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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도시 원문보기 글쓴이: 데미
정일근 시인 소개
바다가 보이는 교실 10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서
그대에게 자운영 꽃반지를
내 귓속의 물고기 한 마리
아름다움에 대하여
무제치늪의 봄
봄, 엄나무 가시 사이 부풀어 오르는
아득함을 위하여
길
그대 내 손금이 될 때까지
사월에 걸려온 전화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사랑, 붉은
신문지 밥상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
어머니의 그륵
사는 맛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
둥근 길
오른손잡이의 슬픔
불혹의 사랑
그리운 곳으로 돌아보라
깨끗한 슬픔
나에게 사랑이란
저기,상봉서동
가을의 일
어머니의 못
평화平和에 대하여
마음의 늑대 -경주 남산
마디, 푸른 한 마디
하회河回에서 안다
누구십니까
쑥부쟁이 사랑
연가
푸른 자전거
겨울 동강 -사랑
편지
가을전어
가을 부근
목욕을 하며
주머니 속의 바다
붉은 우체통이 목련꽃을 피운다
가을 억새
외등 -다연茶淵에게
영덕에는 영덕대게가 없다
진보에서의 생각
사랑론論
새벽
사랑의 눈병
감은사지.1
사랑의 약속
서쪽나라 국경의 숲에서
얼음
단청, 차갑고 혹은 뜨거운
뜨거움
그리운 저녁
우룸치에서의 사랑
옛집 진해
불혹不惑의 사랑
겨울산
나무, 즐거운 전화
어머니 날 낳으시고
서리꽃
가을 전어를 살리다
종
별사別辭 -경주 남산 ·37
마디, 푸른 한 마디
겨울 새벽에
11월
갇힌 소가 우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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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 시인 소개
출생
1958년 7월 28일
출신지
경상남도 양산
직업
시인
학력
경남대학교
데뷔
1984년 실천문학에 시 '야학일기'
경력
2004년 시힘 동인, 문화공간 다운재 운영
2001년 중학교 1학년 2학기 국어교과서 시 '바다가 보이는 교실' 수록
수상
2003년 제18회 소월시문학상 대상
2001년 시와 시학상 젊은시인상 대표작 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 바다가 보이는 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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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보이는 교실 10
참 맑아라
겨우 제 이름밖에 쓸 줄 모르는
열이, 열이가 착하게 닦아놓은
유리창 한장
먼 해안선과 다정한 형제섬
그냥 그대로 눈이 시린
가을 바다 한 장
열이의 착한 마음으로 그려놓은
아아, 참으로 맑은 세상 저기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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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무량수전 앞에서
어디 한량없는 목숨이 있나요
저는 그런 것 바라지 않아요
이승에서의 잠시 잠깐도 좋은 거예요
사라지니 아름다운 거예요
꽃도 피었다 지니 아름다운 것이지요
사시사철 피어있는 꽃이라면
누가 눈길 한 번 주겠어요
사람도 사라지니 아름다운 게지요
무량수를 산다면
이 사랑도 지겨운 일이어요
무량수전의 눈으로 본다면
사람의 평생이란 눈 깜빡할 사이에 피었다 지는
꽃이어요, 우리도 무량수전 앞에 피었다 지는
꽃이어요, 반짝하다 지는 초저녁별이어요
그래서 사람이 아름다운 게지요
사라지는 것들의 사랑이니
사람의 사랑은 더욱 아름다운 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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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 자운영 꽃반지를
그대 잠든 새벽길 걸어
자운영 꽃을 보러 갔습니다.
은현리 새벽길
아직 꽃들도 잠깨지 않은 시간
입 꼭 다문 봄꽃들을 지나
자운영 꽃을 보러 갔습니다.
풀들은 이슬을 달고 빛나고
이슬 속에는 새벽이 빛났습니다.
붉은 해가 은현리를 밝히는 아침에
그대에게 꽃반지를 선물하고 싶었습니다.
자운영 붉은 꽃반지를 선물하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처음 사랑의 맹세를 했던
그 시간으로 돌아가
그대 앞에 가슴 뛰는 소년이 되어
그대 고운 손가락에
자운영 꽃반지를 묶어주며
다시 사랑을 약속하고 싶었습니다.
내게 자운영 꽃처럼 아름다운 그대
늘 젖어있어 미안한 그대 손등에
내 생애 가장 뜨거운 입을 맞추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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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귓속의 물고기 한 마리
젊은 의사는 내 귀의 이명현상을 일시적인 난청으로 진단했다
나는 의사에게 지난 주말 만어사(萬魚寺)를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일만 마리의 물고기들이 돌로 변했다는 만어산 만어사를 다녀온 후
내 귓속에 숨어 따라온 작은 물고기 한 마리
나를 괴롭히는 귀울음 현상의 주범인지 묻지 못했다
만어사 돌 속의 물고기들이 내는 금종소리 은종소리 듣다가
산수유 노란 꽃그늘에 누워 낮잠이 들었는데, 그 때 나는
분명히 내 귓속으로 숨어드는 물고기 한 마리를 보았다
만어사 너덜 아래 숨은 푸른 바다 물고기 한 마리
내 귓속 달팽이관 안에 헤엄치며 놀고 있다는 것을
의사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절 집 풍경(風磬)처럼 소리 내는 물고기를 믿지 못할 것이다
신라 사람 경문왕의 당나귀 귀를 본 복두쟁이의 마음처럼
말할 수 없는 비밀의 고통이 신화를 만든다
만어산에는 소금내음 풍기며 바다가 출렁거리고
물고기들이 만드는 종소리가 그 바다에서 빛나
그 중 한 마리가 내 귓속으로 들어와 일으키는 시인의 이명을
간단한 처방전을 쓴 후 이내 다음 환자를 호명하는
젊은 의사는, 그 비밀 고백한다 해도 알지 못할 것이다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 / 문학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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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에 대하여
영원한 것은 아름답다고 믿은 적이 있었다
영원히 살기를 바랐던 날도 있었다
그러나 삶이 나에게 가르쳤다
아름다운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내게 아름다운 것은 순간이었다
언제나 지나가면 사라지는 헛것이었다
하늘 깊이 반짝이는 새벽별이나
붉게 타오르는 저녁놀
풀잎 끝에 매달린 맑은 이슬 같은
내가 진정 아름다워하는 것들은
영원한 것은 아니었다
오래 기다렸던 첫눈도
눈이 피우는 나무의 눈꽃들도
결국 녹아버리고 마는 흔적이었다
사람의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첫사랑 첫키스 같은 가슴 떨림도
흑백사진으로 남는 추억이었다
그때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가 한 약속도
헛것이 되고 말았다
내가 영원히 사랑한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영원한 것은 헛것이다
백 년 동안 색깔이 변하지 않는다는
백 년 사진 속에 남은 젊은 내 모습도 헛것이다
영원히!, 를 외치며 높이 쳐든
세상의 술잔도 술이 깨면 헛것이다
무릇 아름다운 것은 변한다
은현리 들판도 겨울 봄 여름 가을이 있어 아름답다
우리 집 마당의 겨울나무도
잎 피우고 꽃 피울 봄을 기다리고 있어 아름답다
지금 시드는 아름다운 꽃이여
꽃이 시들지 않고 영원하다면
나는 너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을 것이다
아름다운 것은 변하는 것들에 깃든다
생로병사가 있어 사람도 아름다울 수 있으니
변하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살아온 시간만큼 내가 늙어가는 것도 아름다움이려니
흰 머리카락 늘어가는 아내여
나의 아름다움이여
삶이 나에게 가르쳤다
아름다운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은 헛것일 뿐이라고
변하는 것은 아름답다고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 / 문학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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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치늪의 봄
마음을 얻어야 손이 순응하는 법이다
기다릴 줄 아는 마음을 위해 봄은 오고
바라볼 줄 아는 손을 위해 꽃은 핀다
물이 만든 물의 나라 무제치(舞祭峙)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도 물이니
물은 다투지 않고 평등하게 스며들고
겸허하여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꽃을 기다려 삼월 봄이 오고
봄을 기다려 사월 꽃이 피는
그 착한 물들이 빚어내는 빛나는 봄
오랜 마음의 친구가 내미는 손처럼
그 따뜻한 손 꽉 잡아보고 싶은
무제치늪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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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엄나무 가시 사이 부풀어 오르는
화려하게 꽃 피우는 것만이
