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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야,모야 그리고 윳이야!
오늘은 음력 이월 초하루 날이다.
정월 대보름에는 오곡 잡곡밥을 하여 달을 보고 소원을 빌지만 음력
이월이 시작 되는 초하루 날에는 보리쌀과 붉은 팥이 섞인 잡곡밥과 각종 나물을 하여 이월 영둥 밥을 한다.
정월 보름에는 오곡밥을 하여 소원을 빌지만 오늘은 각종 나물을 하여 지금부터 일을 시작 하니
영등 할매 잘 봐 달라고 빌고 빌며 귀 밝기 술을 한잔 하여 바소쿠리을 메워 소가 밟은 걸음을 이논, 저논에 세 짐씩 져다 놓고 보면 아침 해가 동쪽 하늘에 붉그러미 솟아난다.
소마답 걸음을 지고 가다 보면 부지런한 사람은 몇 시에 일어 났는지도 몰라도 벌써 겨우네 모은 걸음을 몽당 논으로 옮긴 사람도 있고 게으른
사람은 할머니가 하도 잔소리를 하니 하다못해 일어나 겨우 한 짐을 지고들로 나오는 사람도 있다.
비료를 잘 뿌리고 농약을 조절을 잘해야만 풍년이 되는데 이까지것
바람만 불면 날아가는 짚에다 소 오줌을 뿌린 이것이 무엇에 효렴이 있단 말인가.
“순전 미신인데 사람 잠 좀 자도록 놓아두지” 하며 겨우 논 마다 한 짐만 져다 나른다.
옛날부터 오늘이 지나면 본격적인 일철이 시작되기 때문에 일꾼들은
봄옷을 한 벌 주인으로부터 받는다.
또 막걸리 아니 밀주를 한 단지 별도로 받아 동네 청년들에게 신고식을 하고 처지가 같은 사람들과 이틀 삼일 술독에 빠진다.
이술이 깨면 어제 새로 받은 옷을 갈아입고 그 옷이 닦아 떨어지도록 올 여름은 일만 하여야 되는 것이며 이술을 먹고 잔꾀를 부리지 말라고
주인은 사전에 머슴의 스트레스를 풀어 죽도록 일을 하라고 주는 것인데 머슴은 그것도 모르고 주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로 밀주를 한 모금씩 마실 때 마다 고맙게 생각 한다.
어떤 일꾼은 이 술을 머고 취한 상태에서 못싸는 집안 식구들에게 보네 준다고 선금으로 나락을 받아 방앗간에 주인 몰래 처분을 하여 그 날로
흔적도 없이 도망을 하여 다시는 주인집 마을에 나타나지 않는 사실이
자주 있어 근래에는 선불을 주는 선례가 없어 졌다.
농사를 짓다가는 중간에 그만 둘 수 없기에 일이 시작 될 초봄에 그만 둠으로써 주인이 알아서 농사을 지으라는 경고이며 아니면 이리 저리 연락을 하여 한가마 또는 두가마을 추가로 준다는 조건을 하여 새로 1년을
계약 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다수는 죽도록 일을 하기가 싫어 공장에 취직 하였든 것이며 1년 후에는 도시 사람이 되어 양복을 입고 나타나기도
한다.
요즘 같은 노사 분규의 임금 협상은 벌써 60 - 70년대 초에 민주적으로 농촌에서는 있었던 사실들을 그 일꾼들이 80년 이후 도시로 몰려가 권익을 주장하며 시골에서의 경험을 울부짖다 말단 노동 운동의 앞장서는 투사가 된 것 같기도 하며 그때 그 일꾼이 어느 직장의 노동 운동 간부가 되어
다른 길로 성공한 사실도 들렸다.
그래서 자고 나면 누가 일을 하기 싫어 부산으로 갔고 누구는 아버지가 도로 시내로 가라고 하여 차비를 마련하여 대구로 갔다는 말이 들렸다.
