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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회 사무엘 하권 12장-16장
2사무 12,1-15 나탄이 다윗을 꾸짖다
12장의 바탕에는 오래된 전승이 자리 잡고 있다. 그 가운데 밧 세바가 다윗에게 낳아 준 첫아들의 병과 죽음, 그리고 여디드야라 불린 솔로몬의 탄생을 알려주는 15-25절은 반드시 포함된다. ‘다윗이 죄를 지었으나 그의 왕조는 튼튼하게 될 것이다’라는 이 12장의 근본정신은 7,1-17과 같다. 주님께 사랑받는 아이의 탄생은 바로 그 표징이다. 저자가 솔로몬의 탄생을 암몬인들의 완전한 정복(그들의 수도인 라빠의 함락:26-31절) 바로 앞에 놓은 것은 다윗이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12장의 전반부에서(1-15절) 나탄의 비유, 다윗의 자백, 다윗의 목숨을 건져주는 하느님의 용서, 밧 세바가 낳아 줄 첫아들의 죽음에 대한 예고(1-7절과 13-15절) 이 대목의 전반적 배경보다 더 오래된 전승에 속한다.
2사무 12,1-15 나탄이 다윗을 꾸짖다
“주님께서 나탄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나탄이 다윗에게 나아가 말하였다. ‘한 성읍에 두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부자이고 다른 사람은 가난했습니다”(1). 주님께서 예언자 나탄을 다윗에게 보내신 때는 다윗이 범죄한 이후(11,4) 약 1년 정도는 되었을 때이다. 왜냐하면 그때는 이미 밧세바가 다윗의 아이를 해산한 때였기 때문이다(14절). 그런데 하느님께서 이처럼 다윗이 범죄한 즉시 꾸짖지 않고 약 1년 후에 견책(譴責)한 까닭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다윗으로 하여금 죄로 말미암은 영적인 고통의 실상을 경험케 하여 다시는 죄를 범하고자 하는 욕망을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또한 다윗의 굳어진 마음이 하느님을 향하여 열려지기를 기다리기 위함이다. 아무튼 이처럼 주님께서 다윗을 회개시키기 위해 예언자 나탄을 보내신 사실은 하느님께서 먼저 범죄한 인간에게 '찾아오시는 하느님'이심을 보여 준다. 사실 만약 하느님께서 인간을 찾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여전히 죄와 절망의 자리에 버려진 상태에 있을 것이다(로마 1,28). 한편 나탄(Nathan)은 앞서 다윗이 성전 건축을 상의한 적이 있는 예언자이다(7,2). 특히 왕의 권세앞에서도 당당히 진리의 말씀을 외치며 죄악을 지적하는 이 예언자의 용기는 타락한 세상 가운데서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힘과 소명감을 고취시켜 준다.
다윗의 무서운 범죄를 지적하기 위한 나탄 예언자는 부자가 가난한 자의 암양 한 마리를 빼앗아가는 비유를 들어 말한다. 나탄이 이처럼 비유를 들어 다윗을 책망코자 했던 이유는 다음 서너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한 나라의 왕인 다윗의 권세에 대한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여 다윗의 완고해짐을 막기 위함이다. 또한 우회적(迂廻的)인 방법을 사용, 다윗 스스로가 자신의 죄를 기억하고 고백하도록 유도하기 위함이다. 아니면 자신의 죄의 실상에 대해 둔감한 다윗에게 비유를 통해 그 죄의 참담한 실상을 환히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처럼 비유는 완고하고 어리석은 죄인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데 아주 효과적인 한 방법이다.
부자는 양과 소가 많았다. 여기서 부자는 다윗을 말한다. 그리고 '양과 소'는 다윗의 수많은 부인과 첩을 의미한다(1역대 3,1-9). 나탄이 이러한 비유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이처럼 다윗이 많은 아내들을 거느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만족치 아니하고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에게 눈길을 돌렸다는 것이다.
가난한 자에게 있던 암양 새끼 한 마리가 그에게 있어선 단순한 애완용 동물의 차원을 넘어 그 자신의 유일한 꿈과 희망이 담겨 있는 고귀한 존재임을 의미한다. 암양 새끼와 가난한 주인 간의 동고 동락(同苦同樂) 관계를 묘사한 말로서 곧 우리야와 밧세바 간의 애정 관계를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다윗이 우리야의 가정을 파괴하기 이전에는 비록 물질적으로는 풍족하지 못하였지만 우리야의 가정이 사랑과 희망이 넘치는 화목한 가정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부자에게 길손이 찾아왔습니다. 부자는 자기를 찾아온 나그네를 대접하려고 자기 양과 소 가운데에서 하나를 잡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의 암양을 잡아 자신을 찾아온 사람을 대접하였습니다”(4). 부자가 길손을 위해 가난한 자의 양 새끼를 빼앗은 강탈 죄를 나탄은 말하고 있다. 히브리 관습상 길손은 어느 집에 가서든 하룻밤 거처할 자리와 식사를 요청할 수 있었는데 그 경우 집주인은 저들의 요구에 응해 주어야 했다. 하지만 4절에서 부자가 이러한 나그네를 대접하기 위해 자신의 소유를 사용하는 대신 오히려 가난한 자의 애지 중지하는 '암양'을 빼앗았다는 사실은 그의 소행이 마땅히 가중 처벌에 해당하는 악독한 범행임을 보여 준다.
“다윗은 그 부자에 대하여 몹시 화를 내며 나탄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그런 짓을 한 그자는 죽어 마땅하다”(5). 나탄의 비유가 다윗의 잠자던 양심을 일깨우는 데 성공하였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그렇지만 이는 분명히 자기 눈의 들보는 깨닫지 못하면서 남의 눈의 티끌에만 민감히 반응한 다윗의 모순된 태도가 아닐 수 없다(마태 7,3-4). “그런 짓을 한 그자는 죽어 마땅하다” 다윗은 이 말을 통하여 간음(11,4)과 살인(11,15)을 저지른 자신의 죄악에 대하여 스스로 율법에 따른 형벌(레위 20,10; 24,17)을 선고한 셈이다.
그리고 6절에서 다윗은 나탄에게 부자는 가난한 사람의 암양을 네 배로 갚아야 한다고 말한다. 네 배는 도둑에 대하여 율법이 규정한 배상 기준이다(탈출 21,37; 22,1). 지금까지 율법을 무시하고 범행을 저지른 다윗이 율법의 기준을 언급한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모순이다. 우리는 여기서 자신의 큰 죄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관대하고 타인의 적은 죄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엄격한 타락한 인간성을 보게 된다.
“그러자 나탄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우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해 주었다”(7). 지금까지 나탄의 비유를 남의 일로만 알고 단죄하던 다윗의 무딘 양심을 결정적으로 일깨워 주는 나탄 예언자의 선포이다. 나탄은 자신의 사사로운 권위가 아닌 하느님의 엄위한 권위로써 이제 범죄한 다윗을 꾸짖는다. 우리는 이러한 나탄 예언자의 직언을 통하여 참된 예언자의 사명과 오늘날 교회의 예언자적 사명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이같은 사명의 배후에는 무엇보다 상대방을 사랑하는 관용의 정신이 있어야지 그렇지 못할 때에는 남을 무조건 판단하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7절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부터 8절까지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지금껏 다윗에게 베푸셨던 은총에 대한 언급이다. “나는 너에게 네 주군의 집안을, 또 네 품에 주군의 아내들을 안겨 주고, 이스라엘과 유다의 집안을 주었다. 그래도 적다면 이것저것 너에게 더 보태 주었을 것이다”(8). 즉 7절과 8절은 어떠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도 만족하게 지낼 수 있었던 다윗의 은혜로운 형편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이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우리야를 죽이고 밧세바를 강탈한 행위는 정상 참작조차 할 수 없는 악랄한 범죄였다고 규정지을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그러한 다윗의 범죄는 친히 풍성한 은혜를 체험한 자로서 그 은혜의 하느님을 배반한 배은 망덕한 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찌하여 너는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주님이 보기에 악한 짓을 저질렀느냐? 너는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를 칼로 쳐 죽이고 그의 아내를 네 아내로 삼았다. 너는 그를 암몬 자손들의 칼로 죽였다”(9). “너는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고”라는 것이 다윗이 범죄하게 된 근본 원인이다. 즉 그는 하느님의 율법을 가볍게 생각했기에 그에 따를 하느님의 분노를 생각치 않고 탐욕과 간음, 살인죄를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다윗에게 하느님께서 진노를 발하신 것(10-12절)은 "불의로 진리를 억누르는 사람들의 모든 불경과 불의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가 하늘에서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로마 1,18)라는 말씀이 적용된 경우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네 집안에서는 칼부림이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이다. 네가 나를 무시하고,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의 아내를 데려다가 네 아내로 삼았기 때문이다”(10). 다윗 당대 뿐 아니라 다윗의 후손 대부분이 전쟁과 살인 사건에 휘말려 들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이 같은 예고는 훗날 암논의 죽음, 압살롬의 반란 사건, 그리고 아도니야의 죽음을 통해 그대로 이루어졌다. 또한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 통일 왕국이 남북으로 분열되어 서로 반목 질시하게 된 것도 넓게는 이같은 예언의 성취로 볼 수 있다. 아무튼 이러한 다윗가의 재앙은 무고한 우리야를 살해한 죄에 상응하는 하느님의 형벌이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때 다윗이 나탄에게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 하고 고백하였다. 그러자 나탄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임금님의 죄를 용서하셨으니 임금님께서 돌아가시지는 않을 것입니다”(13). 비록 간단한 한 마디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이지만 다윗의 진심이 응결되어 있는 진정한 회개요 통회이다. 즉 다윗은 자신의 범죄가 인간을 죽게 한 것이기 이전에 먼저 주님의 말씀을 무시한 것에 대한 죄악이더 우선됨을 고백한다. 이러한 다윗의 회개는 참된 회개의 전형을 제시하고 있는바 이제 그 특성을 살펴보면 곧 다음과 같다. 다윗은 나탄 예언자의 책망을 들은 즉시 회개하였다. 이는 사울의 경우와 달리 그가 나탄 예언자의 주님의 말씀에 대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받았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다윗의 회개는 매우 짧았다. 즉, 그의 회개에서 우리는 자신의 죄에 대하여 어떤 변명하려는 흔적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다윗의 회개는 자신의 죄에 대해 숨김없이 실토한 것이었다. 즉 그는 어떻게든 자신이 지은 죄악 중 하나만이라도 숨기려 감추려고 하지 않고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모든 죄를 다 내어 놓고 용서를 청한 것이다. 결국 다윗의 회개는 겸손한 회개였다. 즉, 그는 일개 예언자의 찌르는 듯한 말 앞에서 왕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든 죄를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인정하였다.
