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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창작수필문인회 원문보기 글쓴이: 엄지바우(이봉길)
조경희의 수필 세계
수필에 대한 정의는 “붓 가는 대로 쓴 글”이라거나 “형식이 없는 글”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점이 있다. “붓 가는 대로 쓴 글”은 수필이란 한자를 번역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정의는 수필과 비수필을 가르는 기준이 되지 못한다. 또 “형식이 없는 글”이란, 형식이 없는 글은 모두 수필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는 뜻이 되는데 이 역시 무리가 많다. 수필의 성격을 분류할 때 문학적 수필과 비평적 수필로 나누는 경우가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비평적 수필은 엄격한 형식을 가지고 있다. 설명문이나 논설문 등은 서론, 본론, 결론이라는 형식을 필요로 하는 글이다.
독자에게 정서적 체험을 전달하고 즐거움을 주려는 수필은 문학적 수필이다. 그리고 문학적 에세이도 구성상 발단, 전개, 결말이 있다. 발단에는 주제를 포함하고 있으며, 전개는 종속주제, 결말 부분은 전개와 마찬가지로 주제를 담고 있어야 한다. 수필 역시 인물, 공간, 시간, 시점 등 시나 소설이나 희곡이 갖는 문학 요소들을 모두 포함한다.
우리 문학사를 살펴보면 뛰어난 수필가들이 많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여기(餘技)로 수필을 썼다. 작품 「우덕송(牛德頌)」을 쓴 이광수를 비롯하여 『청태집(靑苔集)』의 박종화, 「권태」의 이 상 등의 작가들이 수필을 썼고, 그 후 김진섭, 피천득, 윤오영, 박연구, 윤재천 등 본격적인 수필가 등이 많이 등장했지만, 조경희를 빼놓고서는 현대 수필가를 논할 수는 없다. 그는 수필가로서 문학사에 남을 뛰어난 작품을 발표하였지만, 우리 수필 문학의 발전을 위해 많은 공헌을 했다. 올해로써 탄생 100주년을 맞는 작가로서 조경희의 문학세계를 살펴보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수필가이자 언론가이면서 정치인이기도 한 조경희는 일제강점기인 1918년 4월 6일 경기도 강화 온수리에서 출생하여 잠시 충남 당진에서 살았다. 당진 정미소학교를 다녔고, 서울에 혼자 올라와 동덕여중과 이화여전 문과를 다녔다. 한국일보 등 신문사의 기자를 거쳐 수많은 문학·예술단체의 장을 역임했다. 1971년 한국수필가협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을 지냈으며, 예총 회장, 예술의 전당 이사장, 정무 제2장관 등을 지냈다. 2005년 8월 5일 87세를 일기로 인천에서 타계하였다. 현재 강화 고려궁지 옆에 ‘조경희문학관’이 있다.
그는 언론, 정치, 행정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지만, 그의 진면목은 역시 수필가로서 삶이다. 본고에서는 수필가 조경희의 문학세계를 다룰 예정이다. 누구보다 수필을 사랑하고, 수필 인구의 저변 확대와 창작 및 발표 공간의 확충, 수필가의 위상 정립 등 수필에 관한 전 부분에 걸쳐 사명감을 지니고 활동한 사람을 이야기하자면 조경희를 단연 첫손가락에 꼽을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한국 수필의 발전을 위해 가장 크게 공헌한 이가 바로 조경희라고 말할 수 있다.
조경희 자서전』(2004)에 의하면 그는 이화여전 재학 시절 소설가 이태준의 작문 강의를 들었다. 이태준의 지도를 받은 조경희는 영국의 수필가 찰스 램(C. Lamb)의 『엘리아 수필집』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 책은 친구에 관한 이야기, 좋아하는 배우 이야기, 독서 이야기, 런던의 옛 풍습과 풍물, 사람에 대한 관찰 등을 유머와 페이소스 등을 곁들여 기술하고 있다. 그의 「35년 전의 크라이스츠 학교」, 「정년 퇴직자」, 「낡은 찻잔」, 「돼지구이 이론」, 「환상의 아이들」과 같은 작품은 영국 수필 문학의 백미로 꼽힌다. 이런 램의 작품들의 영향은 조경희 수필에서 자주 눈에 띈다.
