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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슬림 [디에고 엔리케 오소로노] [작가의 말 -2015년 10월-] 레바논계 이민자인 그의 아버지는 멕시코에서 장사를 하며 재산을 모았다. 멕시코 국립자치대학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한 이후 카를로스 슬림은 장난기가 많은 학생으로 대학 때 이미 수학 강의도 하고 대학 야구팀에서 포수를 맡기도 했으며, 그 당시만 해도 혁신적이었던 전자계산기 사용에 유난히 관심을 보였다, 이후 그는 레바논에서 자행된 사브라-샤틸라 대학살을 명령한 레바논 대통령의 집안이었던 소우마야 도미트 제마엘과 결혼했다. 결혼을 한 후 카를로스 슬림은 자신과 아내인 소우마야의 이름 첫 자를 따서 카르소라는 회사를 세웠다. 이 책은 슬림의 증언이 담긴 철저한 역사적 자료와 정보기관의 비공식 문서 조사, 더불어 친구들과 기업 경영자들과의 특별 인터뷰들을 통해, 경제적 지표인 한 성공한 기업가에 대한 진부한 이야기를 넘어 세계 최고부자 멕시코인은 과연 누구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이야기에 다가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슬림과 관련된 경제 보고서나 그의 제국에 대한 경제적 시선만 담고 있는 게 아니다. 그가 정치적으로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 지를 비롯해 그가 끼치는 사회적인 영향, 대중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그의 행동들과 실수들을 담았다. 그와 인터뷰를 하면서 다양하고 민감한 주제들에 대해 질문을 하기도 했지만nd하는 태도를 보였다. 논쟁의 여지가 있는 일들에 대한 질문들에도 그는 꾸밈없이 솔직히 대답하려고 했다. 이 책을 위해 일곱 시간이상 할애를 해준 슬림에게 꼭 감사를 전해야 할 것 같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나는 이 책의 작업을 8년 전부터 시작했다. 이 자서전이 평소에는 많이 들어보지 못했던 그의 목소리가 직접 실려서 특별한 힘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이 자료들을 바탕으로 실제로 그가 멕시코인 들이 가난과 싸우는데 도움을 줬는지, 경제가 사회, 정치적 문제들과는 무관하다고 믿는지, 그저 돈이면 살아갈 수 있는지와 같은 의문들을 품고 현재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에 대해서 분석하고 알아가는 도전을 해보길 권한다. ‘과연 세상에서 가장 부자가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에 대한 질문은 이 책에 대해 방대한 조사를 하는 과정 동안 나를 이끌어 주었던 질문들 중 하나이다. 하지만 결국 이 질문을 비롯한 여러 생각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기 위해 내 의견을 공개적으로 표명하지는 않기로 했다. 긍정 혹은 부정적인 선입견 없이 부자들을 분석하기란 쉽지 않다. [1. 거래] 슬림은 자신의 사업 스타일을 더 잘 이해시키기 위해서 직접 십계명을 만들었다. 1. 최소 계층 구조로 이루어진 단순한 조직 구조. 인적 개발과 집행 기능 증진을 위한 내부 교육, 신속하고 유연한 의사결정, 중소기업들의 장점활용은 대기업을 더 크게 키우는 방법이다. 2. 경기가 좋을 때 절약하면 기업이 더 발전하고 부유해진다. 동시에 위기 때는 급격한 조정을 피한다. 3. 생산과정의 끊임없는 개선과 단순화, 품질향상, 교육, 성장, 현대화에 집중한다. 늘 가장 높은 국제 기준에 따라 생산성과 경쟁력을 높이고 비용과 지출을 줄인다. 4. 기업은 절대 소유자 또는 관리자의 기준에 따라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작은 연못 안에서 크다고 착각하지 않는다. 비 생산요소 자산에는 투자를 최소화 한다. 5. 분명한 목표와 알맞은 방법들이 조화롭게 움직이지 않으면 둘 다 소용이 없다 6. 기업에서 지출되는 돈은 연기처럼 사라진다. 따라서 창출되는 이익을 재투자해야 한다. 7. 기업가의 창의력은 사업에 적용될 뿐만 아니라 , 이것으로 우리나라의 많은 문제들도 해결할 수 있다. 우리는 그룹의 조직들을 통해 이 일을 한다. 8. 견고한 낙관주의와 인내심은 언제나 열매를 맺는다. 9. 일 할 줄 알고 일할 방법까지 갖고 있다면 모든 시간은 언제나 적기이다. 10. 죽을 때 빈손으로 떠난다는 사실을 언제나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살아 있을 때만 일을 할 수 있다. 기업가가 부를 창출하지만 살아있는 동안 일시적으로 관리할 뿐이다. [2. 포브스 (Forbes)] 이후 카를로스 슬림이 오랜 멕시코 국영기업이었던 텔멕스의 경영권을 얻은 후에 사용한 전술은 이렇다. 12년간(2000~2012)사용자가 830만 명에서 9620만 명으로 증가한 멕시코 휴대폰 t장의 성장으로 생성된 자본을 자신의 기업 중 중남미 최대통신사인 아메리카 모빌의 재정 강화에 투자해서 거대한 자본을 보유함과 동시에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페루, 칠레, 에콰도르, 콜롬비아의 새로운 통신 기업을 인수해 나가는 것이었다. 2010년 라틴 아메리카 18개국에 슬림의 고객은 2억5천930만 명이 되었고, 여기에는 브라질의 주요 유선, 이동통신 회사인 클라로와 엠브라텔도 포함된다. [3. 성공] 그들이 재산의 절반을 기부할 거라는 이야기를 강조합니다. 물론 좋습니다. 근데 왜 절반이죠? 왜 7~80%가 아닌 거죠? 제가 비율을 말하자는 건 아닙니다. 제 질문은 이겁니다. 왜 그들은 직접 나서지 않는 걸까요? 왜 시간을 내주지 않는 걸까요? 왜 돈 대신 시간을 내주고 가지고 있는 돈을 한데 모아 문제를 직접 해결하려고 나서지 않는 걸까요? 사람들에게 돈만 기부한다고 그게 해결책이 아닌데 말입니다. 그건 그저 자신이 쌓은 재력이나 부를 부끄러워할 것인가, 아니면 기분 좋게 있을 건가 중에 스스로 편하고자 한 선택에 불과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수많은 가난한 국가들의 국내 총생산과 맞먹는 재산을 쌓아온 이 남자는 자신이 생각하는 부에 대한 입장에 대해 “저는 제가 쌓은 부가 전혀 부끄럽지 않습니다. 비록 여러 가지 면에서 이 말에 찬성만큼이나 비판도 많겠지만요.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도 궁금한 게 있으시다면 다 대답해드리겠습니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4. 칸(Khan)] 멕시코 혁명 100주년을 맞게 된 2010년, 슬림은 시간당 평균 이백만 달러를 벌어들일 정도로 많은 재산을 일군 상태에서 70세 생일을 맞게 되었다. [5. 돈] 한참 카를로스 슬림이 살면서 받은 영향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가 갑자기 탁자에서 일어났다. 여섯 발자국쯤 양탄자가 깔린 넓은 서재 한 귀퉁이로 가더니 오른손 집게손으로 여러 책 중 하나를 가리켰다. 보세요, 이건 버나드 바루크의 책인데 아주 흥미롭습니다. 이건 링-템코-보트를 설립한 제임스 조셉링의 책입니다. 물론 지금은 이 기업이 파산했지만, 그가 어떻게 그것을 만들었는지는 여전히 아주 흥미롭습니다. 또 이 책은 범죄를 저지르고 쿠바로 도망간 미국의 경영자이자 금융가였던 로베르토 배스코의 책입니다. 이 책에는 70년대 위기 상황들이 아주 잘 설명되어 있어서 참 좋습니다! 이건 자동차의 왕이라고 불리는 헨리포드의 책입니다. 이건 또 말하게 되는 것 같은데 호세 에세기엘이투리기가의 책입니다. 이건 진 폴 케티의 책이고 이 책은 플레이보이에서 출간한 그의 또 다른 책입니다. 그 멕시코의 억만장자는 책장에서 다시 책 한권을 꺼냈다. 작고 낡은 책이었다. 「부자가 되는 법」으로 미국의 석유 부호인 진 폴 게티가 쓴 책이었다. 이 책을 넘겨보니 검은 색으로 밑줄을 그어놓은 구절들이 눈에 들어왔다.
카를로스 슬림은 원래 자서전과 경영서, 스포츠와 경제 통계 자료들을 많이 읽는 독자이다. 또한 서재에는 다양한 역사책도 많다. 그렇게 90m2의 사무실벽에 여섯 단으로 된 검소한 책장에는 책들이 가득하다. 그가 일할 때는 주로 종이들이 수북이 쌓여 있고 초콜릿 포장지가 널브러져 있는 자유로운 탁자에서 하는 편이다. 사무실에 있는 수많은 책 중에서 그가 가장 먼저 가리켰던 책은 1957년 휴튼 미플린 출판사에서 나온 미국의 사학자 마가렛 루이스 코이트가 쓴 「미스터 바루크」였다. 1957년은 슬림이 멕시코 국립자치대학에서 토목공학 공부를 시작한 해였다. 이 책은 20세기 초 설탕 사업으로 돈을 벌어 백만장자가 되고 남들과 제휴하지 않고 혼자 움직여 ‘월가의 외로운 늑대’라는 별명이 붙은 미국의 금융가인 버나드 바루크의 이야기이다. 슬림은 콜롬비아의 노벨상 수상자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와도 우정을 쌓았다. 그 외 사담을 나누는 사이로는 미국의 전 대통령 빌 클린턴과 과학자 스티븐 호킹, 역사학자 휴 토마스, 미래학자 엘빈 토플러, 전략가 니콜라스 네그로폰테, 스페인의 전 대통령이자 그의 친구이기도 한 펠리페 곤잘레스 등이 있다. 그들은 일요일이나 월요일 밤이면 로마스 데 차플테펙에 있는 이 부호의 집에 와서 아내인 소우마야를 비롯해 자녀들인 카를로스, 마르코, 안토니오, 패트릭, 바네사, 요한나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과학과 문학, 정치, 국제 정세 등 다양한 주제로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어 왔다. 카를로스 슬림은 끊임없이 책을 읽는 독자일 뿐만 아니라, 멕시코의 거대한 서적 판매상이기도 하다. 그가 소유하고 있는 200개의 레스토랑 체인점과 상점들이 있는 산본스는 멕시코의 가장 큰 서점 망을 갖고 있다. 저의 공식 자서전은 제가 쓰게 될 것입니다. 단지 지금은 다른 할 일들이 많아서 이러고 있습니다만. 그러면서 그는 다시 정확히 짚고 넘어갔다. 하시는 질문들에는 답변을 다 드리겠지만, 당신 책에는 거짓말을 보태지 마시고 제가 말한 것만 써 주시길 바랍니다. Ⅱ Crlos Slim [6. 