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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가현각 증도가] ⑤ 창칼 만나도 독약 받아도 태연하리라 “강과 바다를 돌아다니고 산천을 건너서 스승을 찾아 도를 구하고 참선을 했다. 조계의 길을 알고부터는 생사와 관계가 없는 것임을 분명히 알았다.” 현각자신의 구도행각을 말한다. 그리고 마침내 육조를 만나 개오(開悟)했음을 뜻한다. ‘참선’이라는 말이 가장 먼저 쓰인 예가 이 노래부터다. 참선은 ‘스승에게 나아간다’, ‘선을 하다’는 의미. 현각은 참선한 끝에 조계의 육조를 상견하고 여래선을 깨달은 이후, 자신은 미혹된 생사와 관계가 없다는 것을 명료히 알게 된다.
여기서 생사는 ‘태어남과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미혹한 인생’이다. 자신은 살고 있지만 산다는 그것을 모르는 미혹함이다. 그 미혹이라는 화두가 마침내 깨쳐진 것이다. 생과 사는 엄연히 있지만 생사를 떠나 열반(無生)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생사의 체가 열반이라는 것임을 몰록 알았다.
선장(禪匠)은, 생사를 분명히 밝히는 것이 불법의 일대사라고 한다. 어느 수좌가 혜현에게 ‘어떻게 해야 생사를 해탈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을 때, ‘내 처소에는 생사가 없다’라고 했다. 생사는 있지만 나는 생사에 관계없이 살아간다는 것이다. 소위 무생의 생을 체득한 것, 즉 ‘무생법인(無生法忍)’이다. 태어나기도 죽기도 하는 것은 ‘자아’의 세계이지만, ‘불생불멸’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세계다. 무생은 생사불이이며 이 진리의 깨침이 불가의 일대사 인연이다.
“걸어도 선, 앉아도 선. 말하고 침묵하고 움직이고 조용해도 본체는 편안하다.
현각의 수행 자세를 노래한 것이다. ‘행주좌와 어묵동정이 바로 선’이라는 구절은 선가에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일상생활이 선이라는 것은 천태의 ‘사종삼매행(四種三昧行)’ 즉 모든 행위가 삼매라는 내용과 같은 맥락이다. 참선수행중 서천 이십사조 사자(師子)존자가 미라쿠시왕의 칼에 절명했다던가, 달마대사가 독약을 받고 죽었다는 전설, 또한 『금강경』에 나오는 구절이지만, 부처님도 무한한 오랜 세월동안 인욕수행을 거듭해서 ‘성불’하였음을 예로 하여, 현각자신은 사위의(四威儀)를 갖추고 무생법인을 구족한 인욕선자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조론(肇論)』을 쓴 승조법사는 천자의 어명을 거역하여 사형을 받고 남긴 유명한 시가 있다. ‘사대는 원래 있지 않고 오온은 본래 공하다. 번쩍이는 칼 앞에 놓인 머리, 마치 봄바람을 자르는 것 같아라.’ 무생의 자기를 나타낸 노래다.
“몇 번이나 태어나고 몇 번이나 죽었던가. 생사의 되풀이 아득하여 그침이 없었다. 홀연히 깨쳐 무생을 알고부터는 모든 영욕에 어찌 근심과 기쁨이 있을까.”
생사는 유유히 되풀이 하였지만 이는 중생의 업생 때문이 아니라 깨달아보니 보살의 서원이 지속한 것임을 분명히 알았다는 것. 육조를 만난 이후, 무생의 체를 체득한 현각은 영욕으로 일어나는 근심과 기쁨은 바로 몽환(夢幻)이었음을 안 것이다.
“깊은 산에 들어가 고요한 곳(蘭若)에 머무니, 높은 봉우리 깊은 계곡, 낙락장송아래다. 한가로이 고요히 좌선하는 산승, 한적한 안거에는 스산한 바람만이 인다.”
‘산거낙도(山居樂道)’의 노래다. 현각의 완전히 탈속한, 고절(孤絶)한 은자(隱者)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임제는 자신을 ‘산승’이라고 했고 현각은 ‘야승가(野僧家)’라고 했다. 같은 의미이지만 야승은 시골에 사는 승려다. 어떠한 것에도 구애됨이 없는 승려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어느 수좌가 백장에게, ‘어떤 것이 기특한 일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독좌대웅봉(獨坐大雄峰)’이라고 했다. 지금, 여기에, 홀로 이렇게 앉아 있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기특한 절대 가치가 있는 일이라는 뜻이다. 지금 이렇게 존재하고 있음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말이다. 현각은 바로 이같은 자신을 노래한 것이다. 혜원 스님 [출처 : 법보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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