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함께 하기 위한 또 다른 보혜사
2012년 10월21일(일)
(요14:15~24)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주님이 떠나실 것을 알고 제자들이 불안해하고 있을 때,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 염려하지 말라 하셨고, 그래도 안심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어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겠다” 고 하셨다.
주님이 떠나신다는 것을 알고 제자들이 불안해 있는 것을 알고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 이렇게 위로하였다. “염려하지 말고 있어라.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 내가 가서 거할 곳을 예비하고 다시 와서 너희를 나 있는 곳에 있게 하겠다.”이렇게 말씀을 했는데, 제자들은 아무리 이 말씀을 들어도 잘 납득이 가지 않는 말이고 무슨 말인지 모르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두 번째 하신 말이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서 너희와 영원토록 함께 있게 하겠다.” 이렇게 말씀했다.
“아버지 집”은 그리로 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자신이고, “다른 보혜사”는 우리 안에 내주하시어 아버지 집으로 가게 하는 생명으로서 실제의 영이영이신 그리스도다.
결국 아버지 집은 그 말씀에 따르면 그리로 가는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신 예수 자신이었다. 아버지 집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그러니까 알기가 어려운 것이다. 천당처럼 따로 있는 것이라고 하면 모르긴 몰라도 가보지 않았지만 이렇겠구나 생각을 하겠지만, 내가 길이요 내가 실제이고 내가 생명이라고 하니까 어떻게 알아듣겠냐는 것이다. 요즘도 사람들은 그래서 못 알아듣기 때문에 “천당! 천당!”하는 것이다. 어떤 장소라고 하면 알아듣기 쉬우니까 우매한 백성을 위해서 그렇게 말하지 않았겠나 하는 이런 생각도 든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코 공간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의 영원한 거처로서 자신을 말씀하신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때로서는 알아듣기 매우 어려운 말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어렵다.
그런데 여기서 “다른 보혜사”는 누구인가 하면 우리 안에 내주해서 아버지 집으로 가게 하는 생명을 말한다. 실제의 영이신 그리스도다. 결국은 아버지 집으로 가는 길도 그분이고 또 우리 안에서 아버지 집으로 가게 하는 생명도 그분이다. 그러니까 알고 보면 예수님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 집으로 말하든지 보혜사로 말하든지 표현은 다르지만 내용은 그분자신이다.
육신으로 오신 아들은 영원히 함께 할 수가 없는 형태였기 때문에 영원한 처소와 생명을 약속하신 것이다.
육신으로 오신 아들은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형태이다. 사람은 육신으로 옆에 같이 있다고 해도 사실은 나 자신이 아니니까 그것 자체가 함께 있는 것은 아니고 결국 따로따로 있는 것이다. 따로 국밥처럼 따로 있는 것이다. 알고 보면 같이 걸어가도 따로 가고 있는 것이다. 객체가 다르니까. 그래서 안에 있다는 이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형태 자체가 육체이기 때문에 같이 있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영원한 처소, 영원한 생명 이것이 있어야 한다. 진짜로 함께 가려면 지금 우리가 팔짱을 끼고 가는 이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 있어야 한다. 그것 가지고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같이 옆에 있어도 둘이 서로 개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은 이런 말씀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역사적으로 그들과 함께 하는 분이다.
그들이 부르는 “조상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을 거쳐 모세와 다윗과 함께 하신 살아계신 분이다. 그분은 역사 안에서 그들과 함께 하신 하나님이었으며, 이스라엘은 그분과 함께 역사를 만들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의 하나님은 추상적인 신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함께 하는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역사적으로 그들과 함께 하는 분이었다. 성경에서 “조상의 하나님”할 때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가리켜서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한다. 그 안에는 모세도 포함되고 다윗도 포함되고 자기들의 조상이 다 포함되어 있다. “그분들의 하나님!”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까 살아계신 그런 분을 말하는 것이다. 역사 안에서 그들과 함께 하신 하나님, 애굽을 나올 때 함께하신 하나님 광야를 통과할 때 함께하신 하나님 가나안에 들어가서 나라를 세울 때 함께하신 하나님을 말하는데, 이스라엘의 역사라는 것은 결국 그분과 함께하는 역사였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막연하게 추상적인 신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실제적으로 함께하는 하나님이었다.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모양도 모르지만 하여간 자기들의 역사와 함께하는 하나님, 그분 때문에 그들은 애굽에서 나왔고 그분 때문에 광야에서 만나도 먹었고 메추라기도 먹었고 구름기둥 불기둥을 경험했는데 이 모든 것들은 그분과 다 함께였다. 그러니까 유태인들의 신관이라는 것은 이방인들과 전혀 다르다.
이와 같이 제자들에게 예수는 실제적으로 함께 하는 주님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와 함께 있을 동안 그들은 다른 하나님을 부르지 않았다. 주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그 주님이 떠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안했고 당황했으며 주님은 함께 할 처소와 살아갈 생명을 약속하신 것이다.
제자들도 예수님은 실제적으로 자기들과 함께하는 주님이었다. 그분과 함께만 있으면 모든 것이 되겠다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어디로 떠난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다른 하나님을 부른 일이 없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또 다른 하나님을 찾은 일이 없었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주님이 있었으니까. 자기들의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 있고 기대를 걸 수 있는 소망을 갖는 그런 분이 있었으니까 따로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독특한 면이다.
유태인들이 아니고 이방인들 같으면 주님이 함께 있어도 신은 따로 있으니까 신을 찾는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주 실제적이었다. 주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또 다른 하나님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그 주님이 떠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안했던 것이다. 요즘 같았으면 불안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늘 하늘에 계시니까 떠나간다고 해서 불안할 것이 뭐가 있겠나. 불안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실제적이었기 때문에 불안하고 당황했던 것이다. 그래서 함께 할 처소와 같이 살 생명을 약속하신 것이다. 우리가 이런 배경을 빼놓고 생각하면 절대로 안 된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다.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심
여기서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겠다.”고 했다.
* 또 다른(alon)
“또 다른” 이라는 말은 본질은 같은데 형태는 다르다는 의미의 말이다. 즉 예수님의 다른 형태를 말하는 것이다. 지금은 육신의 형태로 함께 하지만 다음에는 또 다른 형태의 “보혜사”로 함께 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 말은 본질은 같은 데 형태는 다르다는 그런 의미의 말이다. 희랍어에는 다르다는 말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아예 본질이 다르다는 것이고, 이것은 본질은 같은 데 형태만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또 다른’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또 다른’이라는 말은 ‘자신과 같은’이라는 말이다. ‘자신과 같지만 형태만 다른’ 그런 뜻이다. ‘나하고 형태만 다른’ 이런 뜻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다른 형태다. 지금은 육신의 형태나 모양으로 함께 하고 있다. ‘그런데 다음에는 육신의 모양이 아닌 다른 형태로 너희와 함께할 것이다.’ 이 말이다. ‘나는 나인데 지금의 형태가 아닌 또 다른 형태로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이 말이다.
⑴ 보혜사(parakletos)
“보혜사”는 곁에서 변호하는 자, 돕는 자를 칭하는 말이다. 육체로서의 나는 떠나지만 나와 하나인 또 다른 형태의 보혜사가 와서 영원토록 함께 할 것이라는 것이다.
