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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쓰는 연보-곽효환
1967년 음력 8월8일 전라북도 전주시 전동에서 아버지 곽상훈과 어머니 이정원 사이의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다. 태어난 곳은 전라북도 잠업검사소 소장으로 재직하던 조부의 관사였다. 외아들로 누이동생만 셋을 둔 아버지가 결혼해 첫 딸을 낳은 다음 본 장손이었기에 조부모의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조부가 은퇴한 후 전주시 송천동에 커다란 텃밭이 딸린 널따란 대지위에 큰 개량한옥을 짓고 살았다. 은퇴한 조부는 마작판과 작은댁으로, 아버지는 다른 지방 도시로 떠돌아 집은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과년한 고모들이 지키는 여인들의 집이었다.
1973년 송천초등학교 2학년 때 조부의 개량한옥이 빚으로 넘어가자 어머니는 3남매를 데리고 전주교대근처 동서학동에 전북대학교 소 교수집의 별채를 얻어 분가하였고 그곳에서 막내 동생 효성을 낳았다. 1년여를 그곳에서 살다가 인근 세탁소가 있는 집으로 이사하였다. 전주남초등학교 학급 반장으로 학교별로 우수한 학생들을 뽑아 운영하는 고전읽기반에 뽑혀 초등학생이 소화하기 어려운 여러 고전들을 읽고 감상문을 쓰고 토론하는 훈련을 하였다. 이 무렵 저녁 6시경이면 시작되는 만화영화 <서부소년 차돌이>의 미국서부를 개척하는 정의로운 소년에 매료되었고 밤 9시경이면 잠자리에 누워 라디오 연속극을 들으며 상상력의 나래를 폈다.
1976년 서울로 이주하다. 부산 등지를 떠돌다 돌아온 아버지를 따라 서울 봉천동으로 이주하였다. 부산에서 도난방지기 제조 기술을 익힌 아버지는 서울 봉천동에서 도난방지 회사를 차렸으나 얼마 못가 망했다. 문과 문 사이에 설치한 센서를 통해 외부침입자가 발생하면 요란한 경보음을 내는 당시로서는 첨단 보안사업이었지만 먹고살기도 급한 1970년대 서울 변두리의 경제사정에 비추어볼 때 시기상조였다.
이후 사당동으로 이사하였고 아버지는 실패를 거듭하였다. 끝내는 사당동 산 15번지 달동네로 아버지와 나와 바로 아래 동생이 옮겨가고 어머니와 누나는 친척집으로 막내 동생은 전주의 조부모 집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초등학교 6학년인 내 방과 후 첫 일과는 물지게를 지고 30여분을 걸어 내려가 물을 길어오는 일이었고 매일매일 거칠고 고달픈 변두리 산동네의 밑바닥 삶을 체험하였다. 그곳에서 6개월여를 살았을 무렵 어머니가 구해온 돈으로 그곳에서 벗어났다. 이후 어머니는 낮에는 건강식품 외판원, 밤에는 재봉공장 미싱사 등을 하며 놀라울 정도로 집안을 일으켰다. 반면 아버지는 친구과 술과 담배로 세월을 보냈으며 집에서는 점점 폭군이 되었다.
1979년 서울 남성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동양중학교에 입학하다. 이 무렵 아버지의 권유로 웅변을 배우면서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토론하는 법을 배웠고 교내외 웅변대회에서 여러 번 입상하였다. 전주북중학교, 전주고등학교와 전북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한 지방의 엘리트로 운동과 친구를 좋아하고 주변사람들을 잘 챙기는 성품을 가진 청년으로 군인이 되거나 농촌개간운동에 투신하고자 하였으나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한 아버지를 이해하려 노력했지만 거듭된 실패 이후 한량으로 살며 술에 취하면 폭군으로 변하는 아버지를 인생의 반면교사로 삼았다.
