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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인문학, 홍길동전과 교산 허균
- 소통이 필요한 시대에 건진 홍길동전의 인문학 -
차 례
책 머리에 --- 5
1.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 9
2. 홍길동전의 이해
1) 홍길동전의 줄거리 --- 18
2) 홍길동전을 지은 교산 허균 --- 21
3) 홍길동전이 출간된 배경과 원본의 대하여 --- 23
3. 홍길동전이 담고 있는 "사람 공부" --- 26
4. 교산 허균의 이해
1) 교산 허균과의 만남 --- 30
2) 교산 허균이 살았던 때 --- 33
3) 교산 허균의 집안 --- 37
4) 교산 허균이 가까이 한 사람들 --- 46
5) 교산 허균이 한 공부 --- 51
6) 교산 허균의 생각 --- 61
7) 교산 허균의 깨어진 꿈 --- 69
8) 교산 허균의 몇 편의 글들 --- 85
5. "사람 공부"는 곧 깨달음의 세계
1) 나를 찾는 작업 --- 100
2) 앎에서 깨달음으로 --- 101
3) 깨달음은 끝없이 자신을 비우고 우주와 소통하는 일 --- 103
글을 마치며 --- 107
책 머리에
9월 어느날,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곳이 교산난설헌선양회인가를 묻고, 저의 이름을 물으면서 “길 위의 인문학, 홍길동전”에 대하여 강의와 현장 답사를 할 수 있느냐는 문의였습니다. 선양회의 입장에서 누구든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흔쾌히 그러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언제면 좋은지 좋은 날짜를 잡아 달라는 부탁도 받았습니다.
그후, 홍길동전에 대한 것이면 저 보다 앞서 많은 연구를 하고, 책을 펴 낸 장정룡 선생님이 문득 머리에 떠 올랐지요. 그래서 장정룡 선생님께 전후의 사정을 말씀 드리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마침 그때 장선생님은 논문을 쓰는 등 이런저런 일로 몹시도 바쁜 나날을 보내셨던 모양입니다. 틈새 시간을 내면 첫날 강의는 할 수 있다고 하셨지요. 그러면 그 다음 현장 답사는 선양회 사무국장인 김은경님과 저가 함께하면 되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연락을 하여 이런 저희들의 뜻을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데 강의와 현장 답사를 두 사람이 따로 하면 안되고, 그 부탁은 저에게 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마침, 장선생님이 몹시 바쁘시고 또한 저에게 부탁을 하는 것이라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저가 맡아야 하겠구나 싶어 그러겠노라는 답을 드렸습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이렇게 된 것에는 아마도 “길 위의 인문학, 홍길동전”에 대한 것을 먼저 부탁을 받으셨던 소설가 최성각님의 추천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렇게 하여 “길 위의 인문학, 홍길동전과 교산 허균”에 대한 강의를 준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침 청소년들이 읽을 수 있는 책자를 선양회 차원에서 나름대로 만드는 것이 좋겠다는 것을 수 차례 권했던 김은경님의 권유도 있었던 터에 이 참에 작은 책자라도 내야 하겠구나 싶어 용기를 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오래전에 썼던 “민중의 선구자, 허균의 반역”이라 제목의 글을 중심으로 다시금 살을 붙이고 어려운 대목은 고치는 등 한 동안 글쓰기에 골몰했습니다.
이제, 어느정도 그 뼈대가 갖추어져 글머리를 써 그동안의 과정을 말씀을 드리면서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작은 책자를 펴 내려고 합니다.
그동안 부족한 저에게 글쓰기를 강권한 김은경님께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또한 이런 기회를 마련해 준 것이나 다름없는 최성각님께도 고마움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모루 도서관의 한이정님께도 고마움을 전하는 바입니다.
이천십삼년 시월 스무엿새 새벽에
1.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제목 첫 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길 위의 인문학”이란 것은 쉽고도 어렵지요. 알 것 같기도 하고 막상 정리하여 말하려면 주저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이 제목부터 풀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인문학이란 무엇일까? 사전에서는 대체로 이렇게 풀이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언어, 문학, 예술, 철학, 역사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요. 압축하여 말씀을 드리면 문학, 역사, 철학(문사철)을 다루는 학문으로 이야기됩니다. 그런데 이 문학과 역사와 철학은 무엇을 대상으로 하고, 무엇을 중심으로 삼고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인간 즉 사람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문제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정의하면 좋을 듯 싶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문학은 영어로는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일은 인문학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됩니다. 영어로는 휴머니티스(Humanities)라고 한다는데 또 어떤 이는 리버럴 아츠(Liberal Arts)라고도 합니다. 우리가 자주 쓰고 있는 휴머니즘이라는 말이 있지요. 인간적인 그러니까 사람 냄새가 나는 생각을 총칭하고 있는 말입니다. 여기에다 리버럴 아츠(Liberal Arts)를 갖다 놓으면 사람 냄새 중에서도 인간의 자유영혼을 예술로까지 끌어 올리려는 의지를 읽어 내게 되기도 합니다. 이것의 이해가 어려운 것은 학문이라는 규정 때문이지요. 그래서 저는 쉽게 “인문학”은 “사람 공부”라는 표현을 쓴답니다. 이해가 좀 되나 모르겠습니다. 정작 쉽게 풀려고 한 것이 오히려 이해의 방해물이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군요.
이제 한걸음 더 나아 가 보기로 하겠습니다. 인문학이긴 인문학인데 그 앞에 “길 위”라는 수식이 붙어 있는 인문학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인문학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노력의 결실일지도 모릅니다. 순 우리말인 길은 우리 즉 사람이 걷는 길이고 그것은 한자로 도(道)입니다. 같은 말이지만 길은 길인 면이 강하고, 도(道)는 보통의 길 보다는 생각, 바름을 담고 있는, 닦아야 할 길을 일러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도(道)에 대하여 옛 성현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먼저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을 통하여 도(道)를 이해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노자는 도덕경(道德經)1) 첫 머리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겼습니다.
道可道 非常道(도가도 비상도)요
名可名 非常名(명가명 비상명)이라
無名 天地之始(무명 천지지시)요
有名 萬物之母(유명 만물지모)라
故 常無欲以 觀其妙(고 상유욕이 관기묘)요
常有欲以 觀其徼(사유욕이 관기요)라
此 兩者 同出而異名(차 양자 동출이명)이요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동위지현 현지우현 중묘지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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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덕경(道德經)
도덕경은 중국의 사상가이며 도가철학의 시조인 노자(老子)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저서입니다. 《노자》 또는 《노자도덕경》이라고도 합니다. 약 5,000자, 81장으로 되어 있으며, 상편 37장의 내용을 “도경(道經)”, 하편 44장의 내용을 “덕경(德經)”이라고 합니다.
원래 《도덕경》은 상․하로만 나누어졌을 뿐이지만 한대(漢代)에 이르러 장․절로 나누어진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러한《도덕경》이 만들어진 것에 대해서는 한 사람이 한번에 저술하였다는 관점과 도가학파에 의하여 오랜 기간에 걸쳐 당시의 여러 사상을 융합시켜 만들어졌다고 보는 관점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지었다는 주장은 노자를 공자와 같은 시대의 실존인물로 보아 《도덕경》을 그의 작품으로 인정하는 것이고, 이를 부정하는 관점은 노자가 가공인물이며 설사 실존인물이라 하여도 《도덕경》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현존하는 《도덕경》은 여러 사람에 의하여 오랜 기간 동안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용을 이루는 기본사상은 변함없이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사상을 유지해오고 있다는 점에서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습니다.
유가사상은 인․의․예․지의 덕목을 설정하여 예교(禮敎)를 강조하면서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 데 비하여 《도덕경》의 사상은 인위적인 것을 거부하고 무(無)와 자연의 조화, 불상쟁(不相爭)의 논리를 펴 나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도덕경》의 사상은 학문적인 진리탐구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지만 위․진․남북조 시대와 같은 혼란기에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지혜를 밝혀주는 수양서로서도 받아들여졌으며, 민간신앙과 융합되면서 피지배계급에게 호소력을 지닌 사상 및 세계관의 기능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의 경우 《도덕경》에 나오는 내용이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는 학계의 연구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광범위하게 영향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도덕경》의 기본 흐름은 일찍부터 도교신앙과 만나 민중의식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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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잠시 처음부터 다시 풀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道可道 非常道(도가도 비상도)요
이것이 도(道)라고 말할 수 있는 도(道)는 상도(常道) 그러니까 도(道)의 끝점에 있는 최상의 도(道) 즉 불변의 도(道)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名可名 非常名(명가명 비상명)이라
우리가 붙여 부르는 이름(名)은 상명(常名) 그러니까 바른, 참 이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름이 붙여진 그것을 이 이름으로 모두 다 설명하기란 부족하다는 것이지요. 즉 문자의 한계를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야 바로 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좀 다른 뜻이 담겨있긴 합니다만 여기에서 바른 이름을 써야 한다는 공자(孔子)의 정명사상(正名思想)을 살짝 엿볼 수 있기는 합니다. 문자, 말의 한계를 인정하자는 노자(老子)의 가르침이 이러할진대 공자(孔子)의 바른 이름값을 해야 한다고 가르친 정명사상(正名思想)은 맘에 깊이 새겨야 할 참으로 귀중한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이야기할 소통의 문제를 담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잠시 공자(孔子)의 정명사상(正名思想)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공자(孔子)와 그의 제자인 자로(子路)와의 문답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자로가 공자에게, "정치를 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공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을 했습니다. "반드시 이름을 바르게 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마음에 차지 않은 대답을 듣게 된 자로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런 것뿐입니까? 왜 핵심을 찔러서 말씀하시지 않고 그렇게 겉도는 이야기를 하십니까? 어찌해야 바로잡는 일을 하는 것입니까?"라고요. 자로는 팅팅거리면서 재차 물었던 것입니다. 자로에게는 눈앞에 닥친 급한 문제를 바로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정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지요. 자로의 말을 들은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을 이어 갔습니다.
"자로야, 네는 참으로 촌스럽구나. 군자는 자신이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로 말하지 않는 법이다.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말(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면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으며,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도덕적 삶과 법질서가 유지되지 않는 것이다. 도덕적인 삶과 법질서가 유지되지 않으면 형벌 또한 정확하게 시행되지 않게 되어 결국에는 백성들이 손발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이 이름을 정확하게 써야,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게 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야 실천이 뒤따르는 것이다. 그래서 군자는 말을 구차스럽게 하는 법이 없다"라고요.
이제, 중심적으로 다루어야 할 소통의 문제를 잠시 남겨 두고 길에 대하여 좀더 생각을 모아 보기로 하겠습니다.
노자(老子)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無名 天地之始(무명 천지지시)요
有名 萬物之母(유명 만물지모)라
무명, 그러니까 이름이 없는 것은 천지의 원천이며 유명, 이름 붙여진 것은 만물의 어머니라는 것입니다.
故 常無欲以 觀其妙(고 상유욕이 관기묘)요
常有欲以 觀其徼(사유욕이 관기요)라
그러므로 늘 욕심을 내지 않으면 그 끝점에 이르러서 비로소 그 오묘함을 볼 수 있으며 늘 욕심을 내어 그 끝점에 이르면 그 나타남만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此 兩者 同出而異名(차 양자 동출이이명)이요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동위지현 현지우현 중묘지문)이라
이 두 가지는 같은 데서 나온 것인데 다만 이름이 다를 뿐이라는 것이지요. 이를 두고 거무한 현(玄) 즉 신비롭다고 하는데 신비롭고도 신비로운 것은 다름 아닌 신비로움을 지닌 천지 만물의 오묘한 이치에 이르는 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기로 하겠습니다.
“길 위의 인문학”은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서 “사람 공부”을 통하여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아쉽지만 길에 대한 이해는 이 정도의 선에서 마무리하기로 하고 다음으로 이어 가겠습니다.
이처럼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 세상에 태어나 걷게 되는 삶의 과정에서 인간의 문제를 연구하는 학문은 중요한 것이지만 보통 사람들에게는 먼 거리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학문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오늘은 이것을 “사람 공부”로 풀어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자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학문을 하는 일 보다 몇 십배 소중한 문제일 것입니다. 즉 “사람 공부”는 사람에 대한 이해를 그 시작으로 삼는 것이지요. 그러자면 나에 대한 이해가 먼저 되어야 합니다. 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나와 또 다른 나인 너를 이해하고, 나아가 관계 속에 있는 사람을 이해하고, 이 세계와 우주를 이해하는 드넓은 자리로 넓혀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안고 있는 갖가지의 문제를 한 번에 풀어 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싯달타에서 부처로, 하늘의 소리를 들었던 예수로, 신선의 경지를 거침없이 노닐었던 노․장자로, 성인의 가르침을 몸으로 보여 주었던 공․맹자으로 거듭 나는 일입니다.
이것은 삶과 죽음의 문제를 넘어서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름난 성인만이 이 길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늘, 이 만남의 대화가 마무리 될 즈음 큰 지혜를 얻으시고 “지금의 내”가 “시작할 때의 내”가 분명히 아님을 깨우치는 잔잔한 기쁨을 듬뿍 얻으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그런데 인문학을 하는 것. 그러니까 “사람 공부”를 하는 것은 여러 갈래의 길이 있습니다. 오늘은 홍길동전을 통하여 “길 위의 인문학”을 해야 하는 만큼 홍길동전을 통하여 또 홍길동전을 지은 교산 허균을 통하여 차분하게 “사람 공부”를 여러 님들과 같이 열심히 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2. 홍길동전의 이해
1) 홍길동전의 줄거리
홍길동전의 내용은 대략 이렇습니다.
홍길동은 조선조 세종 때 서울에 사는 홍판서의 집에서 시중을 드는 종 춘섬을 어머니로 하는 서자로 태어났습니다.
어느 날, 홍판서가 용꿈을 꾸었는데 길몽이라 생각되어 부정을 탈까봐 말을 뱉지도 못한채 부인을 가까이하려 하였으나, 응하지 않자 포기한 채로 있던 중 때마침 차를 올리려고 온 시비 춘섬의 고요한 자태에 이끌려 관계를 갖게 되었지요. 이윽고 춘섬은 달이 차 길동을 낳았습니다.
길동은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총명하여 하나를 들으면 백을 통할 뿐만 아니라 도술을 익히는 등 장차 훌륭하게 될 기상을 보였으나 천한 태생인 탓으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한을 가슴에 품으며 자랐습니다. 한편 가족들은 길동의 이런 비범한 재주가 장래에 화근이 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기도 하였지요. 그러던 중에 홍판서의 또 다른 첩인 초란은 자식을 낳지 못한 상태에서 길동이에게만 쏟아지는 사랑에 시기를 느낀 나머지 아예 자객인 특재를 시켜 길동을 없애려고 합니다. 이에 길동은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특재를 죽이고 이런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지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사람을 죽인 처지에 놓인 길동은 결국 집을 나와 방랑의 길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다가 도적의 소굴에 들어가 힘을 겨루어 두목이 되었습니다.
그후 특이한 계책으로 해인사의 보물을 빼앗는 활약상을 보이고 자신의 무리를 활빈당이라 부렀습니다. 또한 비책과 도술로써 팔도지방의 탐관오리들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선행을 베풀기도 했습니다. 물론 백성의 재물에는 조금도 손을 대지 않았지요.
그러던 중에 길동은 함경도 감영을 털어 불의한 재물을 빼앗으면서 '어느 날 곡식을 가져간 자는 활빈당 행수 홍길동'이라는 방을 붙여 놓았던 것입니다. 이에 함경감사는 온 힘을 다해 도적을 잡으려고 했으나 실패하자 조정에 장계를 올리게 되었고 조정에서는 좌우 포도청으로 하여금 홍길동이라는 도적을 빨리 잡으라고 재촉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팔도에서 다 같이 장계가 올라오는데 도적의 이름이 똑 같이 홍길동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도적당한 날짜도 한날 한시였습니다. 나라에서 조차도 홍길동의 도술을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하는 수 없이 길동의 아버지인 홍판서와 형인 인형에게 명령하여 설득하도록 하고 길동의 소원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도록 하였습니다.
결국 나라에서는 길동의 소원을 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병조판서라는 벼슬을 내리기로 한 것입니다. 병조판서가 된 길동은 감히 적들이 넘보지 못하도록 나라를 튼튼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아버지를 아버지로, 형을 형으로 부르지 못한 처지에서 병조판서로 나라에 크게 공헌하여 자신의 한을 풀어낸 셈이지요.
이제 길동은 고국을 떠나게 됩니다. 그곳에서 율도국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게 된 것이지요.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과정에서 요괴를 퇴치하여 볼모로 잡혔던 미녀를 구하는 일도 겪게 됩니다. 그 후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듣고 고국으로 돌아와 삼년상을 치른 뒤에 다시 율도국으로 돌아와 나라를 훌륭하게 잘 다스렸다는 이 이야기로 홍길동전은 마무리됩니다.