조경희의 수필은 인간세계의 아름다움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키면서도 지성과 이성을 바탕으로 한 고독한 넋두리와 통쾌미를 발산시켜 줌으로써 철학적 성찰의 분위기를 드러낸다.
조경희는 30세가 되던 1938년에 <한글>에 「측간단상」을 발표하고 이어 <조선일보> 학생란에 「영화론」을 발표함으로써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한다. 주요 작품집으로는 『우화』(1955), 『가깝고도 먼 세계』(1963), 『얼굴』(1966), 『음치의 자장가』(1971), 『면역의 원리』(1978), 『골목은 나보다 늦게 깬다』(1986), 『웃음이 어울리는 시대』(1988), 『낙엽의 침묵』(1994), 『치자꽃』(1999), 『하얀 꽃들』(2000)을 상재했으니 모두 열 권의 수필집을 낸 셈이다. 『조경희 수필선집』(2005)은 타계한 후에 발간되었다.
그는 1971년 4월에 계간 《수필문예》를 창간하였다. 창간호에는 김동리, 조연현, 박목월, 서정주, 이원수, 백 철 등 당시 문학 단체장들의 창간 축사가 실렸고, 김동리, 신석정, 이주홍, 설창수, 김사달, 서정범, 허세욱, 윤재천, 박연구 등의 수필이 게재되었다. 당시 최고의 필진을 동원한 《수필문예》의 창간사에서 조경희는 “수필가들이 늘어나고 그 가족들을 위한 터전과 무대를 마련하는 작업이 필요한데, 누군가 해야 할 일이기에 시작했다.”라고 수필 문학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드러냈다.
윤병로에 의하면 조경희의 수필은 주로 “인간애를 불러일으키는 휴머니티에 바탕을 두고, 생활인의 아름다운 마음을 형상화하는 데 특징”이 있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거침없는 생각과 느낌을 풀어놓는 것이 조경희 수필의 특징이다. 그는 수필집 『음치의 자장가』 서문에서 자신의 글쓰기를 ‘이삭줍기’에 비유하였다. ‘이삭줍기’는 추수가 끝난 들판에 떨어져 있는 이삭을 줍는 것은 곧 일상에서 놓치기 쉬운 일상의 일들을 글의 소재로 쓴다는 말이 된다. 그만큼 그의 수필이 소박하고 깨끗하다.
조경희의 수필은 다정다감하면서 분위기가 밝다. 인생의 어두운 면에서 취재하더라도 여유 있는 긍정의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것은 조경희의 수필이 이성과 지성의 바탕 위에서 창작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 「얼굴」의 첫 부분을 보면, 그의 인성이 잘 드러난다.
작가는 자신의 얼굴이 못났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여학교 시절 예쁘게 생긴 친구를 상급생 언니에게 빼앗기기도 하였다. 못생긴 얼굴 때문에 평생을 부끄러워 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주변에는 외모와 관련된 속담이 많다. “빛 좋은 개살구”라든가, “객줏집 칼 도마”라는 말은 추한 외모를 빗대어서 하는 말이다. 외모에 대한 열등감이나 콤플렉스는 한 사람의 행동과 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아들러(A. Adler)는 이런 열등감에서 벗어나도록 심리치료 방법을 개발한 학자다.