“주님께서 임금님의 죄를 용서하셨으니 임금님께서 돌아가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용서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바르'는 '치우다', '제거하다'란 뜻이다. 이는 곧 하느님께서 인간에게서 죄를 거두어 가신 후 본래 죄 없었던 것처럼 여겨 주시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다윗의 간음죄와 살인죄는 특히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으므로(레위 20,10; 24,17) 하느님의 이러한 용서하심은 곧 그의 목숨을 살려 주시는 은총이었다. 따라서 특별히 13절에는 '임금님께서 돌아가시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다. 한편 이처럼 죄는 미워하고 반드시 심판하셔도 회개하는 죄인에게 대해서만은 은총을 베푸시는 것이 하느님의 사랑의 한 특성이다. 그러나 다윗의 경우에 있어서 이러한 하느님의 용서의 은총은 하느님의 부성적인 사랑 외에도 다윗 약속(7,4-17)에 대한 하느님의 성실하심에 기초한 것이다.
그러나 다윗의 죄에 대한 대가가 필요하였다. 죄는 용서해야 하지만 그 죄에 대한 벌 자체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벌의 대가로 아들의 죽음이 찾아오게 된다. “다만 임금님께서 이 일로 주님을 몹시 업신여기셨으니, 임금님에게서 태어난 아들은 반드시 죽고 말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나탄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주님께서 우리야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아 준 아이를 치시니, 아이가 큰 병이 들었다”(14-15).
2사무 12,16-23 다윗의 아들이 죽다
“다윗은 그 어린아이를 위하여 하느님께 호소하였다. 다윗은 단식하며 방에 와서도 바닥에 누워 밤을 지냈다”(16). “다윗은 단식하며 방에 와서도 바닥에 누워 밤을 지냈다”라는 말에서 “방에 와서도”라는 말은 다윗이 성소(sanctuary)에 들어갔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 철저한 기도를 드리기 위해 조그마한 골방(마태 6,6)에 들어갔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처럼 다윗이 골방에서 7일 동안(18절) 단식하며 기도를 드린 것은 자기의 죄 때문에 죽어가는 아이(14,15절)를 하느님의 은총에 호소하여 살리기 위함이었다(22절). 특히 다윗이 '바닥에 누워 밤을 지냈다'는 표현은 그가 하느님께 구할 자격이 없으므로 오직 하느님의 자비하신 은총만을 기다린 애절한 형편을 잘 보여 준다.
다윗의 기도와 달리 아이는 7일째 되는 날 죽게 된다. 다윗의 신하들은 아이의 죽음으로 다윗의 심려가 커서 해로운 일이 생길까 염러한다. 그런데 다윗의 신하들의 염려와는 정반대로 다윗이 아이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동요도 없이 오히려 기운을 차린다. “그러나 지금 아이가 죽었는데 무엇 때문에 내가 단식하겠소? 아이를 다시 데려 올 수라도 있다는 말이오? 내가 아이에게 갈 수는 있지만 아이가 나에게 돌아올 수는 없지 않소?”(23).
따라서 이러한 다윗 왕의 의외적인 행동은 학자들간에 논란을 일으키기에 충분한데 대체로 다음과 같은 주장들이 제시되고 있다. 혹자는 다윗왕이 애초부터 아이를 위해 기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참회하기 위해 기도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다윗 왕이 아이를 위해 기도했다고 한 본장의 분명한 기록과 대치된다(16, 22절). 또한 혹자는 다윗 왕이 그의 불행을 불굴의 의지로 딛고 일어선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다윗왕이 주님의 전에 들어가서 식음(食飮)을 전폐한 채 하느님께 매달린 사실의 의미를 분명하게 보여주지 못한다. 다윗 왕의 이러한 행동은 하느님께서 행하신 일을 겸손하게 그대로 받아들인 신앙적 행동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즉, 다윗은 지금까지 아이를 위해 단식하고 기도했으나 이제 하느님의 뜻이 분명하게 드러났으니 만큼 죽은 아이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주장이다. 이는 본장의 기록과 일치할 뿐더러(22,23절)이후 하느님께서 다윗에게 죽은 아이 대신 솔로몬을 허락하신 사실과도 부합되므로(24, 25절) 타당한 견해라 할 수 있다.
한번 떠난 인간의 생명은 돌이킬 수 없으며 이는 하느님의 주권적인 섭리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다윗은 죽은 아이에 대해 계속적으로 미련을 가지는 대신 하느님의 최종적 결정에 스스로를 복종시키므로 세상적 욕심을 버린 것이다. 이처럼 비록 범죄하였지만 회개함과 동시에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다윗의 자세는 모범적이다. 즉 다윗은 인간의 생명까지도 하느님의 주권에 달려 있음을 확신하므로 이제 자신의 아이의 죽음에 직면하여서도 평안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2사무 12,24-25 솔로몬이 태어나다
“다윗은 자기 아내 밧 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 잠자리를 같이하였다. 밧 세바가 아들을 낳자 다윗은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였다. 주님께서 그 아이를 사랑하셨다”(24). 이제 밧 세바를 더 이상 '우리야의 아내'라 하지 아니하고 '다윗의 아내'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이제 하느님께서 밧세바를 다윗의 아내로 인정하셨음과 솔로몬이 하느님께서 인정하시는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거해 준다.
'솔로몬'은 '평화의 사람'이란 뜻이다. 다윗이 그의 이름을 솔로몬(Solomon)이라고 지은 동기에 대하여, 혹자는 이제 이 아이의 시대에는 다윗 자신의 시대에 있었던 것과 같은 피흘리는 처절한 전쟁(8, 10장)이 사라지고 하느님의 은혜로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솔로몬이라고 하는 아이가 자신의 범죄에 대한 다윗의 진실한 회개 이후에, 하느님께서 다윗과 밧 세바 가정에 사랑의 표시로 주신 선물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 따라서 다윗이 그의 새 아이를 솔로몬이라고 이름한 것은 솔로몬의 출생이 하느님과 그 가정 사이에 '화목'관계가 회복된 사건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사실은 하느님께서 나탄 예언자를 보내어 이 아이의 이름을 재차 지어주신 것(25절)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그런데 이같은 솔로몬은 실상 밧 세바가 다윗에게 낳은 넷째 아들이다(1역대 3,5). 그러나 여기서 솔로몬이 앞서 죽은 아이(18절)의 바로 다음에 태어난 것처럼 기술된 까닭은 아마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솔로몬을 특별히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25절). 장차 다윗의 왕위를 이을 계승자로서 솔로몬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다(1열왕 1장).
나탄 예언자가 다윗을 방문한 것은 다윗 가정에 대한 하느님의 새로운 뜻을 알리기 위한 직무 수행이었다. 나탄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여디드야 즉 “주님의 사랑을 받은 아이”라고 불렀다.
2사무 12,26-31 다윗이 라빠를 점령하다
“요압은 암몬 자손들의 라빠를 공격하여 그 왕성을 점령하였다”(26). 라빠 성 함락 사건이 솔로몬의 출생보다 먼저 일어난 사건이었지만 솔로몬 탄생 다음으로 기술한다. 여기서 '왕성'(the royal city)은 라빠 성을 이루고 있던 두 성중 하나의 성을 의미한다. ‘물의 성’은 왕성(王城)과 더불어 라빠 성을 이루고 있던 또 하나의 성이다. 즉 이는 얍뽁 강에서 흘러 들어온 물을 가두어 두었던 라빠의 수로를 지키기 위한 또 하나의 성이었다.
당시 다윗이 거처하던 예루살렘(11,1)에서 암몬의 수도 라빠까지는 약 70km 정도의 거리이다. 따라서 요압의 전갈을 받은 다윗(27,28절)은 그다지 많은 시간을 소요(所要)하지 않고서도 라빠에 당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윗은 군사를 모아 라빠로 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 암몬 왕의 왕관을 빼앗었다. 왕관의 무게가 한 달란트가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 달란트는 34.27kg에 달한다.
34kg이나 나가는 왕관은 다윗이 머리에 쓰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것이다. 따라서 다윗은 암몬족의 면류관에서 보석만을 빼어 자신의 면류관에 부착한 후 이를 머리에 썼을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행위는 헛된 우상을 섬긴 암몬 사람들의 실패와 다윗 왕이 이제 암몬의 정복자가 되었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행위였음이 분명하다.