2) 홍길동전을 지은 교산 허균
홍길동전을 지은이는 교산 허균(許均 1569~1618)입니다.
교산 허균에 대해서는 장을 달리하여 상세하게 다루어야 하는 만큼 여기서는 자세하게 공부를 하지 않고 일반적인 선에서 짧게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허균은 조선조 광해군 때의 문인으로 호는 교산(蛟山)입니다. 당시의 명문인 허엽(許曄)의 삼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조선조의 유명한 여류 시인이었던 난설헌 허초희가 바로 그의 누이입니다. 어려서부터 비범하였으며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였습니다.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으나 서류(庶流)들과 모의하여 역모를 꾀한 것이 드러나 성공하지 못하고 광해군 10년에 역적으로 처형되었습니다. 일설에는 역모와는 상관이 없으며 정치적인 희생양이 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남긴 저서로는 성소부부고로 8권 1책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는 허균의 문집명으로 시(詩), 부(賦), 문(文), 설(說)의 4부로 되어 있지요. 성소는 허균의 또 다른 호이고 부부란 장독뚜껑을 덮는다는 뜻으로 자신의 글을 책으로 묶어 둔다는, 교산 허균만이 쓰는 참으로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비운으로 세상을 마감한 그 자신의 삶을 비추어 볼 때 이 문집이 세상에 남아있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로 하늘의 선물로 여겨집니다. 이러한 성소부부고에는 기행시, 유배시 뿐 아니라 엄처사전, 손곡산인전, 장산인전 등의 전도 있고, 이대중, 허욱, 이상국에게 보내는 편지도 있습니다. 또한 정도전론, 김종직론, 남효온론, 이장곤론이 있고, 정치와 국방과 소인론, 호민론 등의 글도 있습니다. 그리고 노자, 열자, 장자, 한비자, 회남자, 묵자를 읽은 글과 최치원부터 유희경, 전우치까지의 시에 대한 품평이 들어있는 <성수시화>, 음식에 대한 품평이 들어 있는 〈도문대작〉도 들어 있습니다. 특히 허균의 시는 이 문집에 728편이 실려 있다고 합니다. 중국의 시선(詩選)이라든가 그들과 주고받은 시들을 모은 <황하집>에 20여 편 해서 현재 모두 749편이 남은 셈이지요. 이 외에도 임진왜란으로 피난을 와 잠시 머물게 된 사천 애일당 외갓집에서 쓴 것으로 여겨지는 〈학산초담〉2)등이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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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산초담(鶴山樵談)
교산 허균이 지은 시화집으로 1책. 필사본입니다. 지은이가 25세 되던 해인 1593(선조 26)년 임진왜란을 피해 강릉 사천에 머물면서 지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의 또다른 유명한 시화집 중 하나인 성수시화(惺叟詩話)가 신라의 최치원으로부터 당시의 문인에 이르기까지의 시를 통시론적으로 거론한 것이라면, 이 책은 주로 당시의 문인들과 당대 중국(명대) 문인들의 시를 공시론적으로 논한 것입니다.
이 책이 학계에 소개된 것은 멀지 않은 일인데 그 이유는 허균의 문집이나 시화총림(詩話叢林) 등에 실려 있지 않았기에
그 실체를 알 수 없었으나 조윤제님이 소장한 편자 미상의 패림(稗林)이 1969년 탐구당에서 영인․간행되면서 제6집에 실려 있는 것이 발견되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1972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허균전집을 발간할 때 함께 수록하면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학산초담(鶴山樵談)은 총108칙(則)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순수한 시화 및 시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99칙, 시인의 인물됨․문장․학문 등을 논한 것이 9칙입니다. 이 책의 시대적 의미는 당시(唐詩)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주․김정으로부터 시작해 소재 노수신, 호음 정사룡, 지천 황정욱(소․호․지)으로 인해 그 규모가 갖추어지고, 이어서 이달․최경창․백광훈 등 이른바 삼당 시인이 출현하면서 완성을 보아 허봉․허난설헌․권필․백대붕 등에게로 계승되었습니다. 동시에 허균은 이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데 중점을 두어 소․호․지 5칙, 삼당 시인 18칙, 허봉 25칙, 허난설헌 6칙 등 당학파의 시평 및 시화에 대부분을 할애했습니다.
따라서 허균의 시론이 내포하고 있는 진정한 의미는 얼마나 정교하게 당시를 모방하는가의 문제라기보다 당시의 습작과정을 거침으로써 스스로 깨우치는 경지를 개척하려는 데 있다고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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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홍길동전이 출간된 배경과 원본의 대하여
홍길동전의 창작 시기는 17세기로 추정됩니다. 정확한 것은 아니나 아마도 선조 40년부터 광해 5년 4월 사이에 썼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허경진의 허균연보에 따르면 1610년 함열에 유배되었고, 1611년(광해군 3년) 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64권을 엮었으며 1612년에는 최초의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을 저술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산 허균이 선조 말, 사회의 혼란을 틈타고 일어난 7인 서류사건이 <홍길동전>과 그 내용에 있어 매우 비슷하다는 것에서 추정하는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또한 이 작품 창작의 동기도 7인 서류 등에 대하여 동정어린 마음과 삐뚤어져만 가는 현실을 그져 바라만 볼 뿐 어쩌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이어지고 특히 적자와 서자의 신분차별에 대한 분개심을 <홍길동전>을 통하여 뜻을 전파하여 사회 개혁의 단초라도 마련하고 싶은 마음에서 “이런 이야기”를 소개하고 어디에선가 은근히 개혁의 싹이 트기를 바라는, 간절하고도 절박한 맘에서 시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그 영역을 넓히게 됩니다.
이처럼 〈홍길동전〉은 임진왜란 이후 문란해진 정치, 사회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으며 나아가 조선 중기 이후 팽배한 서민 의식이 바탕이 되어 사회 제도의 모순과 적서와 남녀의 신분 차별 등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임진왜란을 직접 체험한 교산 허균은 당시 사회제도의 모순과 서민의 고통을 이 홍길동을 통하여 바로 잡으려 한 것으로 여겨지며, 이러한 뜻을 민중에게 널리 알리기 위하여 한문을 모르는 민중(백성)들을 위하여 한글로 작품을 쓴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은 듯 싶습니다.
<홍길동전>의 원본에 대해서는 이 분야에 연구가 깊은 장정룡 교수의 견해를 따라 이곳에 그대로 옮겨 놓겠습니다.
현재 전하는 <홍길동전>의 이본(異本)은 판각복(板刻本)과 필사본(筆寫本), 신활자본(新活字本)이 다 있는데 판각본이 자료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서울에서 찍어낸 경판본과 안성판본이 같은 계열이고 전주(완주)에서 찍어낸 완판본은 다소 다르다. 정규복 교수는 경판 24장으로 한남서림에서 찍어낸 한남본이 가장 오래된 최고본이며 최선본이라 하였으며 최근 이윤석 교수는 이본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판각본 7종, 필사본 20종, 신활자본 1종 등 전체 28종의 목록을 소개하였다. 판각본은 경판 30장본, 경판 24장본, 23장본, 경판 21장본, 안성판 23장본, 안성판 19장본, 완판 36장본 등 7가지 종류를 소개했는데 필자가 1997년 동해시 망상동에서 완판 34장본을 찾아 냄으로써 완판 〈홍길동전〉도 최소한 2종 이상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외에도 한문 필사본이 있다고 하지만 여기서는 다루지 않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3. 홍길동전이 담고 있는 “사람 공부”
홍길동전의 중심 주제는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으로 부르지 못하는 데”에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소통의 문제입니다. 꽉 막힌 사회상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지요. 하늘이 내린 천명을 거부하고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를 수 없는 사회”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을 해야 합니다. 그 중심에 홍길동이 서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겹쳐서 초란의 질투와 시기가 발동하게 되고 돈으로 매수하여 특재로 하여금 홍길동의 목숨을 노리게 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소설이 그 시대를 반영하듯이 <홍길동전> 또한 당시의 사회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홍길동전>에서도 적자와 서자의 차별, 남녀의 차별, 양반과 상민의 차별이 엄격했습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를 수 없을 정도로 꽉 막힌 사회상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으니까요.
가까스로 홍길동은 특재를 죽이게 되고 어쩔 수 없이 집을 떠나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됩니다. 그 후 길동의 방랑은 시작되었고, 그 과정에서 도적을 만나 힘을 겨룬 끝에 도적의 두목인 괴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부처를 팔아 제 배만 불리고 있는 절을 습격하여 재물을 빼앗고 탐관오리들이 판을 쳐 원성이 자자했던 관아를 습격하여 탐관오리를 무찌르고 곡간을 털어 가난한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는 등 선행을 하는 활빈당으로 변모한 것입니다.
길동의 방랑은 길동이 자신을 헤아리게 되고 무술을 익히며 아울러 자신의 내면 세계를 끝없이 수련해 갔던 자기 수양의 시기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에 곁들여 거둔 재물과 곡식을 가난한 백성에게 나누어 주는 것으로 보아 부정과 부패에 대한 응징과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열고자 했던 열망의 실천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탐관오리를 무찌르면서 자신이 닦은 도술을 쓰게 되고 변신술을 이용하여 8도 홍길동을 등장시킵니다. 이것은 자신의 특별한 힘과 재주를 다른 이에게 보여 주어 자신이 중심이 되는 자기 극대화 작업의 한 과정을 전개시킨 것입니다. 거기에다 선행을 통하여 민중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게 되므로 나라에서도 꼼짝없이 홍길동을 인정하게 되는 상황이 연출됩니다.
상황은 반전되어 결국 길동에게 병조판서를 제수하여 홍길동의 소원을 들어 주는 결과를 낳게 되었지요. 나라의 안정을 위하여 상민에게 병조판서라는 엄청나게 높은 벼슬을 내려 신분차별은 마땅히 극복되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이와 같이 신분차별을 심하게 겪었던 초라하고 한많은 길동이에서 자신의 몫을 훌륭하게 해 내는 병조판서 홍길동이의 모습으로 바뀐 것에서 모두에게 통괘함을 선물하고 있습니다.
이후 병조판서로서 나라를 지키는 임무를 훌륭하게 마치고 새로운 나라, 율도국을 열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를 잃고 삼년상을 치르는 모습이 등장하게 되는 데 이는 사람으로서,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예를 갖춘 길동이의 모습도 보게 됩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이 가야 할 길을 보여 주고 있는 인의예지의 실천적 대목이기도 하지요. 이러한 과정을 거쳐 드디어 새로운 나라, 율도국이 세워집니다. 오늘날로 비유하면 복지국가인 셈입니다. 고루 잘 사는, 그야말로 사람사는 세상을 연 것입니다.
이처럼 홍길동전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양반과 상민으로, 남자와 여자로, 적자와 서자로 구별되는 신분의 차별을 철폐하고 율도국을 세우므로 해서 만민 평등사상을 구체화하고 있는 점입니다. 또한 예나 지금이나 만연된 부정 부패를 없애고, 빈민을 구제하여 고루 잘 사는 복지국가를 세우자는 의지의 나타남입니다. 끝으로 자신의 자리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눈을 돌려 세계로, 우주로 자신을 넓히는 일련의 과정을 암시하고도 있습니다.
처음으로 돌아가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지 못하는 처지”는 바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자각”입니다. 이것은 나를 돌아보는 “자기 성찰”로 이어집니다. 끝없이 나는 누구인가를 묻고 내가 누구인지를 찾는 작업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농경시대를 지나 근대 산업사회를 거쳐 과학의 발달로 인하여 기계문명과 물질문명 그리고 극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시대에 이른 오늘에 있어 더욱 귀중한 명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교산 허균은 이처럼 홍길동전을 통하여, 주인공인 길동을 통하여 모순이 가득찬 당시 사회를 바꾸고자 했습니다. 이제는 교산 허균에 대하여 공부를 해 볼 차례입니다.
교산 허균에 대한 공부는 “민중의 선구자, 허균의 반역”(1986)이라는 제가 처음 교산을 알고 썼던 글을 바탕으로 쉽게 풀어 볼 참입니다.
4. 교산 허균의 이해
1) 교산 허균과의 만남
이제, 교산 허균과의 만남이 시작됩니다.
지금으로부터 27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민중의 선구자, 허균의 반역”이라는 제목의 책에 실린 머리글을 먼저 소개할까 합니다. 당시의 제 심정을 소개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금, 교산 허균을 제대로 소개하자면 꼭 들려 드리고 싶은 말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시작됩니다.
허균은 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그 시대의 흐름을 직시하고 틀어져만가는 역사의 방향을 바로 잡으려고 몸부림을 쳤다. 그 몸부림은 유교의 교조주의에서는 이단으로, 신분차별제도에서는 평등으로, 문화에서는 파격으로, 정치에서는 반역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렇듯 허균이 살던 16세기말, 조선의 상황은 허균으로 하여금 반역의 기치를 들지 않을 수 없도록 급격히 모순에 모순을 더하고 있었다.
그가 죽음의 현장에서 말을 꺼내려다가 머뭇거리며 다시 담았던 일을 생각하면 이 글을 쓰고있는 지금 '허균의 말은 나 자신을 통하여 뱉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몰아 치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허균이 생각했던 모든 것이 다 옳다고 여기지 만은 않는다. 또 허균이 취했던 방법이 최선의 것이라고 생각지도 않는다. 최고와 최선보다 차선의 길이라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그것이 최고와 최선의 것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음을 지적할 뿐이다.
우리가 임진왜란을 예언한 이율곡을 높이 평가하고 찬양하면서, 탁월한 국방정책, 병자호란의 예언과 그 대비책 그리고 바른 피난길의 제시, 이 모든 것을 밝힌 허균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기는커녕 오히려 혁명을 모의하려다 반역의 사슬에 걸렸던 사실로 인하여 오늘까지도 허균을 역적의 괴수로 취급한다는 것은 일제의 식민사관에 길들여진 통치꾼과 기성세대의 허구성, 기만성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되고 말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의 각오와 역할은 보다 중요한 것이다.
우리의 역사는 민족을 사랑하고, 민중을 섬기는 큰 뜻을 가슴에 품은 영원한 젊은이에 의해 다시금 쓰여져야 한다. 이러한 작업이 뒤로 미루어질 때 우리는 미래의 역사에 또다시 죄를 짓는 꼴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 우리는 있는 역사적인 사실을 당당히 드러내지 못하는가? 어쩌면 역사적인 사실이 진실로 밝혀지면 오늘의 통치꾼은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기득권을 일시에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스스로가 숨기고 널리 드러내지 않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의 논리 정연하고 확고한 개혁사상이 사회개혁의 의지를 뒷받침하고 있으니 그 실천은 비록 반역의 사슬에 걸리고 말았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커다란 감명을 주어 우리로 하여금 상식과 진실이 썩어 들어가는 오늘의 모순된 사회상을 개혁하게 하고, 민중의 숭고한 피를 먹고 당당히 자랐어야 할 민중혼 마저 꺽어 버리는 오늘날의 병든 정치문화를 깊이 갈아엎어야 할 사명을 부여하고 있다. 또한 뛰어난 문장가로 한문에 밝았던 허균이 왜 다들 천대시하는 한글로 홍길동전을 써 그의 꿈을 나타냈을까? 천대받던 모든 민중을 사랑하지 않고는 될 수 없는 일이다. 그의 가슴에서 태어난 율도국은 그저 꿈의 세계로만 치부될 수 없다.
우린 분명히 허균이 꾸던 꿈을 이어서 계속해 꾸어야 하고 꿈의 실현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져버리지 않도록 각오를 단단히 하여 오늘의 삶을 보다 철저히 살지 않으면 안된다.
이 글에서 먼저 허균이 살던 때를 알아보았고 그의 집안과 그를 가까이 한 사람들을 살펴보았으며 이어 그가 한 공부에 대해서도 분류하여 알아보았다. 또한 그의 사상을 개혁사상, 평등박애사상, 국방정책 등으로 나누어 알아보았고 이어 깨어진 꿈이라는 제목으로 시대적 사건별로 그의 죽음까지를 살펴보았다. 우리의 최초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가 있었으므로 다루지를 않았다.
모든 것이 부족하여 처음 생각대로 잘 정리되지 못 하였다. 이 글을 쓰면서 한동안은 부족한 내가 이 작업을 계속해 낼 수 있을까하는 걱정으로 몹시 마음이 불안하였지만 한편으로는 누군가가 해야만 된다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만용을 부려 보았다.
