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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25(일) 루손 ~ Hobihu 마리나 : 태평양입니다. 태평양을 만났습니다!
오전 2시. 제네시스 주변이 온톤 방카 밭이다. 게다가 대형 상선도 지나다닌다. 인터넷으로 루손 해협의 바람을 체크하려고 필리핀 루손섬에 5마일 거리로 붙었는데 완전 혼돈의 카오스다.
오전 5시. 맞바람 11노트. 선속 4.7노트. 337 해리 남았다. 여명이 밝아오고 있다. 필리핀에 바짝 붙어서 항해하니 인터넷이 된다. 마음 무거운 소식만 한 가득이다. 답답하다. 그나마 루손 해협 바람 예보 데이터를 받아서 다행이다. 예보 상으론 화요일 야간에 강풍이다. 그래도 닥쳐봐야 알 일이다. 코타키나발루에서 지금까지 윈디 예보가 거의 맞지 않았다.
윤태근 선장님께 어제 바람에 관해 카톡으로 질문해 두었다. 다행이 인터넷이 끊기기 전 연락이 왔다. ‘보통은 갈만한 바람입니다.’ 명료하다.
메인2단 축범
우현 콕핏 파도막이 천막설치
밥 이틀 분 해놓기
선실 내부정리
구체적인 준비 사항까지 알려 주셨다. 더욱이 ‘본인 같으면 간다.’ 는 말에 용기를 얻는다. 나 역시 바로 가기로 마음먹었었다. 그래도 경험 많은 누군가의 동의가 필요했다. 윤태근 선장님은 내 용기가 찌그러진 풍선 같을 때, 반드시 명쾌한 의견을 주신다. 감사합니다. 아덴만 대탈출 항해 때도, ‘지금 가야 한다.’ 고 용기를 주셨다. 늘 너무 감사하다.
오전 6시. 주변에 방카가 많다. 밤새도록 필리핀 어민들이 방카를 타고 조업했나보다. 바기오를 벗어나니 방카도 사라지고, 인터넷도 끊긴다. 그런데 계속 노고존 10노트 역풍이다. 황당한 일이다. 역풍은 예보되지 않았다. 피항처로 준비해 두었던 San fernando 앵커리지도 이미 지났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오전 7시. 햇살이 올라오니 곧장 뜨거워진다. 뭐든 챙겨 먹자. 월, 화 이틀간은 제대로 챙겨 먹기도 어렵다.
오전 8시. 맞바람에 역조류다. 제네시스는 4.6~4.9노트로 힘겹게 대만으로 올라가고 있다. 큰 선박들이 많이 다닌다. 주요 항로인가 보다. 필리핀 루손 섬을 벗어나면 그때는 대만으로 가는 배들만 이 항로로 가려나? 아니다. 어디선가 대만 왼쪽이 주된 항로라고 하던데. 그럼 Hobihu 마리나 앞까지도 큰 배들이 많이 다닌다는 의미 아닌가? 레이더 견시를 많이 해야겠다.
루손 해협(Luzon strait : 루손 섬 북부에서 타이완 남단까지) 에 28~32노트까지 돌풍이 있을 예보다. 메인 30%, 집세일 40% 로 축범할 거다. 지나치게 바람이 강하면 아예 세일을 다 접고 기주로 가자. 강풍에 배를 상하게 할 순 없다. 상황을 잘 살피겠지만, 나는 세계일주 세일러가 아니다. 배를 사서 딜리버리 중이다. 안전이 제일.
오전 9시 50분. 집세일을 110% 편다. 어차피 약풍이다. 선속 5.3~5.4노트. 313해리 남았다. 디젤 60리터를 더 넣는다. 벌써 덥다. 해지기 전, 100리터 더 붓자. 루손 해협에 가면 아무 것도 못 할 거다. 그저 아무 것이나 꽉 붙잡고 버티는 것 밖에.