봄을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온몸에 가시 달고 섰는 엄나무
은현리 엄나무도 봄을 기다린다
잘린 가지 끝이나 가시와 가시 사이
거칠고 좁은 황무지 같은 살결에
동상 입은 듯 스스로 붉은 상처 내며
엄나무는 진실로 봄을 기다린다
예쁜 봄꽃들 꽃 피우고 새잎 내밀 때
엄나무 제 아픈 상처 찢고
착하고 푸른 새순 밀어 올릴 것이다
향기로운 꽃은 독이 될 수 있지만
가시 가진 것들이 피우는 어린순은
생명을 살리는 약이 된다 했느니
엄나무 가시 사이 부풀어 오르는 봄처럼
가장 엄격한 자세로 겨울을 견딘 것들에게
가장 뜨거운 봄은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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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함을 위하여
멀다고 느끼는 그 순간 그만큼
우리는 가까워지고 있음이로다
유리창 밖 미루나무 잎새를 흔들며
그냥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나
손을 내밀면 이내 부서지는 아침 햇살,
그 아득함의 거리 속에서도 우리는 지금
바람이며 햇살과 만나고 있지 않은가
사랑이여, 섬이나 별이 도 그렇게 멀면 어떠랴
우리 그리움의 눈물 한 방울 속에
섬인들 가두어 흐르게 할 수 없으랴
무량의 별빛인들 퍼 담을 수 없으랴
무릎에 얼굴 묻고 마디잠을 자는 날의 사랑이여
아득한, 아아득한 그리움의 날들이면 어떠랴
하루 지나면 또 하루
우리는 그만큼 더 가까워지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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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마음이 길을 만드네
그리움의 마음 없다면
누가 길을 만들고
그 길 지도 위에 새겨 놓으리
보름달 뜨는 저녁
마음의 눈도 함께 떠
경주 남산 냉골 암봉 바윗길 따라
돌 속에 숨은 내 사랑 찾아가노라면
산이 사람들에게 풀어 놓은 실타래 같은 길은
달빛 아니라도 환한 길
눈을 감고서도 찾아갈 수 있는 길
사랑아, 너는 어디에 숨어 나를 부르는지
마음이 앞서서 길을 만드네
그 길 따라 내가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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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내 손금이 될 때까지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꽃이 피었다 지는 슬픔보다도
나무들이 바람에 우는 아픔보다도
슬프고 아픈 일이지만
사랑하며 기다리는 것이
기다리며 눈물 훔치는 것이
내 사랑의 전부라 할지라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인지라
흐르는 눈물 손가락에 찍어
빈 손바닥 빼곡하게
뜨거운 그대 이름 적어 보느니
내 손금에 그대 이름 새겨질 때까지
그대 내 손금이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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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에 걸려온 전화
사춘기 시절 등교길에서 만나 서로 얼굴 붉히던 고 계집애
예년에 비해 일찍 벚꽃이 피었다고 전화를 했습니다.
일찍 핀 벚꽃처럼 저도 일찍 혼자가 되어
우리가 좋아했던 나이쯤 되는 아들아이와 살고 있는,
아내 앞에서도 내 팔짱을 끼며, 우리는 친구지
사랑은 없고 우정만 남은 친구지, 깔깔 웃던 여자 친구가
꽃이 좋으니 한 번 다녀가라고 전화를 했습니다.
한때의 화끈거리던 낯붉힘도 말갛게 지워지고
첫사랑의 두근거리던 시간도 사라지고
그녀나 나나 같은 세상을 살고 있다 생각했는데
우리 생에 사월 꽃잔치 몇 번이나 남았을까 헤아려보다
자꾸만 눈물이 났습니다.
그 눈물 감추려고 괜히 바쁘다며
꽃은 질 때가 아름다우니 그때 가겠다, 말했지만
친구는 너 울지, 너 울지 하면서 놀리다 저도 울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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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먼 바다로 나가 하루 종일
고래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사람의 사랑이 한 마리 고래라는 것을
망망대해에서 검은 일 획 그으며
반짝 나타났다 빠르게 사라지는 고래는
첫사랑처럼 환호하며 찾아왔다
이뤄지지 못할 사랑처럼 아프게 사라진다
생의 엔진을 모두 끄고
흔들리는 파도 따라 함게 흔들리며
뜨거운 햇살 뜨거운 바다 위에서
떠나간 고래를 다시 기다리는 일은
그 긴 골목길 마지막 외등
한 발자국 물러난 캄캄한 어둠 속에 서서
너를 기다렸던 일
그때 나는 얼마나 너를 열망했던가
온몸이 귀가 되어 너의 구둣발 소리 기다렸듯
팽팽한 수평선 걸어 내게로 돌아올
그 소리 다시 기다리는 일인지 모른다
오늘도 고래는 돌아오지 않았다
바다에서부터 푸른 어둠이 내리고
떠나온 점등인의 별로 돌아가며
이제 떠나간 것은 기다리지 않기로 한다
지금 고래가 배의 꼬리를 따라올지라도
네가 울며 내 이름 부르며 따라올지라도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겠다
사람의 서러운 사랑 바다로 가
한 마리 고래가 되었기에
고래는 기다리는 사람의 사랑 아니라
놓아주어야 하는 바다의 사랑이기에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 문학과지성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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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붉은
흔현리 들길 걸어가다
가을소풍 마치고 하늘로 돌아간
고추잠자리 한 마리 보았다
또 한 마리의 고추잠자리
오래 그 주검 곁을 지키며
날고 있는 것도 보았다
저 미물들도 저렇게 붉게
사랑했나 보다
제 몸과 색깔 다 벗고
모두 돌아가는 이 늦가을까지.
남부詩 / 책펴냄열린시,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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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지 밥상
더러 신문지 깔고 밥 먹을 때가 있는데요
어머니, 우리 어머니 꼭 밥상 펴라 말씀하시는데요
저는 신문지가 무슨 밥상이냐며 궁시렁 궁시렁하는데요
신문질 신문지로 깔면 신문지 깔고 밥 먹고요
신문질 밥상으로 펴면 밥상 차려 밥 먹는다고요
따뜻한 말은 사람을 따뜻하게 하고요
따뜻한 마음은 세상까지 따뜻하게 한다고요
어머니 또 한 말씀 가르쳐 주시는데요
해방 후 소학교 2학년이 최종학력이신
어머니, 우리 어머니의 말씀 철학
착하게 낡은 것의 영혼 / 시학,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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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
솥발산 산자락에 살면서부터
마당에 놓아둔 나무 책상에 앉아
시(詩)를 쓴다, 공책을 펼쳐놓고
몽당연필로 시를 쓴다
옛 동료들이 직장에서 일할 시간
나는 산골 마당이 새 직장이고
시가 유일한 직업이다
월급도 나오지 않고
의료보험 혜택도 없지만
나는 이 직장이 천직(天職)인 양 즐겁다
나의 새로운 직장 동료들은 꽃들과 바람과
구름, 내가 중얼거리는 시를
풀꽃이 키를 세우고 엿듣고 있다
점심시간,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우면
바람이 공책을 몰래 넘기고
구름이 내 시를 훔쳐 읽고 달아난다
내일이면 그 들은 더 멋진 시 보여주며
나에게 약을 올릴 것이다
이 직장에서 꼴찌가 되지 않기 위해
나는 열심히 마당으로 출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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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그륵
어머니는 그륵이라 쓰고 읽으신다
그륵이 아니라 그릇이 바른 말이지만
어머니에게 그릇은 그륵이다
물을 담아 오신 어머니의 그륵을 앞에 두고
그륵, 그륵 중얼거려 보면
그륵에 담긴 물이 편안한 수평을 ?고
어머니의 그륵에 담겨졌던 모든 것들이
사람의 체온처럼 따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학교에서 그릇이라 배웠지만
어머니는 인생을 통해 그륵이라 배웠다
그래서 내가 담는 한 그릇의 물과
어머니가 담는 한 그륵의 물은 다르다
말 하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말과 하나가 되는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어머니는 어머니의 삶을 통해 말을 만드셨고
나는 사전을 통해 쉽게 말을 찾았다
무릇 시인이라면 하찮은 것들의 이름이라도
뜨겁게 살아 있도록 불러주어야 하는데
두툼한 개정판 국어사전을 자랑처럼 옆에 두고
서정시를 쓰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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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맛
당신은 복어를 먹는다고 말하지만
그건 복어가 아니다, 독이 빠진
복어는 무장 해제된 생선일 뿐이다
일본에서는 독이 든 복어를 파는
요릿집이 있다고 한다,조금씩
조금씩 독의 맛을 들이다 고수가 되면
치사량의 독을 맛으로 먹는다고 한다
그 고수가 먹는 것은 진짜 복어다
맛이란 전부를 먹는 일이다
사는 맛도 독 든 복어를 먹는 일이다
기다림, 슬픔, 절망, 고통, 고독의 독 맛
그 하나라도 독으로 먹어 보지 않았다면
당신의 사는 맛은
독이 빠진 복어를 먹고 있을 뿐이다.