이제, 제가 그 때 부리던 그 만용을 지금 다시 부리나 봅니다. 교산 허균과의 만남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2) 교산 허균이 살았던 때
교산 허균이 살았던 시대는 16세기말에서 17세기초였습니다. 이때는 조선중기로 태평했던 시기는 지나가고 새로운 뒤틀림이 움트기 시작하던 때입니다. 지배지식층은 나태와 안일에 빠져 공리와 공담만 일삼으며 세월을 보냈고 급기야 개인 감정과 권력획득을 목표로 하는 훈구와 사림의 떳떳치 못한 대립으로 무오사화는 일어났고 잇달아 갑자, 기묘, 을사사화로 연결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크게 보면 왕권과 신권의 갈등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훈구와 사림을 이용한 측면이 너무도 강하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와중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사회의 혼란상은 더욱 격심해져 백성은 죽지 못해 살아갈 뿐이었습니다. 또 난리가 끝난 후에도 국민정신을 가다듬기는 커녕 서얼금고를 더욱 강화하여 특권계급의 횡포는 점점 심해져 갔고 도처에는 자신의 사리사욕에만 눈이 어두워진 탐관오리들만이 들끓었습니다. 사회상은 극도의 분열과 빈곤으로, 무질서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지요.
그때의 조정을 살펴보면 선조23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에 조정에서는 일본의 실정을 알아보려고 황윤길과 김성일을 통신사로 하여 일본으로 시찰을 보낸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보고는 당쟁으로 인한 파벌싸움으로 일치될 수 없었으며 그것은 뻔한 일로 나타났습니다. 막상 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를 급히 책봉해야 할 필요를 느껴 선조는 둘째 아들 광해군을 태자로 삼았고, 여러 번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으나 혼란한 때여서 그렇게 할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첫째 아들 임해군이 있었지만 세자로 삼지 않은 것은 그의 성질이 거칠어 인망이 없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선조의 눈밖에 났던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선조 33년, 왕비(아들이 없었던)가 죽자 35년에 김재남의 딸을 왕비로 삼으니 영창대군이 태어나 적통이 된 셈이었지요. 왕권의 계승문제는 여기서부터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선조는 전날에는 광해군을 좋아했는데 적통인 영창대군이 자라자 권력의 획득에만 눈이 어두운 간신배들은 선조를 축축거렸고 이에 선조도 은근히 영창대군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졌던 것입니다.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 간의 갈등은 병중에 있던 선조가 졸지에 죽자 세자로 책봉되었던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따라서 영창대군을 지지하던 소북파의 권세는 일시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에 실권을 장악한 대북파는 광해군으로 하여금 형제를 죽이고 인목대비마저 유폐시키는 등 패륜행위를 저지르게 되었지요. 어릴 때의 총명이 난폭과 나약으로 변질되고 만 광해군의 등장은 조선 중기를 어떤 기대조차 가질 수 없도록 암흑기로 몰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에 있어 광해를 다시금 재조명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긴 하지만 결국 대북파에 눌려있던 소북파인 서인 이귀․이괄․최명길․김자점에 의하여 쿠데타가 일어나 인조가 즉위하게 되는데 이를 역사는 인조반정으로 기록하여 오늘에까지 전하고 있습니다.
서얼금고로 얘기되는 신분차별은 그 폐가 심하여 재능이 있고 큰 뜻을 품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서얼이라는 명목 때문에 자신의 뜻을 펴 나라와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길은 꽉 막혀 있었습니다. 결국 시세를 잘 타는 무리들만이 권력에 붙어 자기의 안일만을 구했던 것이지요. 또한 천민은 천민대로 천대를 받았는데 1차 생산집단인 평민․천민들은 전쟁이 터지면 자신과 가족을 돌볼 겨를조차 없이 의병에 가담하여 나라를 지켰던 것입니다. 또 여자를 자신들의 노리개감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던 당시의 지배지식층들은 한술 더 떠서 여자의 개가를 금지시켜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 버리는 허위에 가득 찬 권위만을 내세우는 등 똑같이 부여받은 인권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상은 유교의 교조주의, 즉 그 독단성으로 인하여 더욱 심화되기에 이르렀고 심지어는 사고의 영역까지 얽어매는 부끄러운 꼴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3) 교산 허균의 집안
교산 허균은 초당 허엽의 3남 3녀 중 막내로 강릉 사천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그 첫째로 강릉 초당에서 태어났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외갓집인 강릉 사천 애일당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며 셋째로는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났다는 것이고 끝으로는 원주에서 태어났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를 종합해 볼 때 강릉 초당 아니면 사천 애일당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따라서 강릉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것에는 큰 무리가 없겠지요.
이런 허균의 집안의 성씨는 가락국 왕비인 허왕후에서 얻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고려 초에 들어와 시조가 양천을 식읍으로 받은 것에서 그 시작을 삼고 있지요. 고려 5백년을 마칠 때까지 정승이 된 사람이 열한 분, 추부(樞府=조선의 중추원)에 들어간 사람이 여섯 분, 학사가 아홉 분, 공주와 혼인한 하람이 여섯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대부분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분들이랍니다. 이어 조선에 들어와서는 정승이 세 분, 찬성이 두 분, 육조의 경이 네 분, 공신이 세 분, 학사는 열두 분인데 그 가운데 충정공 형제와 허집, 허자, 초당 허엽을 최고로 일컫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교산 허균은 고려 충열왕 때의 문신인 허공의 직계 후손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허공은 정직․청렴했으며 대원방면의 외교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요. 특히 전함을 건조하는 일에 여러 번 참여했으며 그럴 때마다 끝까지 그 책임을 다하는 성실성을 보였다고 합니다.
허균의 증조할아버지인 허종은 철저한 배불론자였으며 허종의 동생인 허침은 연산군의 폭정에 앞장서서 반기를 든 의기에 찬 남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할아버지 허한은 그 당시의 이름있는 선비로써 특히 글씨와 그림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고 전합니다.
이제 허균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그의 가족을 소개하기로 하겠습니다. 동인의 우두머리였던 아버지 허엽은 서경덕의 문인으로 노수진을 벗으로 삼았으며 학자, 문장가, 외교가, 정치가라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바른 말을 잘 했으며 공사를 엄격히 구분했는데 모함으로 죽었던 조광조의 한맺힌 원한을 풀어줄 것을 청하고, 허자와 구수담의 무지를 주장하다 벼슬에서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성리학에 밝았던 그는 학문계통이 다른 이퇴계의 칭찬도 받을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허엽은 전처에서 난 두 딸(그 중 한 분이 우성전의 아내)과 허성, 후처에서 난 허봉, 허난설헌, 허균을 두었는데 허균의 나이 열두살 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어머니 김씨는 강릉 사천 애일당에서 지냈던 김광철의 딸로서 일찍이 남편을 잃고 이어 아들 봉과 딸 난설헌, 며느리(허균의 처)를 잃은 후 슬픔에 잠길 사이도 없이 임진왜란을 겪어야 했던 한 많은 이 땅의 어머니였지요.
허균의 큰 누이는 우성전의 아내가 되었으며 남인의 우두머리였던 우성전은 퇴계의 문인으로 성리학에 밝았으며 임진란 때에는 의병장으로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또 큰형인 허성은 유희촌의 문인으로 아버지와 비슷한 성품을 지닌 그는 문장가․외교관․정치가로 활약한 당대의 이름난 선비였습니다. 특히 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을 따라 일본에 다녀온 후 그들이 일본의 침략은 없을 것이라는 동인인 김성일의 주장에 반박하고 일본의 침략은 틀림없이 있을 것이라는 서인인 황윤길의 주장에 같은 입장을 취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당파를 초월해 있음을 보여준 흐뭇한 일이 아닐 수 없지요. 또한 그는 선조가 죽을 때 어린 영창대군을 돌보아 줄 것을 부탁할 정도로 믿음이 두터운 선비였습니다.
작은 형 허봉은 허성과 같이 유희촌의 문인으로 박희립을 따라 명나라에 다녀온 후 동인의 중심 역할을 하였으며 박근원과 함께 병조판서 이율곡이 이론만 내세우고 군정을 게을리한다고 탄핵하다 도리어 갑산으로 유배를 당하였지요. 그후 이조판서가 된 이율곡의 아량을 기대했지만 어쩔 수 없었고, 홍문관 동기생인 유성룡의 수고도 헛일이었습니다. 나중에 영의정 노수신의 노력으로 삼년만에 풀려났지만 서울로 들어 올 수 없다는 단서가 붙어 있어 서울 주변에서 서성거리는 신세로 전락했지요.
이미 그의 가슴은 사나이의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지배지식층의 흐름을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유랑생활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지만 큰 가슴을 펴지도 못한 채 금강산에서 서른 여덟이라는 짧은 생애를 마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잠시, 교산 허균에게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작은 형인 하곡 허봉이 죽기 바로 직전에 동생 교산 허균에게 보냈던 시를 소개합니다.
楓嶽寄舍弟(풍악기사제)
- 풍악산에서 동생에게 -
八月十五夜 獨立毘盧頂(팔월십오야 독립비로정)
팔월 보름날 밤 나 혼자 비로봉 꼭대기에 서다
桂樹天霜寒 西風一雁影(계수천상한 서풍일안영)
계수나무 하늘엔 서리가 차고 불어오는 서풍에 기러기 그림자
兄在順天府 弟居明禮坊(형재순천부 제거명예방)
형은 남쪽 순천 땅에 아우는 서울 명례방에 있다네
年年離別恨 苦淚濕秋霜(년년이별한 고루습추상)
해마다 쌓이는 이별의 한, 고통의 눈물되어 가을 서리를 적시네
또한 여기서 잠시, 하곡 허봉을 더욱 깊이 이해하기 위하여 이광식의 허봉에 대한 글을 그대로 옮겨 놓겠습니다.
허균의 또 한 분의 스승은 바로 작은형 하곡 허봉이었다. 허균이 4 살 되던 해에 작은형은 22 살 젊은 나이로 문과에 급제했는데, 이는 첫째 형 허성(許筬)보다 11 년이나 앞선 급제였다. 허균은 허봉에게서 시를 배웠고, 그를 통해 당대의 이름난 시인이나 문장가를 만났다. 정4품 홍문관 응교를 지낸 뒤 하곡 허봉은 예조좌랑을 제수 받고, 중국 가는 사신의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오기도 한다.
시를 힘차게 짓고 술을 대단히 좋아하는 하곡 허봉은 바른말도 거침없이 하는 성격이었다. 허봉 왈 "율곡 이이가 갑자기 높은 벼슬자리에 승진하여 나라의 중한 책임을 맡았으니, 마땅히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마음을 다하여 직무를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군사 행정의 중한 일을 아뢰지도 않은 채 먼저 시행했고, 내병조까지 들어왔다가도 끝내 임금의 명을 받들지 않았습니다.… 파직시키기를 청원합니다." 병조 판서 이이를 탄핵하는 이런 글을 올렸다가 반대파의 주장에 따라 선조는 하곡 허봉을 함경도 갑산으로 귀양 보낸다.
이에 하곡 허봉이 시를 짓는다. "차가운 나무에 갈가마귀 울고 날은 저무는데 / 술 한 동이 가지고 와 위로해 주니 쫓겨 가는 신하 서글프구나. / 이 세상에서 서로 만날 날 다시는 없을 것 같아."
배웅 나온 친구들 앞에서 읊은 이 시의 내용처럼 하곡 허봉은 귀양 간 지 두 해 만에 풀려났지만 곧 금강산 생창역에서 객사하고 만다.
이렇게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형을 위해 동생 허균이 형의 시를 모아 책으로 편찬한 시집이 '하곡시초'인데, 이번에 그 희귀본이 발견됐다. 강원도의 문화 역량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귀중한 문화 유산이 아닐 수 없다.
작은 누이 허난설헌은 허균과 같이 손곡 이달에게 시를 배웠습니다. 일곱 살때부터 훌륭하게 시를 지었으며 여덟살 때에 지었다고 하는 광한전 백옥루상량문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잠시 시 부분과 그 아래 쪽에 있는 기원 대목을 한글로 풀이한 것으로 감상해 보겠습니다.
어영차 떡을 들보 동쪽에 던지노니
새벽에 봉황을 타고 요궁(瑤宮)에 들어갔더니
날이 밝으면서 해가 부상(扶桑) 밑에서 솟아올라
붉은 노을 일만 올이 바다를 붉게 비추네
어영차 떡을 들보 남쪽에 던지노니
옥룡이 아무 일 없어 연못 물이나 마시니
은평상 꽃그늘에서 낮잠을 자다 일어나
웃으며 요희(瑤姬)를 불러 푸른 적삼을 벗기게 하네.
어영차 떡을 들보 서쪽에 던지노니
푸른 꽃에 이슬이 떨어지고 오색 난새가 우는데
옥자(玉字)를 수놓은 비단옷 입고 서왕모를 맞아
학을 타고 돌아가니 날이 이미 저물었네.
어영차 떡을 들보 북쪽에 던지노니
북해가 아득해서 북극성이 잠기고
봉새의 깃이 하늘을 치니 그 바람에 물이 치솟네.
구만리 하늘에 구름이 드리워 빗기운이 어둑하네.
어영차 떡을 들보 위에 던지노니
새벽빛이 희미하게 비단 장막을 밝히고
신선의 꿈이 백옥 평상에 처음으로 감도는데
북두칠성의 국자 돌아가는 소리를 누워서 듣네.
어영차 떡을 들보 아래에 던지노니
팔방에 구름이 어두어 날 저문 것을 알고
시녀들이 수정궁이 춥다고 아뢰네.
새벽 서리가 벌써 원앙 기와에 맺혔네.
엎드려 바라오니, 이 대들보를 올린 뒤에 계수나무 꽃은 시들지 말고, 아름다운 풀도 사철 꽃다워지이다. 해가 퍼져 빛을 잃어도 난새 수레를 어거하여 더욱 즐거움 누리시고, 땅과 바다의 빛이 바뀌어도 회오리 수레를 타고 더욱 길이 사소서. 은빛 창문이 노을을 누르면 아래로 구만리 미미한 세계를 내려다 보시고, 구슬문이 바다에 다다르면 삼천년 동안 맑고 맑은 뽕나무 밭을 웃으며 바라보소서. 손으로 세 하늘의 해와 별을 돌리시고, 몸으로 구천세계의 바람과 이슬 속에 노니소서.
이것을 여덟 살에 지었다고 하는데 믿겨 지나요? 신동으로 소문이 날만 했습니다. 당시 사회의 분위기, 집안의 분위기 또한 당시 문화를 감안할 때 남편 김성립과의 의좋은 부부로서의 생활은 기대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언제나 고독 속에서 한 많은 청춘을 노래할 뿐이었지요. 결국 아깝게도 스물 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교산 허균의 나이 스무 살에 형 하곡 허봉을, 스물 한 살에 누이 난설헌 허초희를 잃은 것은 크나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특히 허균은 형 허봉에게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고 누이 허난설헌에게서는 핏줄의 뜨거움을 체험했던 것이지요. 한 인물이 성장되어 가는 과정에서 가정이 미치는 영향은 가장 바탕이 되는 것으로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사고의 틀은 이때 이미 그 자리를 잡기에 이르렀습니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허균은 작은 형 허봉과 작은 누이 허난설헌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았는데 허봉을 통하여 손곡 이달의 문하에서 누이 허난설헌과 같이 공부를 하게 되었고, 사명당도 만나게 되어 불교에 눈뜨기 시작했을 뿐만이 아니라 당시의 많은 인물들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열 다섯 살 때 누구보다 허균을 이해하고 아껴주던 형 허봉이 귀양을 가게 되어 허균의 가슴은 찢어질 듯이 아팠을 것입니다. 귀양을 간 형이 보내준 여러 편의 시를 읽고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되었지만 그때는 이미 형 허봉의 마음은 방랑의 길을 택하여 또 다시 헤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삶과 시대와 역사를 얘기하고 학문의 바른 자리를 논하기도 했었을 것입니다. 형 허봉은 불만스러운 현실에 저항하면서 사나이로서의 기개와 포부를 펴지도 못한 채 응어리진 가슴을 지니고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야 말았습니다.
형 허봉의 죽음을 지켜본 허균의 가슴에는 불같은 사회개혁의 의지가 싹트기 시작했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기존의 질서, 기존의 학문, 기존의 사고, 기존의 틀에 대항하여 반의식 사상은 차츰차츰 자리를 틀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허균의 삶을 투영해 보노라면 이러한 반사상, 즉 저항정신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얘기를 했지만 시집을 간 누이 난설헌 허초희의 삶을 지켜 본 허균은 형에게서 느낀 것과는 또 다른 사회의 모순과 질곡에 반의식을 갖게 되었고 남존여비로 얘기되는 사회신분 차별에 강한 반발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물론 다음 장에서 얘기 될 스승 손곡 이달에게서도 영향을 받아 서얼금고의 악폐에 대한 강한 반발로 나타나게 됩니다.
4) 교산 허균이 가까이 한 사람들
사람을 알려고 하면 그 사람의 친구를 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제, 교산 허균의 친구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에 앞서 가르침을 받았던 스승에 대해서 잠시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또한 친구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니까 말입니다.
교산 허균은 누이 난설헌 허초희와 같이 서류 출신 시인 손곡 이달의 문하를 드나들면서 시 공부뿐만이 아니라 문학․인생․역사를 깨우쳤고 그 영역을 넓혀 갔습니다.