텔멕스(Telmex)] 보통 사람들은 빌 게이츠를 천부적 재능이 있는 사람으로, 워렌 버핏은 지칠줄 모르는 일 벌레로, 조지 소로스는 반항적이면서도 세련된 백만장자로 보고 있다. 하지만 카를로스 슬림은 오천만의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에서 나온 세계적인 부자로 더 알려져 있다. 그것은 아마도 그의 일의 가치 대신, 그를 부정부패로 재산을 모으고 권력에 아부해서 이득을 챙기는 사람, 혹은 러시아 올리가르흐들이나 신흥부자와 같은 정도로만 그를 보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은 슬림의 부를 독점적인 사업 형태 덕분이라 했다. 이 거물이 그 말을 여러 번 부인하긴 했지만, 사실 멕시코에서는 정부 도움 없이는 절대 세계 부의 정상에 오를 수 없다는 생각이 매우 지배적이다. 독점으로 생기는 이득은 정치적 이유들과도 결부되어 있었다. 멕시코 정부는 국영 기업들을 매각하는 것이 수익성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만 했다. 그래서 시장 경쟁에 맡기는 것 대신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성공적이라는 사례를 만들기 위해 텔멕스를 강화시키고 수익을 극대화했다. 이런 면에서 사업가로서의 슬림의 성공은 곧 제도혁명당 정권의 민영화라는 정치적인 성공을 의미했다. 1938년에는 외국인이 소유하던 두 개의 전화 회사가 있었고, 1948년과 1969년 사이 두 회사는 합병해서 텔멕스를 만들었다. 이 기간에 멕시코 경제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고 발전을 보였다. 하지만 70년대 나라의 정치적 위기가 오면서 통신 기업들은 국유화되었고, 이것은 문서에 나온 대로 ‘요금과 정치, 노사관계 악화 및 증세부담을 의미했다. 하지만 1988년 변화와 개방의 시기에 텔멕스의 새로운 민영화 과정이 시작되었다. 카를로스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 대통령 집권 시절에 거의 천 개의 공기업이 민영화되었고, 특히 그것으로 기업들 중 가장 많은 수익을 냈던 곳이 _정치적인 논란도 있지만- 바로 유일한 국영 통신사 텔멕스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슬림은 그저 선거 운동에서 카를로스 살리나 데 고르타리와 함께하는 수많은 기업가중 한 명이었다. 그 당시 슬림은 50세도 채 안된 나이였고 그에 대해서 알려진 것도 많지 않았다. 분석가인 헤라르도 에스키엘은 2015년에 평등을 위한 기구들과 옥스팜을 위해 멕시코의 심각한 불균형:경제 및 정치적 힘의 집중이라는 제목의 연구서를 썼다. 그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연구를 재개하면서 2005년과 2009년 사이에 슬림의 통신기업의 독점이 멕시코 국민들에게 1290억 달러 이상의 복지 손실을 의미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것은 국내총생산의 약 1.8%에 해당되는데,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슬림은 카를로스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가 기획예산청장을 맡았을 때부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이 부호가 적극적으로 제도혁명당을 지지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내가 인터뷰를 했던 열 명중 그 누구도 슬림을 천재나 뭔가 엄청나게 창조적인 인물이라 말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를 수수하며 성실한 제도혁명당 지지자로, 텔멕스 매각 일 년 후에<포브스>의 세계부자 순위에 오른 인물이라고 대답했다. 슬림은 자신의 자료인 ‘그루포 커르소의 역사’에서 텔멕스는 기술적, 재정적으로 몹시 어려운 도전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그것을 인수했을 때, 멕시코 전화는 최악의 서비스, 구식장비, 외부 공장 악화, 많은 고객의 불만족, 힘든 조정을 거친 교차보조 상태로 운영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국가의 사회, 경제적 삶에 큰 영향을 끼쳤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투자를 하는데 는 5000억 페소 규모의 무보증 회사채를 발행해 자금을 모았다고 밝혔다. 개별 투자자들을 통해 3070억 페소를, 자본 증가로 5000억 페소를 1993년 1월에 해외공모나 기업들의 투자로 1조 940억 페소를 확보했습니다. 슬림은 총액과 투자기간(5~10년)면에서 이 과정이 너무나 어려운 숙제였다고 털어놓았다. 특히, 기술파트너들인 프랑스 텔레콤, 사우스 웨스턴 벨과의 협상에 대해서는 특히 힘들었습니다. [7. 민영화] 콜로라도 대학의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자크 로고진스키는 멕시코의 여러 정치적 위기 순간을 이렇게 평가했다. 1980년대 국영 복권에서 일했던 자크 로고진스키는 메세추세스 공과대학교를 졸업한 경제학자이자 카를로스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의 주요 측근중 한 명이었던 페드로 아스페로부터 멕시코 정부의 뼈대를 세우는 과정에 참여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저희와 함께 일해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미 탯줄은 잘렸습니다.” 그에게 이렇게 말한 페드로 아스페는 카를로스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 전의 대통령이었던 메겔 데 라 마드리드 정부 시절 기획 및 예산 장관이었다. 그렇게 로고진스키는 1988년 초, 세계의 민영화를 배우기 위해 페드로 아스페와 함께 하게 되었다. 이런 생각으로 그가 실행에 옮겼던 첫 번 째 민영화 과정중 하나가 바로 멕시코 정부 소유 호텔이었던 엘 마라도르 데 아카풀코 였다. 이곳은 라 케브라다 절벽 근처에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다이빙을 즐기는 곳으로 유명하다. 일부 멕시코 신문의 정치면은 제도혁명당 정권에서 민감한 문제들이나 대통령의 결정을 알리는 방편이 되기 일쑤였다. 텔멕스의 문제도 그 중 하나였다. 그해 신문들을 읽어보면 입찰의 우승후보는 슬림이 아니라, 이전부터 어느정도 텔멕스의 주식을 보유하고 기업 이사회에도 참여하고 있었던 로베르토 에르난데스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에르난데스가 밀리면서 슬림과의 사이는 멀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그 은행가는 체면이라도 세우려고 그 과정을 인정하는 광고 게시를 명령했다. “입찰은 금액만으로 결정되는 겁니다. 그 어떤 예외도 없습니다!” 로고진스키는 카를로스 슬림이 가장 좋은 금액을 제안했기 때문이지, 대통령의 특별한 도움을 받아서 인수에서 성공한 것은 아니라며 흥분해가며 강조했다. “그렇다면, 입찰 과정이 조작된 거라는 관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슬림은 텔멕스 인수에 대한 로고진스키 의견을 듣고 처음에는 무척 참여를 망설였다. 그러자 카를로스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 대통령과 그 당시 재무장관인 페드로 아스페는 오랜 비행시간동안 그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슬림에게 일본 여행까지 제안했다. 대통령과 아스페 장관, 슬림이 일본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그 장관은 제게 “제 생각에는 우리가 슬림을 어느 정도 설득한 것 같기는 한데,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가서 그를 확실하게 설득해 주세요라고 했습니다. “ 그리고 나서 며칠 후에 그는 슬림의 집으로 찾아갔다. “저는 슬림의 집에서 함께 있었습니다. 물이 한 번도 채워지지 않은 수영장이 있는 그 집에서 말이죠.”로고진스키는 그 부호가 한 말을 부연 설명했다. “만일 제가 거기에 참여해서 이기면, 제 삶이 바뀔 텐데, 그게 제가 정말 원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 가족은 일요일마다 이 집에서 함께 모입니다. 이번 주 일요일에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월요일에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로고진스키는 월요일에 다시 카를로스 슬림을 찾아왔고, 슬림은 그에게 입찰에 참여. 그렇게 1990년 11월 15일 그는 텔멕스 입찰 신청을 했다. 그 당시 슬림의 협력자였던 하이메 치코 파르도는 입찰 서류에 서명하고 멕시코시티의 로마스 데 차풀테백 지역, 시에라 베르티엔테 1020 번지를 모임장소로 제공했다. 그의 메시지는 다음의 서문으로 짧게 끝났다. “저희는 텔멕스의 민영화로 인해 생기는 기회와 도전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적인 수준의 전기통신 시스템을 발전시키기 위해 텔멕스와 정부가 협력하는 과제를 이루는데 온전히 헌신할 것입니다.” 진실을 말씀 드리자면, 살리나스 대통령의 그 친구는 그 당시 텔멕스의 진짜 주인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사우스웨스턴빌이 7,200만 달러 출자를 결심하지 않았더라면, 텔멕스의 주인은 아마 로베르토 에르난데스가 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민영화는 대통령의 이 친구에게 유리하기는 커녕 미국 사업가의 편을 들어준 셈입니다. 언론에서는 슬림이 1달러 받을 때 미국 주주들은 2달러씩 받았다는 내용을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 민영화 과정 마지막에 텔멕스의 자본 구조에도 전혀 주목하지 않았다. 10% : 사우스 웨스턴벨 5.23% :멕시코 투자자 23명 5.17% : 칼르로스 슬림 5% : 프랑스 텔레콤 4% : 직원들을 위해 보유함(5만명) 70.6% :뉴욕과 멕시코 증권 거래소 제대로 말하자면, 그 당시 대통령의 그 친구는 텔멕스의 진정한 주인이 아니었다. [8. 독점]
