건이 4월5일날 벌어졌는데 이를 ‘4월참변’이라고 부릅니다. 1919년 3.1운동 기점으로 일어난 수많은 독립운동단체는 임시정부를 세우고 무장투쟁을 준비하게 되는데 당시 연해주는 러시아의 내전으로 인하여 체첸군의 놓고 간 무기를 구입할 수 있는 무기 공급처역할을 하는 독립운동의 중심지 이었습니다. 또한 많은 연해주의 한인들은 볼셰비키와 함께 백군을 붕괴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일본군은 미국, 영국, 프랑스와 함께 1918년부터 러시아혁명을 붕괴시키기 위해 시베리아 출병(아래 참조) 감행하는데 7만 명의 군대를 보냈다고 합니다. 당연히 연해주에 주둔하면서 호시탐탐 독립운동세력을 어떻게 뿌리 뽑을까 노리고 있다가 1920년 4월의 학살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지요. 이때 러시아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재판도 없이 처형당하게 됩니다.
또한 4월참변은 한인독립운동세력에만 집중된 것 이 아니고 러시아 파르티잔과 민간인이 5000명 이상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연해주 우스리스크 근교에 4월참변 추모비를 세우고, 매년 우스리스크 고려인문화센터에서 4월참변 추모식을 거행하기도 한답니다.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4월참변은 그 해 10월의 훈춘사건(경신참변)과 함께 일제가 독립운동근거지를 직접 타격하기 위해 벌인 사건으로써 그 뒤 독립운동의 향방을 크게 좌우하는 사건이 됩니다.
우리는 사실 해외에서 일어난 독립전쟁의 역사를 잘 기억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때 넘어갔던 사람들이 어떻게 역사와 얽키고 섥여서 오늘에 이르렀는지 큰 관심이 없습니다. 그동안 이념과 대립에 가려있던 한국의 편협한 역사의식이 한 원인일수 있겠습니다. 바쁜 일상속에서 역사문제따위?에 신경을 쓸 수 있는 겨를이 없어졌는지도 모습니다. 재외동포에 대한 몰이해도 이런 이유가 한 몫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 역사의 한 마디 마디가 이여지고 연결되어 오늘의 역사를 이루어왔고 우리의 삶을 또한 규정할 것이라는 숨겨진 진실에 눈뜨지 않는다면 앞으로 만들어질 역사에서도 흐름에 맡겨진 채 비극의 역사를 반복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려져있고 감추어져 있어서 혹은 우리가 외면하고 있지만 “기억해야 할 역사”인 것을 찾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4월의 하늘은 이리도 시리게 맑고 따스한데 “겨울의 기억과 욕망”이 아직 4월을 잔인한 달로 남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며 다시 엘리옷의 황무지라는 난해한 시를 되뇌어 봅니다.
최재형선생의 추모식이 (4월10일 국회도서관 소강당 오후3시)에 있습니다. 많은 참석바랍니다.
<네이버지식백과> 시베리아 출병 : 러시아 혁명의 간섭전쟁. 1918년 3월 소비에트 정권이 독일과 단독강화를 체결하자 7월, 미·일·영·불 4개국은 체코군 포로구원을 명목으로 총병력 2만 8천(일본 1만 2천)을 파병하기로 협정을 체결, 출병을 단행했다. 일본은 협정을 무시하고 3개월 후에는 7만 3천 병력을 보내 동부 시베리아 요지를 점령했다. 4국연합군은 반혁명 세력을 지원했으나, 주민들의 빨치산 투쟁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19년 가을 반혁명 코르차크 정권이 적군에 패배함으로써 간섭전쟁의 실패가 명확해지자 20년 6월까지 미·영·불 3국은 철군했다. 그러나 일본만은, 계속 병력을 철수하지 않고 있다가 20년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이 일어나자 그 보상에 대한 보장으로 북사할린을 점령했다.그러나 소비에트 정권과 인민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친데다 열강의 의혹과 국내의 반대여론이 고조됨에 따라 22년 10월 시베리아에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25년 일·소 국교회복과 동시에 북사할린에서도 철군했다. 전비 10억 엔, 전사자 3천, 동사자 무수라는 막대한 희생을 낸 출병이었지만 얻은 것 하나 없이 내외의 엄한 비난에 직면했으며, 침략전에 나선 이래 일본 최초의 패배를 기록한 것이 되었다.
4월참변,
4.3항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