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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권의 책을 읽고
만리의 길을 걸으며
만인의 벗을 만난다.
이것이 이번 우리 민학회의 답사 주제였다.
과연 우리는 이번 4박 5일의 중국 산동성 지방 답사에서 무엇을 얻어 올 것인가?
비행 시간은 그저 국내 관광하는 정도 1시간 조금 넘었다 싶은데 벌써 비행기 창 아래로 보이는 땅은 중국 땅이다.
거대한 바다를 가로지르는 저 다리에서 중국의 대국기질을 짐작한다.
칭다오 국제 공항에 도착.
우리를 마중 나온 버스에 몸을 실었다. 아까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바로 그 다리다.
청도에서 황도까지 다리를 놓았다는데 그 거리가 무려 360km란다.
버스로 30분 이상을 달려야 하는 거리다. 중국의 스케일을 보는 듯하다.
이제 서서히 차 창 밖으로 거리의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을씨년스러운 풍경들. 떨어져 나간 문짝, 깨친 유리창, 허물어진 벽....
흡사 사람들이 살지 않는 폐가 같은 이곳에도 어김없이 사람은 살고 있었다.
이번 여행길에서 우리는 과거로 시간여행을 하게 되었다. 맨 처음 김해 공황에서 칭다오에 내리는 순간. 시차가 적용되었다. 우리들의 시간은 벌써 한 시간 뒤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칭다오 공항에는 우리 선생님의 오랜 지인인 팔금산 선생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 분과 함께 한인이 경영하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바로 관광에 나섰다.
우리 일정 중에 맨 먼저 도착한 관광지는 독일 총독관저였다.
1897년 독일이 청도를 점유했을 당시 독일 총독의 관저였던 건물.
실내에는 사진 촬영을 금지했기에 사진을 찍을 수는 없었다. 그저 고급스러운 앤틱가구들이 잘 지어진 집과 무척 어울렸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호화스럽지만 격이 떨어지지 않는 그런 집이었다.
당시 독일 총독은 이 건물을 짓느라 너무 많은 돈을 낭비하여 파면을 당했다나 어쨌다나...
그건 내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거실 벽면에서 아름다운 성모상을 발견했다.
성모님과 아기 예수 그리고 아기 요한의 그림이 그려진 풍요롭고 아름다운 그림을 본 것이
독일 관저 관람의 감동이다.
그리고 다음에 들린 곳은 5,4 광장이다.
5.4광장은 해변에 위치해 있었는데 1919년 5.4일 중국 북경의 한 학생이 일으킨 반제국주의 혁명운동을 기념하여 조성한 공원이란다. 지금은 중국 국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광장에는 소풍 나온 듯한 시민들이 꽤 많이 있었다. 그곳에서도 잊혀져가던 장면 하나 만날 수 있었다. 도장처럼 생긴 것으로 글자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기법, 이런 것을 혁필화라고 하나? 옛날 우리나라에도 있었다.
영화 서편제 속에서도 이런 글씨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나온 것 같기도 하다.
하여간 지금은 우리나라에 서는 사라진 풍경인데 이곳에서 만났다. 이번 답사길에서 난 종종 내 어린 시절의 풍경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광장에는 붉은 형태의 구조물이 있었는데 이 조각상은 '5월의 바람'이라고 한다고 했다.
바람이 부는 모습을 형상화한 조각품이란다. 아마 청년들의 반제국주의 시위를 바람으로 표현한 것이겠지. 내 것이 아닌 역사에는 이렇듯 아는 것이 없지만1919년 5월 4일이라는 말에 혹시 우리 3.1 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중국 여행의 빠질 수 없는 가이드 추천 여행 상품 코너.. 그곳에서는 뭔가를 팔았는데 여행 일정 중에 이렇게 상점 2군데를 끼워 넣지 않으면 관광 허가가 나지 않는다는 말도 들은 것 같다. 아무 것도 사지 않고 나오니 가이드의 얼굴은 조금은 굳어진 것도 같다.
우리들의 내일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서 숙소가 있는 치박으로 향했다.
버스가 달리는 길가엔 끝없는 옥수수밭이다. 옥수수 밭 앞에는 포프라 나무가 줄지어 심어져 있다.
이 포프라 나무의 용도를 두고, 우리들은 각기 제멋대로 상상을 해 보았다.
