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지 신인문학상 당선작품
세상 끝의 집* 외 4편
강익수
그곳엔 수도승들이 있다
댕그랑 댕그랑
종소리는 이내 고요의 자세를 취한다
땅속의 은수자 풀잎은 지상으로 나와 낮게 세상을 섬기고
바위는 대지를 안고 묵언 중이다
몸의 정신으로 정착한 나무는
허공으로 길을 내는 숲속의 용맹한 수도사
종소리 울리는 집들은 죄다 나무의 모양으로
우듬지에는 십자가를 두고 있다
새 한 마리 나무 끝에 내렸다 간다
스스로 봉쇄되어
침묵은 수평으로 여정은 수직으로
정중앙의 십자가에 투신한 젊은 수도사
50여 년의 위대한 포기는 영속되어
두 발의 뿌리는 아득하고
새들의 발부리 내릴 정수리도 보인다
어떠한 고난도 포월(匍越)한 세상 끝의 집이다
숲속 봉쇄수사
나무가 되고 숲이 되었으므로
천상과의 합일을 향한 세상의 이방인이다
벙긋한 미소는 강론이 되고
고요한 묵상은 한 줄의 경전이 된다
머지않아 종소리 은은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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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에서 방송한 카르투시오 봉쇄수도원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제목
늑대의 길
늑대 한 마리 하늘을 우러러 목소리 높이자 나머지 늑대들 일제히 목소리 높였다 주먹을 내지르며 거리를 점령하였다 사냥감은 보이지 않았다 좌우가 모호한 참수리들과 씨름하다 허기에 지쳐 집으로 돌아왔다
여우를 닮아가던 마누라는 토끼의 하얀 두개골을 긁으며 저녁 식사 준비를 했다 귓속으로 굴러다니는 선구자의 말을 가족에게 들려주었다 개구리처럼 눈만 껌벅였다
곳간이 바닥을 드러낼수록 함성은 거리를 흔들어 하늘을 향한 우레 같았다 새벽이면 삐걱대는 잠자리에 뒹굴던 초원의 붉은 냄새가 빠르게 숲속으로 사라졌다
자꾸만 길어져 가는 시소의 끝자락에 앉아 엉덩이에 힘을 주지만 발은 허공을 딛고 있다 몇 번의 계절이 지났던가 불안이 불만으로 바뀔 즈음 거미가 오르내리던 곳간에 고기가 쌓이기 시작하고 맛있는 소고기까지 식탁 위에 올라왔다 몇 마리 비둘기 고기 더하면 우화등선이 부럽지 않겠다
아직 단단한 다리의 근력이 바닥을 구르기도 하였으나 만찬을 즐기는 미각과 후각의 제동에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어디든 살만한 태평성대에 늑대라고 취미가 없겠는가 일상의 일탈을 즐기면서 시간과 취미는 정비례로 토끼와 초원은 반비례로 나아갔다
가득 찬 곳간을 두고도 꼬리를 흔들며 컹컹거리는 거대한 늑대, 바위엔 음각의 늑대 발자국 선명하다
거미
허공에
한 가닥 불심으로 지은
사찰
없는 듯 있으므로
공즉시색으로 엮은
투명한 법문 같다
기다림 마저
바윗돌 같은 수행의
길
지나가던 불자
제 몸 던져 불공 올리면
출렁이는 죽비
적막한 하늘에
발우도 없는
청빈한 공양
눈 내리는 풍경
한 사람이 앞서가자 네 사람이 되고 백 사람이 되고 마침내 커다란 바람으로 나아간다 자꾸 연약해서 펑펑 까맣게 무리 짓는 것 아닌가 그럴 때 어떤 절대자도 권력도 쓰러뜨린다는 것을 눈은 알고 있었나 보다
지난 밤사이 눈은 단번에 세상을 점령해버렸다 고 연약한 것이 어디다 그런 완력을 숨겼을까 고 작은 것이 어디다 그런 중력을 가졌을까 소나무를 꺾어놓고 축사를 무너뜨리고 도로를 마비시키더니 학교를 일터를 정적 속에 가둬버렸다
모여서 함성을 지르던 사람들 가정으로 돌아가 어린 자녀 앞에서 한없이 다정해지듯 눈은 아이들의 여린 발 사분사분 받아주며 놀아주기도 한다 꺾이고 마비된 고립이면 어떤가 모두가 낮아서 깊어지는 하나의 풍경을 그려본다
길
노박덩굴이 아름드리 굴참나무에
넌출넌출 길을 내고 있다
나선의 길이 키를 높일수록
나무는 조금씩 야위어 가지만
길 하나 만드는 일이 일생의 과업인 듯
배를 밀며 멈추지 않는다
길은 마침내 나무의 정수리에 이르러
허공을 향하여
취산화서로 꽃봉오리 내밀고 있다
산허리 돌고 돌아
산을 오르는 사람들
산은 조금씩 수척한 모습이지만
봉우리마다 산객들이
취산화서로 피어나는 꽃송이 같다
그런 길이 되어
그 길 끝에서
꽃 한 송이 내밀면
멀리서 오는 사람도
봉우리의 꽃으로 피어올라
온통 산이 환하겠다
당선 소감
강익수
겨울은 눈 녹듯 지나가고 봄이 더 겨울 같았던 시절. 시는 희망의 손길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벗어나기 힘든 굴레가 되었습니다. 어느 해엔 몇 편의 시를 손에 쥐었으나 그마저도 없이 한 해가 지나가기도 했습니다. 다가서면 멀어지고 멀어지면 손짓하는 관계라고 생각했지만 돌이켜 보면 바람과 비와 새의 지문을 읽어내는 일도 새겨넣는 일도 서툴렀습니다.
당선 소식을 듣고 난 후, 이제 흔들림 없이 가야 할 길이라는 생각에 마음은 어느 때보다 평온하였습니다. 늦은 출발이라는 객관적 인식을 지워가며 즐기고 싶습니다. 여행을 떠날 때처럼 시작이란 단어에는 설렘이 있어 좋습니다. 하루를 온전히 하나의 단어 하나의 문장에 빠져 있다 한들 기꺼이 내가 가야 할, 시의 길입니다
나의 편협한 시각을 넓혀주신 강희안 교수님 고맙습니다. 같은 길을 걷는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에게 이것 또한 사랑이라는 것을 전하며 기쁨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부족한 글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약력
울산출생
울산학성고 경성대불문과 졸업
글벗문학회 동인
이메일 주소 : kfba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