보혜사는 ‘곁에서 변호한다, 돕는다.’ 이런 뜻이다. para라는 말은 ‘곁에’라는 뜻이고, kletos는 말은 ‘불려온다.’ 그런 뜻이다. 무엇하러 불려왔는가? 돕기 위해서 불려왔다. ‘변호자’ 이런 뜻이다. 나를 돕기 위해서 항상 옆에 있는 자, 이것을 보혜사라고 한다. ‘육체로서 나는 떠난다. 그렇지만 나와 또 다른 형태인 또 다른 보혜사가 와서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게 된 것이다. 이것도 참 막막한 말이다.
1/4. 보혜사는 아버지로부터 옴
“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 하셨다.
보혜사는 영이다.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오셨듯이 보혜사도 아버지로부터 온다. 형태는 다르나 근본은 하나라는 것이다.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 육체가 되신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는 우리 생명이 되기 위해 영이신 보혜사를 보내신다는 것이다. 육체로 우리와 함께 하신 아들은 하나님이 사람들과 함께 하기 위한 장막이 되셨고, 영으로 함께 하실 보혜사는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하기 위한 생명이 되실 것이다.
보혜사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아버지로부터 온다. 왜냐하면 “내가 아버지께 고하였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실 것이다.”그러니까 이 보혜사는 결국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왔듯이 보혜사도 역시 아버지로부터 온다. 이 말은 형태는 다르지만 근본은 하나라는 뜻이다. 모양은 달라도 보내신 분은 한 분이고 하나다.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가 우리의 생명이 되시기 위해서 영이신 보혜사를 보내신다는 뜻이다. 육신은 우리가 인생으로 같이 살기 위해서 육체가 되신 예수가 필요했다. ‘말씀이 육체가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실재가 충만하더라.’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가 한계(限界)이냐 하면 육신이 있을 때까지 뿐이다. 그러니까 곁에 같이 있기는 했지만 내 자신의 생명 속에 없기 때문에 그분이 떠나고 나면 나는 홀로 떨어질게 아니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함께 있기 위해서는 한 생명이 되어야 된다. 그래서 ‘생명이 되실 분을, 그 영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이런 말이다. 물론 같이 가는 것도 좋은 데 그것은 한계가 있다. 한 생명이 안 되면 한계가 있는 것이다.
사람은 근원적으로 고독(孤獨)하다는 말이 있다. 왜냐하면 영원히 혼자이기 때문이다. 죽는 순간에도 혼자다. 함께 죽을 수는 없다. 한 날 한 시에 약을 먹고 동시에 죽는다고 해도 같이 죽는 것이 아니다. 따로따로 죽는 것이다. 같이 죽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보고 근원적인 고독이라고 한다. 사람이 왜 고독을 느끼는가 하면 영원히 홀로이기 때문에 그렇다. 같이 있지 못한다. 누구도 같이 있을 수 없다. ‘너하고 내가 같이 죽고 같이 살자.’ 이렇게 해도 같이 죽을 수도 없고 같이 살 수도 없다. 너 죽고 나 살고 이게 맞는 말이다.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아무리 마음으로 하고 싶어도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고독하다. 이것이 깔려서, 깊은 잠재의식 속에 깔려서 우리가 고독을 느낀다고 한다. 어떤 것을 볼 때 고독을 느낀다고 한다.
그러니까 생명이 되어야 함께 하지 다른 방법으로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함께 할 수 없다. 그래서 보혜사를 보낸다는 말은 생명의 영을 보낸다는 말이다. 요즘의 교회에 ‘은사로서 영’ 위에서 부어져서 생선 튀듯이 튄다든지, 힘이 나서 솟아오른다든지, 능력이 막 생긴다든지, 이런 것과는 다른 것이다. ‘능력이 입혀진다.’는 것은 내주하는 것과 다르다. 우리가 오순절의 성령이라고 말할 때는 입혀지는 것을 말한다. ‘능력이 입히울 때까지 너희는 이 성에 유하라.’ 하는 말이 있다. 그러니까 능력으로서 성령과 우리에게 입혀진 성령하고 우리 안에 내주하는 성령과는 다르다.
입혀진 성령은 있다가 없어질 수도 있다. 불이 펄펄 끓을 때는 손만 잡아도 병이 낫고, 능력이 나오고 그랬다. 그런데 어느 날 가면 그게 사라질 수 있다. 다 사라지고 아무 것도 없을 수도 있다. 이것은 마치 어떤 옷을 입었다가 벗어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일시적으로 무엇인가가 왔다가 없어지는 것과 같다. 이것은 우리의 감정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감정이 좀 뜨겁지 않은 사람은 그런 것을 가지기가 어렵다. 같이 기도를 해도 감정이 예민하고 펄펄 끓는 사람은 금방 뭐가 되는 데 그렇지 않은 사람은 참 어렵다. 아까 간증하신 오래곤에서 오신 자매님도 아마 상당히 충만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아까 그러지 않는가 모든 것을 팽개치고, 자식이고 재산이고 다 팽개치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럴 때는 물불을 가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가면 다 식어지고 없어지는 것이다. 작두 위에서 춤을 추는 사람이 있다. 보통 생각으로는 못 한다. 어떻게 칼 날 위에서 춤을 추겠는가? 그래도 발이 안 상한다. 그렇다고 언제든지 칼 날 위에 발을 대면 안 된다. 그 사람이 그냥 우리와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가 칼 날 위에 서겠는가? 그것은 아니다. 어떤 큰 동기를 부여해서 제정신이 아닐 때 칼 날 위에 서게 되는 것이지 멀쩡한 정신으로는 못 선다. 다 이와 비슷한 것이다. 은사로서 성령은 다 이런 유에 속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보혜사는 그런 성령이 아니고 생명을 말한다. 우리와 함께 할 영이 되었다. 능력을 행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함께 하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아들을 통해 사람에게로 오시고 사람은 보혜사를 통해 하나님께로 가는 이 우주적인 만남을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아들을 통해 은혜와 실제로 사람에게로 오셨고, 사람은 보혜사를 통해 생명으로 하나님께로 나아오게 하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사람에게로 오시고 사람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
하나님은 아들을 통해서 사람을 사람에게로 오셨다.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께로 가려면 어떻게 가야 될 것인가? 보혜사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가야 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로 오시려면 하나님의 본질 그대로 우리에게 올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와 형식이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왔다고 말하는 데 ‘하나님이 왔다?’ 어떻게 하나님이 오시겠는가? 하나님은 오실 수가 없다. 오실 수가 없는데 아들을 통해서 왔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만약에 하나님이 그냥 오실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육신이 되어서 세상에 오시겠는가? 그냥 오시면 된다. 구약 성경에 보면 ‘영이 임했다.’는 데가 나온다. 그런데 그것은 임한 것이지 우리와 함께 계속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실 때 반드시 아들을 통해서 오신다. 그러므로 아들이 아니고 다르게 오는 것은 요즘 말로 하면 정통적인 것이 아니다. 혹시 그런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정통이 아니다. 어떤 특별한 경우에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정상적인 통로는 아니다. 우리가 어디 가서 기가 막히는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지만, 항상 그것을 먹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항상 먹는 것은 밥이고 빵이고 그렇다. 이와 같이 우리는 정상적인 길을 걸어가는 것이지 그렇게 특별한 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온다. 아들을 통해서 온다. 이 말은 사람을 통해서 온다. 이 말로 우리가 해석하면 된다. 아들을 통해서 오시는 분은 곧 사람을 통해서 온다.