고구려의 장군 온달은 기록에 의하면 용모가 못생기고 다 떨어진 옷과 신발을 끌고 다녀 모두 그를 ‘바보 온달’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평강공주를 만남으로써 고구려 최고의 장군이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우선되는 일은 자기연민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스스로 자신의 열등한 부분을 인정한 다음 자신이 남보다 우월한 부분을 찾아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작가 조경희는 외모가 잘생긴 사람보다 마음씨가 고운 사람이 훨씬 낫다는 생각에 용모에 관한 열등감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래서 누가 놀려도 태연자약할 수 있는 품성을 가꾸었다. 그것은 “외모의 미운 마음은 영원히 가다듬기 어려워도 마음씨나 수양이나 교양으로써 선을 긍지로 삼을 수 있다고 믿어왔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후 작가는 예쁘지 못한 얼굴이지만 별 구애 없이 살아오게 되었다고 한다. 열등감을 슬기롭게 극복한 사람은 인생을 건강하게 살 수 있다. 누구보다 인생에 대한 큰 자신감이 생기고, 그 자신감이 가슴속에 사랑이 넘치도록 만든다. 후배들은 누구나 조경희를 푸근하고 인정이 넘치는 분으로 기억하고 있다. 조경희는 열등감을 사랑으로 바꾼 작가다.
작가는 유난히 하얀 꽃을 사랑한다. 여러 작품에서 하얀 꽃이 등장한다. 목화, 박꽃, 치자꽃, 정향, 찔레꽃, 백합 같은 꽃들은 모두 하얀색이다. 하얀색은 순결하고 청순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미덕과 봉사하는 숭고함, 성스러움, 희망, 순수, 청결, 평화를 나타낸다. 작가는 작품 「하얀 꽃들」에서 목화꽃의 유용함과 박꽃의 소박함을 본다.
하얀 꽃은 찬란하거나 화려하지 않다. 하얀색은 무채색 중 가장 밝기 때문에 숭고, 순결, 순수, 깨끗함, 단순함의 느낌을 준다. 심리적으로는 감정이나 사고를 정화해주는 역할을 하여 해방감을 준다. 흰색을 좋아하는 사람은 대체로 자기방어적인 사람이며 공평하고 사사로움이 없는 사람이기도 하다. 또 정의감이 넘치고 높은 이상을 요구하는 완벽주의자 타입으로 성실한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실용적 기능적인 면을 매우 중시하는 사람이다. 이 글에서 하얀 꽃을 좋아하는 작가의 인간적 면모가 한눈에 드러난다. 백합 역시 꽃의 화려함보다는 향기 때문에 선호하는 꽃이다. 작가는 하얀 꽃을 예시하며 독자에게 청결하고 순수하며 인간다운 향기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해 준다.
하얀 꽃은 대체로 빛깔이 화려하지 않다. 대신에 짙은 향기를 가지고 있다. 치자꽃이 대표적이다. 치자꽃은 “외모보다도 육체보다도 정신과 높은 교양과 양식을 제일”로 여기는 작가의 가치관을 닮은 꽃이다. 문일평은 저서 『호암전집』에서 “치자는 꽃으로 그리 염미(艶美)한 것이 아니라 향기는 아주 강렬하여 군방(群芳) 중에 열거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면서, 꽃의 십우(十友) 중 치자는 선우(善友)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흰색에 대한 작가의 기억은 그리움과 고마움으로 남는다. 고향 강화를 떠나 이화여전 문과에 입학시험을 치르러 가는 날, 어머니는 언제 준비하셨는지 흰 무명 저고리와 검정 치마 한 벌을 농에서 꺼내 주셨다. 작가는 흰 무명 저고리에서 지극한 어머니의 자식 사랑을 찾는다. 어머니가 지어 주신 흰 무명 저고리를 입고 상경 길에 오른 작가의 마음은 “개선장군의 기쁨”과 다를 바가 없었으며, 자신이 보기에도 눈이 부실 정도였다.
작가에게 흰색은 소박함과 숭고함을 의미하는 색깔이고, 그런 이유에서 작가는 흰 꽃을 좋아한다.
