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희 영
동기회는 언제나 가슴 설레이고 기다려지는 날이다.
그것은 우리의 어린 시절 풋풋함과 젊은 날의 향수를 느끼게 하기 때문인 것 같다.
동기회 날 어느 남자 동기가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하고 유행가 가락을 늘이고 있다.
정말 사랑하기 딱 좋은 날인가?
어느새 칠순을 넘고 있지 않는가!
나도 모르게 내 젊은 시절의 소중한 친구 K양과 J군의 얼굴을 찾고 있다.
우리는 셋이서 의령군 유곡국민학 교에 첫 발령을 받았다.
K양과 나는 K양의 오빠가 사준 담배 한 보루를 가지고 의령교육청 화장실 앞에서 장학사가 나오기만 손꼽아 기다렸다가 용변 보러 나온 장학사에게 들고 온 것을 건네면서 제발 전깃불 있고 수돗물 나오는 곳으로 보내달라고 애걸복걸해서 발령 받은 곳이 바로 유곡초등학교였다.
전깃불, 수돗물은커녕 연탄 부뚜막도 없는 곳이었다.
그 대신 아름다운 바람산과 형형색색의 바위 틈 사이로 흐르는 물이바알간 조약돌과 모래톱을 만들고 수정 같은 시냇물이 넓게 펼쳐져 있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스타킹을 벗고 발을 첨벙 담그면 맑은 물속 하얀 종아리 주위로 송사리 떼가 모여들곤 했다. 나와 K와J는 이른 저녁을 먹고 시냇가에서 머리를 감고 살랑거리는 바람에 비누 향내를 풍기며 복숭아밭 사이 를 거닐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 같은 학교에 근무 하는 김 선생이 나를 조용한 곳으로 부르더니, 대뜸 첫 눈에 반했다며 밤에 잠도 못 잔다면서 사랑 고백을 하였다. 예기치 못한 말을 들은 나는 그때부터 조용하던 마음에 파문이 일면서 고민이 시작됐다. 누구하고 의논하고 싶은데 차마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다가 용기를 내서 K에게 빨래하러 가자고 바람산 밑 시냇가로 불러냈다. 마침 거기엔 가족 계획원으로 근무하는 안양이 빨래하고 있었다. 얘기를 듣고만 있던 안양이 피식 웃으면서 “소문에 의하면 6학년 담임 김 선생이 동네 처녀들과 말썽이 있어서 유곡학교로 쫓겨 왔다던데 그 사람 성격이 어떻노? 나 더러 사랑한단다.~”
아니 이럴 수가. “나 보고도 사랑한다던데?” K도 “나 보고도 사랑한다고 했는데…”
우리 셋은 분기탱천하였다. 우리 이럴게 아니라 김 선생에게 사랑한다고 하면서 만나자고 모의했다. 안양은 5시 10분, K는 6시, 나는 7시. K와 나는 큰 바위 뒤에 숨고 안양이 바위 앞에서 몸을 꼬면서 “저도 사랑하는데 예, 김 선생님은 여러 사람 사랑하는 거 아임니꺼?” 김 선생은 “하늘에 맹세코 안양만 사랑합니다” 하면서 손을 덥썩 잡는 순간 안양이 “야―”하고 소리 쳤다. 그때 K와 나는 바위 뒤에서 뛰쳐나왔다. 김 선생이 깜짝 놀라 뒷걸음칠 때, 가족 계획원 안양이 다부지게 “니는 꼬치가 몇 개고?”
다음 날 출근해서 보니 K와 내 책상 위에 먹지도 않은 약 청구서와 풍선이 놓여 있었다. K가 청구서를 가지고 교감선생님께 “우리는 약 먹은 적 없어요. 감기도 한번 안 걸렸는데요.” 교감선생님이 피식 웃고 교무실에 있던 다른 선생님들도 머리를 책상에 대고 웃는 모습이 이상했다. K는 자기 책상 위에 있던 풍선을 불어 커다랗게 만들어 우리 둘은 배구(?)를 했다.