그러니까 사람 빼놓고 자기 혼자 어디 쭈그려 앉아서 하나님 만나려고 하는 것은 비 정통적인 길이다. 정상적인 길이 아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통해서 오시는 분이니까 사람을 통해서 인격을 통해서 오시는 분인데 나는 따로 앉아서 하나님을 만난다. 이 말은 100 % 불가능 하다고 말 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하시려면 할 실수 있지만, 그러나 이것은 정통의 길이 아니다. 틀렸다 맞았다 이렇게 말할 수 없지만, 정통의 길은 아니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은 그렇게 했지만, 그것이 불안전했기 때문에 마지막에 아들로 오셨다. “아들로 말씀하셨으니”그렇게 말하고 있다. 히브리서에 보면“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마지막 날에 아들로 말씀하셨으니 이 말은 최종적으로 아들로 말씀했다”는 뜻이다. 이 말은 지금까지의 방법이 온전치 않았다는 말이다. 온전한 방법이 아니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아들로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종적으로 오신 이것을 빼놓고 또 다시 옛 길로 돌아간다는 것은 물론 자기 자유는 자기 자유지만, 하나님의 경륜에서 벗어난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 경륜 안에서 길을 정해 놨는데 자기 혼자 딴 길로 간다. 이 말은 하나님의 경륜에서 어긋난 것이다.
우리가 지금 짚세기신고 다닐 수 있다. 그것도 자기 자유다. 남이 뭐라 하든 상관없이 나는 짚세기신고 다니겠다. 하면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동성로 바닥에 짚세기신고 다니면 다 이상한 사람이라고 한다. 정통의 사람이라고 안 한다. 비 정통이다. 종교적으로 말하면 이단이다. 그런 식이 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정상적인 길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아들을 통해서 사람에게로 왔다.
그러면 사람은 어떻게 하나님께로 갈 것이냐? 내 마음으로 간다. 내 의지로 간다. 내 생각으로 간다. 내 믿음으로 간다. 이런 것이 많다. 종교 안에는 다 이런 것이다. 내 마음으로 아무리 가고 싶어도 내가 하나님께로 갈 수 없다. 내 마음이 어떻게 하나님께로 가겠습니까! 내가 어떤 사람에게 가는데 내 마음으로만 갈 수 있습니까! 몸이 있어야 내가 누구에게 가는 것이다. 마음으로만 갈 수 없다. 그러니까 믿음도 좋고, 마음도 좋고, 의지도 좋고, 생각도 좋고 다 좋지만 이것도 역시 비정상적인 길이다. 혹시 가서 만나고 왔다고 하더라도 일시적이지 항구적인 것은 아니다. 항상 그럴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갈 수 있냐? 지금 보혜사를 통해서 간다. 내 안에 있는 그분의 성품! 어떤 것! 그 분의 생명! 그 분과 같은 하나가 된 그것을 가지고 가는 것이지 다른 것을 가지고 간 것은 가도 간 것이 아니다. 내가 그 앞에 까지 도착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분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무하고 돌하고 있으면 돌이 나무 앞에 까지 갔다고 하더라도 설사 어떤 것은 나무뿌리에 돌이 박힌 것도 있는데, 돌이 나무뿌리에 박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돌은 돌이고 나무는 나무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간다고 할 때도 마찬가지다. 내 마음으로 간다. 내 생각으로 간다. 내 의지로 간다. 내 믿음으로 간다. 다 가도 나무와 돌이 다르면 같이 있어도 같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분의 생명과 성품이 없이는 우리가 그분에게로 갈 수 없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모든 종교적인 노력들이 이것 없이 그냥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래서 열심히 기도 한다든지! 꿈이 라도 꾸면 내가 하님을 만나고 왔다. 이렇게 한다든가! 하는 것은 비 정통의 길이다.
아버지께로 가는 길,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그분의 생명과 성품을 통해서 간다. 내가 보혜사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간다. 이것이 우주적인 만남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오고 사람은 보혜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다. 이 만나는 접점! 이것이 우주적인 만남이다. 예수님은 세상에 왜 오셨나? 이것 때문에 오셨다. 왜 육체를 가지고 오셨는가? 이것 때문에 오셨다. 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는가? 이것 때문에 죽으시고 부활 하신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다.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 자리가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자리다.
하나님은 아들을 통해서 은혜와 실재로 사람에게 왔다. 사람은 보혜사를 통해서 생명으로 하나님께로 나아간다. 이것이 우주적인 만남의 통로다. 유일한 통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사람에게로 오시고 사람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어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었다. 마찬가지고 하나님이 사람에게로 오는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 그분 없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말이 그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그 분 안에서 만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분의 생명 안에서만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만난다. 죽으시고 사신 것! 이것이 알고 보면 예수님의 전부다. 아주 간단하게 함축하면 예수님은 죽으시고 다시 사신 분이다. 이 실재 안에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자리가 있다.
우리가 왜 구속을 받아야 되는가?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자리 때문에 그렇다. 그 자리 없이는 하나님과 사람이 만날 수 없다. 이것을 몰랐을 때 우리는 하나님 만나려고 애를 많이 썼다. 어떤 방법을 통해서 어떤 사람이 이렇게 하나님을 만났다 하면 그렇게 해 보고, 저 사람이 저렇게 만났다고 하면 나도 그렇게 해 보고 지금 다 그렇게 하고 있다. 아무개가 그렇게 했다고 하면 나도 그렇게 하고 아무개가 저렇게 했다고 하면 나도 저렇게 하고 이것이 방황이다. 정통의 길이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다.“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
2/4. 보혜사는 진리의 영이심
그는 진리(실제)의 영이다. 주님은 내가 곧 아버지께로 가는 진리라고 하셨다. 그는 하나님이 사람에게로 오시는 실제이며, 사람이 하나님께로 가는 실제이시다. 보혜사는 아들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는 실제로서 그 영이다.
보혜사는 진리의 영이다. “진리”라는 말은 “실재, 사실, 진실”이라는 말이다. 주님은 “내가 곧 아버지께로 가는 진리다.” 이렇게 말씀했다. 하나님 이 사람에게 오시는 실재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떻게 오는가? 눈감고 있으면 어디로 들어오는가? 아니면 어디가 뜨거워지는가? 어디가 떨리는가? 전에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뭔가 신호가 왔으면...’ 내가 기도를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오셨다는 신호를 뭔가 주셨으면 좋겠는데 도무지 신호가 안 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신호가 빨리 와서 만났다고 한다. 예를 들어서, 그냥 있는 갑자기 손이 떨렸다든가, 내가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몸이 막 움직였다든가, 내가 전혀 생각지도 않았는데 어디가 뜨거웠다든가 이러면 일종의 신호가 아닌가? 그것은 하나님은 아니지만 신호다. 그런데 신호가 왔으니까 자기에게 하나님이 왔고 성령이 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도 맛보려니까 도저히 안 되었다. 내가 만일 그때 그게 되었더라면 언제든지 그 신호만 오면 ‘하나님이 내게 왔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것 같다. 우리 교회에 계셨던 여 전도사님이 한 분 그러셨다. 순 복음 교회를 다니던 분인데 우리 교회를 왔다. ‘그 동안에 성령이 떠난 줄 알았더니 오늘 아침 새벽 기도를 가는 데 성령이 왔다.’고 했다. 그 때는 생각할 때 꿈같은 이야기였다. ‘어떻게 갔다가 다시 오는 지, 나에게는 한 번도 안 오시는지...’ 꿈같은 이야기였다.