사실 어린 나이에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들에서 일을 하다가 잠깐 쉬는 시간이면 여러 갈등이 생기며 이길을 벗어 날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며
지개을 지지않고 살아가는 방법이 없는냐고 고민을 하는 것은 당시에 시골에 사는 청년들의 공통된 생각이나 늙으신 부모님을 생각하고 자기가 희생하여 동생들 공부나 시켜야 되겠다는 의식을 가진 사람은 맞이에 해당 되는 한두 사람들이다.
그래서 시골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이월에 모여 1년을 걱정하며 실컨 놀기로 약속을 하며 예날부터 전해 오는 신 풍습이 되어 버렸다.
“순영아!”
“이번 이월에는 편을 갈러 윳을 놀자” 하고 용락이가 제의을 하니
순영이는
“용락아 윳가치을 잘 다듬어 놓아라” 한다.
“순영이 너희 엄마에게 윳가치을 좀 빌려라”하고 하자
순영이는
“우리 윳가치는 하도 오래 되어 모가 잘 나오니 재미가 없다”고 하여 용락이는 자전거을 타고 30리의 비포장 도로을 달려 오룡 뒤산에 올라 갔어 굵은 사리 나무 윳가치을 만들었는데 하루 종일 시간이 걸렸다고 하였다.
요즘은 차당실 뒷산이나 앞산에는 윳가치을 만들 수 있는 사리 나무가 많이 있지만 당시에는 아주 눂은 산에 올라 가야만 윳가치을 만들 수 있는 사리 나무가 있었는데
곧은 사리나무가 아주 귀하여 집빕마다 소중하게 윳가치을 간직
하였으며 산중에서 시집오는 사람은 이불속에 윳가차을 숨겨 오기도
하였다.
이 사리 나무로 정확하게 20센티 길이로 잘라 중간을 갈라 양쪽에 살짝 다듬어야 되며 사리 나무라 해도 아무 것이나 되는 것이 아니며 한마디
길이가 윳가치 길이 이상으로 자란 살살이 나무어야 한다.
잘못하여 마디가 있는 사리는 중간을 갈라 놓으면 마르면서 비틀어져 모양이 엿가락 같이 빙빙 돌아가고 모양이 이상하여 지며 한해에 자라야 마디가 없고 굵기가
정당한 사리 나무을 잘라 만든 채윳으로 윳을 놀면
모가 나올 것 같으면서 윳이 나오고 동동 굴러 개나 또가 나오기 때문에 재미가 있다.
순영이 엄마가 가지고 있는 윳가치는 몇 십년이 되었는지는 알수 없지만 손떼가 묻어 반짝 반짝 거리며 굵기가 정당 하였는데 아무에게나 잘 빌러 주지 않으며
부녀회원들이 모여 단체 윳을 놀때나 마을에서 여자들이 모여 놀때 빌려 주는 것인데 우리들이 놀면 잃어 버릴까 싶어 주지을 않는 것이다.
채윳을 마당에서 놀때는 멍석을 펴나 방에서 놀때는 여자들이 시집
올때 정성으로 하여온 돗자리 위에서 놀아야 흥이 나는데 이 돗자리가
아무 집에나 이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윳가치 보다 더 귀하다.
그래서 엄마들에게 통사정을 하여 돗자리을 빌려 물로 안개가 내리듯 입으로 품어 바짝 마른 돗자리가 습기가 가득 묵어야 밟아도 부러지지
않도록 하여야 되며 돗자리을 밝고 윳을 놀면 무효 처리을 하는 규정을
만들어 돗자라을 신성케 한다.
돗지리는 여자들이 시집 왔어 어른들에게 절를 할때 사용 하는 것이며 또는 조상님에게 재사을 드릴때 제주가 사용 하는 귀한 것인데 윳을 놀때 사용 하는 것은 일종의 불경이기 때문에 잘 빌려 주지 않는 것이다.
잘사는 부자 집에는 며느리의 새 돗자리는 재사용으로 사용 하고
할머니 돗자리는 윳을 놀때 사용하며 돗자리 양쪽 자리는 밝지 말어라
해도 한두번씩 밟은 것이 달고 달아 발자국 자라가 표시 나기도 했다.