오후 12시 15분.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른다. 어제 밤 방카 때문에 졸지도 못하고 견시를 했다. 오전 내 계속 후끈거리는 열기를 느끼며 잠에 빠져 있었다. 대만도 이러면 큰일이다. 더워도 너무 덥다. 계속 수건으로 땀을 훔친다. 몇 번 가드존 알람이 울린 것 외엔, 세상 조용한 항해다. 이번엔 뒷바람이다 그러나 풍속은, 2~4노트. 운항에 방해만 안 되지 별로 도움은 없다. 선속 6.0노트. 순조류다. 이대로만 가도 ETA는 화요일 오후 2시다. 일몰 전 도착이다.
화요일 오후 6시 이후부터 진짜 강풍이니까, 화요일 오전 중에만 도착할 수 있다면, 고생을 덜 할 거다. 순조류야 도와줘! 필리핀 육지와의 거리는 30해리지만 수평선 끝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Luzon 섬 Bangar 앞을 지난다. 곧 바다로 튀어나온 Vigan을 지나게 된다. 마지막으로 인터넷을 한 번 더 노려 볼만하다. 하지만 항로와 20 해리 가까이 되는 거리라 기대는 별로다. Luzon strait는 오늘 밤부터 진입이다. 진입 전 디젤유를 한 번 더 보충하고, 잔뜩 축범 하자. 목표는 화요일 오전 Hobibu 도착!
오후 1시. 라면과 식은 밥으로 점심을 먹는다. 멀미가 있는 경우는 누릉지를 불려 데워 먹지만 멀미 없으면 라면이 제일 만만하다. 월요일부터 풍랑이 심하면 뜨거운 것은 못 먹는다. 조리가 위험하다. 찬 것은, 물과 주스, 찬 우유와 시리얼 등이 있다. 몇 끼 정도는 그런 것들로 때워야 한다. Candon 앞바다 30해리 지점을 통과중이다. 방카가 여기저기 나타났다. 제네시스 주변이 거대한 상선들과 방카들로 어지럽다. 포트 빔리치 5.0 노트, 메인세일 50%, 집세일 110%다. 선속 6.4노트. 291해리 남았다. ETA 27일(화) 오후 1시.
와, 제대로 된 방카도 아니고 뗏목이다. 야자수로 한쪽 귀퉁이에 지붕을 얹었다. 저런 배로 육지에서 30해리, 수심 2,000미터 바다에서 조업 중이다. 대단하다. 주변에 거대 상선들이 지나다닌다. 정말 목숨을 걸고 생선을 잡는다. 누군가의 남편이고 누군가의 애비겠지. 저들의 노동력으로 한 가정이 살아간다. 그들의 조업이 순조롭기를 기도한다.
오후 3시 20분. 풍속 포트 빔리치 5.5노트, 선속 6.8노트. ETA 화요일 오전 8시 20분. 이건 너무 빠르다. 강풍 항해에서 너무 빠르면 야간에 타이완에 도착하고 만다. 그건 문제다. 풍랑 속에 기다려야 한다. 루손 해협(Luzon strait)에서는 최대한 축범해서 6.0 노트를 유지하자. 바람이 약간 불어주니, 더위도 견딜만 하다. Hobihu 까지는 280해리, 1일 17시간 남았다.
날씨도 좋고 바람도 선선하고 파도는 얌전하다. 햇살이 남중국해의 파도에 부서져 반짝인다. Luzon 섬 앞바다는 다시 파라다이스로 변했다. 세일러들이 꿈에 그리던 낭만적인 항해중이다. 조금 덥긴 해도 말이지. 타이완 항해가 끝나면 드디어 한국까지 간다. 한국에 도착하면 어떤 기분이 들까? 아쉬울까? 시원할까? 어쨌든 지나고 나면 지금이 엄청난 추억과 그리움이 될 멋진 순간들이다. 그러니 즐기자. 지금 이 순간 나는 꿈에 그리던 세일링 중이다.
오후 5시 15분. 필리핀에서 마지막으로 제일 튀어나온 Vigan 지역이다. 언덕과 산이 보인다. 거리는 20해리. 인터넷은 되지 않았다. 그럼 이대로 루손 해협(Luzon strait) 으로 간다. 해가 지려면 1시간 30분 정도 남았다. 디젤 100리터를 더 보충하자. 대만에 도착하고도 많이 남을 거다. 바람이 바뀌려고 한다. 풍향이 자꾸 노고존으로 가고 있다. 일단 집세일을 접자. 선속 6.1 노트. 남은 거리 264 해리. 752해리 왔다. 총 구간 74%, 3/4 이다.