하나님이 그렇게 신호를 하고 오시는 분이신가? 그게 아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은 하나님이 오시는 유일한 신호였다. 사람이 그것을 버리고 떠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셈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오시는 실재였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그렇게 온다는 말이다. 저런 모습으로 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따라갔다. ‘저 사람이 누군가?’ 하고 따라갔던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에 보니까 구속의 자리로 갔다. 결국 ‘구속의 자리’ 그 자리로 하나님은 오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그 자리로 오신다. 다른 것으로 오시는 분이 아니란 말이다.
우리가 여러 가지 징조를 통해서 ‘아!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 하나님이 오셨다.’고 하고 그런 징조 같은 것을 많이 상상하는 데 그 징조가 떠나면 또 허망해진다. 어떤 징조가 있다가 떠나가면 또 허망해지고 그래서 그런 사인(sign)을 늘 받는 사람들은 사인 때문에 사인 중독이 되어서 자꾸 그런 것을 맛보려고 한다. 술 취한 사람도 취해 본 맛이 있기 때문에 또 먹으려고 하고 또 먹으려고 하지 않겠는가? 그 기분 때문에 그렇다. 나는 소주를 입에 대 보니까 너무 쓰서 전혀 입에 대지 않는다. 너무 쓰다는 경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놈을 조금 더 먹어서 내 몸에서 기분 좋은 경험이 있었더라면 나는 그 기분 좋은 경험 때문에 중독이 될 것이다. 그래서 카~ 하면서 마신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그 쓴 것을 어떻게 마시는지 모르겠다. 처음 먹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입에 대면 무지 쓰다. 술이 만약에 달았더라면 나도 먹었을지 모르겠다. 쓰기 때문에 나는 안 먹었다. 어떤 사인에 중독이 되면 사람은 그 사인을 자꾸 경험하고 싶어 한다. 또 그것으로 희열을 느끼고, 감격을 하며 그렇게 한다.
사람이 하나님께로 가는 실재도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디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인가? 바로 구속 안에서 만나는 것이다. 예수님을 전부 해부해서 마지막으로 남은 것을 보면 구속이다. 그 자리다. 우리 인생도 알고 보면 그것밖에 없다. 그것 이외에 다른 것들은 모두 사라질 것들이다. 있다가 없어질 것들이다. 우리가 있다가 없어질 것에 매여서 이러기도 하고 저러기도 한다. 영원한 것은 이 한 자리밖에 없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나님께로 가는 실재도 거기에 있고, 하나님이 사람에게로 오는 실재도 바로 그분이다. ‘내가 길이요, 내가 진리요...’
보혜사는 아들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는 실재로서 그 영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결코 구속을 떠나서 보혜사를 따로 생각할 수 없다. 예수를 떠나서 보혜사를 따로 생각할 수 없듯이 구속을 떠나서 우리는 우리와 함께 하는 하나님을 따로 생각할 수 없다.
종교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왜 있는가 하면 자기가 무슨 특별한 경험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계시록을 풀라는 명령을 받았다느니 자기만의 독특한 경험을 했다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이 나와서 모든 일을 저지른 것이다. 사이비라는 것이 그것들이다. 자기만의 어떤 독특한 것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시대의 어떤 사명을 가지고 왔다든가, 요한 계시록을 이을 사명을 가지고 왔다든가 이런 것들이 있다. 자기가 그것을 받았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감람나무라는 사람도 있고, 동방번개라는 사람도 있고, 이런 여러 가지 사람들이 다 그래서 생긴다. 몰몬교의 창시자도 자기가 특별한 빛을 받았다고 한다. 전부다 그렇다.
그러니까 예수 외에, 구속 외에 우리가 하나님을 만났다든가, 봤다든가 했다는 모든 것들은 전부 다 실재가 아니다. 보혜사만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는 실재다. 그리고 보혜사는 구속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떠나 있는 그런 분이 아니다. 왜 그런가 하면 구속 이전에는 보혜사가 오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않았더라.’ 영광을 받으시기 전에는 오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구속 이전에는 보혜사는 없다. 지금 약속이다. 요한복음 14장은 약속이다. 그러니까 구속 없이 무슨 영을 받았다. 이게 위험한 것이다. 구속 없이 다른 자리에서 뭔가를 받았다. 그러니까 이게 예수의 영인지 다른 영인지 구별할 수 없지 않은가? 작두 위에서 춤을 추게 하는 영도 있다. 그것도 놀라운 영이 아닌가? 그것뿐이겠는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영이라면 무엇을 못하겠는가? 그 능력에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겠는가? 어떤 것이 와서 그렇다. 영인지 혼인지 우리는 잘 모르지만 하여간 무엇인가 왔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무 것도 없이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없다.
세상에는 엄청나게 놀라운 일을 행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것은 다 우리의 구속자이신 그리스도와는 무관한 일이다. 거의 90%는 무관한 일이다. 보혜사, 그냥 보혜사만 생각해도 ‘또 다른 보혜사를 주겠다.’해서 ‘보혜사를 주옵소서, 보혜사를 주옵소서...’하고 간구하다 보면 방언이 나온다든가 뭐가 나올게 아니겠는가? 할렐루야를 계속 하다보면 방언이 나온다든가 이런 게 있다고 한다. 이것을 일부러 가르친다고 한다. 방언을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할렐루야를 계속하라고 한다. 나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내게 그것을 가르쳐 주겠다고 하던 사람들은 그때 당시만 하더라도 할렐루야를 계속하면 방언이 된다고 하던 사람들은 없었다. 그 때만 하더라도 순진한 때였다. 그런데 그 뒤로 얼마 간 지나다 보니까 할렐루야를 계속하면 방언이 나온다고 한다. 실험적으로도 가능할 것 같다. 여러분들도 가만히 앉아서 하루 종일 할렐루야를 해 보라, 그러면 뭔가 혀 꼬부라지는 소리가 안 나겠는가? 내 생각에 그게 가능할 것 같다. 그러니까 상당히 시대가 변해서 처음과는 많이 바꿔졌다. 처음에는 기도만 하고 안수만 하던 이런 차원에서 이제는 할렐루야를 계속하라, 열심히 하라 그런 것이다. 남묘호렌게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이야기를 하다가 마지막에 하는 말이 ‘남묘호렌게쿄를 계속해 보라.’는 것이다. 그러면 분명히 효과가 날거라고 한다. 마지막에 하는 말이 어떤 소원을 두고 계속 해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계속 시간을 내서 남녀호랑개교 라는 주문을 계속하면 뭐가된다는 것이다. 내가 저 처녀와 결혼하고 싶다고 정해놓고 남녀호랑개교를 계속하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힘인지는 모르겠는데 전혀 없으면 안할 것인데 그런 일이 있으니까 그렇게 할 것이다. 그래서 남녀호랑개교 사람들과 얘기를 하다가 ‘더 이상 얘기를 못 하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에 그것을 내놓고 해보라고 하는데 그렇다고 해보고 앉아있을 수도 없고 그래서 포기했다.