이 나무가 가구용재로 쓰이기엔 나무 무르고, 정원수로 쓰기엔 너무 키가 크고, 그러다가 내린 결론은 전 세계에 이쑤시개와 나무젓가락을 제공하기 위해서 심은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ㅎㅎㅎ
가도 가도 끝없이 이어지는 옥수수밭가 포프라나무, 우리들이 그렇게 결론지어 놓고 각자 블로그나 자신의 홈피에 이 포프라나무의 용도에 대해서 오늘 우리들이 오늘 버스 간에서 내린 결론을 써 놓는다면 인터넷상으로 떠돌게 되고 나중에는 그것이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정설이 되어 있을 거라고 말해 놓고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ㅎㅎㅎ
드디어.
오늘의 여장을 풀 제도 국제 호텔에 도착했다. 중국의 밤거리도 호기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숙소에만 들어가면 밤 외출은 금지다. 사전에 얻어 들은 공포스러운 괴담 수준의 이야기들은 밤거리를 나서기를 두렵게 했기에 아예 밤 외출은 없었다.
첫날은 이렇게 마감한다.
여행지에서의 하루는 오전 6시에 기상을 하고, 7시에 아침 식사, 그리고 빡빡한 답사 일정을 소화해야한다. 이튿날 아침 일찍 강태공 사당을 찾았다. 강태공 사당에는 강태공의 세째 아들 구목공도 함께 모시고 있었다.
강태공이 위수 가에서 낚시를 하고 있다가 인재를 찾아 떠돌던 주나라 서백(뒷날 주나라 문왕)에 의해 발탁되어 주나라 재상이 되었다. 그래서 강태공의 낚시 줄에는 찌가 없었다지.. 애초에 고기를 낚을 심사가 아니라 사람을 낚을 낚시질이었으니...
사당 안으로 들어가니 커다란 비석이 발길을 가로 막는다.
무성왕 강태공 의관묘
이곳은 강태공의 의관을 모셔 놓았다는데, 묘하나가 커다란 언덕을 이루고 있다
강태공은 강씨, 노씨, 구씨 등 39개 성씨의 시조가 되는지라 각 성씨들이 세운 비석들의 즐비하다.
그 중에는 대한민국 진주 강씨 종친회에서 세운 비석도 있었다.
강태공 사당을 나와서는 고차박물관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온갖 탈 것들이 시대 순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그저 눈으로 훑어내리는 수준으로 지나치다가 진시황이 타던 마차 앞에서는 잠시 머뭇거린다.이 마차의 수레바퀴가 훗날 도량형을 통일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고 하니,
다시 한 번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되었다.
아득한 고대의 마차들을 보고 밖으로 나와 버스에 오르니 현실의 마차들이 요란한 크랙손을 울리며 지나간다. 산동성에는 유달리 자동차 크락손 소리가 시끄럽다. 여기저기서 연방 빵빵 크락손을 울려댄다. '만만디'라는 말도 산동성에는 통하지 않는 것 같다.
온갖 종류의 탈것들이 뒤섞여서 역동적인 중국의 현재 모습을 보여준다. 전차와 버스가 함께 달리고, 마차와 승용차와 인력거가 사람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 그 곳이 중국 산동성이었다.
다음은 제국 역사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제나라의 대성과 소성을 모방해서 만든 형태라 외곽은 성곽과 비슷하다. 내부에는 제나라 8백년간의 자랑스러운 유물들을 전시해 놓았는데 내 지식이 짧으니 그냥 그냥 지나치나다가 바로 이 탁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공자문소처.
우리가 중국 답사에서 가장 흥미를 가지고 찾아보고 싶은 곳 중의 하나였다. 공자가 제나라에 와서 순임금이 지은 韶(소)라는 음악을 듣고 석 달 동안 고깃맛을 잃었다는 그 유명한 이야기가 있는 곳, 그곳을 찾아왔는데, 그 장소를 찾기 전에 먼저 탁본한 글자를 만난 셈이다.
우리 선생님은 공자의 '소 '음 악을 우리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벌써 1년 전부터' 소' 음악 시디를 중국에서 구입해 와서 각자 하나씩 나눠주고 우리 귀에 그 음악이 익숙해지도록 했던 것이다. 글자만 봐도 이렇게 반가운데, 실제 그 장소에 가 볼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다.
직하학궁.
이 글자 또한 반갑다. 이번 답사 길에서 찾아 볼 곳 중에 제일 기대가 큰 곳이 있다면
바로 '공자문소처'와 '직하학궁터'다.
독일대사관저니 5.4광장이니 하는 것은 그저 관광 상품에 끼워 넣은 장소일 뿐이고 우리들의 관심은
오직 공자의 발자취를 찾아서 따라 걸어보는 것이다.