착하게 낡은 것의 영혼 / 시학.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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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
모난 밥상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두레판이 그립다.
고향 하늘에 떠오르는 한가위 보름달처럼
달이 뜨면 피어나는 달맞이꽃처럼
어머니의 두레판은 어머니가 피우시는 사랑의 꽃밭.
내 꽃밭에 앉는 사람 누군들 귀하지 않겠느냐,
식구들 모이는 날이면 어머니가 펼치시던 두레판.
둥글게 둥글게 제비새끼처럼 앉아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밥숟가락 높이 들고
골고루 나눠주시는 고기반찬 착하게 받아먹고 싶다.
세상의 밥상은 이전투구의 아수라장
한 끼 밥을 차지하기 위해
혹은 그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이미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짐승으로 변해버렸다.
밥상에서 밀리면 벼랑으로 밀리는 정글의 법칙 속에서
나는 오랫동안 하이에나처럼 떠돌았다.
짐승처럼 섞은 고기를 먹기도 하고, 내가 살기 위해
남의 밥상을 엎어버렸을 때도 있었다.
이제는 돌아가 어머니의 둥근 두레판에 앉고 싶다.
어머니에게 두레는 모두를 귀히 여기는 사랑
귀히 여기는 것이 진정한 나눔이라 가르치는
어머니의 두레판에 지지배배 즐거운 제비새끼로 앉아
어머니의 사랑 두레먹고 싶다.
제18회 소월시문학상 대상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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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근 길
나무는 자신의 몸속에 둥근 나이를 숨기고 산다
나이테가 둥근 것은 시간이 둥글기 때문이다
시간이 둥근 것은 사람 사는 세상이 둥글기 때문이다
사람의 인연이란 직선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둥글게 둥글게 돌아가는 둥근 길이다
둥글게 걷다보면 어디선가 우리는 만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하늘이 엄지손가락에 나무의 나이테 같은
우리가 걸어갈 그 길을 숨겨 놓은 것이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 2005년 11~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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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손잡이의 슬픔
오른손 아프고부터 왼손 있다는 사실 알았다
나는 오른손 왼손 평등하게 가지고 태어났으나
태어나면서 나는 오른손에 힘주며 세상을 잡았다
나는 오른손으로 숟가락을 잡았고
오른손으로 연필 쥐고 공책에 글 썼다
오른손으로 악수 하고 주먹 날리고
오른손 새끼손가락 내밀어 사랑을 약속했다
우주의 무게 중심이 오른쪽이라 믿었으니, 전지자도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도록 하라 가르쳤으니
왼손은 오른손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으나
왼손은 오른손에서 가장 멀리 잊혀져 있었다
오른손 아프고부터 왼손으로 세상을 잡아 본다
왼손으로는 지푸라기 하나 쉽게 잡히지 않는다
자꾸만 놓치고 마는 왼손의 미숙 앞에
오른손의 편애로 살아온 온몸이 끙끙거린다
오른손잡이도 왼손잡이도 절반을 잃고 사는 것이다
오른손잡이도 왼손잡이도 슬픈 사람인 것이다
손은 둘이 하나다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이
두 손을 모아야 기도가 되듯이
오른손잡이의 슬픔 / 고요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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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혹의 사랑
마음속에 누군가를 담고 살아가는 것이
사랑인 줄 알았다
사랑이기에 젊은 날엔
그대로 하여 마음이 아픈 것도
사랑의 아픔으로만 알았다
이제 그대를 마음속에서 떠나보낸다
멀리 흘러가는 강물에 아득히 부는 바람에
그대를 놓아 보내며
마음에 빈자리를 만들어 놓는다
비워진 사랑의 자리를 보며
나는 비로소 사랑을 안다
사랑이란 누군가를 마음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비워 놓고 기다리는 일
그 빈자리로 찾아올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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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곳으로 돌아보라
그리운 곳에는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있네
헐벗은 영혼도 귀의할 안식이 있듯
상처 뿐인 삶들도 돌아가 잠들 그리운 집은
천상의 사랑은 이미 빗장을 풀고 달아나버려
보리밭 위로 부는 바람에도 나는 어찌할 수 없네
어제는 들판에서 잠자고 오늘은 길 위에서 눈뜨는
노숙의 세월인들 꿈이 없으랴
나는 대상에서 떨어져 나온 외로운 쌍봉낙타
취하지 않고서는 건널 수 없는 도시의 불사막을
지글거리는 고통의 맨 발로 걸어가네
또 그렇게 가다보면 세상의 마지막 저녁과
두고온 고향의 바닷별과 조우하려니
입 안에 풍화하는 모래가 씹히고
모래언덕 위로 붉은 달이 떠오를 때
볕에다 귀를 가져다 대면 들리네
혀속에서 잉잉거리는 세상의 첫소리와
첫사랑한 현옹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리네
착한 눈동자 선한 귀로 그리운 곳으로 돌아보게
그리운 곳에는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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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한 슬픔
작은 마당 하나 가질 수 있다면
키 작은 목련 한 그루 심고 싶네
그리운 사월 목련이 등불 켜는 밤이 오면
그 등불 아래서 그 시인의 시 읽고 싶네
꽃 피고 지는 슬픔에도 눈물 흘리고 싶네
이 세상 가장 깨끗한 슬픔에 등불 켜고 싶은 봄밤
내 혼에 등불 밝히고 싶은 봄밤
첫사랑을 덮다 / 좋은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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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사랑이란
마음속에 누군가를 담고 살아가는 것이
사랑인 줄 알았습니다, 사랑하기에
젊은 날엔 그대로 하여 마음 아픈 것도
사랑의 아픔으로만 알았습니다
이제 그대를 내 마음속에서 떠나보냅니다
멀리 흘러가는 강물에 아득히 부는 바람에
잘 가라 사랑아, 내 마음속의 그대를 놓아 보냅니다
불혹, 마음에 빈자리 하나 만들어놓고서야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나이가 되었나 봅니다
사랑이란 누군가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비워놓고 기다리는 일이어서
그 빈자리로 찾아올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어서
사람을 기다리는 일이 사랑이라는 것을
이제서야 나도 알게 되었나 봅니다
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 / 시와시학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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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상봉서동
상봉서동 가는 길이 어디인가 묻자
숨이 살아 있는 생김치 구석구석
양념 버무리는 일에 열중인 백반집 주인은
저기,라고 무심히 말하네
백반집 주인이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저기가
나에게는 머네 아득히 머네
저기,내 서른의 세월이 모두 눈감은 채 웅크리고 있는
저기,그 시간이 다시 감겨야 가 닿을 수 있는
상봉서동 있으니
저기,눈감지 않고서는 떠올릴 수 없는
저기,꿈길 아니고는 가 닿을 수 없는
사랑의 이름 있으니
붉은 고춧가루 매운 마늘 짠 멸치젓 버무린
생김치 양념 같은 세월에
그리운 혀를 묻고 저기,상봉서동 아프게 중얼거려보면
김이 나는 더운밥도 서늘해지는 입 안
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 / 시와시학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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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일
풀잎 등에 맺히는 이슬 한 방울이 무거워진다
그 무게에 풀들은 땅으로 휘어지며 겸허해지고
땅은 씨앗들을 받아 품으며 그윽하게 깊어진다
뜨거웠던 황도(黃道)의 길도 서서히 식어가고
지구가 만든 그림자 속으로 달이 들어와 지워지듯