그는 경제협력 개발기구의 말을 인용해서 텔멕스는 멕시코의 유선통신 시장의 80%를 , 이동통신 시장의 70%를 차지하고 있다. 이 회사는 모든 시장분야와 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갖고 있다고 말하며 텔멕스가 오늘날 민간 독점인 것은 확실하다고 쐐기를 박았다. [9. 제도 혁명당(PRI)] 2000년 7월 2일 화요일, 코카콜라 멕시코 법인 사장을 했었던 비센테폭스케사다가 국민행동당의 대표로 멕시코 대선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멕시코에서는 70년 이상 집권하던 제도혁명당(PRI)이 처음으로 패배하게 된 중요한 선거였다. 그때 카를로스 슬림은 운 나쁘게도 선거에서 진 반대쪽당의 선거본부에 참여하고 있었다. 슬림은 제도혁명당에 지갑을 열어주던 기간에<포브스>부호 순위에 올랐다. 그 당시 신문 기록에 따르면, 카를로스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 대통령의 임기인 6년간, 그 부호는 멕시코의 차기 대통령 후보자 선거운동에 적어도 2500만달러를 냈다. 이것은 공식적인 대통령 후보였던 루이스 도날도 콜로시오무리에타가 살해된 후에 다시 후보로 지명된 에르네스토 세디오를 위한 것이었다. 그 당시 신문기사를 보면 , 1993년 2월 임기 마지막 때가 되자, 카를로스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는 집권당의 승리자금 마련을 위해 슬림을 비롯한 자산가들을 불러 식사를 했다. Ⅲ Carlos Slim [10. 심장] 슬림이 <포브스>에서 처음 세상에서 가장 부자로 등극하기 십년 전, 그는 심장병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었다. 그해 모든 가을 뉴스는 57세, 63억 달러의 자산을 가진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부자인 한 남자의 죽음을 예고하고 있었다. 멕시코의 21세기 병원의 집중치료 부서장인 의사 엑트로 카스타뇬은 그의 건강 상태를 살피기 위해 휴스턴으로 왔다. 슬림은 미국에서 수주를 보낸 후 멕시코로 돌아와 아카플코 집에서 재활을 계속 이어나갔다. 거기에 있다가 다시 그는 쿠에르나바카로 옮겼고, 마침내 멕시코시티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커져가는 슬림 제국에서는 매일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의 생일날, 트랄판 방위 조직의 여배우 헤수사 로드리게스와 전 국회의원 마르코 라스콘은 멕시코 시티에 있는 쿠이쿠일코의 고고학 지역의 건축물들과 관련해 연방검찰청에 슬림을 고발했다. 시위대원들은 바예데 멕시코 지역의 가장 오래된 프리히스패닉 도시를 훼손한 그루포 카르소의 회장에게 10년 징역을 선고하라고 요구했다. 그렇게 그들은 멕시코 통신 시장에 장거리 전화서비스 분야에 경쟁하러 들어온 AT&T 사와 MCI 기업들과 함께 텔멕스의 공공 및 법적 분쟁을 시작했다. [11. 소우마야 Soumaya] 죽음의 위험에서 벗어난 지 2년 만에 카를로스 슬림은 또 다른 난관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의 아내 소우마야도미트 제마엘이 유전적 신부전증으로 앓다가 1999년 3월 7일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12. 제마엘의 가문] 카를로스 슬림의 아내인 소우마야 도미트 제마엘은 멕시코 레바논계에서 가장 권력있는 가문 중 하나였다. 수많은 레바논인과 마찬가지로 슬림의 장인인 안토니오 도미트는 20세기초 전쟁과 사업의 기회 부족으로 고국을 떠나왔지만, 멕시코에서 신발 제조와 판매로 재산을 모았다. [13. 이주] 카를로스 슬림이 어떤 사람인가 이야기할 때 공통적으로 나오는 말 중 하나가 아랍계 후손으로 인색하다는 평이다. 아랍의 상인들이 원래 유명하긴 하지만, 20세기 초에 빠져나온 레바논 사람들은 그들의 궁핍한 상황을 기억했기 때문에 훨씬 더 신중했다. 레바논은 1516년부터 1920년까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현재는 시리아와 이스라엘, 요르단, 팔레스타인, 터키에 둘러싸여 있다. 1864년에 레바논은 프랑스 실크 공급처가 되기 위해 프랑스의 자치권을 따르게 되었지만, 수도자 마론을 따르는 마론파 기독교인들과 이슬람교의 한 파인 드루즈교 사이에서 내전이 일어났다. 슬림의 아버지는 레바논의 제진에서 실크를 생산하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고, 형들인 호세, 엘리아스, 카를로스, 페드로를 따라 배를 타고 멕시코로 넘어간 이후, 직물을 팔아 부자가 되었다, 이후 레바논 상공회의소를 설립해 장까지 맡았다. Ⅳ. Carlos Slim [14. 훌리안 슬림 하다드] 1902년 슬림의 아버지인 훌리안 슬림 하다드가 멕시코에 도착했을 당시 나이는 14세였고, 그때 그의 형제들은 이미 탐피코Tampico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슬림의 가족중 멕시코에 가장 먼저 온 사람은 훌리안의 큰 형인 호세로, 이민국 등록 증서에 따르면 1893년도 17세의 나이로 이곳에 왔다. 그리고 5년 후 호세는 항구쪽에 가게를 열고 훌리안을 부르기 전에 다른 형제들을 먼저 불러들였다. 가장 먼저 페드로가 왔고 그 뒤를 이어 엘리아스와 카를로스가 들어왔다. 그러던 그들 사이에 다툼이 있었고, 1904년 페드로와 호세가 새로운 사업을 찾아 탐피코를 떠나 멕시코시티로 이사하게 된다. 그리고 막 도착한 훌리안이 그들과 함께 하게 되었다. 페드로와 카를로스, 엘리아스가 그곳에 정착하고 얼마 되지 않아 돈을 모으고 다시 잡화와 비단 가게 동업을 시작한다. 또한, 임대와 재판매를 위한 부동산들을 찾고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익이 많아지자 또 다른 갈등이 일어났다.
슬림은 인터뷰하는 동안 직접 쓴 서류를 줬는데, 이 내용은 정확하게 1911년 카를로스 슬림의 아버지 훌리안 슬림 하다드가 13살 위인 형 호세와 이야기였다. 그 회사의 이름은 위에서 언급한 ‘동방의 나비’였다. 처음엔 각자 절반씩 지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1914년 훌리안 슬림이 형 호세의 지분을 사들였다. 그 부호가 내민 문서에 따르면 , 가게를 열고 10년이 되던 1921년 1월21일 이곳에 있는 상품들은 10만 달러가 넘을 정도였고, 동시에 그들은 멕시코시티의 대통령 궁 앞의 역사지구 내 부동산의 거의 10%를 사들였다. 슬림은 그 가게의 현재 가치를 5백만 달러 이상이라고 보고 부동산들은 대략 2천만 달러 정도라고 짐작했다. 1953년 카를로스 슬림의 나이 13세에 아버지 훌리안 슬림 하다드는 심근경색으로 사망했고-그의 나이 65세- 그의 장례식은 멕시코의 예술궁전에서 치러졌다. [15. 카타엡 당] 세계적인 부호의 아버지인 훌리안 슬림 하다드는 성공한 사업가로 그 당시 정부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었고, 동시에 카타엡 당 신봉자이기도 했다. 카타엡 당은 레바논 조직으로 그 당시 레바논 정치권력을 얻기 위해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이스라엘인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적대감을 가졌고 자신들과 연합했던 레바논의 정치 지도자인 피에레 제마엘을 지지했다. 1980년대 초 <예루살렘 포스트>에서 공개된 비밀문서에 따르면, 제마엘 집안과 이스라엘 정부 사이의 중재인은 바로 엘리아스 라바비였다. 이렇게 오랜 동맹 관계를 이어오던 중 1982년 9월14일 사브라-샤틸라 대학살이 벌어졌던 것이다. [16. 인종 차별주의] 슬림은 부모님의 뿌리 때문에 특별히 인종차별을 받았다는 기억은 없다고 했다. “제가 고등학교와 대학교 때는 그런 차별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는 뭔가 그랬던 것도 같고요. 사람들이 저에게 종종 터키인이라고 불렀거든요. 잠시 후 비서가 슬림의 아버지가 직접 작성한 연설문의 복사본을 가지고 왔다.”이겁니다. “ 슬림이 종이를 가리켰다. 그것은 루이스 코르티네스 정권 때 그의 아버지가 레바논인 들을 변호한 내용이었다. 그는 레바논 인들을 위한 법령을 넣고 싶어 했다. 나는 그 연설문을 넘겨보다가 한 여덟 장 정도를 복사해도 되겠느냐고 물었지만, 슬림은 딱 한 장만 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머지는 쓰고 있는 자서전에 넣고 싶다고 했다. 훌리안 슬림 하다드의 연설문에서는 그 당시 레바논 사업가들의 성공 비결이 나와 있었다. Ⅴ. Carlos Slim [17. 유년기] 그가 13세가 되던 해 그의 아버지는 심장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훌리안 슬림 하다드는 죽기 전에 아들에게 기본적인 재정 교육은 다 시킨 셈이다. 가가 인터넷 상에 적어둔 자서전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훌리안 슬림 하다드는 자녀들에게 수첩을 하나씩 나눠주고 스스로 수입과 지출을 관리하고 자유롭게 저축하게 했다. 그리고 이이들과 함께 매주 일요일에 지출했다. ~~~ 그리고 12살이 되던 해 자신의 첫 번째 수표장을 열어 멕시코 국립은행의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사실 아버지께서 제게 경쟁자들의 가격을 살펴보고 오라고 하셨는데, 그때는 제가 마치 스파이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였거든요. 저는 경쟁자들의 가격을 살펴보고 아버지의 가게로 돌아와서 곧바로 가격 장부를 만들었습니다. “확실히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 슬림이 말을 이었다.”처음부터 저는 가족들의 도움에 대해서 말했었습니다. 