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매 선비 놀이 3 이규보의 시를 베껴보다
삼척을 주서식지로 하는 박문구형님은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여전히 음 주 흡연 방랑을 일상으로 삼는 소설가이시다.
그의 소설은 교과서에 실리는 문학사가 거론하는 소설과는 결이 다른 생활 속 감동이 있어
즐겨 읽게 된다. 게다가 생활과 작품을 완전 별개로 하여 소설 내용은 엄청나게 특이하고
격렬하지만 실제 생활은 담배 끊고 아침 운동 열심히 하는 요즘 젊은 작가들과는 달리
소설 속 못난 주인공들처럼 적당히 게으르고 적당히 무력한 모습조차 좋다.
아마도 그 분이나 나나 이 시대의 마지막 후기 낭만주의자들인지도 모르겠다.
나도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등 성인병 3종 세트에다 부록으로 심장시술에 전립선약까지 장복하면서도 하루 두 갑의 담배와 시시때때로 취한 몸을 전봇대에 기대고 숨을 고르거나
문득 랭면 한 그릇 먹으러 속초까지 달려가니 전국을 싸돌아 댕기는 그 형님의 역마살에는
미치지 못하나 나름 풍류가 있다고 짐짓 자부해 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문득 그런 삶을 산 문인들을 생각해 보니 바다 건너 중국에는 당장 이백 도연명 소식 등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로 떠오르나 우리 나라에서는 별로 생각이 나지 않는다.
얼핏 조선조의 정철이나 임제 등이 떠오르나 정철은 정적 숙청과정의 그 잔인한 행위 때문에
입에 올리기 싫다. 고려로 거슬러 올라가면 아마 이규보 정도가 아닐까 한다.
오늘 밤은 이규보의 낭만을 추억해 언제나 그렇듯이 깊이 없는 야매 정신으로다 선비 놀이를 해
본다. 이 붓장난을 지금 죽서루 언저리 어딘가에서 술잔을 멈추고 담배를 문 채 바다 혹은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을 척주의 선배에게 바친다.
백운거사 이규보는 누가 뭐라고 해도 고려 최고의 시인이다.
고려는 불교국가였다. 그 불교국가에 틈을 낸 것은 광종임금이 귀족들을 억제하기 위해 지방에서 관리를 골고루 뽑기 위해 쌍기의 건의를 받아 시행했다는 과거제도였다.
아버지인 왕건보다는 오히려 궁예를 닮았던 광종은 자신의 통치행위에 사사건건 간섭하고
사병을 키우고 아버지와 결혼동맹을 맺고 지방에서 절대권력을 행사하던 무수한 토호들에게
반감을 갖게 된다.
그들은 소위 개국공신들로 태조 왕건을 도와 절대왕권을 가졌던 궁예를 추방하고 호족연합체적인 정권을 세운 주역들이었다.
대를 이어가며 권력을 농단하고 국정의 일사불란한 집행을 방해하는 그들을 제어하기 위해
그는 노비안검법이란 사실상의 사병혁파법을 실시하고 이어서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명문가의
자손이 아닌 향리의 자제들을 관리로 등용하기 시작한다.
광종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 제목이 ‘미치거나 빛나거나’는 그 과정에서 광종(光宗)임금의 업적이 빛나기도(光) 하고 미치광이 같기도(狂) 했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과거시험의 과목이 주로 사서오경을 중심으로 한 성리학적 내용이었으므로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한 자들은 자연 성리학적 마인드로 무장되었던 소위 신흥 사대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차차 하급관리에서부터 상급관리로 진출했고 마침내 정중부의 반란 이후 소위 무신들이 청소되는 과정에서 문벌귀족들이 숙청된 빈자리를 메우며 고위직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최충헌을 시조로 하는 무신정권의 눈에 띄어 사대부들의 가장 앞자리에서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한 사람이 바로 이규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술과 시와 음악(거문고)를 좋아하여 삼혹호(三酷好)선생이라고도 불리었고
벼슬에 집작하지 않는 태도 때문에 백운거사(白雲居士)라고도 불리었다.
그는 문하시중이라는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1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랐으나 그 바쁜 와중에도 시간이 날 때마다 시작업에 매진하고 집착하여 스스로가 시마(詩魔)에 사로잡혔다고 할 정도의 타고난 문학가였다.