2사무 13,1-23 암논과 타마르
“그 뒤에 이런 일이 있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는 아름다운 누이가 있었는데 이름은 타마르였다. 이 타마르를 다윗의 아들 암논이 사랑하였다”(1). “그 뒤에 이런 일이 있었다”에서 ‘그 뒤에’란 용어는 구약에서 대개 다음 두 가지 예로 사용되었다. 첫째, 시간적인 전후 관계를 연결하는 접속사(1사무 24,8)로서 , 두 번째 시간적인 전후 관계와는 상관없이 단순히 상이한 두 내용을 서로 연결시켜 주는 접속사의 기능을 가졌다. 그런데 13장 1절에서는 첫 번째 경우로 사용되었다. 즉 다윗 가문에 재앙이 있을 것이라는 나탄의 예언자의 말에 이어 일어나는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다윗이 헤르본에서 낳은 아들 가운데 암논은 이즈르엘 여자 아히노암에서 낳았고 맏아들이다. 압살론과 타마르는 그수르 임금 탈마이의 딸 마아카에게 낳았다. 당시 그수르는 이스라엘 바로 북쪽에 위치한 아람 소국이었는데 다윗은 이 이방 나라와의 화친을 위해 정략 결혼을 하였다. 타마르는 암논의 이복 누이동생이다. 암논이 타마르에 대한 연민의 정 때문에 상사병(相思病)이 걸렸다. 상사병에 걸린 암논은 정욕에 사로잡혀 타마르에게 해서는 안될 짓을 하였다. 암논은 타마르의 전인격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육체만을 사랑했었음을 알 수 있다. 암논의 이러한 충동적이고 쾌락 일변도적인 성적 욕망은 그가 타마르를 범한 후 오히려 그녀를 싫어한 사실(14, 15절)에서도 잘 드러난다.
“암논이 누워서 아픈 척하자 임금이 그를 보러 왔다. 암논이 임금에게 ‘누이 타마르를 들여보내시어, 그 애가 제 눈앞에서 과자 두 개를 만들고, 제가 그 애 손에서 받아먹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6). 여호나답은 자기의 지혜로 암논의 부도덕한 욕망을 충족시켜 주었으므로 약한 지혜의 소유자, 곧 교활한 자였다. 여호나답은 암논에게 아픈 척을 해서 타마르의 간호를 받도록 다윗에게 거짓으로 청하라고 말하였다.
이는 자식에 대한 다윗 왕의 남다른 애정을 이용하여 암논의 욕망을 이루게 하려는 여호나답의 간교한 계략이다. 한편 이와 같이 여호나답이 암논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그를 도와 준 까닭은 아마 암논이 다윗 왕의 장자로서(3,2) 왕위 계승의 서열 제1위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여호나답은 자신의 입신 출세를 위해 차기 왕의 지목에 있어서 가장 유리했던 암논을 가까이 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추론(推論)은 왕위 계승의 서열상 장자가 우선이라는 당시 고대 사회의 통념으로 볼 때 매우 일리가 있다.
한편, 하느님께서는 앞서 나탄 예언자를 통하여 다윗 왕의 계승자로 이미 솔로몬을 넌지시 지목하셨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윗이 당시 이러한 사실을 공식 발표하지 않은 것은 아마 왕자들 간의 실권 다툼을 우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암논의 범죄에 다윗이 개입되어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다윗은 후에 발생되는 압살롬의 범죄 때에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개입되었다(23-28절). 이러한 사실은 다윗 가문의 모든 재난이 다윗 자신의 범죄(11장)로 말미암아 발생하고 있음을 다윗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한 하느님의 섭리라 고 볼 수 있다. 즉 이 같은 사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더 이상 다윗으로 하여금 이전과 같은 죄악을 범치 않도록 채찍질하고 계시는 것이다.
히브리 관습에 따르면 여인들은 음식 만드는 일에 초청되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한다. 비록 암논의 요구(6절)가 좀 부자연스럽긴 했지만 다윗이 그 요구를 받아들였던 것도 그 같은 관습 때문이었을 것이다.
히브리인들은 실내에 있는 화로(火爐)나 벽난로에서 요리를 하였다. 즉, 저들의 가옥 구조는 부엌과 거실이 거의 구별되지 않았다. 따라서 타마르는 암논이 지켜보는 가운데 요리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암논이 타마르가 가져온 요리를 거절한다. 이는 병이 악화되기나 한 듯이 방문객들에게 보이기 위함이었다. 즉 이렇게 하여 그는 타마르 이외에 모든 사람들을 밖으로 나가도록 한 자신의 행동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도록 꾸몄던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암논의 꾸밈은 모략가인 여호나답의 지시(5절)를 받아 이루어진 것임에 분명하다.
“암논이 타마르에게 말하였다. ‘음식을 방 안으로 가져와, 내가 네 손에서 받아먹게 해 다오.’ 타마르는 자기가 만든 과자를 들고 암논 오빠의 방으로 가져갔다”(10). 타마르가 미처 오라비 암논의 흑심(黑心)을 눈치채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즉 그녀는 암논이 자신을 범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에 어떻게든 병든 암논의 마음을 위로해 주기 위해 구운 과자를 들고서야 기꺼이 암논의 침실에까지 들어간 것이다.
암논은 타마르가 방에 들어와 과자를 가까이서 먹여주려고 할 때 그녀를 끌어 안았다. “그러자 타마르가 그에게 말하였다. ‘오라버니, 안 됩니다! 저를 욕보이지 마십시오. 이스라엘에서 이런 짓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추잡한 짓을 저지르지 마십시오”(12). 암논이 하느님의 율법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간음(레위 18,9)을 요구하고 있는 장면이다. 암논은 인간의 눈을 피하기만 한다면(9절) 자신의 죄악이 숨겨질 것으로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다윗의 경우처럼 이번에도 하느님께서는 암논의 극악한 행동 하나하나를 지켜보고 계셨으며 끝내 그를 징계하셨다(29절). 이처럼 인간의 범죄는 반드시 자신의 파멸을 가져오는 것이 그 특징이다. 따라서 우리가 각종 탐심과 욕정을 억제함으로 범죄치 않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에 우리의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압살롬의 누이동생 타마르는 암논에게는 이복동생이었다. 옛날 관습에 따르면 이복동생과 혼인하는 것은 문제시되지 않았다(창세 20,12). 문제가 되는 것은 혼인 전의 처녀를 강제로 범하여 동정성을 빼앗는 행위였다. 나중에 이복동생과의 혼인은 폐지되었다(레위 18,11; 신명 27,22).
타마르의 온갖 설득과 만류에도 불구하고 암논은 기어코 자신의 욕정을 채우고 말았다. 이는 곧 그 아버지 다윗이 이성을 잃어버린 채 우리야의 아내 밧 세바를 범한 것과 같은 경우이다(11,2-4). 하지만 이는 곧 하루살이가 타오르는 모닥불을 보고선 불속으로 뛰어듦과 같다. 즉 하루살이는 불빛에 미혹되어 그 속으로 뛰어들지만 맹렬하게 타오른 모닥불은 하루살이를 도리어 태워버리고 마는 것이다. 성경은 무릇 다른 죄악보다 온갖 정욕의 죄를 보다 엄히 경계하고 있다. 왜냐하면 "불륜을 멀리하십시오. 사람이 짓는 다른 모든 죄는 몸 밖에서 이루어지지만, 불륜을 저지르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이기 때문이다(1 코린 6,18).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같은 경고를 듣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불속에 뛰어드는 하루살이와 같은 결과를 초래하고 말 것이다.
“그런 다음 암논은 타마르가 지독히 미워졌는데, 타마르를 미워하는 마음이 전에 타마르를 사랑하던 마음보다 더 컸다. 그래서 암논은 타마르에게, ‘일어나 나가라!’ 하였다”(15). 방금 전까지만 해도 병이 날 정도로(2절) 애모했던 자를 이제 성적 욕구를 채우고 난 후에는 도리어 심히 미워하는 암논의 심리현상은 변태 성욕자(變態性慾者)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즉 상대방의 인격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없이 하등 동물적인 욕정에만 사로잡혀 있을 경우, 일단 육체적 욕망이 충족되고 나면 심한 수치감과 허탈감, 상대방에 대한 혐오감에 사로잡히는 것이 사람의 일반적 심리 현상인 것이다.
암논이 타마르를 자기 집에서 쫓아내는 것은 방금 자신에게 추행(醜行)을 당한 타마르의 수치심을 더욱 자극하는 행동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러한 암논의 행위는 자기 때문에 불행한 생(生)을 맞이하게 된 타마르에 대하여 약간의 동정심도 베풀지 아니한 잔악한 행위임에 분명하다.
타마르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문을 걸아 잠그는 암논의 이러한 행위는 자신의 양심에 빗장을 지르는 것이자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다는 하느님의 심판의 문빗장을 스스로 지르는 짓이 아닐 수 없다. 만일 그가 타마르에게 조금이라도 정신을 가다듬고 수치심을 억누를 수 있는 시간적 여유만이라도 주었더라면 타마르와 하느님으로부터 일말의 자비를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암논은 스스로를 철저히 악으로 일관하였으니 결국 하느님의 진노의 형벌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타마르는 머리에 재를 뒤집어쓰고 긴 겉옷을 찢고 머리에 손을 얹은 채 울부짖으며 걸었다. 머리에 재를 뒤집는 행위나 머리에 손을 얹는 것은 고대 근동에서 슬픔 또는 수치의 표시였다. 머리는 그 사람의 명예를 상징하는 것이다. 머리에 손을 얹는 행위를 한 타마르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당한 억울함(11-14절)을 포함한 아울러 자신의 순수함과 결백함을 나타내고자 하였을 것이다. 타마르는 조금 전 과자를 구울 때 사용한 화로나 벽난로에서 취한 재를 머리에 뒤집어 썼을 것이다. 옷을 찢는 행위 역시 단식이나 굵은 베옷을 입는 행위와 더불어 참을 수 없는 자신의 슬픔을 나타내던 히브리인들의 한 표현 방법이었다.
매우 슬피 울며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고 있는 타마르의 모습을 본 압살롬이 암논의 추행을 짐작하고선 사실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완곡하게 묻는다. “타마르의 오빠 압살롬이 타마르에게 말하였다. ‘네 오라비 암논이 너와 함께 있었느냐? 그렇다면 얘야, 지금은 입을 다물어라. 어떻든 그는 네 오빠이다. 이 일에 마음을 두지 마라.’ 타마르는 제 오빠 압살롬의 집에서 처량하게 지냈다”(20).