그런 돗자리는 윳을 놀때마다 동원 되어 윳바닥 자리로 사용 되기도
했으나 그것도 빌려 오는데는 애로가 많았다.
사리나무 윳가치가 없으면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 윳을 놀기도
하였는데 메끄러운 손맛이나 감각이 사리나무 윳에는 미치지 못해 재미가 덜 났다.
그래서 그 윳가치 담당은 언제나 용락이의 몫이고용락이는 그런 손재주가 참 있었다.
그리하여 마을의 친구들이 모두 모이는 날을 받아 윳놀이을 하였든
것이며 그 윳놀이을 위해 고경까지 걸어 갔어 상품을 준비 하여야만
하였다.
올해가 마지막 윳놀이가 될수도 있었다.
지난 가을부터 정희는 아버자가 선을 보아 시집을 가라고 하니 우리
친구들이 전부 모여 놀수 있는 자리는 더 이상 있을수 없다는 막연한 불안이 순영이는 느끼고 있는 것이다.
정희가 선을 보기 시작하면 둑이 무너진 강물이 밀려오는 것은 시간
문제이며 그 강물은 곧 순영이 자신에게 제일 먼저 닥아 오기 마련이다.
아직 동준씨와 만남이 겨우 시작 되고 있는데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라면 그것은 참기 어려운 고통이 시작 된다.
다른 이웃 마을 에서는 한 마을에서 연애 결혼을 하는 소리가 들리고 다른 마을 총각들 에게 시집을 간다는 말은 있었지만 우리마을에서는 친구 끼리 사귀고 연애을 하는 사실이 아직 없으며 그런 사실은 우리들 위의
형님과 언니 누나들도 같은 생각을 가져 좋은 본보기가 되었으나 결국은 자기 마음을 표시 조차 하지 못하는 먼 훗날의 어리석음의 짝사랑이 되어 버렸다.
남자 친구들이야 결혼을 할 시기는 멀었지만 군 복무을 마치면 고향에 살기는 어려워 지며 살곳을 찿아 객지로 떠나야 하고 진욱이도 올 겨울에 입대을 하라는 사전 통보을 받은 상태 이다.
“순영아!”
“우리집 보리밭 좀 메어 줄래?”
“차당동 처녀,총각들 모두 모아 보리밭 좀 메어 다오.”
우리 할매 혼자서는 진척이 없는데 이월에 좀 놀라고 하면 하루
우리 밭을 메어 주렴.
그대신 품싹은 없고
고경이든 영천이든 하루 종일 먹는 것 싸 줄게.
라고 하여 순영이 에게 사정과 애원을 하여 순영이는 우리 또래을 모두 모아 일렬로 밭을 메면 작은 논은 금방 끝이나고 진욱이는 고경에 갔어
찐빵을 싸 왔어
새참을 하고 콜라로 막걸리을 삼았는데
영화구경을 시켜 주겠다는 약속은 거품이 되었으며
그런 약속은 받으려는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는데 진욱이가 미안 하니까 혼자서 약속을 하였는데 태숙이와 차당실 친구들은 처음부터 믿지을
않았는데 모이기만 하면
"진욱아"
"영천 영화구경을 가자 약속 되로 하라고" 농담을 걸면
비오는 달밤에 쉴때 영천에 가면 돈 안드는 극장 구경은 시켜 줄것이니
약속은 지키 겠다고 큰소리로 응수을 하였다.
마을 어른들은 진욱이가 처녀 총각들을 동원하여 밭을 메는 것을 보고 대단 하다고 말을 하였으며 당시는 보리밭을 두 번씩을 메야 보리 수확이 가능 했다.