그가 ‘설(說)’이라 이름 지은 수필도 볼만하지만 그의 시도 만만치않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문집 ‘동국이상국집’이 남아있어 그의 면모를 파악할 수 있다. 혹
자들은 무신정권하에서 벼슬했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내가 아는 한 그는 벼슬자리를
통해 무신정권의 권력연장이나 홍보 선전을 했다기보다는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자신의 삶도
사랑한 멋쟁이로 남겨두고 싶다.
내가 소개하는 이 작품은 백운소설에 실려있는데 관련 얘기는 다음과 같다.
날씨가 화창한 어느 봄날을 맞아 이규보가 시우 윤학록, 즉 윤세유(尹世儒)를 만나 함께 술을 마시며 봄날의 풍경을 즐겼다. 술탐이 많은 이규보가 과음을 하여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윤학록이
불러주는 운을 따라 지었다는 것이다.
꿈에서 깬 이규보는 꿈에 있었던 일을 윤학록에게 들려주며 또 시 한 편을 지었다.
그래서 제목이 次韻尹學錄春曉醉眠(차운윤학록춘효취면 -윤학록의 '춘효취면(봄날 새벽 취해 잠들다)'에 차운하다 이다
三杯卯飮敵千藥 삼배묘음적천약
一枕春眠値萬金 일침춘면치만금
莫遣黃鷪啼傍耳 막견황앵체방이
夢魂方向玉樓尋 몽혼방향옥루심
해장술 석 잔은 천 가지 약을 먹는 것 같고
봄날 자는 짧은 낮잠 만금의 가치 있도다
귀 가까이서 우는 꾀꼬리 쫓지 말게나
꿈 속에서 신선이 사는 곳 찾아가야 할 테니
묘음이란 묘시에 마시는 술이니 묘시가 요즘으로 치면 아침 5시에서 7시 사이이니 당연히 해장술일 것이고 그 해장술의 가치가 천 가지 약보다 더 몸에 좋다는 말이니 술꾼다운 발상이다.
이 아저씨 가만히 보니 담배를 피면서 마음의 안정을 가지는 것이 건강에 더 좋다거나 담배를 통해 내 몸의 컨디션을 측정할 수 있으니 흡연은 내 건강의 리트머스 시험지라고 박박 우기는 2020년 현재의 나와 묘하게 닮아 있다.
게다가 아침 늦잠이 만금의 가치가 있다니 술고래에 게으른 모습이 아침 출근이 싫어 사표내고
11시쯤에 늦은 아침을 끼적거리는 나와 시공을 초월한 싱크로율의 퍼센트가 높은 듯하다.
내 들은 얘기 중에 멀쩡한 은행원 생활을 하다 아침 조기기상이 싫어 사표를 내고 늦잠자기 위해 비디오 아티스트가 되어 세계를 상대로 사기쳤다는 백남준씨도 같은 종류의 인간일 것이다.
모처럼 잠들었으니 나를 깨우지 말고 주변에 소음을 내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두었을 것이나,
그러나 게으른 자에게도 소망은 있으니 그 꿈속에서나마 이상향인 신선 사는 백옥루를 찾아가야 하니 아름다운 안내자인 꾀꼬리 소리는 옆에 두라는 낭만적 당부가 있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 정말 무서운 자는 게으른 자가 아니라 부지런한 자이다.
이 세상에 정말 해로운 자는 무식한 자가 아니라 유식한 자이다.
싸가지 없는 놈이 엄청난 지식정보를 장착하고 게다가 부지런하고 근면하다면
진정 그런 놈이 이 세상의 가장 큰 재난이 될 것이다.
히틀러가 그런 놈이고 요즘도 그런 놈이 보이기하지만 차마 이름을 거론하지는 않겠다.
어느 날 교직 후배가 나에게 투덜거렸다.
“선배님, 요즘 교실에서 수업하다 5분만 지나면 앞에 앉은 대여섯 명만 듣고
나머지는 다 자빠져 자요. 미치겄어요”
그래서 내가 답했다.
“엎드려 자는 놈은 지 가정과 미래를 망치겠지만,
저 앞에서 초롱초롱 잘 듣는 자들은 잘못하면 나라를 망칠 가능성이 높다네.
걔들에게 싸가지를 심어주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