오후 6시. 디젤 100리터를 더 추가 했다. 기름통을 정리하는데 선수에서 “쾅” 소리가 난다. 우현을 뭔가 미끄러지며 지나간다. 뭔가 보니 드럼통으로 만든 어구용 부이다. 깃발대신 야자수를 끼워 놓았다. 서둘러 선수로 가본다. 헐 앞쪽에 작은 상처가 있다. 타이완 가서 점검하고 뭐라도 발라 두어야겠다. 주변 바다에 이런 드럼통부이가 몇 개 더 보인다. 이탈리아에서부터 필리핀까지 이런 일은 처음이다. 필리핀 앞 바다에는 냉장고 두 개 크기만 한 스티로폼 어구용 부이가 많다. 하지만 드럼통이라니. 황당하다. 그래도 밧줄이 킬이나 스크루에 걸리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다. 한국 연안에 가면 정치망을 주의해야 한다. 바람이 우현에서 좌현으로 넘어가는 중이다. 아직은 노고존에 머물고 있다. 그나저나 수심 2,000미터에 어구용 부이를 어떻게 고정 시키는 걸까?
오후 6시 20분. 하루 종일 찬물을 너무 많이 마셔서 인지, 위장이 묵지근하다. 컵 스프와 빵으로 저녁식사를 마친다. 간단하다. 뭔가 아쉽지만 오늘 저녁 식사는 이정도로 만족하자. 더위에 지쳐 컨디션이 별로다. 그래도 힘을 내자. 10시간 후면, 강풍 항해가 시작된다.
오후 8시. 초승달이 차올라 이제 거의 반달이 되어간다. 머리 위 북두칠성. 주변의 별들이 또렷하다. 지나온 뒤편 바다엔 구름이 잔뜩 끼어 벼락이 치고 있다. 소리는 들리지 않고 번갯불만 번쩍인다. 앞으로 45해리 더 가면 루손 해협(Luzon strait). 강풍이 시작된다.
2023년 6월 26일 (월) 오전 4시 30분.
루손 해협(Luzon strait).에 들어섰다. 바람은 스타보드 크로스홀드 4~7노트, 선속 7.0노트. 파도가 거칠어졌다. 남은 거리 196 해리. ETA 내일(27일 화) 오전 8시 12분. 이 상태로라면 내일 오후의 광풍을 피할 수 있다. 2시 방향에서 여명이 밝아 온다. 메인세일 60%, 집세일은 접었다. 곧 바람세기에 따라 집세일과 메인 세일을 다시 조정할 거다.
오전 5시. 밥을 넉넉하게 짓는다. 오늘 하루 동안 먹을 3끼다. 바람이 강해지면 식사 준비를 하지 못하게 될 수 있다. 스타보드에 일출이 준비 중이다. 선인장 같이 생긴 구름들이 점차 빨갛게 변해가고 있다. 바람은 노고존에서 스타보드로 움직이며 7.0 노트, 선속 7.0 노트다. 엔진 Rpm은 1,500. 코타키나발루 출항부터 지금까지 그대로다. 연료 소모량은 하루 60리터 정도. 조류나 바람의 영향이 없다면 제네시스의 1,500 Rpm은 6노트 이상의 속도를 낸다.
다운받은 윈디 자료들을 다시 살펴본다. 지금쯤이면 풍속 16노트 바람이 불어야 하는 예보다. 하지만 안 불어 주는 지금이 훨씬 평화롭다. 이대로 타이완까지 간다고 하면 너무 고마운 일이다. 루손 해협(Luzon strait) 에 진입하면서 기도를 드린다. 길고 애끓는 기도다. 두렵다. 나는 두려움 앞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 하는 거다. 실제 강풍을 만나는 것보다는 강풍이 온다는 위협이 더 두렵다. 강풍이 닥치면 맞서 싸우느라, 바다와 뱃사람 사이엔 두려움조차 끼어 들 여지가 없다. 제네시스의 우현에는 필리핀 Laoag City의 산들이 보인다. 수평선 끝엔 필리핀에서 출항한 상선의 거대한 실루엣이다.
