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cydides 『The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제5권-15장>
제15장 전쟁 열번째 해 - 클레온과 브라시다스의 사망 -니키아스의 강화
<줄거리>
아테네의 클레온이 암피폴리스를 탈환하기 위해 북진하고, 이에 맞서는 브라시다스의 대비가 있다. 클레온은 트라키아 용병들의 지원을 받아 한꺼번에 공격하려 했으나 기다림에 지친 군대들의 불평 때문에 어정쩡한 공격 시늉을 하다가 약점을 노린 브라시다스의 기습공격을 받고 퇴각 도중에 사망하고 만다. 브라시다스 역시 이 전투에서 숨졌다. 하지만 브라시다스는 암피폴리스인들에게 그 도시의 창건자로 추대받는다.
강경파 클레온과 브라시다스의 사망에 이어 후임자는 평화주의자인 아테네의 니키아스와 라케다이몬의 플레이스토아낙스가 되었다. 이들은 개인적인 약점과 용기 부족으로 평화를 외쳤는데 한편으로는 아테네든, 라케다이몬이든 참담한 실패를 통해 어느 정도 교만이 꺾인 분위기가 평화조약의 체결을 만드는데 일조했다.
라케다이몬과 아테네가 주도적으로 강화조약을 체결했으나 이에 불만은 품은 도시국가들의 항변이 있자, 라케다이몬에서는 오히려 아테네와 동맹조약을 맺음으로써 이들의 불만을 일축해 버렸다. 새 강화조약은 50년 기간으로 했다. 그리고 플라타이아와 니사이아를 제외하고 상대국이 점령한 지역은 돌려주고, 포로교환 및 상호 상대방의 안전을 보장하는 내용으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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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원전 423년. 아테네는 델로스 섬에서 섬주민들을 이주시켰다. 정화를 위한 것이다. 섬주민들은 헬레스폰토스지역의 페르시아 총독 파르나케스가 준 아트라미티움으로 이주했다.
2.
아테네 클레온은 휴전조약이 끝나자, 트라키아로 출병하였다가 토로네 시 방벽에 도착한다. 토로네 시 방벽은 브라시다스가 쌓은 것이다.
3.
클레온의 공격을 받은 라케다이몬 장군 파시텔리다스은 토로네 시로 후퇴하였으나 배에서 내린 아테네군이 먼저 토로네시를 점령하자 사로잡히고 만다. 브라시다스가 토로네 시를 구하러 왔다가 함락된 것을 알고 되돌아갔다. 클레온은 암피폴리스 탈환을 위해 이동했다.
4.
이 시기에 아테네에서는 파이악스를 이탈리아와 시케리아에 사절로 파견했다. 파이악스 사절은 아테네가 시라쿠사에 도전하고 레온티노이의 대중파를 구조할 생각에서 보낸 것이다. 그러나 파이악스는 시케리아에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아테네로 돌아왔다.
5.
파이악스는 이탈리아에서 로크리스인과도 조약을 맺었다. 로크리스인은 아테네가 시케리아의 도시와 조약 맺을 때 참가하지 않은 유일한 도시지만, 다른 도시들과 전쟁 압력을 느껴 아테네와 손을 잡았다.
6.
클레온은 암피폴리스를 탈환하기 위해 에이온을 기지로 삼고 페르디카스와 폴레스에게 용병 지원을 청했다. 브라시다스는 클레온의 움직임을 잘 알고 있었으며 숫적으로 유리한 것을 믿고 클레온이 공격을 감행하리라고 예측하였다. 이에 브라시다스는 중무장병, 기병, 방패병 등으로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7.
클레온은 공격이 늦어지자 불평하는 군대로 인하여 기다릴 수 없었다. 사기가 저하되는 것도 전투에서는 큰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병사들에게는 트라키아 용병들과 사면에서 일시에 공격해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라 하였다.
8.
브라시다스는 아테네의 움직임을 보고 정면승부는 어렵다고 판단해 기습전을 준비했다. 일단 군대를 암피폴리스로 철군시켰다.
9.
브라시다스의 작전 설명 : 아테네군이 방심하고 있으므로 소수의 병력으로 신속히 약점을 찾아 기습전을 감행하고, 혼란한 틈을 타 일제히 대공격을 퍼붓는다. 다만, 비겁해지지 말라.
★ 지휘관의 작전 자세한 작전 설명이 주효. 어떻게 싸울 것인지, 왜 그래야 하는지를 알려줌으로써 각자의 병사가 할 역할을 분명히 알게 함.
10.
브라시다스가 아테네 신전에서 희생드리는 것이 클레온에게 보고되었다. 클레온은 곧 스파르타군의 공격이 있을 것을 생각하고 퇴각 명령을 내렸다. 이것을 놓치지 않고 브라시다스는 공격명령을 내렸다.
