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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칭의와 구원의 종말론적 긴장관계를 말하다
도전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국내외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칭의’ 논쟁이 뜨겁다. 이 와중에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교의학을 가르치고 있는 박영돈 교수가 <톰라이트 칭의론 다시 읽기>로 칭의 논쟁에 뛰어들었다. 박 교수의 책은 출판되자마자 기독교 언론 매체들이 앞장서서 소개했다. 그 결과 박 교수의 책은 신학자, 목회자들은 물론, 일반 평신도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져 주목을 받고 있다. 왜 박 교수의 책이 이처럼 주목을 받는 것일까? 박 교수의 주장은 정당한가?
최근의 칭의 논쟁은 전통적인 구원론 중심의 칭의론 비판 내지 재해석하고자 하는 ‘새 관점’의 등장으로부터 시작됐다. E.P. 샌더스, 제임스 던, 톰 라이트 등 새 관점 주창자들은, 전통적인 칭의론이 1세기 유대교는 물론 초기 기독교 정황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없이, 16세기 종교개혁가들의 잘못된 유대교 이해와 더불어 자신들이 처한 로마 가톨릭과의 갈등 상황을 1세기의 바울의 상황과 동일시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새 관점에 따르면 예수와 바울 당대의 유대교는 행위를 통해 구원을 추구하는 공로주의나 율법주의가 아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선택과 은혜를 먼저 강조하고, 율법을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이 자신들의 신분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받아들인 ‘언약적 율법주의’다. 초기 기독교에서 제기된 이유도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라는 구원론이 아니었고 ‘어떻게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유대인들과 함께 동등한 언약 백성이 될 수 있는가’라는 교회론 내지 선교론이었다.
바울이 율법을 비판했던 주된 이유도 그것이 구원의 수단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언약 백성의 신분 유지의 수단으로 작용했던 율법을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수단으로 강요했기 때문이었다. “라이트는 바울의 칭의 본문을 개인 구원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한 전 세계를 새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언약 성취라는 관점에서 이해한다”는 박 교수의 논증은 타당하다.
새 관점 주창자들 중에 16세기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잘못 형성된 구원론적 칭의론을 1세기의 정황에 부합하는 교회론적 칭의론으로 바로 세우려는 대표적인 학자가 톰 라이트다. 그는 한동안 영국 교회의 드럼 주교로 있으면서 케임브리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바울신학을 가르쳤다. 현재는 성 안드레 대학교에서 신약과 초기 기독교의 연구교수로 재직하면서 저술과 강연 활동에 힘쓰고 있다. 2013년도에 출판한 그의 바울 연구의 완결판 <바울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그가 이 시대의 바울 연구를 주도하고 있는 대표적인 신학자임을 부정할 수 없게 했다. 한국에는 그의 마니아들이 ‘톰 라이트 연구소’와 ‘톰 라이트 북클럽’을 만들었다.
2007년 미국 베들레헴 침례교회를 담임하는 복음주의 목회자이며 신학자인 존 파이퍼 목사가 전통적인 칭의론을 담고 있는 <칭의 논쟁>을 통해 라이트에 대한 반대 전선을 형성했다. 그는 라이트가 전통적인 칭의론의 핵심에 속하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거부하는 점과, 라이트가 주장하는 이중적인 칭의론, 즉 신자의 초기 칭의는 믿음으로 주어지지만 최종적인 심판 자리에서의 칭의는 신자의 모든 삶에 일치해 주어진다는 주장을 비복음적인 것으로 단정하고 이를 강하게 거부했다. 그러나 2년 뒤 라이트가 파이퍼의 책을 반박하는 책, <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를 다시 출판함으로써 칭의 논쟁은 더욱 불붙게 됐고, 이불은 한국 교회와 신학계에까지 번졌다.