아들은 어떻게 우리 생명이 되시는가?
아들의 육체는 떠난다. 그러나 아들은 우리 생명이 되시기 위해 과정을 거쳐 그 영(보혜사)으로 다시 와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가 과정을 거치실 때 우리는 그 안에서 함께 과정을 거침으로 한 생명으로 연합 되고 한 생명이 되었다.(롬6:5참)
아들은 어떻게 우리 생명이 되는가? 아들은 육체이니까 떠난다. 그러나 아들은 우리 생명이 되시기 위해서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그 분의 영인 그 보혜사로 다시 와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과정을 거치신 것은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한 길이다.
만일 예수님께서 물위로 걸어가기만 하고 끝나 버렸다면, 그 과정만 거치고 말아버렸다면, 항상 우리의 숭배의 대상은 되겠지만 우리와 ‘함께’ 가 되지 않는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끝나버렸다면 우리와 ‘함께’ 가 안 된다. 그가 병자를 고치고 끝나버렸다면 신기한 사람으로, 어떤 신적인 사람으로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 되겠지만, 우리와 ‘함께’ 가 되지 않는다.
왜 그가 십자가로 갔는가 하면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그 십자가의 자리에서 우리와 함께 했으니까, 거기서 밖에는 나와 함께할 자리가 없다. 그리고 거기서밖에는 내가 그분과 하나를 인식할 수 있지 아무리 해도 안 된다. 기도를 해도 안 되고 기도를 하면 뭐가 오는 것 같은데 가버리고 올 것 같은데 가버리고 한다. 그러니까 기도가 더 깊어져야 하겠다는 생각만 든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사람들은 완전히 정신을 잃고 어떤 일에 몰입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신이 말짱해서는 그렇게 안 되더라. 안되니까 그것으로 안 되고 만나지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만민이 다 그분에게 참여할 수 있는 과정을 거쳤다. 구속의 자리에서만 만민이 함께 할 수 있는 자리이다. 나도 거기 가니까 거기서 그것을 보니까 ‘내가 거기 있구나. 내 운명이 저기 있구나! 저것이 바로 내 운명이구나.’ 그렇게 알아진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나 사이에 간격이 없어졌다. 그 전에는 무슨 수를 써도 간격이 안 없어진다. 어떻게 물위로 걸어가신 분과 내 간격이 없어지겠는가. 무슨 믿음으로 간격이 없어지겠는가.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신 분과 무슨 수로 내가 간격이 없어지겠는가. 없어질 수가 도저히 없다.
행위를 보면 우리가 사람끼리도 저 사람과 내 행위를 보면 무슨 방법으로도 간격이 없어질 수가 없다. 생각도 다르고 행동도 다르고 다 다르다. 똑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 내가 생각하는 데로 똑같이 생각하는 사람도 없고 내가 행동하는 데로 똑같이 행동하는 사람도 없으니까 나와 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 구속 안에서밖에는 하나의 사람이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교회로 만나는 것은 구속 안에서 만나는 것이다. 혹시 취미가 같아서 만났다든지 생각이 같아서 만났다든지 행동이 같아서 만났다든지 이것이 아니다. 이것은 세상에도 얼마든지 있는 일이다. 동호회나 클럽들이 그런 것들이다. 요즘 싸이클 동호회원들이 우리 집 앞에 자주 왔다 가는데 그것도 동호회다. 이런 식으로 만난 것과는 다른 문제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왜 그렇게 사셨는가 하면 그 사심과 하나하나가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한 과정이었다. 쉽게 말하면 처리 과정이었다. 염색을 할 때 그냥은 염색이 잘 안 된다. 천연 염색을 하면 염색이 유지되지 않고 지워진다. 꽃잎 같은 것으로 염색을 하면 처음에는 잘되는데 물에 들어가면 옅어진다. 그래서 그것을 고정시키는 것이 기술이다. 어떻게 하면 섬유하고 염료하고 붙어서 떨어지지 않느냐 하는 것인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약품이나 다른 것을 통해서 과정을 거쳐서 침투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검정색 옷이 몸에 좋지 않다는 말이 있는데 장사를 해봐서 아는데 검정색 천이 가장 싼데 검정색 염료를 쓸 때는 가성소다를 써야 안팎으로 물이 든다. 그러니까 몸에 나쁘다고 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그것도 과정을 거쳐서 검정색이 되는 것이다. 검정색이 천에 들어오려면 과정을 거쳐서 들어온다는 말이다. 그래서 요즘 천연 염색을 하는 사람들이 소금을 쓴다든지 하는데 그것도 역시 소금을 통해서 과정을 거친 것이다.
예수께서 사신 모든 것은 우리와 하나 되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 과정에 정확하게 참여 되어야 한다. 그 과정을 무시하고 내가 기도를 통해서 예수를 알았다 하는 것은 정통이 아니다. 그것이 예수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가 없다. 무슨 뜨거운 영을 받았다고 하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예수의 영을 받았다고 하고 절에 다니는 사람들은 그렇다고 하면 부처의 영을 받았다고 할 것이다. 그것은 다 애매모호한 문제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사신, 하나하나의 과정은 모두 우리를 위한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십자가이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인 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우리와 상관이 있는 것은 우리의 소원이 그것이었다. 우리가 선악과를 먹을 때 왜 먹었는가 하면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서 먹었다. 하나님 같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였을 때 사람들은 예수를 보고 ‘야 저 사람이 신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가 다 그렇게 되고 싶어서 선악과를 먹었다. 그러니까 그분이 그렇게 사신 것은 우리 속에 있는 그런 것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못하지만 나는 그렇게 못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었던 그리고 어쩌면 가능한 그것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분의 사심의 하나하나는 우리의 모든 과정을 대표하고 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십자가로 간 것이다. 거기 가서 우리는 만나게 된 것이다. 거기 가서 우리 모든 사람이 만나는 것이다. 그것을 떠나서는 우리가 누구하고도 만날 수가 없다. 그러니까 너무 만나려고 노력하면 안 된다. 그것이 아니고서는 너무 만나질 수가 없다. 불가능하다. 적당히 못 만나지는 것으로 살아야지 완벽하게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도 안 되는데 다른 사람이 되겠는가. 나도 남에게 들어갈 수 없는데 남이 나에게 들어올 수 있겠는가. 예수님이 아니면 우리는 여기 지금 같이 있을 수가 없다. 예수님이 아니면 우리는 “함께”라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우리는 언제 틀어져도 틀어진다. 오래 살다보면 언젠가는 마음상할 때가 생기지 않겠나. 부부간에 살아도 처음에야 좋겠지만 살다보면 속상한 것이 생기지 않겠나. 살기 싫을 때가 생기지 않겠나. 생기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만일 구속의 자리에서 만나지 않으면 언제 헤어질지 모른다. 형편상 못 헤어지고 있는 것이지(하하하~~~). 그런 것이 아닌가. 나는 그런저런 생각을 가지고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 번도 헤어져야 된다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처음 출발 자체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까. 사람들은 맞니 안 맞니 하는 이런 생각으로 서로 만나는데 저는 '내 취향이나 생각에 맞나! 안 맞나!' 는 생각으로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 못살겠다." 이런 생각이 없다. 물론 내 상대자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도 있지만.....ㅎㅎㅎ 그렇지 않고 아주 심한 사람과 결혼했다면 '아이고 내가 왜 이런 사람과 결혼 했던고!'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원체 선한 분하고 결혼을 해서 그렇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예를 들어 처음부터 아주 큰 기대를 가지고 결혼한 사람은 실망도 아주 크지 싶다. 그것은 나쁜 것이 아니고 사람이니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하나가 될 수 없다.