1982년 서울 영동고등학교에 입학하다. 경기고등학교를 가라는 아버지의 권유로 청담동 이모 집으로 주소를 이전하였으나 신설학교인 영동고등학교에 배정받았다(같이 주소를 옮긴 동생은 2년 후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은 4월5일 식목일 밤에 아버지가 타계하셨다. 무능하고 폭력적인 아버지였으나 아버지의 죽음은 사춘기에 큰 충격이었다. 성격도 내성적으로 변하고 학교생활에 의욕을 잃고 많은 시간을 집에 머물렀다. 영동고등학교는 신설학교였지만 재벌그룹의 총수, 현직 부총리와 서울시장, 강남의 신흥부자 등 이름만 대면 아는 고위층과 부유층의 자제들이 많았는데 아버지를 잃고 중학교나 동네의 친구 하나 없는 강남의 학교에 통학 하면서 주눅이 들어 지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국어선생님이 추천한 최인훈의 『광장』을 읽고 세계의 불가해함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듯 했고 예술가이면서 지식인이라는 문학인의 독특한 위상에 흥미를 느꼈다. 눈에 띄는 대로 시집와 소설책들 읽었고 김영랑과 윤동주 시집을 끼고 다녔다. 교회에서 문학의 밤, 성극 등의 연출을 도맡으면서 어렴풋이나마 글쓰기를 일생의 업으로 택하기로 결심하였다.
1985년 서울 영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건국대학교에 입학하다. 소망하던 국문과에 입학하였으나 건대신문사의 학생기자생활을 시작하면서 학창생활의 대부분을 학생기자생활에 쏟았다. 대학입학한 해에 총학생회가 부활했고 삼민투를 비롯한 학생운동이 본격화되고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규명을 비롯한 민주화운동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따라서 대학신문기자생활 역시 군부독재 종식과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신념과 의지의 실천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이 무렵 최서해의 소설을 읽으며 밤새 뜨거운 눈물을 흘렸고 김수영의 시를 읽으며 자유의 정의를 향한 퓰리턴의 초상과 부정한 시대를 비켜서서 응전하는 불온성과 소시민성 매료되었다. 특히 대학교 1학년 때 창간된 언론민주화운동을 위한 잡지 『말』의 창간호에 실린 김정환 시인의 시를 읽고 민중시에 적극 호응하였고 그처럼 살고 그처럼 시를 쓰고 싶다고 생각하였다. 대학신문 1학년과 2학년 때 주간교수인 조남현 교수의 균형 있고 깊이 있는 글과 시선, 온화하고 합리적인 성품에 많은 것을 배우고 평생의 스승으로 삼을 것을 결심하였다.
같은 과 예비역 선배와 함께 문학동인 ‘시랑(詩廊)’ 활동을 하며 동인지 『시랑』 2, 3집에 참여하여 습작 민중시를 발표하였으나 다른 동인들과 문학관이 맞지 않는데다 학교신문 만드는 일에 집중하느라 중단하였다.
1988년 2월 건대신문 학생기자를 취재부장으로 마치다. 대학신문기자 퇴임식 날 너무 일찍 경험한 물러남에 대해 당황해하면서도 내가 없는 대학신문의 미래와 민주주의를 걱정하였으나 개강 후 이상 없이 발간되는 대학신문을 보고 좌절하였다.
군대에 가기 위해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시력이 너무 나빠 제2국민역 판정을 받았다.
대학시절 간간히 시를 써 대학신문문학상에 응모했으나 번번이 떨어진 것을 만회하기 위해 4학년 때 평론 「김수영 연구 ―참여문학정신 중심으로」를 건대신문문화상에 응모하여 평론부문에 입상하였다. 수상 후 인사를 간 자리에서 심사를 맡았던 조남현 교수는 이런저런 격려를 하며 시 쓰기 대신 평론 공부를 더 해보라는 덕담을 건넸고 인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반드시 시인이 되겠다고 결심을 하였다.
이 무렵 원인모를 심한 복통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몸무게가 60킬로그램 초반으로 떨어지고 거동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병세가 악화되어 제대로 취업시험에 응하지 못했다. 그해 연말 대학시절 선배처럼 이끌어주던 이재한 목사가 편집장이 되어 창간하는 월간지 『크리스천 저널』에 취재기자로 출근했으나 2주일여 만에 쓰러졌다. 복막염 판정을 받고 6시간이 넘는 수술을 받았다.