손곡 이달은 원주사람으로 일찍이 문장에 뛰어났지만 서자에게 벼슬길이 막혀 있음을 알고 술과 방랑으로 저려오는 가슴을 달래며 살아갔던 사람입니다. 이러한 손곡 이달에게서 교산 허균은 자유분방한 이태백의 시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불행한 손곡 이달의 삶은 허균으로 하여금 서자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게 했고, 개혁의 의지를 다지도록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허균이 가까이 한 사람들을 간단히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유희경은 천민출신의 시인으로 특히 상례에 밝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나라를 도왔고 광해군 때는 이이첨으로부터 인목대비의 폐비상소를 부탁 받았으나 거절하고 절교했다고 합니다.
이정은 평민출신의 화가로 옳지 않는 것과는 타협하지 않는 꿋꿋한 사람으로 어느 날 재상이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자 두 마리 소가 재물을 가득히 싣고 대문으로 들어서는 그림을 그려주어 눈이 어두운 재상을 통렬히 꾸짖었다고 합니다.
이징은 이정과 같은 평민출신의 화가. 권필, 이안눌, 이재영, 조위헌, 허적. 이들은 전 오자로 불리며 기윤헌, 임숙영, 정응운, 조찬한 등 이들은 후 오자로 불립니다. 이들은 모두 모순된 세상을 한탄하고 썩은 권력과는 끝까지 타협을 거부한 당당한 선비들이었습니다. 이들 중 권필은 광해군 초에 이이첨이 사귀기를 원했으나 가까이 하지 않았고, 광해군의 처남인 유희분이 날뛰는 꼴이 더러워 궁유시를 지어 비웃음을 던진 것이 광해군에게 알려져 심한 폭력을 당했고, 이어 귀양을 가던 중 귀양길에서 말술을 청하여 마시고 죽었다고 전합니다. 서양갑, 심우영, 이경준, 허홍인, 박치의, 김경손, 박응서. 이들은 서류출신으로 서얼금고를 없애달라고 연명으로 상소를 올렸으나 묵살된 후 혁명을 모의하였고, 혁명에 쓰일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문경새재에서 은상을 털다 잡히어 이이첨에게 이용당하고 죽었습니다. 특히 서양갑은 동지들에게 남아가 죽지 않으면 다행이지만 죽는다 해도 이름은 크게 남을 것이라고 하여 이들의 기개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정협은 칠서들의 거사 때 행동대원으로 활약했다고 합니다. 현응민, 김윤황, 김개, 하인준, 우경방, 김우성, 황정필. 이들은 허균과 같이 혁명을 계획하다 남대문격문사건으로 발각되어 허균과 같이 죽음을 당한 사람들입니다. 이재영, 이사호. 이들은 서류출신으로 허균과는 어릴 때부터 친구로 지냈으며 심우영과 같이 거사에 가담했다고 합니다. 해안, 옥준, 송운, 서산, 사명대사. 이들은 중으로 해안은 허균과 동갑이고 사주가 같았으며 허균과 한 열흘을 같이 지내다 헤어지게 되었을 때 "해안을 산으로 보내면서"라는 제목의 글을 써 서운한 마음을 달랠 정도로 가까웠다고 합니다. 서산, 사명대사도 허균과 특별히 친했는데 서산대사가 죽자 제자들이 대사의 비문과 문집서문을 부탁할 정도였고, 사명대사의 비문과 문집발문도 허균이 지었습니다.
계생, 무옥, 추섬. 계생(매창)은 기생출신의 여류시인이요, 무옥은 기생출신의 여류 작가로 원부사3)를 지은 것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추섬은 교산 허균의 첩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남자와는 또 다른 친구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 하며 허균과 같이 죽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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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원부사(怨夫詞)
이 작품은 조선의 규중(閨中)에서 눈물과 한숨으로 세월을 보내며 늙어버린 자신의 모습과 임에게 버림받은 정한(情恨)을 한탄조로 노래로 글쓴이의 외로운 정서가 절절하게 묻어나는 가사(歌詞)입니다.
원부사(怨夫詞)
십오 세 갓 지내고 이십이 못한 때에
천생려질(天生麗質)은 남들로 일러 있고
연광(年光, 세월)이 수이 가고 조물이 샘을 냈나
추월춘풍(秋月春風)이 베올에 북 지나가듯
운빈홍안(雲鬂紅顔, 귀밑머리가 탐스럽고 아름다운 여자)이
꿈같이 지난 후
늦봄에 다 진 도화(桃花, 글쓴이 자신을 비유한 말)를
어느 나비(남자를 비유한 말)가 돌아보리
이전에 좋던 소리 임의 귀에 듣기 싫고
이전에 곱던 얼굴 임의 눈에 보기 싫다
청루주사(靑樓酒肆, 술집) 좋은 곳에 새 사랑 경영하여
월황혼(月黃昏) 겨워 갈 때 정처 없이 나가더니
경구준마(輕裘駿馬, 가벼운 가죽옷과 잘 달리는 말) 갖추고서
어디로 다니는고
인연이 끝났거든 생각나지 마소서
기별을 못 듣거든 그립지나 말려 무나
한 달 서른 달 다 보내고 열두 달 지낸 후에
옥창에 앵도화는 몇 번이나 피고 지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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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허균이 가까이 한 사람들은 불우한 삶을 살아간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대부분 평민이나 천민으로 그들과 같이 어울려 슬퍼하고, 기뻐한 사실은 당시의 사회계급 질서에서 생각할 때 상상하기 조차 어려운 일입니다. 독서를 통해서 진리를 깨닫고, 깨달은 진리를 실천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지요. 책벌레 교산 허균의 실천적인 독서법을 우리들에게 남겨 준 셈입니다.
교산 허균은 이미 자신의 자리를 박차고 한없이 낮은 민중의 자리로 내려와 있었고,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이룩하고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사회개혁의 꿈을 꾸었던 것입니다.
5) 교산 허균이 한 공부
① 유학
유교라는 큰 흐름이 사회를 감싸고 있던 시대에 태어나 유교집안에서 자란 허균은 성소부부고의 학론에서 다음과 같이 유교에 대한 자신의 학문 태도를 밝히고 있습니다.
"옛날에 학문(유학)하던 사람은 자기 몸만 착하게 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대개 이치를 깊이 공부해서 온 천하의 변고에 대응하고…"
이러한 그의 태도는 자기만을 위한 학문에서 이웃을 위한 학문의 길로 그 방향을 바르게 잡고 있습니다. 즉 자신의 안일과 영달만을 일삼던 상시 유학자들의 학문관을 부정하면서 현실을 직시하고 그 비리를 바로잡는 적극적인 현실참여의 학문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의 사회는 유교의 교조성으로 지적되는 독단에 빠져 있었던 만큼 바른 유학을 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유학을 닦아야만 양반계급으로서의 최소한의 자격이 주어진 셈이고 나아가 벼슬을 하여 지배층으로서의 자리를 굳힐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유학 이 외의 어떠한 학문도 정통학문으로 인정받을 수가 없었으며 유학 중에서도 공․맹과 정․주의 학설만을 강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학과 도학을 한 사람은 물론 유학 중에서도 정통이라 일컫는 것 이 외의 유학을 하면 이단으로 사회에서 격리되었던 것이지요. 이 엄청난 독단은 오늘날 이름이 드높게 알려진 퇴계 이황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왕양명이 감히 방자하게 우리 주자를 배척하고 함부로 그럴 듯한 여러 말을 인용하여 억지로 끌어다 붙이고"
사회전체가 독단적인 지배 지식계급의 논리에 빠져 있고, 특히 학문의 폐쇄성이 그대로 드러난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당시 사회지배계급의 학문에 대한 독단과 폐쇄성은 장유의 계곡만필에서도 다음과 같이 그대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중국의 학술에는 여러 갈래가 있어서… 길은 하나가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알고 모르고를 따질 것 없이 책을 끼고 글을 읽는 사람은 정․주만 욀 줄 알았지 다른 학문이 있은 줄은 모른다"
이러한 사회분위기로 말미암아 교산 허균의 학문관은 이이화에 의하여 독특하게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이화는 "허균은 유학도이기는 하나 정통유학도가 아니었으며 따라서 어쩔 수 없이 유학도가 되었으나 유학만의 그의 연구의 대상은 아니었다“고 잘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정통 유학도가 아니었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문제를 제기하고 싶으며 오히려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통 유학도라고 해야 옳을 듯 싶습니다.
특히 당시의 사회적 폐쇄성에 비추어 볼 때 그의 반 유교적인 행동과 학문태도는 놀라운 것이고, 필연적인 귀결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유학도가 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유학도로서의 자질을 갖추어 갔으며 그의 본래적이고 반항적인 기질에 의하여 본질로의 회귀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냈을 뿐입니다.
② 불학
작은 형 허봉의 영향으로 불교에 접하게 된 이후 그는 본래적 반항의 기질로 인하여 더욱 깊이 불학에 뛰어든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가 처음 불교도라는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삼척부사였을 때로 사헌부에서 도교에 열중하고 있던 곽재우와 함께 불교에 열중하고있던 허균을 벼슬에서 몰아 내려고 여러 번 상소를 올렸던 바로 그때였습니다. 물론 이 지탄은 당시 사회전체에 흐르고 있던 유교의 교조성과 폐쇄성을 그대로 드러낸 것일 뿐입니다. 여기서 상대편이 올린 상소문을 깊이 헤아려 봄으로써 허균이 간직하고 있던 불학에 대한 깊은 애정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허균의 아비는 힘써서 우리의 도를 배우고 이단을 배척하여 선비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문장을 좋아하고 학문을 하는 자 누군들 이단의 글을 읽어서 보고 들음이 없지 않습니다만 허균이 불경을 외는 것은 이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밥을 먹을 적에는 반드시 식경을 외고. 작은 부처를 늘 곁에 두고 새벽에는 꼭꼭 절하며 먹물 옷을 걸치고 염주를 들고서 절하고 염불하면서 스스로 부처를 받드는 제자라고 하였습니다. 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일을 사람들에게 부끄러워하거나 숨기지 않았으니 꼭 덧붙여 전할 것도 없습니다. 그 사람은 비록 구차하고 문벌이 변변치 못하나 관계되는 일은 가볍지 않으니 지금 선비의 이런 버릇을 바꾸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급히 벼슬자리에서 쫓아 내소서"
결국 삼척부사에서 쫓겨난 허균은 벗 최분음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털어놓고 있습니다.
"제가 세상에서 버림을 받아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나 마음에는 조금도 걸림이 없습니다......불경을 읽지 않았더라면 거의 한평생을 헛되이 보낼 뻔했다고 늘 말하였습니다. 거듭 연구하여 그 숨은 뜻을 살펴보니 심정이 저절로 밝혀져서 깨달은 바가 있는 듯 하였습니다. 그때에 내가 배운 정자나 주자의 학설을 조금 취하여 그들의 학설 중에서 심성에 관해 그 같고 다른 점을 견주어 참과 거짓을 헤아려서 분석하고 논증하였더니 자못 저절로 얻는 바가 있었습니다. 이에 글을 지어 그 뜻을 밝혔는데 부처를 믿었다고 한 것은 이를 가리킨 듯합니다. 제가 오늘날 미움을 받아서 여러 번 명예를 더럽혔다고 탄핵을 받았으나 한 점의 동요도 없습니다. 어찌 그것으로 즐겨 내 정신을 상하게 하겠습니까?"
허균이 불교에 둔 관심은 상당히 깊었으며 관심의 대상으로만이 아닌 오묘한 진리를 터득하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가 중국에서 가져온 능가경을 읽은 후 송운대사에게 출판하여 착한 인연을 짓도록 권고한 사실과 또 해안과 자신은 같은 석가모니의 무리라고 할 정도로 모두가 대자대비를 생명으로 여기는 석가의 무리임을 밝힌 것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허균은 위로는 유학을 높여서 선비의 습속을 밝게 하면서 아래로는 부처의 인과와 화복으로 인심을 깨우친다면 그 다스림은 다 같은 것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유교와는 또 다른 차원에서의 불교를 접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진리는 같다)라는 전제 위에서 접근한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③ 도학
허균의 도학에 대한 태도는 불학에서와 마찬가지로 본래적 반항의 기질로 해서 더욱 깊이 도학에 접하게 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어릴 때는 그냥 읽었으나 성장함에 따라 도의 깊이를 체득하게 되었으며 그 큰 도를 논한 것에 이르러서는 현묘하고도 어지럽게 얽혀서 그 깊이를 헤아리지 못하겠다고 고백하면서 주역과 중용에서는 밝히지 못한 것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도학에 대한 깊이는 현실에 뿌리를 두고 민중의 생활 속에 그대로 배어 있던 신비적 요소를 인정하면서도 도가에서 행하고 있는 방술은 노자의 상도가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깊이가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허균은 "다른 사물에 견주어 죽고 사는 것도 한결같고, 얻고 잃는 것도 매한가지라는 뜻을 은연중에 나타낸 것은 귀중한 갈파"라고 하면서 "욕심없음과 맑고 고요함, 부귀와 침묵은 불교와 같다"라고 하여 불교에서 느꼈던 그윽한 깊이를 도교에서도 똑 같이 느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신선사상은 허균에게 있어 천상보다는 이 현실에서 신선의 땅을 이룩하는 데로 발전되고 있음을 주의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현실에 대한 애착으로 이어지는 현실 개혁사상은 그 뿌리가 여기도 닿아 있는 것입니다. 손곡 이달과 형․누나의 삶을 가까이 지켜보면서 싹이 튼 현실 개혁사상은 그가 유학․불학․도학을 깊이 공부하면서 점차로 증폭되었고 하나하나 구체화되어 나갔던 것입니다.
④ 천주학
우리나라에 천주교를 처음으로 소개한 사람은 허균으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우선 유몽인의 어유야담을 통하여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지요.
"동남쪽의 여러 오랑캐들에게는 이미 행하여져서…… 우리나라만이 알지 못하였는데 허균이 중국에 가서 그들의 지도와 게 이십장을 얻어 가지고 왔다."
또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안정복은 천학고에서, 박지원은 연암집에서 허균이 천주교를 맨 처음 소개했을 뿐만이 아니라 신앙인으로 믿고 따랐다고 까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허균이 맨 처음으로 천주교의 책을 가지고 왔고 또 신앙인으로서 천주교를 믿고 따랐다면 앞서 지적했듯이 불교와 도교를 접할 때와 마찬가지의 자세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즉 학문적 탐구열과 본래적 반항의 기질로 해서 새로운 세계로의 관심은 당연한 것이었겠지요. 특히 “남녀의 정욕은 하늘이 준 것”이라고 하여 남존여비의 차별적 사회에서 여자의 지위도 남자와 같은 동등한 사람의 자리까지 끌어올리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이 천주교의 평등과 박애정신에 기인한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⑤ 단군4)의 생각, 민족의 뿌리정신
허균은 민간신앙 자체에도 경멸 보다는 깊은 관심을 갖고 인정하는 자리에서 결국 하늘을 공경하는 길은 사람다운 도리를 다하는데 있고 또 사람다운 도리를 다한다면 하늘의 복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머문 듯합니다. 그러니까 보다 사람 중심으로, 사람을 바탕으로 하는 생각을 곳곳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으로 보아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라는 우리 민족의 뿌리 생각에까지 이르렀다고 여기게 됩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말하는 것이지요.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허균이 한 공부는 종교의 본질적인 면들을 섭렵하는 가운데서 허균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허균의 사상을 형성시켜 나갔던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공부는 뒷날 그의 개혁사상의 실천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볼 때 그는 분명히 모든 것을 포괄하고 또 한데 녹여 그만이 나타낼 수 있는 가장 허균적인 사상을 우리의 역사 위에 그대로 채색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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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단군의 생각
흔히들 단군을 고조선의 시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얼마나 우리민족의 역사에 대하여 무지, 무식한 것인가를 반증하는 하나의 사례에 불과합니다.
단군은 왕이나 대통령처럼 한 나라의 임금(요새 말로 최고 통치자)를 가리켰던 직책의 이름입니다. 즉 단군은 우리 민족의 역사를 처음으로 연 고조선(단군조선으로 부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됨)의 임금들에게 붙여진 이름인 것입니다. 따라서 단군에 대한 바른 이해는 단순히 단군에 대한 바른 이해의 정도를 넘어 우리의 역사, 특히 우리의 고대사에 대한 바른 이해의 지름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처럼 단군(임금)으로 불려진 임금은 한 사람이 아니고 마흔 일곱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서 잠시 단군정신선양회에서 펴낸(1986. 2. 28 발행) "국조 단군"에 관한 기록의 일부분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되어 옮깁니다.