이 같은 압살롬의 말은 다음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아버지 다윗이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두고 보겠다는 의미이다(21절). 암논에게 복수할 좋은 묘책이 떠오를 때까지는 경거 망동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사실 암논에게 일언 반구(一言半句)도 하지 않은 채 2년 동안 기회를 노린 점을 볼 때 압살롬의 복수심은 대단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윗 임금이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화를 내었다”(21). 다윗 왕은 암논의 범죄 소식을 듣고선 일시적으로 크게 노하기만 했을 뿐 율법에 따라 암논을 사형에 처하지는 않았다(레위 20,17). 그 이유에 대하여 70인역(LXX)은 "그러나 그는 자기 아들 암논을 꾸짖지 않았는데 암논이 자신의 첫아들이어서 그를 사랑했기 때문이다"라고 보충 설명하고 있다. 다윗은 화를 냈지만 이 일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계승사는 여러 곳에서 다윗의 혼란과 허약함을 보여준다. 이러한 다윗의 잘못은 결국 엄청난 가정의 비극을 초래하고 말았다. 즉 다윗의 우유부단한 처신에 불만을 품은 압살롬은 결국 암논을 살해하고(23-29절) 더 나아가 다윗에게 반기(叛起)하고 만 것이다(15장).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 가정 교육의 주안점은 자녀의 영혼을 바로 세우는 것이라고 할수 있다. 즉 자녀가 잘못했을 때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준엄하게 가르치어 그로 하여금 바른 삶을 살게 하는 것이 곧 부모의 참된 역할인 것이다(2티모 3,16-17).
누이 동생 타마르의 일로 인해 암논을 미워하게 된 압살롬이 그 일에 대하여 암논에게 한 마디도 따지거나 변론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사실은 압살롬이 속으로 암논과 절교(絶交)를 선언하고 또한 잔인한 복수극을 계획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2사무 13,23-37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다
“두 해가 지났다. 에프라임 근처 바알 하초르에는 압살롬의 양털깎는 일꾼들이 있었다. 압살롬은 왕자들을 모두 그곳으로 초대하고, 다윗 임금에게도 가서 말하였다. “이번에 임금님의 이 종이 사람들을 불러 양털을 깎게 되었는데, 임금님께서도 신하들을 거느리시고 이 종과 함께 내려가 주십시오”(23-24). ‘두 해가 지났다’라는 말은 압살롬의 복수극이 즉흥적인 감정에 의해 돌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숙고와 치밀한 계획 하에 이루어진 것임을 보여준다. 한편, 압살롬의 이러한 음모는 단순히 자기 누이의 한을 풀어 주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권좌를 차지하기 위한 일종의 쿠데타였을 것이다. 즉 다윗 왕의 세째 아들이었던 압살롬은 다윗의 차남인 킬압이 일찍 죽었으며 장남인 암논만 제거하면 권좌에 오를 수 있는 입장에 있었던 것이다.
바알 하초르는 에프라임 성에서 북쪽으로 약4km, 베텔에서 북동쪽으로 8km, 예루살렘에서 서북쪽으로 약24km 떨어진 마을이다. 이곳은 해발 1,200m 가량 되는 고지로서 양을 키우기에 아주 적합한 목초지였다. 압살롬은 다른 왕자들처럼 이곳에 자기 토지를 마련하고 많은 양들을 사육했던 것 같다. 당시 목축업을 주산업으로 삼고 있던 이스라엘에서 양털을 깎는 일은 축제(祝祭)의 분위기 속에서 행해졌다. 따라서 압살롬은 이 일을 미끼로 자연스럽게 형제들을 불러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압살롬은 먼저 왕위 계승권이 없는 왕자들을 청한 후 이제 다윗 왕을 잔치에 청한다. 그러나 압살롬이 왕을 청한 것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암논을 자기의 계략 속에 끌어들이기 위해 펼쳤던 작전이었다. 즉, 그는 다윗이 신하들을 대동하여 자신의 잔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어려움이 많다는 것을 미리 계산하고, 그 대신에 왕의 실질적인 대표라고 간주되었던 암논을 보내달라고 간청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다윗을 잔치에 청하는 척 한 것이다.
“그래도 압살롬이 간청하자 임금은 암논과 모든 왕자를 압살롬과 함께 떠나보냈다”(27). 이처럼 압살롬의 요청에 대해 다윗이 결국 승락하게 된 까닭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다음과 같이 서로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 다윗이 암논의 추행 사건 이후 2년 동안 압살롬으로부터 자기 누이의 원수를 갚고자 하는 어떠한 조짐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암논은 잔치에 참석할 수 없었던 다윗 왕을 대신할 수 있는 맏아들이었기 때문에 다윗이 압살롬의 요구를 더 이상 거절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는 주장이다. 물론 이상의 모든 사실들이 다윗의 행위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보다 결정적인 이유는 아마도 직감적으로 불안을 느꼈으면서도 압살롬의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한 다윗 자신의 우유 부단한 성격이 크게 작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70인역(LXX)에 보면, 27절 끝에 “압살롬은 임금의 잔치와 같은 잔치를 베풀었다”라는 기록이 부가되어 있다. 만일 우리가 이 해설적인 구절을 원문의 일부로 인정할 수 있다면, 압살롬은 암논을 일단 술에 취하게 만들기 위하여 왕에게나 대접하는 것과 같은 진수 성찬을 준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이에 따르면, 압살롬은 자신이 암논을 차기(次期) 왕위 계승자로 여기는 것처럼 보이기 위하여 암논에게 왕의 주연을 베풀었고, 그 결과 암논으로 하여금 안심하고 술에 취하도록 계획했었음을 알 수 있다.
암논의 죽음은 압살롬의 주도 면밀한 음모하에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아울러 암논의 부주의함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암논은 압살롬의 암살 음모를 간파하지 못하고 술에 취함으로 스스로 죽음을 재촉한 것이다. 한편 이처럼 압살롬이 암논을 살해한 행위는 비록 타마르의 치욕에 대한 복수이기는 하나 이 역시 온당치 못했다.
왜냐하면 암논의 범죄는 개인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율법적인 차원에서 징계되어야 했는데도(신명 32,35) 압살롬이 자신의 분노한 감정에 따라 암논을 살해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은 그 행동의 바탕 하느님의 말씀에 두지 않는 한 항상 오류를 범할 수 밖에 없다. 즉 아무리 인간적인 측면에서 동정을 얻고 합리화 시킬 수 있는 일이라 하더라도 하느님의 뜻에 배치된 행동은 또 다른 죄악을 낳고 마는 것이다.
30절에 다윗은 아들들 모두가 압살롬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사실과는 매우 다른 보고가 다윗 왕에게 전달된 것은 그 당시 현장에서 도망쳐 나온 자들이 절박한 상황 속에서 미처 진상을 파악하지 못한 채 모든 왕자들이 죽임 당했으리라는 지레 짐작하에 성급하게 보고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다윗과 신하들 모두 옷을 찢고 비통한 모습을 보였다. “그때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 여호나답이 말하였다. ‘임금님께서는 그들이 젊은 왕자님들을 모두 살해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실은 암논 왕자님 혼자만 돌아가셨습니다. 이는 암논 왕자님이 누이 타마르 공주님을 욕보이시던 날부터 이미 압살롬 왕자님이 작정하신 일입니다”(32).
여호나답의 정확한 상황 판단이다. 이처럼 여호나답이 사건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는 그 동안 압살롬의 동정을 가까이서 살펴 왔음이 틀림없다. 즉, 그는 자신의 묘략을 베풀어 주어 일어났던 암논의 말에 타마르에 대한 추행 사건이 그의 오빠 압살롬의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기에 지난 2년 동안 압살롬의 동정을 추적해 왔을 것이다.
압살롬은 암논을 살해한 후 자신의 엄마가 살았던 고향 그수르로 도망을 간다. 그수르는 아람 소국들 중 하나로서 이스라엘 바로 북쪽에 인접해 있던 나라이다. 즉 '그수르'이란 말의 뜻은 '다리의 땅'으로서 이는 헤르몬 산에서 갈릴리 호수까지 북부 요르단강 양편으로 다리처럼 길게 뻗어있는 지역을 가리킨다. 한편, 다윗은 당시 그수르 왕 탈마이의 딸 마아카와 정략적인 결혼을 하여 그수르과의 우호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마아카에게서 태어난 자식이 바로 압살롬이다. 따라서 그수르 왕 탈마이는 압살롬의 외할아버지가 된다.
압살롬은 그수르에서 3년동안 머물렀다. 3년이란 다윗이 압살롬의 죄악을 잊어버리고 오히려 그에 대한 연민의 정으로 애끓기에 충분한 만큼의 세월이 지났음을 말해준다.
다윗 왕은 마음속으로 압살롬을 법에 따라 처벌할 의지를 포기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압살롬에 대한 다윗 왕의 분노는 시간이 지나자 점차 누그러지고 오히려 압살롬에 대한 연민의 정이 되살아 났음을 알 수 있다.
2사무 14,1-23 압살롬이 돌아오다
“츠루야의 아들 요압은 임금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기우는 것을 알아차렸다”(1). 이제 암논 살해 사건 후 3년이 지나자(13,23-39) 다윗이 망명 생활을 하고 있는 압살롬에 대하여 염려하고 있는 것을 요압이 알아차린 것이다.