1989년 건국대학교 국어국문과를 졸업하다.
짧은 잡지사 생활을 마치고 8월부터 연합통신(현 연합뉴스) 편집국 교열부에서 근무하였다. 매일매일 국내외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수많은 뉴스들을 접하며 세상을 보는 눈을 떴고 비판적이면서도 균형과 객관성을 갖춘 세계관을 형성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정확하고 바른 문장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하였다.
1992년 9월 대산문화재단 설립준비위원회에 합류하다. 문학을 지원하기 위한 대산문화재단의 설립준비 책임을 맡은 류태영 교수는 대학신문 시절 학생기자와 주간교수로 인연을 맺은 사이였다. 새마을운동 창시의 당사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농과대학 교수였던 그는 제자 가운데 문학을 전공하였고 도전적이면서도 예의 바른 동향(전북 임실)의 나를 눈여겨봤고 함께 일할 것을 권했다. 문학에 관련된 일을 하면서 문청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는 그의 권유에 응하였다.
교보생명 경리부에서 파견 나온 신상만과 한국문학의 발전과 세계화를 큰 목표로 잡고 문학계의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조사하고 사업을 준비하는 한편 대산문화재단 설립에 관한 실무를 진행하였다. 오늘날 대산문화재단의 주요 사업들은 이 무렵 내 손으로 기획하고 실행한 것들이다.
1993년 대산문화재단의 2대 이사장으로 취임한 대산 신용호 선생의 장남이자 서울대학교 의과대 교수인 신창재 박사를 만나다. 공공의 이익을 위한 투명한 과정과 합의, 미래비전 구축 등 공익사업에 대한 식견과 의지, 전문성에 대한 존중, 타자에 대한 신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균형 잡힌 태도 등을 신창재 이사장과 일하며 배웠다.
한편으로는 평소 흠모하던 신경림, 이형기, 오세영, 신달자, 조정권, 최일남, 이청준, 이문구, 유종호, 김우창, 조남현, 최동호, 정과리 등의 문인들을 회사 일을 기회삼아 찾아뵈며 문학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였다. 다시 시 습작을 시작하여 신춘문예에 꾸준히 투고하였으나 번번이 본심진출 정도에 그쳤다.
1996년 세계일보 문학담당기자인 조용호의 권유로 세계일보에 「벽화속의 고양이 3」을 발표하다.
건국대학교 언론홍보대학원 신문출판과에 입학하다.
1997년 건국대학교 언론홍보대학원 학술지 창간 편집위원장을 맡아 『건국 media & communication』 창간호를 발간하다. 이 학술지에 논문 「스포츠신문과 대중문화」를 발표하였다.
5월의 마지막 날 아내 윤민형과 결혼하다
1998년 3월 딸 민경을 낳다.
8월 건국대학교 언론홍보대학원 신문출판과를 졸업하고 언론학 석사학위를 취득하다. 석사학위 논문 「한국문학의 해외소개 연구」는 한국문학 해외소개의 현황을 분석, 종합하고 한국문학 세계화를 위한 전략을 제시한 첫 번째 학위논문이다.
1999년 한국문학과 세계문학이 교류하는 담론의 장으로 서울국제문학포럼을 기획하고 프랑스에 방문해 르 클레지오, 이스마엘 카다레 등 프랑스의 주요 문인들을 만나다. 이때 만남을 인연으로 2001년 르 클레지오를 서울에 초청하였고 이후 지속적인 교류를 한 끝에 르 클레지오는 서울국제문학포럼의 주요 참석자이자 세계적인 지한파 작가가 되었다.
문예교양지 『대산문화』를 반년간으로 창간하는 실무를 맡았다.
