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VS북한, 6.25 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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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VS북한, 6.25 한국전쟁
[역사랑놀자]
*참고
-대한민국역사박물관,『6.25전쟁』,휴먼컬처아리랑, 2015
-역사학연구소, 『함께 보는 한국근현대사』, 서해문집, 2016
-박동찬,『한권으로 읽는 6.25전쟁』,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6
-나무위키 (6.25전쟁)
-위키백과 (6.25전쟁)
-국가기록원 6.25전쟁
-두산백과 6.25전쟁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전쟁
-유튜브 채널 : 도도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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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사
500101 트루만에치슨선언
500624 한국군2/3모내기 휴가 등
500625 새벽4시 북한 남침
500628 북한 서울점령
500801 낙동강방어선 설치
500801 부산영도에 포로수용소
500804 낙동강전투시작
500815 카투사 창설 UN각중대 100명
500818 정부 대구>부산 이동
500915 인천상륙작전-함정261척
500928 UN군 서울수복
501001 국군38선돌파
501007 UN한반도 통일결의
501019 평양탈환
501025 중공군개입시작
501026 유엔군 압록강도착(한국6사단)
501029 이승만대통령 평양방문
501104 중공군참전
501125 중공군18개사단 서부지역
501215 흥남철수작전 시작
501224 흥남철수작전종료
193척 10만여명
510104 서울일사후퇴
510228 거제도 포로수용소설치
510314 서울재수복
510710 소련의 제의로 휴전회담시작
530618 반공포로석방(27,092)
530727 휴전협정조인
530805 포로송환개시
531001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작전명 : 크로마이트(Operation Chromite)
DㅡDAY H- Hour 06:30 인천상륙작전 성공 ...시키다 !!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최고사령관의 역사적인 결심으로
1/5000의 성공 확률을 극복한 이 작전은 김일성의 무력
공산통일을 저지하는 첫 단계를 이루는 쾌거를 이루었다.
기동항대 사령관 도일(Doyle) 미국 해군소장,
참가부대: 미 제10군단, 미 해병제1사단, 함정 262척,
약 7만명
새벽 02시 미 해군 함포지원전대가 미국 해병대를 싣고
월미도를 향해 이동시작,
새벽 05시 북괴군 방어진지에 함포사격을 가하기 시작 !
0540시, LCVP 17척에 상륙선봉부대 탑승,
그리고 전함대의 상륙지원사격 시작.
0615부터 3척의 로켓포함 탄막사격 시작.
LCVP에서 내린 해병대의 선발대 실제 월미도 해안 도착
시간은 06시 31분이었다
미 제1해병여대ᆢBlue Beach
미 제5해병연대ᆢGreen Beach 및 Red Beach,
Yellow Beach.
인천방어 북괴군 400여명은 전부 포로로 잡혔다.
한국전쟁에 참전 UN군 (괄호안 전사자)
미국 1,600,000 (36,492)
영국 56,000 (1,177)
캐나다 27,000 (516)
터키 14,936 (1,005)
호주 8,407 (346)
필리핀 7,500 (120)
태국 6,326 (136)
뉴질랜드 5,350 (41)
네덜란드 5,320 (124)
콜롬비아 5,100 (213)
그리스 4,440 (186)
프랑스 3,760 (270)
벨기에 3,590 (106)
이디오피아 3,518 (122)
남아공 900 (37)
덴마크 630
노르웨이 623 (3)
스웨덴 380
인도 346
이탈리아 185
룩셈부르크 8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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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 총계 1,754,400
(40,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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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omite 작전 (연속)
인천상륙작전과 한국해병대-
대한민국 해병대는 1949년 4월 15일 진해 덕산
비행장에서 380명의 소수 병력으로 창설되어
6.25전쟁 발발 직후 장항, 군산, 이리지구 전투에
처음으로 투입되었으며 낙동강전선이 위기에
처했을 때 미 해병대 제1사단, 미 육군제7사단,
한국 육군 제17연대와 함께,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당시 한국 해병대는 제주도에서 학도병 3,000명을
모집하여 해병대 제1연대로 증편하고,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기 위하여 9월 1일 제주도를
출항, 9월 6일 부산에 도착하여, 미 해병대 제5연대와
연합으로 단기간 특수훈련을 실시한 뒤, 9월 12일
미 LST Q3호와 피카웨이호에 탑승하여
부산항을 출항, 인천으로 항진하였다.
