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글
인간이란 무엇인가?
기후 위기가 성큼 우리 옆으로 다가왔습니다. 여름에는 비가 점점 자주,
많이 내립니다. 올 여름에는 갑작스러운 집중 호우로 또 여러 사람이 세상
을 떠났습니다. 출근을 하려고, 막히는 길을 뚫고 일상을 이어가려던 마음
은 밀려드는 물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졌습니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에
서, 인간이라면 어떤 마음을 먹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남 탓하기보다 더
크고 넓은 시야로 대책을 세워야 하는데……. 정치적 해석보다 인간적으로
해석하고 마음으로 다가가야 할 부분에도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는 글을 쓰고 있을 때쯤, 이십 대 초등학교 교사가 세상을 떠나는 사건
도 벌어졌습니다. 어떤 일이든, 인간의 존엄성은 지키고 싶습니다. 나만 생
각하는 게 아니라 남을 돌아보고, 내 이익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어야 할 텐데요.
가을호 <어린이와 문학>에서는 ‘인간’을 살폈습니다. 처음에 던진 질문
은 이랬습니다. 인간과 기계, 인간과 AI는 어떤 게 같고 다른가? 우리는 어
떻게 살 것인가? 그런데 요즘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더 방점을 찍고 생
각합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길에서
어린이·청소년 문학은 무엇을 해야 할까, 쉽지 않은 질문에 답 또한 갈피를
못 잡네요. 어쩌면 글을 쓰는 내내 이 화두를 간직할 듯합니다. 우리가 한
고민이 여러분에게도 닿기를 바라면서 가을호를 만듭니다.
“작가의 서랍”에서는 최이랑, 한정영 작가를 만나 청소년소설에 대한 이
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를 정리해 「청소년소설 작가라는 책임감」으로 묶
었습니다. 두 분 다 동화와 청소년소설을 오가면서 작업하시는데, 이번에는
청소년소설에 집중했습니다. 비슷한 듯하지만 서로 다른 두 작가가 들려주
는 삶의 방식을 따라가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두 작가가 청소년소설 작가
로 품는 책임감은 이 잡지를 읽는 독자들에게 대부분 적용될 듯합니다. 어
른으로서, 어린 존재들에게 어떤 세상을 펼쳐보일 것인지를 고민하는 시간
이 되길 바랍니다.
“시선”은 최영희의 「양철 나무꾼의 모험은 시작됐다 - 생성 AI와 작가의
길」을 담았습니다. ANI와 AGI를 비교하고, 챗GPT를 포함한 생성 AI가 등
장하면서 작가가 겪는 혼란과 우려를 양철 나무꾼과 빗대 서술했습니다. 오
즈의 마법사에서 양철 나무꾼이 심장을 찾아 헤맸듯이, 작가가 이 시대를
버틸 힘 또한 자신의 심장을 찾는 노력에서 시작하겠지요. 나는, 우리는 어
떤 심장을 벼리며 글을 쓰고 있을까요?
“동시”에서는 잡지가 숨을 쉰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글자와 여백이 엮는
공간감이 팽팽하던 생각의 끈을 느슨하게 풀어놓습니다. 그 느슨함 사이로
자유로운 시어들이 끼어듭니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이를 안타까워
하는 마음, 할머니가 주는 밥을 다 받아먹는 아빠를 만납니다. 어떤 나무는
바람을 들어주고요, 낙서도 마주보면 달리 보이거든요. 팝콘이 터지듯 생성
된 별들과 기억을 잃은 할머니도 여전히 할머니인 것처럼 우리 일상은 흥미
진진한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꽃에서 열매로 바뀌는 밤을 관찰하는 시선과
엄마와 노을을 함께 나누고픈 어여쁜 마음도 엿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마
주하는 전쟁과 관련한 단어들을 시어로 엮고, 늦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조
목조목 이야기하는 아이도 만납니다. 자연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에 미
소를 짓고, 이야기를 좋아하는 별난 늑대도 만납니다. 세상 무엇보다 앞머
리가 소중한 열두 살과 할머니 집에서 발견하는 사물과 인간을 조금 특별
한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빗소리에서 나를 발견하고, 아빠와 사랑한다는 말
을 주고받는 아이를 봅니다. 지칭개로 여러 이야기를 엮고, 다리를 잃은 메
뚜기와 보경이도 소개받았습니다. 코브라는 잠자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비 오는 날 풀잎에 앉은 잠자리를 응원하는 마음까지 읽었습니다. 이제 도
시에서는 보기 힘든 제비, 소나무와 칙넝쿨은 쿡쿡 웃음을 불러일으킵니다.