칭의론을 둘러싸고 라이트와 파이퍼에 대한 찬반 논의가 뜨거워지는 와중에 미국 풀러신학대학원에 재직하고 있는 김세윤 교수가 2013년 <칭의와 성화>라는 책을 통해 이 논쟁에 다시 뛰어들었다. 김 교수는 자신의 책을 통해 전통적인 칭의론이든 라이트의 새 관점의 칭의론이든 일방적으로 어느 한쪽 편의 손을 들어주지 않고, 양쪽의 장점은 취하고 단점은 극복하는 통합적인 시도를 했다. 예를 들면 그는 정통적인 칭의론이 주장하는 칭의와 성화의 구분을 반대했으며, 바울의 칭의론은 개인 구원이라는 수직적 측면을 강조하는 법정적인 면과 유대인과 이방인이 동등한 언약 백성이 되는 수평적인 면을 강조하는 관계론적 면을 다같이 갖고 있다고 본다.
김세윤 교수는 또한 복음서에 나타나고 있는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 메시지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 ‘이미’ 왔음을 강조하는 현재적 측면과,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미래적 측면을 갖고 있는 것처럼, 바울의 칭의론은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 선포의 다른 표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주어지는 현재적 칭의와, 그러나 마지막 심판 자리에서 신자의 거룩한 삶과 일치해 최종적으로 주어지는 미래적 칭의의 양면을 갖고 있다고 봤다. 그러므로 김세윤 교수는 비록 현재적 칭의를 받은 자라도 그리스도의 주권에 따라 사는 거룩한 삶이 없는 자는 최종적인 칭의에 들어가지 못하고 탈락할 수 있다고 본다.
표면적으로 보면 박영돈 교수의 <톰 라이트 칭의론 다시 읽기>는 라이트의 칭의론의 장단점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비판하면서 나름대로 전통적인 바울의 칭의론을 세우는 데 주 목적을 삼고 있는 것 같다. 제목도 직접 라이트의 칭의론을 겨냥하고 있고, 책의 전개 내용도 <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의 전개 방식과 같이 제1부에서는 개관을, 제2부에서는 주해의 순서를 따르고 있는 점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예를 들면 박 교수는 <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처럼 제1장에서 라이트의 칭의론 해석의 틀인 샌더스의 ‘언약적 율법주의’, 던의 ‘율법의 행위에 대한 사회학적 해석’, 라이트의 ‘언약적 신실성’을 먼저 다룬다. 그리고 2장에서 5장까지 라이트의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의 주요 본문 주석에 대한 재검토와 함께 그의 주석이 가져온 신학적인 문제들인 ‘구원의 개인적 차원’, ‘전가교리’, ‘이중 칭의’, ‘구원의 확신’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성화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신 완전한 의로움에 근거해 영 단번에 내려진 판결이니 성화의 진전이 있다고 발전하거나 부진하다고 조금이라도 무효화되거나 취소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가 볼 때(필자처럼 김세윤 교수의 <칭의와 성화>를 주의깊게 읽고, 박 교수의 책을 읽은 독자라면 누구든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지만) 박 교수의 책은 라이트뿐만 아니라 라이트의 장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김 교수의 책을 똑같이 겨냥하는 것 같다.
이 점은 박 교수가 책의 마지막 부분인 6장에서 바울의 칭의론을 길게 개진하면서 김세윤 교수의 독특한 표현인 ‘하나님 나라’ 관점을 유독 강조해 설명하고 있는 점, 그가 이미 2014년도에 페이스북을 통해 김세윤 교수의 <칭의와 성화>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제시한 점, 그리고 머리말 마지막 부분에서 “원래 필자는 한국 교회에서 칭의론과 관련해서 일어나는 모든 혼란과 문제를 종합적으로 다루고 그에 대한 성경적 대안을 제시하는 책을 ‘다시 전하는 칭의와 성화’라는 제목으로 쓰려고 했다”고 하면서 김 교수의 책 제목인 <칭의와 성화>를 의도적으로 거론하는 점 등을 볼 때 부정하기 어렵다.