요압은 트코아에 사람을 보내어 지혜로운 여인을 불러온다. 트코아는 예루살렘 남쪽 16km, 베들레헴 남족 8km 지점에 있는 고지대이다. 이곳은 예언자 아모스의 고향이자(아모 1,1), 르호보암의 산성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2역대 11,6). 지혜로운 여인이란 생활의 지혜가 있고 민첩하며 재치있는 여인을 의미한다. 한편, 이 여인의 거주지인 드코아는 요압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부터 약 2시간 거리였으므로, 아마도 요압은 일찍부터 이 여인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을 것이다. 요압은 여인에게 아들이 죽은 상을 당한 여인으로 변장하여 다윗에게 접근하여 압살롬을 인정토록 다윗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를 쓴다.
요압이 이처럼 압살롬의 사면(赦免)을 위해 애를 쓰고 있는 것은, 압살롬이 차기의 왕이 되리라고 믿고 이 시점에서 그의 환심을 얻어 자기의 권력을 확고히 해두기 위함이었다. 이런 점에서도 요압은 자기의 권력 유지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였음이 드러난다. 만일 요압이 다윗에 대한 진정한 충성심이 있었다면 드코아 여인을 쓰는 대신 나탄 예언자에게 이번 일을 부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요압은 그러지 않고 그릇된 욕심과 스스로 해 낸 인간적 계책으로 이번 일을 도모하였으니, 그 결과 도리어 압살롬의 반란이라는 엄청난 비극을 초래하고 말았다(15장).
“이 여종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들판에서 서로 싸우다가 말리는 이가 없어, 아들 하나가 다른 아들을 쳐 죽이고 말았습니다”(6). 여인이 설명한 자기 아들의 죽음과 암논의 죽음(13,29)은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즉, 전자의 죽음은 쌍방간의 싸움에서 일어난 과실 치사(過失致死)이나 후자의 죽음은 상대방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몰래 계획한 살해었던 것이다(13,23-29). 그러나 이 여인은 이러한 질적인 차이는 덮어두고 사건의 결과만을 비유하여 말하고 있다. 이는 분명 압살롬이 암논을 살해한 죄악성을 교묘히 경감시키려는 의도임에 틀림없다. 즉 드코아 여인은 다윗의 동정심을 유발시키기 위해 살해자에게 이롭도록 상황 설명을 전개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형제끼리 서로 싸우다가 형이 동생을 죽인 것은 물론 처음부터 계획된 살인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동기에 있어서 이는 이미 상대방에 대한 미움이 수반된 분명한 살인이다. 따라서 동생을 살해한 형을 죽이겠다는 군중들의 주장은 율법의 규례에 따른 합당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민수 35,16-19).
여인은 자식을 살려달라고 다윗에게 청한다. 이는 다윗 왕이 드코아 여인의 호소를 다 받아들여 그 남은 아들이 죽지 않도록 선처하겠다는 대답이다. 아마도 다윗은 드코아 여인의 큰 아들이 동생을 죽인 것은 처음부터 계획된 살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정상(情狀)을 참작, 동정을 베풀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여인이 또 ‘임금님께서 임금님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이 일을 기억하게 하시어, 피의 복수자가 살육을 그만두고 제 아들을 없애 버리지 않게 해 주십시오.’ 하고 애원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주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네 아들의 머리카락 한 올도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11). 다윗 왕과의 대화에서 세번째로 드코아 여인을 말하는 장면이다(4-7, 9절). 여기서 이 여인은 다시금 다윗 왕의 공정한 판단력을 흐트리고 그 감정에 호소하기 위해 하느님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다. 즉, 드코아 여인은 여기서 하느님의 두 속성인 정의와 자비 중 정의는 무시하고 자비만을 강조함으로써 다윗으로 하여금 압살롬 문제에 있어서 공정한 판단을 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다윗 왕의 맹세는 하느님의 자비만을 생각하고 정의를 무시한 잘못된 맹세였다. 왜냐하면 다윗 왕은 드코아 여인과 군중들(7절)의 입장을 다 들어보고 공정하게 판결을 내려야 할 재판장인데도 오직 한 쪽 편의 말만을 듣고 섣불리 맹세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판단 기준은 하느님의 율법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편벽되기 쉬운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윗의 맹세는 오히려 하느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 경솔한 맹세였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얻어낸 다윗 왕의 맹세(8,10,11절)를 압살롬의 경우에 적용시키기 위한 드코아 여인의 교묘한 청원이다.
“그래서 여인이 말하였다. ‘그런데 어찌하여 임금님께서는 하느님 백성에게 해가 되는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임금님께서는 당신께 쫓겨난 이를 돌아오지 못하게 하셨으니, 그런 결정으로 임금님께서는 스스로 잘못을 저지르신 격이 되고 말았습니다”(13). 여기서 '하느님의 백성'은 이스라엘을 의미하며 '그런 결정'이란 외국에 도피한 압살롬을 용서하지 않는 다윗 왕의 처사를 의미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압살롬을 다윗 왕의 후계자로 인정하고 그의 귀환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왜 유독 왕께서서만 압살롬의 죄를 용납하지 않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쫓겨난 이”란 그수르에 도피해 있는 압살롬을 은연중 지칭하는 말이다. 즉 드코아 여인은 지금 압살롬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고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 여인이 우회적으로 압살롬을 표현한 것은, 아마도 어떻게 해서든 사건의 진상을 덮어두고 다윗 왕의 약한 감정만을 움직여 압살롬에게 유리한 판결이 내려지도록 하기 위한 의도에서였을 것이다.
다윗은 여인의 이야기가 압살롬을 멀리하고 있는 자신을 두고 하는 말임을 알게 되고 배후에 요압이 있는 것을 알아 차리게 된다. “이 여종은 또 이렇게도 생각하였습니다. ‘나의 주군이신 임금님의 말씀이 나를 안심시켜 주실 것이다. 나의 주군이신 임금님은 하느님의 천사 같은 분으로, 선과 악을 판별해 주시는 분이시다.’ 주 임금님의 하느님께서 임금님과 함께 계시기를 바랍니다”(17).
다윗은 드코아 여인 불필요한 변명과 낯간지러운 아첨을 듣고 난 다윗이 이제서야 여인의 진정한 의도를 눈치챈다. 다윗 왕이 드코아 여인에게 이와 같이 캐물은 까닭은 아마 한갓 여인으로서는 이처럼 엄청난 일을 꾸미기 힘들리라고 판단했거나, 아니면 다윗이 여인의 말을 듣는 중 그 배후에 요압의 술수가 있으리라고 직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요압은 일찍이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기회주의자인 동시에 지략가였으므로, 다윗 왕은 이번에도 그가 자기의 권세를 공고히 하기 위해 술수를 부렸으리라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임금은 요압을 불러 말하였다. ‘좋소. 이제 내가 그대 뜻대로 하겠소. 가서 그 어린 압살롬을 데려오시오”(21). 다윗 왕은 압살롬이 요압의 강권으로 예루살렘으로 오도록 허락하였지만 그에 대해서 계속 적대적이다. 결국 압살롬의 귀환은 재앙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다윗 왕이 압살롬을 자기의 궁전에 돌아오지 못하게 함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연금(軟禁) 조치를 취한 것이다. 즉 이로써 다윗 왕은 아직도 압살롬의 죄를 완전히 용서할 수 없다는 태도 표명을 한 것이다. 이와 같이 다윗 왕이 예루살렘에 다시 귀환한 압살롬을 용서하지 않은 까닭은 아마 압살롬에게서 자기 죄를 회개하는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인지 모른다. 한편 혹자는 다윗 왕은 일단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상 그를 따뜻하게 맞이했어야 옳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렇게 할 경우 다윗은 백성들 앞에서 압살롬의 잘못을 묵인하는 결과가 되므로 앞으로 백성들을 통치 하는 데 어려움이 따랐을 것이다. 따라서 다윗의 이번 조치는 비록 최선책은 아닐지라도 마땅한 조치였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이처럼 다윗과 압살롬 간에 형성된 껄끄러운 관계는 결국 압살롬으로 하여금 부친에 대한 미움과 반역이라는 새로운 죄악을 저지르게 하였다(15장).
2사무 14,25-33 다윗이 압살롬과 화해하다
압살롬이 뛰어난 미남이라는 사실이 온 나라 안에 알려져 있었고, 그로 인해 압살롬이 백성들의 존경과 갈채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압살롬의 외모는 훗날 백성들로 하여금 그를 차기 왕위를 계승할 가장 이상적인 인물로 지목하게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온 이스라엘에서 압살롬만큼 잘생기고 그만큼 칭찬을 받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흠잡을 데가 없었다”(25). 갑작스럽게 문맥이 바뀌어 압살롬의 신상(身上)이 언급되고 있는 부분이다. 추측컨대 이는 후에 있을 압살롬의 반역(15장)과 관련, 그를 부각시키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그의 자랑거리인 머리털이 도리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음(18,9-15)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인 듯하다.
압살롬의 머리 숱이 많고 빨리 자랐다는 말이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 있어서 머리털은 힘과 미(美)의 상징이었으며, 그것이 빨리 자란다는 것은 힘의 왕성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한 숱이 많다고 하는 것은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헤아릴 수 없는 것'이라는 개념을 지니는 것으로서, 자신의 신비로움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따라서 압살롬의 머리숱이 많고 빨리 자랐다는 사실은 백성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압살롬은 후에 그의 자랑거리인 머리털로 말미암아 죽었으니, 세상 자랑거리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새삼 깨달을 수 있다(18,9).
26절에 압살롬의 머리카락을 잘라 달아보니 “왕궁 저울로 이백 세겔”이 된다고 한다. 여기서 왕궁 저울로 계산한 세겔이란 곧 '왕실 세겔'을 의미한다. 즉 이스라엘 사회에서 무게를 측정하던 기본 단위는 세겔인데 이에는 '보통 세겔'과 '왕실 세겔', '성소 세겔'이 있었다. 그 중 왕실 세겔은 보통 세겔의 1/5을 더한 중량이었다. 한편 보통 세겔의 경우 한 세겔은 11.4g이므로 이백 세겔은 약 2.3kg에 해당되는 무게이다. 보통 사람의 머리털이 1년 동안 자랄 수 있는 평균 무게인 약 500g과 비교해 볼 때 이는 엄청난 무게가 아닐 수 없다.