2000년 피에르 부르디외, 월레 소잉카, 개리 스나이더, 이스마엘 카다레 등 세계적인 문호들을 초대한 2000년 서울국제문학포럼의 실무를 맡아 진행하다. 이후 2005과 2011년 서울국제문학포럼의 조직위원. 2017년 서울국제문학포럼 조직위원 겸 집행위원장을 맡아 한국문학과 세계문학이 교류하고 새로운 담론을 생산하는 허브역할을 수행하였다.
2001년 탄생100주년문학인 기념문학제를 기획하고 기획위원으로 참여하다. 첫 번째 기념문학제는 ‘근대문학, 갈림길에선 작가들’을 주제로 김동환, 이상화, 심훈, 최서해 등을 기렸다. 탄생100주년문학인기념문학제는 지금까지 매년 개최되며 근대 문학 100년의 연륜을 쌓은 한국문학의 성과를 조명하고 평가하는 문학계의 주요한 행사로 진행되고 있다.
광화문 교보빌딩의 커다란 현판에 계절마다 시구를 게재해 시민들에게 전달하는 기구인 ‘광화문글판’ 문안선정자문위원회 구성의 실무를 맡아 간사로 참여하다. 2008년부터는 위원으로 참여하여 시민들에게 새로운 발견과 위로를 주는 시구를 선정,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8월 아들 민재를 낳다
2002년 계간 『시평』에 「수락산」외 5편 발표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 시작하다. 집에 놀러온 장대송 시인이 습작해놓은 시 원고뭉치를 읽어보겠다고 가져가서 계간 시전문지 『시평』의 주간 고형렬 시인에게 건넸고 이를 고형렬 시인과 김정환 시인이 심사하여 2002년 1월에 발간한 봄호에 추천함으로써 본격적인 시 창작의 길을 시작하였다.
2003년 계간 문예교양지 『대산문화』의주간을 맡다.
도봉구 도봉동에서 강동구 둔촌동으로 이사하다. 둔촌동에 거주하는 소설가 조세희 선생과 최인석, 이승우, 방현석 등과 ‘둔촌문인모임’으로 교류하다. 이 모임에는 시인 강신애 김진돈 이선식 이인구, 소설가 이경희 김혜나, 평론가 함돈균 김효은 등 여러 문인이 함께 하고 있다.
2004년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과 입학하다. 본격적인 현대문학공부를 하며 백석과 이용악을 만나게 되었다. 이들의 북방시편을 읽으며 가슴이 뜨겁게 차올라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경험을 하며 백석과 이용악, 김동환 등을 중심으로 북방시인들의 시편에 심취하였다. 2005년에는 학술논문 「이용악의 북방시편과 북방의식」을 학술지 『어문학』에 발표하면서 북방문학 연구자로서 본격적인 발을 내디뎠다.
2006년 첫 시집 『인디오 여인』을 민음사에서 출간하다. 시집을 낼 정도 분량의 원고가 쌓여 정리하던 중에 우연히 만난 최승호 시인이 평소 시를 눈여겨봤다며 시집 낼 원고가 있다면 살펴보겠다고 편집자 역할을 자처하였다. 최승호 시인은 첫 시집의 윤문, 목차, 제목 선정에 이르기까지 전반을 살핀 산파였다. 여기에 가장 존경하는 평론가 중 한 분인 유종호 선생의 해설을 수록하였다.
한국문화원연합회에서 발간하는 월간 『우리문화』의 편집위원을 맡다. 경기대학교에서 처음 강의를 시작하였다.
2007년 이문구 선생이 생전에 추천했다는 황충상 선생의 권유에 따라 이문구, 황충상 등이 창간한 문예계간지 『문학나무』편집위원을 맡다.
2007년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과를 졸업하고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하다. 학위 논문 「한국 근대시의 북방의식 연구 -김동환 백석 이용악을 중심으로」는 김동환, 백석, 이용악의 북방시편들을 통해 근대시에 있어서의 북방공간의 의미와 북방의식을 처음으로 고찰한 논문으로 이후 북방문학 연구자이자 북방시인으로 명명 받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논문은 2008년 『한국근대시의 북방의식』이란 제목으로 서정시학에서 출간하였다.