일출이다. 카메라를 켜고 “루손해협에서 일출이 시작됩니다. 드디어 태평양입니다. 태평양을 만났습니다.” 라고 말하고는 목이 메어 버렸다. 6개월 만에 만나는 태평양이다. 여러 격렬한 감정들은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한다. 태평양! 이 바다의 끝에 고향집이 있다. 아직 멀기는 하지만 나의 바다다. 항해기간 내내 마음속에 그리던 그 바다다.
오전 6시 20분. 식사를 마치고 빨래도 했다. 파도가 들이치지 않도록 주방 쪽 해치를 닫는다. 풍속은 크로즈 리치 11~12노트로 올라갔다. 메인 세일 40%, 집세일 70%다. 선속 7.3 노트, 너무 빠르다. 엔진 Rpm 1,400. 메인세일 40%, 집세일 60%로 조정한다. 선속 6.7 노트. ETA 화요일 오전 10시 40분. 세일을 조정하는 사이 풍속 17~19노트로 세진다. 윈디의 예보가 맞아 들어가는가 보다.
파도가 1.5 미터 정도로 커졌다. 파도가 커지면 일상의 모든 행동들이 제약된다. 아주 간단한 행동들도 하기 힘들다. 제대로 서 있기조차 어렵다. 선실에 들어가 뭔가 일을 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경력 많은 선장은 그 와중에 식사 준비도 하고 몇 가지 작업도 할 수 있지만 실제로 너무 힘든 일이다. 오늘 항해는 세일 트림만 조정하는 것으로 해야 한다. 하느님, 루손 해협(Luzon strait)을 안전하게 건너도록 도우소서.
오전 6시 45분. 레이더에 파도가 너무 많이 잡힌다. 가드 존 알람이 자주 울린다. Gain을 오토 70으로 한다. 가드 존 #1, #2 모두 On 한다. 제네시스 좌현에 상선 두 대가 지난다. 같은 방향이다. 우현에는 필리핀 쪽으로 다가 오는 상선이 1대 보인다. 파도가 2.0미터 가까이 된다. 윈디에는 1.7~1.8로 나와 있다. 제네시스는 좌현으로 누웠다가 오뚜기처럼 서기를 반복하고 있다. 메인세일 시트를 풀어 바람을 빼준다.
메인 세일 펄링 시트를 본다. 새로 갈은 시트는 두텁고 단단하다. 문득 ‘미리 예비하심’ 이라는 말이 뇌리를 스친다. 이전의 메인 세일 펄링 시트는 낡았지만 못 쓸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잠깐의 풍랑으로 터져 버렸다. 그래서 든든한 새 시트로 갈았다. 지금 거친 루손 해협(Luzon strait)을 건너며 안심한다. 분명히 ‘미리 예비하심’ 이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2미터 파도를 45도로 비스듬히 넘고 있다. 그래도 가끔 펀칭을 한다. 아덴만 항해를 떠올린다. 이런 파도를 3일간이나 곧장 뚫고 항해했다. 펀칭을 계속하며 소말리아 보사소 앞 바다까지 간 거다. 다른 길은 없었다. 그때 탈출하지 않았더라면 지금까지도 지부티에 있었을 지도 모른다. 실로 목숨 건 항해였다. 오만 Hawana 마리나에 도착하고 난 뒤에, 외국선장들이 왜 그렇게 많은 핑거크로스를 보내 주었는지 실감했다. 그런 항해 다시는 못할 거다. 모르곤 했지만 알고는 못한다.
전체 항해 중에 제일 먼저 풍랑을 만난 것은 지중해 그리스 이오니아 섬 앞이었다. 노고존 28~30노트. 배는 전진할 수 없었다. 펀칭이 너무 심했다. 크로즈 홀드로 지그재그 항해를 했지만 바람에 밀려 결국 제자리였다. 할 수 없이 그리스 본토 쪽으로 방향을 잡고 피항 하려는데, 바람이 약해졌다. 아마 4~5시간 족히 고생한 것 같다. 아내는 내게 짜증을 냈고, 리나는 눈만 똥그래져 있었다. 이후 크레타까지는 퍽 낭만적인 항해였다.