긍정적인 면
필자는 저자가 교의학자로서 성경신학자인 라이트의 책을 주의 깊게 읽고 분석 비판한 점에 감사와 치하를 보내고 싶다. 라이트의 책은 필자와 같은 성경 신학자들에게도 적지 않게 부담이 된다. 그런데도 박 교수는 성경신학자 이상으로 라이트의 칭의론의 배경이 되는 그의 신학적 틀은 물론, 그의 성경 본문 주석 부분을 꼼꼼하게 읽고 해석상의 여러 문제점을 잘 들춰내고 있다. 이것은 그의 신학적 확신과 함께 예리한 학문적 분석과 판단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1장에서, 라이트의 새로운 칭의론의 틀을 구성하고 있는 샌더스의 ‘언약적 율법주의’, 던의 ‘율법의 행위에 대한 사회학적 해석’, 라이트의 ‘언약적 신실하심의 표현인 거대 담론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도 무난하게 이뤄진다. 2-3장의 주석 부분 검토에서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의 주요 본문에 대한 라이트의 주석이 때때로 본문 자체의 의미 발굴에 충실하기보다는 라이트 자신의 신학적 전제나 주장을 본문에 주입하는 점에 대한 지적도 적절해 높이 평가할 만한다.
4-5장에서 다루는 라이트의 ‘해석의 전제’, ‘언약적 율법주의’, ‘율법의 행위’, ‘연장된 유배기?’, ‘하나님의 의는 언약적 신실성?’은 이미 1장에서 다룬 내용의 확장으로 볼 수 있다. 5장의 신학적 문제에서 라이트가 지나칠 만큼 아브라함을 통한 하나님의 전 인류 회복이라는 거대 담론에 치중한 나머지 바울이 강조하는 개인의 믿음에 의한 구원을 외면 혹은 약화시키고 있음을 지적한 것도 바른 지적이다.
라이트가 종교개혁가들의 유산인 전가교리를 부인하고 있음을 지적한 것도 정당하다. 종교개혁가들처럼 전가교리가 바울의 칭의론을 대변한다는 사실에 쉽게 동의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전가되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돼 칭의받음에 근거가 된다는 사실은, 갈라디아서 3장 6절과 로마서 4장 6절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그가 믿는 약속을 근거로,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수단으로 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인으로 간주했다는 가르침과,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서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 못하신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해 죄를 지우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가르침을 볼 때 분명히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부정하려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든 정당성을 찾기 어렵다. 라이트가 하나님의 의를 지나칠 정도로 하나님의 언약적 성실성의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점에 반대해, 박 교수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 구원과 심판의 양면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의를 이해하려는 것도 정당하다. 십자가 사건은 인류를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언약의 성취인 동시에 인류를 파멸시키려는 사탄과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논란이 되는 라이트의 이중 칭의론과 최후 심판론에 대한 박 교수의 비판에 대해서는 일방적인 지지를 보내기 어렵다.
아쉬운 점
저자가 종교개혁가들의 유산을 지켜야 하는 전통적인 개혁주의 교의학자로서 ‘구원의 서정’에 따라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고, 칭의의 열매 혹은 결과로 볼 수 있는 성화는 신자의 삶의 윤리를 동반하지만 칭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해 우리 밖에서 주어지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처음부터 칭의는 이미 확정적이며 마지막 심판의 자리에서는 이를 재확인하는 것이라는 거듭된 주장은 설사 이것이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학의 가르침이라 하더라도 성경 본문 자체의 가르침과 조화하기 어렵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바울은 성화의 모든 과정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확정된 칭의를 바탕으로 진행된다고 가르친다. 칭의는 성령을 따라 사는 삶으로 앞으로 성취해 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율법의 저주를 받아 이루신 우리 밖의 의로움에 근거해 이미 내려진 판결이다. 바울은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동사를 계속 ‘부정 과거 시제’로 사용하였다.”
라이트와 김세윤 교수 등 여러 성경신학자들에 의해 이미 밝혀진 바대로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박 교수가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칭의와 성화를 구분해서 사용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상호교차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는 칭의를 표현하는 동사와 관련해 과거, 현재, 미래 시제를 혼용해서 사용한다.
성화를 표현하는 동사에 있어서는 1회 현재 시제를 사용할 뿐 모두 과거나 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다. 구원을 표현하는 시제의 경우에는 과거, 현재도 사용하지만 적지 않게 미래 시제를 사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다양한 시제의 사용은 바울이 전통적인 구원론이 주장하고 있는 것과 같이 단회적인 ‘선 칭의’, 반복적인 ‘후 성화’의 도식처럼 칭의, 성화, 구원을 엄격하게 구분해 생각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서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다”고 하면서,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칭의와 성화와 구원함에 동시에 다 참여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고린도전서 6장 11절에서는 “너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라고 성화를 칭의 앞에 두고 있다. 그리고 디도서 3장 5-7절에서는 ‘성령의 새롭게 하심’과 ‘의롭다 하심’을 동의어처럼 사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바울의 언어 사용으로부터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것은 크게 네 가지다.