작가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들을 수필의 소재로 삼는다. 일상용품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해서 거기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양산, 손수건, 구두 등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물건이고, 우리 생활 주변에서 자주 대할 수 있는 소소한 것들이다. 특별히 귀한 물건도 아니고 값싼 물건이다. 그런데 작가는 이처럼 하잘 데 없는 물건들로부터 나름의 가치를 끌어내는 눈을 가졌다.
작품 「양산」은 얼핏 양산을 이야기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는 여기에서 사람이란 모름지기 윤곽이 똑똑하고 골격이 좋은 양산을 닮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다. “살이 너무 헤벌어지고 바스러진 것”은 양산으로도 쓸모가 없고, 사람으로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손수건의 미덕」에서는 손수건에 인격성을 부여한다. 작가가 볼 때, 손수건의 역할은 세 가지다. 첫째, 손수건은 가장 점잖은 신사 숙녀들의 체면을 지켜 준다. 둘째, 손수건은 얼굴에 묻은 먼지와 땀을 닦아 준다. 셋째, 고독한 여인의 눈물을 받아 준다. 그러니까 남의 치다꺼리를 해 주는 존재가 손수건이다. 여기에서 작가는 손수건은 남의 치다거리를 일생 동안 해 주는 사람이나, 작은 일이지만 성심성의껏 남의 일을 보아 주는 사람으로 비유한다. 이는 작가의 생활철학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칼라일(T. Carlyle)의 『의상철학』을 보면, “인간은 관습, 즉 의상의 포로”라고 말한 부분이 있다. 칼라일에 의하면 육체와 자연 등 눈에 보이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과 신의 상징이다. 구두 역시 인간의 관습에 지배를 받는 물건이다. 조경희는 구두는 신는 사람의 교양과 취미까지 드러내는 존재라고 보았다. 그뿐 아니라 “구두만 보아도 어느 부류의 사람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구두」)라고 단정한다. 넓은 의미에서 구두도 의상의 하나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의상을 보면 그가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알 수 있는 것처럼, 작가는 우리가 무심히 보아 넘기기 마련인 구두를 통해 자신이 터득한 인생관을 보여 준다.
조경희는 국내외 여행을 많이 했다. 그는 직업상 국내와 국외 여행을 자주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작가는 워낙 여행을 좋아하는 성격이다. 여행의 혼은 자유, 자신이 좋은 대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완전한 자유다. 김기림은 「태양의 풍속」에서 “세계는 나의 학교/여행이라는 과정에서/나는 수 없는 신기로운 일을 배우는/유쾌한 소학생이다”라고 여행의 맛을 그렸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정신이 도로 젊어지는 경험을 한다. 작가는 여행을 통해 정신을 재충전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작품 「유럽의 강」은 유럽 여행 기록이다. 여행자는 어디를 가더라도 강을 만난다. 도시가 있으면 반드시 강이 있게 마련이고 강이 있으면 도시가 발달 되었다. 사람들은 예부터 강물을 의지한 채 살아왔기 때문이다. 자연히 강을 중심으로 사람이 모여 살았고 문명이 꽃을 피웠다. 세계 4대 문명도 강을 끼고 생겨났다. 따라서 강은 어느 강이나 숱한 전설과 사연을 삼킨 채 흘러간다. 천 년을 한 가지로 흐르면서 셈하는 것은 오로지 강물뿐이다.
「놀라운 폐허 마추픽추」는 작가가 먼 남미의 이국 페루에서 폐허가 된 잉카의 유적 ‘공중 도시’ 마추픽추를 대하면서 사라진 사람들과 잃어버린 역사에 대해 비애의 감정을 느낀 기록이다. 마추픽추에는 당초 1,200명 정도의 인구가 살았다고 전해지나 황금을 노린 에스파니아의 정복자에 의해 도시는 폐허가 되고 잉카제국 역시 멸망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잊혔다가 20세기가 되어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화강암으로 된 건축물들은 잉카 사람들이 돌을 다루는 솜씨가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알려준다. 모든 유적지는 고즈넉하고, 옛날 그곳을 거닐던 사람들의 숨결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슬프다. 저자는 마추픽추에서 비애감에 젖는다.