가을 속으로 걸어가면 세상살이 욕심도 무채색이 된다
어두워지기 전에 아궁이를 달구어놓아야겠고
가을별들 제자리 찾아와 착하게 앉았는지
헤아려보는 것이 나의 일, 밤이 오면
나는 시(詩)를 읽으며 조금씩 조금씩 쓸쓸해질 것이니
시(詩)를 읽는 소리 우주의 음률을 만드는 시간
가벼워지기 위해 나는 이슬처럼 무거워질 것이니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 / 문학사상사. 20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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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못
교회에 다니는 작은 이모는
예수가 사람의 죄를 대신해
못 박혀 죽었다는 그 대목에서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흐느낀다
어머니에게 전도하러 왔다가
언니는 사람들을 위해
못 박혀 죽을 수 있나, 며
함께 교회에 나가 회개하자, 며
어머니의 못 박힌 손을 잡는다
어머니가 못 박혀 살고 있는지
작은 이모는 아직 모른다
시를 쓴다며 벌써 여러 해
직장도 없이 놀고 있는 나는
어머니의 가슴에 박힌 작은 못이며
툭하면 머리가 아파 자리에 눕는 나는
어머니의 가슴에 박힌 큰 못이다
그렇다, 어머니의 마음 속에
나는 삐뚤어진 마루판 한 짝이어서
그 마루판 반듯하게 만들려고
삐걱 소리나지 않게 하려고
어머니는 스스로 못을 치셨다
그 못들 어머니에게 박혀 있으니
칠순 가까운 나이에도 식당일 하시는
어머니의 손에도 그 못 박혀 있고
시작 바닥으로 하루 종일 종종걸음치는
어머니의 발바닥에도 그 못 박혀 있다
못 박혀 골고다 언덕 오르는 예수처럼
어머니 못 박혀 살고 있다
평생을 자식이라는 못에 박혀
우리 어머니 피 흘리며 살고 있다
시인세계 2004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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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平和에 대하여
..풀어 말하자면 세상이 잔잔한 수면처럼 고르고 평평하여 수확한
벼를 여럿이 나눠 먹는 일이 평화다. 그래서 전쟁을 겪어본 사람만이
벼와 밥이 평화라는 것을 안다. 심각한 얼굴로 승용차를 타고 바삐 달
려가는 도시 사람에게 세상은 아직 전쟁 중이고, 올해도 황금 풍년이
찾아온 은현리 들판은 여전히 태평성대다. 농부 한 사람 느릿느릿 논
두렁길을 걸어가며 활짝 웃는다. 그 얼굴이 평화다
현대시 2005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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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늑대
-경주 남산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 깊숙한 곳에
늑대 한 마리 감추고 사는갑다
경주시 내남면쯤에서 둥그런 보름달 굴리며
금오산 찾아가노라면
달빛 받으면 사랑이 되고
별빛 밟으면 詩가 되는
그런 사랑 노래 들을 수 있는 귀 하나 달고
얼굴 없는 돌부처에서도
따뜻한 웃음 볼 수 있는 눈 하나 달고
마애불들 오른 손 위로 보름달 떠올라
그 왼손 위로 산 그림자 남기며 사라질 때까지
우우 울부짖으며 되살아나는
마음속의 늑대 한 마리
경주 남산 / 문학동네.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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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디, 푸른 한 마디
피릴 만들기 위해 대나무 전부가 필요한 건 아니다
노래가 되기 위해 대나무 마디마디 다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가장 아름다운 소린 마디 푸른 한 마디면 족하다
내가 당신에게 드리는 사랑의 고백도 마찬가지다
당신을 눈부처로 모신 내 두 눈 보면 알 것이다
고백하기에 두 눈도 바다처럼 넘치는 문장이다
눈물샘에 비치는 한 방울 눈물만 봐도 다 알 것이다
웹진 시인광장 / 2007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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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河回에서 안다
운명은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을
몸이 먼저 알아버렸기 때문일까,
아니면 忠孝堂충효당 가는 길의 밤꽃 내음 때문일까
河回에서 안고 말았다, 내 품에 안긴 세계는
운명 앞에서 침묵하고 있었다
그 때 내 몸에는 들끓는 熱望열망과 같은
비릿한 밤꽃 내음이 코끝을 스쳐 지나갔지만
나는 호흡하지 않았다, 이 순간 한 호흡을 놓쳐버리면
우리는 宇宙우주의 이편과 저편으로 나눠질 수 있는 것이다
내게 사랑이란 한 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호흡한다는 것이다, 들숨과 날숨 고르게 쉬면서
이 밤 함께 흘러가는 것이다
河回, 수태극의 물길이 불혹의 내 손금에
새로 새겨지는 밤이었다
현대시 / 2000. 11.
백년 후에 읽고 싶은 백편의 시 / 시와시학사 .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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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십니까
하늘에도 흘러가는 물의 길은 있나 봅니다. 백로白露 아침,
누군가의 손길이 그 길에서 가장 맑은 물을 길어 풀잎 위로
작은 이슬방울들을 둥글게 빚어놓았습니다.
이슬이 맺히자 처서處暑 지난 산과 들판이 한 점 남김없이
들어가 가을의 때를 기다리고, 생각으로 무거워지는 휘추리
를 흔들고 가는 사유思惟의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천천히 가을 쪽으로 세상을 굴리며 가는 사계四季의 시계추
時計錘 소리, 제 몸의 푸른빛을 사위며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향하여 걸어가는 나무들의 발자국 소리도 함께 들려왔습니다.
누구십니까, 백로 아침에 풀잎마다 해맑은 눈빛을 달아 우
리를 환히 바라보시는 분은. 후, 하고 불면 이내 부서질 것 같
은 작은 눈망울 안으로 한없이 넓고 깊은 눈동자를 담아 보내
주시는 분은.
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 / 시와시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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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부쟁이 사랑
사랑하면 보인다. 다 보인다
가을 들어 쑥부쟁이꽃과 처음 인사했을 때
드문드문 보이던 보라빛 꽃들이
가을 내내 반가운 눈길 맞추다 보니
은현리 들길 산길에도 쑥부쟁이가 지천이다
이름 몰랐을 때 보이지도 않던 쑥부쟁이꽃이
발길 옮길 때마다 눈 속으로 찾아와 인사를 한다
이름을 알면 보이고 이름을 부르다 보면 사랑하느니
사랑하는 눈길 감추지 않고 바라보면
꽃잎 낱낱이 셀 수 있을 것처럼 뜨겁게 선명해진다
어디에 꼭꼭 숨어 피어 있어도 너를 찾아가지 못하랴
사랑하면 보인다, 숨어 있어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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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가
허락하신다면, 사랑이여
그대 곁에 첨성대로 서고 싶네, 입 없고 귀 없는 화강암
첨성대로 서서 아스라한 하늘 먼 별의 일까지 목측으로 환
히 살폈던 신라 사람의 형형한 눈빛 하나만 살아, 하루 스
물네 시간을, 일 년 삼백예순닷새를 그대만 바라보고 싶
네
사랑이란 그리운 사람의 눈 속으로 뜨는 별
이 세상 모든 사랑은 밤하늘의 별이 되어 저마다의 눈물
로 반짝이고, 선덕여왕을 사랑한 지귀의 순금 팔찌와 아사
달을 그리워한 아사녀의 잃어버린 그림자가 서라벌의 밤하
늘에 아름다운 별로 떠오르네, 사랑아 경주 남산 돌 속
에 숨은 사랑아, 우리 사랑의 작은 별도 하늘 한 귀퉁이
정으로 새겨
나는 그 별을 지키는 첨성대가 되고 싶네
밤이 오면 한 단 한 단 몸을 쌓아 하늘로 올라가 그대 고
운 눈 곁에 누운 초승달로 떠 있다가, 새벽이 오면 한 단
한 단 몸을 풀고 땅으로 내려와 그대 아픈 맨발을 씻어 주
는 맑은 이슬이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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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자전거
잠시 비켜 서주시겠습니까, 시간은 언제나 저물무렵에서
시작되고 저기 푸른 동그라미를 가진 자전거 한 대
저녁을 향해 천천히 굴러가고 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찾아가는 그 집에는 아직도 더운 茶(차) 한 잔과
읽다만 가을 詩篇(시편)들, 펼쳐진 사랑의 페이지,
납작납작 흘러나오는 낮은 속삭임의 口音(구음)도
바람이 되어 굴러갑니다.
들리시는지요, 저물어 돌아오던 길, 그 길 위에 바람,
그 바람이 흔들던 나무들의 부드러운 손바닥,
그 나무에 기대어 부르던 푸른 휘파람 소리.
