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86. 서안의 신라불적-흥교사
중국서 ‘탑’으로 남은 신라 왕손 원측스님
|
<원측스님 탑> |
사진설명: 흥교사에 있는 이 탑은 송나라 때인 1115년 세운 것이다. 종남산 풍덕사에 봉안돼 있던 원측스님 사리를 분골해 건립한 탑이다. 탑 위의 무성한 풀이 ‘긴 세월’을 웅변해 주는 듯하다. |
중국 제일의 고도 서안에 들어온 지 이틀째인 2002년 10월5일 토요일. 오전 일찍 함양박물관을 답사하고, 위수를 가로질러 우리나라 불교와 관련 있는 유적들을 찾기 위해 서안 서쪽을 통해 시내로 들어왔다. 당나라 시절 개원문(開遠門), 금광문(金光門), 연평문(延平門) 등이 있었던 서안 서쪽. 지금은 도로 공사가 한창이었다. 함양에서 서안으로 들어가는 도로가 협소해 차들이 움직이기 힘들 정도였다.도로에 꽉 찬 차들을 보며 당나라 시절을 떠올렸다.
3월에 현란하게 피는 모란처럼 장안은 당나라 시대 가장 멋진 꽃을 피웠다. 인구는 100만을 헤아렸고, 외국으로부터 사신과 사람들이 끊임없이 흘러들어왔다. 시인 왕정백(王貞白)이 읊은 ‘장안도(長安道)’에 당시 사정이 잘 묘사돼 있다.
새벽인정 치기도 전 사람들이 몰려들고/
저녁인정 쳤어도 사람들 끊이지 않네./
산 넘고 바다 건너 만국(萬國)인이 몰려와/
앞을 다퉈 금 비단을 바치네.
당나라 시절 장안은 국제적인 도시였다. 교류가 많아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장안의 거리를 이국적으로 만든 것은 외국 정부의 사절이 아니라, 실크로드를 따라 들어온 상인들이었다. 상업 활동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국제교역장 ‘서시(西市)’와 ‘동시(東市)’는 몹시 흥청댔다. 서역에서 오는 상인은 서시에서, 우리나라나 일본에서 간 상인은 동시에서 주로 장사를 했다.
때문에 동시보다는 서시가 더 국제적이고, 이국적으로 보였다. 실크로드의 나그네인 서역인들이 운영하던 상점들도 대부분 서시에 있었다. 당나라 시절 서시엔 로마, 페르시아, 사마르칸드, 부하라, 타쉬켄트, 페르가나 등지에서 온 상인들로 붐볐다. 그들은 각기 특산물을 들고 와 당나라 비단과 교환하거나 당나라 물건을 구입했다.
서역인들은 상품만 들고 온 것은 아니었다. 과일도 들고 왔다. 당시 서역에서 들어온 대표적 과일이 수박(西瓜)과 석류였다. 수박의 중국식 말인 ‘서과(西瓜)’는 문자 그대로 ‘서역에서 온 오이’라는 뜻이다. 사실 중국의 물은 수질이 좋지 않아 그냥 마시면 배탈 나기 일쑤다. 서안도 마찬가지다. 수질이 나쁜 서안에서 목을 축이는 최상의 수분을 제공하는 과일이 ‘서과’ 즉 수박이다.
진시황릉 주변과 황릉 자체를 온통 덮고 있는 석류도 서역에서 들어온 것이다. 진(晋)의 장화(張華)가 지은〈박물지〉(기원 3세기경)에 “전한(前漢)의 장건은 서역에 사신으로 가 안석국류(安石國榴)를 가지고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안석국이란 안식(安息) 즉 페르시아며, 페르시아 산의 류(榴), 그래서 이름이 석류가 됐다. 우리나라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석류나무도 사실은 실크로드를 타고 페르시아에서 들어온 나무다. 전한 시절 장건이 들고 온 것이다.