직하학궁
제나라 위왕(威王),선왕(宣王)은 제나라 수도 임치(臨淄)의 도성 남문인 직문(稷門) 아래에 천하의 학자들을 초빙하여 그들의 저택을 짓게 하였다. 그리하여 제나라는 수많은 인재들을 보유할 수 있었다. 맹자 역시 이 직하학궁에서 강의를 했었다.
전시중에서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축구공이다. 제나라는 축구의 발상지라고 소개하고 있다.
2004년 블래터 FIFA 회장이 그 사실을 공식 인정한 사실을 전시 해 놓았다.
박물관을 나와서 보니 마당에 세워진 제나라 깃발 모형이 꼭 축구 골대같이 생긴 것도
우연은 아닌 것 같다.
박물관을 나와서 금방 안에서 글자로 만나고, 1년 전부터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만난 '공자 문소처'를 찾아가는데 가이드 생활이 10 년 째 접어든다는 가이드도 공자 문소처를 몰라서
박물관에서 다른 가이드에게 공자 문소처를 물으니그 사람은 가이드 생활 17년인데..
역시 모른단다.
내비게이션을 찍고 물어 물어서 찾아 간다. 찾아가는 길가에 먼지가 풀풀 날린다.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서야 궁벽한 시골 한 구석에서 안내 팻말 하나를 발견한다.
'공자문소처'는 바로 이 주물 공장 담벼락에 붙어 있었다. 상상했던 곳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지만 그래도 이런 장소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동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실감한다. 우리가 몇 달 전부터 韶 음악을 시디로 들으면서 우리 귀를 열어 놓았기에 이 장소가 전혀 낯설거나 어색하지 않고 머릿속으로 공자가 감격에 겨워 음악을 듣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는 것이다.
답사전 미리 찾아 본 어떤 자료 사진에서는 글자 옆에는 공자님이 음악을 감상하는 그림도 선명하게 나타나 있었는데 그간 또 시간이 흘렀기 때문일까?
이미 그림의 흔적은 검게 변해서 찾아보기 어렵다. 그냥 돌에 새겨진 글씨만 소중하게 사진에 담는다.
공자가 소 음악을 듣고 감동했다는 것은 비단 음악에서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요순시대를 꿈꾸는 공자의 소망이 그 음악을 듣는 순간 태평성대에서만 나올 수 있는 음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에 더욱 좋아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오늘 우리가 이곳에서 이토록 감격에 겨워하는 것도 그 장소를 찾아낸 기쁨보다 우리가 소 음악에 대해서 공부하고 또 그것을 확인하려고 이 먼 길을 떠난 우리 삶에 대한 감동도 함께 했을 것이다. 함께 이 길을 걷는 인연들이 소중하고 우리의 앞길을 인도해주는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이 우리를 감동케 한 것이리라.
공자 문소처를 나와서 우리는 또 다시 묻고 물어 '직하학궁터'를 찾아 나섰다.
물어물어 가다가 외길에서 버스를 돌리지도 못하고 뒤로 운행까지 해가며 직하학궁터가 있었음직한
근방까지 찾아갔더니
아뿔사~~!!
전방이 봉쇄되었으니 차량통행금지를 한다는 표지판이 우리를 가로 막았다. 저 눈 앞에 멀리 보이는 들판이 직하학궁이 섰던 자리...바로 그 자리인양.. 상상 속에서 그려보기로 한다.
제자백가들이 모여서 저마다 자신의 학문을 주장할 때 논객 맹자가 각개 전투 하듯이
하나하나 깨부수며 자신의 유학을 전파해나는 모습을 상상한다. 맹자는 정말 거침없이 자신을 학문을 전했다고 하니까 충분히 그랬을 것이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되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가슴은 뭔지 모를 충만감으로 가득해져서 마치 풍선을 탄 듯 하늘로 둥둥 떠가는 것 같다. 먼지 풀풀 나는 비포장도로를 벗어나자 반가운 도로명이 보인다.
'문소로.'
'공자문소처를 모르고서야 이런 도로명이 나올 리 없다. 태평성대를 추구하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이제 우리들은 황하강으로 간다.
黃河勝境!
황하강 입구에는 이렇게 써 있다.황하의 빼어난 경치가 시작되는 모양이다.
그리고 안에는
萬里波導!
황하의 물결을 얼른 보고 싶다. 우리 앞에는 거대한 용 한 마리가 하늘을 향해 올라가듯이 꿈틀거리고 있다. 마치 황하의 물속에는 이런 용이 꿈틀거리며 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면서 발걸음이 빨라진다.
입구에 새워진 바윗돌에는 그림인 듯 글자가 새겨져 있다.
구름 雲자와 용 龍자를 합체해서 쓴 글자란다.
황하의 물이 있고 구름이 있으면 용은 언제라도 승천할 수 있으리라..