매번 느끼지만, 동시로 드러내는 세상은 넓고 깊습니다. 그만큼 멋진 일들
이 벌어진다는 의미겠지요.
“동화”는 세 편을 실었습니다. 결이 다른 세 편이 엮어내는 이야기는 우
리를 다른 세상으로 이끕니다.
김경미의 「비 오는 날 자전거」는 비 오는 날마다 자전거를 타는 이상한
사람과 갑자기 내린 비로 빗속에서 자전거를 타는 두 사람이 만납니다. 소
문만 무성하던 두려운 존재와 만난 뒤,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문득 비 오
는 날 다른 자전거들은 어떨지 궁금해집니다.
윤지은의 「엄마를 찾습니다」에서는 일 년 전 엄마가 떠난 뒤, 아빠와 함
께 자연휴양림으로 온 미주가 엄마를 잃은 새끼 산양과 만납니다. 엄마와
헤어진 산양을 돕기 위해 엄마 산양을 그리는 미주의 손길과 마음이 따듯
합니다. 저도 새끼 산양과 이야기하고 싶네요.
하신하가 쓴 「노몬의 북소리」는 지구에서 보낸 정보를 받은, 또 다른 행
성인 노몬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사람들을 억누르며 자신의 권력을 지키
려는 자와 이에 맞서고자 용기를 내는 아토를 만납니다. 이들에게 다가올
미래가 자유롭기를, 노몬에서 울리는 북소리가 희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청소년소설”은 두 편입니다.
김유경의 「바디 렌탈 센터」에서는 로봇 제조 공장의 관리자로 근무하던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남은 태이와 남이 이야기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한쪽
다리의 뼈 굵기가 얇아 기계로 대체해야 하는 남이와 교체 비용 때문에 고
민하는 태이가 등장해요. 태이는 비용을 벌기 위해 바디 렌탈 센터에서 아
르바이트를 합니다. 의식을 복사하고, 남에게 몸을 빌려주는 아르바이트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집니다.
남유하의 「왕따 박물관」에서는 잠기지 않은 옥상을 찾는 ‘나’가 등장합
니다. S 일당으로부터 왕따를 당하는 ‘나’는 옥상문이 열린 곳으로 들어갔
다가 ‘왕따 박물관’이라는 천막을 발견합니다. 왕따 박물관이라뇨, 거기선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기획”은 ‘여름 대토론회’ 발제문을 다룹니다. 이번 대토론회 주제는 ‘생
성형 AI와 어린이·청소년 문학의 미래’입니다. 여름 대토론회는 잡지가 나오
기 전에 열렸습니다. 따라서 이번 호에는 아주 빠듯하게 편집할 수밖에 없
었다는 점을 밝힙니다.
강수환은 「지금부터 로봇들과 대화해 보시지 그러세요? - 생성형 AI 시
대의 독자」라는 화두를 던집니다. 문자를 독약과 묘약의 관점에서 바라본
다면, 디지털 미디어에서 생성형 AI는 묘약일까, 독약일까? 또는 어떤 경계
에 있을까? 생성형 AI가 상용화되는 시점에서 독자는 어떤 지점인지 생각
할 거리를 던집니다. 로봇과 대화하는 독자가 될 우리는 어떤 질문을 던질
까요?
최배은은 「우리가 적응해야 할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생성형 AI
의 시대, 어린이·청소년 문학에 제기된 문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집
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바라보는 관점부터 미래까지, 고민할 부분은 열려
있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는 어떤 미래로 나아갈까요? 그 질문을 주고받을
여름 대토론회는 흥미진진했습니다.
대토론회 토론은 유영진, 이재복 두 분이 맡았습니다. 다소 어려운 주제
일 수도 있지만, 궁금했던 점을 같이 풀고자 했습니다. 현장 정리는 김온이
맡아 올렸습니다. 자리에 같이 하지 못한 분들도 현장 분위기를 충분히 느
끼길 바랍니다.
“어린이와 함께”는 「어린이 눈으로 본 대화형 인공지능」이라는 주제로 진
행했습니다. 한 번도 대화형 인공지능을 사용해 본 적 없는 어린이들이 처
음으로 챗GPT를 사용합니다. 각각 곤충 채집, 게임, 동물을 좋아하는 세
어린이입니다. 어린이가 어떤 질문을 하는지,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무엇인지 같이 살펴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삐뚤빼뚤”은 어린이 목소리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꼭지입니다. 빗소리
와 튀김, 바쁜 밤, 물 먹기 싫은 돈까스, 돌을 찾는 아이 등 기발하고 재밌는
상상력과 마주합니다. 어쩜 이런 생각을 했을까, 미소를 지으며 읽습니다.
