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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남 마르첼리노 마리아 수사님의 묵상글 중 '신앙여정' 과 공유한, 할 글들 (240702 - 2409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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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의 신비적 변화는 관계적 변화의 실체
http://www.ofmkorea.org/ofmkfb/558015
이마르첼리노M 2024.07.02 19:36
=== 2 ========================
믿음은 사랑하기 위하여 선택하는 결단입니다.
http://www.ofmkorea.org/ofmkfb/558206
이마르첼리노M 2024.07.05 17:17
=== 3 ========================
변화된 실존의 생생한 관계의 현장으로 나아가는 기도의 길
http://www.ofmkorea.org/ofmkfb/558335
이마르첼리노M 2024.07.07 08:00
=== 4 ========================
영원한 지금, 꽉 찬 오늘 (하느님 나라의 현재)
http://www.ofmkorea.org/ofmkfb/558468
이마르첼리노M 2024.07.09 09:16
=== 5 =========================
내가 찾는 하느님 나라는 어디에?
http://www.ofmkorea.org/ofmkfb/558624
이마르첼리노M 2024.07.11 11:04
=== 6 =========================
인간의 나약함 안에서 꽃피는 말씀의 통치
http://www.ofmkorea.org/ofmkfb/559021
이마르첼리노M 2024.07.16 10:57
=== 7 ========================
神話에서 神化로 (육화의 신비)
http://www.ofmkorea.org/ofmkfb/559410
이마르첼리노M 2024.07.21 08:18
** 7. 23 게시
=== 8 ========================
프란치스칸 영성 (통합된 안목으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삶의 방식)
http://www.ofmkorea.org/ofmkfb/559616
이마르첼리노M 2024.07.24 08:04
** 7. 25 게시
=== 9 ========================
프란치스칸들이 복음을 산다는 것은?
http://www.ofmkorea.org/ofmkfb/559777
이마르첼리노M 2024.07.28 02:52
=== 10 =======================
무지의 구름을 뚫고 ( 삼의일체 하느님의 선에 참여케 하는 존재의 일의성)
http://www.ofmkorea.org/ofmkfb/560046
이마르첼리노M 2024.08.01 04:49
=== 11 =======================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갈망이 꽃피는 땅
http://www.ofmkorea.org/ofmkfb/560371
이마르첼리노M 2024.08.03 16:43
=== 12 =======================
하느님 안에서 사는 법을 배우는 사람만이 자기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http://www.ofmkorea.org/ofmkfb/560487
이마르첼리노M 2024.08.07 00:35
=== 13 =======================
자연 생태계 안에서 바라보는 관상의 생태계
http://www.ofmkorea.org/ofmkfb/560585
이마르첼리노M 2024.08.10 05:41
=== 14 =======================
관계의 밭에서 발견한 아버지의 품 (마태 13,44)
http://www.ofmkorea.org/ofmkfb/560966
이마르첼리노M 2024.08.16 17:32
=== 15 =======================
혼자 떨어져 울게 하는 인간의 자만심
http://www.ofmkorea.org/ofmkfb/561296
이마르첼리노M 2024.08.28 09:33
=== 16 =======================
그리스도의 몸에 저항하는 사람들
http://www.ofmkorea.org/ofmkfb/561614
이마르첼리노M 2024.09.08 08:27
=== 17 =======================
성 프란치스코 안에서 바라보는 선을 어둡게 하는 헛된 환상
http://www.ofmkorea.org/ofmkfb/561724
이마르첼리노M 2024.09.12 05:11
=== 18 =======================
악과 악마의 실체
http://www.ofmkorea.org/ofmkfb/561757
이마르첼리노M 2024.09.13 10:18
=== 19 =======================
사랑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http://www.ofmkorea.org/ofmkfb/561816
이마르첼리노M 2024.09.15 05:41
=== 20 =======================
폭염(暴炎)이 지나간 자리에 찾아온 가을
http://www.ofmkorea.org/ofmkfb/562043
이마르첼리노M 2024.09.25. 02:53
=== 21 =======================
너무 좋아서 믿기 어려운 신비
http://www.ofmkorea.org/ofmkfb/562128
이마르첼리노M 2024.09.29. 07:12
=== 22 =======================
억새들의 수런거림
http://www.ofmkorea.org/ofmkfb/562144
이마르첼리노M 2024.09.30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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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의 신비적 변화는 관계적 변화의 실체
그리스도의 성체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그리스도의 몸인 지체 앞에는 무릎을 꿇지 못하는 사람들은 성체가 관계적 변화를 위한 식사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물질로 된 빵의 신비적 변화에만 관심을 보입니다. 그들은 복을 받으려는 계산된 마음으로 성체를 받아 모시기에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만 따지지 자신의 변화나 관계의 변화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들이 보이는 믿음의 태도는 죽음 없는 부활을 찾고 고난 없는 영광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빵은 사람들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내어주시는 몸으로 사람들을 먹이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신 예수님의 마음을 빵에 담아 우리에게 주실 때, 사랑하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어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내어주는 몸으로 현존하시기 위하여 죽음을 받아들이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체를 받아 모실 때마다 기억해야 합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다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지체가 되어있습니다.” (1고린 12,27) 바오로 사도는 몸이라는 표상이 그리스도 신자들의 공동체를 특징 지우는 일치성, 다양성, 연대성을 말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제들은 실제로 사람들을 변화시키기보다 빵을 변화시키기가 훨씬 더 쉽습니다. 한평생 무릎을 꿇고, 신뢰하고, 믿는다고 하면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어떻게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성찬례에서 빵을 받아먹고도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들로 살아가고 있을까? 빵은 죽음과 부활로 주어진 양식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내어주는 사랑의 표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빵을 받아먹은 우리는 자신을 내어주는 현장으로 파견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변화가 관계의 변화로 관계의 변화가 빵의 표상이 주는 실체입니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요한 6,53-56)
먹고 마시는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얼굴인 우주로부터 생명의 에너지를 받아들여 지금 여기에 나를 존재하게 하는 양식입니다. 빵은 밀이 부서져 하나의 형상을 지닌 음식으로써 빵을 먹는 자들의 일치를 이룹니다. 이는 내어주는 사랑의 표상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의 관계적 선으로 표현됩니다. 그러므로 빵의 신비는 관계적 신비가 되고 관계적 신비 안에서 삼위일체 하느님의 내어주는 사랑에 참여하는 기쁨을 줍니다. 이 참여 안에서 누리는 자유야말로 인간 실존의 목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도한 집착이 만들어 내는 인간의 이기적인 탐욕과 자기 중심성은 선의 흐름을 막고 있으며, 눈앞의 이익과 즐거움과 편안함에 길들어진 우상의 실재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에 직면하게 되면 숨어버립니다. 업적과 공로를 쌓기 위하여 숨어버립니다. 기도와 희생이라는 피난처로 도망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희생보다 자비를 원하시는데 여전히 대가를 치르겠다면서 보속이라는 이름으로 바치는 기도문을 외우러 떠납니다. 자기의 몸을 내어주시는 빵을 먹고도 전혀 변화가 없는 상태가 계속되는 것입니다.
빵은 자신과 관계적 변화를 위한 식사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일치성과 다양성, 그리고 연대성의 현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만물을 존재케 하는 신성한 실재와 만나는 성찬례를 통하여 완전히 그분과 하나가 됩니다. 이렇게 하나가 된 몸으로 새로운 관계, 회복하는 관계, 나누는 관계의 현장인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인간 실존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실재와 합일이 영성체를 통하여 현시된다면 빵의 신비적 변화에 무릎을 꿇는 것과 더불어 지체인 네 앞에 무릎을 꿇지는 못하여도 꼭대기에서 내려와 동등한 위치에서 겸손하게 섬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일치한다는 건 동등해진다는 것이며, 다양성 안에서 산다는 것은 자기 몫을 살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동등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면서 연대하는 일상이 하느님 나라의 현재일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내어주는 신비가 빵을 나누는 현재 진행형인 잔치인 것입니다. 이 잔치에서 하느님의 무상성과 보편적 사랑이 구체화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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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사랑하기 위하여 선택하는 결단입니다.
성령께서는 사람들이 악의 유혹을 느끼는 순간마다 그들의 마음속에서 선의 유혹을 불러일으키려고 힘쓰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의 마음속에서 수없이 많은 동요를 경험합니다. 나의 자유는 그러한 동요 속에서 매 순간 무엇인가를 선택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그가 어떤 시대, 어떤 조건, 어떤 문화 속에서 생활하건 두 가지 길 가운데 선택하게 마련입니다. 너 없이 행복할 것인가? 아니면 너와 더불어 행복할 것인가? 지금 행복할 것인가 아니면 다음에 행복할 것인가? 살아 있을 때 행복할 것인가? 죽은 후에 행복할 것인가? 혼자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타인과 공감할 것인가? 채워서 행복할 것인가? 비워서 행복할 것인가? 내어주면서 행복할 것인가? 쌓아두면서 행복할 것인가? 위에서 행복할 것인가? 동등해져서 행복할 것인가? 올라가서 행복할 것인가? 내려가서 행복할 것인가. 매일 아침 새롭게 다짐해야 할 이 선택은 그 무엇보다 근본적인 것입니다. 그 선택이 우리의 삶의 실체를 결정짓고 우리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확실하지 않은 현실에 대해 품는 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어도 당신의 흔적을 우리 마음과 너와 나의 관계 안에 남겨놓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믿음은 사랑과 결코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곧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내어주고 받아들이는 가운데 최상의 자유와 가쁨을 맛보게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선택하고 결단하고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일상이며 하느님 나라의 현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이해하고 인식하고 그것에 끌리거나 하려면 그것의 상당한 부분이 내 안에 있어야 합니다. 전혀 낯설고 듣지도 보지도 못한 무엇과 하나가 되거나 체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만물 안에 당신의 상당한 부분을 심어놓으셨습니다. 당신의 모상과 닮은 모습으로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는 지금도 그 일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우주 안에 만물을 보고 하느님의 얼굴을 알아보는 것도 내 안에 심어놓은 성령의 숨결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렇게 여러분에게 편지를 써 보내는 것은 여러분이 진리를 몰라서가 아니라 진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고 또 진리로부터 거짓말이 결코 나오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요한 2,21)
성령께서 내 안에 선의 흐름으로 악을 이겨내게 하십니다. 그러나 나의 동의 없이 그렇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나의 자유로운 선택이 내 안에 그리스도가 형성될 때까지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매일 매일 나의 선택에 따라 미래의 내 얼굴이 결정될 것입니다. 오늘은 과거의 선택에 따른 모습이며 미래는 오늘의 선택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무상의 선물을 받아 들고 나를 내어주기까지 나의 자유를 영의 현존 아래 두고 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믿음은 사랑하기 위하여 선택하는 결단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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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된 실존의 생생한 관계의 현장으로 나아가는 기도의 길
파스카는 거르고 지나가다 라는 뜻으로 죽음의 천사가 양의 피가 묻어 있으면 재앙을 거두고 지나갔음을 상기 시켜줍니다. 파스카의 신비는 상실과 위기, 스트레스와 한계, 고통과 억압된 상처, 외로움과 슬픔, 등 결정적 죽음 이전의 죽음 앞에서 그리스도처럼 변화의 길을 걷는 신비입니다. 인간은 이를 관통하여 의식과 자유의 깊은 차원으로 들어간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린양의 죽음이 인간의 재앙을 피하도록 했다면 그리스도의 피는 인간의 근본적인 해방과 자유를 위한 죽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은 부활 이전에 반드시 통과 해야 할 관문이며 이러한 죽음은 부활이라는 변화된 실존의 생생한 현재입니다.