드디어 황하를 본다. 누런 황토물이 이름처럼 흐르고 있다. '인류 문명의 발상지'라는 거대한 수식어에 비해서는 왠지 초라한 것 같지만 사실...어떤 것이든 그 시작은 미미한 것으로부터 출발이다. 이 초라해 보이는 누런 강물이 우리 인류의 문명의 시작을 알렸다. 교과서에서만 배웠던 것을 오늘 실제로 보고 있다.
중국 사람들은 황하를 '모친의 강'이라고 부른단다. 장강을 아버지의 강이라고 부르고....
그리고 강가를 거닐다가 만난 바위에 새겨진 글자.
四瀆維宗!!
이 글귀를 황하 강가에서 만났다. 처음에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몰랐다.
분명 네 개의 瀆이 있을 것이고 그 중에서 황하가 그 중에 제일이라는 것을 알겠는데, 그 네 개의 독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瀆 도랑 독, 문제는 이 두 번째 글자를 제대로 몰랐다는데 있었다.
도랑이란 뜻을 알고 나니 황하의 지류들이 생각났는데 사전에서 이 글자의 뜻을 알고 나니..문제가 조금은 풀렸다. 그렇다면 4도랑 중에서 으뜸인 것...즉 지류들이 생각났고 황하강의 지류를 찾아보니...백하, 흑하, 위하, 낙하였다. 여행 후 제일 먼저 한 숙제였다.
답사라는 것이 책에서 배운 것을 확인하러 가는 작업이고 ,또 답사 갔다 와서는 수많은 의문을 품고 와서 해결해나가면서 공부하는 것이라면 이번 답사길은 그 어느 때보다 의문이 많아서 다녀와서 되새김질하는 기간이 오래 오래 걸린 것 같다.
黃河福獸!
강가에서 만난 또 하나의 의문, 돌로 조각해 놓은 짐승 밑에 새겨진 글자다.
황하를 지키는 상스러운 동물이겠지. 해태를 닯은 것 같기도 하고, 이 동물의 이름 또한 궁금하기만 하다. 물을 다스린 신으로 '대우'라는 동물이 있다는데 혹시 '대우'일까?
커다란 바위에 새겨 놓은 상형문자들, 황하를 잘 다스린 우왕의 이야기일까?
바위에는 고대 상형문자 같은 것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글자 모양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황하강가에는 이렇듯 황하에 얽힌 이야기들을 형상화 해 둔 조각이며 돌이며 글귀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것들을 돌아보느라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몇 몇은 잠시 일행들에게서 벗어나 그들을 기다리게 했다. 황하강가에서 난 현실의 시간을 잠시 잃어버리고 잠시 먼 과거에서 헤매고 있었다.
또 우리의 발자취를 남긴 곳은 대명호다. 바다처럼 넓은 호수에서 잠시 숨고르기를 했다.
秋柳合煙!
가을 버느나무가 물안개 속에 나붓끼는 모습이 연기 같다는 뜻일까
글자에 어울리게 대명호에는 유난히 수양버들이 많았다.
고전 시에서 많이 등장하는 버드나무는 어디에서도 잘 자라는 나무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별하는 순간에 전해주는 나무이기도 하다. 그 사람이 옮겨가는 그 곳에 그 버드나무 가지를 꽂아두면 역시 잘 자랄 것이고 나무가 잘 자라듯이 그 사람도 그곳 타향에서 뿌리내리고 잘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주기도 한다.
또 다른 의미는 그 사람이 옮겨간 그곳에 이별할 때 준 나뭇가지를 심어서 새 잎이 나면 나를 잊지 말라는 뜻으로 주기도 한다.
옛날 우리나라 시조에도 나온다.
묏버들 가려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대
자시는 창 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 잎 나거든 날 인가도 여기소서
고죽 최경창과 이별하는 장면에서 기생 홍랑이 지어 올린 시다.
호수에 비치는 햇빛이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湖柳如鈺玉
그 물에 비친 보석을 보면서 혼자서...한 줄 시를 지어보면서 쑥스러워 웃는다.
수 많은 시인 묵객들이 시를 남겼다는 대명호에 이르러...시 한 수 짓지 못하고 지나간다는 것이
허전해서 운도 맞추지 못하면서 한 줄 말장난을 해 본다.
그 다음으로 들린 곳은 표돌천이라는 곳이다.