강화에는 많은 유적지가 있다. 국내 네 번째의 면적을 가진 섬이기도 하지만, 고려 항몽(抗蒙) 전쟁 당시 임시 왕궁이 있던 곳이었다. 전등사와 정수사라는 큰 사찰도 있다. 단군신화가 서려 있는 민족의 영산 마니산과 참성단, 슬픈 뱃사공의 이야기가 전해오는 손돌목, 조선 말 외세에 맞서 싸웠던 초지진과 광성진도 이곳에 있다. 고인돌들도 곳곳에 산재되어 있다. 특산물로는 강화 특유의 감, 순무가 있다. 섬 전체가 고려와 관련된 지명이 많다. 작품 「강화 이야기」에는 “내 고향 강화, 그곳엔 깊고 넓은 전설적인 이야기가 고요히 숨 쉬고 있다.”라고 하여 작가의 고향 사랑이 듬뿍 담겨 있다.
작가는 오랜만에 고향에 있는 온수리 성당을 찾았다. 성당은 그대로지만 옛 동창들은 이름을 말해 주어도 누군지 잘 알 수가 없다. 김성탄은 「서상기」에서 “길을 떠났던 나그네가 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다. 그리운 성문이 보이고, 강 양쪽 기슭에서는 아낙네와 아이들이 고향 사투리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다. 아아, 이 또한 흐뭇한 일이 아닐까” 하고 고향의 정겨움을 이야기하고 있고, 시인 김수영은 작품 「고향」에서 “언제든 가리/마지막엔 돌아가리/목화꽃이 고운 내 고향으로/조밥이 맛있는 내 본향으로” 하고 노래하여 고향의 정겨움과 따스함을 노래했다.
조경희의 작품세계는 소박함, 정겨움, 따스함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는 이런 자신의 문학적 목소리를 간결하고도 수사가 절제된 문장 속에 담아낸 작가이다.
- 류재엽/ 문학평론가
조경희 문학관(강화 문학관 2층)
월당 조경희 선생은 고향의 푸른 자연과 인정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여 생전에 한국 수필문단의 어머니로 불리었으며, "인간애를 불러일으키는 휴머니티를 바탕으로 생활인의 아름다운 마음을 형상화"하는 특징이 있다.
골 목
골목은 아침에 나보다 늦게 깬다. 오직 멀리서 멍멍, 개 짖는 소리가 들릴 뿐이다. 제일 먼저 아침에 골목에 들어서는 사람은 아마 조간을 배달하는 신문 배달원일 것이다.
골목길과 벽 하나의 사이를 둔 거처에 사는 나는 아침부터 골목에서 벌어지는 일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다.
나의 청각(聽覺)은 신문 배달부가 신문을 집집마다 문틈 새로 집어넣는 부스럭하는 작은 소리도 놓치지 않게 된다. 먼 곳에서 종소리가 들려오고 날이 새기 시작하면 골목은 차츰 시끄러워 진다.
신문 배달부 다음에 나타나는 사람의 발자취는 반찬 장수들이다. 어리굴젓이니 새우젓이니 조개젓을 사라고 소리소리 지른다.
한두 마디만 소리를 외쳐도 알아들을 사람은 다 알아들으련만, 소리를 질러야만 물건을 팔게 되는 것인지 소리를 지르며 지나간다.
부드러운 목소리, 거센 목소리, 가는 목소리, 기운 빠진 목소리…. 목소리만 들어도 나는 그들의 모습을 분간할 수 있다. 그만큼 그들의 목소리는 이 골목 안에서 낯익은 목소리들이다.