지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바람과 파도가 다 맞는다. 이것이 역방향이었더라면 필리핀에서 며칠 대기했어야만 한다. 하늘의 구름은 점점 더 옅어져 간다. 햇살이 세지만 바람 때문에 많이 덥지는 않다. 은총이다.
오전 8시. 순간 풍속이 20노트를 넘나든다. 선실 안쪽의 몇 가지 물건들은 모두 좌현으로 쏠려 있다. 부서진 것은 없다. 배가 한 번씩 들썩일 때마다, 2~3미터를 오르내린다. 이런데 추파춥스를 물고 잘도 버틴다. 책도 보고 있다.
오전 8시 14분. 방랑시인 김삿갓의 야사를 다룬 잡문을 읽고 있다가, 나비오닉스를 보니 선속이 7.4노트를 넘고 있다. 바람이 빔리치 16~18노트 사이. 큰 파도에 흔들리면서도 제네시스는 꿋꿋하게 나아간다. 타이완 Hobihu 마리나는 이제 24시간 남았다. 잡문은 남성 우월주의 와 여성을 성의 대상으로 농단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지금 같으면 형사적인 범죄다. 아마 저자의 여성과 사회 인식이 이 정도에 머물러 있는 것이겠지. 세상살이 상당히 고달플 거다. 잡문을 덮는다. 잡문은 잡문 일뿐.
오전 10시. 집세일을 70%로 편다. 선속을 6.7~7.2 노트로 맞춘다. 이렇게 내일 27일(화) 오전 10시 가량 타이완 Hobihi 마리나에 입항하려는 생각이다. 그럼 20일(화) 10시 출항이니. 정확히 7일 만에 입항하게 된다. 어? 선속 7.4노트? 바람이 빔리치 22노트를 넘어간다. 그러나 평균적으로는 16~18노트다. 목적지까지 160 해리 남았다. 856해리 왔다. 23시간 더 가야 한다.
생각해보니, 강릉 겨울 바다에서 20노트 바람은 흔하다. 나는 매년 겨울 20노트 바람에서 선속 8노트 이상으로 항해하며 놀았다. 다만 1~2시간씩 짧게 체험하는 항해였다. 제주도나 부산, 울릉도 항해도 만만치 않지만, 그중 2022년 제주도 앞바다에서는 정말 혼이 났다. 2단 축범을 했는데도, 새벽 3~4시 사이, 메인 세일 슬라이더가 3개나 깨져 나갔다. 겨울 바다는 공기 밀도가 여름 바다보다 높다. 당시엔 파도도 이보다 훨씬 높은 3~4미터 였다. 부산서 출발할 땐 괜찮았는데 새벽 3시, 제주에 거의 다 가서 풍랑이 덮쳤었다. 지금은 날씨도 따듯하다. 그렇게 생각하니 태풍시즌에 거친 루손 해협(Luzon strait)을 항해하며 마음이 좀 더 편해진다. 나는 올 해 겨울도 더 거친 강릉 바다에서 항해 할 것이다. 필리핀 루손섬에서 타이완 Hobihu 까지는 200해리, 강릉서 울릉도 가기의 두 배다.
오전 11시. 통영 비지터스 2 이준희 선장님의 위성전화다. 현재 위치를 불러 드리고, 바람이 18~20노트, 파도가 2미터, 선속 7.0~7.6노트라고 말씀드린다. 화요일 오후부터 수요일 사이 바람이 더 세진다고 걱정하신다. 그러나 화요일 오전 8시~10시 사이 입항한다고 하니 다행이라며 안도하신다. 오늘도 전화 연결이 상당히 힘 들었다고 하시니, 여러 번 전화 하셔서 한 번 연결 된 걸 것이다. 너무 감사하다. 다른 것 보다 파도 때문에 배가 많이 흔들려 그건 좀 힘들다고 말씀드린다. 오늘 중 또 전화 하신다며 전화는 끊겼다. 힘이 난다. 나와 제네시스의 안전 항해를 위해 이렇게 애써 주시는 분이 계시다. 나는 바른 길을 가고 있나 보다. 이렇게 쓰는 사이 파도가 콕핏을 덮쳤다. 전자 기기들을 닦아야겠다.
