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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된 악기가 있을 리 없었다. 통기타라도 든 함중아는 행복한 축이었다. 오르간을 맡은 형 함정필은 베니어판에 건반을 그려놓고 손 짚는 흉내만 내야 했다. 보다 못한 신중현이 아리아 풍금 한 대를 가져다주었다.
신중현 사단 중에는 ‘미련’, ‘나는 너를’을 부른 가수 장현도 있었다. 평소 함중아 일행이 고생하는 모습을 안쓰럽게 보던 그는 친구가 사장으로 있는 대구 수성호텔 나이트클럽을 소개해 었다.
“‘드디어 때가 왔다’ 싶었죠. 그런데 악기가 있나. 부산 큰 누나한테 20만원을 얻었죠. 그 돈으로 청계천에 나가서 4인조 악기를 다 샀어요.”
대구 나이트클럽 무대에 올랐다. 일단 스승의 흉내를 내기로 했다. 신중현 연주 스타일에 그의 레퍼토리를 그대로 읊었다. “그때는 소울이 유행할 때였어요. 나이트 음악문화가 정말 조용한 분위기였지. 그런데 머리가 치렁치렁한 우리들이 가서 시끄럽게 하니까, 이게 영 아닌 거라. 하루 딱 하고 쫓겨났습니다.”
서울로 올라온 패잔병 무리를 보고 장현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이번엔 대전 유성호텔로 가보라고 했다. 거기서 6개월 정도를 일했다.
○2년간 스승과 골든그레이프스 활동도
하루는 신중현이 대전에 왔다가 클럽에 들렀다. 사장하고 얘기를 하고 있는데 무대에서 주구장창 자신의 레퍼토리만 들리는 것이 아닌가. "본인 제자들인 줄 몰랐던 거죠. 사장한테 ‘쟤들 누구요?’했다는 겁니다, 하하! 당장 짐 싸들고 서울로 올라와서 오디션을 보라고 하시더군요.” 당시 신중현은 퀘션스를 해체하고 홀몸이었다. 신중현은 서울로 올라온 옛 제자들의 그룹에 멤버로 들어왔다. 그래서 신중현과 골든그레이프스가 만들어졌다. 신중현과 골든그레이프스는 2년 정도 갔다. 이후 신중현은 ‘엽전들’을 만들어 나가고, 함중아는 ‘신중현’이란 간판을 뗀 채 골든그레이프스를 이끌었다.
○1974년 그룹쟁탈전 1등 ‘최고의 순간’
1974년. 당시 유행하던 그룹사운드 경연대회가 서울시민회관에서 열렸다. 주간경향컵 그룹쟁탈전이란 대회였다. 여기서 1등을 ‘먹었다’. 지금까지도 함중아가 ‘생애 최고의 순간’으로 꼽는 무대였다.
“신중현 씨 앰프를 몰래 들고 나갔죠. 그런데 이게 공연을 하다 펑 터져버린 거야. 아주 귀한 건데. ‘야, 이거 우리 죽었구나’싶었지. 그래서 머리를 짜 낸 게 … 상패가 큰 컵이었는데 여기에다 술을 가득 따라서 받쳐 들고 갔어요. 물론 무지하게 혼났지. 그러면서도 제자들이 1등 했다니까 좋아하시더라고. 흐흐흐”
○팀 해체후 형이 손잡은‘윤수일과…’ 경쟁
이 즈음에서 그룹 내에 내분이 생겼다. 형 함정필과의 음악적 갈등이었다. “형은 길이 좀 달랐어요. 형은 흑인들 음악, 그러니까 리듬 앤 블루스 쪽을 선호했고 나는 하드락이었거든. 음악 갖고 티격태격 많이 싸웠죠. 결국 골든그레이프스를 해산하기로 결정했죠.”4인조가 둘씩 찢어졌다. 지금까지도 음악 동지로 활동하고 있는 드러머 제임스 성은 당시 형을 따라 나섰다. 함중아는 두 명의 빈 자리를 채워 ‘함중아와 양키스’를 만들었다.
형은 형대로 함중아가 빠진 자리에 기타리스트를 채웠다. 그게 바로 ‘아파트’의 국민가수 윤수일이었다. 형의 그룹은 ‘윤수일과 솜사탕’으로 명명됐다. 함중아와 윤수일은 이처럼 애당초 라이벌일 수밖에 없는 미묘한 인연으로 엮여 있었다. “함중아와 양키스를 만들어 대구 수성호텔에서 일을 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77년에 윤수일이 부른‘사랑만은 않겠어요’가 무지하게 뜨는 거라요. 열 받잖아. 지방에서는 안 되겠다 싶어 서울로 부랴부랴 올라와서 취입을 한 게 ‘안개속에 두 그림자’였죠.”
