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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순정리론 제64권
6. 변현성품 ⑧
5. 수도위(修道位)
5.1. 수혹(修惑)과 그 대치도의 수(數)
이와 같이 이미 선구(先具)와 배리욕(倍離欲), 그리고 전리욕(全離欲)으로서 견제(見諦)에 든 여러 성자들의 차별을 16찰나의 마음에 근거하여 건립하였다.13)
이제 마땅히 수혹(修惑)에 근거하여 점차(漸次)로 낳아지는 ‘능히 대치하는 도’(즉 修道)의 분위(分位) 차별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각 지마다 아홉 가지 실(失)과 덕(德)이 있으니
하품ㆍ중품ㆍ상품의 각기 세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地地失德九 下中上各三
논하여 말하겠다.
여기서 ‘실’이란 과실로서 대치되어야 할 장애[所治障]를 말하며, ‘덕’이란 공덕으로서 능히 대치하는 도[能治道]를 말한다. 즉 앞에서 이미 욕계 수소단의 혹(惑)에 9품의 차별이 있다고 분별하였듯이, 상계의 4정려와 4무색정의 경우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하니, 태어나고 죽는 것(즉 생멸의 유위)으로서 9지(地)에 포섭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14) 그리고 대치되어야 할 장애가 각각의 지마다 각기 9품이 있듯이, 그것을 능히 대치하는 온갖 도인 무간도와 해탈도도 역시 그러하여 9품의 [차별이 있는 것이다].
과실과 공덕은 어떻게 각기 9품으로 나누어지는 것인가?
이를테면 근본품으로 하ㆍ중ㆍ상품이 있으며, 이러한 세 품류는 다시 각기 하ㆍ중ㆍ상품으로 나누어져 차별된다. 이에 따라 과실과 공덕은 각기 9품으로 나누어지게 되는 것으로, 이를테면 하의 하품과 하의 중품과 하의 상품과, 중의 하품과 중의 중품과 중의 상품과, 상의 하품과 상의 중품과 상의 상품이 바로 그것이다.15)
여기서 하하품의 도의 세력은 능히 상상품의 장애(즉 번뇌)를 끊으며, 나아가 상상품의 도의 세력은 능히 하하품의 장애를 끊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니, 능히 대치하는 상상품 등의 온갖 공덕은 처음에는(다시 말해 수혹을 처음으로 끊을 때에는)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이러한 공덕이 존재할 때에는 상상품 등의 과실이 이미 없어졌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도] 중의 지(智)가 비록 수승한 것일지라도 혹(惑)이 아직 증성(增盛)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품의 도라고 이름한 것이며, 상속(相續) 중의 혹(惑)이 비록 지극히 끊기 어려운 것일지라도 미세하게 수행(隨行)하기 때문에 하품의 장애라고 이름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은 이치에 근거하여 비유를 들어보면 [이러하다]. 예컨대 옷을 세탁할 때 거친 때가 먼저 제거되고, 그 후에 점차로 미세한 때가 제거되는 것과 같다. 즉 그 같은 거친 때는 옷에 매우 견고하게 묻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약간의 공력을 들여 물로만 씻어도 바로 제거될 수 있지만, 미세한 때는 그렇지 않으니, 옷에 매우 견고하게 묻어 있기 때문에 잿물 등으로써 많은 공력을 들여야 비로소 제거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캄캄한 어두움[麤闇]은 적은 빛으로도 능히 멸할 수 있지만, 미세한 어두움[細闇]은 요컨대 큰 빛에 의해 비로소 소멸되는 것과 같다. 즉 캄캄하고도 무거운 어두움은 약간의 빛만 비추어도 바로 소멸시킬 수 있지만, 미세하고도 가벼운 어두움은 요컨대 큰 빛을 비출 때 비로소 소멸시킬 수 있는 것이다.