2008년 한일중 동아시아문학포럼 조직위원으로 실무책임을 맡아 첫 번째 동아시아문학포럼의 서울대회를 개최하다. 2006년 김우창과 오에 겐자부로의 공개대담에서 동아시아의 평화기조 구축과 공동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동아시아문학포럼 창설의 필요성이 대두 되었고 이를 2005년부터 인연을 쌓아온 중국의 모옌과 만나 본격적으로 협의하였다. 그 결과 중국은 중국작가협회가, 일본은 오에 겐자부로의 추천을 받은 시마다 마사히코가 중심이 된 문인그룹이 주축이 되어 참여하고 한국은 김우창 교수가 조직위원장을 맡아 동아시아문학포럼의 첫 대회를 서울에서 치르고 이후 2년마다 세 나라에서 차례로 개최하기로 하였다.
중국문예지 ≪黃河文學 황하문학≫에 「굴뚝 위의 둥지(烟筒上的巢)」 등 중국어역 시 4편을 발표하다.
2009년 문학인 아버지 혹은 문학인의 아버지를 조명한 산문집『아버지, 그리운 당신』을 최동호 교수와 공동으로 편해 서정시학에서 출간하다.
한국현대문예비평학회이사. 연희창작촌 운영위원(~2011, 2013~2016년), 김유정기념사업회 이사(~2013년)를 맡다.
중국 문예지 ≪作家 작가≫(2009.8.)에 「从浅水湾 천수만에서」 등 중국어역 시 5편을 발표하다.
2010년 두 번째 시집 『지도에 없는 집』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하다.
국립중앙도서관․조선일보․교보문고가 공동주최하는 ‘길위의인문학’ 기획위원(~2012년)을 맡다.
중국 문예지 ≪作家 작가≫(2010.4.0에 「先驱者的道路 앞서간 사람들의 길」 등 중국어역 시 2편을 발표하다.
2011년 연구서 『구보 박태원의 시와 시론』을 푸른사상에서 출간하다. 이 연구서는 2010년 구보 박태원이 시 전편을 처음으로 연구한 논문 「구보 박태원의 시 연구」를 중심으로 박태원의 시와 시론을 묶은 것이다.
중국작가협회에서 중국 루샨(廬山)에서 개최한 국제창작캠프에 참가하여 논문 「한국근대시의 자연과 나의 시」, 시 「어떤 동거」 등을 발표하였다.
sbs라디오(103.5Mhz) <최백호의 낭만시대>에서 시를 대중화하는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시작한 ‘시인의 마을’에 고정게스트로 참여하여 1년가량 진행하였다.
2012년 시집 『지도에 없는 집』으로 제14회 고대신예작가상 수상하다.
프랑스 시전문 계간지 『PO&SIE 포에지』 한국시 특집호에 「지도에 없는 집」 등 10편 을 수록하고 발간을 기념해 프랑스와 스위스 등지에서 열린 낭독회에 황지우, 김혜순, 정과리, 강정 등과 함께 참석하다.
편저 『이용악 시선(초판본 이용악 시선)』을 지식을만드는지식에서 출간하였다. 또 백석 시인 탄생 100주년을 기념한 백석 시그림집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를 편하여 교보문고에서 출간하였다.
한국시인협회 이사(부회장 겸 교류위원장 ~2013), 한국작가회의 이사, 국제비교한국학회 이사를 맡다.
2013년 중앙일보의 ‘詩가 있는 아침’을 연재하다.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 문학부문에 어머니 이정원 여사가 수상하다.
시 「숲의 정거장」으로 제 11회 애지문학상을 수상하다,
한국언론문화포럼 논설위원(~2014)을 맡다.
2014년 세 번째 시집 『슬픔의 뼈대』를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하다
중앙일보의 ‘시(詩)가 있는 아침’에 연재한 글을 정리한 시 해설서 『너는 내게 너무 깊이 들어왔다 ―곽효환의 시가 있는 아침』을 교보문고에서 출간하다.
한국시학회 이사를 맡다.
