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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6(수)
<평창 오대산 상원사>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에 있는
있는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4교구 본사 월정사의 말사이다. 세조와 관련된 일화가 많으며, 상원사 동종 등 유명한 문화재들이 있는 절이지만 요즘은 그 무엇보다 고양이 석상으로 냥덕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다.
705년(성덕왕 4)에 창건하여 진여원(眞如院)이라 하였다. 이 진여원은 보천(寶川)과 효명(孝明)의 두 왕자가 창건하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오대산에 들어간 두 왕자 가운데 형인 보천은 중대 남쪽 진여원 터 아래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곳에 암자를 짓고 살았으며, 아우 효명은 북대(北臺) 남쪽 산 끝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암자를 짓고 살았다.
이 두 형제는 예배하고 염불하면서 수행하고 오대에 나아가 항상 공경스레 예배를 드렸으며, 날마다 이른 아침에 골짜기의 물을 길어다 차(茶)를 달여 1만 진신(眞身)의 문수보살(文殊菩薩)에게 공양하였다.
마침 신라의 왕이 죽자 나라사람들이 오대산으로 와서 두 왕자를 모시고 서라벌로 돌아가려 하였으나, 보천은 울면서 돌아가려 하지 않으므로 효명을 모시고 서울에 돌아와서 왕위에 추대하였다.
그 뒤 20여 년이 지난 705년 3월 8일 진여원을 처음으로 세웠다. 그 뒤 보천은 오대산을 나라를 돕는 신행결사도량(信行結社道場)으로 만들 것을 유언하였고, 그 유언에 따라 진여원에 문수보살상을 모시고 낮에는 『반야경』과 『화엄경』을 독송하게 하였으며, 밤에는 문수예참(文殊禮懺)을 행하게 하였다. 또, 결사의 이름은 화엄사(華嚴社)라고 하였고 복전(福田) 7원(員)을 두게 하였으며, 그 경비는 가까운 주현(州縣)에서 주었다고 한다.
고려시대는 어떠한 역사를 거쳤는지 거의 알 수가 없다. 다만, 『동문선』의 「오대상원사승당기(五臺上院寺僧堂記)」라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고려 말 이 절은 극도로 황폐해 있었다. 그때 나옹(懶翁)의 제자 영령암(英靈庵)은 오대산을 유람하다가 터만 남은 상원사를 보고 중창(重創)의 원을 세웠다. 판서 최백청(崔伯淸)과 그의 부인 김씨(金氏)가 그 뜻을 듣고 재물을 희사하였으며, 1376년(우왕 2) 공사에 착수하여 이듬해 가을 낙성을 보았다.
그 해 겨울 선객(禪客) 33명을 모아 10년 좌선(坐禪)을 시작하였는데, 5년째인 1381년 5주년 기념법회를 열자, 승당의 불상이 방광을 하고 향내음을 풍겼다. 중창주 김씨 부인은 이 사실을 목도하고 더욱 불교를 믿는 마음이 지극해졌고, 토지와 노비를 시주하여 상원사가 영원히 존속될 수 있도록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척불정책 속에 전국의 사찰이 황폐되었지만, 오히려 이 절은 더욱 발전하였다. 척불정책의 대표적인 왕이었던 태종은 1401년(태종 1) 봄 상원사의 사자암을 중건할 것을 권근(權近)에게 명하여 불상을 봉안하고, 스님들의 거처로 사용할 3칸 집과 2칸의 목욕소를 만들었다. 그 해 겨울 11월 태종은 사자암에 왕림하여 성대한 법요식(法要式)과 낙성식을 베풀었다.
이때 태종은 권근에게 명하여, “먼저 떠난 이의 명복을 빌고, 후세에까지 그 이로움이 미치게 하여 남과 내가 고르게 불은(佛恩)에 젖고 유명(幽明)이 함께 의지하기 위함이니, 경은 기문(記文)하여 구원(久遠)한 세대에게까지 알게 하라.”고 하였다. 또한, 이 절은 세조가 문수동자(文殊童子)를 만나 괴질(怪疾)을 치료받고, 고양이에 의해 자객의 습격을 피하는 등의 일화가 서려 있는 세조의 원찰(願刹)이기도 하다.