그 도움은 물질적인 것이 다가 아니라, 주로 본보기와 훈련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1952년 말에 수입과 지출을 관리하기 위해서, 아버지께서는 통장을 가져오라고 하셔서 매주 검사를 하셨습니다. 이런 규칙을 계속 지켜나가면서 저는 수년간 저만의 대차대조표를 기록했습니다. 그렇게 1955년 1월, 제 자산은 5523.32페소가 되었고, 1957년 8월에는 31969.26페소로 늘었습니다. 그렇게 계속 자산을 늘려가던 중 멕시코 국립은행의 주식에 투자했습니다. 가끔씩 대출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1966년 초의 제 자산은 가족 자산을 제외하고 5백만 페소가 넘게 되었습니다. 슬림이 유년 시절 경험 중 가장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어 한 것은 바로 12살에 처음으로 은행계좌를 열었던 것이었다. 그 말이 나오자 그는 오래된 수첩을 꺼내보였다. 거기에는 시간별로 기입한 지출 기록이 있었다. 또한 아주 흥분된 독백들도 적혀 있었다. “제가 16살이었을 때 어머니께서 50페소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당시 그것으로 투자를 했습니다. 여기 보면 제가 번 돈이 200페소였어요……. [18. 청년기] Ⅵ. Carlos Slim [19. 훌리안 슬림 엘루] [20. 안전] 신문기자인 헤라르도 갈라르사는 게릴라군들이 멕시코시티의 가까운 곳에서 슬림의 움직임을 따라다니면서 작성했던 보안문서를 입수했다. 물론 내용들 중에는 명확하지 않은 부분들도 많지만 꽤나 흥미롭다. 그 당시 기록에는 너무 검소한 생활을 했다고 적혀있던 카를로스 슬림이 십년 후 세상에서 가장 부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기록 내용은 다음과 같다. 카를로스 슬림(CS)엘루 레바논계, 언론에서는 멕시코 레바논 공동체의 걸출한 인물이라고 보도했다(그의 사촌인 멕시코 증권거래소 및 증권협회의 알프레도 하르프 엘루와 더불어). CS는 멕시코 시티 로카요사스와 이파라체스 거리 사이에 있는 레포르마 지역 아래에서 위쪽으로 세 번째 집에 살고 있다. 매일 아침 10시, 그는 레포르마의로카요사스 모퉁이에서 쓰레기 같은 자동차를 몰고 나온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 진짜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다. 그리고 그가 나가면 경비원이 바로 문을 닫는다. 집에는 적어도 정원사와 가사도우미가 한 명씩 있다. [21. 지인들] 카를로스 슬림은 유머 감각이 뛰어나기로 유명하고 가까운 지인들과 그런 이야기 나누는 걸 좋아한다. 71년만에 멕시코 정권교체가 일어났던 2000년도에 멕시코의 한 지식인 집단은 슬림에게 <엘 인데펜디엔테> 신문 창립을 위한 자금 지원을 제안했다. 그러자 그 부호는 그들에게 자신의 사업자 등록번호에는 미디어 관련된 사업들이 없다고 딱 잘라 거절했다. 하지만 십년 후 그는 <뉴욕 타임스>와 그루포 프리사의 주식을 사들이면서 라틴아메리카의 텔레비전과 잡지, 라디오와 열 두 개의 네트워크를 손에 넣게 되었다. 굳이 말씀 드리자면 , 그들은 특정 시장에서의 파트너들일 뿐입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물론 제게 사업파트너들이 있습니다. 텔멕스를 인수할 때, 프랑스 텔레콤이 5%, AT&T 와 사우스웨스턴 벨이 각각 5%씩 해서 10%, 저희가 3.8%의 지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 외 각각 8%, 5%를 샀습니다. 그 당시 그렇게 텔멕스를 인수했습니다. [22. 상속자들] 시간당 100만 달러를 벌 수 있는 이 엔지니어에게는 아들 셋, 딸 셋 총 여섯 명의 자녀가 있다. 그 중 세 아들인 카를로스, 마르코 안토니오, 파트릭 슬림은 슬림의 주력회사의 대표들이다. 그리고 딸 소우마야, 바네사, 호아나는 사회문화 전반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또한 사위들도 장인의 또 다른 회사들의 관리직을 맡고 있다. 워렌 버핏 -그의 재산의 상당 부분을 사회에 기부하고 세 자녀에게 20%만 물려 줌-과는 달리, 카를로스 슬림은 죽고 나서 재산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혹여 그가 1억 명의 멕시코인 들에게 그것을 나눠주고자 한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트위터나 페이스북으로 그에게 돈을 요청하는 것처럼-아마도 일인당 약 500달러씩 받고 지구상에서 열 한 번째로 인구가 많은 이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아이패드를 갖게 될 것이다. 슬림의 자녀들은 어렸을 때 수년 동안 방 두 칸에서 함께 잤다. 한 방에는 세 아이들이 또 다른 방에서는 세 딸들이 지냈다. 지금 그들의 아버지는 자녀들이 책임감 있는 사람들이라며 자랑스럽게 말한다. 카를로스 슬림과 아들, 딸들은 카르소 그룹 내 다양한 기업에서 자본금의 80%를 소유하고 있다. 워렌 버핏은 자녀들에게 딱 5억 달러만 유산으로 남겨줄 거라고 했습니다. 당신은 얼마나 물려주실 것입니까? 제 아이들은 돈을 상속받지는 않을 것입니다. 각자가 운영하는 회사의 주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즉 책임감과 약속을 함께 받게 될 겁니다. Ⅶ. Carlos Slim [23. 기부 활동] 슬림의 입장에서 가장 박수를 받을 만한 기부활동 중 하나는 가난한 멕시코 수감자들에게 보석금을 지원한 것이었다. 2010년까지 15년 동안, 그는 경미한 범죄로 고발된 10만 명 이상의 석방을 지원했다. 또한, 먼 외곽지대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위해 41만 6천대의 자전거와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위한 휠체어 8만7833대, 안경ㄴ 12만 7천개, 영양사랑 가방 1500만개를 지원했다. 또한 그 덕분에 백만 명의 임산부들이 특별 건강 네트워크를 통해 치료를 받았다. 그는 이미 퇴직한 세계적인 권투 챔피언 22명에게 매달 500달러씩 연금을 지급했다. 결론적으로 그가 낸 보도에 따르면, 멕시코 인으로서 세계적인 부호에 오른 그의 기부활동은 전 세계 사람들 중 3620만 명 이상이 혜택을 받았다. [24. 언론] 그의 말을 들으면서 그처럼 성공하길 꿈꾸는데, 그가 부자가 될 수 있는 비밀을 전수해 줄 거로 생각하는 거죠. [25. 통신사업] 카를로스 슬림은 텔멕스 운영권과 함께 독점권도 손에 넣게 되었다. 텔멕스가 법적으로 5년간 지역, 국내외 장거리 통신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유일한 기업이었기 때문이다. 텔멕스 운영으로 슬림의 세력이 커지면서 대부분의 주주와 사우스 웨스턴 벨, 프랑스텔레콤의 경영권 요구는 법적으로 저지당했다. 하지만 그 부호가 받아들여야했던 몇 안 되는 법적 의무들도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텔레비사가 운영하는 텔레비전 방송 부문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1990년 8월 10일자 텔멕스 영업권자격변경조항1,9의 마지막 단락에는 “텔멕스는 직간접적으로 국영 텔레비전방송 영업권을 가질 수 없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동시에 텔레비사도 통신 분야에 참여할 수 없다. 이것은 제도혁명당 정권이 국가안보 차원으로 가장 전략적인 두 거대한 기업 간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내린 결정이었다. 멕시코에서는 텔레비사가 오랫동안 텔레비전 부문을 독점했다. 1990년대 텔레비사는 TV아스테카와 경쟁하기 시작했다. TV아스테카는 카를로스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 정부가 오래된 국영방송사를 민영화한 것으로 리카르도 살리나스 클리에고가 운영을 맡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텔레비사와 TV아스테카는 텔레비전 방송사 복점을 유지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많은 일을 함께 도모했다. 또한 그들은 슬림의 독점에 대항하기 위해 이우사셀 통신사를 통해 공식적으로 제휴하기도 했다. 1995년 텔멕스에 소송을 제기한 변호사 기예르모암단은 국영 전화 매매로 인한 이득을 따져보았다. 언론에 제출한 자료에서 그는 텔멕스 매각을 가치가 절반 이하로 낮아졌고 어떤 경쟁도 없이 거리를 활보할 권한을 가진 택시에 비유했다. “이 일을 택시로 비유하자면 매각시 정부는 28000페소짜리 택시를 12000페소에 판 셈이다.” 슬림은 이미 1976년에 갈라스 데 멕시코(담뱃갑 라벨 인쇄업체)를, 1981년에는 말보로와 그 외 담배들을 소유하고 있는 시가탑을, 1984년에는 멕시코의 전설적인 은행가인 마누엘 에스피노사 이글레시아로부터 5500만 달러에 멕시코 보험사를 인수했다. 또한 1990년대 그의 재산이 순식간에 늘어난 것은 멕시코 기업들이 맞게 된 국제시장 개방이라는 세계적인 현상이 낳은 결과였다. 보통 경제용어로 말하는 신흥경제국가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었다. 슬림이 포브스에서 조사하는 세계부호 명단 상단에 처음으로 이름을 드러낸 2007년에는 이런 분쟁이 더 커졌다. 슬림은 그해 빌 게이츠와 워렌 버핏을 이기고 최고 부자 순위에 오른 첫 라틴아메리카 기업가가 되었다. [26. 상어들] Ⅷ Carlos Slim [27. 좌파] 검소함과 거대한 권력을 가진 슬림은 멕시코에 사는 세계적인 부호이지만 대중들에게는 겸손과 절제의 사람으로 유명하다. 멕시코에서 사람들을 깔보거나 무시하면서 살고 싶어 하는 본능을 참는데 성공한 갑부들은 아주 극소수이다. 대중 잡지들을 넘기다 보면 그렇게 하지 못한 사람들이 수도 없이 나온다. 하지만 슬림은 멕시코인 들이 상상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는 반대이다. 