압살롬은 그수르에서 삼년 동안이나 망명 생활을 하고 왔는데도 또 다시 예루살렘에서 2년 동안이나 연금 상태에 있게 되자, 압살롬이 자기의 불행한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요압을 이용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요압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압살롬에 대한 다윗 왕의 좋지 못한 감정을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압은 처음과 달리 압살롬을 멀리하고 그에게 비협조적이다. 자신의 세력 확장에 압살롬이 더 이상 효용 가치가 되지 못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압살롬은 요압을 통해 다윗왕을 만나 화해하게 된다. 압살롬은 두 번이나 요압을 만나기 위해 노력했으니 면담이 성사되지 않다, 요압을 만나기 위한 계략을 세운다. “그러자 압살롬은 자기 종들에게, ‘보다시피 보리를 심어 놓은 요압의 밭이 내 밭에 잇닿아 있다. 가서 거기에 불을 놓아라.’ 하고 일렀다. 압살롬의 종들이 그 밭에 불을 놓았다”(30). 압살롬의 이와 같은 행위는 요압의 방관적인 태도에 대한 보복적 행위이자, 또한 요압을 억지로라도 자기에게 오게 하려는 계략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압살롬의 고의적 행위는 자칫 엄청난 화재(火災)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는 아주 위험스런 악행이었다. 아무튼 이러한 태도로 미루어 보아, 압살롬은 지금까지 자기의 죄에 대해서는 뉘우치는 마음이 전혀 없이 자신의 불편한 처지만을 불평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요압이 임금에게 나아가 사정을 아뢰니 임금이 압살롬을 불렀다. 압살롬은 임금에게 나아가 그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였다. 그러자 임금은 압살롬에게 입을 맞추었다”(33). 왕 앞에서 무릎을 꿇고 얼굴을 땅에 대는 행위는 신하가 왕 앞에 나아갈 때 반드시 취해야 하는 예절이다. 그러나 여기서 압살롬의 이러한 행위는 그가 다윗 왕을 진심으로 존경했다는 표시가 결코 아니었다. 반대로 그는 요압이나 가리욧 유다(마태 26,48)의 경우와 같은 가식적인 예절만을 갖추었을 뿐, 마음 속에는 오히려 다윗 왕에 대한 반발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15장).
다윗 왕이 압살롬과 입을 맞춘다. 여기서 입을 맞추는 행위는 화해의 표시로서, 특히 아버지가 범죄한 아들에게 입을 맞추는 것은 그를 완전히 용서한다는 표시이다. 이로 보아 우리는 이제 다윗 왕이 압살롬의 죄를 완전히 용서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다윗 왕의 이러한 조치는 지금껏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조금도 회개하지 않는 압살롬을 단지 자식에 대한 부정(父情) 때문에 용납한 어리석은 행위였다. 왜냐하면 다윗 왕은 이로 말미암아 압살롬이 차기 왕이 될 것이라는 인상을 백성에게 심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압살롬의 반역적 활동(15,1-12)을 사실상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결국 다윗 왕은 여기서 압살롬의 반란을 허용한 결정적인 실수를 범한 것이다.
2사무 15,1-12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키다
압살롬은 북쪽 이스라엘의 불만과 올바른 판경을 바라는 일부 유다인들의 불만을 이용하여 반란을 꾀한다. 그는 다윗이 임금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헤브론에서 반란의 신호를 보낸다.
“그 뒤, 압살롬은 자기가 탈 병거와 말들을 마련하고, 자기 앞에서 달리는 사람들을 쉰 명이나 거느렸다”(1). 압살롬이 병거와 말들과 오십 명의 호위병들을 갖춘 것은 반역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병기를 구비한 행위일 뿐 아니라, 아도니야의 경우처럼 차기 왕으로서의 위용을 백성들에게 나타내기 위함이었다(1열왕 1,5). 즉 이러한 병력의 배치는 흔히 이방의 왕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인데 그들은 자신들의 강한 권세와 화려한 영화를 나타내기 위해 곧잘 이러한 수행원들을 거느렸던 것이다. 따라서 압살롬의 이러한 행위는 이방 왕들의 사치한 풍습을 따른 것이었고, 차기 이스라엘의 왕으로 자처한 반역적 행위였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심을 자기에게 모으려는 계략이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스라엘 왕은 자기의 성문, 곧 궁궐 문에 합법적인 재판관(裁判官)을 세워 재판을 베풀는 풍속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 재판관은 먼저 예루살렘 주민들을 재판하고 다음에 타성읍의 소송 문제들을 재판하였는데, 그 재판 시간은 이른 아침이었다. 따라서 압살롬은 성문에서 열리는 왕의 재판을 전적으로 방해하기 위하여 아침 일찍 성문 길 곁에 섰던 것이다.
압살롬이 왕의 재판을 받으러 올라가는 사람들을 세워놓고 개인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장면이다. 백성들에 대한 압살롬의 이러한 친절은 자기를 왕으로 보이기 위해 거창하게 병력을 대치한 오만 불손한 행위와는 아주 대조적이다(1절). 그렇지만 이 역시 그가 진심으로 백성을 사랑했기 때문에 취한 행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백성들의 환심을 사려는 음흉한 행동이었음은 두말 할 나위없다(6절). “압살롬은 임금에게 재판을 청하러 가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런 식으로 대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6).
압살롬이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사로 잡은 지 4년이 지났다. 그는 다윗 임금에게 헤브론으로 가서 주님께 한 서원을 하도록 청원하였다. 압살롬이 하느님께 어떠한 서원(誓願)을 드렸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압살롬의 패역한 행동과 전후 문맥 관계로 보아, 이는 다윗을 속이고서 헤브론으로 가려 한 압살롬의 거짓말이었음이 거의 확실시 된다. 즉 그는 다윗으로부터 아무런 의혹도 사지 않고 예루살렘을 떠나 거사(擧事)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이제 하느님까지 팔아먹고 있다 것이다(9-12절). 헤브론은 예루살렘 남쪽 약 30여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으로, 야훼 신앙의 발상지이다(창세 13,18). 따라서 당시 예루살렘이나 기브온(1역대 16,39)과 같은 종교 중심지가 있긴 하였지만, 압살롬이 주님께 제사드리기 위해 헤브론으로 가겠다고 한 것은 그다지 이상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압살롬은 그곳이 자신의 고향이며(3,1, 3), 다윗이 그곳에서 기름 부음 받은 것(2,1-4)을 생각하고 자기도 헤브론에서 기름 부음을 받으려 작정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압살롬은 다윗이 수도를 헤브론에서 예루살렘(5,1-10)으로 옮긴 탓에 생긴 헤브론 주민들의 섭섭한 감정도 충분히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즉 다윗이 헤브론을 수도로 삼은 동안 그곳 주민들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종교적, 문화적으로 상당한 기득권(旣得權)을 향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도가 예루살렘으로 옮겨지고 난 후에는 자연히 그같은 이권을 상실하였을 터이니, 헤브론 주민들은 점차 다윗에 대하여 불만과 섭섭한 감정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압살롬은 자기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최적지(最適地)로서 헤브론을 지목하고서, 어떻게든 반역의 무리를 규합하려 했던 것이다(10-12).
“그러나 압살롬은 이스라엘 모든 지파에 밀사들을 보내면서 이렇게 전하게 하였다. ‘나팔 소리를 듣거든 ‘압살롬이 헤브론의 임금이 되었다.’고 하시오”(10). 여기서 나팔 소리는 압살롬이 다윗에게 반기(叛旗)를 든다는 신호이다. 압살롬이 예루살렘에서 헤브론으로 데리고 간 이백 명의 인사(人士)는 단순히 평범한 인물들이 아닌, 예루살렘 성의 고위 관리들이었을 것이다. 즉, 압살롬은 이들이 자기의 거사에 동조(同調)해 줄 경우 자기의 정치적 기반이 확고해질 것을 계산하고 이들을 하느님께 제사 드린다는 명목(7,8절)으로 데리고 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이백 명의 인사들은 압살롬의 반란 기도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압살롬에게 유인당한 셈이므로, 아마 압살롬은 이들이 반항할 경우 이들을 살해하려고까지 했을 것이다.
길로(Giloh)는 유다 남쪽 산지에 있는 한 성이다. 이곳은 헤브론에서 북서쪽으로 약4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한편 이곳 출신 아히토펠은 지략이 뛰어나 다윗의 책사로 중용(重用)되었던 자로서(31절), 이스라엘 가운데 그의 지략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압살롬은 자기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해 그를 영입하였는데, 과연 그의 기대대로 아히토펠은 기발한 모략을 제공하여 압살롬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16,20-23; 17,1-3). 그런데 한때 다윗 왕을 배반하고 압살롬의 모사로 활약했던 아히토펠이 이처럼 쉽게 다윗 왕을 배반하고 압살롬의 책사가 된 이유에 대하여 성경은 침묵하고 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사항을 놓고 추정해 볼 때, 그 까닭은 아마도 다윗 왕의 악행에 대한 그의 반발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경에서 보면 밧세바는 아히토펠의 손녀인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아히토펠이, 자기의 손녀를 추행하고 또한 손녀 사위인 우리야를 살해한 다윗 왕의 파렴치한 행위(11장)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다가 압살롬의 제의가 있자 이렇게 빨리 변심할 수 있었다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정치적 상황은 이제 급속도로 압살롬에게 크게 유리해진 반면, 다윗 왕에게는 크게 불리해졌다. 그 원인은 아마도 압살롬의 매력적인 외모(14,25, 26)와 그의 간교한 여론 조성(1-6절) 이외에도 백성들에게 비추어진 다음과 같은 다윗 왕의 부정적인 모습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밧 세바 간음 사건과 우리야의 죽음(11장), 암논의 범죄에 대한 그의 우유부단한 조치(13,21), 영토 확장 사업(8장)에 따라 상대적으로 약화된 다윗 왕의 대국민 관심(對國民關心)과 과다한 세금 징수 등으로 인해 상당수의 백성들은 이제 다윗 왕의 공정성과 윤리성, 그리고 통치력에 의혹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2사무 15,13-37 다윗이 오르단으로 달아나다
“전령 하나가 다윗에게 와서 말하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쏠렸습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신하에게 일렀다. ‘어서들 달아납시다. 잘못하다가는 우리가 압살롬에게서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오. 서둘러 떠나시오. 그러지 않으면 그가 서둘러 우리를 따라잡아 우리에게 재앙을 내리고, 칼날로 이 도성을 칠 것이오”(13-14).