두 사람의 라이벌전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81년 윤수일이 ‘떠나지마’와 ‘아파트’를 연달아 터뜨리자, 함중아는 불후의 명곡 ‘내게도 사랑이’로 맞불을 놓았다. 윤수일이 ‘환상의 섬’을 정상에 올리니 함중아는 ‘카스바의 여인’을 내놓는 식이었다.
○혼혈가수 전성기라 혼혈인 양 살았죠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다. 혼혈가수로 알려진 함중아는 사실 혼혈이 아니다. 그가 펄벅재단에서 성장했고, 실제로 혼혈친구들과 함께 음악을 했으며, 심지어 그룹 이름이 ‘양키스’라는 데에서 온 오해였다. 짙은 쌍꺼풀에 흰 피부. 앳된 귀공자풍의 외모가 ‘혼혈가수 함중아’의 이미지를 더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혼혈이 아님을 밝히지 않고 지내왔다. 함중아와 윤수일이 등장하면서 국내에는 혼혈가수들의 왕성한 활동이 이어졌다. 희자매의 인순이가 있었고, ‘오, 진아’의 박일준도 가수로 데뷔했다. 언더그라운드에서는 혼혈 음악인들이 크게 늘었고, 대우와 시선이 달라졌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그가 굳이 자신이 혼혈이 아님을 공표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조용필 만난후 기타보다 노래에 빠져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함중아는 본래 가수가 아닌 기타리스트 지망생이었다. 무대에서 노래를 하긴 했어도 마음은 늘 연주에 가 있었다.
스스로 지은 예명 ‘중아(重亞)’는 ‘세계적은 몰라도 아시아에서만큼은 묵직한 기타리스트가 돼보자’하는 뜻이었다.
서울 북악파크호텔 나이트클럽 시절 일이다. 두 팀이 교대로 무대에 올랐는데 하나는 함중아팀이고, 다른 한 팀이 ‘조용필과 그림자’였다. 공교롭게도 두 팀은 종로2가 웨스턴살롱에도 같이 출연했다. “조용필과 그림자는 주로 일본노래를 했어요. 그런데 너무 잘 하는 거라. ‘저 사람은 감기도 안 걸리나’싶을 정도였다니까. 난 그 사람, 지금보다 무명 때 노래를 더 잘 했던 거 같아.”
하루는 무대 뒤로 조용필을 찾아가 “노래 좀 가르쳐 주면 안 돼요”했다. 조용필이 무대에 올라가 노래를 할 때 테이블에 앉아 레퍼토리를 베꼈다. “처음 쫓겨났던 대구 수성호텔에 다시 내려갔죠. 그 전까지는 신중현 씨 곡을 했는데, 이번엔 조용필 씨 흉내를 내 본 거라. 그런데 이게 반응이 확 옵디다. 난리가 아니었지. 그래서 내가 노래에 빠졌다는 거 아닙니까. 그 이후로는 기타를 등한시 했지. 하하!”
함중아씨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혼혈이 아니시라면서요?"라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혼혈이 아니면서도 혼혈가수로 살아야 했던, 고아가 아니면서도 고아처럼 살아야 했던 그의 인생이었습니다.
함중아씨는 바둑을 참 좋아합니다. 바둑을 두다가 무대에 오를 시간을 놓쳐 팀원들은 종종 ‘함중아와 양키스’가 아니라 ‘함중아 없는 양키스’로 공연을 해야 했다지요. 이번 취재에도 사이버오로 정용진 이사와 백승이 부산바둑협회 국장이 동행했습니다. 인터뷰와 사진촬영을 끝낸 뒤 모두들 7080클럽의 테이블에 앉아 그의 공연을 보며 술을 마셨고, 공연시간이 다 끝난 후에는 함중아씨를 포함한 일행 모두가 인근 감자탕집으로 자리를 옮겨 밤새 소주를 마셨습니다.
술을 마시는 동안 음악이 아닌 바둑 얘기만 잔뜩 하고 만 것은 기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합니다.