그가 선택했던 커뮤니케이션 정책은-사위인 아르투로 엘리아스 아흅이 책임지고 있음-미디어 노출을 많이 안하고 사건이 생기지 않도록 중립을 지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정치적으로는 바른 이미지를 구축해왔다. 텔레비사의 수장인 에밀리오 아스카라가 장과 비교해 보자면, 슬림은 축구팀(클럽 아메리카)의 승리를 축하는 곳에 제대로 차려입지 않은 채로 나타나서 기뻐하는 사람이다. 아마도 그래서 슬림은 멕시코 지식인들이나 기자들에게 에밀리오 아스카라가 장에 비해서 적은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이미지는 그가 사람들 앞에서 화를 낼 수 있다는 두려움에 스스로 조심하기 때문이다. 최소 세 명의 기자와 편집자들의 이야기를 들은 바로는, 특정 주요 기사들에서 그의 이름이 언급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슬림 또는 기업 홍보팀의 위협을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림은 자신과 기업들을 위해 아주 빈틈없고 신중한 이미지를 잘 관리하고 있다. [28.카프카(Kafka)] 1821년 스페인의 군주제도로부터 독립했을 당시 우리는 자치제를 실행하기에는 너무나도 준비가 안 돼 있었다. 우리는 미국에 지면서 1848년 2월 절반이 넘는 국토를 잃었다. 프랑스 침입은 1862년 초부터 1867년 중반까지 5년간 계속되었다. 비센테 폭스 대통령은 겨우 0.5%로 선거에 이긴 펠리페 칼데론 대통령에게 정권을 물려주었다. [29. 비레예스 호텔] 왜 카를로스 슬림에게 역사지구가 그렇게 중요한 겁니까? 아, 왜냐하면, 그가 여기에 살았었거든요. 여기에서 고등학교까지 공부했어요. 그렇게 일상생활도 했고……. 아버지 사업이랑 모든 것이 다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여기 역사지구에 애정을 가질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슬림은 극심한 민족주의자인가요? 예, 완전히요, 그는 엄청난 민족주의자입니다. 그 사실에 대해서는 한 순간도 의심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가 소유하고 있는 기업들의 상황만 봐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가 그렇게 수많은 국제적인 관계들을 맺고 있지만, 제가 아는 한 대부분의 투자는 여기 멕시코에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어떤지를 말해줍니다. 그가 얼마나 멕시코를 생각하는지, 그리고 멕시코가 어떻게 되어야 하고 어디를 향해 가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 모두 다요. 그럼, 그가 왜 그렇게 민족주의자일까요? 그의 아버지가 비록 다른 나라 즉 레바논에서 오긴 했지만, 자신을 보호해주고 환영해 준 멕시코를 아주 사랑하는 분이셨습니다. 저는 분명 그의 아버지가 이런 마음을 아들인 카를로스 슬림에게도 심어줬다고 생각합니다. Ⅸ. Carlos Slim [30. 1퍼센트] 카를로스 슬림이 늘 운전기사를 대동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주 멕시코시티의 지옥 같은 도로 한 복판에서 자신의 벤츠를 직접 운전해서 다닌다. 사람들은 카를로스 슬림을 과시하지 않고도 많은 돈을 셀 줄 아는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한다. 그가 해외로 나가게 될 때는 호텔에 있거나, 아니면 집을 빌리거나 친구 집에서 머문다. 해외에는 어떤 저택도 개인 용도로는 구매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30년 동안 같은 집에서 살고 있다. 그의 홍보팀은 그가 입는 옷이 삭스 백화점의 세련되고 비싼 옷이 아니라, 그의 소유인 시어스 백화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옷이라고 했다. 그는 중요한 자리에서도 세련되지 않은 행동들을 종종 한다. 와인보다는 코카콜라 라이트를 선호하고 손에 일본식 땅콩을 들고 먹는 모습이 사람들의 눈에 자주 띈다. 또, 원래 담배를 끊었지만 가끔씩 시가에 불을 붙이기도 한다. 루이스 마리아(Luis Maria)는 멕시코 주제 칠레 대사로 있을 때 슬림을 알게 되었다. 남미 사람들에게 세계 최고 부자 멕시코인 이 누군지 설명할 때, 그 칠레의 사회학자는 카를로스 슬림은 그 당시 낡은 귀족정치가 끝나고 꼭 명문가가 아니더라도 새로운 부유층이 나타날 수 있게 해 준 새로운 멕시코 혁명이 낳은 아들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는 개인적으로 슬림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부호가 마치 부자가 아닌 것처럼 말한다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그의 자택은 로마스 데 차를테펙 주택가에 있고 방은 총 6칸이다. 집안의 벽에는 엘 그레코, 피사로, 모네, 르누아르의 그림들이 걸려 있었고, 가구들은 슬림과 소우마야가 그곳으로 이사했던 1980년대부터 사용했던 것으로 보였다. 2007년 그는 자신의 집을 공개하겠다는 특별한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텔레문도 채널의 알 오호 비보 프로그램의 진행자인 마리아 셀레스트 아라라스가 그 진행을 맡았다. 슬림은 가족끼리 최대한 서로 마주치고 함께 할 수 있게 하려고 너무 큰 집을 피했고, 그래서 아내와 함께 이 집을 선택한 거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그는 세 아이들과 세 딸을 각각 한 방에 자게 하기도 했었다. 슬림이 아끼는 집을 다 둘러보고 난 후 그와 진행자의 장난기 있는 대화도 끝났다. ‥‥ <“8년 전에 아내분이 돌아가셨는데……. 얼마나 힘드셨는지 알고 있습니다만 다시 새로운 삶을 살아보겠다는 생각은 안 하셨나요? 재혼이라든가? “ “새 삶이요? 물론 새로운 삶은…….” “사랑에 대해서요.” “결혼에 대해서요? 전혀 없습니다.” “결혼은 안 합니까?” “저에게 또 다른 가정을 꾸리는 건 없습니다.” “하지만 데이트를 한다거나 이성과 즐기시는 건 괜찮지 않나요?” “물론입니다만, 근데 왜 그런 얼굴을 하세요? 왜 그런 질문을 하시죠?” “제가 해야 할 질문이니까요. 그럼 잠재적인 애인 후보들은 어떻게 만나시나요?” “저는…….” “특별한 방식이 있으실 것 같은데요…….” “뭔가 질문을 하겠죠.”(웃음) “뭔가를 물어보신다면 무슨…….” “농담입니다.” “그럼 언제 그녀들과 데이트를 하시나요. 만나면 뭘 하시나요?” “음…….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죠.” “다음 질문이요?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현재까지는 결혼 생각이 없단 말씀이시죠?” “이미 자녀들이 너무 많아서……. 아니, 농담입니다,”(슬림의 웃음) “세상에서 제일가는 부자에게 다른 끙끙 이가 있어서 달려드는 여성들도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듭니다. 여성을 만나실 때, 그분이 정말로 당신을 원하는지, 아니면 돈을 보고 있는 건지 어떻게 구별하십니까?” “당신이 구별하는 법과 같습니다.” “딱 보면 아신다는 말씀이시군요.” “네, 보통 그렇습니다.” 돈과 성공은 아첨하는 사람들과 거기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럽게 끌리는 자석이다. 슬림은 이런 탐욕적인 사람과 함께 하는 법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왜냐하면, 이것도 인간의 모습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 그런 사람들은 보통 아름다운 여성이나 운동선수 또는 인기 록 가수에게 끊임없이 몰려들죠.” 그는 인터뷰에서 이 말을 강조했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할 때는 어떠신지요?” “사실 제가 가는 곳은 길이든 어디든 사람들이 아부 많은 편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제게 아주 호의적인 편입니다. 정말 운이 좋게도 저에게 친절하게 대해줍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이 사진을 찌고 싶다고 하면 함께 찍습니다. 길에서 저에게 사업 제안을 하지는 않으니까요.” “하루에 혹은 일주일에 얼마나 많은 사업 제안을 받으십니까?” “저에게 수많은 편지들을 보내지만, 그것들을 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한 편에서는 그런 점을 비판합니다.” “늘 이런 상황들이 수없이 일어납니다. 한편으로는 아첨하고 또 다른 한 편으로는 비판을 하는 거 말이죠. 당신이 인터부하면서 했던 이야기들처럼 말이죠…….” “그럼 그런 비판들을 어떻게 받아들이시나요?” “저기 제가 청년들에게 쓴 편지에 적혀 있습니다.” “줄 때는 받을 생각을 하지 마라. 왜냐하면, 손금을 내보이게 되니까.” 이것은 중국 속담입니다. 여러분이 부정적인 느낌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감정적인 상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옵니다. 여러분의 가치와 원칙들을 비롯한 그 무엇도 이것들에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이런 부정적인 것들이 쉬지 않고 당신을 귀찮게 조른 다고해도 받아주지 마세요.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행하고 고통 받게 됩니다. 제 아버님은 강한 낙관주의와 인내를 특별히 강조하셨습니다. 이것도 이 그룹의 원칙 중에 있습니다. 당신에게는 이것들이 있습니까? 아니면 없습니까? “ “고맙게도 제게는 있군요. 그렇다면 탐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부분의 일반 시민 입장에서, 제 재산 때문에 제가 탐욕스럽다고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예를 들어서 멕시코 역사 지구가 변하자, 그 당시 길에서 몇몇 사람들은 저에게 고맙다고 인사까지 했습니다. 