- 단군 한배검(檀君王儉)은 배달나라의 맨 첫째 대(初代) 임금이요, 단군은 단군국(檀君國) 곧 「배달나라의 임금(檀君)」으로서 배달나라의 모든 임금들을 통틀어 가리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배달나라의 맨 첫째 대 임금은 한 분인데, 그분을 「단군 한배검」이라 부른다. 단군 한배검을 비롯해서 이 여러 단군들이 다스리던 시대를 일반으로 단군(배달)시대라, 또 나라를 단군 조선(檀君 朝鮮)이라, 한배 검 조선(王儉 朝鮮) 혹은 옛 조선이라 하는데 이 시대가 1,048년(서기 앞 2333년~앞 1286년)동안이다. (중략)
제1대 단군 한배검, 제2대 단군 부루, 제3대 단군 가륵, 제4대 단군 오사구, 제5대 단군 구을, 제6대 단군 달문, 제7대 단군 한속, 제8대 단군 서한, 제9대 단군 아술, 제10대 단군 노을, 제11대 단군 도해, 제12대 단군 아한, 제13대 단군 홀달, 제14대 단군 고불, 제15대 단군 벌음, 제16대 단군 위나, 제17대 단군 여을, 제18대 단군 동엄, 제19대 단군 종년, 제20대 단군 고홀, 제21대 단군 소대, 제22대 단군 색불루, 제23대 단군 아홀, 제24대 단군 연나, 제25대 단군 솔나, 제26대 단군 추로, 제27대 단군 두밀, 제28대 단군 해모, 제29대 단군 마휴, 제30대 단군 나휴, 제31대 단군 등을, 제32대 단군 추밀, 제33대 단군 감물, 제34대 단군 오루문, 제35대 단군 사벌, 제36대 단군 매륵, 제37대 단군 마물, 제38대 단군 다물, 제39대 단군 두홀, 제40대 단군 달음, 제41대 단군 음차, 제42대 단군 을간지, 제43대 단군 물리, 제44대 단군 구물, 제45대 단군 여루, 제46대 단군 보을, 제47대 단군 고열가
참고로 태백산에서는 매년 10월 3일 개천절에 천제를 지냅니다. 이 천제는 하늘 제사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하늘은 하늘이신 환인, 환웅, 단군(왕검)님께 올리는 제사입니다. 즉 우리 민족이 처음 나라를 세운, 하늘을 연 날을 기념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이지요. 선계를 다스리는 환인의 뜻에 따라 인간 환웅으로 세상에 내려가 곰(웅녀)과 결혼하여 단군(왕검)을 얻었으며 이후 단군(왕검)이 배달민족의 시조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곰을 숭배하는데 "고맙습니다."의 어원도 "곰" 같습니다"에서 나왔다고도 합니다. 하늘, 땅, 사람이 하나라는 사상의 이해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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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교산 허균의 생각
① 개혁에 대한 생각
교산 허균이 지은 "호민론"첫머리에는 "천하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오직 민중뿐이다. 이 민중은 물보다도, 더 무섭고....그런데 통치꾼들은 제 욕심대로 이들을 천대시하고 혹사하고 있다."라고 하여 그의 개혁사상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민중의 위대함을 알지 못하고서는 뱉을 수 없는 말이지요.
그는 민중을 항민, 원민, 호민으로 구분하여 호민의 막중한 임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항민은 작은 일에 만족하고 눈앞의 이익을 위하여 불평도 없이 다스림을 받는 자를 말하고, 원민은 항민과는 달리 지배층의 착취에 대하여 상당히 불평을 하며 원망을 하지만 행동으로 어떻게 하지 못하고, 호민은 원망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틈을 엿보다 적당한 때를 만나면 분연히 들고 일어나 항민과 원민을 포함한 많은 무리를 모으고 사회의 부조리한 상태를 개혁하기 위한 자신의 안일을 돌보지 않고 나서는 자라고 규정하면서 원민과 항민은 별로 두려운 존재는 아니나 호민이야말로 두려운 존재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허균은 오늘날과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민중의 힘과 민중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한 나라가 제 배만 불리려는 지배계급의 횡포로 민중을 혹사하고 착취하면 결국에는 호민이 일어나 끝내 나라는 망하고야 만다고 했는데 이것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즉 민중을 무시하는 권력은 마땅히 무너져야 하며,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교산 허균은 무릇 하늘이 머리를 세운 것은 민중을 잘 보살피라고 한 것이지 제 욕심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며 또 이러한 나라는 화를 당하는 것이고, 화를 당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지 결코 하늘에 불평할 일이 못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통치꾼들이 가야할 길을 밝히는 것으로 마음 속 깊이 새겨야 할 충고입니다. 민중 위에 군림하려는 그들의 작태는 가소롭기 짝이 없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허균은 "황소의 난"을 말하면서 이러한 난은 그저 기다릴 수 없다고 한 것으로 보아 자연발생적인 때의 이름보다는 민중을 선동, 규합하여 때를 맞이할 것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민중에 의한 혁명의 불가피성과 필연성을 지적하면서 시기의 선택에도 상당히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맹자의 왕도정치5)에서 영향을 받은 듯이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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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맹자의 왕도정치(王道政治)
왕도정치란 맹자의 정치사상의 핵심으로 이상적인 정치 형태를 말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집단인 국가 사회나 더 나아가
인류 사회에 있어서 민생의 안정과 인간다운 삶의 성취를 목적으로 하고 그 목적을 실현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힘과 무력에 의한 강제적 해결이 아닌 통치자의 인격과 덕의 감화력에 의한 평화적이고 순리적인 해결을 바람직한 것으로 보는 정치사상입니다.
맹자는 인을 바탕으로 하여 군주의 어진 마음이 구체적인 정치 현실로 표현될 때 바람직한 정치가 즉 왕도정치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하고 그 실천 방법으로 민생의 안정을 역설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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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잠시 이이화의 견해를 살펴보면 "그는 호민의 한계성을 지적하고, 전제군주제인 당시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해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호민의 적대세력은 어디까지나 썩어빠진 관권이나 독재군주이지 정당한 관권이나 바른 군주는 아니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허균은 군주제를 인정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의 관력이 임금 한 사람에게만 매달려 있던 당시를 생각한다면 호민의 적대세력은 우선 썩어빠진 관권이나 독재군주에 한정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이것이 극복되면 결국에는 군주가 없는 평등한 사회의 건설이 극복해야 할 다음의 문제로 제기될 것으로 짐작됩니다. 다소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오늘을 사는 우리는 허균의 호민론을 민중론으로까지 발전시킬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② 평등과 박애에 대한 그의 생각
앞에서 지적한 그의 개혁사상은 여기서 다루려고 하는 평등과 박애사상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설들력을 잃고 말 것입니다. 당연히 그의 개혁사상 밑에는 이 평등과 박애사상이 자리하고 있지만 이제 어떻게 이러한 사상이 펼쳐졌는지 살펴 보려고 합니다.
우선 당시의 사회상은 앞에서도 밝힌 바가 있지만 크게 세 가지의 모순으로 집약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서얼금고(신분차별), 둘째는 여자의 개가금지, 셋째는 천민의 인권제한입니다.
서얼금고의 철폐를 주장한 사람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허균은 그들이 인재의 등용이라는 측면만을 내세운 것에 대한 부족함을 지적하고 인도적인 측면에서 마땅히 서얼금고는 폐지해야 함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즉 하늘이 재주를 냈는데도 그것을 버리면 하늘을 거스르는 것이고, 하늘을 거스르고서는 천명을 바랄 수가 없으며 "원망을 품은 민중이 많을진대 어찌 사회의 평안을 바랄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면서 민족혼을 깨우는 일체감의 조성이라는 측면으로도 마땅히 받아들여야하는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물론 허균의 <홍길동전>에서도 서얼금고 철폐를 주장하고 있지요. 신분적 차별이 없는 율도국의 건설이 이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혹 어떤 이는 홍길동이 양반의 후예이고 양반계급을 인정한 점에서 어떤 한계성을 지적하고 있으나 당시의 사회적 흐름을 감안할 때 이해가 되며 또한 실제로 서얼철폐의 주장뿐만이 아니라 그의 생활에서 서류들과의 깊은 사귐에 있어 그들에게 그 어떤 신분적 차별이 없었던 점은 분명한 평등의식이 깔려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또 여자의 개가 금지에 대한 부당함은 "유재론"에서 하늘이 사람을 차별하지 않았다고 주장했고 때로는 비난의 대상이 되면서까지 그 자신이 구체적인 행동을 통하여 남녀의 평등사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천민에 대한 인권의 억압도 "원망을 품은 사람이 나라의 반을 넘는데 어찌 평화로울 수가 있겠느냐고 지적했고 나아가 그 자신이 불우한 사람 즉 서얼, 평민, 천민들과 가까이 하며 그들의 아픔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서 막연한 평등과 박애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삶을 살아냈던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파격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허균의 행동에 대하여 이이화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부안 기생 계생과 원부사의 작자인 무옥에게 늘 인격적인 대우를 하였고 그들의 재주를 아끼고 불우한 처지를 동정하였다. 특히 계생에겐 참선을 하라고까지 권하는 것은 그때의 통념으로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여성관을 갖고 있다.
당시의 유교 가치관을 부수려는 그의 의지가 어쩌면 남녀의 무분별한 만남을 오히려 재촉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꼭 무분별한 정도로만 볼 필요가 있을까요? 그는 어떤 정도에서 머물러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즉 이래서는 안되지에서 선을 긋는 것이고 결국은 무분별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살펴 본 바와 같이 서얼금고의 철폐, 여성의 개가금지에 대한 부정, 천민에 대한 인권탄압의 부당성이 바로 허균이 시도하게 된 모순된 사회제도 개혁과 평등․박애사상 실천의 근본 동기가 되고 있습니다. 선구자의 면모를 그대로 들여다 볼 수 있는 이러한 허균의 생각과 삶은 하나의 큰 모험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맹목에 젖어있던 당시 선비들의 눈에는 점잖치 못하고, 예의가 바르지 못한 허균으로 비쳤을 것이고 그의 깊이를 알려고 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문화와 사상적인 적과 상대적인 권력의 적으로 몰아 결국에는 허균을 이단자로, 역모의 괴수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교산 허균은 어느 때나 자신은 한 점의 동요도 없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③ 국방이론
허균은 보기 드문 탁월한 국방정책가입니다. 그는 병론과 서변비로고서에서 주로 자신의 국방정책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선 당시의 군정을 살펴보면 재상의 아들과 같은 특권계층은 병역의 의무가 없었고, 평민이나 천민에게만 병역의 의무가 있었지만 그것도 뇌물로 빠져나가 실제의 군사 수는 작았으며 더구나 훈련도 되지 않았고, 장수를 의심하여 군사를 당당히 맡기지도 않았으므로 소견을 갖고 일하는 유능한 장수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태와 안일에 빠진 무능한 장수들의 군사는 짐작이 가고도 남을 것입니다. 찌그러진 사회상에서 어찌 훌륭한 장수가 나올 수 있을까요? 이러한 군정의 현실을 개혁하려는 교산 허균의 의지는 "병론"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허균은 첫째로 평등한 병역의무, 둘째로 유능한 장수의 선택, 셋째로 장수와 군사에 대한 절대적 신임, 넷째로 철저한 군사 훈련, 다섯째로 합리적 군정운영, 여섯째로 인간애를 바탕으로 한 군기확립을 주장하면서 당시 절대의 권력을 쥐고 있던 임금에게 그 책임이 달려 있음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또 "서변비로고서"에서 교산 허균은 여진(청)의 침입 즉 병자호란을 예언했습니다. 쳐들어오는 길목까지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침략당한 역사적 사실을 소개하면서 지리적 여건으로 미루어 볼 때 앞으로 우리를 침략할 적은 압록강과 연평령으로 쳐들어 올 것이며 그 적은 여진이라고 단정했던 것입니다. 허균은 중국을 드나들면서 압록강 부근의 국경지역을 살피고 그곳의 지형과 그곳에 근무하는 관리들의 의견을 들어 다음과 같이 대비책을 세웠습니다.
그 대비책은 첫째로 유능한 장수를 택하고, 둘째로 장수에게 상당한 권한을 주며, 셋째로 군량을 충분히 공급하고, 넷째로 성을 보수케 하며, 다섯째로 요새를 설치하여 저지선을 만들고, 여섯째로 식주․구성․안주 등 중요한 지점에 특히 중무장한 부대를 배치도록 했습니다. 이 때가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대략 20년 전으로 여겨집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군정은 극도의 문란 상태였기 때문에 허균의 또 다른 고민은 난이 일어나면 막기는커녕 제대로 피난도 갈 수 없는 혼란한 상태로 참화를 입을 것으로 짐작하여 바르게 피난을 갈 수 있도록 "관동불가 피난설"에 자신의 견해를 자세히 밝혀 놓았던 것입니다. 물론 당시 집권층은 그래도 난이 일어나면 중국이 도와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에 빠져 있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사대주의에 찌들은 정치꾼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오늘의 역사는 임진란 8년 전에 임진왜란을 예언하여 10만 양병설을 주장한 이율곡을 높이 평가하면서 왜 허균에 대해서는 바른 평가를 내리기에 주저하는 것일까요? 그의 탁월한 국방정책, 비상한 병자호란의 예언과 그 대비책, 그리고 바른 피난길의 제시, 이 모든 것은 예사로 운 일이 아닙니다. 마땅히 허균을 다시 평가하여 우리 역사의 귀중한 인물로 되살려내야 합니다.
7) 교산 허균의 깨어진 꿈
① 칠서지옥
처지가 같은 일곱명의 서류 출신인 서양갑, 심우영, 이경준, 허홍인, 박치의, 박응시, 김경손은 서류출신에 대한 신분차별의 폐가 심한 서얼금고를 없애 달라고 연명으로 상소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견해는 묵살되었지요. 그 후 자신들의 불우한 처지를 소양강변에서 술과 시로 달래며 혁명을 모의하던 중 부족한 자금을 모으기 위하여 문경새재에서 은상을 턴 것이 탄로가 나 이듬해 이들은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이를 칠서지옥이라 하며 이 사건을 계기로 당시 대북파인 정인홍․이이침이 이들을 도와 주는척하면서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일에 쓰일 자금을 모으려 했다는 거짓 자백을 유도하였습니다. 결국 그들의 계략에 걸려 거짓 자백을 하게 되어 죽음을 당했으며 이로 인하여 영창대군도 죽음을 당하는 등 김제남이 이끄는 소북파가 참변을 당하는 계축옥사로 번졌던 것입니다.
이때에 허균은 물밑으로 이들의 혁명을 격려하였고, 모의를 돕기 위하여 모반에 사용될 격문을 지어 이경준을 통하여 보내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 졌습니다.
② 대북파에 가담
앞에서 계축옥사로까지 번진 사건으로 허균은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칠서들이 끝까지 허균과의 관계를 얘기하지 않은 것은 허균에게 있어 무척 다행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허균은 불안을 떨치지 못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까지 생각해 온 사회개혁에 대한 의지를 제대로 펴보지도 못한 채 죽을지도 모를 위험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이 모순된 사회의 실상을 직접 겪으면서 어떤 길을 택해야 하나를 고민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순간의 폭발로 인한 산화냐 아니면 좀더 때를 기다려야 하나를… 반대되는 모든 세력을 적으로 삼아 당장 맞서 싸울 것이냐 아니면 그들 속에 스며들어가 때를 기다려 민중의 힘으로 엎을 것인가를…
교산 허균이 선택한 길은 나중에 있었습니다. 그가 대북에 가담한 사실을 이해하려면 위와 같은 당시의 급변한 상황을 깊이 이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교산은 글방 친구였던 이이침에게 벼슬 자리를 부탁하는 등 의도적으로 가까이 하려 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결국, 허균은 이이침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벼슬 자리를 얻게 되었으며 결국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자신을 몰아 넣은 셈이 되었지요.
이 일을 두고 교산 허균을 바라보는 어떤 이들은 그에게서 나약한 지식인의 모습을 엿보는 것 같아 안타까움과 배신감을 동시에 갖게 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의 삶을 좀 더 뒤따라가 보노라면 앞서 얘기한 대로 교산 허균의 길은 분명히 나중에 있었던 것임을 다시 깨우치게 될 것입니다.
③ 경운궁 문서사건
이이침은 글 잘하기로 이름난 허균을 자기의 편으로 삼았다는 생각에서 또 허균을 이용하여 자기의 지지기반을 구축하려는 생각에서 허균을 도와주었고 그래서 허균의 벼슬길은 잠시 순탄하기만 했습니다. 나중에 광해군으로부터 존호까지 받을 정도로 많은 칭찬과 신임을 받기에 이르렀지요.
그러나 허균에게는 불안한 생활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허균이 중심이 되어 삼청동에 무리를 모으고 거사를 꾀하고 있었고 이러한 사실이 소문으로 널리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왕의 신임을 받고 있으면서도 그는 어떻게 하면 이러한 소문을 소문으로 잠재워 자신이 의심을 받지 않을 수 있을까하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김윤황으로 하여금 아무도 몰래 인목대비가 거처하는 경운궁에 '왕을 배척하고 누군가가 삼청동에 무리를 모아 거사를 일으키려 한다'는 내용의 괴문서를 화살에 달아 쏘게 한 후 그것을 주워 왕에게 보였던 것입니다.