오전 11시 30분. 바람이 22노트를 넘나든다. 선속은 7.4~8.0노트. 세일들을 좀 더 축범할까? 고민 중이다. 금방 18노트로 줄어들기는 하니까, 잠시 더 지켜본다. 일단 메인세일을 더 벌려 바람을 더 빼준다. 속도가 계속 8노트를 넘어가면 집세일을 더 줄이자.
정오. 콕핏으로 자꾸 파도가 넘어와서 전자 기기들을 피신시킨다. 선속은 7.7~8.0노트 사이를 오르내린다. 애매하다. 점심 식사를 하기에도 애매하다. 연양갱 하나, 자유시간 하나, 남은 우유로 점심을 대신한다. 파도가 배를 하도 흔들어 대는 통에 정신없다. 전자 기기들과 함께 스프레이 후드 아래 콕 박혀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꼭 배가 뒤질 힐 듯 하다, 복원된다. 요트의 복원력이 대단하긴 하다.
오후 2시 10분. 그래도 뭘 먹어야 한다. 마구 흔들리는 선실로 뭐든지 꽉 잡고 비틀비틀 내려간다. 간신히 오이를 깎고 두반장을 접시에 덜어낸다. 어린이용 ‘처음먹는 요리가케’ 하나, 물. 찬밥에 요리가케 하나를 뿌리고 냉수를 국 삼아 점심을 먹는다. 배는 그 사이에도 엄청나게 흔들린다. 바닷말 덩어리들이 많이 떠다닌다. 스크루에 엉키지 않기만 기도한다. 후딱 점심을 먹고 풍향을 본다. 빔리치 16~18 노트. 선속 7.5 노트. 바람이 더 세지지 않기를 바란다. 127 해리 남았다. ETA는 내일 (27일 화) 오전 7시 20분이다.
오후 3시 40분. 스턴에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 와 앉았다. 가만히 앉아서 날개를 쉰다. 똥도 한 덩이 싼다. 왼쪽 발목에 파란 고리를 차고 있다. 슬그머니 졸려는 분위기다. 2020년 겨울 항해 때엔 루손섬 북쪽에서 매가 날아와 밤새 쉬다 간적 있다. 신기하다. 야생동물도 급하면 사람을 찾는다. 하물며 비둘기야. 혹시 놀라 달아날까봐 모든 동작을 조용히 한다. 선속이 6.3노트로 떨어진다. 풍속이 11~15 노트 사이다. 타이완까지 117 해리 남았다.
오후 4시 10분. 비둘기가 날아갔다. 갑자기 22노트 돌풍이 불고 파도가 스턴을 때리자 놀라 달아났다. 필리핀까지 95.5 해리. 거의 루손 해협의 가운데쯤이다. 비둘기야, 그래도 필리핀이 더 가까우니 필리핀으로 가라. 비둘기가 떠나고 나는 물티슈로 비둘기 똥을 닦았다. 한 군데 인줄 알았는데, 두 군데다.
오후 5시 15분. 갑자기 바람이 거세진다. 22노트가 넘어가기 시작한다. 선속이 9노트가 넘어간다. 엔진 Rpm을 1,100으로 줄인다. 집세일을 60%로 줄인다. 그래도 선속이 7.7~8.1 노트다. 남은 거리 104 해리. ETA는 내일 오전 6시 50분이다. 이렇게 빨리 갈 이유는 없는데.
오후 6시. 서서히 해가 지려 한다. 혹시나 야간에 바람이 더 강해질 경우를 대비해 메인 세일을 30%로 줄인다. 그런데도 바람은 18~20노트. 선속은 7.4~80 노트를 오르내린다. 바람도 대단하고, 제네시스의 성능도 대단하다. 메인세일과 집세일을 바짝 축범해, 세일을 손바닥만큼 편 제네시스가 루손 해협(Luzon strait)을 내달리고 있다. 남은 거리 100해리. ETA는 내일 오전 7시 30분. 제네시스의 우현에선 코타키나발루 ~ 타이완 항해의 마지막 날 석양이 준비 중이다.