변화가 없는 사람은 자신이 우상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며, 자신을 꼭대기에 올려놓기 위하여 조금의 휴식도 없이 수레바퀴처럼 살아갑니다. 이들은 자신의 업적과 공로를 자랑하고 하느님께서도 그에 합당한 선물을 주실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그렇게 살아갑니다.
창조의 관점에서 보면 완전히 죽는 것은 없으며 다만 다른 존재에게 자신을 내어주어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게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 생존의 역사를 보더라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흔적을 남기고 죽어서 살아있는 존재에게 영향을 줍니다. 그러므로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인 현재로 경험합니다. 나에게 생명을 주고 떠난 부모님과 가족들은 현재의 내 안에 살아있습니다. 영원은 그렇게 지금이라는 시간 안에서 경험하는 실재입니다. 이러한 실재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선의 흐름이 나를 통하여 너에게 전해진다면 진리가 생명이며 생명을 얻는 길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은 변형된 실제로 우리와 함께 계시며 선을 선택할 때마다 내 안에서 그 일을 하십니다. 이것이 영의 거룩한 활동입니다. 이 영의 거룩한 활동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은 무상의 선물을 받아 들고 자신을 내어주면서 기쁨과 자유의 깊은 만족을 누리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자신을 내어주는 죽음이 없다면 부활의 체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너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죽음과 부활이라는 생의 양면을 지닌 그리스도의 현존은 나에게 그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파스카의 신비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는 길이며, 내어주는 길이 살리는 길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내어주시는 선에 참여하는 길이 거기에 있습니다.
변화는 죽음으로부터 나온 부활의 현장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따르고 닮으려는 변화의 과정을 걷는 이들은 자신은 죽으면서 너를 살려내려는 의지에 차 있습니다. 이것이 희망이라고 부르는 이름입니다.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의 현장입니다. 만물 안에서 통합된 인격으로 우리와 동행하시는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거울입니다.
나는 신앙이란 흐르는 강물처럼 흐름과 사랑을 신뢰하는 능력이라고 믿습니다. 관계 안에 자비와 선의 흐름이 있음을 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배웠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이 흐름을 막을 수 없습니다. 다만 무지의 구름이 가려져 있을 뿐입니다. 하느님의 선하심은 우리가 상처받는 때일수록 구름 저편에 자비의 손길이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깊이 신뢰해야 합니다. 지금 여기에 현존하는 능력을 상실한 사람은 무지의 구름 속에서 자기 외에 다른 것들을 볼 수 없고 창조된 모든 피조물이 자신을 위해 있는 것처럼 너와 피조물을 이용의 대상으로만 여길 뿐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변화로 나아가는 사람이며 변화로 나아가는 모든 과정을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혹당하고 무시당하고 때로는 죽음의 위협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러한 현상을 안으로 깊이 받아들여 상실의 강을 건너 아버지의 품으로 달려가는 사람입니다. 빈틈없이 안전한 장소가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용서로 인하여 황홀한 기쁨과 자유를 선물로 받는 그 품에서 더 깊은 차원의 신뢰와 자기 개방이 너를 용서하고 받아들일 여백을 만듭니다. 기도가 변화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변화로 나아가지 못하는 기도는 자기만족으로 끝납니다. 파스카의 신비는 그렇게 죽음의 강을 건너 생명의 강에서 온갖 생명들과 더불어 부활의 현재를 살아갑니다. 죽음은 부활이라는 변화된 실존의 생생한 현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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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지금, 꽉 찬 오늘 (하느님 나라의 현재)
http://www.ofmkorea.org/ofmkfb/558468
이마르첼리노M 2024.07.09 09:16
영원한 지금, 꽉 찬 오늘 (하느님 나라의 현재)
말씀의 통치에 굴복하는 믿음을 드러내는 때는 미래가 아닌 지금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빛나게 하고, 아버지의 나라를 오게 하며,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때는 언제나 지금이며 내가 서 있는 여기이기 때문입니다. 도구적 존재로 살아가는 나는, 예수님 말씀의 통치를 받아들여 지금 여기에서, 성령의 열매를 거두는 변화의 체험으로 관계 안에 선이 흐르게 함으로써 공유된 선으로 참여하는 행복을 미리 맛보게 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는” (갈라 5,22-23) 미래에 행해야 할 덕목이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나를 도구 삼아 바로, 지금, 여기에서, 그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의 체험이 지금이 아닌 장차 있을 상벌(賞罰)에 대한 경쟁으로 그리스도교의 변화시키는 힘을 마비시키고 약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왜곡된 전통 안에서 업적과 공로를 쌓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뒤로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상벌은 사후에 받게 될 보상이 아닙니다. 상벌은 이 세상에서 보이는 내 행실에 내재 되어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선은 그 자체로 지금 받는 보상이며 악은 그 자체로 지금 받는 처벌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에 미래를 맡겨야 합니다. 복음의 말씀보다 인과응보의 틀에서 나오는 신심에 맞춘 신앙생활은 초점을 크게 벗어나게 합니다. 여기에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다는 것은 통탄할 일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유일하게 할 일은 말씀의 통치, 곧 하느님의 다스리심에 굴복하고, 무상으로 주시는 선물을 받아들여 맘껏 누리고, 너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나를 내어주는 것이 전부입니다.
진짜로 좋은 삶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 우리가 물어야 할 근본적인 질문이 여기에 있습니다. 경건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이들과 근본주의자들은 진짜 삶이 이번 생의 다음에 있다고 믿고 있으며 이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거짓 생각이 수많은 그리스도교인을 잘못된 종교의 틀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모범이 우리에게 위대하고 좋은 소식이 된 이유는 나의 변화와 모든 관계의 변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제도가 아니라 내세에서 시작되는 상벌제도가 되면서부터 복음은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존중하고 신뢰하는 사랑을 배우기보다 경쟁하고, 증명하고 포장하는 데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쓰면서 자신의 업적과 공로를 내세(來世)의 상벌 기준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통제와 지배의 영역을 넓히는 데에만 관심이 있을 뿐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변화와 관계의 변화로 해방과 평화를 가져다 주기보다 다른 사람을 바꾸기 위한 무기를 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관계적 선을 배우는 것입니다. 위격 간에 내어주는 사랑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아닌 이유로 행하는 어떤 일도 의미가 없습니다. 희생을 강요하는 종교는 예수께서 선포하신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희생이 아니라 자비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하느님을 끌어들여 명분을 만들고 너와 피조물을 일회용품처럼 쓰고 버리는 이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현세에서는 복을 받고 미래에는 천국에 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삶을 바꾸라고 하십니다. 그분은 거짓된 나를 놓아버리고 하느님 안에 있는 나를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따르고,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따르고, 사랑하고, 용서하는 사람은 인과응보라는 계산기가 없습니다. 조금 바치면 조금 받고, 많이 바치면 많이 받고, 안 바치면 안 주시는 하느님으로 만드는 것은 사람이 만든 하느님입니다. 돈과 쾌락과 안전과 자기 보호만을 위한 우상의 실재가 거기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만든 그러한 틀 속에 갇혀계실 분이 아닙니다. 무상성과 보편적 사랑으로 우주를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변화에 둔감하고 진리에 저항하는 종교로 바꾸려는 이들이 사람들 안에 있는 종교심을 이용하여 우월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을 양산하고 있습니다. 가톨릭교회에 몸담은 수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인간성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려고 하기보다는 많은 양의 기도문을 외우거나 보속과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인과응보의 계산기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온전히 현존하시는 현재, 바로 지금을 피하려고 온갖 짓을 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종교와 미래의 종교는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의 종교만이 의미와 가치를 지닙니다. 하느님의 현존은 언제나 지금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이 진짜로 일어나는 중요한 지금, 언제나 꽉 찬 오늘이야말로 하느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는 진정한 때이며, 진짜인 무엇을 맛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때입니다. 영원한 지금, 하느님 나라를 위해 연습할 수 있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 자비의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2고린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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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찾는 하느님 나라는 어디에?
http://www.ofmkorea.org/ofmkfb/558624
이마르첼리노M 2024.07.11 11:04
내가 찾는 하느님 나라는 어디에?
교회에서 찾는 하느님 나라, 세상에서 찾는 하느님 나라, 다음 세상에서 찾는 하느님 나라. 나는 어디에서 하느님 나라를 찾고 있을까요?
교회 안에서만 찾는 하느님 나라는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기에 믿지 않는 사람들과 우주라는 거대한 피조물에 대한 심각한 관계의 부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 자체를 하느님 나라로 삼는다면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으로부터 나오는 자기중심적인 지배의 나라에서 꼭대기를 점령하지 못하는 실망을 안겨줄 것입니다.
나중에 올 하느님 나라, 이 세상이 아닌 다음 세상을 천국으로 삼고자 한다면 지금, 여기서 나와 관계를 변화시키는 복음의 핵심을 놓치게 될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하느님 나라로 삼고자 하는 우리의 관심은 교회도 아니고 세상도 아니며 다음 세상도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다스리심을 경험하는 개인과 사회의 모든 왕국이나 보상을 초월하고 그것을 능가하는 거기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삼위일체 하느님의 관계적 내어줌이 너와 나와 피조물과 나 사이에서 경험될 때 순수한 하느님 체험이 나오고 이 체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찾는 하느님 나라는 세 가지 관계 안에서 경험됩니다. 하느님과 나, 너와 나, 그리고 모든 피조물과 나 사이에서 관계 맺는 방식에 의해서 경험되는 실재입니다. 나는 피조물의 아주 작은 하나이며 이 하나인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의 에너지를 받아서 너와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나를 내어주면서 경험합니다. 그 나라는 지금이라는 시간 속에서 영원을 향한 미래로 열려있습니다. 그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고, 현재 진행 중이며, 미래에 완성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이 영원이며 영원은 지금의 연속선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내면에서 성령의 거룩한 활동을 간직하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내어주시듯, 아들이 아버지에게 내어드리듯, 너와 피조물을 통해 나에게 전달된 하느님의 자비와 선을 너와 피조물에 내어주는 거기에 구체적인 하느님 나라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는 이 모든 것을 초월해 있습니다. 언제나 여기에 있고, 여기가 아닌 데 있으며, 언제나 지금이면서 지금이 아닌 데 있습니다. 이미 와 있지만 아직 완성되는 과정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묵시21,3)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루가 17,21)
관계 속에서 발견되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밖에서 찾는 하느님 나라는 조작된 하느님 나라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인과응보의 틀에서 만든 하느님 나라는 변화가 없는 나만을 위해 찾는 나라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나라에서는 자기가 옳고, 우월하고, 구원받았음을 자랑하느라고 시간과 생명의 에너지를 낭비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명분을 크게 만들지만 하느님과는 전혀 무관한 자아도취에 근거한 결과만 남아 누구와도 가까이 지낼 수 없게 됩니다.
말씀의 통치는 나의 변화를 위한 것이지 타인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말씀과 그분의 삶에서 드러난 모범을 받아들여 내 안에 말씀이 잉태되고, 잉태된 말씀은 안으로부터 과거를 지우고, 현재를 살기 위해 미래를 내다봅니다. 그 변화는 믿음으로 드러나는 나의 태도로 증명됩니다. 사용하는 단어, 억양, 표정과 눈빛, 몸짓의 변화, 등,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닮으려는 데에 모든 에너지를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나의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가 변화를 위한 성령의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천상의 순간인 지금이 하느님 나라의 때이며 내가 관계를 맺는 곳이 하느님 나라의 장소가 됩니다.