허균은 이 괴문서를 이용하여 소문은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사실을 굳히려 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그의 뜻대로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로 해서 또 다른 문제가 생긴 것이지요. 왕은 누가 괴문서를 던졌나에 관심을 나타내며 사나운 성질을 그대로 폭발시켜 버렸던 것입니다. 광해군의 노여움은 이 흉계를 꾸민 자를 찾게 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광해군의 즉위를 도와 영의정까지 오른 기자헌은 자기의 세력이 약해짐을 느끼고 왕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 허균을 반대편으로 삼고 이 흉계를 꾸민 것이 허균임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턱없는 소리라고 하며 기자헌을 길주로 유배시킬 정도로 당시 광해군의 허균에 대한 신임은 상당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의 문제가 얽혀 있었습니다.
④ 인목대비의 폐비사건
허균은 광해군에게 붙어 놀아나는 기자헌을 좋게 생각했을 리가 없었고 더욱이 인목대비 폐비문제를 놓고 기를 쓰며 싸우는 꼴에 속이 뒤틀렸을 것입니다.
당시 조정에서는 이이첨이 중심이 되어 인목대비를 폐비시키려고 했는데, 여기서 기자헌은 폐비의 불가를 주장했습니다. 허균은 잠시 절대의 신임이 필요했고, 자신의 정체를 짐작하고 반대하는 기자헌을 누르기 위하여 인목대비 폐비를 주장하는 이이첨의 무리에 자연히 속하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지자헌의 아들 기준격은 그의 아버지를 살리기 위하여 허균을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허균의 죄상을 폭로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즉 허균의 조카사위요, 선조의 왕자인 의창군을 왕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기자헌이 반대하여 성공하지 못하였다는 것과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을 이용하여 영창대군을 왕으로 세운 후 군사통솔권을 잡아 김제남까지 제거한다는 것, 그리고 과거에 서양갑들과 역모를 했다는 것 등입니다.
이러한 기준격의 상소에 허균은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인목대비 폐비주장에 대해 선봉에 서게 되었고, 이 일로 일은 점점 꼬이게 되었습니다.
허균에게 있어서는 그의 개혁의지 실현이라는 최대의 목적을 위하여 다른 문제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이 되는데 이 인목대비 폐비문제로 인하여 허균은 오히려 불리한 입장에 서게 되었습니다. 또한 실질적인 권력자이면서도 자기에게 쏟아지는 반대파의 거센 비난을 교묘하게 허균한테로 돌려버린 이이첨의 교활함에서도 허균의 불리함은 증폭되고 있었습니다.
⑤ 남대문 격문사건
이러한 때에 이이첨의 딸인 세자빈이 아들이 없어 다른 후궁을 간택하였는데 허균의 딸이 내정되었습니다.
허균은 허균대로의 계산에 의하여 광해군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는 마지막 기회로 은근히 마음을 놓을 수 있었지만 대북파에 속하는 같은 무리였던 이이첨에게는 문제가 달랐던 것이다. 지금까지 자기의 뜻에 잘 따르는 동지로 이용하려 했던 허균에게 상당한 의심을 품게 되었고, 동지가 아니라 권력의 경쟁자로서 결국은 내부의 적으로 단정짓고 허균을 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북쪽에서 오랑캐들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장안에 퍼지면서 사회상황은 불안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교산 허균은 이러한 뒤숭숭한 사회상을 그의 거사에 이용하려고 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우선 민심을 권력으로부터 분리시키고, 권력의 무능함을 폭로하기 위하여 조직적인 선동에 힘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동지들로 하여금 남산에 올라가 피난을 가도록 외치게 했고 알게 모르게 당시 사회상황의 모순성과 권력의 부패성을 선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몰래 승려와 장사들을 모아 병서를 익히게 하고 궁안의 사정을 알도록 하는 등 훈련을 시켰던 것입니다. 아마도 허균은 거사의 결정적인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허균의 충실한 동지인 서얼출신의 현응민이 남대문에 장차 강남대장군이 이른다는 내용의 격문을 붙여 분위기를 고조시키려고 한 것이 문제가 되어 심문을 받던 중 그 주동자가 허균으로 밝혀지면서 상황은 급변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허균의 거사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지요. 광해군 일기를 인용한 이이화님의 견해를 통해서 허균의 거사계획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승려와 장사 수백 명을 남산에 모두 모이게 해서 훈련을 시켰다. 그리고 나날이 병서를 익히게 하고 궁안의 사정에 밝도록 훈련시켰다. 그리고 정해진 거사일에는 어두운 밤을 타서 남산에 올라 「서쪽의 도적이 이미 압록강을 건너오고 유구의 군사가 남쪽에서 쳐들어와 숨어있으니 성안의 백성들은 모두 피난해야 된다」라고 외치게 하여 민심을 선동한다. 그리고 또 피난하려면 성은 평야만 같지 못하고 평야는 산을 넘는 것만 같지 못하다는 노래를 골목에서 마다 부르게 하여 백성들을 사방으로 흩어지게 하여 민심이 술렁이는 틈을 타서 장사들로 하여금 궁안으로 쳐들어가게 한다는 계획을 꾸몄다."
허균은 민중의 힘을 이용하여 새로운 질서를 세우려고 시도했던 것입니다.
우선 위기를 넘기고, 다음을 위하여 대북파에 가담했고, 절대적인 신임을 위하여 폐비를 주장했으며 자기의 딸이 후궁으로 간택되도록 했으나 그의 속뜻은 이런 정도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두의 관심은 폐비의 싸움에 있었고, 사회는 뒤숭숭한 가운데 놓여 있었던 시기를 이용하여 자신이 뜻한 개혁의 의지를 펴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김진세는 허균이 이이첨의 사주를 받아 인목대비를 폐하는 체하면서 역모를 하려 했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이이첨의 사주를 받았다는 것은 잘못이며 사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허균은 당시의 막강한 실권을 쥐고 있던 이이첨을 이용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⑥ 깨어진 꿈
폐비사건에서 이이첨은 이이첨대로 이 사건을 자신의 위치를 다지는 일로 여겼고, 허균은 허균대로 거사를 위하여 잠시 이이첨을 이용했던 것입니다. 허균에게는 이 폐비의 일이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왕조를 타도하여 본질적인 사회개혁을 이루려고 했던 것이지요.
허균은 자신의 위치를 더욱 확고히 다지려 했던 세자의 후궁일로 지금까지 한패거리(겉으로 보기에는)였던 이이첨의 의심을 사 결국은 역습을 당하게 된 셈입니다. 이이첨은 권력을 빼길 위급한 상황으로 판단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이룩한 권력에 불안을 느꼈고, 허균을 새롭고 가장 두려운 적으로서 타도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 싶습니다.
바로 이때 남대문 격문사건이 일어났던 것이지요. 이이첨은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습니다. 이이첨은 재빨리 광해군에게 허균이 역모를 꾸몄다고 사실을 부풀려서 일러 바쳤던 것입니다.
결국 교산 허균은 뜻하던 거사의 계획은 밝혀지고 말았습니다. 허균을 아끼던 광해군은 그래도 허균을 좋아하여 살리려고 시간을 끌었으나 이이첨은 허균이 자신의 허물을 들추어낼까 두려워하여 허균의 죽음을 재촉하는데 급급했던 것입니다.
교산 허균은 한 많은 가슴을 풀지도 못한 채, 꾸던 꿈을 마저 꾸지도 못한 채 동지들과 함께 죽어 갔습니다. 결국 허균의 꿈은 깨어지고 말았지요.
어떤 이들은 교산 허균은 혁명을 꿈꾼 것이 아니라 정쟁의 희생물이 된 것을 강조하고 있기도 합니다. 정쟁의 희생물인 것은 옳은 말이지만 혁명을 꿈꾼 것이 아니라는 주장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민중의 선구자, 허균의 반역”에서 교산 허균은 “아직도 울음을 그칠 줄 모르는 바보인가?”라고 물으며 이렇게 마무리짓고 있습니다.
"영웅이 시대를 낳는 것이 아니라 시대가 영웅을 낳는다."
언제부터인지 이 말은 우리의 가슴을 적셔왔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 말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시대가 영웅을 낳는다'는 표현은 정당한가?
시대라는 말을 역사로까지 그 뜻을 확장한다고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인가? 정당하고, 문제가 없다면 역사는 영웅을 잉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결국 영웅을 인정하는 영웅 중심의 역사로 전락되어 바라는 것과는 다른 모습의 역사가 되고 만다. 그래서 이 말은 다음과 같이 크게 수정되어야 한다.
"시대가 민중을 낳는 것이 아니라 민중이 시대를 낳는다"
민중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으면서 아직도 영웅사관의 찌꺼기를 털어 버리지 못하여 고작 시대가 영웅을 낳은 것이라고만 되뇌일 뿐이었는데 이번에 여러 친구들과 같이 공부를 하면서 끈질기게 남나있던 영웅사관을 때려 부술 수가 있었다. 더욱이 이 글을 쓰면서 민중이 시대를 낳는 것임을 거듭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글에서 구체적인 연대는 밝히지 않았다. 또 밝힐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다만 민중을 대표한 허균을 살펴 보고자 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어떤 곳에서는 허균의 모습이 영웅적으로 그려졌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영웅 허균으로 받아들이지 말았으면 한다. 잘못된 점이 있다면 순전히 나의 부족한 재주와 더불어 허균에 대한 사랑이 지나쳤기 때문이다.
내가 어릴 때 들어왔던 많은 역사의 인물들은 분명히 민중과 더불어 숨을 쉰 민중의 대표였을 뿐이라는 사실에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답답한 허균의 가슴을 헤집고 자리를 틀고 앉은 것이 바로 민중이요. 피맺힌 한 속에서 “할 말이 있다”라고 울부짓은 것이 바로 허균이다. 울뱅이 허균은 아직도 울음을 그칠 줄 모르는 바보인가?
이제, “할 말”을 뱉지 못하고 최후를 마친 교산 허균의 능지처참을 당하는 모습을 최재효님의 “이무기 긴 잠에서 깨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소개하며 “교산 허균의 이해”를 마무리짓도록 하겠습니다.
남자의 몸은 양손, 양다리에 밧줄로 단단히 묶여졌다. 밧줄은 육중한 소가 끄는 수레에 이어지고 나졸들은 사형집행관(死刑執行官)의 명령을 기다렸다. 산발(散髮)한 남자는 제 정신이 아닌 듯 몸을 부르르 떨기도 하고 뭐라고 웅얼거리도 하였지만 관리들은 실실 웃으며 신경쓰지 않았다.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아침부터 한양의 백성들은 소문을 듣고 구름처럼 저잣거리로 몰려들었다. 백성들은 주로 조선사회에서 천덕꾸러기로 박대받는 서얼(庶孼)들과 하층민(下層民)으로 분류된 기생, 중, 노비, 상인, 백정들이었다. 집행관은 백성들 앞으로 나가더니 죄인의 죄상(罪狀)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무오년(1618년) 무렵에 여진족의 침범이 있자 명국에서 군사를 동원하였다. 조선이 여진의 본고장인 건주(建州)에서 가까워 혹시 있을지도 모를 여진의 침략으로 인심이 흉흉하고 두려워하는데 죄인은 긴급히 알리는 변방의 보고서를 거짓으로 만들고 또 익명서를 만들어아무 곳에 역적이 있어 아무 날에는 꼭 일어날 것이다.라고 하면서 도성 안 백성들을 공갈하였다.
또한 죄인은 밤마다 사람을 시켜 남산에 올라가서 부르짖기를서쪽의 적은 벌써 압록강을 건넜으며, 유구국(琉球國) 사람은 바다 섬 속에 와서 매복하였으니, 도성 안의 사람은 나가서 피하여야 죽음을 면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밖에도 죄인은 노래를 지어성은 들판보다 못하고, 들판은 강을 건너니만 못하다하였다.
또 소나무 사이에 등불을 달아놓고 부르짖기를살고자 하는 사람은 나가 피하라고 하니, 민심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아침저녁으로 안심할 수 없어 서울 안의 인가(人家)가 열 집 가운데 여덟아홉 집은 텅 비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김윤황을 사주해서 격문을 화살에 매어 경운궁 가운데 던지게 한 것, 남대문에 붙여진 격문이 등이 모두 죄인의 짓이다.
사지(四肢)가 밧줄에 묶인 사내는 몸을 비틀며 판결문(判決文)에 불복(不服)하였지만 입에 재갈이 채워진 상태에서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장문(長文)의 판결문이 끝나자 집행관의 수신호(手信號)와 동시에 이랴하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사내는 허공에 붕 뜬 채 고개를 들고 온 몸에 힘을 주고 버둥거렸다. 팽팽해진 육신이 사방에서 잡아 당기는 힘을 더 이상 당해내지 못했다.
사내 입에 재갈이 물려졌지만 비명소리는 구경나온 백성들 귀에 분명히 전달되고 있었다. 나졸들은 소들이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주춤 거리자 날카로운 쇠갈쿠리로 소의 허벅지며 등을 내리 찍었다. 놀란 소들이 사방으로 달아났다. 사내의 왼쪽 팔과 오른쪽 다리가 몸통에서 찢겨져 나갔다. 백성들은 우우우소리를 내며 거인(巨人)의 능지형(陵遲刑)을 지켜보며 속으로 통곡하였다. 피가 사방으로 튀면서 저잣거리 바닥은 금방 핏물로 촉촉이 젖었다.
나졸들이 세차게 쇠 갈쿠리를 소 잔등에 내려 꽂자 소들은 거품을 물며 사방으로 내달렸다. 오른쪽 팔과 왼쪽 다리가 마저 찢어지면서 핏물과 함께 내장이 쏟아져 내렸다. 사내의 머리는 몸통에 겨우 매달려 있는데 두 눈을 부릅뜬 채 재갈이 풀려 혀를 길게 빼내어 깨물고 있었다. 갈기갈기 찢어진 사내의 육신은 고깃덩어리가 되어 저잣거리에 방치되었다. 이를 지켜보던 서얼(庶孼)들은 울분을 참지 못해 땅을 치며 통곡하였고 여인들은 두 눈을 가리며 흐느꼈다.
1618년 8월 24일 한양의 서쪽 저잣거리에서 대역죄인(大逆罪人) 허균(許筠)을 처형하는 형벌이 진행되고 있었다. 형이 끝나자 맑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끼면서 뇌성벽력(雷聲霹靂)이 쳤다. 백성들은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하늘이 노했다고 쑤군거렸다. 풍운아(風雲兒)의 처참한 시신을 아무도 거두지 못했다. 멀리서 아버지의 능지형을 바라보던 아들과 딸, 사위는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조선을 저주하고, 간신배(奸臣背)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멀리서 임의 시신을 감시하던 포졸들이 겁에 질린 시선으로 행여 반란(反亂)이 일어나지 않을까 두려운 시선으로 군중들을 바라보며 주변을 두리번 거리기도 했다.
며칠이 지나도록 기린아(麒麟兒) 교산(蛟山) 허균의 시신은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시신에 구더기가 들끓고 파리들이 윙윙거리며 하루 종일 시신 근처를 맴돌았다. 개들이 시신 주변을 배회하면 임을 추종하던 서얼(庶孼)들과 천민들이 차례로 번을 서가며 임의 시신이 훼손되거나 탈취(奪取)되는 것을 방지하기기도 했다. 어떤 의리있는 무리들은 며칠 밤낮을 임의 처참한 시신이 방치되 있는 저잣거리를 떠나지 못하고 방성대곡(放聲大哭)하며 분루(憤淚)를 삼키기도 했다.
이렇게 생을 마감한 교산 허균은 그의 문집 또한 모두 없어질 뻔했습니다. 그러나 불행중 다행으로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허균은 사위 이사성(李士星)에게 정리한 자기 문집을 보냈던 것입니다. 그 후 이사성의 아들인 이필진이 잘 보관하여 후대에 전하게 된 것이지요.
이필진(李必進)의 묘지명(墓誌銘)(恬軒集 권33)에수천 권의 서책을 집에 간직하고 있었으니, 이것은 허씨(許氏)의 책이라는 말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성소부부고를 비롯한 많은 책이 전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홍길동전을 발표할 때는 무명으로 발표하였으나, 나중에 유몽인이 좋지 않은 뜻으로 홍길동전이 그의 작품이라고 기록해 놓음으로써 알려지게 된 점도 특별히 관심을 기울여 살펴보아야 할 중요한 대목입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이처럼 홍길동전과 성소부부고 등이 남아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은 천만다행입니다.
8) 교산 허균의 몇 편의 글들
여기서 잠시 교산 허균이 남긴 귀한 글들 몇 편을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어쩌면 교산 허균의 사람됨을 그러니까 인간적인 모습을 이해하는데 있어 참으로 귀한 자료라는 생각이 들어서 소개하는 것입니다.