실제로 보통 사람들은 친절합니다. 소우마야 박물관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제게 말을 건네고요. 원하시면 언제 날 잡아서 한번 함께 가보셔도 좋습니다.” “성공을 위해서는 야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말씀하시는 야망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네요. 이미 말했듯이 성공은 돈을 보는 게 아닙니다.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직업적으로 일이 잘 되고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서는 야망보다도 뭔가 분명한 적성을 바탕으로 삶의 방향과 정말 뭘 하고 싶은지 정해야 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따라서 성공은 노력과 재능, 적성, 팀워크의 문제입니다. 팀이 없으면 일을 잘할 수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보증된 좋은 팀이 있고 또 그 팀이 동일한 목표를 가져야 합니다. 또한, 야망을 품는 것보다는 우선 리더십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먼저 사람을 조직하고 일어나는 일들을 처리할 수 있는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그것이 기업가와 몽상가, 정치인의 차이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업가가 발전하고 기업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좋은 팀이 필요하고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해결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 계획을 실행하려면, 종이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안 됩니다. 빨리 실행에 옮기되 유연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니까 적성의 문제군요, 근데 당신은 공학을 공부했지만,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 12살 때부터 사업을 했습니다.” 나는 그가 자신의 집에서 텔레문도 기자와 했던 대화들을 따라가며 다시 인터뷰를 이어갔다. “외국에 집을 소유하지 않으신다는 것도 꽤 주목을 끕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인터뷰 중에 슬림에게 질문했다. “저는 외국에 별장들을 짓지 않습니다. 물론 돈을 아끼느라 그런 건 아닙니다……. 외국에 부동산 투자도 하고 있으니까요.” “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MET)앞에 맨션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걸 왜 제 집이라고 하는 이유를 모르겠지만, 그 집은 저희가 투자목적으로 다시 팔려고 구입한 것입니다. 제가 그 7층짜리 집에서 살게 된다니요, 말도 안 됩니다!” “왜 말도 안 되는 거죠?” “ 그 집을 갖고 싶을 정도로 과도한 욕망을 부리지 않습니다. 이미 거기에 있는 집이지만, 여행할 때는 주로 호텔에 묵습니다. 그게 더 실용적이거든요.” “그럼 뉴욕에 가시면 보통 어느 호텔에 묵으시나요? 플라자 호텔?” “그곳에도 여러 번 갔습니다. 하지만 뉴욕 펠리스 호텔에 더 자주 갑니다. 거기서는 제가 들려야 하는 사무실들에 들어갈 수 있거든요. 저는 여러 호텔에서 묵었습니다. 하지만 꼭 여기여야만 한다고 정해 놓은 곳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오페라 극장 앞의 그 맨션에서는 한 번도 안 지내시나요?” “저희는 지금 그걸 내놓은 상태입니다. 늘 그걸 팔려고 합니다. 아름다운 곳이거든요.” “자신을 위해서는 주로 어디에 돈을 쓰시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남들과 달리 특별히 돈을 잘 쓰는 곳이 있다면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뭐 세계 부호 중 한 사람이 자기 돈을 남들이 안 쓰는, 그러니까 자기가 좋아하는 곳에 돈을 쏟아 붓는다고 해도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지만요…….” “저만의 소비요? 그게 뭐죠?” “아, 뭔가를 샀는데 후회하는 거요? 사치품, 그러니까 자동차겠네요. 제 자동차요. 아무 생각 없이 10년을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래된 자동차들이잖아요…….” “하지만 언젠가는 바꾸겠죠. 모르겠습니다. 제가 후회하는 거요?” “굳이 필요 없는데 돈을 쏟아 붓게 되는 거요.” “저는 돈을 그렇게는 안 씁니다.” “요트? 아니면 큰 비행기도 안사시나요?” “아, 그것들은 예전에 샀습니다. 이미 가지고 있어요.”> ※ 이 부분 인터뷰 내용이 슬림을 이해하는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전체를 발췌. ‥‥ 독일 태생의 논 평가인 존 란체스타(John Lanchester)는 현재 자유 시장 시스템아래 늘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 빨리 소득과 부를 쌓게 될 거라고 하며 “그것은 중력의 법칙 같은 아주 기본법칙이다.”라고 말했다. 신자유주의에 따르면, 한 사람의 경제 성장이 다른 사람에게 기여하는 것은 더 이상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다. 또한, 그는 “사람들의 말처럼 높은 파도가 모든 배를 일으킨다. 그리고 그 높은 파도가 꼭 부자들의 앞에서 일어난다. 하지만 신자유주의환경에서 그것은 아무런 분제가 되지 않는다. 이제 불평등은 번영을 위해 치러야 할 대가만이 아니라, 더 번영할 가능성이 되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불평등의 증가는 신자유주의의 우연히 생긴 불쾌한 부수의 결과만이 아니라, 모든 경제 과정의 동력인 셈이다.”라고 하기도 했다. 자크로고진스키에 따르면, 억만장자에서 울트라 부자가 된 카를로스 슬림에 대해 이제까지 깊게 파고들지 않았던 점이 있는데, 바로 미국의 재판과 관련 있는 내용이다. 공무원이자 경제학자인 그는 1991년도<포브스>에 재산이 17억 달러라고 기록된 이 멕시코 부호의 재산 증가 경로를 따라갔다. “이 17억 달러가 오로지 텔멕스 가치이고, 그가 산본스와 광산들 등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 가정 하에 다음의 분석을 하겠습니다. 1991년에서 2003년 사이에 슬림의 재산은 17억 달러에서 74억 달러로 증가했습니다. 그리고 텔멕스만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워싱턴에 있던 지인들에게 ‘그의 수익을 좀 계산해 주게, 17억년 만에 74억 달러가 되었는데, 매년 재산이 13%씩 늘어나고 있는 셈이거든’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후에 다시 상황을 파악하고 이런 말을 합니다. ‘그저 호기심에서 하는 소린데, 슬림이 170만 달러를 들고 호주에 놀러갔고, 원래 가지고 있던 17억 달러로는 미국 신용평가사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tandard & Poors)지수에 들었다고 가정해보자고.’ 그리고 좀 있다가 지인들에게 다시 ‘미국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 1991년도 3월과 2003년 3월 지수가 어떠했는지 찾아보고 똑같이 분석 좀 해 줘, 2003년도에는 재산이 얼마가 있었지?’라고 물어봅니다. 물론 이번엔 74억이 아니라 67억쯤 될 겁니다. 물론 정말 큰 차이가 난다고 말씀하실 수도 있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건 그가 잠을 자고 수영하러 호주까지 가도 전혀 상관없이 그의 재산이 저절로 몇 배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1990년과 2003년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슬림이 이 정도의 재산을 형성하게 된 건 텔멕스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2003년도에 2명의 미국 파산 심사위원들이 슬림에게 라틴아메리카에서 파산했던 두 미국 기업의 모든 재산을 넘겼기 때문입니다. AT&T와 미국의 장거리 통신업체인 MCI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슬ㄹ미에게 그 모든 재산이 들어왔습니다. 이 거대한 멕시코 독점자가 이 모든 재산을 손에 넣게 된 겁니다. 그 미국 기업들이 그곳에서 경쟁하는 방법을 몰랐거든요! 그래서 저는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너무 궁금했습니다. AT&T는 멕시코에서 처음으로 파산했지만, 이해가 안 가는 게 슬림의 독점 때문에 그 기업이 성장하지 못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만일 그 이유라면 AT&T와 MCI를 비롯한 또 다른 기업들이 성장하지 못한 것도 그들은 망했던 걸까요? 왜냐하면, 그 기업들은 라틴아메리카에서 투자하는 방법을 잘 몰랐기 때문입니다. 특히 멕시코에 온 이 두 미국 기업은 브라질과 칠레, 아르헨티나, 콜롬비아에서도 성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슬림이 그 싸움에 들어가서 이 두 기업의 모든 재산들을 다 손에 넣게 된 겁니다. 