과실(수혹)과 공덕(대치도)이 서로 대응하는 이치도 역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한다. 이에 따라 “백법(白法, 즉 대치도)은 수승하고, 흑법(黑法, 즉 수혹)은 저열하다”고 말할 수 있다. 만약 이(때나 어두움의 예)와 다르다고 한다면, 상상품의 도가 현전할 때 비로소 능히 하하품의 장애를 대치할 수 있는 것이거늘 어떻게 “백법의 세력이 수승하고 흑법의 세력은 저열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찰나에 능히 대치하는 도가 생겨나면, 무시(無始) 이래로 전전하며 증익되어 온 견고한 온갖 혹을 영원히 뿌리 채 뽑아낼 수 있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백법은 수승하고 흑법은 저열하다”고 말한 것으로, 이는 마치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쌓이고 쌓인 여러 고질병도 적은 양약을 복용함으로써 능히 단박에 낫게 되는 것과 같고, 또한 장시간에 걸쳐 쌓여온 온갖 어두움(즉 무명)도 일 찰나의 광명으로 능히 소멸하는 것과 같다.
5.2. 예류과(預流果)
1) 총설
[3계 9지의] 과실과 공덕의 차별을 9품으로 이미 분별하였다.
이제 다음으로 마땅히 그것에 근거하여 성자의 차별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바야흐로 온갖 유학(有學)으로서 수도위 중에 있는 모든 성자를 역시 또한 신해(信解)와 견지(見至)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다.16) 그러나 여기에는 다시 그 단계에 따라 여러 종류의 차별이 있는데, 먼저 아직 어떠한 [수혹도] 끊지 못한 자에 대해 먼저 건립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아직 수소단의 과실을 끊지 못하고서
과위에 머무는 자를 ‘극칠반생’이라 한다.
未斷修斷失 住果極七返
논하여 말하겠다.
과위(果位)에 머무는 자가 일체 지(地)의 수소단의 과실을 아직 아무 것도 끊지 못하였을 때를 일컬어 ‘예류과(預流果)’라고 하는데, 그의 태어남은 극칠반(極七返)이다.
여기서 ‘칠반’이라고 하는 말은 일곱 번 생을 왕복한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으로, 바로 인ㆍ천(물론 욕계천임) 중에 각기 일곱 번 태어난다는 뜻이다.17) 또한 ‘극’이라고 말한 것은 가장 많이 생을 받는 경우를 나타내기 위함이니, 모든 예류과가 다 결정코 일곱 번 반복하여 생을 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경에서 설한 ‘극칠반생’이란 바로 그 중에서 가장 많을 경우 일곱 번 반복하여 태어난다는 뜻으로,18) 경에서 설한 것과 여기서의 뜻은 어떠한 차별도 없다.
그리고 온갖 무루도를 전체적으로 일컬어 ‘류(流)’ 즉 흐름(srota)이라고 한 것으로, 이를 근거[因]로 하여 열반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또한 ‘예(預, āpanna)’라고 하는 말은 최초로 이르러 획득[至得]하였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서, 그는 [무루도의] 흐름에 이르렀기[預流] 때문에 ‘예류과’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예류과라고 하는 명칭은 어떠한 뜻에 근거한 것인가? 만약 처음으로 무루도를 획득하였을 때를 일컬어 ‘예류과’라고 하였다면, 예류과라고 하는 명칭은 마땅히 제8류(類, 즉 예류향)의 명칭이 되어야 할 것이며, 만약 처음으로 과위(果位)를 획득하였을 때를 일컬어 ‘예류과’라고 하였다면, 배리욕(倍離欲)과 전리욕(全離欲)의 행자가 도류지에 이르렀을 때에도 마땅히 예류과라고 이름해야 할 것이다.19)
이러한 ‘예류과’라고 하는 명칭은 처음으로 과위를 획득하였을 때에 근거한 것이다. 그렇지만 배리욕과 전리욕의 행자가 도류지에 이르렀을 때에는 ‘예류과’라고 이름하지 않으니, 그들의 과위는 수소단의 혹이 끊어지는 것에 근거하여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즉 ‘예류과’라는 명칭은 반드시 [일체의] 과위를 두루 획득하는 자(즉 차제증자)에게 처음으로 획득되는 과위에 근거하여 설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일래과와 불환과는 결정코 [일체의 과위를 두루 획득하는 자에게] 처음으로 획득되는 과위가 아니며, 오로지 이러한 과위만이 처음으로 획득되기 때문이다.20)
그렇다면 어떠한 연유에서 이러한 [‘예류과’라는] 명칭은 제8 [류(類)]에 근거하지 않은 것인가?