사우재(四友齊)
내가 사는 집 이름을 사우재(四友齊)라 하였는데 그것은 내가 벗하는 이가 셋이고 거기에 또 내가 끼니 합하여 넷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세 벗이란 것은 오늘날 생존해 있는 벗이 아니고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옛 선비들이다. 나는 원래 세상일에 관심이 없는 데다가 또 성격이 제멋대로여서 세상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꾸짖고 떼를 지어 배척하므로 집에는 찾아 오는 이가 없고 밖에 나가도 찾아갈만한 곳도 없다.
그래서 스스로 이렇게 탄식했다. “벗은 오륜(五倫) 가운데 하나를 차지하는데 나만 홀로 벗이 없으니 어찌 심히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벼슬길에서 물러나 생각해 보았다. 온 세상 사람들이 나를 더럽다고 사귀려 들지 않으니 내가 어디서 벗을 찾을 것인가 할 수 없이 옛사람들 중에서 사귈만한 이를 가려내서 벗으로 삼으리라고 마음 먹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는 진나라 처사 도연명6)이다. 그는 한가롭고 고요하며 작은 일에 대범하여 항상 마음이 편안했으니 세상일 따위는 마음에 두지도 않았다. 그래서 가난을 편히 여기고 천명을 즐기다가 죽었다. 그의 맑은 풍모와 빼어난 절개는 아득히 높아 잡을 길이 없으니 나는 깊이 흠모만 할 뿐 그 경지에 미치지는 못한다. 그 다음은 당나라 한림 이태백7)이다. 그는 뛰어나고 호탕하여 온 세상을 좁다고 여기고 임금의 총애를 받는 귀인들을 개미 보듯하며 스스로 자연 속에서 방랑했다. 그런 그가 부러워서 따라 가려고 애쓰는 중이다. 또 그 다음은 송나라 학사 소동파8)이다. 그는 허심탄회하여 남과 경계를 두지 않으므로 현명한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 귀한 이나 천한 이를 가리지 않고 모두 더불어 즐기니 유하혜9)가 자기의 덕을 감추고 세족을 쫒는 풍모와 같은 데가 있다. 내가 본받으려 하나 아직 그러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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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도연명(陶淵明, 365~427)
도연명은 중국 동진 시대 말의 시인으로 본명은 도잠(陶潛)이며 자가 연명(淵明)입니다.
양자강 남안 심양의 농촌에서 태어났습니다. 도연명 30세 즉 405년에 평택 현령으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복을 입고 군(郡)의 순시관을 만나라는 명을 받자 "너덧 되 쌀 봉급 때문에 허리를 굽히고 향리(鄕里)의 소인(小人)에게 절을 해야 하느냐" 그날로 사의를 표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이 일은 그가 현령으로 부임한지 80일 만이었습니다. 이 때 그가 고향으로 돌아 오며 지은 시가 그 유명한 '귀거래혜(歸去來兮), 즉 돌아 가리다'로 시작되는 "귀거래사(歸去來辭)"입니다. 이백, 두보 보다도 술을 좋아 하였다는 그는 향리 전원에서 괭이를 들고 농사를 짓다가 63세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의 "귀거래서(돌아 가리다)"를 소개합니다.
돌아가리로다
고향의 전원은 황폐해 가는데 내 어이 아니 돌아가리
정신을 육체의 노예로 만들고 그 고통을 혼자 슬퍼하고 있겠는가
잘못 들어섰던 길 그리 멀지 않아 지금 고치면 어제의 잘못을 돌이킬 수 있으리다
배는 유유히 흔들거리고 바람은 가볍게 옷자락을 날린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묻고 새벽 빛이 희미한 것을 원망하다
나의 작은 집을 보고는 기뻐서 달음질 친다
머슴아이가 반갑게 나를 맞이하고 어린 자식은 문 앞에 서서 기다린다
세 갈래 길에는 소나무와 국화가 아직 살아 있다
아이들 손을 잡고 집 안에 들어서니 병에 술이 채워져 있다
나는 혼자 술을 따라 마신다 뜰의 나무들이 내 얼굴에 화색이 돌게 한다
남창을 내다보고 나는 느낀다 작은 공간으로 쉽게 만족할 수 있음을
매일 나는 뜰을 산책한다 사립문이 하나 있지만 언제나 닫혀 있다
지팡이를 끌며 나는 걷다가 쉬고 가끔 머리를 들어 멀리 바라다본다
구름은 무심하게 산을 넘어가고 새는 지쳐 둥지로 돌아온다
고요히 해는 지고 외로이 서 있는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나의 마음은 평온으로 돌아오다
돌아가리다
사람들과 만남을 끊고 세속과 나는 서로 다르거늘 다시 수레를 타고 무엇을 구할 것인가
고향에서 가족들과 소박한 이야기를 하고 거문고와 책에서 위안을 얻으니
농부들은 지금 봄이 왔다고 서쪽 들판에 할 일이 많다고 한다
나는 어느 때는 작은 마차를 타고 어느 때는 외로운 배 한 척을 젓는다
고요한 시냇물을 지나 깊은 계곡으로 가기도 하고 거친 길로 언덕을 넘기도 한다
나무들은 무성한 잎새를 터뜨리고 시냇물은 조금씩 흐르기 시작한다
나는 자연의 질서있는 절기를 찬양하며 내 생명의 끝을 생각한다
7)이태백(李太白, 701~762)
자는 태백(太白). 청련거사(靑蓮居士)라고도 합니다. 본명은 이백(李白)입니다.
소동파는 북송 인종(仁宗) 때 메이산[眉山:지금의 쓰촨 성(四川省)에 있음]에서 태어났읍니다. 8세 때부터 메이산의 도인(道人)이라 불리던 장역간(張易簡)의 문하에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그 영향을 받아 도가(道家), 특히 장자(莊子)의 제물철학(齊物哲學)을 접하게 되었읍니다. 1056년 그의 아버지 소순은 두 형제를 데리고 상경하여 이들의 시를 구양수(歐陽修)에게 보여주고 격찬을 받았읍니다. 이들 형제는 그해 가을 진사(進士)가 되었고 이듬해 예부(禮部)에서 주관하는 시험에 나란히 급제했지만 모친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갔읍니다. 1060년 복상(服喪)을 마치고 수도인 카이펑[開封]으로 돌아온 소동파는 관리임용 특별시험인 제과(制科)에 동생과 함께 급제했읍니다.
그후 후저우 지사(知事)로 있던 1079년 조정의 정치를 비방하는 내용의 시를 썼다는 죄목으로 어사대(御史臺)에 체포되어 수도로 호송되었읍니다. 이때 어사들의 심문과 소동파의 변명을 담은 기록이 〈오대시안 烏臺詩案〉에 남겨져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읍니다. 다행히 사형을 면한 그는 100일간의 옥살이를 마치고 황주(黃州:지금의 후베이 성[湖北省] 황강 현[黃岡縣]) 단련부사(團練副使)로 좌천되었읍니다. 정치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고 황주에 거주할 의무가 지워진 일종의 유형(流刑)이었읍니다. 황주에서의 생활은 매우 비참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읍니다. 그는 본래 병영이었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는데 이 땅을 동파(동쪽 언덕)라 이름짓고 스스로를 동파거사라고 칭했으며 그의 호는 여기서 유래한 것으로 그 유명한 〈적벽부 赤壁賦〉도 이곳에서 지은 것으로 알려졌읍니다.
유하혜는 중국 춘추전국 시대의 대표적인 성인군자입니다. 그는 덕행이 있고 예의를 중시한 정인(正人)군자로서 노나라의 대부로 있다가 이후 은둔생활을 했습니다.
어느 겨울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치던 날 그는 먼 길을 가다가 성 밖에서 노숙을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한 젊은 여인이 추위에 떨며 쓰러져 있었습니다. 유하혜는 이 여인이 얼어 죽을까 두려워 자신의 품에 안고 솜옷으로 덮어 추위를 막아주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날이 밝을 때까지 유하혜는 그저 여인을 안고 있었을 뿐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중국인들이 잘 알고 있는 '품에 안고서도 난잡하지 않다.'의 ‘좌회불란(坐懷不亂)의 고사입니다.
이 이야기는 후세에게 남녀가 접촉하는 면에서 도덕적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유하혜는 남녀 자리를 잘 지켰을 뿐 아니라 군주에게 직언할 줄 아는 충신으로도 알려졌습니다. 원칙을 고수했던 그는 이런 이유로 세 번이나 벼슬에서 파면당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유하혜를 보고 "이렇게 쫓겨나기보다는 차라리 다른 나라로 떠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권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유하혜는 "곧은 도리로 남을 섬기려면 어디를 가든 세 번은 쫓겨나지 않겠습니까? 벼슬을 보존하려면 도리를 어기면 되는데 굳이 조국을 떠날 필요가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공자는 유하혜를 '도덕이 고상하고 예절을 지킬 줄 아는 군자'라고 인정했으며 맹자는 그를 '조화로운 성인'이라는 뜻의 ‘화성(和聖)'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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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분의 군자는 문장이 천고에 떨쳐 빛나건만 내가 보기에는 문장은 그들에게 취미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내가 취하는 바는 그들의 인품에 있지 그들의 문장에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이 세 분 군자를 벗 삼는다 할 것 같으면 굳이 속인들과 함께 옷소매를 맞대고 어깨동무를 하며 또 소곤소곤 귀속말을 할 것도 없으며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친구의 도리라고 여기지도 않는다.
나는 이정(李楨)에게 명하여 세 군자의 초상을 그리게 하고, 내가 찬(贊)을 지어 한석봉에게 해서(楷書)로 쓰게 했다. 그래서 내가 머무는 곳이면 반드시 그 초상을 좌석 귀퉁이에 걸어 놓으니 세 군자가 엄연히 서로 마주 보고 품평하며 마치 함께 웃고 이야기하는 듯하고, 더욱이 그 인기척 소리까지 들리는 듯 하여 쓸쓸히 지내는 나의 생활이 괴로운 줄 거의 알지 못한다. 이렇게 하여 나도 비로소 오륜을 갖추었으니 사람들과 사귀는 것은 더욱 탐탐하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
아, 나는 본디 글을 못하는 사람이라 세 군자의 문장에도 따라 가지 못한다. 게다가 성격마저 거칠고 망령되어 그런 인물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감히 생각지도 못하는 바이다. 다만 그분들을 존경하고 사랑하여 벗으로 삼고자 하는 정성만은 귀신을 감동시키고도 남음이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그런지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나고 하는 것도 모르는 사이에 그 분들과 서로 일치되는 바가 있다.
도연명은 팽택의 수령이 되어 80일 만에 관직을 그만 두었고, 나는 2천석을 받는 태수가 되었으나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번번히 배척받아 쫓겨나고 말았다. 적선(謫仙) 이백은 심양과 야랑으로 귀양가고, 소동파는 대옥과 황강으로 귀양갔으니 이는 모두 어진이가 겪는 불행이었다. 그런데 나는 죄를 얻어 형틀에 묶여 곤장을 맞은 뒤 남쪽으로 귀양을 갔었으니 아마도 조물주가 장난을 쳐서 그들과 같은 고통만은 맛보게 하면서도 주어진 재주와 성품만은 갑자기 바꿀 수 없었던 모양이다.
다행히 하늘의 복을 받아 전원으로 돌아 갈 수 있도록 허락되었으니 관동지방은 나의 옛 터전으로 그 경치며 풍물이 중국의 시상산, 채석강과 견줄만하고 백성은 근실하고 땅은 비옥하여 또한 중국의 상숙현과 양선현 보다 못지 않으니 마땅히 세분 군자를 모시고 벼슬을 모두 버리고 경포 호숫가로 돌아 간다면 어찌 인간 세상에 한가지 즐거운 일이 되지 않겠는가. 저 세분 군자가 안다면 역시 즐겁고 유쾌하게 생각하실 것이다.
내가 사는 집은 한적하고 외져서 아무도 찾아오는 이가 없으며 오동나무가 뜰에 그늘을 드리우고 떨기로 난 대나무와 들매화가 집 뒤에 줄지어 심어져 있으니 그 그윽하고 고요함은 꽤 즐길만하다. 그런 중에 북쪽 창에다 세 군자의 초상을 펴 놓고 분향하고 읍을 하는 생활을 한다. 이에 편액을 사우재(四牛齊)라 하고 그 연유를 이와 같이 기록해 둔다.
이 글은 자신의 집을 사우재(四友齊)라고 붙인 까닭에 대하여 쓴 것입니다. 자신의 제 멋대로인 성격으로 인하여 세상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 것을 밝히면서 늘 흠모하던 네 명의 옛 선비인 도연명, 이태백, 소동파를 벗으로 삼기로 작정하고 이정에게 초상화를 그리게 한 후 항상 자신의 곁에 두어 정신적인 친분을 나누었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교산 허균의 삶의 자세와 가치관을 그대로 들여다 볼 수 있는 글입니다.
다음 글은 누실명(陋室銘)이라는 제목의 글로 교산 허균이 자신이 머물렀던 방에서의 느꼈던 느낌을 잔잔하게 적어 놓은 글입니다.
누실명(陋室銘)
남쪽으로 두 개의 창문이 있는 손바닥만한 방 안
한낮의 햇볕 내려 쪼이니 밝고도 따뜻하다
집에 벽은 있으나 책만 그득하고
낡은 베잠방이 하나 거친 이몸
예전 술 심부름하던 선비와 짝이 되었네
차 반 사발 마시고 향 한 가치 피워 두고
벼슬 버리고 묻혀 살며, 천지 고금을 마음대로 넘나든다
사람들은 누추한 방에서 어떻게 사나 하지만
내 둘러보니 신선 사는 곳이 바로 여기로다
마음과 몸 편안한데 누가 더럽다 하는가.
참으로 더러운 것은 몸과 명예가 썩어 버린 것
옛 현인도 지게문을 쑥대로 엮어 살았고
옛 시인도 떼담집에서 살았다네
군자가 사는 곳을 어찌 누추하다 하는가.
아마도 이 글은 임진왜란 때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 강릉으로 피난을 왔었는데 외갓집인 강릉 사천 애일당에 있으면서 썼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애일당 뒤 길다랗고 나즈막한 산줄기가 교산인데 허균의 교산이라는 호도 이때부터 즐겨 썼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지금도 애일당 옆 바다가 보이는 나즈막한 언덕배기에는 교산 허균을 기리는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습니다. 누실명의 한 대목을 김동욱님이 번역하고 쓴 것으로 조금 다른 맛을 느끼게 해 주는데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습니다.
반 항아리 차를 거우르고,
한잡음 향 피우고
외딴집에 누워
건곤고금을 가늠하노니
사람들은 누실이라 하여
살지 못하려니 하건만
나에게는 신선의 세계인져
다음 글은 도문대작10)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음식품평서로 별미노트에 해당하는 책인데 그 책의 처음을 차지하고 있는 방풍죽에 대한 글입니다. 귀양을 가 마음껏 먹을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던 교산 허균은 예전에 먹었던 그 맛을 그리며 특히 그가 강릉 집에서 맛보았던 방풍죽을 그리며 썼던 글이라 더욱 관심을 끄나 봅니다.
방풍죽(防風粥)
깨끗이 다듬은 방풍을 살짝 데쳐
쌀이 알맞게 죽을 쑤고
사기그릇에 담아내는 방풍죽
이것은 좋은 맛이 입안에 가득하여
3일이 지나도 가실 줄 모르는 향미로운 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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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도문대작 [屠門大嚼]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을 지은 교산 허균(許筠:1569~1618)이 우리나라 8도의 명물 토산품과 별미음식을 소개한 책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음식 비평서 또는 별미노트입니다.
1권 1책. 필사본이지요. 1611년(광해군 3) 허균이 귀양지인 전라북도 함열(咸悅)에서 기존의 초고와 기억을 토대로 엮은 성소부부고( 惺所覆瓿藁)에 들어 있습니다.
'도문대작'이란 푸줏간 앞을 지나면서 크게 입맛을 다신다는 뜻으로, 병이류(餠餌類) 11종, 과실류 30종, 비주류(飛走類) 6종, 해수족류(海水族類) 40종, 소채류 25종, 미분류 5종 등 총 117종의 식품에 대한 분류와 명칭, 특산지, 재배 기원, 생산 시기, 가공법, 모양, 맛 등의 내용을 몇 가지씩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현재 채소로 전혀 사용되지 않는 목숙이 당시 좋은 식품이었다는 점과 원주(原州)가 그 특산지였다는 사실은 목숙연구에 좋은 참고가 됩니다. 또한, 고려 삼별초의 항쟁 때 몽고의 장군인 홍다구(洪茶丘)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수박[西]을 들여와 개성에서 재배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는 고증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밖에도 제주산의 귤 종래 금귤(金橘)․감귤(甘橘)․청귤(靑橘)․유감(柚柑)․유자(柚子)․감류(甘榴) 등 6종과 백어(白漁)․소라․홍합․화복(花鰒) 등을 기록하고 있는데, 특히 화복의 경우 경상우도의 상인들이 전복을 말려 꽃 모양으로 오리거나 얇게 저미는 기술이 능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곰의 발바닥, 표범의 태(胎), 사슴의 혀와 꼬리 등 진기한 식품들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단순한 식품 소개의 차원을 넘어 전국을 대상으로 각 식품에 관한 음식 관습까지 언급하고 있어 17세기 우리나라 별미음식을 알 수 있는 좋은 식품학상의 자료가 되며, 더욱이 별미음식이 넓은 지역에 걸쳐 선정되어 있으므로 당시 상류계층의 식생활과 향토의 명물을 쉽게 알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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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가 자신에 관한 것이었다면 지금부터는 밖의 세계를 바라보는 교산 허균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시는 나 아닌 너인 즉 백성을 위하는 그의 치열한 의식이 교산 허균의 철학과 사상의 밑바탕에 그대로 짙게 깔려 있다는 것을 강하게 느낄 수가 있습니다. 자신의 영달을 위하여 실천적인 혁명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닌 이웃을 바라보는, 이웃을 위하는 따뜻한 마음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것을 알게 합니다. 임진왜란으로 철저하게 짓밟힌 한 여인의 삶이 잔잔하게 그려져 있지요.