이러한 깊은 인연 속에서 세조는 신미(信眉)와 학열(學悅)의 권유로 상원사를 중창하게 된다. 1465년(세조 11) 학열이 공사의 총감독을 맡았고, 인수대비(仁粹大妃)는 경상감사(慶尙監司)에 명하여 쌀 500석을 내어 강릉부(江陵府)로 운반하게 하고, 비단 1,000필을 함께 내어 공사비에 충당하게 하였다. 1466년상원사의 낙성식을 가졌는데, 크게 동서로 나눈 가람형식에 각각 상실(上室)을 지었다.
남쪽에는 다섯 칸의 누각을 짓고 범종을 안치하였으며, 동쪽에는 나한전(羅漢殿), 서쪽에는 청련당(淸蓮堂)을 지었다. 청련당의 서편으로는 재주실(齋廚室)을 지어 승당(僧堂)과 선원(禪院)으로 삼았다.
석조(石槽)와 집기(什器) 등 현존하는 거의 모든 유물들은 이때에 마련된 것이다. 그 뒤 인수대비는 탱화를 봉안하기 위하여 다시 조(租) 150석을 하사하고, 신미를 초대 주지로 모시게 하였다.
세조도 상원사의 역사가 이룩된 다음 상원사에 들러 의발(衣鉢)과 좌구(坐具) 등 수선(修禪)에 필요한 물건들을 하사하였다. 그 해 52명의 선객을 모아 수선을 시작하였다.
예종은 세조의 뜻을 따르기 위해 1469년(예종 1)상원사를 세조의 원찰로 삼고, 전대에 하사한 전답에 대해서는 조세(租稅)하는 것을 금하였다. 배불정책을 펴온 조선왕조의 보호를 받으며 발전되어 온 이 절은 1946년 선원 뒤에 위치했던 조실(祖室)에서 시봉(侍奉)의 실화(失火)로 건물이 전소되었다.
1947년 당시 월정사의 주지였던 이종욱(李鍾郁)에 의해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의 건물을 본떠서 중창하였다. 동북 45도 방향의 이 절은 전면 8칸, 측면 4칸의 ‘ㄱ’자형 건물이다.
6·25전쟁 때는 이 절을 지키면서 수행 정진하던 당대의 고승 한암(漢巖)에 의해 월정사 등의 다른 오대산 사찰과는 달리 전화를 면하였으며, 현재까지 전국 수도승들의 요람으로 중요시되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ㄱ’자형 선원을 중심으로 승당인 소림초당(少林草堂), 영산전(靈山殿), 종각인 동정각(動靜閣), 후원(後院) 등이 있다. 선원은 청량선원(淸凉禪院)이라고 하는데 오대산을 일명 청량산(淸凉山)이라고 하는 데서 유래된 것이다.
선원 안에는 석가여래좌상과 문수보살상, 1984년 국보로 지정된 목조문수동자좌상, 3구의 소형 동자상, 서대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목각의 대세지보살상(大勢至菩薩像)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 문수동자상은 상원사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으며, 오대산이 문수보살의 주처(住處)임을 증명하는 역사적 산물이다. 이 상은 세조가 직접 친견하였다는 오대산 문수동자의 진상(眞像)을 조각한 목조좌상이다.
이 동자상의 자세·수인(手印)·의문(衣文) 등은 불상과 동일하지만 얼굴 부분만은 동안(童顔)으로, 두발을 위에서 두 가닥으로 땋아 동자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 동자상에서는 총 23점의 유물이 나와서 1984년 보물로 일괄 지정되었다.
또한, 선실 바깥 마루에 안치되어 있는 신중상(神衆像)은 일명 동진보살(童眞菩薩)이라고도 하는데, 모든 신중들이 탱화로서 봉안되어 있는 데 대해, 이곳만이 유독 조상(彫像)으로 조성되어 있음이 특이하다.