[제8류는] 아직 향(向)과 과(果)의 무루도를 모두 획득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며, 견(見)ㆍ수(修)의 무루도를 모두 획득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며, 현관(現觀)의 흐름[流]에 두루 이르러 획득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현관의 흐름’이란 8인(忍)과 8지(智)를 말하는 것으로, 도류지의 찰나에 [비로소] 그 모두에 이르렀고 획득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8 [류]를 예류과라고 이름하지 않는 것이다.21)
이에 따라 예류과는 오로지 첫 번째 과위[에 근거한 명칭]일 따름이다.
그들(예류과의 성자)은 욕계 인(人)ㆍ천(天) 중에서 각기 일곱 번의 생을 받으므로 마땅히 열 네 번의 생을 받는다고 말해야 할 것인데,22) [계경에서는] 어떠한 까닭에서 그들은 최대한 일곱 번의 생을 받게 된다고 설한 것인가?
이 같은 책망은 옳지 않으니, ‘칠’이라는 수가 공통되기 때문으로, 칠엽수(七葉樹)라고 하고, 7처선(處善)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23)
(1) 극칠반생에 대한 화지부의 이석(異釋) 비판
만약 “경에서는 ‘견도가 원만한 자는 여덟 번째의 유(有)를 받을 곳도 없고 받을 수도 없다’고 설하였으니, 마땅히 그는 인취와 천취에서 각기 일곱 번의 생을 받는다고 설해서는 안 될 것이다”고 한다면,24) 이 역시 그렇지 않으니, 경에서는 하나의 취(趣)에 근거하여 밀의(密意)로서 설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이 경이 밀의설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예류과)는 역시 중유도 받지 않는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25)
만약 인취와 천취를 합하여 7생을 받는다고 한다면, 경에서는 다만 “인취와 천취에서 일곱 번의 생을 받는다[受人天七]”고만 말해야 하거늘, 어떠한 연유에서 “천취에서 일곱 번 [태어나며], 아울러 인취에서도--[天七及人]”라고 설하였을 것인가? 이미 ‘아울러’라는 말을 설하였으니, 결정코 [천취와 인취에서] 각기 일곱 번의 [생을 받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또한 필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하니, 음광부(飮光部)에서 [전승한] 경에서도 “[인취와 천처에서] 각기 일곱 번의 생을 받는다”고 분명히 별도로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26)
만약 하나의 취(趣)에 근거하여 밀의로서 설한 것이기 때문에, [인ㆍ천에서 각기 일곱 번 생을 받는다는 주장은] ‘견도가 원만한 자는 여덟 번째의 유(有)를 받는 일이 없다’고 말한 경설과 상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상류반(上流般)으로서 변몰(遍沒)하는 자--그는 하나의 취(색계 천)에서 여덟 번을 초과하는(다시 말해 여덟 번 이상의) 생을 받는다--의 경우와는 상위하는 과실이 없다고 하겠는가?27)
[“여덟 번째의 유를 받을 곳도 없고 받을 일도 없다”고 하여] ‘여덟 번째[의 유]’를 부정하는 말은 ‘극칠유(極七有)’ 즉 최대한 일곱 번 생을 받는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으로, [이때 생을 받는] 지(地)는 [상류반의 경우처럼] 상지(上地)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류반의 경우와 상위하는 과실이 없다]. 즉 이러한 지(즉 욕계)에 근거하여 “모든 성자는 최대한 일곱 번 생을 받는다”고 설하였다면, 이는 바로 색계나 무색계가 아니라 이러한 지 중에서의 여덟 번째 [유]를 부정한 것이다. 계경에서 설한 ‘일곱 번 반복하여 태어난다[七返有]’는 말은 3계에 근거하여 무차별적으로 설한 것이 아니거늘, 어찌 “이러한 ‘여덟 번째 [유]’를 부정하는 말은 3계 모두와 결부시켜 무차별적으로 설한 것이다”고 해야 한다는 것인가?