아, 聖堂(성당)의 저녁 미사 종소리 따라 마을의
작은 窓(창)들이 저마다 착한 등불의 심지를
돋울 때, 언제나 놀이 쏠리어간 쓸쓸함 쪽으로
더욱 쓸쓸히 등이 굽어지는 저 사람은 누구입니까.
...돌아보면 푸른 자전거, 저녁 안개 속으로 새떼들은
먼 숲으로 돌아가 둥지에 들고, 추억의 휜 등을 펴고
잠들고 싶은 지상의 작은 밤 더운 이부자리를 찾아,
어둔 밤 스스로 불을 켜고 찾아오는 그리운 點燈(점등)
별을 향해, 짤랑짤랑 굴러가는 저기 저 푸른 자전거.
1999.현대시학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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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동강
- 사랑
동강은 겨울이 오면 청동거울이 된다.
하늘이 비취의 물을 얼려
자신의 근엄을 비추어 보려 만들어 놓은 지상의 거울이.
하늘이 잠든 밤 어린 별 하나 깨어 제 모습 보려다
거울 뒤에서 손짓하는 연애각시와의 사랑에 빠졌다.
아침이면 제 성좌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푸른 첫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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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 지
1
조선낫으로 내 그리움을 다스릴 수 있다면 유월의 잡풀
목대궁 싹둑싹둑 잘라 버리듯이 이 막막한 사랑의 갈증 모
두 베어 버리겠네 사람아 나는 아직도 첫눈에 가늠하지 못
하는 바다의 이수里數처럼 아득한 그리움의 거리 속에 서 있
나니 눈멀고 귀먹은 날에 사람아 먼 나의 사람아
2
바람이 부는 날의 저물 무렵에는 바람이 되어 그대에게
로 가겠다 그대는 유배지에서 바라보는 그리운 내륙의 먼
불빛이거나 그 마을의 아궁이에서 뜨겁게 타오르는 장작불
이다 다시 그 마을로 가기 위해 나는 바람이고 싶다 그대에
게로만 부는 더운 바람이고 싶다
첫사랑을 덮다 / 좋은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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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전어 / 정일근
시인이여, 저무는 가을 바다로 가서 듬뿍 썰어달라 하자
잔뼈를 넣어 듬성듬성한 크기로 썰어달라 하자
바다는 떼지어 헤엄치는 전어들로 하여 푸른 은빛으로 빛나고
그 바다를 그냥 떠와서 풀어놓으면 푸드득거리는 은빛 전어들
뼛속까지 스며드는 가을을 어찌하지 못해 속살 불그스레 익어
제 몸 가득 서 말의 깨를 담고 찾아올 것이니
조선 콩 된장에 푹 찍어 가을 바다를 즐기자
제철을 아는 것들만이 아름다운 맛이 되고 약이 되느니
가을 햇살에 뭍에서는 대추가 달게 익어 약이 되고
바다에서는 전어가 고소하게 익어 맛이 된다
사람의 몸에서도 가을은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법이니
그 빈자리에 가을 전어의 탄력 있는 속살을 채우자
맑은 소주 몇 잔으로 우리의 저녁은 도도해질 수 있으니
밤이 깊어지면 연탄 피워 석쇠 발갛게 달구어 전어를 굽자
생소금 뿌리며 구수한 가을 바다를 통째로 굽자
한반도 남쪽 바다에 앉아 우리나라 가을 전어 굽는 내음을
아시아로 유라시아 대륙으로 즐겁게 피워 올리자
~~~~~~~~~~~~~~~~~~
가을 부근 / 정일근
여름내 열어놓은 뒤란 창문을 닫으려니
열린 창틀에 거미 한 마리 집을 지어 살고 있었습니다
거미에게는 옥수수가 익어가고 호박잎이 무성한
뒤뜰 곁이 명당이었나 봅니다
아직 한낮의 햇살에 더위가 묻어나는 요즘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일이나, 새 집을 마련하는 일도
사람이나 거미나 힘든 때라는 생각이 들어
거미를 쫓아내고 창문을 닫으려다 그냥 돌아서고 맙니다
가을 바람이 불어오면 여름을 보낸 사람의 마음이 깊어지듯
미물에게도 가을은 예감으로 찾아와
저도 맞는 거처를 찾아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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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을 하며
마흔 해 손 한 번 씻겨 드리지 못했는데
아들의 등을 미는 어머니 우리 어머니
병에서 삶으로 돌아온 내 등 밀며 우신다.
벌거벗고 제 어미를 울리는 불혹의 불효,
뼈까지 드러난 몸에 살과 피가 다시 살아
어머니 목욕 손길에 웃는 아이가 되고 싶다
까르르 까르르 웃는 아이가 되고 싶다
어머니의 욕조에 담긴 어머니의 사랑이 되어
회귀의 강으로 돌아가는 살찐 새끼가 되고 싶다
한국시조작품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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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 속의 바다
그 마을 사람들은 바다를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설마? 하고 물어보면 불쑥 주머니 속의 바다를 꺼내 보여
준다
놀라지 마라, 그것은 마을의 아주 어린 꼬마 녀석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제법 사랑을 아는 나이가 된 친구들은
사랑으로 외롭거나 쓸쓸할 때에는
손바닥 위에 바다를 올려놓고 휘파람을 분다
아무래도 마을 어른들은 한 수 위다
흰 손수건인가 싶어 보면 어느새 하얀 갈치 떼로 변하고
손금 위로 바다를 흐르게 하고 흐르는 바다 위에 섬을 띄
운다
아주 오래 전 그 섬을 찾아가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의 안부
까지 전해준다
떠나오던 날 마을 사람들이 주섬주섬 챙겨 선물로 건네주
던 바다
읽다 만 시집 속에 곱게 접어온 바다
삶에 지칠 때, 누군가가 아득히 그리울 때
나는 손바닥에 그 바다를 올려놓고 엽서를 쓴다
아침이면 사람과 함께 눈뜨는 바다
저녁이면 사람과 함께 잠드는 바다
사람과 한 몸이 되어 살아가는 바다를 나는 알고 있으니
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 / 시와시학사. 200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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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우체통이 목련꽃을 피운다
오늘 새벽 붉은 우체통 옆 목련나무에 목련꽃 피었다.
두레박으로 퍼올릴 수 없는 세월 우물처럼 고여
빛깔과 향기로 잘 익은 깊은 산속 절집 마당에
세상의 마을과 사람에게로 이어지는 모든 길들을
제 몸 속에 담고 있는 키 작은 붉은 우체통이 있었는데,
붉은 우체통 그 옆에는 목련나무 한 그루 서 있었는데.
목련나무는 알고 있었다
산사의 어두운 밤이 슬금슬금 내리면 살금살금 숨어 찾아와
삐뚤삐뚤 사연을 적어 하늘나라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던
파르스름한 머리, 먹빛 가사를 입은
착한 눈빛의 동승을 목련나무도 알고 있었다.
붉은 우체통은 동승의 편지를 삼킬 때마다
수신인의 주소가 없는 편지를 삼킬 때마다
제 몸 속에는 찾을 수 없는 길 하나로 하여
끝닿을 수 없는 깊고 깊은 고해의 바다가 되고,
행여나 동승에게 제 마음 들킬까 싶어
발자국 소리 절 안으로 사라진 한참 뒤에서야
긴 한숨을 쉬었다. 슬픔 봄밤
보내지 못한 편지 위에 또 다른 편지가 쌓이고
붉은 우체통은 자신의 몸에 쌓이는 기다림의 무게에
어쩔거나 이 일을 어쩔거나, 홍열이 올라 더욱 붉어지고
그 옆에 서서 내려다보던 목련나무도 함께 붉은 신열이 올라
오늘 새벽 숨길 수 없는 비밀 그분에게 죄다 고백하듯
가지마다 가득히 목련꽃이 피었다. 활짝 피었다.
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 / 시와시학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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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억새
때로는 이별하면서 살고 싶은 것이다.
가스등 켜진 추억의 플랫홈에서
마지막 상행성 열차로 그대를 떠나보내며
눈물 젖은 손수건을 흔들거나
어둠이 묻어나는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터벅터벅 긴 골목길 돌아가는
그대의 뒷모습을 다시 보고 싶은 것이다.