○고향에 라이브 클럽“후배하나 키워야죠”
오랜 부산생활을 접은 그는 최근 고향인 포항으로 돌아와 오광장에 ‘7080라이브클럽’을 열었다. 그의 마지막 바람은 이 클럽을 포항의 최고 명소로 만드는 것, 그리고 좋은 후배가수 한 명을 키우는 것이다. “이거, 옛날 얘기만 하니까 좀 그러네. 벌써 내 나이가 이렇게 됐나.”
새벽 5시, 포항의 감자탕 집에서 기자에게 “1시간만 더 있다 올라가라”며 함중아 씨가 소주잔을 내밀었다. 가장 한국적인 록을 구사하는 신중현의 음악적 어법에 젊은 시절 영향을 받은 산타나의 남미풍 리듬을 접목시키고, 하드록에 트로트를 섞은 ‘세미 트로트록’, ‘고고록’을 창시한 함중아. 육체는 아닐지 몰라도, 그는 분명 ‘음악적 혼혈’을 타고난 사람일 것이다.
함중아의 바둑사랑
가수 함중아에게 가기까지
불멸의
히트곡, ‘내게도 사랑이'의 가수 함중아 씨가
바둑광이란 말은 오래전부터 들어왔다. 게다가 내가 월간바둑 입사시절부터 절친하게 지낸 백승이(현 부산바둑협회 전무이사) 형과 그가 아삼륙이라
하니, 취재는 떼놓은 당상이나 다름없었다. 김철중 3단을 비롯한 프로기사와 박성균 아마7단 등의 고수들과 교유하고 있다는 소식도 심심찮게 듣던
참이었다. 그래서 언제 한번 부산에 따로 걸음해 함중아 씨를 취재해야지 해야지 하면서도 그렇게 10년을 훌쩍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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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든 취재 가능한 ‘통발 안에 든 고기(?)'라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접촉하기 힘든 연예인이라기보다 바둑계 일로 자주 대면할 기회가 있는 인사라는 느낌이 더 강하게 지배해서였을까. ^^;;
아무튼 이러구러, 여전히 변죽만 울려대고 있던 차에 스포츠동아로 전직한 후배 양형모 기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주말판에 함중아 씨를 싣고 싶으니 다리를 놓아달라는 거였다. 백승이 형과의 관계를 알고 한 부탁이었다. 예전부터 ‘함중아 취재'를 벼르고 있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후배는 은근슬쩍 동행취재를 제안했다. 말이 동행취재지 기실 기름칠 역이나 최소한 찍쇠(사진기자)로 부려먹을 속셈이 분명했지만(^^) 흔쾌히 수락했다.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하랴 싶었고, 오랜만에 후배와 ‘왕년의 콤비'를 맞춰 보고도 싶었다. 음악적인 부분은 양기자가, 바둑적인 부분은 내가 쓰기로 역할분담했다.
[양형모 기자가 ‘스포츠동아'에 쓴 함중아의 음악인생 이야기를 먼저 보실 분들은 ← 여기 클릭]
대한민국에서 프로기사와 가장 많이 둔 아마추어?
포항으로 가는 길은 즐거웠다. 자칭 부산바둑의 마당쇠를 자처하는 백승이 형과 이일수 형이 합세했다. 넘어져도 떡광주리에만 넘어진다고, 때마침 이틀 전(10월 24일) 포항 오광장 거리에 함중아 씨가 ‘7080라이브클럽'을 오픈해 타이밍도 이만한 타이밍이 없었다. 업소 좌우 거리로 늘어선 화환이 끝이 없었다. 200개가 넘어섰다는데 오죽했으면 포항시내 꽃이 동나 꽃집에서 “거기 도대체 뭐하는 집이냐?”는 문의전화가 왔을 정도였다.
함중아, 하면 84년부터 활동한 ‘부산'이 퍼뜩 등가어(等價語)로 떠오르는 가수. 그런데 어인 일로 포항에 둥지를 틀었을까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포항 연일 출신이었다. 친형이 지금도 포항 안강에 살고 있단다.
인터뷰는 오징어 물회로 다함께 저녁을 먹은 뒤 ‘함중아7080라이브클럽' 출연자 대기실에서 2시간 가량 이어졌다. 그리고 영업이 끝나는 새벽 3시까지 공연 틈틈이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고 이도 아쉬워 인근 감자탕집으로 옮겨 아침 해가 뜰 때까지 취중취재(?)를 하다가 결국 뜬눈으로 비몽사몽 귀경했다. 취재라기보다는 오랜만에 만난 동네 형님과 밤새 회포를 풀다 온 기분이었다. 이런 게 바둑의 장점일까. 바둑 한 판에 10년지기의 힘이 있다는 말.