우리 교회 안에 온 형제자매들이 티격태격하면서 사는걸 보면 그 사람들도 다 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이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구나!"이것을 알기 위해서 그런 것 같다. A하고 B하고 부딪히다가 안 되면 C하고 D하고 문제가 생기고 매일 같이 문제가 바꿔지면서 계속 부딪히다 보면 '아!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구나! A도 아니고 B도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 구속 밖에 없구나!' 이렇게 알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교회 안에서는 싸워도 희망이 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하고 끝나 버린다면 허무할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아~~ 구속이구나!' 이렇게 알게 됨으로 희망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많이 싸워도 갈대가 있기 때문에 괜찮다.
아들의 위치는 떠난다. 하지만 과정을 거쳤다. 그 분이 과정을 거칠 때 우리도 그와 함께 과정을 거쳤다. 제자들은 분명히 구경만 하고 다녔고 자기들과 다른 사람으로 알았다. 십자가에 죽을 때도 '당신은 죽습니까? 나는 갑니다.'이러고 갔다. 마음으로는 같이 죽고 싶었겠지만 주와 함께 옥에도 같이 가고 죽는데도 같이 가겠습니다. 고 한 고백이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냥 맨입으로 한 말이 아니었는데 막상 그분이 가시는 길속에서는 자기가 참여를 못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마음으로는 원이었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제자들은 그렇게 할 수는 없었지만 그 과정 안에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해서도 아니고 그렇게 안 해서도 아니고 나는 내가 원하든지 원치 아니 하든지 그분의 과정 속에 있었다는 말이다.
온 인류는 지금 자기가 원든지 원치 안든지 예수를 알든지 모르든지 다 이 과정을 거치고 있다. 이 과정 안에 있다. 예수의 과정으로 우리 인생을 풀어보면 다 그 안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 안에 와서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하기 위한 과정이다. 예수님이 과정을 거치 실 때 우리는 그 안에서 그와 함께 과정을 거쳤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생명으로 연합되고 하나가 된 것이다.
복음은 전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새삼스럽게 연합이 안 되는 것을 연합시키는 것이 아니고 이미 벌써 그리스도 과정 안에 포함되어서 과정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당신은 이 과정을 통해서 예수와 하나입니다. 당신은 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 안으로 왔습니다.”하는 이것을 전하는 것이다. 이미 이루어지고 이미 된 사실을 전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스마폰을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진 스마트폰을 들고 가서 이것은 이러이러한 기능이 있으니까 사시오 하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산 사람은 스마트폰을 이용하는 것이고 그 말을 듣고도 믿지 않는 사람은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못 하는 것이다. 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을 것이고 믿지 못하는 사람은 영생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다. 믿는 사람은 스마트폰을 사서 사용할 것이고 스마트폰을 사용해서 대구교회 말씀을 들을 것이고 CLN 방송을 들을 것이다. 지금 다 올려놓았다. 그래서 차를 타서도 들을 수 있고 등산하면서도 들을 수 있게 해 놓았다. 그러니까 믿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믿지 않고 사지 않은 사람을 듣지 못할 것이다.
세일즈맨들이 나가서 ‘이것을 사면 들을 수 있습니다.’하고 소개를 해 놓았다. 삼성이라는 회사가 만들었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이미 만들어진 것을 전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그 과정을 확실하게 안다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된다.
⑴ 세상은 받지 못함
세상은 예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아들의 영을 알지도 못하고 받지도 못한다. 예수에게 있어서 육과 영은 하나다. 그를 알지 못한 자는 그의 영도 알지 못한다. 그의 육을 거부한 자는 그의 영도 거부한다.
그런데 세상은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예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아들의 영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에게 있어서 육과 영은 하나다. 따로 따로 있지만 육과 영은 하나다. 그러니까 그를 알지 못하는 자는 그의 영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의 육을 거부한 자는 그의 영도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를 알지 못하고 무슨 영을 받았다는 이것이 문제다. 예수님과 함께 이 과정을 거쳐서 자기가 구속 안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데 뭔가가 갑자기 와서 덮어 씌웠다면 그것이 문제가 된다. 그러니까 뭔 영을 받았다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고 아주 문제가 많다. 영을 안 받은 사람은 냉랭해서 문제이고 영을 받았다는 사람은 뜨거워서 문제인데 사실은 예수를 아냐 모르냐는 것이 진짜 중요한 문제다.
그는 우리 생명이 되시기 위해 육체 안에서 과정을 거치셨다. 그러므로 그 육체를 무시한 자는 그의 과정 안에 참여하지 못하고 그와 연합하지 못한다. 육체(삶과 죽음) 안에서 만나고, 영(부활) 안에서 연합한다. 그러므로 그의 육체를 버린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며 받을 수 없다.
그는 우리 생명이 되시기 위해서 육체 안에서 과정을 거쳤다. 왜 그가 육체가 되신 것이 필요했는가. 그것은 육체를 통해야만 과정을 거칠 수 있기 때문이다. 육체가 아니면 우리와 같은 과정을 거칠 수 없다. 육체를 가지신 분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인생의 과정을 간접체험을 했다. 그러니까 이 육체를 무시하는 자는 그의 과정 안에 참여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와 연합하지 못한다. “니가 뭐라고~”하면 같이 참여가 안 된다. ‘저 사람이 나와 같은 사람이구나!’해야 참여가 된다.
오늘날 믿는 사람들이 문제가 되는 것은 “예수는 신(神)이다.” 이렇게 높이 올려놓았기 때문에 함께 과정을 거친다는 것을 모른다. 신이니까 그냥 믿을 뿐이다. 신은 그냥 믿는 대상일 뿐이다. 그래서 믿음은 참 좋은데 과정 안에 참여하지 못한다. 결국 그분을 따를 수 없게 되고 연합하지 못하게 된다.
“육체”라는 말 속에는 삶과 죽음이라는 것이 들어있다. 육체할 때는 살고 죽는 것이 들어있다. 그러니까 “영”할 때는 부활이 들어있다. 그가 육체가 되셨다는 말은 살고죽었다는 말이고 그가 영이시다는 말은 그가 부활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의 육체를 버린 사람들은 그를 알지 못하며 받을 수 없다.