높이 85㎝, 무릎폭 35㎝의 목조상으로서 머리에는 구름무늬의 보관을 썼고, 좌우 손은 문수동자와 같은 수인을 취하고 있는 점이 매우 특이하다. 의문은 투박하고 굵으며 양 어깨에서부터 전신을 무겁게 감싸고 있고, 가슴과 무릎, 다리 부분 등 여러 곳에 영락 등의 장엄구를 드리우고 있다.
형태는 완전히 의자형으로서 목제의자에 앉아 있다. 두 발 역시 투박한 신발에 싸여 군의(裙衣) 밖으로 나와 있으며, 조각수법은 대체로 경직된 맛을 보이고 있으나 특이한 신중상이란 점에서 주목된다. 이 상의 조성연대는 세조의 상원사 중건연대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1971년 강원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적멸보궁과 선원, 승당인 소림초당(少林草堂), 영산전, 종각인 동정각, 후원 등이 있다. 영산전은 선원 뒤쪽에 있다. 선원 화재시에 불길을 모면한 유일한 건물이다.
산내에서 가장 오래된 법당으로서 전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이다. 전내에는 석가삼존상과 16나한상을 봉안하였고, 또 세조가 희사한 『고려대장경』이 봉안되어 있는데, 모두 39함이다.
영산전의 옆에서는 화강암 석재들이 출토되어 현재 법당 옆에 쌓여 있다. 이 탑은 사방에 삼존(三尊)의 불보살을 가득 새겼으며, 옥개(屋蓋) 등에 층급을 나타내지 않고 낙수면에는 단순히 연화를 조각했을 뿐이다.
그리고 청량선원 옆에는 희귀한 당우가 있다. 승사(僧舍)로 사용되는 소림초당으로서 전면 6칸, 측면 4칸의 일반형 팔작집이다. 소림초당 앞에는 종각이 있다. 이곳에는 1962년 국보로 지정된 국내 최고(最古)의 상원사 동종이 있다.
-상원사 백과사전-
《상원사와 6.25》
1950년 6·25전쟁은 민족의 비극이었다.
그 전쟁으로 민족의 분단은 더욱 더 고착화되었고, 남북 간의 이념 대결이 극심하게 전개되었다.
그리고 전국의 문화재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소실되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북진을 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참전으로 눈물을 머금고 후퇴를 하였다.
마침내 국군은 38선상에서도 중공군의 총공세에 밀려 다시 남쪽으로 후퇴를 하였고, 주민들도 다시 피란을 가야만 했다. 이른바 1·4후퇴.
“이제 불을 지르시오.”
“스님, 이러시면 어떡합니까?”
“나야 죽으면 어차피 다비(茶毘)에 붙여질 몸이니 내 걱정은 말고 어서 불을 지르시오.”
“스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나오셔야 합니다.”
“당신네는 군인으로서 상부의 명령에 의해 불을 놓는 것이니 불을 놓으면 되고, 나는 중으로서 부처님 제자로서 마땅히 절을 지켜야 돼요. 군인은 상부의 명령을 따르면 되고, 나는 중으로서 부처님 명령을 따라 절을 지키면 되는것이요. 본래 중들이란 죽으면 당연히 불에 태우는 것이니 심려마시요. 내가 나이도 많고 죽을 날도 멀지 않았으니 잘된 것 아니요. 그러니 걱정 말고 불을 지르시요.”
절의 소각을 전해들은 한암스님은 장교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서는 방에 들어가서 가사 장삼을 입고, 법당의 중앙에 가부좌를 틀고 정좌를 하였다.
그리고는 장교에게 이제 되었으니 불을 놓으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노승과 장교는 상원사 소각을 놓고 눈에 핏발이 선 대결을 하였다.
장교의 옆에 있는 사병이 “이제 저 중을 끌어 낼까요?”라고 하였다.
당시 이 장면을 지켜본 한암스님(漢巖, 1876~1951)의 상좌와 보살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 하면서 장교에게 제발 살려 달라고 울면서 부탁하였다.
잠시 후, 무엇인가를 골몰히 생각한 장교는 “이 스님은 보통 스님이 아니다. 도인 스님이 분명해.”라고 말을 하면서 부하 사병들에게 상원사 법당 밖으로 나갈 것을 지시 하였다.
