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도서소개
활발한 창작 활동으로 우리 시단을 이끌고 있는 맹문재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인 『기룬 어린 양들』이 <푸른사상 시선 33>으로 출간되었다. 전태일 열사 이후 노동하다가 세상을 뜬 노동자들의 삶의 의미를 시대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에서 조명하고 있다. 65편의 시를 통해 1970년대 이후의 노동 열사 68위(位)를 모시고 있는데,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이 시대에 우리가 맞서 추구해야 할 인간 가치를 새롭게 인식시킨다.
맹문재의 시집에서 두드러지는 형식은 전기나 평전과 같은 논픽션 양식이 차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시집에 수록된 모든 시는 실제 노동운동 과정에서 산화해간 열사들의 삶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이들 시들은 일종의 논픽션 양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시가 일반적인 전기나 평전 양식과 구분되는 것은, 그의 시에서 복원되고 있는 인물들이 모두 주류적인 지배 역사 서술에서 배제되고 추방된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일반적인 전기나 평전은 주로 주류적인 지배 역사 서술에서 중요한 위상을 지닌 인물에 대한 서술이 주를 이룬다. 이는 결국 역사의 주체를 소수 권력층으로 한정짓는 효과를 낳는다. 이 과정에서 정작 대문자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하위 주체들의 목소리는 공백으로 남게 된다.
맹문재의 이번 시집에 수록된 작품들이 형식적인 측면에서 전통적인 전기나 평전 양식을 차용하고 있으나, 이들 양식과 결정적으로 변별되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그는 한국 현대사에서 소외되고 추방된,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사회 재편의 폭력 속에서 다시 복원되어야 할 인물들의 목소리를 다루고 있다.
정신병원에 입원한 아버지와 원목공장에 다니는 어머니를 구하려고 중3부터 공장에 나갔네
도자기와 타일을 만드느라 손가락이 깨졌네
화공약품 냄새가 덮쳐 두통을 앓고 코피를 쏟다가 반신불구가 되었네
사장은 글자를 모르고 큰소리를 모르는 그녀의 어머니를 불러 고혈압으로 쓰러졌다고 속였네
그녀의 산재 처리는 사고도 없고 신문고도 없는 연극으로 끝났네
- 「김성애」 전문
솔직히 고백하건대, 이 시를 읽기 전까지 나는 ‘김성애’가 누군지 몰랐다. 대문자 역사에 그녀의 이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삶이야말로 이른바 ‘한강의 기적’ 이면에 가려진 우리 현대사의 어둠이 아닌가? 대문자 역사는 언제나 지배층의 역사일 뿐이며, 하위 주체의 역사는 그 이면에 숨겨져 있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만약 시적 윤리가 공적인 층위에서의 경제 성장 지표로 환원되지 않는 그 이면의 낮은 목소리를 복원하는 것이라면, 위의 작품이 시적 윤리를 수행한 중요한 사례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대문자 역사에서 지워진 ‘김성애’의 삶을 일대기 형식으로 풀어내면서 그녀의 삶에 새겨진 하위 주체의 목소리를 복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여전히 시적 윤리가 놓여야 할 자리가, 가장 낮은 곳의 목소리가 존재하는 바로 그곳이라면 말이다.
맹문재의 시들이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시가 추도문이나 유서를 비롯한 하위 주체 스스로의 목소리를 담은 텍스트를 삽입하여 낮은 목소리 그 자체를 발화하도록 만다는 미학적 모색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민중시가 진정 하위 주체의 삶을 재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시적 내용의 측면뿐 아니라 그 형식적 측면에서도 하위 주체의 목소리를 복원하기 위한 실험과 모색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럴 때에만 지식인-엘리트의 관념적 급진성을 극복하고, 하위 주체의 ‘낮은 목소리’를 복원하는 형식, 이를 통해 하위 주체를 시적 화자로 설정하는 미학적 형식의 고안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간과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하위 주체의 목소리를 왜 복원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그것이다. 단순히 대문자 역사에서 배제되고 추방된 이들의 삶을 재현해야 한다든가, 혹은 시적 주체를 확장시켜야 한다든가 하는 진술은 지나치게 관념적이어서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 오히려 우리가 직시해야 할 것은 하위 주체의 목소리를 통해 시적 화자의 목소리가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가에 대한 정직한 답변이다. 당연하게도 사후적으로 이들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시인의 시 쓰기 작업은, 곧 하위 주체의 목소리와 시인의 문제의식이 마주쳐서 만들어내는 대화적 공간(바흐친)의 창출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2. 저자약력
맹문재
1963년 충북 단양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문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1년 『문학정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먼 길을 움직인다』 『물고기에게 배우다』 『책이 무거운 이유』 『사과를 내밀다』가 있다. 전태일문학상, 윤상원문학상, 고산문학상을 받았다. 현재 안양대 국문과 교수로 있다.
3. 도서목차
■ 시인의 말
제1부
전태일
김진수
김경숙
제2부
안종필
김종태
박종만
박영진
변형진
표정두
황보영국
이석규
김수배
김성애
오환섭
제3부
김장수
오범근
최윤범
장용훈
문송면
성완희
송철순
이문철
김윤기
최완용
김종수
이상남
조정식
이상모·박진석
이종대
강현중·김종하
강민호
이영일
최태욱
최동
박성호·원태조
김봉환
박창수
윤용하
석광수
유재관
김처칠
권미경
박복실
제4부
조경천
서영호
김주리
최성묵
임종호
양봉수
박삼훈
조수원
김시자
유구영
홍장길
제5부
최대림
최명아
김윤수
김종배
이옥순
김순조
안동근
김기욱
유순조
한경석
배달호
해설 이것이 왜 시가 아니란 말인가?-장성규
4. 추천의 글
노동자의 죽음은 모두 타살이라고 쓴 적이 있다. 열악한 환경에서 강요된 노동을 해야 하는 기계 노동 자체가 살아 있는 생명의 활동이 아닐 뿐더러, 정상적인 수명을 다 누리지도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다. 이러한 현실에 저항하다 목숨을 잃은 사람들, 의문사든, 자결이든, 투신이든, 분신이든 극단적인 탄압 속에서 이루어진 죽음은 모두 사회적·정치적 타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 익숙하면서도 낯선 시집을 받아들고 혼란에 사로잡혔다. 그가 신중하게 쓴 시가 왜 시 같지 않은가? 우리 시단에 뛰어난 시적 성취로 많은 주목을 받아온 시인에게 무슨 시적 억하심정이 있는 것일까? 『유심』에 연재된 시들을 빠짐없이 읽어왔으나, 다시 시집을 두 번 더 읽은 후에야 그 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시집에 실린 65편의 시는 ―시인이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1970년대 이후 이 땅의 노동 열사 68위(位)의 처절한 비문(碑文)이 아닌가! 이 시대 성장 신화의 제물로 바쳐진 기룬 양들의 뼈와 분노와 슬픔을 한 점 한 점 수습하여 시의 집에 안치하고 묘역을 조성한 것이 아닌가! 시가 이 시대에 무엇을 애도해야 할 것인가? 맹문재 시인이 아니고 누가 이런 방식으로 질타할 수 있는가? ‘오든’의 시가 불현듯 떠오른다. “시계를 멈추어라/전화기를 뽑아라”. 이 시집을 읽는 동안 “개들이 짖지 못하게 하라”.
- 백무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