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식 님 작품을 보고 장일암 선생이 쓰신 글입니다.
허락을 구하고 전재합니다.
ㅡ
‘텅 빈 방에는 밥상으로 쓰는 거겠지만 깨끗한 상이 하나 있고 천장에 전구 하나가 뎅그러니 매달려 있었을 뿐 정말 절답게 소박하고 정갈한 방이었다.
적료, 적정 등의 글자가 떠올랐다. 그리고는 무언가 알 수 없는 분위기에 이끌려 셔터를 눌렀다. 내 사진 중에 아직까지 이보다 나은 사진은 별로 없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이 사진은 마음에 든다.’ (한정식)
.
.
다음은 서울대 동문 인터뷰에서…
초창기 ‘북촌’ 사진을 보면 인물도 간간이 나타나는데 그 이후에는 나무, 물, 발, 풍경 등을 많이 찍으셨어요.
“자연이 심성과 맞는 것 같아요. 나한테 덤벼들지 않으니까(웃음). 임응식 선생님에게 사진을 배웠습니다. 이분은 ‘사진은 리얼리즘이다, 인간의 삶을 찍어야 한다’고 늘 강조하셨지요. 사진의 기록적 가치에 큰 의미를 두셨죠. 그런데 저는 다른 방향으로 나갔습니다. 마음이 약해서 사람을 찍을 수 없었어요.
부딪히는 걸 싫어하는 성미예요. 외로운 길을 걸어왔지요. 사진의 정체성을 기록성에서 찾고 있다는 점을 깊이 이해하고 공감은 하면서도 현실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쪽으로는 눈이 가지 않았어요.
내 사진은 50대까지는 문학성에 많이 기댔습니다. 그러다 보니 영상의 매력이 약했지요. ‘사진이 시각예술임을 무시했구나’ 그런 깨달음이 들더군요. ‘고요’ 시리즈가 이런 깨달음 이후 시작됐습니다. 그러면서 사진의 추상성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추상을 지향하지 않을 수 없고.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 ‘언어 밖의 세계’로 가고자 하는 것이지요. 음악을 좋아하는데 쇼스타코비치, 말러의 곡을 들으면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옛 선배들의 음악을 뛰어넘어 새로운 것을 했거든요. 난 뭘 했나, 반성할 때가 많습니다.”
.
.
.
사진작가 마다 어떤 뚜렷한 정체성이 작품에 나타나는 시기가 있는데 1937년생이었던 한정식 선생이 지천명의 나이 50에 들어섰을 때가 바로 이 사진을 촬영한 때이다. (1986년) 바로 이 사진이 고요 시리즈 탄생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진이 아닌가 한다.
한정식 선생은 이 사진을 촬영하며 ‘법성게’를 들었다고 술회 하셨는데, 그만큼 그에게는 큰 깨달음을 준 광경이었던 것이다.
1월의 특강 <기술자의 풍경, 철학자의 풍경>에 꼭 다시 소개하고 싶은 사진이다.
나는 기술 위에 철학이 있고, 철학 위에 예술과 영성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만큼 깨달음이 필요한 분야가 예술인데 그걸 한낱 돈벌이의 도구, 혹은 과시욕의 도구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예술가를 자처하는 경향이 있어 안타깝다. 허나 어쩌겠는가 여기가 바로 모든 욕망과 아집이 지배하는 속세인 것을… 비록 사방이 똥밭이어도 그것을 거름 삼아 향기로운 포도송이를 맺는 포도나무를 생각해본다.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