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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이동활의 음악정원 ♣ 원문보기 글쓴이: 웃는갈대
가고파(전편)< FONT> 가고파(전편)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일하여 시름없고 단잠 들어 죄없는 몸이
작품해설 한국의 가곡. 김동진이 만 20세 되던 1933년 작곡한 곡으로 재학 중이던 숭실전문학교에서 은사 양주동으로부터 이 시를 듣고 감동을 받아 그 악상을 5선지에 옮겼다는 곡이다. 통절형식으로 반주 화음처리가 매우 중후한 느낌을 준다. 한국 가곡 중 가장 많이 애창되고 있는 곡 중의 하나이다. 김동진작곡, 이은상 작사. "내 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로 시작하는 10절의 가사를 가진 통절형식(通節形式)의 곡이다. 〈가고파〉의 바다는 이은상이 태어나고 살았던 마산 앞바다 합포만(合浦灣)으로, 이 시는 1932년 그가 이화여전 교수로 재직할 때 씌어졌고, 그 다음해에 김동진이 평양 숭실전문대 문과에서 양주동에게 이 시를 배우면서 악상이 떠올라 단숨에 4장까지 작곡을 했다. 40년 후인 1973년에 나머지 6장을 완성하였다. 〈가고파〉는 1933년 작곡 이후 평양 신암교회와 신정교회에서 불리다가 테너 이인범(李仁範)에 의해 널리 소개되었다. 이 곡은 김동진의 〈내마음〉·〈수선화〉와 비슷한 정서를 갖는데 이들 가곡은 한국 가곡의 방향성을 규정하는 역할을 했다. 또한 고향을 떠올리는 애상감과 마지막 부분의 남성적 중후함이 많은 사람들의 애창곡이 되게 하였다(1984년 문화방송 조사에서 내가 좋아하는 가곡 1위 곡). 성악가 팽재유 팽재유는 천부적인 미성에다 후천적인 法의 발성을 兼全한 테너이자 감동적인 노래를 만들어 내는 技도 능숙한 희귀하고 多元的인 성악가다. 그의 노래의 꽃봉오리는 이역의 캐나다에서 화려하게 만개했다. 그는 1973년 캐나다 토론토대학 오페라科에 입학, 바리톤 Loui Quilico교수등 세계 정상급 성악가에게 배웠으며, 1975년 4월 졸업한 뒤 동양인으로는 처음 캐나다 국립오페라단원에 발탁됨으로써 순탄한 揚名의 길에 올랐다. "환상적인 동양인 테너"로 캐나다악계의 총아가 되어있는 그는 이제 국내에도 많은 팬을 가졌다. 1976년 6월 일시 귀국, 서울, 대전, 부산 등지에서의 독창회를 통해 관중의 열화와 같은 환호와 비평가의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다. 한국가곡만을 예로 들더라도 그는 독특한 해석으로 한마디 한마디를 호소하듯 열창, 예술가곡의 경지를 펼쳐 보인다. 팽재유는 경남 진해에서 출생, 연세대 교수 이인범에게 배웠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희성으로, 명나라 도독으로 임란때 원군으로 왔다가 귀화한 팽우덕(彭友德)장군의 후예다. 작곡가 김동진 1913. 3. 22 ~ 2009. 7. 31 작곡가·신창악운동가(新唱樂運動家).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찬송가 등으로 서양음악을 접했다. 평양 숭실중학교를 다니면서 D. R. 말스베리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고, 5학년 때 〈봄이 오면〉(김동환 작시)을 작곡했다. 숭실전문학교 문과에 다닐 때 양주동에게 배운 이은상의 시(詩) 〈가고파〉를 비롯해서 〈발자욱〉·〈뱃노래〉 등을 작곡해 재능을 인정받았다. 1936년 숭실전문학교 졸업 후 일본 도쿄음악학교에서 공부하고, 귀국 후 1939년에는 만주 신경교향악단원으로 일하다가 해방 직후 중앙교향악단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평양예술문화협회에서도 주도적으로 활동하다가 해산되면서 월남했다. 6·25전쟁 때에는 육군 종군작가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수십 곡의 군가를 작곡하였고, 휴전 후 서라벌예술대학에 있으면서 국방부 정훈국 주최의 연주회에서 〈조국찬가〉를, 정부수립경축음악회에서는 〈승리의 길〉을 작곡·지휘했다. 1963년부터 경희대학교 음악대학 교수를 지냈고, 1967년 음악대학장을 지냈으며 1978년 정년퇴임, 그후 명예교수가 되었다. 경희대 재직시 개교 25주년 기념 칸타타로 〈목련화〉를 발표했다. 1979년부터 신창악연구회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그가 창안한 신창악은 한국 가곡이 갖고 있는 형식의 단순성, 감상성과 선율과 가사의 언어적 결합의 미비점을 극복하면서 판소리 창법을 서양음악 기법과 발성으로 노래할 수 있게 한 성악음악이다. 신창악으로 〈심청전〉·〈춘향전〉의 아리아를 작곡했다. 주요작품을 살펴보면 가곡으로 〈봄이 오면〉(1931)·〈가고파〉(1933)·〈내 마음〉(1940)·〈수선화〉(1941)·〈목련화〉(1974) 등이 있고, 기악곡으로 〈양산도를 주제로 한 바이올린 협주곡〉(1938)·〈가야금협주곡〉(1959), 교성곡으로 〈조국찬가〉(1955)·〈승리의 길〉(1958), 오페라로 〈심청전〉(1977) 등이 있다. 이은상 李殷相, 1903. 10. 22 ~1982. 9. 18. 1918년 아버지가 세운 마산창신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다니다가 1923년 그만두었다. 창신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다가,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사학과에서 공부했다. 일본에 잠시 머물며 〈신생〉의 편집일을 도왔고, 귀국한 뒤로는 1931~32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를 지낸 뒤 〈동아일보〉·〈조선일보〉에서 근무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으며, 1945년에는 사상범 예비검속으로 광양경찰서에 갇혀 있다가 8·15해방이 되어 풀려났다. 같은 해 호남신문사 사장을 지냈고, 1950년 이후 청구대학(지금의 영남대학교)·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1954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1959년부터 충무공이순신장군 기념사업회장, 안중근의사숭모회장 등을 맡아보았다. 1967년 시조작가협회장, 한글학회 이사를 지냈고, 1969년 독립운동사 편찬위원장, 1972년 숙명여자대학교 재단이사장이 되었다. 1970년 경희대학교에서 문학박사학위, 1974년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76년 성곡학술문화재단 이사장, 총력안보국민협의회 의장, 시조작가협회 종신회장, 1978년 예술원 종신회원으로 추대되었고, 1981년 국정자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져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1976년부터 노산문학상 운영위원회에서 노산문학상을 제정해 시상하고 있다. 음원출처:http://music.krsong.com |
첫댓글 제가 가장 많이 들었던 가곡을 꼽으라면 가고파일겁니다.
전 후편 가사를 줄줄 외며 부르기도 했었는데 요즘은 좀 시들해 졌습니다. ㅎㅎㅎ
가고파는 팽재유의 노래가 그중 좋더군요. 엄정행의 노래도 좋고요. 최근에는 남격합창단의 김성록이가 부른 것도
쓸만 했습니다. 가고파는 이제 국민정서의 원형질로 자리잡아 간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