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벽희운(黃壁希運, ?∼850) 스님은
당나라 때에 복건성 복주(福州) 민현(縣)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일찍이 황벽산에서 출가하였고, 그래서인지 속성(俗姓)이나 출생연도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 수가 없다. 평소 활달한 천성에 사소한 일에는 집착하지 않는 성품을 가지고 있었으며, 7척의 키에 이마가 튀어나와 육주(肉珠)라는 별명이 있었다.
스님은 한 눈밝은 노파로부터 강서의 백장스님이 선림(禪林)의 스승으로 우뚝 솟은 봉우리와 같다는 말을 듣고 백장선사를 찾아가서 물었다. “화상께서는 예부터 전해지는 종승(宗乘)을 어떻게 가르쳐 보이십니까?” 백장스님이 양구(良久)하자 다시 스님이 물었다. “스님 그렇게 침묵만을 지켜서 스님의 가르침이 뒷사람들에게 단절되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자 백장스님이 입을 열었다. “나는 처음부터 그대가 이 일을 맡을 사람으로 보았노라.” 두 선사는 이렇게 대면한 이래 스승과 제자로 맺어지고 그들의 정신세계는 중국선의 큰 물줄기를 이루게 된다.
어느 날 백장스님이 외출에서 막 돌아온 스님에게 물었다. “어디 갔다 오는가?” “대웅산 밑에서 버섯을 캐옵니다.” “그 산에서 호랑이를 보았는가?” 이 말을 듣자마자 스님은 호랑이처럼 포효했다. 그러나 백장스님은 도끼를 들어 호랑이를 잡으려는 몸짓을 하였고, 스님은 호랑이가 되어 백장스님을 덮쳤다. 백장스님은 그 날 오후 상장법문을 하면서, “대웅산 밑에 호랑이가 한 마리 살고 있으니 모두 조심하기 바란다. 오늘 이 늙은 백장이 호랑이에게 한 입 물렸다.”고 말하였다.
백장스님 찾아가 제자 인연 맺어., 두 스님이 중국선의 큰 물줄기로
부처 중생은 다를바 없다… ‘전심법요’는 선의 개론서
스님의 선법은〈전심법요(傳心法要)〉를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전심법요〉는 대사의 재속(在俗) 제자인 배휴(裴休, 797∼870)가 강서(江西)의 종릉(鍾陵)에 관찰사로 재임할 때인 회창(會昌) 2년(842)에 용흥사(龍興寺)에서 스님께 문법하던 것을 필록(筆錄)하여 두었다가, 대사께서 입적하고 난 다음 그 대강을 대사의 문인들에게 보내어 청법(聽法) 당시의 장노(長老)들과 대중의 증명을 얻어서 세상에 유포시킨 것이다
스님은 설파한다. “모든 부처님과 일체 중생은 한 마음일 뿐 거기에 다른 어떤 법도 없다. 이 한 마음 그대로가 부처일 뿐이니 부처와 중생이 새삼스레 다를 바가 없다. 중생은 다만 모양에 집착하여 밖에서 구하므로, 구하면 구할수록 점점 더 잃는 것이다.
부처에게 부처를 찾게 하고 마음으로 마음을 붙잡는다면, 겁이 지나고 몸이 다하더라도 바라는 것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중생들은 마음을 쉬고 생각을 잊어버리면 부처가 저절로 눈앞에 나타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이 마음 그대로가 부처이고, 부처가 곧 중생이다. 시방의 모든 부처님에게 올리는 공양이 한 사람의 무심도인에게 올리는 공양만 못하다.”
스님에 의하면 모든 부처와 중생은 오직 한 마음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안팎의 모든 경계는 이 마음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 또한 마음은 본래 깨끗하여 아무 모습이 없다. 다시 말해서 본원청정심(本源淸淨心)인 마음은 늘 두루 밝게 세상을 비추고 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견문각지(見聞覺知)의 식작용(識作用)인 염오심(染汚心)을 마음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이 마음은 허공과 같이 텅 비워 있어서 사려분별과 언어의 상대적 한계를 벗어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허공과 같은 마음을 깨달으려면 모든 분별의식의 상(相)을 버리고 집착을 없애서 무심도인(無心道人)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지식과 견식으로 분별하는 자는 많지만 깨치는 자는 드문데, 그것은 그들이 사념(邪念)을 마음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전심법요〉는 구사하고 있는 언어들이 간명하고도 평이하며 격외언구(格外言句)의 고준(高峻)한 말들을 사용치 않으면서도 선의 이치를 논리적으로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선(禪)의 개론서로서의 성격뿐만 아니라, 더불어 남종선의 정통 선사상을 이해하는 데 가장 긴요한 어록으로 평가받고 있다.
[ 출처:불교신문 ]
첫댓글 잠시 머물러 향기를 맛으며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