지금의 시대에는 남아있는 방이 많이 있고 넓은 방이 여기 저집 있지만 당시만 하여도 모두가 7자 방이 하나이고 보니 처녀 총각 열사람 이상이 모여 놀수 있는 방은 한계 였으며 방이 두 개 붙어 있는 집은 마을에서
한두집 뿐인데 그런집은 어른들이 계시기 때문에 비켜 달라는 소리는
할 수가 없어 군불를 때지 않는 잠실방을 얻어 하루전부터 나무을 가지고
왔어 불을 피워 놀기도 하였으며
나중에는 용락이의 아버지가 길이 장가 가면 줄려고 사둔 집에서 놀수가 있었는데 우리들 에게는 정말 요긴 하게 모임방으로 이용 되었다.
저녁만 먹으면 자동적으로 모이고 국수 내기도 하고 닭을 잡아 옴밥이라는 죽을 끊여 먹기도 하고 때로는 화투을 처서 국수 내기도 하였는데
이 치다꺼리는 모두가 순영이가 하였고 잠순가 거들었으며 또한 정희도
많이 하였다.
뺑순이는 시키면 집안의 막내 표시을 많이 내고 공주병이 있어 몸을
싸려는데 살살 웃으면서 이리 피하고 저리 변명을 하여 좀 처럼 국수 당번을 하지 않으면 영순이가
“뺑순 언니는 먼데 손에 물도 않넣니” 하면
“나는 우리집에서도 공주 대접을 받기에 잠깐 쉬고
다음에 내가 다 할게“ 하며 아양을 떤다.
그러면 석순이가 뺑순이 대신 내가 할게 일어선다.
오늘 윳을 놀고 나면 이제 본격적으로 일을 하는 게절이 돌아 오는 것이다.
어제 까지 날씨가 좋더니 검은 구름이 밀려 오드니 작은 빗방울이 떨어진다.
오늘 하루는 푹 쉴수가 있어 좋지만
보리밭을 다 메지 못한 집은 독세가 보리보다 먼저 자라기 때문에 예사 걱정이 아니며
독세가 자라 버리면 보리는 녹아 버리고 보리을 벨때 질질 감기어 능률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진욱이네 밭은 어제 친구들 덕분에 모두 메어으니
들어오는 석순이가 “욱아 품 값 줄래”
“너 때문에 우리 밭은 다 못메어 어쩌노?”하며 한바탕 큰소리로 웃는다.
친구들이 모이니 편을 갈르기 시작 한다.
오늘은 우리들 보다 한 살 위인 삼밭골 혜숙이 누나도 오고 태희도 모이고 보니 열두 사람이 모였다.
아에 집에서 올때부터 쌀을 한식기씩 가지고 오니 쌀이 반말이 넘어 두되만 밥을 하고 나머지는 고경에 갔어 시루떡을 만들기로 하렸다.
첫판부터 태숙이와 환길이가 윳을 놀기로 하였는데
두동을 먼저 출발한 용락이가 막판에 태숙이의 모가 계속나와 역전
폐을 하였는데 용락이는 윳을 잘못 만들었다 하며 투덜 거리며 남겨 놓은 싸리나무로 새로 만들어 오나
모두가 사용하든 윳가치을 계속 사용 하기로 주장 하니 길이는 양보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순영이가 윳을 노는 방식은 윳가치을 잡고 궁둥이을 삭 당기고 팔을 내어
윳을 돗자리에 힘껏 밀어 버리니 윳가치가 데굴 데굴 굴으드니 윳이
되고 다시 그런 방법으로 하니 모가 나오고 또 힘 있게 던져 버리니 개가 되어
윳말을 잡아 다시 던지니 모가 된다.
그라면 상대방에서는 앉았어 윳가치을 던져라 하고 경고도 하며, 보다 못한 영순이는 순영이 너무 한다 하며 시비을 건다.
그러다가 용락이가 던진 윳이 모가 나오면 용락이는
모가 나오는구나 하며,
궁둥이을 순영이 턱 밑에 앉아 버리면 성질이 급한 순영이는 용락이의 궁둥이을 발로 밀어 버리니 모두가 한 바탕 웃는다.
편윳을 노는 많큼 단합이 되는 놀이는 없다.