사랑 없는 시대의 이별이란
코끝이 찡해오는 작별의 악수도 없이
작별의 축축한 별사도 없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총총총
제 갈 길로 바쁘게 돌아서는 사람들
사랑 없는 수많은 만남과 이별 속에서
이제 누가 이별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겠는가
이별 뒤의 뜨거운 재회를 기다리겠는가
하산길 돌아보면 별이 뜨는 가을 능선에
잘 가라 잘 가라 손 흔들고 섰는 억새
때로는 억새처럼 손 흔들며 살고 싶은 것이다.
가을 저녁 그대가 흔드는 작별의 흰 손수건에
내 생애 가장 깨끗한 눈물 적시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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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등
-다연茶淵에게
삶이란 대문 앞으로 긴 골목길이 지나가는
그런 집에 살아가는 것이라고
불혹不惑에 병얻어 부쩍 그 생각하네
내 생도 어느새 방 나와
마당에서 서성이는 세월 살고 있으니
방으로 들어가 다시 잠을 청하기도
문 열고 나가기도 어정쩡한 시간
그냥 마당에 서서 기다리며
저녁을 위해 외등外燈 하나 밝히고 싶네
어두워지면 작은 세상 이루는 불빛아래
사선斜線 그으며 내리는 사월의 비나
허공으로 펑펑 터지는 십이월의 눈 바라보며
풍경風景이 있는 고즈넉한 밤 맞이하고 싶네
삶의 주머니에 남아 바스락거리는 시간 만져보며
긴 골목길 뚜벅뚜벅 걸어 찾아오는
운명의 구둣발 소리가 찾아오는 그 밤을
나는 외등 아래 서서 담담하게 맞이하고 싶으니
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 / 시와시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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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에는 영덕대게가 없다
영덕에는 영덕대게가 없다
금오식당에도 영덕대게는 품절이다
백반 한 상에 따라 나온
작은 게 한 마리
팔다리 다 펼치고도 양은남비 속이 넓다.
영덕대게들은 영덕을 두고 다 어디로 떠났을까
차부 앞 금오식당 낡은 차림표에 이름만 남겨두고
영덕대게는 어디로 갔을까
그리운 시인,
오늘 힘들게 찾아간 영덕여고 교정
오래 전에 큰 도시로 떠났다는 그대의 안부에
무심한 세월의 먼지기 쌓여 푸석거린다
뜨거웠던 젊은 날의 사랑도 영덕대게 같은 것
이제는 이름만 남은 영덕대게처럼
사랑은 소중했던 옛 시편들과 함께 서늘하게 식고
추억 저쪽에서도 시들시들 시간이 마른다
나에게는 신작 시집을 보낼 그대 주소가 없고
그대 수첩 속에는 오래전 내 전화번호가 적혀 있을 것이다
살아갈수록 우리의 삶을 살아온 날을 잊기 바쁘고
영덕에서 영덕대게가 잊혀지듯
틀린 주소와 바뀌어버린 전화번호를 가지기 위해
우리는 살아가는 것일까
영덕에는 영덕대게가 없다
대게는 모두 사라지고 영덕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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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에서의 생각 / 정일근
진보에서의 생각이 무엇이었는지 생각나지 않지만
진보에서의 생각이었다는 생각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진보에서 나는 무슨 진보된 생각을 했을까
그때 낯선 진보의 길 위에서 서성이며
진보된 세상을 진보에서 생각했을까
진보된 어떤 생각을 진보에서 버리려 했을까
진보식당에서 진보갈비탕 한 그릇
진보 우체국에 들러 진보에서의 전화
진보에서 쓴 우편 엽서
진보에서 본 증권회사 진보지점들까지
자질구레한 진보에서의 궤적은 지금도 선명한데
진보에서의 그 생각은 생각나지 않는다
진보에서 무슨 진보된 생각을 했을 것이다 믿으며
오랫동안 진보에서의 진보된 생각에 대해 생각하지만
생각나지 않는 진보에서의 생각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진보에서의 생각
그리운 곳으로 돌아보라 / 푸른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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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론論
사랑을 사랑이라 하면 곧 사랑이 아니다 사랑을 사랑이
아니라 해도 곧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사랑도 아니고 사랑
이 아님도 아니다 사랑은 사랑이면서 사랑이 아니고 사랑
이 아니면서 사랑이다
사랑아,사랑이 아니면서 사랑인 너의 이름은 무엇인가?
첫사랑을 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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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사랑아 너를 내 팔에 누이고도
욕심없이 잠을 자고 난 관음觀音의 새벽
몸도 마음도 이슬처럼 맑고 가벼워서
통도사 극락암 삼소굴 앞마당에 핀 금낭화
작은 방울 같은 꽃 끝에라도 매달릴 수 있겠다
뒤란 대나무숲에서 잠을 깬 무소유의 바람
새벽을 밟고오는 맨발마다
화엄 같은 파란 무늬가 빛나고
어린 모감주 잎들 일제히 깨달음의 눈을 뜬다
스님은 어느새 여름 선방에 드시고
찾아오는 손님을 위해 남겨 놓은 차 한 잔
사랑은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는 일이라며
따뜻한 말씀으로 풀리고 있다.
첫사랑을 덮다 / 좋은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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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눈병
여름의 끝에 사랑의 눈병을 얻었다
의사의 진단은 너무 쉽게 세상을 외면한 병
나는 너무 쉽게 사람을 외면하며 등 돌렸다
(안과 의원을 찾아가면서도
지하도의 맹인 악사를 외면했다!)
눈은 세상과 사람을 찾아 비추는 거울
외면하는 눈은 거울이 아니라 어둠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까지 멀어지고
눈을 잃는 것은 마음까지 잃는 것이려니
이제 아픈 눈을 굵은 소금으로 씻어
가을 햇살에 잘 말리고 싶다
그런 사랑을 위해 오는 눈병이라면
망막 가득 9월의 따뜻한 햇살을 담아
아름다운 세상 아름다운 사람을 보는
사랑의 눈병 그대들에게 전염시키고 싶어
흐르는 바람 빛나는 별을 향해 서서
핏발 선 두 눈을 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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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사지.1
탑은 달을 꿈꾸었는지 몰라
버려진 세월의 뱃속 가득 푸른 이끼만 차고
변방邊方의 돌들의 이마는 시나브로 금이 갔다
그 금 사이 무심한 바다가 들여다보곤 돌아갔다
천 년千年 전 바람은 피리구멍 속에 잠들었고
신화는 유사有史 행간 사이 숨어 버렸다
문득문득 사라진 절의 풍경風磬소리 들리고
항아리마다 칠월 보름달이 떠오를 때
저기 사랑하는 신라여인이 긴 회랑回廊을 돌아간다
탑 속 빈 금동사리함에 누운 잠아
천 년千年의 사랑아 내가 너를 안을 수 있다면
......돌 속에 묻힌 혀는 무겁기만 한데
항아리 속에서 떠오른 누우런 달이
둥근 맨발로 걸어 탑 속으로 숨어든다
어허 탑마다 즐거운 만삭滿朔이다
내가 탑이다
첫사랑을 덮다 / 좋은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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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약속
무릇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해가 뜨는 동해에
그 바다을 향해 웅크린 산줄기에
바다도 산도 둔갑을 한다
시간이 내는 발자국 앞에
마침내 자신의 모습을 바꾸는 자연
지구별에서도 해마다 사막은 늘어나고
그리운 바다는 줄어든다
행여,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말하지 마라
마음은 산중 운수납자도 열지 못하는
나무서랍 속의 낡은 비밀서류일 뿐이려니
경주 나산 수리봉에 올라 하늘을 보라
제 성좌로 찾아와 빛나는 밤하늘의 별들과
보름이면 어김없이 자신의 몸을 굴리며
제 자리로 돌아오는 둥근달
약속하지 않아도 찾아오는 사랑 있으니
기다리지 않아도 돌아오는 약속 있으니
경주 남산 머리 위로 보름달이 뜨는 저녁
사랑, 그 아름다운 자리를 찾아 돌아오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우리 약속을 보라