따라서 이 경에서 ‘여덟 번째 [유]’를 부정하는 말을 설한 것은 ‘일곱 번의 유를 [받는다]’는 말과 마찬가지로 오로지 욕계에 근거하여 밀의로서 설한 것이기 때문에 [인ㆍ천에서 각기 일곱 번 태어난다는 주장과] 상위하는 과실이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해] 다른 어떤 이[有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같은 회석(會釋)은 옳지 않으니, 다른 어떤 경에서도 일찍이 이와 같이 설한 일이 없기 때문이며, 여기(앞서 인용한 경)에는 밀의설(密義說)의 특징[相]이 없기 때문이다. 즉 일찍이 어떤 경에서도 이와 같이 ‘상류반은 7유(有)를 초과하는 생을 받는다’고 설한 일이 없으니, 이러한 사실로써도 이 같은 8유를 부정하는 경(앞서 인용한 경)은 일체(3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욕계에 근거하여 설한 것임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여덟 번째 유(有)를 부정하지 않는 경이야말로 그 밖의 별도의 다른 뜻[別意]을 갖지 않는 성교에 위배되는 것으로, 반드시 별도의 다른 뜻을 갖기 때문에 밀의설로 판석(判釋)되는 것이다.28) 따라서 이 같은 회석은 정리(正理)에 맞지 않는 것이다.
어찌 ‘여덟 번째 유를 부정하는 경’과 ‘상류반에 대해 설하고 있는 경’은 지극히 서로 상위하는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두 경은] 서로 상위하지 않으니, 상류반에 대해 설하고 있는 경에서는 [변몰 뿐만 아니라] 그 밖의 다른 뜻을 갖는 상류반에 대해 모두 설[總說]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는 오로지 전초(全超)와 반초(半超)를 일컬어 상류반이라고 한 것으로,29) [그들은] 변몰(遍沒)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회석(會釋)이야말로 이치상 결정코 그렇지 않으니, 다른 어떠한 곳에서도 일찍이 이와 같이 설한 일이 없기 때문이며, 어떤 처소에 태어나게 된 결정적 이유에 대해 일찍이 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30) 즉 일찍이 어떠한 경에서도 “온갖 상류반에는 오로지 두 종류(전초와 반초)만이 존재할 뿐 변몰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한 일이 없었다. 또한 일찍이 [어떠한 경에서도] 어떤 처소에 태어나게 된 결정적 이유에 대해 설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이러한 상류반은 결정코 색계 중에 오로지 이러한 곳에서 태어날 뿐 저러한 곳에서는 태어나지 않는다”고 말하였을 뿐이다.
즉 계경에서는 7선사취(善士趣)의 처소에 대해 설하면서 다수의 비유를 들어 상류반은 순서에 따라 색계의 여러 처소에 두루 태어난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데,31) 그 경의 뜻을 관찰해 보건대, 상류반의 경우 [불꽃을 태울만한] 아무런 근거도 없는 길가[道邊] 등에까지 이르러 꺼진다는 사실을 이미 설한 셈으로,32) 불환과의 성자는 색계 중의 일체의 처소에 태어나 8유(有)를 초과한다는 사실을 이미 나타내었기 때문에 결정코 변몰의 상류반도 존재함을 알아야 한다. 이를테면 그 경에서는 여섯 선사취에 근거하여서는 각기 하나의 비유를 설하였지만, 오로지 일곱 번째 상류반으로서의 선사취에 대해만은 열한 가지 비유를 설하여 그 성자가 색계 중의 일체의 처소에 순서대로 태어난 자임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33)
즉 그 경에서는 마치 [시뻘건 쇳덩이의] 불꽃이 흩날려 마침내 길가나 물가 등 [불꽃을 태울만한] 아무런 근거도 없는 곳에 이르러34) 바로 꺼지듯이, 그 성자도 이러한 처소(색구경처)를 지나면 더 이상 태어날만한 곳이 없기 때문에 바로 반열반한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상류반에 대해 설하고 있는 경에는 그 밖의 다른 [별도의] 뜻이 없다.35)즉 여덟 번째 [유]를 부정하는 성교와 그것(상류반에 대해 설하고 있는 경)은 서로 상위하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이 경(여덟 번째 유를 부정하는 경)의 밀의설의 특징인 것이다.36)