2015년 평론가 이경수, 시인 이현승과 함께 1년여의 작업 끝에 『이용악 전집』을 소명출판에서 출간하다. 이 책은 이용악의 월북 이전과 이후의 시 전편과 북에서 발간한 산문집 등을 집성한 명실상부한 이용악 전집이다.
시집 『슬픔의 뼈대』로 제25회 편운문학상 수상하다.
북경과 청도에서 열린 중한일 동아시아문학포럼에 참가하다.
sbs라디오(103.5Mhz)의 ‘책하고 놀자’에 ‘곽효환의 행복한 시읽기’의 진행게스트를 맡아 격주로 한국 근현대 시인들의 문학적 생애와 시세계를 소개하다.
서울문화재단 문화정책 위원(~2016)을 맡다
대산문화재단 경영임원(상무)로 승진, 재단의 대내외적인 업무를 총괄하게 되다.
프랑스 문예지 ≪meet≫(2015.11.)에 「도심의 저녁식사」 등 불역 시 3편을 발표하다.
2016년 시집 『슬픔의 뼈대』로 건국문학회 제1회 김건일문학상을 수상하다,
시 「마당을 건너다」로 제14회 유심작품상을 수상하다.
청록집 발간 70주년 기념 시그림집 『청록집』을 편해 교보문고에서 출간하다.
문화체육관광부 문학진흥TF 위원(2016.8~12)으로 참여하다,
한국시인협회 부회장 겸 상임위원장(~2017), 연희문학창작촌 운영위원장(~2019), 세계한글작가대회 집행위원(~현재)을 맡다.
불어 잡지 ≪Cahier de Coree 카이에 드 코레≫(2016.11.)에 「바이칼」 등 불역 시 5편을 발표하다.
2017년 문화체육관광부 문학정책위원회 위원(~2019), 2017 서울국제문학포럼 조직위원 겸 집행위원장을 맡다,
윤동주 탄생100주년 기념 시 그림집 『별 헤는 밤』을 편해 교보문고에서 출간하다.
광주 아시아문화전당 아시아문학페스티벌 조직위원(~현재)을 맡다.
몽골어역 몽골어역 『곽효환 시선집』이 몽골 СОЁМБО(영문명 Soyombo, 2017.)에서 출간되다.
2018년 네 번째 시집 『너는』을 문학과지성사에서 상재하다.
국립한국문학관건립추진위원회 건립소위원회 위원을 맡다.
2019년 경기대학교 한류대학원 겸임교수, 한국문학평론가협회 부회장을 맡다.
시집 『너는』으로 제 30회 김달진문학상을 수상하다.
2020년 2024강원동계청소년올림픽 조직위원 겸 집행위원(~2022.)을 맡다.
2021년 한국문학번역원의 제 8대 원장으로 취임(5월14일)하다. 장고 끝에 한국문학번역원장을 맡기로 함으로써 30년간 몸담으며 한국문학의 세계화와 문학에 대한 꿈을 키운 대산문화재단을 사직하다. 아울러 문학진흥정책위원회 위원 겸 부위원장, 한국작가회의 이사, 한국시인협회 이사, 경기대학교 한류대학원 겸임교수직을 사임하다.
6년간 맡아온 sbs라디오(103.5Mhz)의 ‘책하고 놀자’의 ‘곽효환의 행복한 시읽기’의 진행게스트를 마치다.
국립 한국문학관 이사(~2023.), 국어심의회 위원(2021.12~2023.11.)을 맡다.
프랑스어역 한국시인선집(곽효환 외 10인) 『C’est l’heure où le monde s’agrandit 지금은 세계가 확장되는 시간 』이 프랑스 브루노 뒤세(Éditions Bruno Doucey)에서 출간되다.
2022년 한국문학번역원에서 한국문학 해외진출 디지털 플랫폼 KLWAVE를 구축, 가동하고 디아스포라 한글문학 웹진 (계간)≪너머≫를 창간(11월)하다.
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르 클레지오가 서문을 쓴 불역시집 『Et tol… 너는』이 프랑스 필립 레(Philippe Rey)출판사에서 출간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