연합상륙군은 미 해병대 제1사단과 한국 해병대
제1연대, 미 육군 제7사단과 한국 육군 제17연대로
구성하여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의 작전부대 편성은 다음과 같다.
작전에 참가한 총병력은 7만 5천 명으로,
9월 13일부터 15일까지 48시간 동안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200여대 항공기의 항공폭격과, 화력지원
함정의 함포 지원하에, 월미도에 대한 제압사격을
실시하였다.
제1단계는 월미도 선점작전으로 9월 15일 0시를
기해 미 해군 클라크 대위, 육군 계인주 대령,
해군 연정 소령, 최규봉 KLO부대장 외 2명의 특공대는
팔미도에 침투하여 팔미도 등댓불을 점화한 후, 등대에
성조기를 걸어놓은 것을 신호로 해군 공격전대는
협수로를 통하여 인천항으로 접근한 후 9월 15일
06시 30분 로켓포함이 월미도의 녹색 해안을 강타하는
동안 미 해병대 제5연대 3대대가 20척의 상륙주정으로
월미도에 상륙하여 M26전차의 사격으로 적을
제압하여 상륙 후 1시간 만에 월미도를 확보하였다.
제2단계는 인천 일대에 해단 두보를 확보하는 작전으로
당일 17시 30분 미 해병대 제5연대(-)와 한국 해병대
제1연대는 상륙주정으로 적색해안인 만석동 지역으로
상륙하여 5m의 암벽을 사다리로 기어오르는 상륙을
감행하였고 미 해병대 제1연대는 상륙돌격 장갑차로
청색해안인 송도해수욕장의 서부 지역으로 상륙하여
상륙돌격 장갑차에서 사다리를 타고 5m 암벽을 넘어
상륙을 감행하여 인천을 방어하는 북한군 인천경비여단과
제8사단 및 31사단을 격파한 뒤 해안 두보를 확보하였다.
그 후속 제대로 9월 18일 미 육군 제7사단과 9월 24일
한국 육군 제17연대와 해병대 김성은부대가 인천에
상륙하여 한·미 해병대가 함께 수도 서울 탈환작전을
수행하고 낙동강 전선에서 미 8군은 총반격 작전을
감행하게 되었다.
당시 신현준 사령관이 지휘하는 한국 해병대는,
9월 15일 17시 30분에 적색해안인 인천 만속동해안에
상륙하여 9월 16일부터 인천시가지 소탕작전을
전개하였다.
한·미 해병대 및 육군은 계속해서 경인가도를 따라
부평으로 진격하여 북한군의 주력을 격멸하여,
9월 20일부터 수도 서울 탈환작전을 개시하게 되었다.
여세를 몰아 수도 서울을 조기 탈환하여 9월 27일 0610시
한국 해병대가 중앙청 옥상에 태극기를 게양 하였다
인천상륙작전에서 한국군과 유엔군은 적 사살 1만 4천명,
포로 7천 명의 대전과를 올린 반면, 미 해병 1사단(전사
415명, 부상 2,029명, 실종 6명) 한국 해병대(전사 97명,
부상 300명,실종 16명) 미 제7보병사단 32연대(전사 66명,
부상 272명,실종 47명) 등, 4,000여 명의 병력손실이
있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타결되기 직전인 7월 10일에 한미간에 합의가 시작
된것인데, 정전회담을 시작한것은 1951년 7월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정전회담이 2년간이나 지루하게 끌어졌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왜 이렇게 지루한 게임을 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포로 처리문제의 복잡성이었고, 한국민의 휴전반대
여론 때문이었습니다. 한국전쟁은 단순히 남북간의 전쟁이
아니고 국제전이었습니다. 따라서 유엔군 측에 잡혀온 포로
속에는 북한군과 중공군, 북한군이 서울 점령 시 남한
사람들을 징집하여 의용군으로 내보내 포로가 된 사람 등이
있었고 북한에 잡혀 있는 포로들 속에는 한국군, 미군, 영국군,
프랑스군 등 복잡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과 미국의
트루만 대통령은 전쟁 목표가 서로 달랐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북괴가 남침을 해서 전쟁이 발발했는데,
여기서 멈출수는 없다. 우리는 북진통일을 목표로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것이었고, 트루만 대통령은 전쟁 이전의
38선을 회복하면 전쟁을 종결하는것이 목표였습니다.