백성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압살롬의 편에 붙었다.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 소식을 듣자마자 이처럼 즉각적으로 피신하려 한 것은 아마 나탄 예언자가 그에게 예언했던 재앙을 의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다윗은 자신으로 인해 하느님의 도성(都城) 예루살렘이 전화(戰火)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다윗이 이처럼 예루살렘을 떠나 피신 길에 오르면서도 궁을 지키도록 후궁 10명을 남겨둔 것(16절)은, 하느님께서 자신으로 하여금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다윗은 2년 동안이나 벼르다가 기어코 암논을 살해하고야 말았던 압살롬의 강한 복수심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13,23-29). 따라서 이번에도 2년 동안의 연금(軟禁) 상태(14,28)를 비롯하여 다윗과 여러 가지로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압살롬이 잔인한 복수극을 펼칠 것으로 충분히 예상 했을 것이다. 따라서 다윗은 피난길을 재촉하였는데, 이때 다윗 왕과 더불어 예루살렘을 탈출한 사람은 그의 호위병과 6백 명의 병사들 그리고 많은 대신(大臣)과 백성들이었다(17절).
임금은 피난을 가면서 갓 사람 이타이에게 자기 본국으로 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타이는 다윗의 피난에 동행한다. “그대가 온 것은 어제인데, 오늘 내가 그대에게 우리와 함께 가자고 할 수 있겠소? 더구나 나는 발길 닿는 대로 가야 할 처지요. 그러니 그대의 동족을 데리고 돌아가시오. 주님께서 그대에게 자애와 성실을 베풀어 주시기 바라오”(20). 다윗 왕이 진퇴 양난(進退兩難)의 곤경에 빠져 있으면서도 한 사람의 무고한 외국인을 깊이 생각하고 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즉, 이타이는 본토 사람이 아니라 외국인이기 때문에 공연히 타국의 정치적 내란으로 인해 목숨을 내걸 필요가 없다고 다윗 왕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다윗 왕의 언사를 통해 자신의 곤경 중에도한 사람의 난감한 처지를 이해하여 주는 그의 깊은 사려(思慮)와, 용사의 힘을 의지하려는 인간적인 도모 보다는 하느님을 의지하여 난국을 타개하려는 그의 대담한 신앙을 발견할 수 있다. 한편, 다윗은 압살롬을 가리켜 굳이 '왕'이라 부를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도 19절에서는 그를 왕으로 칭하고 있는데, 아마도 다윗이 압살롬을 진정 왕으로 인정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이타이의 입장을 고려하여 그렇게 칭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즉 압살롬이 반란에 성공할 경우, 외국인인 이타이는 현재 이스라엘에 망명한 정치적 망명자이므로 압살롬을 왕으로 섬겨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타이는 임금에게 대답하였다. ‘살아 계신 주님과 살아 계신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을 두고 맹세하는데, 죽을 곳이든 살 곳이든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께서 계시는 곳이면 어디나 이 종도 거기에 있겠습니다”(21). 이 말은 이타이가 다윗 왕에게 망명한 후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믿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 즉 이는 이제 이타이가 필리스티아에서 우상 종교를 버리고 주님의 종교로 개종(改宗)했음을 시사해 준다.
“마침 차독도 모든 레위인과 함께 하느님의 계약 궤를 모시고 나오다가 하느님의 궤를 내려놓자, 에브야타르도 올라와 사람들이 모두 도성에서 지나갈 때까지 거기 서 있었다”(24). 차독과 레위인들이 다윗과 동행하려 한 사실은, 그들 전체가 다윗 왕을 지지하고 나섰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그들은 단지 내란 중(10-12절)에 계약 궤를 안전히 보호해야겠다는 의도보다는, 하느님의 임재의 상장물인 계약 궤를 다윗 편에 둠으로써 장차의 전투에서 다윗 왕에게 유리하게 하고픈 심사(心思)에서 그리하였던 것이다. 한편 차독은 아론의 셋째 아들인 엘르아자르의 후손으로서, 다윗 치하에서 에브야타르 가문과 더불어 제사장작을 수행하던 자이다.
그런데 다윗 왕이 계약의 궤를 예루살렘 성내로 다시 반환시킨다. 그 이유는 복합적이다. 그 중 우선 표면적(表面的)인 이유로서, 예루살렘 성내의 정보를 입수하기 위함이었음을 들 수 있다. 즉 다윗은 효과적인 전투를 위해 연락원(連絡員)이 필요하였는데, 이에 적합한 인물로서 제사장들을 지목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압살롬에게 계약의 궤를 지키는 자로만 보여질 것이므로, 비교적 행동이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28절). 다음으로 다윗이 이처럼 행동한 내면적인 이유는, 그가 지금의 곤경을 하느님의 징계로 이해했기 때문이다(26절). 즉, 다윗은 자신이 현재 하느님의 징계를 받고 있는 한 계약의 궤를 모신다 해도 과거의 죄에 대한 징계(12,10-12)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다윗이 하느님의 회복의 은총을 의심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오히려 예루살렘 성을 떠날 때 하느님의 회복의 은총을 확신하였다. 다윗은 하느님의 영광이 손상되는 것을 염려하였기에 계약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되돌려 보낸 것이다.
“다윗이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산꼭대기에 다다랐을 때, 에렉 사람 후사이가 옷은 찢어지고 머리에는 흙이 묻은 채 다윗에게 마주 왔다”(32).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산꼭대기는 올리브 산 꼭대기를 가리킨다(30절). 한편 여기서 '예배'란 말은 제사보다 기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한편 이곳은 지리적으로 인적이 드문 곳으로서 하느님과의 영적 교제를 나누기에 적절한 곳이었다. .
후사이가 자신의 옷을 찢으며 흙을 머리에 무릅쓴 채 다윗을 맞이하였다는 것은, 곧 통일 이스라엘의 왕인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피난 길에 나서게 된데 대한 자신의 충격과 슬픔을 토로(吐露)한 것이었다. 아무튼 다윗이 이처럼 피난길에서나마 후사이를 만나게 된 것은 그의 간절한 기도(31절)의 응답(應答)이었다. 즉, 다윗 왕은 여기서 후사이를 만남으로써 아히토펠의 모략을 파할 수 있는 결정적인 전기(轉機)를 마련할 수 있게 된 것이다(17,1-23). 한편, 후사이는 다른 곳에서 다윗의 친구로 기록되어 있는데(37절), '친구'에 해당하는 '레에'는 백성들의 여론을 수렴하여 왕에게 직고하는 대신(8,18)을 의미하는 말이다. 따라서 후사이는 다윗 왕의 단순한 친구 이상으로 왕의 정책 결정에 상당 부분 관여한 모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에렉 사람이란 에브라엠 지경의 에렉 성 출신자를 의미한다.
다윗 왕이 후사이에게 예루살렘이 머물러 있으라고 말한 것은 아마 후사이가 나이가 매우 많아 자신의 일행을 따라오기 힘들 것으로 염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 말 가운에는 아히토펠에 버금가는 모사인 후사이가 예루살렘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서 압살롬측의 정보를 탐지하고, 저들의 계략을 파하는 것이 휠씬더 유익하다는 의미 또한 담겨있을 것이다(34절).
차독 사제와 에브야타르 사제와 함께 후사이도 다윗 왕의 명령에 그대로 순종하는 모습이다. 사실상 이러한 순종은 압살롬에 의해 그 음모가 발각될 경우 살해를 당하게 될 지도 모르는 모험적인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사이가 이를 감행한 것은 그만큼 그가 다윗 왕을 존경했음을 의미한다. 아무튼 이와 같이 국내의 종교 지도자(대제사장들)과 정치 지도자(후사이)가 충성스럽게 다윗 왕을 지지했다고 하는 사실은 하느님께서 구체적으로 다윗과 함께 하심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다윗의 벗 후사이는 도성으로 들어갔다. 그때 압살롬도 예루살렘으로 들어오고 있었다”(37). 다윗이 예루살렘 성을 버리고 급히 피신 길에 오른 소식(13-18절)을 들은 압살롬이, 이제 반란지(反亂地)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승리의 입성(入成)을 하게 된 것을 가리킨다.
2사무 16,1-4 다윗과 치바
다윗이 사울 집안이나 그 지지자들과 겪는 갈등은 계승사에서 연이어 나온다. 치바는 자기 상전 요나탄의 아들 므피보셋에게 관용을 베푼 다윗에게 충성을 표시하고자 한다. 그는 다윗에게 와서 사울 자손의 야망을 알려(16,3), 다윗은 그의 충성을 친절하게 보상해 준다.
치바가 현재 압살롬의 반란(15,10-12)을 피해 피난 길에 나선 다윗 왕에게 이처럼 음식물을 공수 한 것은 아마 압살롬의 반란이 결국 실패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훗날 다윗 왕의 호의를 얻기 위하여 이같이 많은 음식물을 날라 온 것으로 추정된다.