중언부언할 필요 없다. 함중아 씨가
바둑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대변하는 에피소드 몇 개.
<1> 98년 무렵 부산의 모 나이트클럽에 전속으로 출연할 때 그 옆에 한국기원 연제지원이 있었다. 그때 그는 참새 방앗간 드나들 듯 쉬는 시간마다 수시로 건너가 바둑 삼매경에 빠졌고 다음 스테이지를 펑크낼 때도 왕왕 있었다. 당시 연제지원장이 백승이 씨였고 이 ‘바둑계의 마당발'을 통해 수많은 바둑인과 연결되었다. 어떤 날은 임선근 9단이 보이기에 이게 웬 횡재냐 싶어 다짜고짜 지도기 한판을 부탁하기도 했다. 이런 함중아 씨에게 부산바둑협회 이사는 당연직(?)이었다.
“그때는 제가 그래도 끗발이 좀 있을 때라 사정이 생겨 못간다 둘러대고 나머지 밴드 멤버들로 무대를 때우기도 했죠. 흐흐. 제 바둑사랑요? 지금도 전 ‘한국기원' 간판만 봐도 가슴이 설렐 정도예요. 서울에서 기사분들 내려오면 술대접도 좀 하고…, 대한민국 아마추어 중에 프로하고 가장 많이 둔 사람이 저일겁니다. 흐흐.”
2008년 5월 사직실내체육관에서 열린 부산광역시장배에서 프로기사들과 함께. 가운데 선글라스를 낀 이가 함중아 씨. (사진/부산바둑협회 제공) |
2008년 10월 부산협회장배 바둑대회에 보낸 부산바둑협회 함중아 이사의 화환(왼쪽에서 두번째). 함중아 씨는 2000년 고 김영성 부산바둑협회장의 권유로 부산바둑협회 이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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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많은 프로기사와 친하지만 그 가운데 김철중 3단은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다. 한 10년전쯤 여름에 부산 해운대로 김3단 가족을 초대한 일이 있다. 그때 함중아 씨와 바둑이 동수인 친구 가족 등 세 가족이 파라다이스호텔을 잡아놓고 피서를 즐기기로 했는데 김철중 3단은 바닷물에 몸 한번 담가보지 못한 채 돌아갔다. 2박3일 내내 세 사람이 바둑만 뒀기 때문이다.
“그냥 두기 뭐해 판당 약간의 돈을 걸고 친구와 번갈아가며 ‘마법의 접바둑 마술사'에게 줄창 도전했는데 한번도 못 이겼어요. 대접 톡톡히 했지. 하하. 하도 기가 막혀 그때 너 도대체 몇 점까지 접을 수 있냐고 물으니까 8점이라고 하더군요. 요즘은 그냥 6점으로 둡니다. 가장 많이 바둑을 두어본 기사가 김사범이지요.”
<3> 2003년말이었던가. 고관절 수술로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절대 안정'을 취하라는 의사의 처방을 받은 바 있다. 관절 수술을 받은 환자로서 의자에 앉아 바둑을 두는 행위는 금물 중의 금물임은 말할 나위 없다. 그런데도 함중아 씨는 하루를 견디지 못하고 병실에 바둑꾼들을 불러 모아서 퇴원할 때까지 줄창 앉아 바둑을 두었다.
부산에서 열린 농심신라면배에서 이창호 9단과 함께. |
김인 9단과도 반갑게 인사. |
치수만 맞춰주면 누구든 ‘콜!'
함중아 씨가 바둑을 처음 배운 건 펄벅재단에서 폐가 안 좋아 1년 정도 요양할 때였다.
“15살 때인가 인천에 있는 요양원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프로기사가 되려고 바둑공부하던 사람이 거기 같이 있었던 거 같아. 이 양반이 심심한데 바둑 가르쳐주겠다며 바둑판 앞에 끌어 앉히더라고요. 난 두기 싫어 죽겠는데 말이죠. 하하. 정석이고 뭐고, 하여간 그때 얼마나 억지춘향으로 배웠으면 지금도 그 정석 안 잊어버렸다니까….”
그 이후 기회 있으면 조금씩 두고, 그렇게 7급까지 올라왔다. 골든그레이프스 팀으로 부산에 와 있을 때 멤버들이 하나같이 고만고만한 바둑광이었다. 친형인 함정필 씨(키보드)가 3급으로 가장 셌고 함중아 씨와 제임스성(드럼) 씨가 동급으로 4점을 깔고 두는 실력이었다. 1시간 연주하고 1시간 쉴 때 팀원들은 10만원을 걸어놓고 리그전을 벌이곤 했다. 돈보다 자존심의 문제라 경쟁심이 장난이 아니었다.
