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자료바구니(기독) 원문보기 글쓴이: 자료바구니
6. 성령 아래서의 삶(8:1-39)
로마서 8장은 로마서는 물론 바울서신 전체에 나타나 있는 성령에 관한 교훈에 있어서 탁월한 위치를 차지한다. 로마서 8장에 성령에 관한 언급이 무려 21회나 나타나고 있는데(8:2,4,5,5,6,9,9,9,10,11,11,13,14,15,15,16,16,23,26,26,27), 이러한 현상은 바울 서신 그 어느 곳에도 찾아볼 수 없는 이례적인 것이다. 이에 앞서 바울은 1:4, 2:29, 5:5, 7:6절을 제외하고는 성령에 관한 언급이 없다. 8장 이후에도 바울의 유대 동족의 구원에 대한 열망을 성령의 사역과 연결시키는 9:1절, 성령으로의 열심을 강조하는 12:11절, 이 두 곳 외에 14:17절에 이르기까지 성령에 관한 언급이 없다. 이와 같은 사실은 로마서 8장이 로마서에 나타나고 있는 바울의 성령 이해를 살펴보는데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308)
로마서의 전체적인 구조면에서 볼 때, 9-11장은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있어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 문제, 곧 유대인에게 있어서 현재의 이방인 신자들이 그들의 구원을 위한 거울 역할을 하며, 동시에 이방인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현재의 유대인이 그들의 종국적인 구원을 위한 거울 역할을 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로마서 9-11장이 이스라엘 문제를 집중적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8장은 바울이 복음을 제시하고 있는 1-7장까지의 결론이며, 복음의 구체적인 실천부분을 취급하는 12-15장의 출발점이 된다고 볼 수 있다.
(1) 그리스도가 주는 자유(8:1-4)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1)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2)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3)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4).”
본문개관
8장의 성령에 대한 바울의 언급은 그가 7장에서 거론한 율법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미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로마서 7장의 중심적인 주제는 율법을 삶의 원리로 삼는 자의 좌절을 보여주는데 있다. 7장에서 바울은 일종의 자서전적인 고백형식을 통하여, 현재의 크리스천적인 전망에서 본 율법의 무능력을 생생하게 노출시키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분 없이, 신자의 삶에 있어서 믿음 및 성령과 배치되는 모든 율법주의적인 시도를 분쇄시킨다. 사실상 바울 당대의 유대교에 따르면, 율법은 언약백성의 신분과 삶을 결정하는 보류였다. 그들은 율법이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과 삶을 유지하게 하는 힘을 가졌다고 보았다. 그러나 바울은 다메섹 사건 이후 그리스도 사건과 성령 체험의 빛 아래서 율법을 재조명해본 결과, 율법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게 성공적인 삶을 주기보다, 오히려 죄와 육의 세력 때문에 실패와 좌절과 절망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과 십자가의 죽음에서, 그리고 오순절의 성령 체험의 빛 아래서 죄의 세력과 대조되는 율법의 절대적인 무능력과 절망적 상황을 본 것이다.
율법 자체가 문제가 있거나, 죄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이 하나님의 법으로서 거룩하고 의롭고 신령함에도 불구하고(롬 7:12,14a), 인간을 사로잡고 있는 죄의 권세가 너무나 강대하여, 율법을 수단으로 삼아 인간을 절망적 상황으로 몰고 가기 때문이다. 아마 로마교회에 소속되어 있던 크리스천들 중에도 예루살렘 교회의 경우에서처럼(행 15:1) 모세의 율법을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과 삶을 좌우하는 보루로 삼으려고 하는 유대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은 자들이 있었는지도 모른다(롬 16:17-20). 그래서 바울은 이들을 염두에 두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로마 교인들과 유대인 크리스천들에게 다시 한 번 오직 성령만이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과 삶을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강하게 부각시킨다. 이를 위하여 먼저 7장에서 율법을 통한 삶의 절망적인 상황을, 8장에서는 이와 대조적으로 성령을 통한 성공적인 삶을 그리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로마서 8장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성령 안에서의 삶을 말하는 1-17절이다. 둘째, 성령의 역할을 말하고 있는 18-30절의 부분이다. 셋째, 성령 안에서 사는 자에게 주시는 소망과 승리를 말하고 있는 31-39절의 부분이다. 성령 안에서의 삶을 말하는 첫 부분인 1-17절도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바울은 7장의 그리스도와 성령 없이 율법 아래에 있는 자와 대조하여, “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정죄함이 없는가?”하는 문제를 취급하는 8:1-4절의 부분. 둘째, 바울은 “육을 따라 사는 자의 삶”과 “성령을 따라 사는 자의 삶”을 서로 대조하며 참된 신자의 삶이 어떤 삶인가를 밝히는 8:5-11절의 부분. 셋째,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인 신자 안에서의 성령의 역할에 관하여 말하는 8:12-17절의 부분.