오후 6시 40분. 화장실에 들어가 어찌어찌 간신히 샤워를 했다. 파도는 이제 2미터를 훨씬 넘는 것 같다. 이런 바다에 샤워를 하는 나도 어지간하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샤워 하지 않으면 끈끈해서 못 견딘다. 야간 견시 중 잠깐 조는 것도 끈끈하면 아주 불쾌해서 거의 뜬눈이 된다. 남은 거리 95.7 해리. 드디어 100 해리 아래다. 풍속 15~18노트, 선속 6.8~7.2 노트.
오후 8시 2분. 갑자기 파도가 엄청나게 세졌다. 어둠속에서 파도가 헐을 때릴 때 마다 배가 뒤집어 질 듯하다. 거의 눕혀 놓은 삼성 패드가 테이블에서 굴러 떨어진다. 앉아있어도 불편하고, 잠시 누워도 불편하다. 엔진 Rpm 1,300. 풍속 15~18노트. 선속 5.5~6.0 노트다. 역 조류가 걸려 있나보다. 속도가 나지 않고 파도만 험하다.
오후 9시. 통영 비지터스 2 이준희 선장님이 또 위성전화 해 주셨다. 내일 오전 10시부터 바람이 더 세진다는 예보다. 역조류가 되었는지 선속이 느려졌다. 오전 10시 전에 들어 갈 수 있을까?
오후 11시 5분. 파도가 조금 가라 앉았다. 바람이 클로스홀드가 됐다. 전혀 예상 밖의 방향이다. 예보 상으로는 빔리치가 정상인데, 클로스홀드다. 선속이 5노트 까지 느려진다. 엔진 Rpm을 1,500으로 올린다. 내일 오전 중에는 도착해야한다. 오후에 바람이 더 거세진다. 그러나 그것도 윈디 예보니 믿기도, 안 믿기도 어중간하다. 그러나 바람은 현실이다. 바람이 빔리치로 바뀌기를 바라면서 이대로 가보자. 70.6 해리 남았다.
2023년 6월 27일 (화) 오전 2시 30분. 바람은 클로스홀드 17~18노트. 선속 5.6~6.5노트. 엔진 Rpm과 풍속에 비해 선속은 빠르지 않다. 펀칭도 있다. 하지만 파도가 어제 저녁의 그 난리통은 아니다. 제네시스는 그런대로 차분하게 항해중이다. 윈디 예보는 바람이 강하다는 것은 맞았지만 바람의 방향은 달랐다. 진행방향 우측에 장애물이 있다. 주의하자. 53.1 해리 남았다.
오전 4시 50분. 여명이다. 1시 방향의 구름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클로스홀드 15~18노트. 집세일이 자주 펄럭인다. 노고존에 다가간다. 선속 6.0 노트. 남은거리 38.5 헤리. 레이더엔 개미 한 마리 잡히지 않는다. ETA는 오전 11시 08분이다.
배 뒤에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다. 한국에서 준비해 이탈리아에서 배를 사자 게양한 거다. 오늘 보니 1/3이 닳아 없어졌다. 4괘의 ‘곤’ 과 ‘리’ 가 반 넘게 사라졌다. 이탈리아에서 여기까지 내겐 무엇이 닳아 없어진 걸까? 시간, 열망, 금전, 건강. 나는 겉으로 보이는 것 보다는 마음속의 어느 부분이 많이 닳았을 거다. 모난 부분이 닳아 둥글게 되었으면 좋겠다.
오전 5시 40분. 바람이 노고존으로 갔다. 집세일을 접고, 메인세일만 70% 폈다. 풍속은 16~22노트를 오르내린다. 제네시스는 계속 널뛰기를 하는 중이다. 우현 바우에 묶은 기름통들이 넘어졌다. 파도를 맞으며 엉금엉금 기어가서 다시 세워놓는다. 다른 작업은 생각도 못한다. 그대로 기어 다시 돌아온다. 파도에 두어번 얻어맞는다. 남은 거리 33.4해리. 마리나 입항 할 때 바람이 너무 거세지 않기를 바란다.