말을 써로 주장에 맞게 쓰려고 싸움도 하고 자기 주장되로 하려다가
같은 편 끼리 싸움도 하고 일단 정해 지면 그 말을 잡기 위해 한편끼리
모야, 사리야 하며 손뼉을 치고 함성을 지르다 보면 생각지도 않는 걸이 나와 다른 말을 잡아 덕을 볼때는 말잡고 덕보자 하며 목청을 눂인다.
이때는 오빠도 적이 되며 언니도 갈라지고 친분도 없이 상대편을
욕하고 나무라며 남북이 갈라지듯 뚜렷하게 니편 내편이 구분이 되어
눈싸움과 기 싸움으로 시작 하여 한치의 양보도 없이 윳놀이에 흠뻑 빠진다.
오늘 이기면 일년 내내 이겼다는 뿌듯함에 지낼수 있고 모든 것이 잘 되리라는 막연한 기대감에 혼신의 힘을 솟는다.
그러다가 생각지도 않는 또가 나오고 뒷또을 하여 막말에 두동살이 말을 잡으면 아리랑부터, 쾨지나칭칭나네, 동백아가씨까지 동원이 되어 팔을 흔들고 다리을 절룩 거리며 한바탕 춤을 추고 노래도 하며 같은 선수끼리 업어 주고 않아주며 애정을 표시 한다
죽었든 말이 살아나고 넉동살이가 두말을 남기고 연속 세 번이나 나오는 윳과 모에 잡히면 넉동살이 말을 포갠 환길이의 머리는 남지 않고 넉동말이 죽는 순간 도망을 가 버린다.
보다 못한 다음 사람은 내말은 내가 한다 하며 윳을 놀지만 그리 될 수가 없다.
윳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옆에서 응원이 절대 적이고 같은 목소리로
모야, 걸이야 하면 한가치의 윳이 또르르 굴러 모가 되며 눂이 던진
두가치가 내리면서 먼저 내린 윳가치을 건드려 모가 될 때는 기적이라
하였고
손가락으로 또다 하고 양밥을 하면 또가 되어 말을 잡지도 못하다가
마지막 순간에는 앞질러 넘어 서니 상대방이 다시 또야 하고 목청을 눂이고 소리을 치면 그렇게도 안나오든 또가 하늘에서 떨어지듯 또가 나아 도로 말을 잡아 먹어 버린다.
첫 또는 살림 밑천이라 하여 귀하게 여기고 모가 잘 나오는 윳가치는 될수 있는데로 모의 간격을 두지 않으려는 것이 윳말을 쓰는 사람의 기본이나 배짱이 큰 사람은 꿉어 두동이나 세동샇이을 만들어 첫모에서 질러 가기을 원하나 어떤 사람은 거북이 작전을 허여 한바퀴 돌고 돌아 이기기도 한다.
이겼든 윳이 막판에 지고 나면 섭섭하고 분하여 개인적으로 돈을 걸어 노리도 감아 지고 말았든 윳판의 원한을 갑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무엇
무엇을 싸기로 하여 윳을 놀때는 최선을 다하며 떼에 따라 싸움도 한다.
오늘은 양편이 한판을 이기고 한판을 지고 하여 마지막 세판 까지 가게 되었는데 삼밭골 혜숙이 누나와 태희의 마지막 판 놀인데 그만 사고가 발생 하였다.
윳말을 덜 썻는데 성질이 급한 혜숙이 누나가 던진 윳이 모가 나오고 보니 태희는 아니다고 주장을 하고 지고 있는 같은 편에서 동조을 하니
윳이 중지 되고 있어다.
그러다가 연규 아제가 술이 취해 이 “뭐하는 것이고” 하며 성질을 부리고
윳은 그만 놀자 하며 술소리을 하니 석순이가 중간에서 “이판은 무효로 하고” 새로 시작 하기로 하여 다시 마지막 판이 시작 되었다.
벌써 점심 시간이 지나 2시가 되어도 배는 하나도 곱프지 않으며
순영이와 잠숙 정희가 하여온 점심을 먹는데 여기에도 니편 내편이
구분되어 돌아서서 밥을 먹기 시작 한다.