우주의 모래알 같은 작은 지구에서
욕계 육천 우주를 환히 비추는
우리 사랑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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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나라 국경의 숲에서
저녁 내내 말을 달려 찾아온 서쪽나라의 국경 숲에서 배
운다
해 지자 키 큰 삼나무 숲 위로 별들이 찾아와 빛나는데
묻나니, 우리 머리 위에 저리도 많은 별이 살고 있었던가
세상 어느 천문학자도 그리지 못한 신비한 천문도가 펼쳐
지고
그때 나는 들었다,우주의 떨리는 숨소리 같기도 하고
들뜬 별들이 스스로 부서져내리는 소리 같기도 한
은은한 사랑의 밀어가 삼나무 숲으로 폭설처럼 내려앉
는다
그리하여 별의 사랑은 나무의 작은 이파리에 난
더더욱 작은 숨구멍 하나하나에까지 젖어들고
그 사랑 나무 속 물길을 타고 뿌리 끝까지 전해져
참을 수 없는 격정으로 나무들이 활활 타오른다
그렇구나, 별의 사랑으로 뜨거워지는 나무들의 뿌리가
우리 별을 데우고, 나무의 사랑으로 더워진 별이
광활한 우주를 향해 아낌없이 자신을 태우는 것이구나
그래서 어둔 밤하늘 별들이 저리 빛난다는 것을
저녁 내내 말을 달려 찾아온 서쪽나라의 국경 숲에서 배
운다
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 / 시와시학사.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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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강은, 겨울 동강은 자신을 사이에 둔 마을과 마을을, 강의
이편 저편 마을로 나누기 싫었던 것이다
자신을 사이에 두고 길은 끊어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길
도 끊어지는 것이 안타까웠던 것이다
어린아이들도 괜히 강 건너 서로를 미워하며 돌은 던지고
나 큰소리로 욕이나 해대며 짧은 겨울 한낮을 다 보내는 것이
슬펐던 것이다
하여, 강은 지난밤 가리왕산의 북풍한설北風寒雪을 불러 제
살을 꽝꽝 얼려버린 것이다
저 하나 육신공양肉身供養으로 강 이편 마을들과 강 저편 마
을을 한 마을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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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청, 차갑고 혹은 뜨거운
얼음 안에서 뜨겁게 타오르는 불이 있구나
그 불 안에 차갑게 어는 얼음이 있구나
단청의 화엄 장엄한 길을 따라가다
한겨울 영하의 시퍼런 저녁을 걸치고 있는
서까래 연화문(紋) 사이에 숨은 웅화(雄花)*를 바라보노라면
어두워질수록 온갖 머리초들이 겨울꽃을 피워내
팔작 지붕의 적멸보궁이 활활활 불타오르네
영축산 땅 속 깊은 곳으로 흐르는 수맥마저 얼어붙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권하는 한 잔의 물도
차가운 표정으로 결빙되는 산사의 겨울
자신의 법과 말씀을 침묵의 빙점 아래 묻고
겨울짐승 겨울나무처럼 깊이 잠들은 줄 알았는데
웅화 한 잎이 피어나며 거침없이 불타오르는 세상
살과 뼈를 태우는 불 속에서 붉고 푸른 혀들이 깨어나
혹한의 저녁부터 풀림의 따뜻한 아침이 올 때까지
잠들지 말아라 잠들지 말아라 겨울잠의 이마를 치니
내 안에 얼어버린 나를 태우는 사랑의 붉은 불을 보네
그 불 안에서 얼음장 같은 지혜의 푸른 눈빛을 보네
문학동네 1998년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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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움
칼에 살을 베어보지 않은 사람은 제 살의 뜨거움을 알지 못
한다
작은 베임에 마흔을 지내온 내 몸이 통째로 화끈거린다
고맙다! 내 속에서도 아직 뜨거운 불이 숨어 있으니
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 / 시와시학사.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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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저녁
마음에 길이 있다면
그 길에 저녁이 있다면
오늘은 그 마을에서 쉬다 가리라
사람아 불 밝혀라
첫사랑을 덮다 / 좋은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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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룸치에서의 사랑
이국의 여자와 내가 말이 통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이 사랑이 꿈인 줄 알았다, 깰까 싶어 두려운 꿈속
우리는 원형의 알타이語로 사랑의 말을 주고받았고
사랑으로 입 안의 혀는 한없이 부드러워졌다
이 여자는 언제부터 내 마음을 따라왔던 것일까
이슬라마바드를 떠나올 때나 캐리코럼 하이웨이를 달릴 때에도
눈빛 맞출 여자 하나 보지 못했는데
돈황 석굴의 어둠 같은 깊은 눈빛으로
투루판의 여름 포도 향기 같은 달콤함으로
음악처럼 나에게 감겨드는 이 여자는 누구인가
우룸치에서의 사랑으로 나의 피는 수평을 잃어버렸고
여자의 낮고, 아득하고, 뜨거운 곳으로
나는 사마르칸트産 한지에 스미는 물처럼 천천히 침윤했다
여자의 몸에 감긴 비단을 벗겨낼 때마다
벗겨진 비단이 서쪽으로 길을 만들고
그 길 따라 낙타 무리가 돌아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이 사랑의 끝을 알 수 있었다
꿈에서 깨고 나면 여자는 돈황의 석굴 속으로 떠나고 없을 것이다
나는 우룸치 낡은 삔관(賓館)에서 늦은 아침잠을 깰 것이고
입 안 가득 여자가 남긴 비단길의 뜨거운 모래만 남아 씹힐 것이다.
인연이 있다면 신장 위구르족 자치구 박물관에서
미라로 남은 천년 전 여자를 나는 다시 만날 것이지만
그때는 아마 우룸치에서의 불 같은 이 사랑
차가운 얼음이 되어 모두 잊었을 것이니
현대시 2001년 12월호 / 2001 올해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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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집 진해
내 삶은 아직도 길 위에 있다
지친 두 발 기진한 육신
허기진 비애가 하루를 마감할 때
돌아가 옛집 더운 아랫목에
굽은 허리 묻고 잠들고 싶다
진해시 여좌동 3가 844번지
굴다리 지나 다닥다닥 산 위까지
둥지 틀고 식솔 거느린 번지마다
날 저물면 저 빼곡한 불빛
내 영혼의 일부가 그 불빛 속에서 자랐다
먼 사람 그리웁듯 그리운 진해 옛집
지금도 내 이름의 우편물이 쌓이고
꽃밭에도 봄꽃 흐드러지겠다
사월이면 꽃 지고 연초록 새잎들 신생하겠다
내 영혼은 집 떠나 길 위에서 상처받고
삶에 등 배길 때마다
백열전구 불빛 붉은 마루
저녁 밥상가로 둘러앉던 식구들처럼
더운 국에 밥 말아 먹던 뜨거운 밥숟갈처럼
그리운 옛집 진해
첫사랑을 덮다 / 좋은날.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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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혹不惑의 사랑
마음속에 누군가를 담고 살아가는 것이
사랑인 줄 알았다
사랑이기에 젊은 날엔
그대로 하여 마음이 아픈 것도
사랑의 아픔으로만 알았다
이제 그대를 마음속에서 떠나보낸다
멀리 흘러가는 강물에 아득히 부는 바람에
그대를 놓아 보내며
마음에 빈자리를 만들어 놓는다
비워진 사랑의 자리를 보며
나는 비로소 사랑을 안다
사랑이란 누군가를 마음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비워 놓고 기다리는 일
그 빈자리로 찾아올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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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산
첫눈 맞고 있는 겨울산을 보면
흰 털 세운 한 마리 산짐승 같으니.
부드럽게 웅크린 등줄기나
가슴께로 바짝 당겨놓은 살진 허벅지
이놈아, 하고 툭툭 치면
웅크렸던 몸 긴 기지개 한번 켜고는
산길 따라 세차게 달려갈 것 같으니.
이 땅 어느 산을 올라도
모든 길은 백두에 닿는다는
백두대간의 큰 꿈을 아는가.
첫눈 내리는 날 한반도 모든 산줄기들
흰 털 하얗게 곧추세워
하얀 능선 위를 달려가고 있으니.