“임금이 또 ‘네 주군의 아들은 어디에 있느냐?’ 하고 묻자, 치바가 임금에게 대답하였다. ‘지금 그분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습니다. ‘오늘에야 이스라엘 집안이 내 아버지의 나라를 나에게 돌려줄 것이다.’ 하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3). 이와 같은 치바의 말은 철저한 거짓말이다(19,26-27). 왜냐하면 므피보셋은 지금까지 왕위 찬탈을 위한 어떠한 준비도 하지 않은데다, 그는 절뚝발이로서 이미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없는 결격 사유(缺格事由)를 지닌 자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바가 마치 므피보셋에게 왕위 찬탈에 대한 야욕이 있는 것처럼 꾸며댄 것은 물욕(物慾) 때문이었음이 분명하다. 즉 치바는 피난 중에 경황이 없는 다윗을 흥분시켜 므피보셋의 모든 소유를 자신이 차지 하려는 사악한 목적 하에서 이같은 모함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4절).
치바의 악한 의도를 간파하지 못한 다윗 왕은 경솔한 결정을 한다. 왕은 므피보셋에게 속했던 모든 재산을 치바에게 준다. 그런데 평소 지혜로운 다윗 왕이 이처럼 경솔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던 까닭은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다윗은 현재 압살롬에게 쫓기는 입장(15,14)이므로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치바가 공수한 음식(1,2절)이 다윗을 감동시켜 공정성을 잃게 하였기 때문이다. 아무튼 다윗이 미처 사실 여부도 확인해 보지 않은 채 이처럼 실언(失言)을 한 것은 크나큰 실수가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여기서도 우리는 다시금 "듣기는 빨리 하되, 말하기는 더디 하고 분노하기도 더디 해야 합니다"(야고 1,19)는 성경 말씀을 기억하게 되는데, 실상 아무리 조심하여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 곧 언행(言行)의 신중성이다.
2사무 16,5-14 다윗과 시므이
시므이는 사울의 지지자로서 다윗이 사울 가족에게 보인 잔악함 때문에 그를 용서하지 않는다(8). 다우시은 체념한 채 시므이의 욕설을 듣는다(10-12). 다윗은 나중에 승리자로서 이런 비열한 적을 용서하지만, 자기 왕조의 안전을 지키려고 그의 처형을 유언으로 지시하기를 잊지 않는다(1열왕 2,8-9).
“다윗 임금이 바후림에 이르렀을 때였다. 사울 집안의 친척 가운데 한 사람이 그곳에서 나왔는데, 그의 이름은 게라의 아들 시므이였다. 그는 나오면서 저주를 퍼부었다”(5). 바후림(Bahurim)은 예루살렘에서 올리브 산을 넘어 요르단 강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는데, 예루살렘에서 동북쪽으로 약 6km지점이다. 이곳은 베냐민 지파의 성읍으로서, 과거 다윗이 옛 아내인 미칼을 당시의 남편 팔티엘로부터 취하여 왔을 때 팔티엘이 올며 따라오다가 되돌아간 역사적인 성읍이기도 하다(3,16).
사울의 친족 중 한사람으로 여겨지는 시므이(Shimei)는 자기 지파와 가문에 대하여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그리하여 그는 유다 지파인 다윗이 사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됨을 시기하고, 이제 다윗이 쫓기는 신세가 되자 이를 반기면서 다윗을 저주하였던 것이다. 물론 시므이는 훗날 압살롬의 반란이 수습되자 다윗 왕을 찾아와 이와 같은 과거의 망령된 행실을 시인하고 다윗의 용서를 받긴 하였다(19,16-23). 하지만 그는 결국 솔로몬 왕 때에 왕명을 어겨 참수를 당하고 말았다(1열왕 2,36-46).
시므이는 다윗과 다윗 왕의 모든 신하들을 향하여 돌을 던졌다. 여기서 돌을 던진 행위는 상대방에 대하여 참을 수 없는 극도의 분노를 표시한 행위이다. 그런데 시므이가 이처럼 다윗과 그 신하들을 저주하며 돌을 던진 까닭은 다윗이 사울가의 피를 흘렸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8절). 물론 여기서 '사울가의 피'란 사울 왕의 비참한 죽음이 아닌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과 사울의 군장 아브네르의 죽음을 의미 한다. 왜냐하면 사울 왕의 죽음은 필리스티아와의 전투인 길보아 전투에서 생긴 죽음으로(1사무 31장) 다윗 왕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았으나, 이스보셋과 아브네르의 죽음은 어느 정도 다윗 왕과 연관이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3,27;4,6). 즉, 시므이는 여기서 다윗 왕이 과거 이스보셋과 아브네르을 죽인 장본인이며 따라서 베냐민 지파의 쇠퇴와 사울가의 몰락의 책임이 바로 다윗에게 있다고 믿으면서 돌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므이의 비방은 전혀 근거가 없다. 왜냐하면 다윗은 사울가의 어느 누구도 살해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윗은 사울의 손자 므피보셋을 마치 자기 아들처럼 예우하며 아껴주었을 뿐이다. 따라서 시므이의 이같은 행위는 그릇된 자기 선입견(先入見)의 결과였음을 알 수 있는 바, 우리는 여기서 선입견의 무서운 실상을 보게 된다.
“그러면서 다윗이 아비사이와 모든 신하에게 일렀다. ‘내 배 속에서 나온 자식도 내 목숨을 노리는데, 하물며 이 벤야민 사람이야 오죽하겠소? 주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저주하게 내버려 두시오”(11). 아비사이는 요압의 동생으로(2,18), 다윗 왕의 조카이자 그의 충성스런 신하이다. 11절에는 시므이의 저주 역시 하느님의 징계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다윗의 역설(力說)이다. 즉 자신의 아들 압살롬도 자신에게 반기(反旗)를 들었는데(15,10-12), 하물며 다른 지파 출신인 시므이가 자신에게 저주 한 마디 한 것쯤이야 하느님의 징계치고는 대수로운 것이 아니지 않겠느냐는 반문이다.
2사무 16,15-23 후사이가 압살롬에게 접근하다
“압살롬과 이스라엘 온 백성이 예루살렘에 들어왔는데, 아히토펠도 압살롬과 함께 있었다”(15). 여기서 '이스라엘 온 백성들'이란 압살롬을 지지하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 백성들을 의미한다. 한편 압살롬 반역 사건과 관련, 저자는 압살롬을 지지하는 자들을 '이스라엘 온 백성들'로, 다윗을 지지하는 자들을 '모든 백성'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본 저자가 이와 같이 표현한 까닭은 이스라엘의 모든 성읍이 압살롬을 왕으로 받아들여 압살롬의 세력은 이스라엘 건국에 걸쳐 확장된 반면, 다윗의 경우에는 각 지파들로부터 소수의 지지자들만이 그를 따랐음을 강조하기 위함인 듯하다.
다윗과 그 일행이 황급히 예루살렘에서 탈출하자(15,14) 압살롬이 반역의 군사들을 이끌고 헤브론(15,9-13)에서 예루살렘으로 무혈 입성(無血入城)한 것을 가리킨다. 이는 압살롬과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한 아히토펠로 말미암아 모종의 일이 일어나게 될 것임을 암시 하고 있는 전조(前兆) 구절이다. 즉 이는 아히토펠의 사주로 압살롬이 다윗의 후궁들을 겁탈하는 사건(20-23절)이 일어나게 되었음을 시사하는 도입 구절이다.
에렉 사람 후사이는 아히토펠에 버금가는 다윗의 책사이다. 다윗의 명을 좇아 압살롬에게 거짓 투항한 그는(15,32-37) 아히토펠의 모략을 꾀하는 데 성공하므로써(17,1-23), 압살롬의 반역을 종식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18장).
다윗이 예루살렘 성을 빠져나갈 때 궁을 관리하고 지키게 할 목적으로 남겨 두었던 열명의 후궁들을 있다. 아히토펠의 후궁들 접근 모략은 다윗의 폐위(廢位)를 명확히 함과 동시에 압살롬의 왕권을 완전히 굳히기 위한 작전이었다. 즉, 왕위 찬탈자들이 자신의 왕권을 가시적(可視的)으로 나타내 보이기 위하여 전왕(前王)의 후궁들을 취해 동침하는 것은 고대 근동의 보편적 관례였다. 따라서 아히토펠은 이러한 당시 근동 지방의 관례에 따라 압살롬으로 하여금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케 함으로써 그의 왕권을 가시화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압살롬을 위하여 옥상에 천막을 쳐 주자, 압살롬은 온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자기 아버지의 후궁들에게 들었다”(22). 나탄 예언자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는 순간이다(12,11). 즉 하느님께서는 다윗이 밧 세바를 범한 죄에 대한 징계로서 장차 그의 처들이 백주(白晝)에 겁탈당할 것이라고 선고 하셨는데, 이제 아히토펠의 불의한 모략에 의하여 그 같은 심판이 그대로 성취되고 만 것이다.
“그 시절에 아히토펠이 내놓는 의견은 마치 하느님께 여쭈어 보고 얻은 말씀처럼 여겨졌다. 아히토펠의 모든 의견이 다윗에게도 압살롬에게도 그러하였다”(21). 여기서 '하느님께 여쭈어 보고 얻은 말씀'이란 대제사장이 우림과 툼밈을 통하여 알아낸 하느님의 뜻을 의미한다. 따라서 아히토펠의 모략이 하느님께 물어 받은 말씀과 일반이라는 말은, 그의 모략이 대제사장의 우림과 둠밈을 통해 받음 하느님의 계시의 말씀처럼 다윗과 압살롬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그 같은 아히토펠의 모략은 비록 다윗에게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런지 모르나, 압살롬에게는 악정(惡政)을 일삼도록 만든 촉진제 구실을 하였을 뿐이다. 왜냐하면 아히토펠이 현명한 머리는 지니고 있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선한 양심은 지니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