또한 [인취와 천취를] 차별 없이 말한 [여덟 번째 ‘유’를 부정하는] 경설을 살펴보건대, 여기에는 차별적인 의취(意趣)가 없는 것이 아니니, 예컨대 계경에서 “두 전륜왕이 동시에 출현하는 곳도 없고 출현할 수도 없다”고 설한 것과 같다. 즉 이 경에서 비록 더 이상 차별하여 말한 일이 없을지라도 다만 하나의 4대주에 근거하여 설하지 않은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그(앞서 유부의 회석을 부정한 다른 어떤 이)는] 이에 대해서도 역시 “다른 어떤 경에서도 일찍이 이와 같이 설한 일이 없기 때문에, 여기에는 밀의설의 특징[相]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회석은 옳지 않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여덟 번째 ‘유’를 부정하는 경은 하나의 취에 근거하여 밀의로서 설한 것이다”는 나의 회석(會釋)에 대해] “이 같은 회석은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따라서 그는 이에 대해 헛되게 완고히 주장[固執]하였을 뿐이다.37)
2) 예류과가 극칠반생인 등의 이유
다시 어떠한 연유에서 여덟 번째 유(有)를 초래하는 업은 능히 견제(見諦)를 장애하지만 7유를 초래하는 업은 장애하지 않는 것인가?38)
만약 “[예류과의] 성자는 욕계 중에서 최대한 일곱 번 생을 받고 여덟 번째 [생]을 받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고 한다면, 여기에는 [여덟 번째 생을 받지 않는] 이유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역시 동일한 의심이 야기된다.
만약 “이때(제7생)에 이르러 상속신이 필시 성숙하기 때문이다”고 한다면,39) 이 역시 그렇지 않으니, [그렇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즉 어떤 결정적인 인연으로 인해 일곱 번째 생에서 온갖 누(漏)를 다하게 된다는 것인가? 근기가 성숙하지 않은 자가 여덟 번째 생에 이르러 온갖 누를 다하였다고 할지라도 근기 역시 성숙한 것은 아니다.
만약 “성도의 종류가 [원래] 그러하기 때문으로, 마치 칠보독사(七步毒蛇)에게 물리는 것과 같다”고 한다면,40) 이러한 비유는 옳지 않으니, 목숨의 수량이 정해진 자라면 이러한 제한을 초과하여서도 역시 [생을] 왕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성도의 종류가 법[이](法爾)로서 그러하여 [성]도가 생겨남으로 말미암아 여덟 번째 유(有)를 막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찌 그 같은 업이 능히 견제를 장애한다고 설할 수 있을 것인가? 이를테면 다만 마땅히 “성도가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여덟 번째 ‘유’를 막는다”고만 말해야지 “여덟 번째 ‘유’를 초래하는 업은 능히 견제를 장애한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미 지었거나 이미 증장한 여덟 번째 ‘유’를 [초래하는] 업이 존재한다면, 성도는 [이미 생겨난 업을] 능히 막을만한 힘이 없기 때문에 생겨날 수 없을 뿐더러 그것 역시 능히 견제를 장애한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만약 성도의 종류가 법이로서 그러하여 여덟 번째 ‘유’를 막는 것이라면] 여덟 번째 ‘유’에 이르러 비로소 반열반하는 것이라고 한들 정리(正理)에 무슨 어긋남이 있을 것인가?41)
유여사는 이에 대해 이같이 해석하였다. “그에게 [아직] 7결(結)이 남아있기 때문에 [7생을 받게 되는 것으로], 이를테면 두 가지 하분결(下分結)과 5상분결(上分結)이 바로 그것이다.”42)
이 역시 “[예류과에 이르면] 오로지 7유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능히 입증할 수 없으니, 오로지 탐결(貪結)과 진결(瞋結)이 7유를 인기한다고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계경에서 불환과의 성자가 최대한 일곱 번의 존재를 받는다고 설한 일이 없다.43) 또한 경에서는 5상분결이 욕계의 생을 인기한다고 설한 적도 없다. 따라서 그의 말에는 “[예류과에 이르면 오로지 7유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능히 입증할만한 공력이 없는 것이다.
