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하오.
“몇 살이오.” “쉰 여덟이오.” “결혼한 지 얼마나 되었소.“ ”삼십 사 년 되었소.“ ”결혼해서 둘이 산 햇수만큼 앞으로 살아갈 자신 있나요.“ 대답이 들리지 않는다. 바람결에 떨리는 목소리가 묻어 왔다. ”자신이 없어요.“ 아내에게 던진 말이다. 대답을 요구한 나 자신도 알 수 없다. 그저 희망 사항일 뿐이다.
걷기에 애쓰는 사람들이 많다. 맨발 걷기를 하는 이들이 주변을 차지한다. 학교 운동장이나 체육 시설이 있는 곳이면 몇 명 씩 모여 걷는다. 자치 단체에서 따로 황톳길을 만들어 맨발 걷기를 넓혀 가고 있다. 최근 한 통계에 의하면 열 일곱 개 조사 대상 국가 중에서 대한민국 노령층의 하루 걷는 시간이 가장 길었다. 한 시간 이상 걷는데,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 십 분 이상 더 걷는 수치이기도 하다.
우리 몇 시간 걸을까? 얼마 전부터 아내와 함께 맨발 걷기를 시작하였다. 해수욕장까지 버스로 네 정거장 정도 타고 가는 것도 개의치 않고 이틀이 멀다 하고 걷는다. 맨발 걷기를 하면서 이전과 비교해 보면 체력이 몰라볼 정도다. 특히, 밤에 잠을 잘 때면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있었는데 지금은 좋아졌음을 느낀단다.
바람이 분다. 밀려오는 파도와 파란 하늘을 안고 옷자락을 날리며 백사장을 누빈다. 둘은 일렁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손깍지를 하고 나란히 걷는다. 해양 스포츠를 즐기는 이들이 나뭇가지를 타는 다람쥐처럼 판 위에 돛대를 세우고 바람을 맞이한다. 밀려오는 파도를 타는 사람들의 모습이 띄엄띄엄 얕은 물가 쪽으로 다가온다.
여느 청춘 남녀가 만나듯 우리 둘은 잠깐 사이에 가까워졌다. 찌개가 한소끔 끓는 시간처럼 짧은 연애를 했다. 사귄 지 세 달이 지나기 전에 결혼식을 치렀다. 팍팍한 살림 탓에 부모님을 모시고 신혼 생활을 이어갔다. 시집살이를 겪고 일 년 후 분가를 하였다. 단출한 신혼 방이지만 가족에게 웃음을 주는 안식처였다. 아들과 딸이 차례로 우리에게 와 주었다.
세월은 달리는 말에서 내려다 보듯 가늠하기 어렵게 스치듯 지나갔다. 부부 중심의 생활이 자녀에게 이어지더니 지금은 손주가 으뜸이다. 자신의 자녀를 키울 때에는 준비 없이 훌쩍 지나간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일을 핑계 삼아 주변을 돌아볼 여유를 챙기지 못하였다. 아이들이 어릴 때 시간을 함께 한 기억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목마 타기와 술래잡이, 공 놀이 조차 손에 꼽을 정도다. 이제는 되돌릴 수 없다. 자식이 행여나 서운하게 생각하는 바가 있는지 미안하기까지 하다. 이런 마음을 보상 받기라도 하듯 자식에게 못다 준 정을 손주에게 쏟으려 할까보다. 다른 집 할아버지 할머니는 어떨까.
여태껏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기 자신의 일은 뒤로 미루고 자식부터 챙겨 왔다. 이제는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자식에게 쏟은 정성 못지않게 본인에게 투자를 하고 스스로 관리해 나가도록 하자. 좋은 것과 아름다움을 누리는 우리의 선택이 필요하리라. 지나간 시간 만큼이나 장마철에 소가 밟고 지나간 잔디밭처럼 머리숱은 듬성듬성하고, 깊게 패인 주름은 바싹 마른 호두 껍질을 보는 듯하다.
우리는 제한된 삶을 산다. 장년이 되면서 몸의 반응이 이전과 다름을 느끼지 않는가. 눈 앞에 닥친 것은 작은 일이라도 미루지 않도록 하자. 버텨 온 세월의 짐을 내려 놓고 나를 위한 시간으로 만들어보자. 지금껏 가족을 위해 애쓴 시간이었다면 자신에게 돌렸으면 한다. 몸에 익어 떨치기 힘들지라도 결단을 내리자. 가을이 영글어가듯 인생의 중년에 맞는 자신을 찾아가는 것이 어떠한가. 다짐을 새롭게 하고 하루하루 활력이 넘치고 유익한 출발을 펼쳐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