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난을 긍지로 하는
‘정신혁명의 대투쟁’
단의초(單衣抄)
고(故)로 생년(生年)三十二로부터 금년(今年)五十四에 이르기까지 이십여년간(二十餘年間)· 혹(或)은 사원(寺院)에서 추방(追放) 당(當)하고· 혹(或)은 주처(住處)에서 축출(逐出)당하고· 혹(或)은 친족(親族)이 괴로움을 받고· 혹(或)은 밤에 습격(襲擊)을 당(當)하고· 혹(或)은 합전(合戰)을 만나고· 혹(或)은 악구(惡口)를 수(數)없이 듣고· 혹(或)은 구타(毆打)당하고· 혹(或)은 부상(負傷)을 당하고· 혹(或)은 제자(弟子)가 살해(殺害) 당(當)하고· 혹(或)은 참수(斬首) 당(當)할 뻔도 했고· 혹(或)은 유죄(流罪)가 두 번에 이르니, 이십여년간(二十餘年間) 한시(時) 반시(半時)도 마음 편한 일이 없노라.
요리토모(賴朝)의 칠년(七年)의 합전(合戰)에도 틈은 있었으리라. 요리요시(賴義)의 십이년(十二年)의 투쟁(鬪爭)도 어찌 이보다야 더 했겠느뇨.
(어서 1514쪽 7행~10행)
20여 년간은 잠시도 마음 편한 적이 없었다 - 그것도 우리들을 위해서였다.
얼마나 고마우신 일인가.
그것은 어떤 싸움보다도 격렬한 정신혁명의 대투쟁이었다.
32세에 입종했을 때부터 대난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래도 대성인은 일보도 물러서지 않으셨다.
본초에서 대성인이 말씀하시고 있는 제난(諸難)의 일부를 구체적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
세이초사에서 쫓겨나고 고향인 아와에서 쫓겨났으며 양친과 친족이 괴로움을 당하고 초암을 밤에 습격당했으며 고마쓰바라에서 습격을 받으셨다. 악선전이 퍼져 수많은 악구를 들었다.
고마쓰바라의 법난에서는 왼팔이 부러지고 이마에 칼로 상처를 입고 제자도 전사했다. 헤이노사에몬노조가 체포하러 왔을 때는 쇼우보에게 경권(經卷)으로 맞았고 다쓰노구치의 법난에서는 참수될 뻔했으며 이즈와 사도의 두번의 유죄도 당하셨다.
그래도 대성인은 “아직 단념(斷念)치 않노라”(어서 1056쪽), “기뻐서 가로되, 본래부터 알고 있는 터이니라”(어서958쪽)고 말씀하시며 용감하게 대항하셨던 것이다.
그것도 전부 민중을 위해서였다. 모두 우리들을 위해서였다. 대성인은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원하시지 않으셨다.
안온한 생활을 하시려면 가능했을 런지도 모른다.
일단 일어서면 대난이 온다는 것도 명확하게 알고 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성인은 굳이 일어서셨던 것이다.
이 편지에서도 받으신 난을 열거하시면서 조금도 원망하시거나 푸념하는 표현이 없다. 오히려 대난을 커다란 긍지로 삼고 계신다. 의연한 사자왕의 고동이 전해져 온다.
우리들은 그 문하이다. 대성인의 투쟁에 이어져 있는 것이다. 이런 명예로운 일은 없다. 대성인의 대난에 비하면 다소의 악구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교만한 권력자에게는 강하게,
진심 어린 민중에게는 다정하게
도다 선생님은 군국주의에 의한 전시중의 탄압의 모습을 이렇게 쓰시고 있다.
“이때 신자 일동의 놀람, 당황, 본사 전체의 당황하는 모습은 후에 듣기에도 우습고 보기에도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마키구치, 도다의 일문은 등산이 금지되고 세상이 온통 떠들썩하게 국적의 집이라고 매도당한 것은 그런 때라고는 하지만 우스운 일이다.
또 투옥된 사람들도 가여웠다. 사업이 망한 자, 채무 독촉을 받는 자, 수입의 길이 끊겨 굶주리는 자 등이 속출하고 가족들도 비탄으로 지새는 나날이었다.
그래서 우선 가족들이 퇴전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확신이 없고 교학에 어둡기 때문이었다.
투옥된 자도 점점 퇴전하기 시작했다. 기개가 없는 자들이다. 용감하지 못하고 믿음이 약하며 대성인이 어본불이라는 것을 모르는 슬픈 일이다.”
이 상황 속에서 자신은 “생님(牧口)의 자비의 광대무변(廣大無邊)함은 저를 감옥까지 데리고 가주셨습니다”라고 감사하시고 있었다.
얼마나 장엄한 사제입니까.
이 어서의 짧은 구절에도 나타나 있듯이 교만한 권력자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강하게 진실한 서민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따뜻하게.
더구나 그 어느 것도 자비가 나타남이다. 여기에 니치렌 대성인의 숭고한 인간주의가 있는 것이다.
☞ 영원의 경전 ‘어서’서 배운다 (1) 단의초(單衣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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