이것만이 아니다. 포도, 거여목, 오이(胡瓜), 호도(胡桃), 깨(胡麻), 호콩, 당근 등 ‘호’자가 붙는 모든 과일, 칼 삼키기, 불 뿜기 등의 요술과 곡예, 비파, 하프, 호적(胡笛) 등의 악기, 천마 등이 모두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에서 중국으로 들어와, 우리나라까지 전해졌다. “장안의 모든 귀족들이 호복(胡服) 입기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옷 또한 유행했다. 여기에다 호선무(胡旋舞)와 호희(胡姬)도 장안의 서역 붐을 조성하는데 일조했다. 아름다운 ‘호희’가 추는 춤인 ‘호선무’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장안에 몰려들었다. 장안의 귀공자들은 서역에서 들어온 포도주에 취하고 호희가 추는 호선무에 넋을 잃었다.
실크로드 통해 석류, 수박 등 장안에 들어와
|
<흥교사 삼문 > |
사진설명: 이 문을 지나 경내에 들어가니 왼편에 원측스님 탑, 현장스님 탑, 규기스님 탑이 있었다. |
상념에 빠져있는 사이 차는 어느 새 시내에 들어와 있었다. 서안의 진산 종남산에 올랐다 초당사를 참배하고, 오후엔 흥교사(興敎寺)를 찾았다. 신라 원측스님(圓測. 613~696)의 탑과 소상(塑像)이 있기 때문이다. 흥교사로 가는 차 안에서 원측스님을 떠올렸다. 어린 나이에 출가, 당나라에 유학 가 그곳에서 일생을 마친 스님. 이국에서 얼마나 고생을 심하게 했을까. 스님의 뛰어난 재질을 시기한 중국인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소상도 일부러 못생기게 만들었다. 특히 “도둑처럼 엿듣고 학설을 정리했다”고〈송고승전〉등에 적혀있는데, “중국 스님들의 시기심 때문에〈송고승전〉에 그렇게 기록됐다”는 글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난다.
원측스님. 속명은 문아(文雅), 원측은 스님의 자다. 신라 왕손으로 어려서 출가했다. 627년(진평왕 49) 15살 어린 나이로 당나라에 건너가 법상(法常), 승변(僧辨)스님 등에게 유식론(唯識論)을 배웠다. 중국어, 산스크리트어에 능통해 당 태종 이세민에게 도첩을 받았다. 스님의 재질이 그만큼 뛰어났던 것이다. 이후 원법사(元法寺)에서〈비담론〉〈성실론〉〈구사론〉등을 탐구하는 등 고금의 장, 소를 두루 섭렵했다. 676년(문무왕 16) 인도의 지바하라스님이 가져온, 18부 34권이나 되는 산스크리트본(本) 경전 번역에 참여했다.
몇 년 뒤인 693년(효소왕 2)엔 인도의 보리류지스님이 가져온 산스크리트본〈보우경〉을, 695년에는 우전국(현재의 호탄)의 실차난타스님이 가져온〈화엄경〉을 역경했다. 당시 정통파로 자처하던 규기, 자은파(慈恩派) 등과 경전 해석을 둘러싸고 견해가 대립됐는데, 규기스님(632~682)이나 자은파보다 더 정확하게 해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해심밀경소〉〈인왕경소〉〈성유식론소〉〈유식이십론소〉〈유가론소〉〈인명정리문론소〉〈반야바라밀다심경찬〉〈아미타경소〉〈구사론석송초〉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
사진설명: 취재팀이 흥교사에 간 2002년 10월5일 한 스님이 원측스님 탑 옆에서 좌선삼매에 빠져있었다. 스님 뒤에 ‘무’자가 보인다. |
스님은 그러나 신라로 돌아오지 못하고 당나라에서 입적했는데, 중국 섬서성 서안 함영현 반천 흥교사(興敎寺)에 스님의 탑이 있다. 지금 우리가 가는 흥교사가 바로 그 흥교사다. 장안현 위곡에서 두곡으로 이어지는 동쪽 소릉원에 자리 잡은 흥교사를 향해 차는 계속 달렸다. 시내를 벗어나자 백양나무 가로수가 줄지어 서있는 들판길이 나왔다. 도로 양편의 들판엔 일하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있었다. 길을 따라 한참 달리자 저 멀리 산기슭에 탑이 보였다. 나무 사이로 우뚝 솟은 탑은 아마도 현장스님의 탑인 것 같았다. 흥교사라 적힌 삼문(三門)을 지나 경내로 들어갔다. 경내엔 시원한 나무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현재의 흥교사는 청나라 말기에 복원된 것”이라고 안내인이 설명했다. 곧바로 원측스님 탑이 있는 데로 갔다. 당나라 불교를 대표하는 현장스님 탑을 중심으로 왼쪽에 원측스님 탑이, 오른쪽에 규기스님 탑이 각각 서 있었다. 원측스님 탑 앞에 나아가 삼배를 드렸다. 너무 늦게 찾아 온 것이 유감이었지만, 스님의 탑 앞에서 예를 올릴 수 있게 된 것이 너무 기뻤다. 3층탑인데 1층에 원측스님의 소상이 봉안돼 있고, 2층 중간에 ‘측사탑(測師塔)’이라는 글이 보였다.