하느님의 통치, 곧 하느님의 다스리심은 예수그리스도의 육화로 시작되었으며 공로가 아닌 선물에 바탕을 둔 새로운 사회질서를 선포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상성이 지닌 자비의 얼굴입니다. 하느님의 다스리심을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는 하느님 나라의 실재(實在)입니다. 그러므로 자비롭고 선하신 하느님 모습은 기쁨에 찬 나의 얼굴로, 하느님의 품에서 누리는 나의 자유로, 지금 여기서 선포되는 복음으로, 관계를 비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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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나약함 안에서 꽃피는 말씀의 통치
http://www.ofmkorea.org/ofmkfb/559021
이마르첼리노M 2024.07.16 10:57
인간의 나약함 안에서 꽃피는 말씀의 통치
하느님의 통치, 곧 하느님의 다스리심은 도구적 존재로 살아가는 내가, 나와 다른 무수한 너와 피조물과 어떻게 연결될 것인지를 배우도록 초대하십니다. 하느님의 다스리심은 고통이 없는 신비스러운 세계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다른 모든 것들과 참으로 연결될 수 있는 그런 세계에 관한 것입니다. 창조된 우주 안에서 살아가는 생명들이 얼마나 섬세하게 연결되어 존재하고 있는가를 발견하게 하심으로써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내가, 존재의 원천인 창조주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깨닫게 하십니다. 나는 너와 피조물이 없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말씀의 통치를 통해 우리 안에서 상호 간에 주고받는 생명의 에너지를 발견하도록 돕습니다. 그 에너지를 발견하면 할수록 온 세상이 우리의 거룩한 성당이고 성경이 약속한 “새 하늘과 새 땅”(묵시 21,1)이며 성프란치스코가 지고 다녔던 은둔소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하십니다.
도덕적 성취를 위하여 사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되는 길보다 연결을 배우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사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되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이다가 관계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사적으로만 구원을 추구한 나머지 인간 실존의 바탕인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랑하라는 새 계명으로 관계를 구원하셨습니다. 그것은 위로부터 새로 태어나는 신비였습니다. 자신을 내어주는 자비와 선으로 관계의 혁명을 이룸으로써 살리고 회복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옳은 것이 다 거룩한 것은 아닙니다. 옳은 것은 옳은 것일 뿐, 옳다고 해서 저절로 연결되거나 선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계명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라고 하십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런 다음에 나를 따라라” 율법은 죄가 무엇인가를 알려줄 뿐입니다.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은 율법을 초월하는 거기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통치는 서로 연결된 존재 안에서 실현되는 신비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상호 간에 내어주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홀로 족할 것인가? 더불어 행복할 것인가? 움켜쥘 것인가? 내어줄 것인가? 올라갈 것인가? 내려갈 것인가? 섬길 것인가? 지배할 것인가? 협력을 구할 것인가? 명령할 것인가?
우리가 사는 세계는 두 종류의 세계입니다. 하나는 힘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다스리심으로 시작된 사랑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입니다. 인과응보의 틀에서 사는 사람은 언제나 힘을 중심으로 설계된 세계에서 살아가며. 말씀의 통치를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통치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힘으로 지배하는 분으로 해석합니다. 회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이유처럼 내어주는 사랑으로 내 안에 있는 나를 빼내어 너와 피조물에 다가가게 함으로써 나에게서 내가 벗어나게 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현장에서 맛보는 즐거움, 말씀의 권위와 나약함의 아름다운 조화가 이 작은 피조물인 나에게서 실현되는 놀라움 안에서 나는 육화의 기쁨을 맛봅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다스리심이 내 안에 있는 나를 통제할 수 있도록 당신의 삶과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순수한 사랑의 동기를 단단히 붙잡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랑의 힘이 배제된 힘의 실현은 잔혹하고 사악합니다. 하느님의 다스리심은 사랑으로 일하심으로써 내 안에 있는 다른 힘과 충돌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선택의 기로(岐路)와 마주하게 됩니다. 나는 선을 선택할 때마다 하느님의 승리를 경험합니다. 주님의 영께서 그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몸의 요구와 체면과 평가에 민감하여 악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외롭고 허전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다스리심은 마음의 밭에 떨어진 씨의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성령의 열매들입니다. 씨는 네 종류의 마음의 밭에 뿌려집니다. 돌밭과 길바닥과 가시덤불에 떨어진 말씀에서 자기 모습을 찾아내고 발견한 사람만이 좋은 땅에 떨어진 씨처럼 열매를 맺습니다. 말씀을 듣고, 이해하고, 간직하고, 행하고, 이를 반복하는 가운데 얻는 수확의 기쁨이며 삼십 배, 육십 배, 백배로 누리는 말씀의 신비입니다. 성령 안에서 말씀의 통치를 받아들인 사람만이 누리는 해방의 기쁨과 자유입니다. 더 많은 말씀이 내 마음을 차지할수록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사라지고 영의 활동에 자신을 내어놓게 됩니다. 도구적 존재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나약함으로 돌밭과 길바닥과 가시덤불이 되기도 하지만 말씀의 권위가 인간의 나약함 안에서도 이를 통합하여 조화롭게 만드십니다. 말씀의 권위가 내면에서 나와 다투는 가운데 선을 택하도록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빈번하게 넘어지고 실패를 경험하면서도 선택하고 결단하고 책임을 지려는 의지에 차 있습니다. 말씀의 통치를 받아들인 이들은 외부의 적과 싸우지 않고 내면의 적과 싸웁니다. 이로써 무상의 선물을 받아 들고 나를 내어주기까지 믿음의 현장에서 매력으로 끌어당기는 성령의 활동에 내어 맡깁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따르기 위해 변화의 과정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누룩이 되어 부풀어 올라 빵의 반죽이 되기까지, 나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동요는 계속될 것입니다. 연결을 위한 진통이 관계 안에 선이 출생할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하느님의 다스리심이 다가왔다고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마태4,17) 그러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할 때마다 하느님의 다스리심은 우리의 관계를 뚫고 들어오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둘이나 세 사람, 그들 안에서 서로를 내어주는 선의 흐름을 볼 때 지금과 미래의 교회 모습을 봅니다. 하느님의 다스리심을 받아들여 회심을 통해 자기에게서 해방된 이들이 누리는 자유를 봅니다. 말씀의 권위가 인간의 나약함 안에서 꽃피는 하느님 나라의 현재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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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話에서 神化로 (육화의 신비)
http://www.ofmkorea.org/ofmkfb/559410
이마르첼리노M 2024.07.21 08:18
神話에서 神化로 (육화의 신비)
예수님 안에서 신성이 육신으로 드러난 것은 말씀이 사람이 되었다는 육화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육화의 본질적인 면들은 하느님의 자기 계시가 이 세상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숨기고 드러내신 곳이 바로 에 세상이었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이라는 말은 구체적인 물질세계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향기를 맡고, 입으로 맛보고,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감각적인 세계에 하느님의 숨겨진 진실이 있고 우리는 우리의 일상에서 그 진실의 보물을 하나씩 발견해 나가는 것이며 그것이 믿음이 주는 기쁨의 실상입니다. 그러므로 은총은 바깥에서 우리에게 전해진 선물이라기보다 안에서 발견하는 선물이며 오감을 통해 발견하는 하느님 나라의 구체적인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연관된 곳이 어디든 간에 물질적인 우주가 하느님이 당신을 숨기고 드러내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사는 동안 발견하고 맛보고 경험하는 실재이지 다음 세상에서 받게 될 상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실 상벌은 상태적 진실로써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선은 그 자체로 보상이며 악은 그 자체로 처벌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육화의 신비가 우리의 가슴속에 살아서 행동의 동기를 만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은총은 여기에 없는 무엇을 바깥에서 세상으로 불러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은총은 이미 주어진 선물입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숨겨진 진실을 마주하고 발견하면서 하느님 나라의 진실을 맛보고 살아갑니다. 모든 발생이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창조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으며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많은 이들이 생각하기를 은총은 바깥 어디에서 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의 하느님은 바깥에서 모든 일을 하시고 하느님의 사랑도 창조물과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며, 기도하는 이유도 그 선물을 위에서 우리에게 내려보내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존이 우리가 청하는 기도로 이루어진다는 생각은 하느님의 자유로운 영의 활동을 제한하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업적과 공로와 기도에 대한 보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서의 자녀들을 먹이고 기르시는 돌보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창조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지금도 진행되는 하느님의 놀라운 신비입니다. 관계 안에 흐르는 하느님의 자비와 선과 아름다움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당신의 창조물을 통하여 창조물 안에서 발견되는 신비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생겨난 것들이 밝혀주듯이 생명의 출현은 만물 안에 있는 깊은 중심으로부터 이루어집니다. 그 중심에 창조된 세상이라는 아버지의 품이 있습니다.
사물들의 내적인 차원에서 발견하는 육화의 신비는 신화를(神話) 신화(神化)로 알아들을 때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에게 당부하신 “나를 따르라”라고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를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神에 대한 이야기에서 神을 닮아가고 神처럼 되어가는 존재라는 말이며, 변화가 육화의 본질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 “하느님이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우리는 예수님처럼 완전한 인간이며 동시에 완전한 신적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닮을 수 있고 따를 수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우리에게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기를 권고하셨습니다. 발자취를 따른다는 것은, 바로 뒤에서 그분을 따라가는 삶입니다. 또한 성프란치스코는 주님의 영과 그 영의 거룩한 활동을 항상 간직하고 살아가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주님의 영을 지닌다는 것은, 말씀을 잉태한 모태가 되라는 말입니다. 간직된 말씀이 있어야 행동하는 선으로 관계 안에 하느님의 자비가 흐르게 할 수 있습니다. 육화는 그렇게 나를 도구 삼아 이루시는 하느님의 놀라운 신비입니다. 그러므로 우주 만물은 그리스도의 얼굴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시며 만물에 앞서 태어나신 분이십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 곧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왕권과 주권과 권세와 세력의 여러 천신들과 같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모두 그분을 통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만물은 그분을 통해서 그리고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그분은 만물보다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속합니다.”(골로 1,15-17)
神話에서 神化로 변화되는 육화의 신비는 육화의 도구로써 살아가는 내 실존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닮고 따르려는 구체적인 내 믿음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그네 인생길에서 길이 되신 예수님을 만나 길이 되어가는 여정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프란치스코는 우리의 이정표가 되시고 안내자로서 또 다른 길이 되신 분이셨습니다. 이제는 내가 그 길이 되어 누군가를 아버지의 품으로 안내하는 도구로써의 기쁨과 자유를 여기에서 누리게 될 소명을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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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영성 (통합된 안목으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삶의 방식)
http://www.ofmkorea.org/ofmkfb/559616
이마르첼리노M 2024.07.24 08:04
프란치스칸 영성 (통합된 안목으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삶의 방식)
성프란치스코는 예수님의 신성보다 인성을 더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닮고 따를 수 있는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신성이 아닌 인성입니다. 예수님의 인성 안에 숨겨진 신성을 따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칸의 삶의 방식이 육화에 기원을 둔 하느님의 선하심과 겸손하심을 본받고 따르는 데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가까이 따를 수 있는 실현 가능성을 열어주었습니다. 프란치스코와 클라라가 하느님의 겸손하심을 사랑하게 된 까닭은 하느님이 자신을 비우고 물질세계에 당신을 숨기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가톨릭 전통이라는 역사 안에서 나는 나도 모르게 형성된 하느님의 이미지를 수정해야 했습니다. “위로부터 새로 태어나야 한다.” (요한 3,3) 는 예수님의 말씀은 프란치스칸 영성을 배우면서 이분법적이 아닌 통합된 영성으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인과응보의 틀과 이분법적 사고 방식을 철저하게 고집하는 이들은 하느님의 육화에 대한 인식보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다 보니 하느님에 대한 막대한 두려움과 죄책감에 대한 불안과 미래에 받게 될 처벌에 대한 공포를 조성하였고, 멀리 계신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하여 개인적인 완전함에 대한 추구와 도덕적 성취만을 우선시하는 영성만이 남게 되었으며, 인간이 가까이 따를 수 없고 범접할 수 없는 하느님의 이미지만을 조성하였습니다.
