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아기 앞에서 마음아파 하시던 신부님, 황 방지가 수녀
날자는 잘 모르지만 1969년 내가 수련자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그때는 우리구호병원도 없었고 치료받을 아이가 생기면 급할 때면 가까운 병원으로 가거나 또 초량 분도병원을 가기도 했습니다.
나는 큰 언니라고 아이 중 병약한 아기가 입소되면 우리 반으로 배치되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새롭게 이곳에 입소된 가정원 아이들은 결핵에, 영양실조에. 지극히 약한 아이들이라 얼마동안 끊임없이 병치레를 많이 했습니다.
그때 저는 아이 4명을 키우고 있었는데, 두살짜리 막내가 열이 갑자기 너무 높아 병원으로 진료를 받으러 갔습니다.의사 선생님이 진찰하고 나서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며 “수녀님 마음이 많이 아프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무슨 말인지 몰랐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다시 “아기가 소생할 가망이 없으니 입원도 안 되고 주사 맞히고 어쩔 수 없으니 빨리 집에 데리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눈물이 났습니다.
나는 원장 수녀님께 보고를 드리고 아이를 데리고 와서 방에 눕혀놓고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간호를 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마음은 찢어질듯 아팠습니다.
지금은 아기가 중하면 당연히 입원을 하지만 그 시대에는 가능성이 없는 아기는 입원을 안 시켜주고 자연스럽게 집에 데리고 가라던 시절이었습니다.
정신과가 심하거나 결핵이 심한 아이는 더더욱 아예 입원도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마지막 가는 아기에게 흰 천을 가지고 깨끗한 옷을 한 벌 만들어 입히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아기를 보면서 옷을 급하게 만들었습니다.
아기는 열이 계속 나고 상태가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물수건을 이마에 갈아주면서 아기를 안고 마음 아파했습니다.
밤 9시가 조금 넘었을 때입니다.
옆방에 있는 아이들 때문에 아기를 잠시 내려놓고 왔다 갔다 하다가 창밖을 보니 창설 신부님께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하염없이 서 계셨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며, “신부님, 이 밤에 어쩐 일이세요?”하면서 현관문을 열으니 “야 원장 수녀에게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아기도 자매도 너무 걱정되어서 왔습니다. 야 자매, 고생이 많지요? 아이는 좀 어떻습니까?”
나는 다시 왈칵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병원에서 안 된다니 어떻게 합니까? 잘 참고 아기를 마지막 까지 잘 보살펴주시오 수고하시오 .” 하시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시다가 가셨습니다.
아기는 그날 밤 3시30분경에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집에 있을 때 본 것이 있어서 아이를 깨끗이 씻기고 새 옷을 갈아입혔습니다.
나는 미사 후 신부님께 보고를 드리니 신부님께서는 원장 수녀님과 함께 저의 집에 오셔서 아기 얼굴을 보시고 대세는 주었는지 물으셨습니다.
마리아로 주었다고 말씀드리니 “잘 했습니다. 자매혼자 정말 수고가 많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자매가 한 일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그때의 일을 잘 생각합니다.
아기를 보며 함께 걱정해 주시던 신부님의 안타깝게 주시하시던 그 눈길은 절망에 찬 저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셨으며 정말 수고했다고 격려해주시던 신부님의 아버지다운 눈길은 저에게 새로운 활력과 에너지를 충만케 해 주셨습니다.
그때 제가 그 사랑을 느끼지 못했다면 영적으로 어렸던 제가 과연 그 큰 일을 감당할 수 있었을지 의문스러워집니다.
신부님의 그 사랑! 정말 그립습니다.
첫댓글 천국에서 신부님과 수녀님께 감사드리는 아기의 밝은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아주 빛나는 흰옷을 입은 아기 ... ♥
아!!
아빠 신부님 너무 그리워요!! 이 글을 읽는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 걸까요?
슬픈 감정은 금물! 하면서도 신부님이 그리워지는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글써주시고 올려주신 두분 언니수녀님께
감사합니다.
사람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두 사람을 통해서 읽게 됩니다.
마지막까지 정성을 다하는 사랑의 정신도 배우고,
상대가 진심으로 느껴지게끔 지지하시는 창설신부님의 눈빛과 마음도 배웁니다.
현장감있게 생생히 적어주신 16bel님께 고마움 마음을 전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