다만 법이(法爾)로서 최대한 7생을 받기 때문에, 이(극칠반생의 이유)에 대해 억지로 그 이취(理趣)를 펼쳐서는 안 된다. 중간에 비록 [무루의] 성도가 현전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그 밖의 다른 업력이 남아있기 때문에 원적(圓寂, 반열반)을 증득하지 못하며, [일곱 번째 생에 이르러 비로소 증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오로지 부처님이 세간에 출현할 때만 불해탈율의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가 일곱 번째 생[有]에 이르렀을 때 만약 불법(佛法)을 만나지 못할 경우에는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아라한과를 획득한다.44) 그러나 이미 [아라한]과를 획득하고 나면 필시 집에 머물러 있지 않으니, 필추(苾芻)의 위의(威儀)를 법이(法爾)로서 [저절로] 성취하기 [때문이다].45) 나아가 비록 그 전에 부처님께서 설한 교법과 만나지 못하였다고 할지라도 남은 목숨[命]에 대해 지극한 염심(厭心)을 낳아 오랜 시간을 거치지 않고 바로 원적(圓寂)에 들게 된다.
그런데 어떤 이는 말하기를, “[불법을 만나지 못하였을 때라면] 그는 [불법 이외의] 다른 도(즉 외도)로 가 출가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치상 마땅히 그렇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니, 다른 도로 간 자는 악견(惡見)의 힘으로 말미암아 사업(邪業)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것(예류과)을 [악취로] 물러나 떨어짐이 없는 법[無退墮法]이라고 말하게 된 것인가?
[악취로] 물러나 떨어지는 업을 생장시키지 않기 때문이며, [과거세] 그가 생장시켰던 업은 결과로 드러나지[與果] 않기 때문이며, 강성한 선근이 그의 몸을 진호(鎭護)하기 때문이며, 가행(신ㆍ어업)과 의요(의업)가 다 같이 청정하기 때문이니, 온갖 유정으로 하여금 결정코 악취에 떨어지게 하는 업은 인위(忍位)에서도 일어나지 않거늘 하물며 예류과를 획득한 성자에게 일어날 것인가?
그래서 어떤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리석은 이는 죄가 적을지라도 역시 악취에 떨어지고
지혜로운 이는 죄가 클지라도 역시 괴로움에서 벗어나니
마치 쇠뭉치는 작을지라도 역시 물에 가라앉고
쇠그릇은 클지라도 역시 능히 물에 뜨는 것과 같다.
경에서는 “예류과는 괴로움의 끝자리[邊際]를 짓게 된다”고 설하고 있는데,46) 어떠한 뜻에 근거하여 ‘괴로움의 끝자리’라고 일컬은 것인가?
이러한 [7]생을 거친 이후에는 더 이상 괴로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으로, 이는 바로 후생(後生)에는 더 이상 괴로움이 상속하지 않게 된다는 뜻이다. 혹은 ‘괴로움의 끝자리’란 이른바 열반을 말한다.
어떻게 열반을 지어진 것[所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 같은 [열반의 획득을] 장애하는 것(즉 번뇌)을 제거하였기 때문에 ‘짓게 된다’는 말을 설한 것이니, 이는 마치 ‘허공을 짓는다(만든다)’고 하는 말이 이를테면 ‘집[臺觀]을 허무는 것’을 말하는 것과 같다.47)
만약 인취에서 예류과를 획득하였다면 인취 중에서 일곱 번의 생을 채워야 하며, 천취의 경우도 이에 준하여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성자가 아닌 이(즉 범부)도 역시 최대한 일곱 번 생을 반복하다가 상속이 성숙해짐에 따라 열반을 획득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는 결정적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본송에서] 설하지 않은 것이다.
5.3. 일래과(一來果)
1) 일래향: 가가(家家)
수혹(修惑) 중 아직 아무 것도 끊지 않은 자를 예류과라 이름하며, 최대한 일곱 번의 생을 반복한다는 사실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이제 다음으로 [수혹을] 끊는 단계에 있는 여러 성자들에 대해 마땅히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니, 먼저 일래향(一來向)과 일래과(一來果)에 대해 논설하리라.