대개 그들의 물건이란 값나가는 것이 못된다. 젓갈 장수 외에도 무장수니, 두부장수니, 엿장수니 모두 십 원 안팎에서 흥정이 되는 물건들이다. 그밖에도 칼 갈라는 사람, 구공탄 찍는 사람이 소리를 외치고 지나가고 있다.
내가 이 골목 안에서 산 지도 2년 가깝게 되지만 그들의 직업은 변함이 없는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두부 장수는 두부 장수를 하고 있다.
일 원짜리 돈의 값을 알 수 있는 것은 이런 골목 안에서 뿐일 것이다. 또한 일 원짜리 돈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도 이 골목 안 장수들일 것이다.
이 골목 안에 오래 살아가는 동안에 골목 안 사람들이 한 식구 같이 되는 것처럼 장수들도 어느 틈에 가까워진 것이다.
외상의 미덕(美德)을 발휘하는 곳도 이런 곳일 것이다. 얼마 많지 않은 밑천이지만 외상거래가 선다.
나는 낮에는 대개 밖에 나가 있으니까 낮일은 잘 모르지만 골목길이 가장 시끄러울 때는 아마 통행금지 시간이 임박할 무렵일 것이다.
여자들의 웃음소리를 실은 지프차가 클랙션 소리를 울리면서 지나간다. 술주정꾼들이 소리소리 고함을 지르면서 지나간다.
이런 뒤숭숭한 분위기가 없는 날 저녁은 교교한데 가끔 '메밀묵 사려' 하는 처량한 소리가 들려오는가 하면, 야경꾼의 딱딱이 치는 소리가 들려오면서 골목 안의 풍경은 이 정도로 막을 내리게 되는 셈이다.
나는 이런 골목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일일이 바라다보는 목격자다. 골목 안에 나타났다 꺼지는 이런 인물들 속에서 그들이 처해 있는 현실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시드니 킹슬리라는 작가의 「데드 앤드」라는 연극을 본 생각을 한다. 이 작가는 일전에 상영된 「탐정 야화(探偵 夜話)」라는 영화의 원작자와 같은 사람이다.
이 작품을 읽은 사람은 알겠지만, 미국의 골목 안을 무대로 해서 그 골목 안에 들어서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그려진 작품이다. '데드 앤드'라는 말은 막다른 골목이란 의미인데, 이 작품은 막다른 골목을 무대로 해서 막다른 골목에 처해 있는 사람들의 절박(切迫)한 심정을 그린 작품이었다. 이런 것으로 보아 어느 나라에나 골목은 있는 것이고 골목이란 이름 있는 큰길과는 거의 생리를 달리하고 있다. 그러기에 누구든지 여행을 할 때는 그 나라의 뒷골목을 찾아가 보라는 말을 한다. 골목 속에 파고 들어가 보아야 그 나라와 국민의 생활 실정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서 울만 하더라도, 서울을 알려면 서울의 뒷골목을 알아야 할 것이다. 종각 뒷골목과 명동 뒷골목은 그 생리를 달리하고 있다.
어느 골목을 가면 누구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듯이 골목은 이미 우리의 생활과 결부되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골목은 오랜 역사를 말하고 싶어 할는지 모른다. 숱한 역사의 인물들이 지나간 발자취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제 때 같은 캄캄한 시대에는 골목은 즐겨 비켜서 갈 수 있는 피난길이었을 것이다.
군자(君子)는 대로행(大路行)이라 한 것은 형이하학적(形而下學的)인 길을 말함이 아니요, 사람이 마땅히 취해야 할 태도를 말했을 것이다. 군자는 대로행이라 한 이 말을 따르려는 현대의 군자들은 종종 앞의 큰길보다 뒤의 좁은 골목길을 걷기를 즐기는 듯하다.
- 조경희 (1986)
첫댓글 조경희는 수필문학의 어머니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 수필이 제자리를 잡기까지
조경희선생의 공헌이 가장 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