두려움에 차 있거나 겉으로 드러나는 배타적 순결로 무장한 종교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갈라놓기를 좋아합니다. 이러한 종교에서의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가까이 계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멀리 있으면서 벌을 내리시는 무서운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하느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는 언제나 자신을 성스러운 편에 두어야 했고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을 멀리 떠나야 했습니다.
프란치스칸 신학자 둔스 스코투스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로 귀결된다고 말했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이 한 분이시듯 모두가 다양한 방식으로 같은 존재에 참여한다는 통합된 안목을 갖게 해 주었습니다. 창조된 모든 것은 그 안에 숨겨진 하느님의 얼굴이 담겨있다는 말입니다. 이분법적인 사고는 통합이 아닌 갈라놓음으로써 반쪽짜리 영성을 만들었습니다. 신성만을 강조한 나머지 인간성을 저급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육화는 물질세계로 들어오신 하느님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창조물은 속된 것이 아니며 만물은 신성하고 거룩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나눌 수 없는 우주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시며 만물에 앞서 태어나신 분이십니다. 만물은 그분을 통해서 그리고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그분은 만물보다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속합니다.”(골로 1,15-17)
프란치스칸 영성은 통합하는 영성이지 갈라놓는 영성이 아닙니다. 육신 없는 영혼은 귀신이며 영혼 없는 육신은 시체입니다. 육신을 물리쳐야 할 원수로 여기던 시절엔 나도 그렇게 이분법적인 사고와 가치관에 젖어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통합된 인격 안에 육화하신 몸으로 나와 함께 존재하십니다. 이 놀라운 신비에 참여하는 행복이 믿음이 주는 기쁨입니다. 하느님의 선하심과 겸손하심이 진리로 드러난 아름다움이며 예수님 안에서 빛나는 하느님의 창조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주 작은 존재지만 그분으로부터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살아있는 생명을 사랑으로 돌보시는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자신을 내어주신 육화로 말미암아 나에게 희망이 생겼습니다. 나는 그 희망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조금이나마 예수님을 닮기 위해 나의 일상을 관계성 안에 선이 흐르도록 하려는 의지에 차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닮으십시오”(에페 5,1) 성프란치스코는 예수님의 인간성 안에서 하느님의 가난하심과 겸손하심을 발견하였고, 위로부터의 하느님이 아니라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닮으려 했습니다. 나에게 영감을 주고 희망을 준 프란치스코와 보나벤투라, 그의 뒤를 이은 둔스 스코트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무엇인지, 그분을 닮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통합적인 안목을 갖고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었습니다.
「2신자 편지」 13: “우리에게 모범을 남기시어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형제회 편지」 51: “내적으로 깨끗해지고 내적으로 빛을 받고 성령의 불에 점화되어,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게 하시고…”. 비인준 규칙 1,1: “이 형제들의 규칙과 생활은 순종 안에, 정결 안에, 소유없이 살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발자취를 따르는 것입니다…”. 「비인준 규칙」 1,2: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비인준 규칙」 1,3: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비인준 규칙」 9,1: “모든 형제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과 가난을 따르도록 힘쓸 것이며…”. 「마지막 원의」 1: “보잘것없는 나 프란치스코 형제는 지극히 높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지극히 거룩하신 어머니의 생활과 가난을 따르기를 원하며, 끝까지 그 생활 안에 항구하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분별력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사이가 아니라 겉으로 포장된 것과 깊은 속 사이에서 생겨납니다. 깊은 속은 언제나 은총을 보여 주지만 겉에만 머무는 삶은 우리로 하여금 핵심을 놓치게 합니다. 겉에만 맴도는 삶은 모든 것이 속되고 깊은 속으로 들어가면 모든 게 거룩합니다. 자기 잘못으로 깊게 들어가는 것이 하느님을 찾는 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까지도 거룩함으로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발견하기까지 프란치스칸 영성은 통합된 안목으로 따름과 닮음 안에서 새로 태어나는 삶의 방식입니다.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 “복음을 지킨다”는 것은 대단히 생명력 있는 개념으로, 어떤 규범들을 실현하는 것으로 축소될 수 없으며,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의 삶과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치를 표현하기 위해 프란치스코는 그의 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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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들이 복음을 산다는 것은?
http://www.ofmkorea.org/ofmkfb/559777
이마르첼리노M 2024.07.28 02:52
프란치스칸들이 복음을 산다는 것은?
프란치스칸 카리스마란? 회개와 형제성과 작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교회 안에서 복음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칸들이 복음을 산다는 것은 말씀으로 표현되는 하느님의 뜻과, 살아 있는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만나는 관계들이 말씀의 씨앗이 뿌려지는 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이 관계의 밭에서 공존하는 지혜를 배우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과제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두 종류의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하나는 힘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다스리심으로 시작된 사랑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입니다. 하느님의 다스리심을 받아들이려면 말씀이 우리의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행동의 동기들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이 형제들 삶의 본질을 이루고 있다면, 형제들의 생활양식은 ‘행함’보다 ‘존재’가 더 우선적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의도는 형제들의 삶을 교회 안팎의 특정한 활동에 국한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형제들은 나환자들의 돌봄이나, 젊은이들의 교육이나, 설교나, 본당의 운영이나, 비신자들에 대한 선교, 등등 어느 특정한 사도직을 통해 우리의 생활양식을 규정지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타인들을 위한 어떤 봉사로 소명 받은 것도 아니고, 가난이나 관상 같은 특별한 크리스천 덕을 쌓는 카리스마에 소명 받은 것도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좋은 것들이고 필요한 것들이지만, 그 자체로 프란치스코의 특별한 카리스마를 규정짓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들은 “거룩한 복음의 실행”과 관계를 맺을 때만 비로소 그 의미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성 보나벤투라가 “하느님 안으로 들어가는 여정”에서 말한 것처럼 어떻게 부분들 속에 숨어계신 하느님을 찾고 어떻게 모든 곳에 찍혀있는 그분의 발자국을 알아볼 것인지, 그 방법을 배우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내어주시는 사랑에 힘입어 그분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에서 나오는 감사와 그에 대한 응답으로 그분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말씀에 굴복하고 철저하게 도구적 존재로 살아가면서 무상으로 주신 선물을 누리고, 관계 안에서 발견한 누군가의 필요성에 자신을 내어주는 거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약하면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나는 사랑받고 있으며 그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나를 내어주는 거기에 방법이 있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여전히 바쁜 세상을 살면서 고마워하고, 존중하고, 소유를 탐내지 않고, 단순한 기쁨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프란치스칸 영성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믿음으로 하느님을 만나 올바른 관계를 얻으려 한다면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기 위해서 하늘까지 올라갈 필요는 없다.”라고 하십니다. (로마 10,6) 하느님께서 “말씀은 네 바로 곁에 있고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 (로마 10,8) 바오로 사도는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육화의 신비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간격을 완전히 극복하셨음을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이미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그분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이들이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끝없이 오르려고 합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하느님을 만나려면 초월이 아니라 심연에서 만나야 합니다. 물질로 된 인간의 몸에 들어오신 신성으로 말미암아 우리 곁에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내 마음의 심연에서 시작하여 너와 창조물과의 관계 안에서 발견되는 하느님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육화의 신비는 인간과 모든 물질세계 안에 하느님의 자리를 다시 설정하도록 돕습니다. 하느님 자리는 하늘 위가 아니라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 높은 보좌에서 다스리시는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아래로 내려오신 하느님을 모릅니다. 그들은 수동적이고 의존적이며 공격적인 싸움을 그치지 않습니다. 인간 역사에서 전쟁은 대부분 종교전쟁이었다는 사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작은형제들의 삶은 그 자체로 복음적 삶을 지향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계시되고, 우리와 함께 사는 형제자매들이나 우리가 섬기는 사람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 영역에로 들어가야 합니다. 매일의 사건들과 모든 피조물을 통해서 계시되는 하느님의 목소리와도 관계를 맺는 영역에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말씀을 받아들인 이들은 일상적인 삶을 통하여 지속적인 관상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을 사는 프란치스칸들이 신심 위주로 사는 이들에게 복음을 회복하도록 돕는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육화의 신비는 자기 안에서 경험할 수 있는 신비입니다. 복음의 말씀에서 잉태된 말씀으로, 잉태된 말씀에서 관계 안에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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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의 구름을 뚫고 ( 삼의일체 하느님의 선에 참여케 하는 존재의 일의성)
http://www.ofmkorea.org/ofmkfb/560046
이마르첼리노M 2024.08.01 04:49
무지의 구름을 뚫고 (삼위일체 하느님의 선에 참여케 하는 존재의 일의성)
둔스스코투스가 말한 “존재의 일의성”은 “한 목소리”를 뜻한다고 했습니다. 하느님을 말할 때, 천사들을 말할 때, 인간들을 말할 때, 동물들을 말할 때, 물고기를 말할 때, 땅을 말할 때, 그것은 존재라는 단어를 한 목소리, 하나의 의미로 쓰는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것들 모두가 다양한 방식으로 같은 존재에 동참한다는 뜻이며 존재는 하나다는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에페소서는 이 같은 사실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며 성령도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셔서 안겨주시는 희망도 하나입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고 세례도 하나이며 만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꿰뚫어 계시며 만물 안에 계십니다.” (에페 4,4-6)
토마스아퀴나스가 “존재의 유비”(類比)에 대해 말할 때, 그 말이 뜻하는 것은 하느님만이 순수 존재이시고 나머지 창조된 모든 것은 하나의 유비 또는 은유로 동참한다는 것입니다. 둔스스코투스의 “존재의 일의성”과는 달리 창조된 피조물 안에 당신을 숨기시는 하느님의 숨결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가톨릭 전통 안에는 존재에 대한 해석이 주로 토마스아퀴나스의 신학적 견해를 따름으로써 교리적이고 사목적인 태도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비추어 볼 때 믿음에 대한 진리로 받아들이기에는 한계를 느낍니다.