그놈의 등에 덥석 올라타는 꿈이여
겨울산과 한 몸의 날렵한 산짐승 되어
지리산에서 백두산까지 튼튼한 등뼈를 밟고
한걸음에 달려가는 즐거운 꿈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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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즐거운 전화
나무들이 사랑을 속삭이는 모습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바람 부는 날 숲으로 가보셔요, 바람을 투명한 전홧줄 삼아
뚜와루 뚜와루 즐거운 나무들의 수화手話 혹은 수화樹話. 그리워 살금살금 한 걸음씩 가까이 다
가서지 않아도 기쁨 넘쳐나는 나무들의 깨끗한 사랑법. 저 단정한 거리를 두고도 꽃 피우고 열
매 맺는 나무들의 사랑법을 아시는지요? 사랑이여, 나도 이제 그대 앞에 한 그루 잎 많은 나무로
마주 서고 싶습니다. 그대와 나 사이에 바람이 전홧줄을 놓아줄 때 잎새 하나 하나 사랑의 푸른
수화기를 들고 즐거운 전화를 걸고 싶습니다. 뚜와루 뚜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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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날 낳으시고
오줌 마려워 잠 깼는데 아버지 어머니 열심히 사랑 나누고 계신다, 나는 큰 죄 지은 것처럼 가슴이 뛰고 쿵쾅쿵쾅 피가 끓어 벽으로 돌아누워 쿨쿨 잠든 척한다, 태어나 나의 첫 거짓말은 깊이 잠든 것처럼 들숨날숨 고른 숨소리를 유지하는 것, 하지만 오줌 마려워 빳빳해진 일곱 살 미운 내 고추 감출 수가 없다
어머니 내가 잠 깬 것 처음부터 알고 계신다, 사랑이 끝나고 밤꽃 내음 나는 어머니 내 고추 꺼내 요강에 오줌 누인다, 나는 귀찮은 듯 잠투정을 부린다, 태어나 나의 첫 연기는 잠자다 깨어난 것처럼 잠투정을 부리는 것, 하지만 어머니 다 아신다, 어머니 몸에서 내 몸 만들어져 어머니 내 몸 부엌살림처럼 낱낱이 다 알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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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꽃
차가워진 적이 없는 사람은
사랑으로 뜨거워지지 못한다
세상의 모든 약속 빙점 아래 잠들어
꽃눈 속의 봄꽃들 아직 눈뜨지 못하는데
겨울의 새벽 입술이 유리창에 닿는
얼음의 길을 따라 서리꽃 핀다
서리꽃은 빙점하에 피는 뜨거운 꽃
허공에 뿌리내린 불가해의 꽃
차가운 하늘에서 빛나기 위해
별이 스스로 뜨거워지듯
땅의 가장 차가운 곳에서 피는
하늘의 가장 뜨거운 꽃이여
사랑의 비등점은 빙점에도 있으니
사랑에 꽃피우기 위해
오랜 눈물 버리고 차가워지려니
내 끓는 영혼의 꽃밭으로 찾아와 피어라
피어라 사랑의 뜨거운 꽃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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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전어를 살리다
용주사에서 하안거 마치고 오신 현전 스님 앞에
두툼한 가을시편들 자랑처럼 펼쳐 놓았는데
시 수십 편 읽으시다 한 줄*에 놀라 물러서신다
칼로 썰어달라니! 시에 피냄새 진동하는구나!
스님 주장자 들어 내리 치신다
손에 피 묻히지 않고 마음에 피 흘리지 않고
그분의 길 조용조용 따라가고 있다 생각했는데
내 시에서 풍기는 피냄새 내가 알지 못했구나
어쩔거나, 시가 저 착한 것들 모두 썰어버렸구나
어쩔거나, 무심한 시가 칼이 되어 생명 저미었구나
가을 전어들 시로 죽였으니 시로 살리기 위해
가을이 오는 바다에 시를 용서처럼 풀어놓는다
가을전어들이여, 너희들 살아서 바다로 돌아가시라
몸 속 서 말 깨는 탈탈 털어 세상에 던져 버리고
현전 스님 들려주시는 화엄경 뼛속 살 속에 담고
그분의 바다로 돌아가 극락왕생 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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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종이 울리는 것은
제 몸을 때려가면서까지 울리는 것은
가 닿고 싶은 곳이 있기 때문이다
둥근 소리의 몸을 굴려
조금이라도 더 멀리 가려는 것은
이목구비를 모두 잃고도
나팔꽃 같은 귀를 열어 맞아주는
그분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앞선 소리의 생이 다하려 하면
뒤를 따라온 소리가 밀어주며
조용히 가 닿는 그곳
커다란 소리의 몸이 구르고 굴러
맑은 이슬 한 방울로 맺히는 그곳.
경주 남산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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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사別辭
-경주 남산 ·37
우리 이승의 사랑 끝나고 그대는 죽어 복사꽃 나무
가 되리라 나는 죽어 한 마리 은어가 되리라
사랑이여 천 년이 지난 봄날 먼, 먼 어느 봄날 그대
온몸에 복사꽃등불 밝힐 때
나는 몸속 수박향 숨기고 소월천 거슬러 오십천 따
라 올라가다 강물에 어루숭 어루숭 잠긴 그대의 꽃그
늘 그냥 지나치지는 못하리라
나를 휘감는 연분홍 비단 같은 슬픔에 까닭도 모른
채 펑펑 울며 거기 멈추어 서 있을 것이니
사랑이여 그대 또한 그러하리라
꽃그늘에 울고 있는 한 마리 어린 은어를 보며 꼭 한 번
어디선가 눈 맞춘 것 같은 작은 물고기의 눈물을 보며
무엇인가 아뜩하여 경계 없는 슬픔에 그대가 피운 가
장 아름다운 꽃 분홍 꽃잎 몇 장 손수건으로 하늑하
늑 날려줄 것이니
사랑이여 사랑하였으니 진실로 그러하리라
착하게 낡은 것의 영혼 / 시학,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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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디, 푸른 한 마디
피릴 만들기 위해 대나무 전부가 필요한 건 아니다
노래가 되기 위해 대나무 마디마디 다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가장 아름다운 소린 마디 푸른 한 마디면 족하다
내가 당신에게 드리는 사랑의 고백도 마찬가지다
당신을 눈부처로 모신 내 두 눈 보면 알 것이다
고백하기에 두 눈도 바다처럼 넘치는 문장이다
눈물샘에 비치는 한 방울 눈물만 봐도 다 알 것이다
웹진 시인광장 / 2007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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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새벽에
시인의 아내는 겨울에 눈이 밝아진다
봄 여름 가을에는 잘 보지 못했던
곳집이 비는 것이 눈에 환히 보이는 모양이다
새벽 추위에 우리는 함께 잠을 깨
아내는 사위여가는 겨우살이를 헤아리고
나는 시를 생각한다
시인의 가난은 추운 날을 골라서 찾아온다
보일러 기름도 추운 날 새벽을 골라 똑 떨어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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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혼자 내원에 들었다
정시 정각에 도착한 열차처럼
나는 가장 좋은 시간에 닿았다
잘 익은 나무들과 함께 걸어서 당도한 11월
나무의 1과 1 사이로 황금빛 수평선 펼쳐지고
그 사이로 겨울 철새는 풍경이 되기 위해
먼, 차가운 먼 북족에서 세차게 날개 치며 돌아오는 중이다
물들기 위해 봄부터 함께 걷기 시작한 나뭇잎
한 장 한 장, 햇살 되받아내며 눈부시고
바람은 차고 밝은 몸으로 찾아와
마지막 꽃씨와 풀씨를 날린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 원융무애의 바다에 당도하듯
내원의 나무가 걸어서 당도한 바다, 저 깊은 바다
먼저 물든 낙엽부터 먼저, 풍덩풍덩
미련 없이 돌아가는데
묵언하는 나무가 날기 위해 천천히 등을 굽힌다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 문학과지성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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갇힌 소가 우는데
..은현리에 살면서 들었다. 황금벌판에서 일하는 소는 움머-하
며해설피* 울지만 감옥 같은 창고에 갇혀 사육되는 소는 엉-엉
- 휴대폰 진동소리처럼 기계음으로 우는 것을. 처음에는 기계
의 진동음으로 알았다가 무슨 소리가 뼈마디에 스며들도록 아
픈가 싶어 찾아갔다 신문지 크기만한 창문 하나 가지고 컴컴한
어둠 속에 징역사는 소를 만났다. 그 순한 눈망울 가득 타오르
는 사람의 원죄를 보고 말았다. 그 소리 가끔 전화기로도 듣는
다. 도시 사는 친구가 술에 취해 전화를 하는 밤, 보고 싶다 보
고 싶다며 대책 없이 우는 밤, 그 울음 뒤로 도시가 엉-엉- 휴대
폰 진동음으로 갇힌 소처럼 따라 우는 소리를.
현대시 / 2004.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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