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완의 '서장'통한 선공부] <1> 서장 (書狀)
부추밀에 대한 답서(3)
선은 생사없는 청정심을 깨닫는 것
"편지에 말씀하시길, '초보자가 잠시 고요히 앉으니 공부가 저절로 좋아진다'고 하시고 또 말씀하시길 '감히 고요하다는 견해를 망녕되이 짓지 않는다'고 하시니, 이는 부처님의 '사람이 자기의 귀를 막고 크게 소리치면서 남이 듣지 않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는 말씀처럼 스스로 장애를 만드는 일일 뿐입니다. 만약 생사심(生死心)이 부수어 지지 않으면 매 순간 순간이 어둡고 어리석어서 마치 아직 혼이 흩어지지 않은 시체와 같습니다. 그러니 다시 무슨 부질없는 공부를 하여 고요함을 이해하고 시끄러움을 이해하겠습니까?
{열반경}에서 '광액(廣額)이란 백정은 소 잡는 칼을 놓자 바로 깨달았다'고 하였는데, 그가 어찌 고요한 가운데에서 공부를 해왔겠으며 그가 어찌 초보자가 아니겠습니까? 그대가 이것을 본다면 분명 그런 것이 아니라고 여기고는, 그는 옛 부처님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지 오늘날 사람은 이런 역량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만약 이렇게 생각한다면, 스스로의 뛰어남을 믿지 않고 기꺼이 자신을 못난 사람이라고 여기는 짓입니다.
우리 선종(禪宗)에서는 초보자냐 오래 공부한 사람 이냐를 따지지 않으며 또한 고참이나 선배를 귀하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만약 참으로 고요함을 바란다면 반드시 생사심(生死心)을 부수어야 합니다. 애써 공부하지 않아도 생사심만 부서지면 저절로 고요해집니다. 옛 성현이 말씀하신 고요함이라는 방편은 바로 이렇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만, 말세의 삿된 스승들은 옛 성현이 방편으로서 하신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옛 스님의 글 가운데에는 선을 언급하면서, "밖으로 경계에 따라가지 않고 안으로 마음에 헐떡임이 없어야 한다"라거나 "마음이 마른 나무나 돌 같이 되어야 한다"는 등의 언급이 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모두 방편의 말이므로 문자그대로 이해하여서는 안된다. 이 방편의 말을 문자그대로 이해하여 그렇다고 여긴다면, 그것이 바로 경계를 따라 마음을 헐떡이는 것이며 나무나 돌 같이 되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고요함과 시끄러움을 나누어 취사선택하는 분별심이기 때문이다.
번잡한 세간을 벗어나 조용한 곳에 고요히 앉는 것을 즐겨하면서 그것이 바로 선공부의 효과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대체로 이러한 잘못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고요하고 한가함의 즐거움에 빠져 그것을 탐닉하면서도, 스스로는 아무 견해도 짓지 않는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들의 앞에 생로병사(生老病死)나 흥망성쇠(興亡盛衰)라는 피할 수 없는 인생의 문제가 현실로 닥쳐오면, 그들의 고요함은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공부하지 않은 사람과 다름없는 고통을 당하고 만다. 그 까닭은 이들의 공부가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다.
선이란 어떤 특정한 경계에 머물러서 그것을 즐겨 취하고 그와 다른 것은 버리는 그런 것이 아니다. 선은 그렇게 사량분별하고 취사간택하는 생사심(生死心)의 실상(實相)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생사심이란 무엇인가? 삶과 죽음에 머물러 있는 마음이요, 삶과 죽음을 분별하는 마음이요,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마음이다. 이러한 마음 속에서 제 좋아하는 대로 따라다니는 것은 마음을 닦는 공부가 아니라 오히려 마음에 오염되는 짓이다. 이런 식의 공부는 아무리 오래 하여도 집착만 키울 뿐이다.
실재로는 아무리 잡념이 많고 아무리 집착이 심한 마음이라 하더라도 마음 그 자체는 아무 잡념도 없고 아무 집착도 없는 마음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잡념이나 집착에 머물러 있으면 그것들은 실재하는 것으로 되어서 번뇌를 만들어내지만, 마음의 실상을 알면 잡념이나 집착은 다만 마음의 움직임으로 나타나는 허깨비일 뿐이고 그저 늘 변함없이 깨끗한 마음일 뿐이다.
그러므로 선의 공부란 사량분별하고 취사선택하는 생사심을 버리고 고요히 가라앉히는 것이 아니라, 그 생사심의 실상을 파악함으로써 생사심이 본래 생사(生死) 없는 청정심(淸淨心)임을 깨닫는 것이다.
김태완/ 부산대 강사.철학
[출처 : 부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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