이 공격에서 브라시다스가 부상을 당하고, 암피폴리스로 옮겼으나 승전소식을 듣고 숨을 거두었다. 또한 클레온은 도망치다가 미르키노스 방패병에 사로잡혀 죽었다. 아테네군의 대패로 끝났다.
★ 브라시다스와 클레온의 죽음 비교. 명예로운 죽음이 그를 돋보이게 한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어야 할지 고민할 문제.
11.
암피폴리스인은 브라시다스를 영웅으로 추대하여 그를 암피폴리스의 창립자로 결정하고 하그논의 흔적을 모두 없앴다.
★ 건축물 등의 유물, 유적을 없앴지만 투키디데스가 글을 남겼기 때문에 암피폴리스의 창립자는 하그논이란 사실을 오늘날에도 알 수 있다. 문(文)의 강력함.
아테네측 사상자 :600여명, 라케다이몬측 : 7명. 투키디데스는 그 이유를 ‘공포 속에서 순식간에 벌어진’ 전투 때문이라고 한다.
★ 스스로에게 진 자는 남에게 질 수 밖에 없다.
12.
암피폴리스의 전투가 있기 전에 라케다이몬에서는 트라키아 지방에 원군을 파병했으나 파병군이 지체하는 틈에 브라시다스는 죽었던 것이다.
13.
브라시다스를 돕기 위한 파병군은 겨울에 테살리아의 피에리옴까지 침입했지만 테살리아인의 반대에 부딪히고는 귀국한다. 그러나 그들의 진짜 귀국 이유는 라케다이몬인의 의견이 화평 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이다. 브라시다스를 위한 지원이 지체된 원인도 이와 같을 것이다.
14.
화평의 분위기가 성숙했다.
아테네는 델리옴, 암피폴리스의 패배로 인하여 자신감을 잃은 데다, 동맹들의 이탈이 염려스러웠다.
스파르타는 필로스, 스팍테리아에서의 패배와 농노들의 반란 및 아르고스와의 30년 휴전 조약이 끝나고, 펠로폰네소스 동맹국 중 아르고스 편에 붙을 도시국가가 생길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탈국이 생겼다고 한다.
15.
아테네와 라케다이몬이 1년간의 휴전조약을 맺었다. 그리고 1년 사이에 보다 장기적인 화평조약을 맺으려 했다.
16.
클레온과 브라시다스가 사망한 후, 라케다이몬에서는 파우사니아스 왕의 아들 플레이스토아낙스, 아테네에서는 니키아스가 지도권을 장악했다. 둘 다 화평론자였다.
니키아스는 화평론을 내세우며 안전주의를 제일로 삼아, 모험과 도전을 회피했다.
플레이스토아낙스는 자신의 입지 기반이 튼실하지 못한 약점이 난리를 겪게되면 흔들릴 것을 염려했기 때문에 화평론을 폈다.
★클레온과 브라시다스 때는 전투, 니키아스와 플레이스토아낙스 때는 일시적인 평화 상태가 되는 것을 보면서, 지도권의 생각에 의해 시민들의 삶이 좌우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전쟁이든 평화든 몇 사람의 생각에 따라 결정되는 구조는 바람직하지 않다. 현대 사회가 점점 더 시민권을 강화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은 이런 경우와 대비할 때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든다.
17.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양쪽 모두 전투에서 획득한 것은 반환한다는 조건을 화평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스파르타는 플라타이아를, 아테네는 니사이아를 양보하지 않았다.
★ 플라타이아, 니사이아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조국이 회복되지 못하는 것이 뼈아픈 일이었을 것이다. 평화조약은 라케다이몬 및 아테네의 필요에 의한 것이지 플라타이나, 니사이아의 입장은 상관없다. 우리나라가 분단의 현실을 안고 있는 것은 당시 중공, 소련, 미국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결국, 자국의 운명, 사람 개개인의 운명은 스스로가 주도적으로 꾸려야 한다. “내 인생은 나의 것”
18. 서약내용 - 50년간 유지. 포로교환. 중립국 인정. 상호불가침 및 상해나 공격 금지. 전투 중 확보된 영역 반환.
19. 조약 서명자들의 명단
20.
조약이 성립된 해. 투키디데스는 연대 계산을 계절의 순환에 의해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전까지는 요직자의 재임기간 중 초기인지, 중기인지를 따져서 했다고 말하며 자신의 방법이 더 합리적임을 설명한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이다. ‘고민의 산물’
21.
암피폴리스는 조약의 내용에 불만을 품고 아테네 반환을 거부했다.
22.
라케다이몬은 약은 꾀를 생각해 내었다. 곧 암피폴리스와 같은 사태가 발생하는 것은 비단 라케다이몬뿐만 아니라 아테네측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따라서, 라케다이몬과 아테네가 동맹을 맺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다른 도시국가들은 어느 한쪽만을 지지하고 의지할 수 없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