그리고 북괴와 중공도 미군의 강력한 공중폭격으로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힘이 없어졌기 때문에 휴전을 서두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이 꺼낸 카드가
한미상호방위조약이었습니다. 전쟁을 이 상태에서 끝내고
유엔군이 한국을 떠나버리면 전쟁복구 문제와 방위문제를
우리 스스로 감당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승만
대통령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 전쟁을
끝내려면 미국이 전후에도 한국방위를 책임져 준다는것과
전후 복구를 위한 예산도 충분히 지원해 줄것을 약속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지금까지 자기들이
약소국들과 상호방위조약을 맺은 전례가 없다면서 지원은
해줄 수 있지만, 상호 동등한 입장에서 방위조약을 체결해
줄 수는 없다고 거절하였습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않고
계속 꼬이자 이승만 대통령은 특단의 조치를 취해서 세계를
깜짝놀라게 했습니다. 1953년 6월 18일 밤에 원용덕 헌병
총사령관을 시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는 반공포로
2만 5천여명을 석방시켜 버린 것입니다. 이 사건은 세계사에
전무후무한 사건이었습니다. 이에 자극을 받은 미국정부는
이승만 대통령을 제거하고 다른 인물로 교체하려는
*에버레드 계획*이라는 것을 만들어 시행하려 했으나,
아무리 찾아봐도 이승만한 대통령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포기를 하고 이승만이 요구하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기로 하였습니다.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결정을
받아들이면서 휴전협정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승인한다고
통보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상호방위조약 전문을 받아 보니, 조약3조에 "한미는 각국의
헌법상 절차에 따라 행동할것이다."라는 문구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문구를 한국과 미국 어느 한쪽이
외부의 침략을 받으면 자동개입한다는 조건을 넣으라고
압박을 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한국과 미국은 다시 줄다리기를
1년간이나 해야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명을 받은 외교부와
국방부는 손발이 닳도록 미국으로 뛰어다녔지만 그 문구는
수정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이승만 대통령은 다시
이런제안을 했습니다. "당신들이 상호방위조약 전문을 수정해
줄수 없다면,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보완책으로 "한미합의
의사록"이라는 부속합의서를 만들어서 그 안에
1. 한국육군 20개 사단을 무장화 시켜주고, 해군과 공군
전력을 대폭 강화시켜 명실공히 북한의 침략을 억제
할 수 있는 70만대군을 유지 할 수 있도록한다.
2. '미군 2개사단을 한국전방 지역에 고정배치 한다. '는
것을 넣어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이 요구안은 미국이
울며 겨자 먹기로 합의를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미 2사단과 7사단이 문산과 동두천에 주둔하게
된 것입니다. 문산과 동두천 축선은 북괴군의
주 공격로입니다. 그곳을 거치지 않고는 서울로 진입을
할 수가 없는 요충지인데, 그곳에 미군을 배치해 놓으므로써
북괴군이 남침을 하게 되면 미군이 자동개입을 할 수 있도록
절묘한 전략이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를 보면서 이승만 대통령은 탁월한
정치외교력과 애국심에 자연히 고개가 숙여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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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http://blog.daum.net/cozygarden/117765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