존재의 유비에서 발생하는 신학적 논리는 우리와 함께 가까이 계시는 분이 아니라 힘으로 통치하시는 이미지를 줍니다. 우리는 벌 받지 않기 위해서나 상을 받기 위해서 애써야 하며 늘 해결해야 할 숙제들이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죄책감에 눌려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프란치스코가 세상을 보는 눈과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려는 그의 믿음은 이분법적이 아니라 통합적인 사고방식으로 이끌어 줍니다. “존재는 하나다”는 일의성은 창조된 모든 존재가 나누임이 없는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기쁨을 줍니다.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가 내어주는 자유이며, 내어주는 자유는 인과응보의 틀에 묶여 사는 나로부터 내가 해방되는 기쁨으로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존재의 유비”와 “존재의 일의성”은 하느님을 알고 인간을 아는 데 매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칸으로 살아가는 나로서는 프란치스코로부터 보나벤투라와 둔스스코투스에 이르는 신학적 기반을 내 삶의 기초로 삼고 있습니다. 복음 안에서 어떤 믿음으로, 어떤 앎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스스로 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육화를 예수님과 모든 창조물 안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며, 프란치스칸 관상의 출발점이자 도착점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 곧 하나의 기원에서 나온 존재로 살아가는 프란치스칸은 만물 안에서 동일한 형제성과 평등성을 육화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배웁니다.
개인적 죄의식으로부터 해방을 믿음 안에서 누리는 이들은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가 하느님의 무상성과 보편적 사랑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자신을 내어주시는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을 고마워하고, 형제적 평등성 안에서 상호 존중하면서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을 내 것으로 소유하지 않고, 받은 사랑에 대해 응답하는 마음으로 단순한 기쁨 속에서 자신을 내어주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육을 선택하신 영이시라는 놀라운 신비를 사람이 되신 예수님의 인간성 안에서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당신을 내어주실 때 육(肉)으로 된 영(靈)이든지 영(靈)으로 된 육(肉)이든지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언제나 육화에 있으며, 하느님의 영은 물질세계 안에서 발견되고, 인간의 의식은 보고 만지고 느껴야 하는 물질에 있기 때문입니다. 순수한 영만 있는 것도 순수한 육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온전한 신성과 온전한 인간성이 함께 있을 때 하느님의 현존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물질로 되기를 선택하신 그리스도의 신비는 물질과 영, 둘 중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도 없는 것처럼 알 수 없는 신비로 존재하십니다. 나는 생명의 주인께서 몸과 영혼이 온전하면서 자유로운 합일을 원하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가 우월하거나 하나가 저급하지 않고 동등함을 유지 할 때 사랑하기 쉽고, 몸과 영혼이 하나의 인격으로 통합될 때, 내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비는 무지의 구름을 뚫고 빛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습니다.”(마태11,27) 사람이 되신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발견하는 사람은 영이 육을 통해서 왔고 육이 영의 활동하는 거처라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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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갈망이 꽃피는 땅
http://www.ofmkorea.org/ofmkfb/560371
이마르첼리노M 2024.08.03 16:43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갈망이 꽃피는 땅
그리스도의 신비 가운데 가장 위대한 신비는 육화의 신비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육을 선택하셨기에 볼 수 있는 물질세계에서 그분을 발견하고 만나고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말씀이 사람의 육신으로 되었기에 하느님을 지금 여기서 오감으로 경험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어느 한순간 육화가 있으면 다른 곳에는 왜 없겠습니까? 온 우주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육화된 말씀을 경험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중요해 보이지 않는 작은 것들 안에 당신을 감추십니다. 그래서 오직 겸손하고 정직한 사람만이 그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연 생태계의 살아있는 무수한 개체 안에서 발견하는 육화의 신비는 하느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우심이 진리로 표현된 말씀으로 인식합니다.
우리 가운데 아무도 생각하지 않은 곳에서 발견하는 하느님의 현존은 특별한 장소와 때에 국한되어 있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의 하찮고 평범한 영혼 안에서 하느님을 알아봅니다.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갈망이 있는 곳이라면 또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갈망이 있는 곳이라면, 때와 장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기도와 자선과 단식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더라도 그분은 드러나지 않는 곳과 숨어서 행하라고 하십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그분께서 다 알아보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말씀의 육화가 나에게서도 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내 마음에 간직된 말씀이 행위로 드러나는 거기에 육화의 현장이 있고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무상의 선물을 받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아이처럼 기쁨에 차 있게 됩니다. 내어주시는 사랑을 받아 나를 내어주는 거기에 육화의 진실이 숨어있습니다. 예기치 않은 곳에서 하느님의 신성한 현존을 자유로이, 그리고 과감하게 확인할 수 있는 땅, 하느님의 자비와 선이 흘러가는 관계에서 영의 현존을 일단 한 번 경험하면 다른 곳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커다란 간격이 극복되는 거기에 영의 현존이 있기 때문입니다.
육화가 말해주는 또 하나의 신비는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는 질문에 영적인 존재로 되어가는 것이라기보다 진실로 더욱더 인간존재로 되어가려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원한 신성이 물질인 인성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계시는 우리가 이미 영적인 존재라고 말하고 있고, 다만 아직 그걸 모르고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인간 실존의 진실을 보면 매음과 강간, 살인, 강도질, 등 수많은 모순과 갈등으로 차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 실존의 현상 안에서도 순수한 인간존재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하느님의 창조에 부합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온갖 피조물은 저마다 창조주의 목적에 따라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면서 인간만이 창조주의 목적을 벗어나 자기 뜻대로 산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다른 피조물을 보아서라도 정신 차리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영적인 것과 영적이지 않은 것 사이에 슬프게도 이분법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되신 예수님의 인성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본질적으로 영적인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예수의 인성 안에 숨겨놓은 신성으로 인하여 육화의 진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동등성을 포기하고 인간과 동등해 지기 위하여 육을 선택하셨기 때문이며, 한없이 자신을 낮추시고 무상으로 내어주시는 하느님의 가난하심과 겸손하심이 육화의 진실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일상 안에서 스승이요 연인이며 친구로 만나기 전에 너무나 성급히 하느님으로 모신 게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함께 계심을 알아보는 때는 과거도 미래도 아닙니다. 바로 오늘이며 지금입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너’와 피조물 안에 육화의 신비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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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안에서 사는 법을 배우는 사람만이 자기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http://www.ofmkorea.org/ofmkfb/560487
이마르첼리노M 2024.08.07 00:35
하느님 안에서 사는 법을 배우는 사람만이 자기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인간의 죄가 아니라 인간의 고통이었습니다. 이러한 고통에 직면하여 살아가는 우리는 저마다 중독자들입니다. 이러한 중독을 성경 전통에서는 죄라고 부르고, 중세 그리스도교에서는 정욕 또는 집착이라고 불렀으며 현대에서는 중독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물질적 중독은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중독이지만 실제로 우리가 중독되어 있는 건 습관적 행동, 우리의 사고방식, 현실을 살아가는 생활방식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중독증상을 알지 못하는 건 항상 그럴듯한 무엇으로 위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질문 하셨듯이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더냐?”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더러운 영에게 “이름이 무엇이냐?”하고 물어야 합니다. 포장을 벗겨야 깨끗하고 정직한 마음으로 하느님과 나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나를 아는 앎이 우리 삶을 바꿔놓게 하고 변화로 나아가게 합니다.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려면 찾아 나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누군가가 들려준 이야기만을 믿고 살아왔기에 스스로 찾지 않는다면 여전히 중독된 상태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찾아 나선다는 말은 우리 안에 심어놓은 하느님께 대한 원초적 갈망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 뜻을 따르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실제로 진실한 하느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선택하려고 하면 깊이 바라보고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 안에는 생각과 정신이 있습니다. 생각을 살피면 그것이 말이 되고, 말을 살피면 행동이 되고, 행동을 살피면 버릇이 보이고 버릇을 살피면 성격이 드러납니다. 성격을 살피면 그것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살피는 이러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지만 “하느님을 아는 지고한 지식” 때문에 지금까지 철저하게 바리사이의 삶을 살아왔던 바오로는 이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겨 쓰레기로 버렸습니다. 알기 위해서는 알고 있다고 여기던 것들을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알고 있다고 여기던 것들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잘 보이기 위해 만든 포장된 위선과 거짓말, 합리화와 변명들이 위장된 악입니다.
인과응보의 틀이 만든 선은 대부분 위장된 선으로 보입니다. 하느님까지도 그러한 틀에 넣어 생각하기에 하느님의 이름으로 저지르는 악이 종교전쟁이라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전부(全部)가 아니면 전무(全無)로, 흑(黑)이 아니면 백(白)으로 내 편이 아니면 적으로 간주하려는 이러한 생각으로 참된 개혁을 하고자 한다면 그 개혁은 매우 위험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참된 개혁은 이전 것들을 모두 버리고 새것으로 채우는 것으로는 이룰 수 없습니다. 이전 시대, 이전의 교회가 모두 틀렸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결코 그런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프란치스코는 중세교회의 혼돈 속에서도 교회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교회 안에 머물면서 교회에 새바람을 일으켰습니다. 정신적인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숙한 경험과 지혜로 후반부 인생을 설계할 때 반드시 이전의 전통과 법과 경계를 모조리 파괴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개혁과 혁명은 역효과를 내어 다시 이전의 전반부 인생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아무것도 바꿔놓지 못한 채 가짜 개혁과 실패한 혁명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이분법적이고 인과응보의 사고방식과 틀에 묶여 마침내 자기가 속한 집단에도 등을 돌리게 됩니다. 미워하는 마음으로는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실망스러워하면서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각자가 자기 몫을 살도록 허용하면서 나는 내 몫을 찾아 살아야 합니다. 선을 행하는 일은 악조건에서 일어날 때가 많습니다. 예수께서는 적대자들의 위선을 고발하고 논쟁을 벌였어도 싸우거나 헤치지는 않으셨습니다. 성프란치스코 역시 다른 사람을 단죄하고 미워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을 살피라고 하셨습니다. 화를 내거나 흥분과 분노로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면서 누군가를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사는 법을 배운 사람은 허용과 용서를 분별할 줄 압니다. 어느 경계나 울타리가 유지해야 할 가치가 있고 어느 것이 양보할 수 있는가를 압니다. 비록 그것 때문에 잠을 설치고 눈물로 베개를 적시는 갈등이라 해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관점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그것이 말씀에 굴복하는 길이며 순종의 덕을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안에서가 아니면 참된 나를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내가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고 하느님께서 나를 돌보고 계신다는 확신이 없다면 안전한 공간이 없습니다. 모든 관계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을 통해서,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게 될 때만 너는 더 이상 물리쳐야 할 적이 아닙니다. 자기가 속한 집단의 구성원들이 이상적인 집단을 만들기 위해 배척과 추방과 징벌을 한다면 노력과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게 할 뿐이며 사랑과 일치라는 임무에서 우리를 멀어지게 할 뿐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바라시는 일이 아닙니다. 아무도 하느님의 무상성과 보편성에서 제외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객관화하는 능력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능력은 믿음으로 드러나는 태도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말씀에 굴복하고 무상으로 주시는 선물을 받아 들고 나를 내어주면서 단순하고 기쁘게 살아가는 이들이 하느님 나라의 현재를 사는 자기중독에서 해방된 이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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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생태계 안에서 바라보는 관상의 생태계
http://www.ofmkorea.org/ofmkfb/560585
이마르첼리노M 2024.08.10 05:41
자연 생태계 안에서 바라보는 관상의 생태계
창조된 자연 생태계 안에서 영적 생태계를 바라보는 사람은 영이 물질세계로 들어온 육화의 신비 안에서 자신을 봅니다. 자연 생태계가 긴밀한 연결을 통해 상호 간에 내어주면서 생명을 유지하듯이 내어주는 죽음이 다른 존재에게 생명을 주고 자신도 다른 존재로부터 받은 선물로 생명을 얻어 살아갑니다.