땅에서 물이 퐁퐁 솟아오르고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하는데.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그저 가이드의 뒷꽁무니를 따라다니며 한 바퀴 둘러본다. 두강천이라는 이곳은 삼국지에서의 조조가 마시던 술 이름이 두강주였다나 어쨌다나? 하여간 이 물을 마시면 물맛이 달고 맛있는데 장수한다고 한다. 나도 물 한 모금 마실까 해서 다가갔더니 물을 마시려는 사람들이 줄이 생각보다 길다. 노 부부 두 사람이 커다란 물통에 물을 받느라 그렇게 줄이 길게 늘어진 것이었다. 장수에 대한 염원을 가질 연세는 이미 넘어 버린 것 같은데 인간의 욕심은 한이 없다는 생각을 잠시 하게 되었다. 대명호는 그런대로 시원한 바람맛과 수양버들의 늘어진 맛이라도 느꼈지만 표돌천에서는 아무런 감동도 느낄 수 없었던 차에 진짜 감동은 표돌천을 돌아 나와서 버스에 오르기 직전 길가의 상인들이 파는 표구의 글귀가 우리를 감동시켰다.
영정치원(寧靜致遠)!
고요하면 멀리 이를 수 있다.
이 말이 왜 그토록 반가웠느냐 하면바로 답사 떠나기 전 주에 제갈량의 '戒子吟'을 배우면서공부했던 글귀였기 때문이다.
夫君子之行 (부 군자지행)
靜以修身(정이수신),儉以養德(검이양덕)
非淡泊 無以明志(비담백 무이명지)
非寧靜 無以致遠(비영정 무이치원)
-군자의 행동은 고요함으로써 내 몸을 닦고
검소함으로써 내 덕을 기르고
담백한 것이 아니면 뜻을 분명히 할 수 없고
고요한 것이 아니면 먼 곳에 도달할 수 없다.-
즉,고요하지 않으면 인생의 끝까지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보인다는 것은 안다는 것이다. 이 글귀가 내 눈에 들어왔다는 것이 반가워서 표돌천의 시큰둥함이 일시에 사라져버리고, 다음 일정에서 무엇을 만날 것인가로 기대에 차서 버스에 올랐다.
이제 우리는 태산으로 간다.
내일 태산을 오르기 위하여 버스를 타고 3시간 정도를 이동하고 있다.
태산으로 가는 길가에는 노란 황금빛 모감주 나무가 우리를 따라오고 있다. 산동성은 모감주 나무가 가로수인양 군데군데 모감주 꽃이 한창이었다. 우리 고답 반에서 모감주 나무는 인연이 깊은 나무다.
올 봄에 모감주 자생지를 찾아서 우리는 억수 같은 빗속을 뚫고 동해면 발산리까지 모감주 군락지를 찾아 답사한 적이 있었다.
산동성에서 만나는 모감주나무는 그때의 추억을 되살리게 해 주어서더욱 반가웠던 것이다.
차창 밖으로 모감주 나무가 지나가면 우리들은 모두 소리를 높혀 모감주~~ 모감주!!를 외쳤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꽃이 지고 열매가 맺었는데 여기 산동에서는 지금이 절정인듯 환하게 피어 있어 우리를 즐겁게 해 주었다.
모감주 가로수가 끝나더니 이제는 산들이 우리를 따라 오고 있었다. 산이 보이지 않고 끝없이 옥수수밭이 이어지던 평지만 다녔는데 산이 나타나는 것을 보니 태산이 가까워지고 있나보다.
해가 지고 있다. 산머리에 비치는 햇빛이 신령스러운 기운을 뿜어내는 듯하다.
뒷자리에 앉은 회장님과 나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산의 모습에 탄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그렇게 달리고 또 달려서 버스는 태산 아래 태산 국제 호텔에 우릴 내려놓고 휴식에 들어갔다.
호텔 로비에 들어서자 그곳이 태산 아래임을 알 수 있다. 태산석들이 상품으로 만들어져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악독존'이라 새겨진 작은 돌들, 이 돌들만 봐도 반갑다.
내일 아침이면 우리는 태산에 오르게 된다.
태안 국제 호텔 로비에는 멋진 시가 한 수 적혀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눈에는 알아보지 못할 초서지만 미리 답사를 한 적이 있는 선생님은 처음 태산을 오를 때...이 호텔에 투숙했는데 그때 이 시를 만나서 읽어내지 못해서 참으로 답답했다면서 답사 후 그 시가 두보의 <태산을 바라보며>라는 시라는 것을 알아낸 뒤에
이번 답사 길에서 우리들에게 미리 알려주신 덕분에 우리는 제대로 읽지는 못해도 두보의 시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두보의 시라고 알고 보니..
맨 처음이
'杜甫 詩'라고 끼워 맞춰 읽을 수 있는 눈이 떠지는 것이었다.
