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세군 선교사로 헌신하고 "영동병원" 설립자인 "에이커홈"(Earland Akerholm : 玉居欽)은
1888년 3월 13일 스웨덴 "바커리드"(Barkeryd)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914년 3월 9일 구세군 사관(正尉)으로 내한하여 처음에는 개성 지방관으로 있었다.
1916년 6월 스웨덴에서 함께 내한한 구세군 선교사
"본크비스트 나탈다"(Bonkvist Natalta)와 "경성 제일 교회"에서 결혼하였다.
1918년 7월 1일자 "구세신문"은 개성의 부흥회의 성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개성지방관 에이커홈(Akerholm)과 그의 부인, 경성 본영의 "어륵손"(Ericsson) 선교사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합심 협력하여 가두 전도와 영내 예배를 통하여 1,430명이 복음을 접하고, 31명이 회개하였으며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토요일(18일)과 주일에도 여전히 계속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 후 "에이커홈" 선교사는 1920년 충청북도 지방관으로 전임 되어 선교 사업을 계속하였다.
이때 그는 사재를 출연하여 조성한 기금으로 "영동 병원"을 설립하여 농촌 지역의 의료 사업을 전개하였다.
충청북도 지방 활동 중 1920년 3월 15일 장티푸스로 인하여 32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하였다.
그의 유해는 영동읍 계산리(향교 건너편) 뒷산에 안장되었다.
2000년 "구세군 대한 본영"은 이들 선교사의 숭고한 신앙과 역사적 사실을 후대에 전하려는 취지에서
"구세군 순교 성지 기념사업회"를 조직하여 2000년 9월 27일 "에이커홈"의 유해를 충북 영동에서
서울의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으로 이장하였다.
이 碑는 원래 충북 영동에 있었던 묘비인듯하다.
碑 아래에는 "THY WILL BE DONE"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라고 씌어 있다.
일부 자료에는 묘비에
“朝鮮忠淸北道 救世軍地方營 族官 玉居欽 主降生 一八八八年 三月 十三日生 一九二十年 三月 十五日 別世"
"조선 충청북도 구세군 지방영 옥거흠 주강생 1888년 3월 13일생 1920년 3월 15일 별세"
그리고 ”復生者 我生命者 亦我信者 雖死必生而 信我者 永不死爾信否"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을 입게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힘입어
구원을 얻게 하셨으니 우리 대신 죽으시어 저와 함께 살게 하시니라”라 기록되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묘비 뒷면에 씌어진듯하다.
부인: 서울 여자 관장 "나탈타 에이커 홈"(Natalta Akerholm 1965.1.10)
스웨덴 출신의 여성 사관으로 1914년 3월 9일 내한하였다.
에이커홈과 서울에서 1916년 6월 결혼하고, 1920년 남편이 소천한 후에도
조선에서 구세군 선교사로서 활동을 계속했다.
1922년에는 전도를 위하여 성경과 찬송가를 자비로 사서 나누어 주었으며
1925년 7월 경성 제2영 담임사관으로 봉직하였다.
1925년 9월 19일 정위에서 부관(副官)으로 승진하여 함경도 고산 구역관(區域官)으로 임명되었다.
구역관 취임식에는 서기장관 등 많은 구세군 사관과 병사들이 참석하였다.
1928년 9월 27일 서울 정동에 구세군 사관학교가 개관될 때는 여성 사관의 교관이었다.
1930년 영국 만국 사관 대학 연구 과정을 마치고 돌아와 서울 여자 관장(1933), 서울혜천원(1938)에서
폭넓게 활동하면서 1934년 4월 참령으로 승진하였다.
이밖에 그는 구세군 본영 사관 부인들로 조직된 자선위문단 책임관,
원산 선교사 휴양 관장, 여성 사업부, 사회사업부에서 봉직하였다.
1940년 12월 2일 일제에 의하여 강제 출국되어,
스웨덴에서 80세인 1965년 1월 10일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