창조의 신비는 태초부터 말씀으로 시작된 신비였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로부터 시작된 영적 생태계 안에서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된 자연 생태계를 바라보고, 자연 생태계의 빠짐없이 연결된 세상 안에서 나를 바라보고 산다면 우리는 저마다 자기 몫을 하는 것으로 날마다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한테 붙잡혀서 다른 모든 것들과 더불어 한 우주 안에 있음을 보는 것입니다. 만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모두가 하느님 안에 함께 속해있음을 깨닫게 되면서 영적 생태계 안에 하나의 작은 존재로 살아가는 나를 바라보게 된다면 내가 다른 존재들보다 더 우월하다는 생각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됩니다.
영성은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관한 것입니다. 업적과 공적을 많이 쌓아 그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는 건 종교심이 만든 인과응보에서 나온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업적과 공로에 대한 보상으로 상을 주고 벌을 내리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바르게 보면 나머지는 저절로 따라오고 길은 넓어집니다. 큰 생명이 우리 안에 있고 나는 생명의 강에서 함께 흐르고 있습니다. 나는 살아있는 생명에 “예”라고 말하는 법을 조금씩 배우면서 살아가는 중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린아이처럼 되라고 하십니다. 다른 말로 초심자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린아이의 머리와 가슴으로 그분을 따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세월과 함께 우리는 뒤틀리고 상처받고 실망하면서 처음 시작 때의 마음 앞에 수많은 장벽을 쌓아왔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새롭게 볼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상처받기 쉬운 어린아이로 돌아가 “난 아무것도 모른다.”라고 말하기란 쉬운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안다고 하는 것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 세계의 전체 안에서 나를 보지 않는다면 내가 창조의 중심에 있고 나를 위해 창조하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만물을 지배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항상 너는 사랑의 대상이 아닌 지배의 대상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느님과 너와 피조물은 이용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되어 파국으로 내달리는 인간 실존의 문제가 생생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가 하느님 나라를 배우는 현장입니다.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나를 내어줄 것인가를 배우는 기도와 관상의 학교입니다. 관상의 비결은 지금을 사는 법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삶의 한순간 순간을 성사(聖事)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지금 여기가 너무나 거룩한 장소이며 지금이라는 순간이 거룩한 때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너와 창조된 모든 만물 안에서 나를 바라보고, 자연 생태계 안에서 영적 생태계의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 관상의 출발점이자 도착점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지금을 보는 눈과, 지금을 맛보고 지금의 향을 들이쉬며, 지금의 소리를 듣고, 지금을 느끼는 감각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경험하지 않는다면 하느님과 함께 있는 자유 안에서 누리는 미래는 보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삶을 제대로 산다는 것은 바로 지금을 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꾸짖지 않으시는 하느님이 늘 순간에 존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경험하고 맛보고 즐길 수 있을 때 ‘다음’은 기대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음의 순간에도 맛과 즐거움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순간순간을 충분히 진짜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맛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만족하는 법을 잃어버렸습니다. 자연 생태계는 언제나 지금을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은 지금 여기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사는 나라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영적인 삶은 자연과 더불어 풍요롭습니다. 자연 생태계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하는 영적인 세계가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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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밭에서 발견한 아버지의 품 (마태 13,44)
http://www.ofmkorea.org/ofmkfb/560966
이마르첼리노M 2024.08.16 17:32
관계의 밭에서 발견한 아버지의 품 (마태 13,44)
누군가를 배제함으로써 스스로를 규정하려는 교회는 잘못된 교회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을 단죄하시는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자신들만이 의인이며 거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진지하게 심판하시는 유일한 집단은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은 하느님 은총 속에 자기들만 포함시키고 남들은 배제하는 인간들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그리스도로 존재하라는 유일한 사명을 회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교로 존재한다는 것은,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공동체이지 선한 사람만 모인 공동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죄인들의 공동체가 교회의 진정한 모습이며 쫓겨난 이들을 교회에 받아들일 때 제자리로 돌아간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비는 교회의 신비이며 교회의 신비는 신비롭고 우주적이며 거대하고 성스러운 이야기에 우리의 삶을 정렬시킵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의 신비로운 차원을 상실할 때 우리는 감싼 대용품으로 이래저래 까다로운 도덕군자가 됩니다. 그래서 자기가 남들보다 영적으로 우월한 자리에 있다는 그릇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인간의 교만과 불의와 위선과 무지, 그리고 권력과 명예와 재물에 관하여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내면의 변화를 위한 것이었지만 많은 이들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윤리와 도덕에 집중하였습니다. 율법과 도덕적 성취로 의롭게 된 이들은 남을 심판하고 화를 냅니다. 그래서 자신의 육신은 수치심과 열등감을 지니고 다녀야 하는 물건처럼 여겼습니다.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고 보속이라는 이름으로 희생을 강요당했습니다.
의인 중독증에 걸린 이들은 하느님 나라가 의인들만 모인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율법과 도덕성으로 자신을 의인으로 규정짓고 있기에 잃었던 양의 비유를 들으면 자신은 아흔아홉 마리의 양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 나라와 교회는 죄인들의 공동체로써 현재와 미래의 모습으로 현존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하느님의 무상성과 보편성에 의존하여 살아갑니다. 용서하시는 아버지의 자비와 선하심이 인간의 죄보다 훨씬 더 큽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으로부터 공존의 지혜를 배우는 이들은 실패와 용서를 통해 성장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육체에 근거한 개인적 죄와 사회적 죄를 동등하게 중요시할 때 권위를 되찾을 것입니다. 인간관계의 사회성 앞에 홀로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업적과 공로로 하느님에게서 상을 받거나 특별대우를 받을 것이라고 믿는 이들은 하느님 앞에서는 어떤 인간도 특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거처를 무죄한 인간의 상태에서만 찾으려 했기에 하느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좋은 것과 선한 것, 나쁜 것과 악한 것의 참된 본성과 위장된 본성을 분별할 수 있을 때, 세상 모든 것이 부서지고 헐리고 나약하고 가난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하느님이 머무시는 거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위장된 선을 위선이라고 부릅니다. 위선자는 자기밖에 모르기에 사람을 존중할 줄 모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무상성과 보편성 안에서 배우는 진리는 불완전한 것들을 사랑하는 자유로 선을 창조하는 능력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내어드린 나의 자유를 도구 삼아 불완전한 관계를 회복하도록 도우십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사랑하기 위해서 그것이 완전해지기를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네가 변화되기를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그랬다가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장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변화는 나의 내면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나의 변화가 관계의 변화로, 관계의 변화가 사회적 변화로, 사회적 변화가 공존과 번영의 씨앗이 됩니다. 불완전한 것을 사랑하는 능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 배우는 진리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마지막 여행의 완전한 선물은 우리가 가야 할 집에 이미 와 있음을 발견하고 깨닫는 일입니다. 자기의 몸과 자기의 삶으로, 또한 자기의 마음으로 집에 이미 와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어디로 이끄시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최종 목적지로 가야 할 집은 더 이상 지리상의 어느 곳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속해 있는 곳, 모든 것이 담길 수 있는 곳, 모든 것이 선물인 그곳이 집이기 때문이며, 자신의 실패와 과오로부터 배우고 성장하는 바로 여기가 집이기 때문입니다. 그 집은 밭에 묻혀있는 보물입니다.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삽니다. 보물을 찾으러 길을 떠난 사람과 보물을 찾다가 발견한 사람, 그리고 이미 보물을 찾은 사람은 삶의 내용이 전혀 다릅니다. 말씀에 굴복하고, 주어진 선물을 누리고, 관계 안에서 발견한 너의 필요에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면서 깊은 만족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집은 그렇게 관계 안에 있습니다. 관계의 밭에서 발견한 아버지의 품은 최종적으로 우리가 머물러야 할 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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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떨어져 울게 하는 인간의 자만심
http://www.ofmkorea.org/ofmkfb/561296
이마르첼리노M 2024.08.28 09:33
혼자 떨어져 울게 하는 인간의 자만심
예수께서 십자가에 당신을 기꺼이 바치신 것은 온갖 나약하고 모자라는 것들을 받아들이신 그분의 선택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숨겨진 자비를 피조물과 함께, 피조물 안에서, 피조물을 통하여 발견하고 우리를 돌보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지금 여기서 누리고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신성한 형제가 되기를 원하셨고 당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침으로써 모두가 속하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관계 속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창세 이전에 우리를 뽑으신”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천지 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를 뽑아주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는 자가 되게 하셔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 (에페 1,4)
하느님이 당신의 피조물과 맺으시는 지속적이고 보편적인 이러한 관계를 하느님과 인간과 맺으시는 계약이라고 부릅니다. 하느님께서 피조물과 이러한 계약을 맺으신다면 인간끼리의 관계도 하느님께서 당신을 내어주는 방식을 배워 상호 간에 내어주는 사랑으로 선이 흐르게 함으로써 하느님의 선에 참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와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의 지혜이십니다. 그분 덕택으로 우리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고, 해방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다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1고린 1,30)
예수님께서는 모든 때와 모든 장소에서 모든 피조물과 함께 하십니다. 그분의 함께 계심에서 혼자 떨어져 있게 하는 인간의 자만심이 외로움과 우울하게 만들고 자기중심적인 배타적인 관계를 만듭니다. 이것이 인간이 저지르는 악과 죄의 현상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넘어 하느님이 여기 또는 저기에 있다는 관념을 모두 초월하는 신성한 현존의 실재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이나 딸의 자격을 스스로 얻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느님의 현존에 눈을 뜨고 우주적 신비를 눈치채는 것이 전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노력이나 업적과 공로에 대한 보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자신의 힘으로 하느님을 움직이게 할 수 있으리라는 집념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들이 저지르는 악습과 죄의 현장에는 자만심의 감옥 속에서 반복적으로 업적과 공로를 쌓는 숙제를 하기 위해 귀한 생명의 에너지를 낭비하는 모습을 봅니다. 우리는 피조물이라는 이유로 어떠한 인간도 주거나 빼앗을 수 없는 타고난 존엄성이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성 보나벤투라는 “창조된 피조물에는 하느님의 신성한 지문이 찍혀 있다.”라고 말합니다. 인간에게 타고난 존엄성은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우리는 종파를 넘어 똑같이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느님의 DNA는 동일한 것입니다. 세계 안에 있는 여러 종교의 현상을 보면 만물을 지으신 한 분 하느님, 창조하신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인과응보의 틀에 갇힌 인간의 과도한 탐욕과 이기심이 만들어내는 현상일 뿐입니다. 창조된 만물에서는 창조주가 하나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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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몸에 저항하는 사람들
http://www.ofmkorea.org/ofmkfb/561614
이마르첼리노M 2024.09.08 08:27
그리스도의 몸에 저항하는 사람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1고린 3,23) 바오로 사도의 이 말은 그리스도인에게는 너무나 좋아서 믿기 어려운 진실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전부이시며 모든 이 안에 계십니다. (골로 3,11)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을 알아듣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따로 떨어져 분리된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보다 우월한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 하고, 부서지기 쉬운 나약함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다른 무엇과 합일되는 것에 저항하는 모습을 봅니다. 따로 떨어져 분리된 존재는 관계 맺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외롭고 우울합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에 딸린 지체는 많지만 그 모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그러합니다. (1고린 12,12) 새 인간은 자기 창조주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된 지식을 가지게 됩니다. (골로 3,10) 믿음을 지닌 사람은 만물 안에 전부로서 현존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봅니다. 하느님께서 우주를 바라보시는 관점으로 모든 관계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현존하십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벗어난 우주의 보편적 현존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여기와 저기에 아울러 현존 하시고, 닫힌 문을 통과하고,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고, 빛처럼 희고, 어디에나 있으면서도 아무 데도 없는 이러한 부활 이야기가 예수님의 몸에 대해 말해주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분의 현존은 모든 피조물 안에 있기에 어떤 한가지 모습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그리스도 몸의 지체인 우리는 그분을 떠나 살 수 없으며 따로 떨어져 분리된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생명의 에너지를 공급받을 유일한 대상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 안에 가득 차 있으면서 당신을 받아들인 마리아처럼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에게만 부활하신 당신 몸을 보여주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골로사이와 에페소에 보낸 편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를 알려줍니다. 예수와 그리스도는 서로 다른 믿음의 대상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한 사람을 공경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몸인 모든 피조물을 받아들이고 공경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의 하나인 나는 그리스도 몸의 일부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분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전부 안에서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전부 안에서 나를 보는 사람은 절대로 따로 떨어져 분리된 존재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알파와 오메가 이시며 처음이요 마지막이며, 시작이요 끝입니다. (묵시 22,13) 이는 인류 역사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어떻게,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예수님은 죽으셨고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 믿음에는 죽음이 있습니다. 관계의 현장에는 언제나 죽음과 부활이 함께 있습니다. 내려가고, 내려놓고, 허용하고 놓아주는 거기에 부활하신 주님의 영께서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진리이시고 예수님은 이 진리를 시간 안에서 인격화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사람은 말씀이 사람이 되신 육화와 그분의 육화를 삶으로 드러내는 육화의 도구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영께서는 세례를 받은 이들만의 하느님이 아닙니다. 전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바라보아야 나를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를 알 수 있고 그렇게 하찮은 나를 그분께서 얼마나 극진한 사랑으로 돌보고 계신지를 알기에 따로 떨어져 우월한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보여주는 믿음은 우월을 드러내는 믿음으로 전락하는 모습을 봅니다. 비교하고 증명하려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고 업적과 공로로 포장된 믿음을 거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아도취의 중독 현상이 거기에 있습니다.