'先生'이라는 낱말의 뜻을 깊게 새기는 계기가 된다.
'먼저 난자.'
먼저 태어났다는 것은 결국 먼저 아는 자 일 것이다.
먼저 아는 자가 나중에 오는 자에게 길 안내를 해 주는 것.
그것이 먼저 난자의 소임이라면 우리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선생님의 소임을 차고 넘치도록 해 주시는 셈이다.
드디어 태산으로 출발이다~~
天街
즉 하늘 길이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모든 국민이 외고 있는 시조가 있다면 바로 이 양사언의 시조가 아닐까 한다.
이 시조 때문에라도 태산은 우리에게 참으로 멀고도 가까운 산이었다. 태산은 문명의 힘으로 '오르고 또 오르는 '수고를 덜어서 금방 天街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늘 길은 과연 하늘 길이었다. 비록 케이블카가 데려다 주긴 했으나. 까마득한 하늘 길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이 태산의 정기를 받으며 천천히 걷는다.
태산의 대관봉
대관봉에는 당현종의 기 태산명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들이 돌에 새겨져 있었다.
케이블카를 타지 않고 이 산을 올랐다면 그 감동을 돌에다 새기고 싶을 만도 하겠지만
난 그저...돌에 새겨진 글자들을 끼워 맞춰 읽어보려는 시도를 해 보는 것으로 태산을 올랐다는 것을 실감할 뿐이었다. 기대가 너무 컸기에 내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까?
막상 태산에 발을 딛고 보니 조금은 싱거운 느낌이 들기도 했다.
벽립만인:만길의 암벽에 섰구나.
천지동유:하늘과 땅이 같은 곳에 있네
치신소한:몸을 하늘의 은하수에 둔 듯 하네
암암:바위 바위 ~~
(이 말은 바위처럼 굳센 기질과 의연함을 나타내는 말로 호연지기와 상통하여 맹자의 의기를 기려서 새긴 것으로 <시경>에도 "泰山巖巖"이란 구절이 나온다고
우리 선생님이 가르쳐 주셨다.^^*
그래서 알고 읽는 것과 모르고 있는 것에는 이렇듯 깊이가 다른 것이다.
이래서 답사를 하는 것이겠고....
태산 중턱에는 공자사당이 있었다. 공자가 태산을 올랐던 것을 기리기 위해서 세운 집이겠지.
공자 사당 앞의 글
"태산이 공자고, 공자가 곧 태산이다."
라는 이 글귀로 인해 오늘 태산을 오른 보람을 찾은 듯하다. 사람이 결국 아는 만큼 보인다고 태산을 오르면서 도교 사원을 만났지만 도교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는지라 봐도 별 감흥이 없다가 공자 사당 앞에서' 孔子'라는 글자만 봐도 고향 까마귀를 본 것처럼 반가웠다.
因高喩大;높은 곳으로 인하여 큰 것을 깨우치다.
태산에 오르고서야..공자님의 호연지기를 배운다.
태산을 오르다니...
내가 태산을 오르다니 비록 내 발로 밟아서 오르지 못 하고 케이블카로 올랐기에 그 감격은 감하지만 그래도 공자님이 올랐다는 태산을 나도 올랐다는 그 사실이 참으로 감격스럽다.
그 감격을 가슴에 새기고 다시 태산을 내려온다.
이번 답사길의 제일 주 목적은 물론 공자의 발자취를 찾아보는 것이었지만 그것과 더불어 우리 회원들에게 가장 흥미를 끌었던 답사처가 있었으니..
그곳은 바로 <무씨 사당>이었다.
우리 민족의 개국 신화, 단군 신화를 짐작해하는 그림이 그려진 석실이 있다는 것이다.
중국 산동선 가상현에 있는 전한 시대(기원전 202년~ 기원 후 24)때 만들어진 무씨 사당의 석실 화상석 그림이 단군신화와 흡사하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는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우리민족을 뿌리를 찾아 나선 길이었다. 그런데 무씨 사당을 찾아가는 길 또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중국 현지 가이드들은 잘 몰랐고 여기 저기 물어봐도 그곳을 찾아오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했다.
그래도..우리가 누군가? 기어이 먼지 풀풀 나는 비포장도로를 달리고 또 달려서
드디어 도착했다.
우리들의 기대는 컸지만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우리들의 가이드는 이곳에 상주하는 해설사를 찾아다녔지만 안내 하는 사람은 없는 듯 했다.