3/5. 보혜사는 제자들과 함께 함
그러나 제자들은 육체 안에서 주님을 알고 있다(17). 육체로 그분과 함께 있음으로 또 그의 영도 그들 속에 있게 될 것이다. 육체로 함께 하신 주님은 또 다른 형태의 보혜사로 생명 안에 함께 하신다. 보혜사는 또 다른 형태의 주님이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 돼 있다. 세상은 그를 모른다. 왜냐하면 예수를 모르기 때문에 모른 다는 것이다. 보혜사가 와도 모른다. 그렇다면 너희는 어떠한가? 너희는 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체 안에서 주님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육체 안에서 함께 과정을 거쳤다는 것이다. 그래서 알고 있다는 것이다. 육체로 그분과 함께 있으므로 또한 그의 영도 그들 속에 함께 있게 될 것 이라는 말이다. 너희는 나를 알고 이 말이 너희는 나를 알았다는 말이고 그래서 너희는 나와 영원히 같이 있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육체로 예수를 아는, 과정 안에서 예수를 아는 이것이 연속해서 지금 구속으로, 부활로 가는 것이다. 그래서 육체 없이 예수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 한 것이다. 육체로 그분과 함께 있으므로 또한 그의 영도 그들과 속에 있게 될 것이다. 육체로 함께 하신 주님은 또한 다른 형태의 보혜사로 생명 안에 함께 하신다는 말이다. 보혜사는 또 다른 형태의 주님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아들을 다시 보지 못하지만 제자들은 다시 볼 것이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주님이 살므로 그와 과정을 함께 한 제자들도 살 것이다. 함께 죽었으면 함께 산다(롬6:8).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하셨다.
그러므로 세상은 아들을 다시 보지 못하지만 여기서 말한 것처럼 세상은 나를 다시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볼 것이다. 제자들은 다시 볼 것이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러니까 내가 살면 너희도 살 것이다. 왜냐하면 같은 과정 안에 있기 때문에 같은 과정을 겪고 있기 때문에 내가 살면 너희도 살 것이라는 것이다. 주님이 살므로 그와 과정을 함께 한 제자들도 살 것이다. 함께 죽었으면 함께 산다. 이 말씀은 로마서 6장 8절에 있는 말씀이다. 주와 함께 죽었으면 주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하셨다. 이 말은 과정을 거쳐서 우리에게 온다는 말이다. 주님은 과정을 거쳐서 우리에게 오셨다. 그래서 우리와 하나다. "하늘에서 바로 왔다면 우리와 하나 되겠는가?" 하나가 안 된다.
3/4. 보혜사는 상호 내재함을 알게 함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 리라" 육체는 만남을 위해 필수적이지만 상호 내재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진다. 그러나 부활 안에서는 상호 내재할 수 있다. 그날은 부활의 때요 그 영(보혜사)의 때다. 육체 안에 제한된 때가 아니라 해방의 때다(막12:25참고).
보혜사는 상호 내재함을 우리에게 알게 할 것이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 것이다." 육체는 만남을 위해 필수적이지만 상호 내재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만나기 위해서은 꼭 있어야 되고, 그를 꼭 알아야 된다. 과정을 거친 예수를 알아야 되고, 물위로 걸어간 예수도 알아야 하며, 피곤한 예수, 잠자는 예수 등..... 다 알아야 한다. 그것 없이 예수를 안다는 것은 다른 예수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육체라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렇지만 한계가 있다. 상호내재 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활 안에서는 상호 내재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날은 부활의 때요, 그 영의 때요, 보혜사의 때요, 육체 안에 제한된 때가 아니라 해방의 때라는 것이다(막12:25참고).
마가복음 12장 25절에 이런 말이 있다. "일곱 남편이 있는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냐?" 이런 질문이 있다. 그 날에는 부활의 때 에는 시집가는 것도 없고 장가가는 것도 없다.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러므로 상호 내재하는 것은 그때 그 안에서다. 육신적으로는 함께 있어도 함께 있는 것이 될 수 없지만 그날 즉 부활의 때에는 구속 안에서 죽고 다시 산 때에는 우리에게 한계가 없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경험해 보면 우리는 구속 안에서 한 자리에 있다. 주님의 구속 안에서 우리의 여러 가지 사정과 형편과 행동의 다른 점들이 사라져 없고 한자리에 있다. 그냥 그대로 있는 데도 불구하고 사정과 형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자리에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사정과 형편이 똑 같아 질 것인가? 그렇지 않다. 언제든지 다를 것이다. 그렇다할지라도 우리는 한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부활의 때라고 한다. 이 자리가 부활의 자리고, 다시 산 자리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과 내가 구속 안에 있으면 키가 똑같아 질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틀닐 것이다. 저 사람과 내가 구속 안에 있기 때문에 밥을 먹어도 같은 밥을 먹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틀린 생각이다. 구속 안에 있기 때문에 내가 바다에 가고 싶을 때 저 사람도 바다에 가고 싶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것은 맞지 않는 생각이다. 구속 안에 있다 하더라도 바다가 가고 싶은 사람 다르고 산에 가고 싶은 사람 다르다. 하지만 한 자리에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장가가는 것도 아니고 시집가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이 자리가 바로 주님과 우리가 만나는 자리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 만나는 자리다.
4/4.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나타내시고 함께 하심
⑴ 나타나심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하셨다.
그렇다면 주님의 계명은 누구에게 나타나는가? 그것은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나타나고 그와 항상 함께 한다. 처음에 말씀드린 대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도 지킬 것이다. 라고 말씀 드렸는데 나타낸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도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타내리라.”고 했다. 사랑하는 자에게 나타낸다는 말이다. 나를 사랑하는 자에게 나를 나타내겠다는 말이다. 우리가 인간적인 상식으로 생각하더라도 그것이 당연하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를 나타내지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나를 나타내겠는가.
그런데 여기서 내가 계명을 주노니 하는 말씀을 지난번에 했는데 이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 하는 새 계명인데 이 계명은 우리가 아는 박애주의를 말한 것이 아니고 교회를 향한 것이다. 우리가 비록 부족하더라도 이렇게 서로 사랑하는 교회적 사랑 안에 있게 되면 우리는 내가 좀 부족하더라도 앞에 가는 사람을 따라갈 수 있고 또 내가 누구를 끌어갈 수도 있고 밀려간다. 고기떼가 파도에 밀려가는 것처럼 고기가 가면 물살이 가는데 그러면 옆에서 그 물살에 따라간다. 따라갈 때는 자고 있어도 같이 떠내려간다. 그와 같이 교회적인 사랑 안에 있을 때는 우리가 좀 문제가 있고 우리가 좀 안된다고 하더라도 그 물결에 따라가게 된다. 나 혼자 있으면 가다가죽는다. 그런데 그 물결에 따라가면 잠자도 산다. 그래서 떠나시면서 당부하는 말이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고 한 이유가 거기 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신다. 사람은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한 형상으로 지어졌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사람을 따라서 자신을 나타내신다. 전기는 전구에 따라서 자신을 빛으로, 모터에 따라서 힘으로 나타낸다. 아브라함에게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모세에게는 모세의 하나님으로...그 사람 따라서 자신을 나타내신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자신을 나타내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었다. 사람은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한 형상으로 지어졌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 사람을 따라서 자신을 나타냈다. 추상적인 희랍인들의 신 같으면 자기 혼자서 나타내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처음부터 사람과 함께 하는 하나님이다. 그래서 자기를 나타내기 위해서 형상으로 사람을 지었다. 그 다음부터는 형상과 함께 나타나는 분이다. 그러니까 사람을 따라서 자신을 나타내는 분이다.