첫째, 바울은 한편으로 칭의, 성화, 구원에 다같이 과거 시제를 사용함으로써 칭의만이 아니라 성화와 구원 역시 우리의 의로운 행위에 의지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둘째, 바울은 다른 한편으로 칭의, 성화, 구원을 현재나 미래 시제를 사용함으로써 성화만이 아닌 칭의나 구원도 신자의 적극적인 삶을 요청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셋째, 바울은 복음서의 하나님 나라의 경우처럼 칭의, 성화, 구원에 대한 가르침도 동일한 ‘이미’와 그러나 ‘아직’의 역동적인 종말론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고 있다.
넷째,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와 ‘아직’ 사이에 강한 제자도를 요청하고 합당한 제자도가 없이는 아직 기다리고 있는 미래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탈락할 수 있음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바울의 구원론도 신자의 거룩한 삶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바울은 모든 신자가 마지막 심판대에서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을 말하면서 이 점을 재확인한다.
이처럼 바울은 한편에서는 오직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믿음으로, 은혜로 받게 되는 칭의와 구원의 안전성과 최종적인 확실성을 강조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신자의 거룩한 삶이 없이는 미래에 주어질 칭의와 구원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친다.
바울은 서로 모순되는 것 같은 양자의 가르침을 절충하거나 조화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양자의 가르침을 그대로 둠으로써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의 자리를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자의 강한 윤리의 자리를 만든다. 칭의와 관련해 구원의 안전성과 최종적인 확실성의 강조 없이는 성도의 궁극적인 견인은 불가능하며, 동시에 칭의의 유보와 탈락이라는 처벌이 전제되지 않는 한 기독교 윤리는 힘을 잃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은 바울의 양면적인 가르침은 박 교수나 라이트 혹은 김세윤 교수 어느 쪽이든 일방적인 지지를 보낼 수 없게 한다. 필자가 보기에 박 교수처럼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려는 전통적인 칭의론을 따르는 사람들은 기독교 윤리의 자리를 약화시키는 위험에 빠질 수 있고, 라이트나 김세윤 교수처럼 칭의와 성화를 동일시해 기독교 윤리의 자리를 강화시키려는 자들은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이미 주어진 칭의와 구원의 안전성과 확실성을 약화시키는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직 성경’이라는 종교 개혁 정신은 성경 본문의 가르침이 설사 우리의 신학과 논리에 불합리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성경 본문의 가르침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 교회에 필요하다.
-최갑종 교수/ 백석대 총장. '목회와 신학'(두란노) 2016년 8월호에서

첫댓글 오늘날의 한국 장로교는 칼빈을 거의 우상시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경은 특정 신학적 문제에 대해 인간의 교리로 산뜻하게 한데 뭉뚱그릴 수만은 없는 양면성을 그대로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것을 인간의 논리로 지나치게 도그마화할 경우 하나님의 생명에서 멀어지고 수많은 영혼들을 잘못 인도할 수도 있다는 경각심이 한국 장로교 안에도 양심적인 학자들과 사역자들 가운데 일어나길 기대합니다. 이런 와중에 존경받는 장로교 신학자 한 분이 또다른 존경받는 장로교 신학자 한 분의 책을 소개하며 칼빈주의 구원론에도 성경을 벗어난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지적하는 용기있는 서평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와 ‘아직’ 사이에 강한 제자도를 요청하고 합당한 제자도가 없이는 미래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탈락할 수 있음을 누누이 강조하듯, 바울의 구원론도 신자의 거룩한 삶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음을 가르친다. 바울은 모든 신자가 마지막 심판대에서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을 말하면서 이 점을 재확인한다. 이처럼 바울은 한편에서는 오직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믿음으로, 은혜로 받게 되는 칭의와 구원의 안전성과 최종적인 확실성을 강조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신자의 거룩한 삶이 없이는 미래에 주어질 칭의와 구원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분명하게 가르친다."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