“다들 바둑책을 들고 공부할 때 난 책은 보기 싫고…. 그래서 무조건 2시간 일찍 출근, 근처 기원으로 직행해 원장하고 무조건 실전 트레이닝을 했지요. 내가 잘 두지도 못하면서 장고로 일관하니까 원장이 빨리 두라고 코치하데. 그래야 는다고. 한 2년 되니까 형님하고 동수가 되더라고. 그렇게 7급 벽을 넘어섰어요. 당구도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으면 150에서 잘 안 늘듯이 바둑도 혼자 7급까지는 어영부영 갈 수 있는 거 같은데 그 이상은 뭔가 동기부여나 계기가 없으면 안되는 거 같아요.”
지금은 형님과 친구 제임스성이 거꾸로 접히고 두는 신세가 되자 “절에 들어가 바둑공부해야겠다”며 벼르고 있다 한다.
7급시절 바둑맞수이기도 한 제임스성은 평생을 함께 한 친구이자 음악동지이다. 함중아가 형 함정필과 음악적 갈등으로
골든그레이프스를 해체할 때 제임스성은 형을 따라나서 '윤수일과 솜사탕'을 만들었다. 그때 윤수일의 히트곡 '사랑만은 않겠어요'는 애초 제임스성이
부를 예정이었으나 먼저 윤수일에게 양보했고, | ||
이 한 순간의 선택이 극과 극을 낳았다. 밴드 드러머로 활약해 이름이 크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제임스성도 신중현과 팀을 함께 할 때부터 가수로 활동했다. 포항에 가면 함중아와 더불어 그의 선이 굵은 노래도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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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실전은 굉장히 많아요. 굉장한 속기고요. 3급 벽을 확실히 넘어서기 위해선 책을 보든가 마음먹고 지도를 받아야 하는데…, 두는 거 자체를 너무 좋아해서…. 나보고 화초바둑이라고, 그림은 참 좋은데 뒤에 가면 마무리가 안된다고, 스스로 무너진다고들 합디다. 그래도 상대가 프로기사든 1급이든 치수만 맞춰주면 얼마든지, 언제든지 내기바둑 둘 자신 있다 이겁니다. 하하.”
함중아 씨가 입에 올리는 급수는 예전 ‘기원 급수' 체계를 말한다. 인터넷 급수로 치면 아마3~4단을 오르내리는 실력이다. 틈만 나면 인터넷 바둑 둔다 한다. 사이트는 가리지 않으며, 사이버오로는 요즘은 뜸하지만 예전엔 꼬박 24시간을 둔 적도 있다 했다. 사이버오로의 대화명이 ‘옥돌비자.' 대화명도 기물(棋物) 그 자체다.
기물 얘기가 나오자 함중아 씨가 은근히 자랑하는 게 있었다. 포항에 온 직후 이 지역 어린이바둑교실 이성호 원장으로부터 귀한 선물을 하나 받았는데, 그게 이세돌 9단과 윤준상 국수가 국수전 도전기 때 둔 조개바둑알이라며 이에 걸맞은 바둑판을 구해 가보로 간직할 참이라고 뿌듯해한다.
바둑은? 무조건 무조건이야
도대체 바둑의 어떤 점이 그리 좋더냐고 물어보았다. “당구, 탁구, 마작…. 제가 원래 잡기를 좋아합니다. 승부욕이 있는 건지도 모르죠. 하하. 그런데 이것저것 다 해봤는데 바둑만한 게 없더라고요. 밤새도록 둬도 지겹지 않아요. 그냥 좋아요. 제가 기타를 잡게 된 계기가 부천 소사의 펄벅재단에서 생활할 때 사감선생님의 통기타 소리가 정말 좋아서 배우게 되었듯 땡기는 데야 어쩌겠어요.”
음악인으로서, 바둑과 음악의 공통점이 있다면?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겠지만, 음악도 악기를 접해 보면, 기타를 처음 접해보면 재미있어서 빠져 들 듯이 바둑도 사람을 매료시키는 마력이 있어요. 재미는, 어려운 게 재미있지요. 바둑도 처음엔 진입장벽이 높잖아요. 그렇지만 그 매력을 맛보게 되면 오래 가지요. 쉬우면 별로…. 통기타도 알고 보면 쉬운 게 아닙니다. 한 10년은 해야 그 맛을 알게 됩니다. 장고도 10년은 쳐야 제 소리를 낸다는 말이 그 말이지요.”