알고 보니 청구서는 피임약이고 풍선은 콘×이었다. 우리는 너무 부끄럽고 황당하기도 하고 분했다. 그때 생각에 ‘동기 J는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알면서도 어떻게 우리에게 이야기도 안 해주나.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나 듣고 깔끔히 떨고 앉아 있으면서…, 좀 야속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 이후로도 김 선생은 출석부나 성적일람표를 감추어서 밤새도록 다시 만들게 하는 둥 우리 셋을 계속해서 괴롭히던 어느 날 내 책상 속에 물렁물렁한 것이 봉투에 들어 있었다. 나는 찰떡인 줄 알고 봉투를 여는 순간 그것은 끔찍하게도 죽은 쥐였다. 너무 놀라 “아―” 소릴 지르며 던지는 순간, 공교롭게도 마주 앉아 계시던 교감선생님 이마에 맞고 책상에 떨어졌다. 교감선생님 이마엔 쥐살이 으깨진 털 묻은 피가 흘렀다. 놀란 교감선생님은 이마에 묻은 쥐 피를 털어내면서 소리 질렀다.
‘아이 더러워, 내 마박 내 마박’ 그다음 일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교감선생남께 야단 아닌 야단을 맞았지, 가슴은 계속해서 떨리지, 우리의 유일한 동기한테 의논해 볼래도 군대 가고 없었다. 군대 가는 날도 우리는 소 닭 쳐다보듯 빠끔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마음속으로는 섭섭했지만, 지금 같았으면 송별연도 열어 주었으련만…
나는 K선생 소행에 분해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적극적으로 전투태세를 취하자. 우리를 너무 만만하게 본다.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자. 내자! 한 방에 가게 만들자.’
고심 끝에 6학년 아이들에게 화장실에서 나오는 큰 구더기를 잡아오면 용돈을 준다고 했다. 아이들이 ‘저요, 저요’ 하면서 희망자가 너무 많았다. 김 선생은 숙직실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살림 도구라야 군에서 쓰는 철사 달린 깡통(반합)과 그릇 두어 개였다. 그 깡통에 화장실에서 잡아 온 구더기를 가득 채워 뚜껑을 닫아 방 한가운데 놓아두고 K와 나는 불 때는 갈비(소나무 가지와 잎)더미 옆에 숨어 있었다.
김 선생이 맛있는 거라도 있는가 싶어 입맛을 다시면서 뚜껑을 여는 순간 ‘으악―’ 소리를 지르면서 깡통 그릇을 냅다 던져버리자 구더기들이 쏟아져 나와 온 방에 흩어졌다. K와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낄낄’ 웃다가 그만 들키고 말았다. 우리를 본 김 선생은 작대기를 들고 뒤쫓았다. 우리는 다리야 날 살려라 허겁지겁 바람산 위로 올라가 숨도 죽인 채 숨었다. 산속에 어둠이 깔리면서 여우 울음소리가 지척에서 들리자 우리는 너무 무서워서 서로 부둥켜 안고 울었다. 산을 내려 가자니 김 선생 한테 잡힐 것 같고 산에 있자니 금방이라도 여우 밥 신세가 될 것 같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산 아래쪽에서 횃불을 들고 이쪽으로 다가오면서 ‘K 선생님―, 이 선생님―’하고 여러 선생님들과 동네 청년들의 외치는 소리 속에 K를 보살피고 계셨던 K의 어머니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K가 그만 ‘엄마―’하고 울음을 터뜨렸고 나도 울면서 김 선생 때문에 못 내려간다고 소리를 질렀다.
새벽 1시, 교장선생님 사택 마루에 꿇어 앉아 한참 설교를 듣고 집으로 왔다. 발령이 나자, 김 선생은 인근 학교로, K와 나는 김해 쪽으로 전근되었다.
그때는 정말 참지 못할 고민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니 철없었던 스무 한 살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도시에서 학교생활을 하는 것보다 시골에서의 몇 년이 더 아름답고 추억들이 많은 것 같다. 피라미 배를 손톱으로 툭 따서 팔딱팔딱 뛰는 놈을 꽁지를 잡고 초장에 덥석 찍어 먹는 모습에 기겁하던 그때를 지나면서 차츰 그 진미를 느껴 보던 즈음 바람산과 헤어짐이 못내 아쉬웠다.
70의 길목에서, 그 때 그 친구들과 알고 지내던 여러 분들이 건강하고 행복한 노년을 잘 보내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