그렇게 그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아메리카 모빌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그 덕분에 재산이 그렇게 많이 늘어나게 된 겁니다. ‘ 새로운 사회에서 늘어나고 있는 심각한 문제들 중 하나는 과학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그로 인한 생산성이 높아져서 수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잃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자리 부족과 경제 위기에 대한 거부 반응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주일 3일, 하루에 11시간 일하는 방법을 제안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들을 해결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31. 브라질 빈민가, ‘파벨라(Favela)] 멀리서 보면 파벨라의 작은 집들은 마치 언덕위에 이리저리 흩어져있는 형용색색의 야생풀들 같다. 텔레비전 안테나에 달린 접시들-엠브라텔(슬림 소유의 TV.전화. 이동통신사)의 파란색과 디쉬의 빨간색 접시 안테나들-이 브라질 빈민가임을 드러내는 특징이 되어 버리긴 했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리우데자이네루주의 이 ‘평화로운’ 파벨라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카를로스 슬림을 위한 오마주이다. 나는 브라질 정부의 동의를 얻어 여러 파벨라들을 방문했다. 예전에 이곳은 마약 갱단들의 소굴이었지만 이미 정부가 그런 것들을 정리한 상태였다. 그러던 2012년 4월 이 빈민가에서 경쟁이 벌어졌는데 수십 년간 격리되었던 이 지역에 전화와 인터넷, 케이블 텔레비전 서비스가 공급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중에서도 엠브라텔은 강력한 영업사원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멕시코 주인인 카를로스 슬림을 위해 들이 직접 걸어 다니며 적극적으로 고객유치에 나섰다. 이 지역에 경찰들이 들어오고 난 후 그 뒤를 이어 곧바로 케이블 TV 영업사원들이 이 마을을 뚫고 들어왔다. 브라질에서 카를로스 슬림은 14개 주의 93개 도시에 트리플 풀레이(케이블 Tv, 광대역 인터넷, 유선전화)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약 천만 가구를 연결하는 47000km이상의 통신망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브라질 케이블 TV 시장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다. 이런 통신 경쟁으로 급부상된 시장 중 한 곳이 바로 리우데자네이루 주에 있는 파벨라들이다. 2010년, 카를로스 슬림 제국의 대장 격인 ‘아메리카 모빌’은 2억 5930만의 고객과 2억 1130만의 휴대전화 가입자, 2740만 유선전화 가입자, 1200만의 광대역 인터넷 가입자, 800만의 텔레비전 서비스 가입자를 바탕으로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통신 기업이 되었다. 아메리카모빌은 멕시코에서의 독점금지 규제에 걸려 현지 시장점유율을 50% 아래로 낮추기 위해 '덩치'를 줄여야 하는 처지다. ※아메리카모빌은 멕시코 무선통신 시장의 70%를 점유한 시장지배적 사업자여서 지난 7월 규제당국으로부터 독점금지 위반 제재를 받았다. [32. 자유기업 주식회사] [33. 은퇴] 만일 세계 최고 부자 멕시코인이 계산기를 두들기며 기부금 합산하는 것을 본다면 ‘부활동의 전사’ 같다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억만장자들과 비교해 볼 때, 750달러에 이르는 자산을 가진 슬림의 기부 규모는 아주 평범한 편이다. 그가 가진 돈이면 레바논의 외채의 두 배를 갚을 수도 있고, 그가 3주 동안 버는 돈이면 모든 건강 관련 연구에 투자할 수 있다. 또한, 빌 클린턴에게 건넨 후원금은 그가 일주일 일해서 번 돈이고, 샤키라(콜롬비아 출신 가수로 라틴 아메리카 최 빈곤층 아동들을 돕기 위한 행사에서 후원금을 요청)가 웃으면서 받은 후원금은 그의 시간을 전혀 빼앗지 않아도 될 금액이었다. 그가 아무리 베풀어도 그의 관대함의 선은 책상에 놓인 계산기의 디지털 숫자를 넘지 않는다. 하지만 슬림은 좀 더 복잡한 인물로 단순히 인색한 사람으로만 표현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우리는 통신부문에 투자를 계속해 나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문명의 신경계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일 텔멕스가 이런 투자를 하지 않으면 자국민뿐만 아니라 외국인들도 이 일을 하지 않을 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정보통신 인프라가 없는 멕시코는 고통 속에 있는 것이고, 이것은 도로가 없는 것보다 더 최악입니다. 2014년 슬림의 프리스코 광산은 12,000kg의 금을 생산했는데, 이것은 그해 국내 생산의 13%를 차지하는 양이었다. ~~~하지만 2015년 초에 프리스코의 기업 가치는 30%나 떨어지게 되었다. [34. 소피아 로렌] 75세를 맞는 카를로스 슬림은 줄어든 재산을 등록했다. 2015년 여름에 그는 149억 달러의 손실을 보았다. 이것은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일곱 개에 맞먹는 액수이다. 블룸버그는 이것이 슬림의 주요 통신회사인 아메리카 모빌이 방송통신법 개혁으로 새로운 진출을 하는 AT&T 에 맞서 가격과 제품을 바꿔야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다른 그루포 카르소의 주인의 재산 감소 원인은 국제 금값 하락으로 그가 소유한 광산 회사인 프리스코의 가치가 55.7% 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슬림의 컨소시엄 분위기는 침체되지 않았고 오히려 사업의 다각화를 강조했다. 건설과 혁신과 투자에 대해서 언급한 내부문서를 보면, 그루포 카르소는 최근 몇 년간 멕시코의 다양한 지역에 600만 제곱미터 이상의 쇼핑몰과 건물공사를 했다. 또한, 멕시코시티의 지하철 12호선 건설에도 착수했다. 이달고 지역에 있는 에너지 처리장을 통해 바예데 멕시코의 오염된 물의 60%를 정화했고, 정부로부터 영업권을 받아 1,267,000km고속도로도 관리하고 있다. 그 보고서에서 강조하는 가장 눈에 띄는 공사 중 하나는 바로 미국의 잭슨빌과 마이애미, 멕시코의 칸쿤, 과테말라의 푸에르토바리오스, 도미니카공화국의 푸에르토풀라타, 푸에르토리코의 산후안, 콜롬비아의 바란키야와 카르타헤나, 엘살바도르의 포르탈레사,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11개의 접점을 통해 미 대륙을 지나는 17400km 길이의 해저 광케이블 공사이다. 또 다른 중요한 공사는 인데펜덴시아라는 자동으로 울릴 수 있는 첫 멕시코 석유 플랫폼으로 멕시코 만의 9킬로미터 이상의 깊이의 다양한 구멍들을 뚫고 있다. 주지사팀은 소피아 로렌을 멕시코시티를 경유하지 않고 유럽에서 아카플코로 바로 모시기 위해 특별 전용기를 구해야만 했다. “비록 소피아 로렌이 영화계 여왕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카풀코 체류 동안 내내 프로다운 면모를 보였습니다. 모든 행사에 정시에 나타나서 계약서에 나온 활동을 진행했습니다 주에 데려오는 일을 담당했던 상황은 멕시코에서 가장 중요한 저널리스트 중 한 명인 아델라 미차(Adela Micha Zaga. born May 25, 1963)와의 인터부였다. 실제로 그녀는 소피아 로렌이 불편해할 만한 질문들을 했었다. “당신은 전 세계 모든 남성들이 만나고 싶어 하고 우러러 보는 배우였습니다. 그들에게 유혹을 느끼신 적은 없나요?” 미차가 인터뷰 중에 질문을 던졌다. “제 얼굴을 빨개지게 만드시는군요.” 로렌이 대답했다. “정말이요? 믿을수가 없군요!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편이신가요, 소피아?” “제가 아주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라고 말씀드릴 수 없을 정도로 수줍음을 많이 탑니다. 이 인터뷰는 절 아주 부끄럽게 만드는군요.” “무슨 그런 말씀을... 왜죠?” “저는 제 감정에 잘 빠져들기 때문에, 오래전에 있었던 것들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대답하는 게 쉽지가 않습니다.” “어떻게 지금까지 이 엄청난 디바의 자리를 지키고 계신가요? 당신에게 이 자리는 늘 중요한 건가요?” “제가 그렇게 엄청난 여신의 자리에 있는지 몰랐네요. 몰랐습니다.” “알고 계실 텐데요.” “아니요, 모른다니까요. 이런 식의 말장난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 인터뷰는 아주 정중한 목소리로 끝났다. 로렌은 그 가지가 가져온 굽이 높은 구두들을 보며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세요, 당신 구두 굽은 마천루 같네요.”라고 말했다. 2011년 11월 18일 금요일 저녁, 아카풀코 국제영화제 개막 저녁 만찬에서 마침내 슬림은 젊은 시절 우상이었던 로렌을 만나게 되었다. 아기레 주지사는 탁자의 정중앙에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그의 아내가, 그리고 또 다른 옆에는 로렌이 앉아 있었다. 주지사의 요청에 따라 로렌의 옆에는 슬림이 앉았다. 슬림은 그녀에게 관심을 집중하고 있어서인지, 그 외 프랑스 배우인 알랭들롱과 멕시코 여배우 셀리아 수아레스, 슬림의 친구 기업가인 메겔 알레만 벨라스코에게 말을 걸거나 그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이 행사 조직을 맡았던 사람이 그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카를로스 슬림은 로렌과 사진을 찍자는 부탁을 했다. 그리고 해변을 함께 걸으면서 앤서니 만 감독이 만들고 찰턴 헤스턴, 소피아 로렌, 존 프레이저가 출연한 영화 ‘엘 시드(El Cid) 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9월20일, 로렌의 80 소우마야 박물관에서 갈라 이벤트를 준비했다. ~~~~ 그녀의아들 중 한 명인 에도아르도 폰디도 그 행사에서 인사말을 전했다. 