그리고는 장교는 절을 태웠다는 증명을 하기 위해, 절의 문짝이라도 떼어내어 태워 연기라도 내야 하겠다는 양해를 한암스님에게 구한다.
장교는 부하 사병들에게 상원사의 문짝 수 십여 개를 떼어 내 마당에 놓고 불을 지르도록 하였다.
문짝을 태운 검은 연기는 상원사 하늘로 높이 올라갔다. 그래서 멀리서 보면 상원사에 불이 난 것처럼 보였다.
문짝을 다 태운 장교는 불을 놓았다는 증거로 노승이 옻칠한 깨진 죽비 하나를 가지고 상원사를 내려갔다.
한암스님의 생사불이적인 생사관에서 기인한 절의 수호 정신으로 상원사는 기적적으로 소각을 면한 것이다.
당시 한암스님의 말을 듣고 소각 중지 명령을 내린 그 중위의 신상은 아쉽게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한암스님의 죽음으로 맞선 기세와 지혜로운 국군 장교의 결단으로 상원사는 전화를 딛고 살아남았다.
그 아랫 절 "월정사"는 전각 모두가 전소되었다.
화를 면한 상원사는 상원사 동종(국보 제36호), 문수동자상(국보 221호), 상원사 중창권선문(국보 제292호)등 소중한 문화재는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나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이 문화재들은 세조가 상원사에 행차하여 문수동자를 만났다는 기연으로 인하여 조성되거나 이운된 것이었다.
상원사 문화재를 수호한 한암스님은 조계종의 종정을 네 번이나 역임한 근대 고승, 큰스님이시다.
한암스님은 1876년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나, 그의 나이 22세 때인 1897년 금강산 장안사로 출가하였다.
그는 치열한 수행을 하여 금강산 신계사와 해인사에서 두 차례의 깨달음을 겪었다.
그래서 그는 당시 근세 선불교의 고승인 경허에게 인가를 받았고, 통도사 내원 선원에서 30세의 나이로 조실을 역임하였다.
1923년에는 서울의 봉은사 조실로 추대되었으나, 일제에 의해 국권을 상실당하고 불교마저도 친일불교로 전락되어 파계승이 들끓는 현실을 비판하면서
“천고에 자취를 감출지언정 춘삼월에 말 잘하는 앵무새는 되지 않겠노라.”는 말을 남기고 오대산 상원사로 들어갔다.
그는 이렇듯이 산중에 칩거, 수행하면서도 불교 경전 공부와 참선 수행을 치열하게 하였다.
이 같은 한암스님의 명성은 전국에 퍼졌다. 그래서 당시 전국의 선방 수좌들은 상원사 선방의 한암스님 회상에서 한철 수행을 하려고 몰려들었다.
한암스님은 월정사 승려와 그를 찾는 승려들에게 반드시 지켜야 할 승가 5칙, 즉 참선, 간경, 염불, 의식, 가람수호를 가르쳤다.
이 5칙을 다 지키면 좋겠지만 그 중의 한 가지는 꼭 지키라고 강조하였다.
이 전통은 지금도 월정사 스님과 한암문도회 스님들에게는 전설로, 가풍으로 전해진다.
1950년 6·25전쟁이 나자, 그는 그의 제자들을 안전한 남쪽으로 보내고 그의 상좌인 희찬스님, 그를 시봉하던 평등성보살과 상원사를 지키고 있었다.
상원사 소각을 저지한 한암스님은 3개월 후인 음력으로 2월 24일, 상원사에서 좌탈입망(座脫立亡)으로 열반에 들었다.
그런데 마침 한암스님의 열반 직후 그곳을 들른 국군 8사단 정훈장교인 김현기대위가 그 열반 직후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그의 마지막 모습은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고 김현기 대위의 육사동기이며 인접 사단에서 정훈장교로 근무하던 소설가, 선우휘는 한암스님의 상원사 이야기를 전해듣고, 1969년 1월 "월간 중앙"에 [상원사]라는 단편소설로 기고하였다.
그 후 한암스님의 "문화재 수호" 이야기는 세상에 널리 알려져 전해 오고있다.(옮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