떠나기 전에 미리 조사해본 환웅이 환인에게 천부인 3개를 받아 무리 3천명을 거르니고 태백산을 내려오는 그림을 찾으려고 이곳 저것을 부지런히 둘러보지만 그런 화상석을 찾아낼 수가 없다. 안내자가 있으면 후석실에 있다던 그 그림을 찾아 볼 수 있을텐데....
중국 신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모습들을 새겨놓은 돌들만 눈에 띈다.
마음에 조급해진다. 가이드는 빨리 빨리를 외치고, 그 멀리 달려온 시간에 비해서 참관하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자와 콤파스를 들고 있는 복희와 여와가 천지창조를 하는 모습을 새긴 화상석이다.
그리고 또 하나 그림을 발견한다.
이 그림은?
괜히 내 혼자 짐작해본다.
오른쪽 그림이 호랑이 같고 아래 그림이 혼례식 장면 같고 그래서 어쩌면 이것이 웅녀와 환인의 결혼식 장면이 아닐까? ㅎㅎㅎ
참으로 멋대로 상상해보는 것이다.
그림의 해석을 내 멋대로 하다가 급한 마음에 그냥 사진만 찍어 온다.
결국...이 화상석 그림 전체를 탁본해 놓은 책을 사기로 했다. 그 책에는 각 각 그림에 대한 해석이 되어 있다고 하니 그 책을 사서 그림과 대조해 볼 수 밖에 없는데 그 책마저도...몇 권이 없어서 결국 내 손에 까지 들어오지 않았다.ㅠㅠ
다른 회원들이 샀으니 이 그림의 해석은 천천히 알게 되리라. 비록 단군신화의 이야기를 그린 화상석은 찾아내지 못했지만 이곳 무씨 사당의 그 그림으로 인해 우리들은 일연스님이 <삼국유사>에 기록한 단군신화보다 적어도 1200여년은 더 앞선 역사를 갖게 되었다.
단군 신화는 일연스님이 지어낸 이야기가 결코 아니고 우리 동이족의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들을 고려시대에 문자로 기록해 놓은 것이다.
우리들의 뿌리를 찾아 나선 무씨사당의 답사는 시간에 쫓겨서 마음껏 둘러보지는 못했지만
오래 오래 되새김질을 하게 될 것 같다 무씨사당에서 우리들은 급하게 나왔지만 가이드는 시간을 너무 많이 지체했다면서 맹묘를 시간 안에 찾아갈 수 없을 것 같단다.
개방 시간이 오후 6시까지인데 빠르게 가도 6시가 넘을 거라면서 전화를 걸어서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부탁을 한다. 멀리 한국에서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꼭 참배하기를 원한다는 말에 그렇다면 아성전 안에는 들어가서 조배는 할 수 없다는 조건으로 허락을 했다.
맹묘에 도착하니 어둠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우리들은 마음이 바쁘다. 서둘러 아성전 앞에 도착했다. 비록 문을 열고 들어갈 수는 없지만 그 앞에서나마 머리를 숙이고 예를 표했다.
금세 어둠이 밀려온다. 맹묘 옆의 맹부로 이동하는 동안에 거리엔 어둠이 덮쳤다.
맹자의 후손들이 거주하던 공간이라는 맹부는 어둠에 등이 떠밀려 아쉬운 마음을 접고 그냥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버스는 달려서,,
우리들이 마지막으로 머물 권리빈사에 도착했다. 곡부현에 있는 이 호텔은 여느 호텔과는 다른 형태를 띠고 있다. 아담한 2충짜리 건물이다.
현관 입구에 들어서자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라는 공자님의 말씀이 우릴 반긴다.
이제 정말 공자의 공간으로 들어 선 듯 하다. 우리를 싣고 산동성을 누비던 버스도 고단한 몸을 잠시 쉰다.
아침 일찍..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나서 밖으로 나왔다.
어젯밤에 잠시 살펴 본 바로는 이곳 궐리는 크게 위험해 보이지 않았길래 혼자서 새벽 외출을 해도 무방할 것 같아서 살며시 방을 빠져 나온다.
해가 서서히 떠오르고 있는 성터에 혼자 걷는 기분은 상쾌하다. 길에는 마차가 다닌다.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 여행을 하는 기분이다. 중국에 와서 며칠 동안 내 눈에 보이는 풍경들은 참으로 낯설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익숙한 풍경들이었다.
조금 있으면 번잡해질 상가도 아주 조용하다.
각 점포마다 장사가 잘 되길 바라는 글귀들을 써 붙여 놓았는데 중국 사람들은 이런 글자를 대문 앞에 혹은 현관 앞에 써 붙이길 좋아하는 것 같다. 집 대문에도..가게에도..그리고..
방 앞에도 작은 소망을 담은 글자들을 써 붙여 놓았다.