그의 인사는 이렇게 시작했다. “ 이 기회를 통해 형과 저는 카를로스 슬림과 가족 분들께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의 큰 열정과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와 어머니와의 우정 덕분에 이 저녁에 저희가 여기에 있을 수 있습니다.” 소피아 또한, 그날 저녁 간단하게 말을 이었다. 여러분이 스무 살이셨을 때는 80살이 되는 날을 절대 상상하지 못하셨을 겁니다. 하지만 그날이 되어도 여전히 그 사실을 믿지 못하실 겁니다. 올해, 특히 많은 분께서 제가 영화계에 남긴 것들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 여행에서 저와 함께하며 제 가슴속에 쌓인 잊을 수 없는 기억들과 흔적들은 그동안 제가 남겼던 자취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합니다. 늙어서 생기는 몇 안 되는 장점중 하나는 삶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부드러운 행동으로 인한 우아한 단순함,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친구들이 주는 힘, 그리고 사라의 가치가 평온함과 진정한 승리를 안겨주는 유일한 요건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불꽃놀이와 같은 유명세와 성공은 일시적으로 눈을 즐겁게 할 수 있지만, 이런 만족감은 순간일 뿐입니다. 작고 고요한 것들이 평생 당신에게 남아 있고 당신이 누군지를 규정하는 것들입니다. 확신 있는 침묵만이 서로 사랑하는 확실한 가족을 만듭니다. 확신 있는 침묵만이 정직하고 완전하게 삶을 끌고 나가는 법을 알고 있습니다. 확신 있는 침묵만이 제 삶에 경이감을 주고 매일 아침 일어날 때 더 뭔가를 알아가고 배우며 나누고 싶게 만듭니다……. 저는 여기 여러분과 나의 가족, 친구들 앞에서 모두와 함께 이 잊을 수 없는 순간을 깊게 나눌 수 있어서 영광이고 감동스럽습니다. 이 순간은 예술에 대한 헌신과 탁월한 삶의 약속을 지키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의 사나이, 나의 살아하는 친구 카를로스 슬림이 없이는 이 일이 일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카를로스. [35. 실패비용] [첨부]과연 세계 최고 부자 멕시코인이 좋은 사람일 수 있는가? -호세 마르티네스 기자- 이 책은 기본적으로 슬림이라는 주제에 접근 하지만, 실제로는 인물에 대한 기술을 넘어서는 언론적인 작품이다. 기자로서 디에로 엔리케 오소르노는 뭔가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그는 아주 치밀하다. 그리고 타고난 기자이다. 그에게는 통찰력과 예민함이 있고 교양 있고 지적이어서 이것저것을 찾아다니며 퍼즐을 맞춰가는 것을 좋아한다. 또한, 정보에 대해서 많은 필터를 거친다는 원칙을 갖고 아주 엄격하게 정보들을 확인함으로써 떠도는 소문을 걸러내며 작업을 해나간다. 그는 기밀사항들을 제대로 풀어낼 줄 알고 각처에서 좋은 문서들과 연락처를 손에 넣는다. 그렇게 그는 슬림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씩 이어갔다. 이 책은 그를 깨끗하게 미화하려는 것도 혹은 더럽히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저 그는 위대한 기자들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을 뿐이다. 그가 내게 이 책에 대해서 몇 줄 써 달라고 요청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부자가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에 답변을 생각해 달라고 했다. 결론적으로 내 대답은 ‘그렇다’이다. 나는 슬림이 아주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많은 나라에서도 그를 탐낸다. [감사의 말] 이 책을 준비하면서 나와 인터뷰를 했던 수많은 사람들은 내가 그루포 카르소의 수장인 카를로스 슬림에 대해 조사하고 있다고 하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이 책을 출판하는 건 어려울 거라고 경고했고, 무엇보다도 많은 출판사가 특별히 멕시코의 대형 서점을 갖추고 있는 산본스와의 거래에 영향을 받을까 봐 겁을 먹었다. 하지만 이런 경고나 주변의 위험 신호들은 이 책에 대한 나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카를로스 슬림의 비공식적인 전기를 준비하면서 이 거물과 세 번에 걸친 장시간의 인터뷰를 했는데, 처음 그를 찾아가기 전에 슬림이 이전에 했던 인터뷰들 중에 괜찮은 내용들이 있는지 미리 살펴보았다. 그나마 자신을 가장 많이 드러낸 인터뷰는 미국 언론인인 래리 킹 과 했던 것이었다. 결국 그런 인터뷰를 하면서 그는 슬림과 친구가 되었고 어떤 사람들은 그가 미래에 슬림의 공식적인 전기를 쓰게 될 저자라고까지 말했다. 물론 슬림은 내게 직접 자서전을 준비할거라고 했다. [Review] 스페인으로부터 독립된 지 200년 가까이 지났고, 많은 석유를 비롯하여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서지 못한 나라. 마약과 불법거래, 치안불안, 부정부패가 상존하고, 새들이 나무에서 떨어질 정도로 매연으로 가득한 거대한 도시. 이것이 우리가 상상하는 멕시코다. 300년간의 스페인 통치로 약 1억5천만 인구 중 대부분이 메스티소(인디오 혼혈)이며 그들은 아스테카 후예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스페인을 모국이라고 부른다. 아직도 거리 곳곳에서 길게 줄을 서서 순종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는 착한 모습에서 연민의 정을 느끼게도 한다.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도시 ‘티후아나’ 공항 철조망에는 수많은 작은 십자가가 걸려 있다. 불법으로 국경을 넘다가 희생된 멕시코인들의 가족이 걸어놓은 것이라고 한다. 이런 풍경은 이른 아침, 합법적으로 국경을 넘는 게이트에서 뚱뚱한 백인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순번을 기다리는 수많은 노동자의 긴 행렬과 대조적이다.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 직후 불안정한 정치제도 아래에서 절반이 넘는 국토를 미국에 잃었기에 국경을 접하지만, 반미 성향이 강하고, 그들이 모국이라고 자처하는 스페인은 너무 멀고 형제 국을 도울 여력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대외 수출의 75% 이상을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 독자는 어떤 개인의 전기를 읽고 나면 그 인물에 대한 나름대로 전체적인 평가가 내려진다. 아무리 작가가 인물을 미화하더라도 독자는 미묘한 표현 속에 들어있는 숨은 의도를 알 수 있다. 이 책은 독자에게 지금까지 멕시코에 대한 편견과 그런 나라에서 세계 최고의 부자 명성을 얻은 카를로스 슬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 하는 책이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흔히 볼 수 있는 미화된 자서전이 아니라 멕시코의 유망한 젊은 기자에 의해 쓰인 전기 형식의 글이기 때문에 보다 객관적이고 굉장히 재미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밝혀지지 않은 가장 최근의 이야기, 베일에 가려져 있는 억만장자의 진솔한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분명 호기심을 자극하는 일이다. 레바논 이민자의 아들로 외국의 유명 대학을 다니지도 않았고, 가난한 나라 멕시코의 국립 자치대학에서 토목공학을 배운 학생이 어떻게 부를 이루게 되었는지를 그의 모든 가문의 역사적 배경과 함께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현재 멕시코는 수천 명의 우리 동포가 거주하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본다면 에니깽의 슬픈 역사가 있는 나라, '꼬레아'의 숨결이 오랜 역사 속에서 사회 다방면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지금 멕시코는 시간당 평균 이백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카를로스 슬림이라는 역사적 인물과 함께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나라에서, 새로운 정보 통신 사업을 ‘아메리칸 모빌’ 과 함께 전투적으로 확장해 나가고 있다. 18년 전 부인을 잃고 독신으로, 그는 아직도 어린 자식들을 길러낸 30년 이상 된 옛집에서 살며, 멕시코시티의 지옥 같은 도로 한복판에서 자신의 벤츠를 직접 운전해서 다니며 왕성한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는 별도의 경영수업을 받지 않은 공학도가 어떻게 이렇게 큰 부를 이루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하지만 전 12살 때부터 사업을 했습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부자는 돈을 벌기 위해 끊임없이 배운다.”라는 수식어가 그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 책은 멕시코에 진출한 우리 기업의 모든 사람과 그곳에 거주하며 꿈을 키우는 수천 명의 우리 동포, 그리고 또 라틴아메리카에 자신의 미래를 걸고 그곳 언어를 공부하는 젊은 학생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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