무상의 선물을 받아 들고 겸손하게 자신을 내어주는 사람만이 믿음을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없이 사랑하는 법과 사람에게 자유를 주는 법이 기쁨을 주는 법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남들과 비교하고 증명하고, 탓하지 않습니다. 사랑받고 있다는 믿음이 커지면 그렇게 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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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치스코 안에서 바라보는 선을 어둡게 하는 헛된 환상
http://www.ofmkorea.org/ofmkfb/561724
이마르첼리노M 2024.09.12 05:11
성 프란치스코 안에서 바라보는 선을 어둡게 하는 헛된 환상
그릇된 환상은 어둠 속에서 피어나
선을 흐리게 하고 희망을 앗아갑니다.
빛을 가리는 그림자처럼
진실을 왜곡하여 진리를 따르는 척하다가
방황의 심연으로 끝없이 추락합니다.
하느님과 제물을 동시에 추구하는
이중 충실성의 깊은 함정 속에서
눈앞의 이익과 눈앞의 즐거움
눈앞의 편안함만을 찾다가 결국 길을 잃고 맙니다.
내면에서 울려 나오는 진실의 목소리는 점점 더 멀어지고
방황의 깊은 수렁 속에서 캄캄한 어둠만 남아
진실을 분간할 수 없습니다.
그릇된 빛의 조각들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사막의 신기루처럼 손에 닿지 않는 허상,
거짓된 약속과 허황된 꿈들에 사로잡혀 자신의 왕국을 만들 때
과도한 탐욕과 이기심만이 남아
단절의 견고한 장벽은 갈수록 두터워집니다.
그릇된 환상은 사로잡히게 하고 노예로 만들어 마침내 파멸시킵니다.
이것이 우상이 저지르는 일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말합니다.
내적 가난
물질적 소유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의 가난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고, 진정한 자유를 찾는 데 도움이 됩니다.
겸손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며, 하느님 앞에서 겸손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겸손은 진실을 바라보는 눈을 열어줍니다.
형제애
관계 안에서 하느님을 찾고 모든 사람을 형제자매로 여기며, 내어주는 사랑을 배워 내어주는 사랑으로 응답할 때 관계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진실한 신앙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굴복하고 그분을 닮고 따르며, 성령의 거룩한 활동을 마음에 간직하는 것이 어둠 속에서도 빛을 찾는 데 도움이 됩니다.
기도와 관상
규칙적인 기도와 관상을 통해 하느님으로부터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있는가? 를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사랑받고 있음에 응답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고, 내면의 평화를 찾게 되면 마음의 어둠을 밝히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피조물과의 조화
피조물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창조물을 존중하며,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그분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는 영적인 성장을 돕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빛은 존재합니다. 그 빛을 믿고 진실을 찾게 되면 마음의 눈이 뜨이고 희망의 빛을 따라 어둠을 헤쳐 나갈 것입니다. 선을 어둡게 하는 그릇된 환상에서 벗어나 결국 환상은 사라지고 진실의 빛이 세상을 밝힐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내어주는 사랑을 배워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을 내어주면서 삼위일체 하느님의 선에 참여하는 깊은 만족과 기쁨 가득 찬 얼굴로 관계를 비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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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과 악마의 실체
http://www.ofmkorea.org/ofmkfb/561757
이마르첼리노M 2024.09.13 10:18
악과 악마의 실체
나는 내 인생의 여러 변곡점에서 공존을 헤치고 자존감을 뺏고 평화를 짓밟는 악의 실체에 대해 생각해 왔습니다. 과거의 역사 안에서 인류가 겪은 참혹한 실상이 인간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주었는가를 알기 때문에 악과 그 악이 저지르는 실체와 직면해 있는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프란치스코의 모범과 가르침을 본받아 어떻게 선으로 악에 저항할 수 있는가를 배우려 합니다.
집단적 이기주의와 자국 우선주의가 만든 조직적 악마인 세계의 실체, 개인의 악행과 악습, 나쁜 선택이 만들어 내는 육(肉)의 실체, 그 꼭대기에 앉아 공익과 공동선이라는 명분으로 통치하는 위선의 실체가 전쟁을 일으키고 시장원리를 조작하고 형벌 제도로 반대자들을 고문하고 처형합니다. 또한 부당한 법률과 조세정책으로 개인의 재산을 빼앗고 있습니다. 이는 너무나 당연해서 의심의 여지가 없는 모습으로 체제의 꼴을 갖추고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헤치고 있습니다.
사탄은 언제 어디서나 너무나 크고 너무 필요해서 잘못될 수 없는 무엇으로 자기를 나타냅니다. 창세기의 뱀으로부터 시작해서 차원 높은 악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좋고, 매력적이고, 항상 내 편에서 덕스럽게까지 겉모습을 위장합니다. 인과응보의 틀로 도덕적 성취를 내세워 불의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류 역사 안에서 살펴보면 사람들은 개인의 죄와 악행에만 주목해 왔습니다. 60년대 산업화가 시작될 때까지 삶의 밑바닥에 깔린 악의 기반들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았고 거대한 사회 제도에 대한 강렬한 비판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이념의 대립과 폭력적인 사회 제도와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벌이는 탐욕적이고 집단 이기적인 형태에 대해 비판하기보다는 개인들이 비난당하고 형벌을 받아왔다는 사실을 숨길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산업화라는 명분으로 저지른 착취와 인권유린은 폭력으로 개인의 자유를 빼앗고 저항하는 이들을 가두고 고문하면서 내란 죄라는 명분으로 사형시켰습니다. 이러한 악에 대해 수많은 젊은 노동자들과 정의를 외치던 이들은 피를 흘려야 했고 감옥에 갇혀야 했습니다. 이와 함께 사회 변두리로 쫓겨 난 이들은 처절한 삶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우리는 독재를 정당화하는 법률이 만들어지고 합법적으로 살인을 정당화하고 폭력으로 통치했던 역사를 가슴에 품고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우리가 무엇에 맞서야 하는지, 왜 악이 저토록 인간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지 악의 실체에 직면하여 지금도 진행 중인 전쟁과 폭력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지, 예언자의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첫 번째 차원의 악은 세계 차원의 악입니다. 그 악을 인식하지 못하면 두 번째 차원의 악마는 피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세계의 조직은 가장 감추어져 있고, 위장되어 있고 부정되면서도 근본 바탕을 이루는 악의 현주소입니다. 그것은 국가들이 생존하기 위하여 만든 눈앞의 이익과 즐거움과 편안함만을 추구하는 문화와 그러한 집단들이 만든 제도이기 때문에 의심 없이 받아들인 악의 실체입니다. 현존하는 핵전쟁의 위협과 과도한 군비경쟁은 자연을 황폐화하고 식량과 물을 고갈시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서민과 변두리에 몰린 이들은 굶어 죽어도 대량 살상을 위한 첨단무기를 소유하기 위해 막대한 재화를 낭비합니다. 집단이기주의는 개인 차원의 이기주의에만 머물 때 결코 악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폭력을 정당화하는 법을 정하고 거기에 힘을 실어주는 집단이기주의는 전쟁하는 명분을 만들고, 독점과 소유로 재물을 착취하기 위한 법을 제정합니다. 여기서 태어난 독재정권과 형벌 제도와 수단들은 악마를 대신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것을 집단이기주의라고 하지 않고 불가피한 무엇이라고 말합니다.
일단 악마의 법이 제정되고 나면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대가도 치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북한의 독재가 공산주의 체제로 유지되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이스라엘이 중동에서 여러 나라들과 전쟁하고, 지구 촌 곳곳에서 드러난 폭력과 전쟁 속에서 미국은 세계 경찰 노릇을 하면서 개발도상국과 가난한 나라를 이용하여 자국의 이익과 정권을 유지하려고 강제로 뺏고 죽입니다. 이는 공존을 위한 도덕적 손실은 아랑곳 하지 않는 데서 드러난 악의 실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못 박는 사람에게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소서, 저들은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모릅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또한 우리가 잘한다고 하는 일이 악을 저지르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은 결코 악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정의롭고 정당한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두 번째 차원의 악은 개인적인 죄와 실수와 잘못들인 육(肉)이 저지르는 악입니다. 인간의 과도한 탐욕이 만든 악의 실체입니다. 우리가 개인을 비난하고 벌을 내리고 죄책감을 느끼게 하면서도 누구로부터도 비판받지 않은 채 숨겨진 사회적 합의 들을 비판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폭력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고 말 것입니다. 중세교회가 체제를 유지하고 번영이라는 명분으로 저지른 허영과 탐욕의 실체는 너무나 커서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해치는 이들을 단죄하고 비리와 폭력을 눈감아주면서 젊은 청소년들에게 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거나 허영을 삼가고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지 말라고 한다면, 또 교직자들의 부끄러운 진실을 감추고 예수님의 말씀을 전한다면, 그것은 뻔한 헛소리에 불과할 것이고 “들보와 티”에 대한 위선의 실체일 것입니다.