전기는 똑같은 전기이지만 전구에 따라서 빛을 나타낸다. 형광등이라는 이런 속에 들어오면 이런 빛이 오게 되고 백열등이라는 전구를 만나면 다른 빛이 나온다. 전기는 전구에 따라서 자신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이것은 전구가 다르면 또 다른 빛이 나오게 되니까 교리적으로 ‘하나님은 이런 빛이다.’ 라고 정해놓을 수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교리로 정의할 수 없다. 모터는 모터 나름대로 힘을 나타낸다. 전기는 똑 같은 전기인데 1마력짜리 모터에게 가면 1마력을 나타내고 2마력짜리 모터에게 가면 2마력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모터와 함께 나타나시는 분이다. 전구와 함께 나타나시는 분이다. 전기는 기구와 함께 한다.
아브라함에게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에게는 이삭의 하나님 야곱에게는 야곱의 하나님으로 모세에게는 모세의 하나님으로 그 사람을 따라서 자신을 나타낸다. 왜 우리가 모임을 통해서 간증을 듣고 싶은가 하면 하나님은 한 하나님인데 그 사람에게 따라서 하나님이 나타나는데 그 사람의 사람됨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양각색으로 그분 자신이 드러난다. 그래서 풍성하다는 것이다.
만약 이 형광등밖에 없다면 우리가 전기를 알 때 이 형광등에서 나타나는 빛만 알 것이다. 그런데 전기상회에 가보면 여러 가지 전구가 많이 있다. 천장에 오만가지 전구를 메달아 놓았다. 오만 등이 있어서 오만가지 색깔로 오만가지 모양으로 빛이 드러난다. 그것을 보면 굉장히 화려하고 풍성하다. 하나님의 풍성이라는 말은 그런 말이다. 우리를 말한다면 각기 다른 전구와 같다. 우리 형제들을 놓고 보면 10사람이 모였으면 10사람이 다 색깔이 다른 전구다. 각기 다른 전구에서 빛이 나니까 얼마나 화려한가. 새예루살렘이 12가지 보석으로 되어있다. 12가지 보석으로 되어 있으니까 안에서 빛이 비치면 12가지 색으로 빛나게 된다. 그것이 풍성이다. 그래서 교회의 풍성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러니까 똑 같은 교리(敎理)를 가지고 하면 그런 풍성이 나올 수 없다. 똑 같은 교리만 암송해야 하는데 그런 풍성이 나오겠냐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에게는 이삭의 하나님 야곱에게는 야곱의 하나님 이렇게 되어야 맞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정해진 하나님만 알고 있어서 다른 것은 다 틀렸다고 한다. 이런 것은 하나님의 풍성을 모르는 사람이다.
⑵ 함께 하심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우리(아버지와 아들)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함께 할 것이라”고 하셨다. 주님은 계명을 지키고 그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타내시고 함께 하신다.
함께하신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함께 할 것이라”고 했다. 주님은 계명을 지키고 그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타내시고 함께하신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렇게 하신 것이 새계명이다. 이것은 교회에게 준 비밀이다. 그분은 교회 안에 함께하신다는 말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처음부터 함께 하는 하나님이시다. 창조에서 형상과 함께 하셨고, 구속에서 인류와 함께 하셨으며, 연합에서 교회와 함께 하셨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처음부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었다. 추상적인 하나님이 아니다. 신이 아니다. 창조에서는 형상과 함께 했다. 그래서 결국은 많은 것을 창조하셨지만 마지막에 사람을 창조하실 때만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하셨다.”는 것은 다른 것도 다 마찬가지다. 그런데 마지막에서 와서 한 말은 모두가 다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 속에 만물이 들어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대표적인 것이니까. 그래서 형상과 함께 하셨다. 구속에 있어서 인류와 함께 하셨다. 모든 인류와 함께 구속에 들어오셨다. 우리의 구속이 되셨다. 그러니까 믿는 사람이든지 안 믿는 사람이든지 다 예수 안에 구속이 되어있다. 단지 그것을 모르고 사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너 다르고 나 다르다고 하면서 사는 것이다. 우리는 너와 내가 다른 것이 아니고 다 하나다. 그래서 연합에서는 교회와 함께 하셨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함께를 떠나서 사유하고 함께를 떠나서 연구하는 그런 신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함께 안에서만 나타나시는 분이다.
전기는 물론 물질이니까 전구가 아니라도 전기는 존재한다. 우리가 빛으로 볼 때는 전구가 없이는 빛을 볼 수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알 때는 형상과 함께 아는 것이지 형상이 없이 그분을 알 수 없다. 그러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오늘 여러분들이 모임을 가질 때 한 사람 한 사람은 각자가 너무나 소중한 사람이다. 일곱 가지 빨주노초파남보가 나올 때에 한 가지가 빠져보면 무지개가 될 수 없다. 그 중에 어떤 색깔은 보기가 더 좋은 색도 있고 덜 좋은 색도 있다. 사람도 색에 대한 선호가 다 다르다. 하지만 한 가지가 좋다고 그것만 찾고 있으면 안 된다. 무지개를 보려면 일곱 가지가 다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나는 모임 속에서 한 가지 색이다. 나는 전체가 아니고 단지 한 가지 색일 뿐이다. 그렇지만 이 한 가지 색이 전체를 조화시켜준다.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니까 색깔이 볼 때마다 예쁘다. 모양이 아름답고 지루하지 않다. 어떤 사람이 배색을 해 놓더라도 그보다 더 잘해 놓을 수는 없다.
오늘도 우리는 각자가 다른 전구로 각자가 다른 등으로 다 샹데리아가 되어서 불을 밝힐 것이니까 모두는 너무 소중한 사람들이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함께 하는 하나님이다. 함께를 떠나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바로 희랍사람들이다. 그러니까 골이 아프다. 이것은 머리가 너무 좋다보니까 그런 것인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머리가 그렇게 좋지 않기 때문에 함께하는 하나님밖에 모른다. 그러니까 실제적이다. 함께 하는 분이 떠나니까 슬픈 것이다. 영원토록 함께하는 분을 보내겠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영원히 함께하실 분이 있고 그리고 또 영원히 함께 할 우리 자신들이 있다.
[ 기 도 ]
고마우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 인생을 각자대로 합당하게 쓰시고 각자대로 귀하게 쓰시고 각자대로 영광스럽게 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 우리가 스스로 생각할 때는 부족하지만 주님이 전체 안에서 우리를 아름답게 보시고 전체 속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감사하고 주님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당신의 풍성을 위해서 다 그 자리에서 쓰여지기를 원합니다. 온전하게 바쳐지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