게송으로 말하겠다.
욕계 3ㆍ4품[의 수혹]을 끊고
세 번ㆍ두 번 태어나는 자이면 가가(家家)이고
5품까지를 끊으면 두 번째 향이며
6품을 끊으면 일래과이다.
斷欲三四品 三二生家家
斷至五二向 斷六一來果
논하여 말하겠다.
예류과의 성자가 증진하여 수혹을 끊을 때, 만약 다음의 세 가지 인연을 갖출 경우 그 명칭은 가가(家家)로 바뀐다.
첫째는 번뇌를 끊음[斷惑]에 의해서이니, 욕계 수혹 중의 3품(상하품)과 4품(중상품)을 끊었기 때문으로, 이를테면 일찍이 이생위에서 끊은 경우도 있고, 혹은 지금 예류과로부터 증진하여 닦는 단계에서 끊는 경우도 있다.48)
둘째는 근(根)을 성취함[成根]에 의해서이니, 능히 그 같은 수혹을 대치하는 무루근을 획득하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같이 3품과 4품의 수혹을 능히 대치하는 도인 무루의 온갖 근을 이미 성취하였기 [때문이다].
셋째는 생을 받음[受生]에 의해서이니, 다시 욕계의 유정으로서 세 번과 두 번의 생을 받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3품을 끊은 자는 다시 세 번의 생을 받으며, 만약 4품을 끊은 자라면 다시 두 번의 생을 받는데, 이러한 세 번과 두 번의 생은 이생위에서 세 번과 두 번의 생을 초래하는 업을 조작하고 증장하였기 때문이다. 즉 모든 성자는 성위(聖位)에서 더 이상 능히 후유(後有)를 견인할만한 업을 새로이 짓지 않으니, 생사를 등지고서 열반으로 향하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계경에서는 “모든 성자는 오로지 고의로 지은 업[故業]을 향수할 뿐 더 이상 새로이 짓지 않는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이러한 세 가지 인연 중에서 한 가지를 결여하든지, 두 가지를 결여하든지, 세 가지 전부를 결여할 경우에는 ‘가가’라고 이름하지 않는다.
어떠한 까닭에서 ‘근을 성취함’에 대해서는 본송 중에서 설하지 않은 것인가?49)
예류과[의 성자]가 그 후 증진하여 수혹을 끊었다고 설하였으므로 능히 그것을 대치하는 온갖 무루근을 성취하였다고 하는 사실은 이 같은 뜻에 준하여 이미 이루어진 셈이다. 그래서 [세 가지 인연을] 모두 설하지 않은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세 번ㆍ두 번 태어난다’는 말도 설해서는 안 될 것이니, ‘3품ㆍ4품[의 수혹]을 끊었다’고 설함으로써 그 뜻이 이미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즉 [예류과의 성자가] 이미 증진하여 3품과 4품의 수혹을 끊었으면, 결정코 3생과 2생만이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세 번ㆍ두 번 태어난다’는 말을 설하지 않을 경우] 가가(家家)의 상이 원만하지 않기 때문에 설한 것이라고 한다면, 본송 중에서 다시 ‘등(等)’이라는 말을 설하면50) 바야흐로 가가의 세 가지 상을 모두 갖출 수 있는 것이다. 혹 [‘등’이라는 말을 설하지 않을지라도] ‘세 번ㆍ두 번 태어난다’는 말을 설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본송 중에서 ‘세 번ㆍ두 번 태어난다’고 말한 것은, [3품ㆍ4품을 끊은 자도] 증진함으로써 앞으로 받을 생이 혹 어떤 경우 [이보다] 적을 수도 있고, 혹 어떤 경우 아예 없을 수도 있으며, 혹 어떤 경우 이보다 많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51)
[이에 대해] 유여사(有餘師)는 [이같이] 설하였다.