좀 길지만 차분하게 음미해 보면 좋을 듯 싶습니다.
노객부원(老客婦怨)
- 늙은 나그네 아낙의 원망 -
東州城西寒日曛(동주성서한일훈)
동주 성 서쪽, 차가운 해 뉘엿뉘엿
寶蓋山高帶夕雲(보개산고대석운)
우뚝한 보개산이 저녁 구름 감싸 있다
皤然老嫗衣藍縷(파연로구의남루)
머리 허옇게 센 늙은 할미, 남루한 옷차림
迎客出屋開柴戶(영객출옥개시호)
손님 맞아 방을 나와 사립문을 열어 준다
自言京城老客婦(자언경성로객부)
스스로 말하기를, 서울 늙은 나그네 아낙
流離破産依客土(류리파산의객토)
파산하여 떠돌다가 객지에 사는 신세가 되었다오
頃者倭奴陷洛陽(경자왜노함락양)
저 지난날 왜놈들이 서울을 함락시켜
提携一子隨姑郞(제휴일자수고랑)
외 아들 손에 잡고 시어머니와 남편 따라
重跡百舍竄窮谷(중적백사찬궁곡)
삼백리 길 걷고 걸어 깊은 골에 숨어 왔소
夜出求食晝潛伏(야출구식주잠복)
밤에 나와 밥을 빌고 낮에는 숨어 살았소
姑老得病郞負行(고로득병랑부행)
시모 늙어 병을 얻어 남편이 업고 가니
蹠穿崢山不遑息(척천쟁산불황식)
험한 산길에 발바닥이 다 뚫어져도 쉬지도 못했소
是時天雨夜深黑(시시천우야심흑)
이런 때, 비는 내려 밤이 더욱 캄캄하니
坑滑足酸顚不測(갱활족산전불측)
길 미끄럽고 다리 시러워 언제 넘어질지 몰랐소
揮刀二賊從何來(휘도이적종하래)
칼 휘두르는 두 왜적은 어디서 왔는지
闖暗躡蹤如相猜(틈암섭종여상시)
어둠 속에 머리 내밀며 서로 다투어 뒤를 밟아
怒刃劈脰脰四裂(노인벽두두사렬)
성난 칼날 목을 갈라서 목이 찢어졌소이다
子母倂命流冤血(자모병명류원혈)
어미와 아들 다 죽어 원한의 피 흐르고
我挈幼兒伏林藪(아설유아복림수)
나는 어린아이를 끌고 덤불 속에 엎드렸소
兒啼賊覺驅將去(아제적각구장거)
아이 울음에 들켜 잡혀가고 말았으니
只餘一身脫虎口(지여일신탈호구)
내 한 몸 겨우 남아 호랑이 굴을 벗어났지만
蒼黃不敢高聲語(창황불감고성어)
허둥지둥 경황없어 소리 높여 말조차 못했소
明朝來視二骸遺(명조래시이해유)
다음 날 아침 와서 보니 두 시체 버려져
不辨姑屍與郞屍(불변고시여랑시)
시모인지 남편인지 분간할 길 없었다오
烏鳶啄腸狗嚙骼(오연탁장구교격)
솔개와 까마귀 창자 쪼고, 들개는 살 뜯으니
蔂梩欲掩憑伊誰(류리욕엄빙이수)
삼태기와 흙수레로 덮어 가리려 해도 누가 도와주랴
辛勤掘得三尺窞(신근굴득삼척담)
석 자 깊이 구덩이를 천신만고로 겨우 파서
手拾殘骨閉幽坎(수습잔골폐유감)
남은 뼈골 손수 모아 봉토하고 나니
煢煢隻影終何歸(경경척영종하귀)
의지 없는 외그림자 끝내는 어디로 돌아갈까
隣婦哀憐許相依(린부애련허상의)
이웃 아낙 슬피 여겨 함께 살자 하여
遂從店裏躬井臼(수종점리궁정구)
이 주막에 더부살이 방아 찧고 물 길렀소
餽以殘飯衣弊衣(궤이잔반의폐의)
남은 밥 먹여 주고 낡은 옷 입혀 주어
勞筋煎慮十二年(로근전려십이년)
지치고 마음졸이기 열두 해가 되었다오
面黧髮禿腰脚頑(면려발독요각완)
주름진 얼굴, 듬성머리, 허리도 다리도 뻐근한데
近者京城消息傳(근자경성소식전)
근자에 서울 소식 드문드문 들려왔소
孤兒賊中幸生還(고아적중행생환)
내 불쌍한 아이는 적중에서 다행히도 살아나와
投入宮家作蒼頭(투입궁가작창두)
대궐에 투숙하여 창두가 되었다 하오
餘帛在笥囷倉稠(여백재사균창조)
옷장에는 남은 비단, 창고에는 곡식 가득하니
娶婦作舍生計足(취부작사생계족)
장가들고 집 마련하여 생계가 풍족하다 하나
不念阿孃客他州(불념아양객타주)
타관살이 나그네 처지 제 어미께 생각 못하니
生兒成長不得力(생아성장불득력)
낳은 아들 성장해도 그 덕을 보지 못하오
念之中宵涕橫臆(념지중소체횡억)
생각할수록 한밤중에 눈물이 가슴 적시고
我形已瘁兒已壯(아형이췌아이장)
내 꼴은 다 시들고 아들은 이미 장년이 되었소
縱使相逢詎相識(종사상봉거상식)
설사 서로 만나더라도 알아 볼 리 있을까
老身溝壑不足言(로신구학불족언)
늙은 몸 구렁에 버려지는 건 더 말할 나위 없거니
安得汝酒澆父墳(안득여주요부분)
너의 술이라도 얻어 아비 묘에 올려볼 수 없겠는가
嗚呼何代無亂離(오호하대무란리)
아 슬프구나, 어느 시대인들 난리야 없으랴만
未若妾身之抱冤(미약첩신지포원)
이 못난 여편네가 품은 원한은 아직도 없었으리라
이제 한 편의 시를 더 읽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사지가 찢기는 능지처참을 당한 교산 허균의 꿈과 그 마음이 담긴 노래요, 시라는 생각이 들어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시의 제목은 명연(鳴淵) 그러니까 울음을 토해내는 연못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명연(鳴淵)
- 우는 연못 -
陰竇窺窈窱(음두규요조)
그늘진 못 엿보니 까마득히 깊기만 한데
幽幽黮環灣(유유담환만)
거뭇한 물안개 그윽히 물굽이를 에워싸고
下有千歲虯(하유천세규)
물밑엔 천년 묵은 이무기 있어
佶栗深處蟠(길률심처반)
꿈틀대며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구나
有時吐白氣(유시토백기)
때때로 흰 기운 토해 내면
霏作煙漫漫(비작연만만)
흩어진 연기처럼 자욱할 뿐
何時變雷雨(하시변뢰우)
언젠가 때가 오면 천둥 비 일으키며
飛上瑤臺端(비상요대단)
날아서 하늘 위로 높이 오를 터
이 시는 교산 허균의 나이 서른 다섯쯤 되는 젊은 시절에 혁명을 꿈꾸며 쓴 것으로 여겨집니다. 결국, 자신을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에 비유하여 노래한 것이 되고만 애절한 시로 오늘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교산 허균의 사람 모습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기회가 되면 행여 내 주변에서, 내 곁에 있는 이웃 님들에서 교산 허균의 모습을 아니 교산 허균을 찾아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 인문학 그러니까 “사람 공부”의 궁극을 찾아 떠나 보기로 하겠습니다.
5. “사람 공부”는 곧 깨달음의 세계
1) 나를 찾는 작업
사람 공부는 나에서 출발합니다. 즉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나의 존재를 인식하고 탄생에 대한 경이로움에 접하게 되지요.
나는 나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사람으로 탄생, 존재하는 것으로 그것은 바로 사랑의 결실입니다. 공간에서 어느 일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지만 존재의 가치 즉 존재감은 그냥 위치해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것은 스스로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을 때 비로소 존재자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나는 지금이라는 시간과 그것이 쌓여 만든 역사라는 흐름 속에 위치해 있으며 여기라는 나를 담고 있는 공간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채 영글지 못한 상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지요.
홍길동은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를 수 없는 처지”로 존재하고 있으며 교산 허균은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할 말이 있다”라고 외치며 할 말을 하지 못한 처지의 존재로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나는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를 돌아봅시다. 그러고 이런 내가 어떻게 채워지는지를 찬찬히 살펴 볼 차례입니다.
2) 앎에서 깨달음으로
앎은 보고, 듣는 과정을 거치면서 이해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맛으로, 냄새로, 피부의 촉감으로 이해의 폭을 넓히게 됩니다. 즉 형태의 세계요, 물질의 세계를 접하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앎이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보이는 세계만으로 이 세상은 구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이 떠져야 된다는 것이지요. 그랬을 때만이 진정한 앎에 이르게 되고 깨달음의 세계에 들게 되는 것입니다. 단순한 앎에서 진정한 앎으로 이해되기 위해서는 유무형의 세계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뒤따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앎을 방해하고 있는 것들을 거두어 내야 합니다. 그 시작이 바로 공부입니다. 그리고 공부의 시작은 텅빈 나를 채우는 데에서부터 다시금 텅빈 나를 만들어 가는 힘든 과정입니다.
그런데 이 공부가 제대로 되지 못했을 경우, 안타까운 일이지만 오히려 깨달음을 방해하는 구실을 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앞에서 길(道)을 설명하면서 노자의 도덕경을 이야기했는데 그것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道可道 非常道(도가도 비상도)요 / 이것이 도(道)라고 말할 수 있는 도(道)는 상도(常道) 그러니까 도(道)의 끝점에 있는 최상의 도(道) 즉 불변의 도(道)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의 세계를 드러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말과 글이지만 이 말과 글은 이미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말과 글에 얽매이기 보다는 그것이 나타내려고 하는 뜻을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비로소 바로 알 수 있고, 그래야만 참으로 깨달음의 세계에 닿을 수 있는 것입니다.
홍길동은 집을 떠나 도둑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을 설득하여 활빈당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탐관오리들을 혼내주기도 했으며 곡식을 빼앗아 가난한 백성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기도 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상당하게 무술을 익힌 것을 알게 합니다. 또한 변신술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등 그 경지가 보통 이상이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이것은 바로 상당히 깊은 공부를 한 홍길동이라는 것이지요. 교산 허균의 공부도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유불도를 거쳐 천주학 그리고 한민족의 뿌리정신에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단순한 앎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세계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사실은 교산 허균의 실천적인 삶을 들여다보면 바로 알 수가 있는 대목입니다.
3) 깨달음은 끝없이 자신을 비우고 우주와 소통하는 일
여기서 잠시 부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 보겠습니다. 싯달타의 “사람 공부”를 엿보자는 것이지요.
싯달타의 삶은 고집멸도(苦集滅道)의 과정을 몸소 거치면서 깨달음에 이르렀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삶은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과정으로 결국은 고통의 바다라는 것이지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수긍이 갑니다. 그런데 그러한 고통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일까요?
그것이 바로 집착에서부터 왔다는 것이지요. 이 집착은 욕심을 말하기도 합니다. 생노병사의 고통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그 원인이 되는 집착을 버리는 것이 필요하고 그 길이 찾는 것이 바로 도(道)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에 세계를 여는 것이지요.
이제 우리는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지 못했던 홍길동”에서 “할 말을 하지 못했던 교산 허균”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막힌 것을 뚫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르게 전달되지 못했을 때의 갑갑함을 떨쳐버리는 일입니다. 그것은 나와 나 자신과의 소통에서 시작하여 나와 너와의 소통으로 확대시키는 일입니다. 이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사랑입니다. 사랑의 기운이요, 사랑의 에너지를 주고받는 일입니다.
그러데 이처럼 막히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지금까지 나를 가득 채웠던 집착에서 비롯된 공부일 겁니다. 이렇게 집착, 욕심에서 쌓았던 공부는 하나씩 하나씩 털어 내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우주요, 내가 주인이요, 창조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앎에서 시작한 것이지만 단순한 앎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깨달음에 이르러야 합니다. 즉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고 몸으로 아는 일입니다. 체득하는 것이지요. 지극한 경지를 몸소 느낄 수 있어야 얻어지는 세계입니다.
그리고 그것에서 생명을 보아야 합니다. 풀 한 포기, 딩구는 돌, 스치는 바람, 나와 그리고 나를 제외한 일체의 것 그러니까 하늘과 땅을 포함한 너에게서 나를 보는 일입니다. 나와 너는 같은 우주의 태에서 태어난 동포(同胞)임을 아는 일입니다.
이것은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라는 우리 한민족 뿌리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지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나에게서 그리고 너에게서 하늘을 보는 것이고, 땅을 보는 것이지요. 이러한 지경에 이르면 바로 우주와 소통하게 됩니다. 홍길동전에서 그리고 그것을 지은 교산 허균에서 우주와의 소통을 이루어 내가 곧 하늘임을 몸으로 깨닫기를 빕니다.
아울러 오늘, 이 길 위의 인문학인 “사람 공부”를 통하여 “지금의 내”가 “시작할 때의 내”가 분명히 아님을 깨우치는 잔잔한 기쁨을 얻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어제도 그리고 미래도 소중한 것이지만 “지금”이라는 존재와 붙어 있는 이 시간이 더욱 소중하며 이러한 존재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여기”가 더욱 소중하며 부족하면 부족한 “이대로”의 나를 통하여 나 자신과 우주와 소통하는 것이 더욱 소중할 것입니다.
글을 마치며
돌이켜 보면 쑥스럽기 그지없는 삶을 사는 저입니다. 도저히 용기를 낼 수 없는 일을 계속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이런 저런 책을 뒤적이며 뚫어져라 읽었으면서 책에 써 놓기는 마치 자신의 지식인 것처럼 서술한 대목이 있을 테니까요.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그렇게 서술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저의 부족이요, 서툰 표현이며 그 밑바탕 지식은 순전히 다른 이에게서 빌려 온 것으로 보면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글에만 얽매지 않으려고 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길 위의 인문학, 홍길동전과 교산 허균”이라는 틀이 주어졌고, 그 틀에 저의 생각을 담게 되었습니다.
글 머리에서도 밝혔듯이“길 위의 인문학”은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서 어떻게 살아 가는 것이 바른 삶인가를 물으면서 “사람 공부”를 통하여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는 것으로 여기고 조심스럽게 저의 생각을 소개한 것입니다. 이미 이 삼천년 전, 아니 그 보다 훨씬 이전인 반 만년 전에 가르침은 있었습니다. 오늘의 소통은 가르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를 넘어 앎에서, 깨달음의 길로 가자는 것이지요. 몸으로 아는 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이렇게 만용을 부릴 수 있었던 것은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이대로 힘을 내라는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제가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행여 이 후라도 틀린 것을 찾게 되면 바로 잡아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밝혀야 할 출전은 대목마다 자세하게 밝히지 못하고 "참고문헌”으로 다음과 같이 한데 모아 놓았습니다. 너른 이해를 구합니다.
부디 여러분과의 만남이 귀한 만남으로 저 자신은 물론 여러분 자신을 변화시키는 새로운 단초가 마련되기를 간절히 빕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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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고 문 헌】
교산 허균 시선(허경진 2013. 4. 15 개정증보판 평민사)
국사대사전(이홍식 1981. 1. 5 세진출판사)
원전해설 홍길동전(장정룡 2005. 3. 30 재판 동녘출판사)
웃음과 눈물의 인간상(이어령 1969. 2. 10 삼성출판사)
태백의 인물(최승순 외 1973. 3. 15 강원일보사)
한국과 한국인(이어령 1969. 3. 25 삼성출판사)
한국사(진단학회, 이상백 1981. 4. 25 을유문화사)
한국사신론(이기백 1982. 1. 10 일조각)
허균 연보(허경진 2013. 4. 25 도서출판 보고사)
허균의 생각(이이화 1980. 11. 5 뿌리깊은 나무)
허균의 생애와 사상(김동욱 1959. 3월 사상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