오후에 해선 떡바아간에서 찿아온 시루떡은 니하나 내하나 하며 누구도 더 가져 갈수 없게 순영이가 갈라 주면 저녁을 드려야 되는 아버지 밥상에 모두 드리고 보면 우리는 겨우 한 개를 먹을수 있었는데 안 먹어도
배가 부르며 아버지 먹는 모습에 만족을 하고 동생들에게 하나씩 주니
돌아서서 아무 말 없이 모두 먹어 치운다.
아버지 저녁을 차려 주고는 바로 모여 마지막 윳판이 벌어 졌다 아까 태희와 혜숙이가 놀다가 판이 꺼어진 것을 다시 시작을 하여 무사히
윳을 놀고 보면 영규 아제와 용락이는 술에 취하여
“야! 이기사나야”
뭐 하노 하며 시비을 걸면
“종내기 미처구나” 하며 석순이는 고개을 젖는다.
요줌은 몇일간 계속하여 석순이가 길이 집으로 놀러 오니
석순이 아버지가 순영이을 불러
“순영아”
“예”
“석순이하고 용락이 하고 좋아하니” 묻드라는 것이며
석순이는 아버지 모르게 영천에 데이트을 가려니 용락이 집에서 옷을 갈아 입고 아버지 모르게 영천에 가는데 석순이 아버지는 의심을 하게 되었으며 용락이 집이 넉넉 하니 석순이 아버지 마음에는 용락이 하고 혼사을 하였으면
하는 바램도 없지 않았는데 당사자들은 다른 마음 이었고 그런 말이 있은 후 부터는 용락이가 석순이을 좋아 하였지만 우리는 한 마을에서 사랑을 할수 없었든 분위기 였다.
삼바꼴 혜숙이 누나는 이 윳이 마지막 윳놀이 이며 열흘 후면 결혼을 하게 되어 아쉽기만 하다.
신랑을 맞아 시집을 간다 하지만 동생들과 더 이상 놀수 없다는 생각을 하니 눈물이 나고 정든 동생들을 두고 멀리 시집을 간다는 것이 영영 헤어지는 것만 같은 설음이 북 바처 엉엉 울어 버리니 태희도
“아지메 그만 울어라” 하며
따라서 울니 전부가 눈시울에 눈물이 맺힌다.
외딴 삼밭골에서 처녀 시절을 사과 밭 밑에서 밭을메는 것이 전부 였고
그러다가 사과 적과을 하고 농약을 칠때 하루 종일 약통과 씨름하다 가을이 되면 능금을 땃던 것이며 다른 오빠와 동생들은 모두가 잘 되어
대학교에 단녀도
말 한마디 않고 일만 했으며,
어쩌다가 마을에 내려 오면 동생들과 같이 한 바탕 노는 것이 전부 였는데
지난 설을 쉬고 밑선을 보아 결혼 날짜을 잡은 것이다.
태희도 마찬 가지다.
욋골 산을 개간하여 뽕나무을 심어 누에을 치면서 숫한 고생을 하였다.
산비탈이 만평이 넘는 밭을 혼자서 맬때도 있었고 오빠는 맨날 모임과 볼일이 있어 동생 태희 에게만 일을 맡기고는 저녁 늦게 오는 것이 일과가 되었든 것이며
누에을 먹일 때는 한달동안 아무데도 가지을 못하고 누에에 몰일을
하여야 하고 가을 뽕은 비가 오기 전에 한잎 한잎 따야만 되기에 여간 고생이 아니 었다.
다른 사람이 저녁을 차리려고 떠난 사이에 남은 헤숙이와 태희는
환용락이가 따라준 소주을 한잔 마시드니 지나간 세월을 원망 스러운듯 연신 눈물을 흘린다.
영순이도, 정희도
언니가 올봄에 시집을 가면 차례 차례 기다리고 있는 것이며,
우리들 모두도 시집을 가야 되는 것이고, 다음달 부터는 연규 아제도
방위을 마치고 서울로 간다고 했다.