아덴만 탈출 항해 같은 고생을 타이완 항해에서 하루 동안 겪고 있다. 아덴만 탈출 항해 때는 내가 완전히 미쳤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당시에는 맞바람이었고, 제네시스는 4일 내내 펀칭을 하고 있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보다 더 힘든 항해를 4일이나 할 수 있었을까? 당시의 미친 항해로 지금 타이완에 접근 중이다. 아니었으면 지금도 아프리카 흙먼지를 노랗게 뒤집어쓰며, 지부티에서 정말로 미쳐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전 7시 15분. 바람 우는 소리가 계속 된다. 풍속 20~23노트. 바람이 잦아들 기미가 없다. 파도가 많이 거칠다. 계속 헐을 때리며 분무된다. 온통 소금물이다. 무척 힘들다. 아침 식사는 생각도 못한다. 24.2 해리 남았다. 앞으로 3시간 40분.
오전 7시 45분. 20해리 남았다. 대만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풍속 25~28노트. 이 정도면 태풍이다. 바람 때문에 입항이 걱정이다.
오전 8시 5분. 멀리 어슴프레 육지가 보인다. 산이 보인다. 대만이다. 18.8 해리 남았다. 바람이 너무 강해서 입항이 수월하지 않을 거다. 이 바람이면 메인세일을 접기도 만만치 않다. 2~3해리 남겨 놓고 메인세일을 접어보자. 핸드폰은 될려나?
오전 8시 30분. 바우 선실 장롱 문이 떨어졌다. 깨진 것은 아니고 뭔가 빠진 모양이다. 도착하면 수리하자. 펀칭이 대단했다. 풍속은 클로스홀드 25노트. 초긴장 입항하자. 16.8해리 남았다. 바람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난다. 전방에 피쉬 해븐이다. 아직 핸드폰 로밍 안 된다.
오전 9시 30분. 인터넷이 돼서 이중식교수님과 문기훈 선장님의 도움을 받고 있다. 마리나 들어가서는 호세라는 분의 도움을 받을 예정이다. 그나저나 아직도 바람이 25노트 이상이다. 일단 바로 전방의 피쉬 해븐을 피하고, 메인 세일을 접고, 마리나를 찾아 들어가기. 이렇게 세 가지 미션이 있다. 하나씩 잘 처리해 보자. 젠장 배가 너무 흔들려 앉아있기도 힘들다.
오전 10시 15분. 바람이 32노트를 넘어간다. 젠장, 태풍이네. 일단 메인세일을 접자. 바람을 옆으로 받는 상태에서 메인세일은 접히지 않는다. 풀 배튼 방식처럼 노고존을 만든다. 펀칭이 대단하다. 재빨리 메인세일을 감고 원해 항로로 침로를 바꾼다. 헉! 엔진 Rpm 1,500인데 속도가 4.0노트다. 역조류가 세다. 다시 집세일을 50% 편다. 선속 5.1 ~5.4 노트가 나온다. 6.8 해리 남았다. 산에 가려서 인지 바람이 15~20 노트를 오르내린다. 이제 마리나 잘 찾아 들어가기 미션만 남았다.
2020년 겨울. 오키나와에서 루손 해협(Luzon strait)을 통해 필리핀 수빅베이마리나로 갈 때 죽을 고생을 했다. 그런데 지금 루손 해협(Luzon strait)을 통해 타이완 Hobihu로 오는 것도 역시 죽을 고생이다. 루손 해협(Luzon strait) 통과 정말 쉽지 않다. 이리로 지나시는 분들은 여름이나 겨울이나 각오 단단히 하시기를!
Hobihu 마리나 4.8 헤리 앞. 얼씨구 비까지 내리네. 여러 가지로 애로 사항 많네요.
정오. Hobihu 마리나에 계류했다. 바람이 19노트 이상이고, 폰툰에 대는 줄 알았는데, 큰 배 옆에 붙여 대는 거였다. 그래서 바우가 바람에 밀리는 바람에 스텐천 하나가 좀 휘어졌다. 하, 이래저래 손상이 많이 간다. 한국 가서 펼쳐야겠다. 일단 이미그레이션 대기 중. 이미그레이션이 끝나면 220V 소켓을 사러 가야 한다. 여기는 220V 소켓이 전혀 다른 모양이다. 어쨌든 hobihu에 잘 도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