최근에 책장 정리를 하다가, 초등학교 때 쓴 글을 발견했습니다. 오래 전 글
이라 종이가 누렇게 변했지만, 제 글이 최초로 인쇄된 흔적이었어요. 발표
한 어린이들에게도 “삐뚤빼뚤”에 실린 글이 오래 간직할 수 있는 추억이 되
길 바랍니다.
“이야기는 어디에서 오는가”는 선안나의 「동화를 쓰는 고갱이 마음」을
실었습니다. 이 글에서 작가로 자기 목소리를 꾸준히 내려는 노력을 엿볼
수 있습니다. 어렵고 힘든 이야기라도 어린이에게 꼭 해야 할 이야기라면,
그 길을 마다하지 않아야 하는 마음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저 또한 어떤 작
가로 살 것인지 고민하면서 읽었습니다.
“목소리”는 김옥진의 「너도 그랬단다」에서는 조산사로 맞이하는 출산 과
정을 담담히 풀어냈습니다. 자연 출산으로 아이를 낳는 산모와 가족들, 조
산사가 한마음으로 어린 생명을 기다리는 과정에 심장이 쫄깃했습니다. 아
이가 오는 순간은 새로운 우주가 열리는 것처럼 대단한 일이죠. 우리는 이
런 놀라운 사건을 통해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그러니 ‘너도 그랬단다’는 ‘나
도, 너도, 우리도’ 그런 인간이라는 사실은 똑같겠지요.
“서평”에서는 책 세 권을 소개합니다.
먼저, 김혜연이 「함께 살아가는 삶 안에서」 라는 글에서 『콩 세 알 팥 세
알』을 읽은 소감을 풀어놓습니다. 이 책에서 따뜻한 마음과 배려, 나누고자
하는 정을 발견하는 과정을 털어놓지요. 책에 숨겨놓은 의미를 찾는 작업은
늘 흥미롭답니다. 더 나아가 나만의 ‘세 알’을 돌아봅니다.
신희진의 「마음이 큰 사람」에서는 『백점 백곰』을 소개합니다. 항상 백점
을 맞던 고미는 한 문제를 틀려서 고민합니다. 그러다 길을 떠나면서 괜차
나 마을에서 할머니를 만나죠. 이제 고미는 또 다른 모험을 떠납니다. 모험
이 끝난 뒤 고미는 어떤 모습일까요?
한미선의 「우리는 무엇을 감추기 위해 주먹을 내미나」에서는 『왕주먹 vs
말주먹』을 소개합니다. 왕주먹을 쓰는 태오와 말주먹을 날리는 선우는 친
구들에게 뭔가를 감추고 싶어서 주먹을 내세웁니다. 그런 두 사람이 치고받
고 싸우는 과정에서 누구를 편들 수 없을 만큼 팽팽한 긴장이 맴돌죠.
“그림책의 그림을 읽다”에서는 「마음을 그리는 것, 그림을 마음에 담는
것」이라며 고정순이 이세 히데코가 글과 그림을 쏟은 『그린다는 것』을 읽
습니다. 이번에는 작가에게 직접 편지를 쓰는 형식이네요. 글쓴이가 이 책
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보입니다. 그리고 이 글을 이세 히데코 씨가 읽기를
바랍니다.
“편집후기”에는 저 못지않게 어렵고 힘든 여름을 보낸 편집부원의 마음
을 담았습니다.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듯이, 우리 모두에게도 여름 동안
얻은 남다른 시선을 가을에는 열매로 키우길 바랍니다.
가을호를 준비하면서 여러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특별히 이번 호에는
동시와 동화에서 신인이 탄생했습니다. <어린이와 문학>이 ‘신인’이라는 표
시를 따로 하지 않는 이유는, 이 잡지에 글을 싣는 그 순간부터 동등한 ‘작
가’이기 때문입니다. 더 많은 분들이 이 잡지를 통해 글동무로 우리 곁에 오
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어린이와 문학>에서는 과월호를 판매하고 있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어린이와 문학> 카페에 들러주세요. 그럼 다음 호로 만날 때까지
몸도 마음도 건강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 김하은 (본지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