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17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나 때문에” (루카 9:24)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잃거나 박해받거나 미움을 받는 일은 무엇일까? 실제로 예수님은 당신 소명대로 살다가 죽임을 당하셨다. 당신 고향에서 거부당하기도 했으며(루가 4:23, 200주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마태 27:22)라며 박해받으셨다. 대제사장을 비롯하여 율법학자들, 바리사이파 사람들 그리고 저잣거리의 왈패들까지 말도 안 되는 일로 트집을 잡는가(마태 12장 1절 이하) 하면 모욕하며 천대하였다. 도대체 무엇이 예수님에게 이런 일을 당하게 하였을까? 예수님은 무슨 일로 미움을 받고 박해받아 십자가형에 죽임당하시게 되었던가? 만약 우리도 예수님을 따르게 된다면 당연히 받게 될 박해와 죽임인데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파견하시기에 앞서 이미 알고 계셨나 보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 (요한 15:18)
예수님은 기존의 질서에 대항하셨다. 율법이 질서 지어 놓은 세계에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새 질서를 가져오셨다. 율법의 질서에 편승한 수많은 기득권 세력에겐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하느님의 뜻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으면서 자기들이 율법에 따라 세운 질서를 흔드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불손한 자라고 고발한다. 작금의 우리 사회와 어쩌면 이렇게 똑같은지 여기에 무슨 의미가 숨어있는 듯하다. 이 역사적 충돌은 율법의 하느님에서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으로 재구성되어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러한 변화는 ‘불안’을 일으키는데 특히 기득권에 속한 자들일수록 변화를 거부한다. 그들은 여러 가지 형태로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는데 그 수단과 방법이 교묘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세속의 자녀들이 자기네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약다.”(루가 16:8, 공동번역)라고 하셨다.
이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루카 9:23) 박해와 죽음을 각오할 수밖에 없음이 분명해졌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분명해진 것이다.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서라면 권력자 곁으로 다가가야 할 것이다. 권세를 누리며 살고 싶다면 세상의 권력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그런 것들로부터 등을 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일까?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을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존재 자체가 자신들이 어떤 사람인지 드러내 주는 거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자기들처럼 세속적이지 않아 자기들의 세속적인 속내가 노출되는 것을 꺼리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참된 진리’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에 관심이 있다. 방어적인 사람은 ‘참된 자아 발견’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내밀한 모습’이 감춰질 수 있을지에 관심이 있다. 참되다고 사람들이 좋아할까? 결코 ‘참되다’라는 이유만으로 환영받지 못한다. 사람들은 ‘참된 것’보다 ‘내 편’을 더 좋아한다. ‘올곧은 사람’이라 하여 좋아할까? 아니다. 올곧음이 불편하여 외면당하기 쉽다. 참된 자아를 정립한 사람은 진리를 쫓겠지만, 방어적 자아에 멈춘 사람은 ‘의존 대상’을 쫓는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가 겪게 될 세상을 아셨다. 세상을 아셨기에 세상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당신이 가는 길에 어떤 고통과 수난이 기다리고 있는지 아셨다. 그러기에 당신의 뒤를 따르겠다는 우리에게 매우 비통한 마음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루카 9:24)
그리고 세상이 “너희보다도 나를 먼저 미워했다는 것을 알아라.” (요한 15:18)
건강한 자아를 갖춘 신앙인에게는 크게 문제가 아니지만, 자신을 방어해야 할 심리적 기제(complex)가 있는 자아의 신앙인에게는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 목숨을 거는 일인데 내적 자아 상태는 ‘방어적’이라니, 평소에 별 갈등이 없을 때는 잘 기능하는 신앙인처럼 보이지만 갈등과 스트레스(시련과 박해)가 닥치면 곧바로 ‘방어적’이 되고 말 것이다. 방어적인 자아의 신앙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자신을 대변하는 신앙으로 변질하기 쉽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러한 변질을 정작 자신은 모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방어’는 무의식적, 조건적 반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왜곡된 신앙에 빠지게 되니 그의 영혼이 어찌 위험하지 않을 수 있을까?
오늘은 한국천주교회에 매우 빛나는 기념일이자 축제일이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이기 때문이다. 사제와 평신도 이름을 앞에 나란히 세운 것도 한국천주교회의 특별함을 잘 나타내주고 있으며 103위의 성인이라는 대단히 많은 성인을 모시게 된 것도 매우 특별함이라 생각한다. 103위 이외에도 무명의 수많은 순교자가 하늘나라에 계시겠지만 한편 이렇게 많은 그리스도인의 순교라고 해서 순교가 쉬운 일이었을까? 우리는 모르지만 순교하지 못하고 흩어지고 저버리고 숨어버린 수많은 그리스도인을 생각하면 103위는 매우 주옥같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결심했으나 그 결심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한 수많은 그리스도인, 그들은 우리보다 신앙이 약해서 그랬을까? 그들은 우리보다 영성이 약해서 그랬을까? 아니면 우리는 지금 그러한 박해가 닥친다면 그들처럼 흩어지지 않고 저버리지 않고 숨지 않고 순교할 수 있을까? 지금 이러한 논의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 순간’이 닥치면 우리는 이성적 사고만이 아니라 편도체의 지배를 받는 몸의 감각과 내면의 감정에 의해서 반응하게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 순간’에 우리는 의지적으로 행동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게 의지적인 행동, 신앙의 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본성적 차원에서도 건전하고 건강함을 유지하지 않으면 절체절명의 순간에 우리 몸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방어적 반응’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순교자들이 뛰어난 것은 인간으로서 자신 내면의 ‘방어적 본성’까지도 통제할만한 신앙심을 품고 있었고 그 신앙에 따라 행동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의지대로 선택한 행위를 한 순교자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지혜 3:4) 순교자들의 행위야말로, 그들의 삶이야말로 하느님께서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지혜 3:6)에 합당하다 하겠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누가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8:34)라고 말하며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8:35)라고 선언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8:37)라고 말하며 그리스도인은 무엇으로 사는 사람들인지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