이끼 낀 탑에 손을 댔다. 돌이 주는 ‘차가운 느낌’ 함께 역사가 주는 ‘오랜 세월’이 전해오는 듯 했다. 손을 댄 채 한참동안 서 있었다.〈송고승전〉엔 “원측스님이 문지기를 매수해 현장스님이 강론하는 곳으로 몰래 들어가 엿듣고 의장(義章)을 꾸몄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물론 믿을 수 없는 것이다. “학문이 높은 수준에 이르렀고, 규기스님과 학문적으로 논쟁할 정도인 스님이 그런 행동을 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아주대 변인석 교수는〈장안의 신라사적〉(아세아문화사 펴냄)에서 지적했다.
15살에 입당 유학, 서명학파 이끌어
장안에서 오랫동안 여러 고승들에게 배워 대성한 원측스님은 현장스님 귀국 후 문하에 들어가 - 현장스님과 원측스님은 ‘사제관계’가 아니고 ‘동학(同學)관계’라는 주장도 있다 - 역경사업에 종사했다. 어학실력이 남달랐던 스님은 예리하고 참신한 학설로 주변을 사로잡았다. 원측스님에 대한 소문을 들은 측천무후 등 당 황실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황제의 명으로 자은사 부근 서명사에 주석하며 역경과 학문, 교화에 진력하다 696년 84세를 일기로 입적했다.
원측스님의 법구는 용문 향산사(香山寺)에서 다비돼 백탑에 봉안됐고, 분골(分骨)돼 종남산 풍덕사(豊德寺) 동쪽 언덕에도 탑이 세워졌다. 그러다 송나라 때인 1115년 다시 분골돼 흥교사 현장탑 왼쪽에 모셔진 것이다. 탑에서 손을 떼고, 시계방향으로 세 바퀴 돌았다. 규기스님 보다 더 뛰어난 학덕으로 규기파의 경원의 대상이 됐던 원측스님. 당대 최고의 고승이었던 원측스님. 30분 정도 부근에 앉아 탑을 쳐다보았다.
|
사진설명: 중국 근대 변법자강 운동의 기수 강유위가 쓴 흥교사 현판. |
그러나 우리는 떠나야만 할 사람. 시간에 쫓겨 흥교사 경내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마침 대웅전 옆 벽에 붙어있는, 중국 근대 변법자강 운동의 기수 강유위(康有爲. 1858~1927)가 쓴 ‘흥교사’란 편액이 보였다. 혁명가의 글씨를 보는 순간, 원측스님 탑을 볼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 가슴을 지나쳤다. 흥교사를 나와 고개를 돌려보니 원측스님 탑은 보이지 않고, 현장스님 탑만 보였다. 여러 번 고개를 돌렸으나, 원측스님 탑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탑을 가린 나무가 그때보다 더 원망스러웠던 적은 없었다.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목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