지방에서 뿌리박고 활동해서이기도 하겠지만 성격상 가깝게 지내는 연예인이 별로 없는 편이다. 하지만, 개그맨 엄용수 씨와는 둘도 없는 친구다. 그러고 보니 엄용수 씨도 알아주는 바둑고수. 지금까지 4점 놓고 두 번쯤 둬봤다는데 처음엔 봐주었는지 이겼고 최근 부산시민바둑대회 명사초청 공식대국에선 보기 좋게 졌다. (아래 사진)
명사대국이라면 2002년 봄 바둑TV에서 벌인 김도향 씨와의 ‘가수 라이벌전'이 유명하다. 그때 김도향 씨의 스승격인 양상국 9단과 함중아 씨의 스승격인 김철중 3단을 비롯하여 임동균, 김동섭 아마7단 등 두 가수와 친분이 두터운 기사들이 총출동, 응원전을 펼쳐 장관을 이루었다. 승부는 ‘실전 잡초바둑' 함중아 씨의 승.
조훈현 바둑과 함중아의 노래
함중아 씨는 인터뷰 말미에 자신에 대한 잘못된 정보 두 가지에 대해 다시 말했다. 방송에서 여러번 말했는데도 여전히 인터넷에 바로 잡히지 않은 채 떠돈다며, 자신은 혼혈출신이 아니라는 것과 ‘내게도 사랑이'가 대학가요제 곡이 아니라는 점을 한번 더 밝혀주었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10대 고교시절부터 음악에 대한 꿈과 낭만을 간직하며 살아온 4인조 남성밴드의 애환을 담은 이야기다. 이 영화에
함중아의 ‘내게도 사랑이'가 연주된다. 함중아 씨 역시 10대 후반 매일 새벽 남대문까지 직접 만든 과자를 리어카로 실어 나르며 음악을
배웠고, 아현동에서 신촌 음악실에 갈 차비가 없어 걸어가야 하는 간난고초의 세월을 견디며 꿈을 키웠다. 그때는 모든 게 부족했지만 음악적인
정신은 한겨울의 호수처럼 차고 깊었으며 투명했다. 그러나 모든 게 풍요로워진 요즘, 음악이 정작 사양길을 걷는 듯해 안타깝다. 시대를 탓해야
할까. 통음에 부대껴서였을까. 신음처럼 흘리던 그의 독백이 마치 퇴락해가는 바둑의 뒷모습을 보는 듯하여 덩달아 숙연했다.
“기계음악이 나오고 난 뒤로, 컴퓨터가 나오고 도움도 됐지만 음악이, 노래란 게…, 요즘은 막…, 남는 게 없이 가는 게 많아서…, 시대가 변해서…, 젊은 애들은 그런 곡들 잘 외워대데…. |
연주자? 요즘엔 거의 없다고 봐야 해. 기계로 다 하니깐. 연주하던 사람들 밤무대 설 자리 없으니까…. 나이트도 거의 립싱크고..., 100프로 라이브로 하는 게 없어…, 먹히지도 않고. 훌륭한 연주자들 무대 설 데가 없어서 다 흩어지는 판이지….”
그래서일까. 그는 여전히 조훈현 바둑을 좋아한다 했다. 이젠 젊은애들에게 팍팍 나가떨어지는 ‘옛날바둑' 취급을 받을진 몰라도 그에겐 승부를 떠나서 그 스타일이 제일이란다. 그가 남긴 히트곡들은 주로 퇴근해서 조용할 때 쓴 곡들이다. 전 세계 작곡가들의 대곡은 아마 다 5분 안에 나온 것일 거라며 쓰면서 ‘이거 되겠다, 안되겠다' 여부는 본인들이 다 느낀다고 말한다. 억지로 짜낸 것은 다음날 보면 ‘영 아니올시다'라는 걸 대번에 느낀다고 한다. 마음을 담지 못한 음악, 마음이 부르는 노래가 아니고선 영혼을 느낄 수 없는 법. 승부를 떠나 조훈현의 바둑에서 그 무엇을 느끼듯 함중아의 노래에서 우리들이 여전히 건져올리는 것은 흘러간 추억만이 아닐 것이다.
기사출처 http://www.cyberoro.com/news/view.htm?num=51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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