예언자들이 먼저 관심을 보인 것은 제도화된 범죄연대와 조직적인 범죄였고 그 다음으로 개인의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예수님은 예언자 가운데 특별한 예언자였습니다. 그분은 제도화된 악에 대하여 거침없이 말했습니다. 감추어진 악은 드러내야 하고. 악은 싹부터 잘라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무 늦습니다. 집단이기주의와 개인이 저지르는 살인, 도둑질, 강도, 간음, 탐욕과 거짓말 등이 제도 안에서 정당화될 때 질서는 파괴되고 인간의 자유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합니다. 어떤 조직이든 “내게 엎드려 절하라”고 한다면 그것이 교회든 국가든 아니면 시장경제이든 그 조직은 언제 어디서나 분명한 악마입니다.
악마의 술책은 속임수 위장입니다. 매우 도덕적으로 보이는 게 악마의 일입니다. 변장한 얼굴로 사람을 속입니다. 자신을 먹이고 지켜주거나 자기들의 우월감을 부추겨주는 사람은 절대로 악마일 수 없다고 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외형의 호화로운 장례식처럼, 회칠한 무덤처럼 그 안에는 부패한 악이 선으로 포장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형식적인 법과 제도에 충성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숭배를 강요할 때마다 강하게 비판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을 비판하신 것도 그들 안에 위선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악은 선으로 위장하는 능력이 탁월합니다. 우리는 영을 식별하는 능력이 없기에 위선을 덕으로, 거룩한 일로 인식하기도 합니다. 영의 식별은 탁월한 능력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필요성에 자신을 기꺼이 그리고 겸손하게 내어주는지, 도구적 존재로 관계 안에 하느님의 선이 흐르게 하는지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드러난 태도와 행동하는 선을 보면 누구든지 알 수 있는 식별이기 때문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악은 선에 의하여 드러납니다. 어둠은 빛에 의하여 드러납니다. 무상의 선물을 받아 주님의 영을 지닌 사람은 존재 자체로 악과 어둠을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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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http://www.ofmkorea.org/ofmkfb/561816
이마르첼리노M 2024.09.15 05:41
사랑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소리가 나지 않는 사랑
소리를 내지 않는 사랑
소리가 없는 사랑
문 닫는 소리
걷는 소리
큰 소리로 떠드는 소리
비어있기에 소란합니다.
빈 깡통과 빈 수레
소리를 내고
보이려 하고
포장합니다.
설치는 소리
자랑하는 소리
높이는 소리
헐뜯는 소리
미워하는 소리
우는 소리
들판의 벼들처럼
단맛을 내는 청과처럼
곱게 물든 단풍처럼
영의 거룩한 활동처럼
신령한 악기가 되어
존재로 표현되는 기쁨
기쁨에 찬 가난
기쁨에 찬 얼굴
기쁨에 찬 겸손
부드럽고
다정하고
온유하고
겸손하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소리 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소리를 내는 것은 자기만족을 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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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暴炎)이 지나간 자리에 찾아온 가을
http://www.ofmkorea.org/ofmkfb/562043
이마르첼리노M 2024.09.25. 02:53
폭염(暴炎)이 지나간 자리에 찾아온 가을
하루 사이에 대지를 숯덩이처럼 불태우던 더위가 사라지고 성큼 가을이 찾아왔습니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지친 나무들은 이제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새로운 계절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폭염에 이미 숨을 거둔 가을 채소들, 갑자기 쏟아붓던 집중호우로 여기저기 물난리를 겪는 사람들, 여름날의 상처와 흔적은 사라지고, 자연은 다시금 평온을 되찾아 가고 있습니다.
한여름의 뜨거운 날들은 마치 인생의 고난과도 같았습니다. 그 뜨거운 열기 속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고난이 지나가고 나면, 우리는 더욱 강해지고 성숙해질 것입니다. 가을은 그런 우리에게 위로와 안식을 줍니다. 가을의 첫 바람이 불어올 때, 나는 창문을 열고 그 서늘한 공기를 맘껏 들이마셨습니다. 여름의 뜨거운 열기가 남긴 피로가 서서히 풀리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차분하고 조용한 평화가 다시 찾아왔습니다.
나뭇잎이 붉게 물들어 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 속에 담긴 지혜를 느낍니다. 가을의 서늘한 바람은 살아있는 생명에게 새로운 힘을 불어넣고, 우리는 그 속에서 다시 일어설 용기를 냅니다. 여름의 고난을 이겨낸 우리는 이제 단맛을 내는 청과처럼 내면에서 불어오는 상큼하고 신선한 바람이 되어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희망이 되는 선물을 준비했으면 좋겠습니다. 부드럽고 온유한 얼굴, 맑은 눈빛, 다정한 말씨, 환한 미소, 존재 자체로 조용한 평화를 건네고, 누군가가 말없이 다가와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그러한 품으로 남아 겸손하게 나를 내어주려는 마음으로 가을을 맞이하면 좋겠습니다.
가을이 찾아오면, 나는 이름 모를 슬픔에 젖어 있기를 잘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움과 슬픔을 뒤로 하고 새로운 희망을 품으렵니다. 폭염(暴炎)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단지 고난의 흔적만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피조물과 더불어 견디는 사랑을 배웠습니다. 가을 청과가 단맛을 내기까지 숱한 어려움을 견뎌야 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나는 밤마다 왕진 가방을 들고 여기저기 바쁘게 다니시는 아버지의 자비로운 손길을 보았습니다. 거기서 생명의 에너지를 얻어 누리는 모든 피조물의 희망을 보았습니다. 폭염(暴炎)이 지나간 자리에 찾아온 가을은,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줍니다.
사랑할수록 깊어 가는 슬픔은 지난날 가을이 남기고 간 사연들이 많아서 그럴까요? 가을은 언제나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남기고 갑니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고, 나뭇잎이 붉게 물들어 떨어지는 이 계절은, 마치 인생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합니다. 어느 늦은 가을날, 백양사를 혼자서 걸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마음을 울리고, 바람에 날리는 낙엽들이 발밑에서 사각거렸습니다. 그 순간, 나는 지난 시간의 기억들이 떠올랐습니다. 함께 걷던 그 길, 함께 나누던 이야기들, 그리고 그리움으로 남는 이들이 떠올랐습니다.
가을은 이별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나뭇잎이 떨어지듯, 우리도 언젠가는 이별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그리운 이들이 하나둘 내 시야에서 사라질 때 함께 해준 벗들에게 그래도 세상은 아름다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내 인생도 가을의 끝자락에 와 있습니다. 가을이 깊어 갈수록 삶의 깊이를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집니다. 내 인생에 나와 함께했던 고마운 이들에게 한 분 한 분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싶습니다. 나를 동반하고 부축해 주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은 그렇게 죽는지 모르게 자신을 내어주면서 죽는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가을밤, 차가운 공기 속에서 나는 별빛을 바라봅니다. 별빛 아래서 나는 그리움과 슬픔을 엮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 순간, 이 느낌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습니다. 가을은 우리에게 삶의 깊이를 더해주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게 합니다. 남은 시간이 아름다운 건 단풍의 색깔처럼 나도 그렇게 내어주는 사랑에 완전히 물들어 있을 때라는 사실에 수긍이 갑니다. 마지막 촛불이 다 탈 때까지 그렇게 촉신을 태우고 싶습니다. 말러 교향곡 아다지에토의 잔잔한 선율과 함께 가을이 깊어질수록 내 인생도 깊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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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좋아서 믿기 어려운 신비
http://www.ofmkorea.org/ofmkfb/562128
이마르첼리노M 2024.09.29. 07:12
너무 좋아서 믿기 어려운 신비
그리스도의 신비는 사랑의 신비이며 사랑의 신비는 너무 좋아서 믿기 어려운 내어주는 신비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물과 모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주셨고 지금도 여전히 내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인간 예수 안에서 육화되신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아버지로부터 내어주신 생명을 아버지께 돌려드리는 내어줌으로써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하느님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1고린 15,28)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개인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하여 알고 있으면서도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포괄적 신학은 충분히 깨닫지 못하였던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구원은 받은 것 같은데 우주 전체가 아직은 아니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인 유대인들에게 전해진 성경의 계시는 개인들이 아니라 역사 자체의 구원이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개인의 구원에만 머물렀으며 보편적 구원에는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만 알았지, 그리스도를 몰랐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를 말씀으로 육화하셨으며 육화하신 그리스도를 우리 눈으로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이 사랑으로 모든 피조물, 모든 인간의 맏아들로서 우리는 그분의 아들과 딸이 되었다고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창세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뽑아 당신 앞에서 사랑으로 거룩하고 나무랄 데 없도록 하신 것” (에페 1, 4)입니다.
그리스도는 나자렛 예수보다 더 크고, 더 먼저고, 태초부터 계신 분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심으로써 영원한 신비로 남아 계십니다.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시며 만물에 앞서 태어나신 분”(골로 1,15) 으로써 “만물은 그분을 통해서,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고” (골로 1,16) 우리를 품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천상 유산을 받은 자녀가 되었다고 말하는 바오로 사도의 그리스도 신비는 너무 좋아서 믿기 어려운 신비입니다. 하지만 믿기 어렵다고 해서 체념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의 신비는 믿기 어려운 신비지만 우리는 사랑 없이 하루도 살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비는 사랑의 신비이며 사랑의 신비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내어주시는 관계적 사랑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예수님으로부터 배웠습니다. 우리는 내어주시는 사랑의 극치를 십자가에서 보았습니다.
“하늘과 땅 위에 있는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다.” (골로 1,16) 우리는 여기에서 우주적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그분은 인간들만이 아니라 땅과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짐승들까지 창조된 모든 것을 구원하십니다. 지구라는 하나의 별 안에서 모든 사물과 모든 사람이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범주 안에 포함됩니다. 그러므로 마침내 역사는 하나로 모이고 “만물이 그분 안에 존속됩니다.” (골로 1,17)
너무 좋아서 믿기 어려운 구원의 신비는 우리 모두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희망으로 구원의 길을 갑니다. 그리스도의 보편적 구원과 무상의 은총이 우리의 믿음이며, 희망이고 내어주는 사랑의 실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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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들의 수런거림
http://www.ofmkorea.org/ofmkfb/562144
이마르첼리노M 2024.09.30 02:19
억새들의 수런거림
구월의 끝자락
바람이 불어오는 들판에
억새들이 수런거린다.
가을의 속삭임을 담아
은빛 물결이 춤을 춘다.
햇살에 반짝이는 그들의 몸짓,
자연의 노래가 되어
고요한 마음속에
잔잔한 울림을 남긴다.
억새들의 수런거림 속에
지난날의 추억이 떠오르고,
그리움과 설렘이
가슴 깊이 스며든다.
바람과 함께 흩날리는
억새들의 이야기,
그 속에서 나는
너의 이야기를 듣는다.
해 질 녘
노을에 물든 들판,
억새의 머릿결이 황금빛으로 빛나고.
바람에 살랑이는 그들의 춤사위,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가 된다.
하늘과 땅이 맞닿는 그 순간,
억새는 자연의 붓으로 그려진 그림.
그 속에 담긴 시간의 흐름,
우리의 이야기가 억새에 얽힌다.
바람에 흩날리는 그들의 속삭임,
마음 깊이 울리는 노래가 된다.
혼자 부르던 나의 노래
억새들과 더불어 합창한다.
억새의 머릿결에 스며든 황혼,
그 아름다움 속에 나는
잠시 멈춰 서서
경이로움에 고개를 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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