글자체들이 바로 그림이다.
아침 산책을 한 바퀴 돌고 와서
이제 본격적으로 일행들과 공묘를 답사하기 시작했다.
공묘입구
태화원기 :우주 만물의 기운 즉 공자의 가르침이 이와 같다는 뜻이겠지.
공묘에서 제일 처음 내 시선을 끈 것은 그런 글귀보다 구불 구불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향나무였다.
공자가 직접 심었다는 이 나무는 마치 용트림을 하듯 수피가 아주 멋졌는데 나를 감동시킨 것은 건축물보다 공묘에 심어져 있는 나무들이었다.
하나같이 잘 생긴 헌헌장부 같은 나무들이었다.
대성전의 석주.
대리석으로 만든 거대한 석주는 용들이 꿈틀거리는 듯 했다. 살아생전 부귀와는 거리가 멀었던 공자가 죽어서는 왕으로 받들어져서 이렇듯 호화스러운 집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 하다. 공묘에서 노벽을 만났다.
진시황의 분서 갱유때 공자의 8대손 공부가 경전을 벽 속에 숨겨 두었던 것을 노나라 공왕때 궁궐 확장 공사를 하면서 공자의 옛집을 헐다가 벽 속에서 무더기 죽간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을 기념하여 세운 벽이다.
그때 벽 속에 나온 책들이 <상서>,<춘추>,<예기>,<논어>,<효경> 등 수십 편의 유교 경전들이었다.
그리고 내 가슴에 자리 잡은 신기한 그림 하나.
貪圖!
공부에서 만난 이상한 동물 그림이다. 용 같기도 하고 말 같기도 하고...기린 같이도 한 이 동물의 이름은 '탐'이란다. 탐은 이 세상 모든 것을 먹어치우고도 배고파하는 걸신이란다.
먹어도 먹어도 만족할 줄 모르는 탐.. 결국 태양마저 삼키려고 입을 벌리고 있는 이 탐욕의 동물은 공자의 후손들에게 탐욕을 경계하기 위해서 공부의 벽에 그려 놓은 것이란다.
공부에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바로 이 탐이란 그림 앞에서 나를 바라 본 것이다.
욕심..내 욕심이 지나쳐서 사람들을 기다리게 했다.
이것 저것 둘러 보면서 카메라 속에 뭔가를 더 집어 넣으려다가 일행들을 놓치고 말았다.
그들은 나를 찾아 헤매고 나도 그들을 찾느라 아까운 시간을 20분 정도나 지체했다.
반성하면서...욕심을 내서 담았던 사진 한 장을 꺼내본다.
이번 중국 여행길에서 만난 제일 멋진 그림이다. 내가 이름을 짓는다.
新赤壁賦~
붉은 담에 비치는 그림자가 만들어낸 나무 이 나무는 분명 회화나무였음에도 불구하고 내 눈에는 마치 이런 봄날 따스한 햇살 한 줌에 봉오리를 연 고목의 매화 같았다. 그 모습에 홀리어 잠시 시간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시간을 잃은 순간 일행도 잃어버리고..
그런데 이 사진은 이번 중국 여행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사진이다.^^*
잃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
그 다음으로 찾아 간 곳이 공자와 그 후손들의 묘가 있는 공림으로 갔다.
거대한 무덤 군이다. 걸었으면 딱 좋은 길을 전동차를 타고 이런 묘 사이를 달려서 공자의 묘 앞에 들어섰다.
대성지성문성왕
우리들은 공자님께 조배했다.
사실..곡부에서의 답사가 가장 감동적이었지만 여행 갔다 온 후로 미루어 놓은 일상의 일들을 처리하느라 답사기를 쓰는 것이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감동이 조금씩 사라지고.. 오늘 밤의 이 답사기는 정말 숙제하듯이 해치운다는 느낌 말고는 아무 것도 없다. 쫓기는 듯..뭔가 정리를 해야될 것 같다는 강박관념이 심해서 쓰레기 글이 되어 버렸다.
만권의 책을 읽고
만리의 길을 따라
만인의 벗을 사귄다.
이번 여행의 주제에 완벽하게 미치지는 못했지만 여행 떠나기 전에 공자님의 생애라든가 논어와 그 외 몇몇 권의 책을 읽고 나름 준비를 해 간 답사 길이었지만, 떠나서 보니...참으로 내가 안다는 것이 먼지 한 톨 정도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느끼고 온 여행이었다.
그러나 好學의 즐거움은 분명히 느끼고 왔으니..그것으로 위안을 삼을까 한다.
함께 한 인연들이 참으로 소중하다. 고맙고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