저절로 눈물의 자리는 한탄의 자리로 변하고 동사에서부터 정희의 노래 소리가 들려 오면서 방으로 들어 온다.
“꿈많은 내가슴에 봄은 왔는데 봄은 왔는데” 하면서
낮에 놀든 윳가치로 장단을 맞추니
한탄과 눈물이 법석이든 자리가 이내 정희의 리사이트 장으로 변한다.
한곡을 마친 정희는 계속하여 바다가 육지라면 하고 부르니 연규 아제도 벌떡 일어서드니 같이 따라 하면서 노래을 한다.
노래 소리는 멀리서도 들렸고 빨라 졌다 늦어졌다 하며 손에 손을 잡고 빙빙 방을 돌기도 하고 때로는 어께 동무을 하여 언제나 잊지 못할
차당땅을 생각하며 고향이 그리워도 하며 목청을 눂여 노래을 부르는데
"용락이 있는냐" 하며
들어오는 사람이 있어 문을 열어 보니
대구에서 막차을 타고 고경에서 비을 맞으며 걷어온 상도 였다.
모두가 반가워 하며 이렇게도 모일수 있는 것이 우리들 친구 이구나
생각하면서 이월의 초하루 어두운 밥은 깊어만 가고 노래 소리는 새벽이 되어서야 드리지 않으니
마을 어른들은 잠을 자다가도 따라 부렀고
어떤 어른들은 하도 재미있게 노래을 부르기에 살며시 구경을 하고 가면서젊음은 역시 좋은 것이다 하셨는데
그래서 잊을수 없는 마지막 윳놀이가 되었고 즐겁게 놀아본 젊은 날의 추억이 되었다.
윳놀이는 차당실에만 놀고 노는 민속 놀이가 아니다.
당시 어느 마을 마다 어느 문중 마다 설날부터 이월 초가 지난 한달 동안은 집안식구,친척들 문중의 형,아우 끼리 놀고 나면 다움에는 한 마을에 같이 자란 친구들과 모여 놀수 있는 시간이 돌아 오고 하였다.
만약 집안이나 무중의 단체 윳놀이에 빠지기만 하면 어른들의 불호령이 나고 일가 및 대소가 사람들과 어울릴 시간이 없는 너는 도데체 어디서
왔는냐 하며 야단 법석이다.
그러나 엄격한 질서와 법도가 존재하는 문중놀이 윳놀이는 재미가 덜하여
우리 친구들과의 윳놀이을 학수 고대 하며 손가락을 찍어 가며 기다리고
기다렸는데 지금도 당시의 친구들과 만나면 그 때 그 윳을 놀고 싶고
그런 모임이 없다해도 어쩌다 초등학교 모임에 가면 편 윳을 노는 모습을 볼수 있고 세월이 지나 쉰의 중반이 되어도 윳가치만 손에 들면
신이 나고 이기겠다는 용기가 백배 하여 던지고 던져 보지만 세월의 흐름은 돌이킬수 없는 향수에 젖으며 각자가 살기 위하여 떠났기에 현실은 어쩔수 없다 한탄을 하며 비록 윳놀이만 하고 지낸 스므살의 차당실 기억이라도 생각만 하여도 즐겁가만 하다.
탕갓방구
첫댓글 추억만 더덤지말고 내년보름날에는 대구에 한번 오시게 대구친구들은 해마다 춘천각에서 한바탕놀지 누구라고 실명은 밝히지 않게는데 빡빡자기 주장만 하는 친구도있고 재미나케 하루 윳놀고 간다 추억 더덤는것 보다는학실히 재미가있다 초대하거든 꼭참석 하시게.....
척사대회라고했지. 난 어릴 때 철사대회로 알아 들어 무슨 철사? 하며 의구심을 가지기도 했었다네. 추억? 좋지 때론 지나간 세월에 대하여 심미안을 척도로 인생을 반추 할 수도 있겠기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