“가가(家家)의 세 인연을 갖추더라도 역시 가가가 아닌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일찍이 이생위에서 3품과 4품의 수혹을 끊고서 견도위 중에 머무는 자가 바로 그러한데,52) [여기(본송)서는] 다만 가가의 생을 나타내려고 하였기 때문에 [‘세 번ㆍ두 번 태어난다’고 설한 것이다]. 즉 [가가는] 바로 예류과의 승진위(勝進位)이기 때문으로, 견도위에 머물 때에는 이러한 [가가의] 뜻을 갖지 않기 때문에 비록 세 가지 인연을 갖추었을지라도 ‘가가’라고 이름하지 않는 것이다.”53)
지금 그의 말을 자세히 살펴보건대, 결정코 이치에 맞지 않으니, 견도위에 머무는 이는 그러한 세 가지 인연을 갖춘 것이 아니기 때문으로, 그 때는 능히 수혹의 대치도를 닦지 않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것(수혹)을 대치하는 온갖 무루근을 획득하여야 비로소 이러한 세 가지 인연 중의 무루근의 뜻을 성취하게 된다.54) 따라서 [일찍이 3품과 4품의 수혹을 끊고서] 견도위에 머무는 자는 세 가지 인연을 갖추지 않은 것으로, 세 가지 인연을 갖춘 이로서 가가가 아닌 자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가가(家家)에는 모두 두 종류가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첫째는 천가가(天家家)이니, 이를테면 욕계 천취에 세 번[三家] 태어나거나 두 번[二家] 태어나 원적(圓寂)을 증득하는 자로서, 혹 어떤 경우에는 한 곳의 하늘[天處]에서, 혹은 두 곳의 하늘에서, 혹은 세 곳의 하늘에서 태어나기도 한다.55) 둘째는 인가가(人家家)이니, 이를테면 인취에 세 번 태어나거나 두 번 태어나 원적을 증득하는 자로서, 혹 어떤 경우에는 한 주(洲)에서, 혹은 두 주에서, 혹은 세 주에서 태어나기도 한다.
만약 칠생(七生, 극칠반생의 예류과)의 경우라면 반드시 일곱 번의 생을 채우지 않고서도 [원적을 증득하는] 이가 있지만, 가가의 단계에서는 중간에 열반에 들지 않는다.
어떠한 부류에 포섭되는 이가 칠생에 포함되는 것인가?
칠생 중의 ‘극(極)’이라고 하는 말은 가장 많을 경우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에 따라 일곱 번의 생을 채우기 전에 반열반을 획득하더라도 역시 그것(극칠반생)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이미 나타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근기가 가장 둔한 자는 일곱 번의 생을 모두 거쳐야 하지만, 근기가 예리한 이는 결정코 일곱 번의 생을 채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5품[의 수혹]을 끊은 이도 역시 가가라고 이름해야 함에도 어찌 그같이 말하지 않는 것인가?
제5품의 수혹을 끊을 때에는 반드시 제6품도 끊어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일간(一間)의 경우처럼 1품의 혹이 능히 과위의 획득을 장애하는 것은 아니니, [일래과는] 아직 계(界, 욕계)를 초월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56)
즉 예류과의 성자가 증진하여 욕계의 1품의 수혹 내지 5품의 수혹을 끊을 경우, 명칭이 바뀌어 일래과의 ‘향(向)’이 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2) 일래과
만약 제6품의 수혹을 끊으면 일래과(一來果)를 성취한다. 그때 그는 천상에 갔다가 한 번만 인간으로 태어나 반열반하기 때문에 일래과라고 이름한 것으로, 이렇게 한 번의 왕래를 거친 이후에는 더 이상 다시 태어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뜻으로 말미암아 가가(家家) 가운데 천가가(天家家)로서 세 번의 생을 받는 자는 인간으로서의 생을 두 번 받고, 천상에서의 생을 세 번 받으며, 두 번의 생을 받는 자는 인간으로서의 생을 한 번 받고, 천상에서의 생을 두 번 받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니, 인가가(人家家)의 경우에 대해서도 마땅히 이와 같은 예로서 해석해 보아야 한다.57)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저 일래과에는 저들 2생의 가가와 어떠한 차이점이 있는 것인가?
저 [일래과의] 탐ㆍ진ㆍ치는 오로지 하품만이 남아 있을 뿐이기 때문에, 일래과를 박탐진치(薄貪瞋癡) 즉 ‘탐ㆍ진ㆍ치가 엷어진 자’라고도 이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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