본문주해
①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다
8장은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라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그러므로 이제”라는 말은 3:21절의 경우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정죄로부터 자유 하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종말론적인 선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인 죽음과 부활 사건이후, 이미 크리스천에게 적용되기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최종적으로 완성된다. 이러한 선언을 통해서 바울은 7장의 죄와 육과 율법의 지배 아래 있는 자의 어두운 면과, 8장 이하에서 소개할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 있는 자의 밝은 면을 서로 날카롭게 대조시킨다. 이 대조는 개인의 실존적인 대조를 뛰어넘어 우주적이고 종말론적인 대조이다. 이러한 대조에서 자연히 제기될 수 있는 질문은, 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느냐는 것이다. 바울은 이와 같은 질문을 염두에 두면서 그 답변을 2절 이하에서 제시한다.
2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다시 3-4절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율법은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한 인간을 정죄할 뿐,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사건을 통하여, 율법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킴으로서, 죄와 사망의 법으로 작용하였던 율법을 이제는 성령에 의해 실현되어지는 성령의 법이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어떤 주석가들은 2절에 나타나고 있는 “생명과 성령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을 동일한 율법에 대한 다른 관점의 사용으로 보지 않고, 서로 다르게 보거나 혹은 법을 모세의 율법이 아닌 원리나 세력으로 이해하려고 한다.309) 그러나 7장에서 이미 바울이 율법을 한편으로 거룩하고 신령한 “하나님의 법”으로 말하면서(7:22), 다른 한편으로 율법이 죄를 예방하기보다도, 죄의 도구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죄의 법”이라고 부르고 있는 점(7:23)을 볼 때, 양자를 다르게 볼 이유가 없다. 바울은 동일한 율법을 각각 다른 전망에서 말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②생명의 성령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
바울은 구원의 원리를 말할 때 율법이 결코 인간을 구원하는 수단이 될 수 없다는 점과 관련하여, 율법을 ‘의’, ‘믿음’, 혹은 ‘성령’등과 날카롭게 대조시키면서, 율법의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마치 바울이 새 시대에 있어서 율법의 무용론이나 폐기론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6:2절에서 율법을 ‘그리스도의 법’이라고 부름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언약적 의지의 표현으로서의 율법의 본래 기능회복을 말한 바 있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는 더욱 적극적으로 율법을 “믿음의 법” (3:27,31), “생명의 성령의 법”(8:2)이라고 부르면서, 새 시대에서 믿음 및 성령과 연합하는 율법의 새로운 역할을 말하고 있다. 바울에 따르면 그리스도와 성령과의 관계없이 옛 시대의 세력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은 여전히 죄와 사망의 법이 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그를 대신하여 모든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셨다. 그래서 이제 율법은 죄와 사망의 법으로써가 아니라, 구속받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삶을 위한 생명과 성령의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의 근거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죄인을 대신할 수 있도록 육을 가진 죄 있는 인간으로 보내시고, 그에게 우리의 죄를 전가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의 모든 요구를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사건에 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을 통하여 율법이 인간에게 죄와 사망을 주는 법이 아니라, 생명을 주는 법이 된다. 이것은 전적으로 율법 아래 오셔서 율법의 저주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그리스도와 연합시키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이 암시하고 있듯이, 신자는 인간을 대신하여 율법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킨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인 죽음과 부활에 연합되어졌기 때문에(6:1-11), 신자는 더 이상 죄와 사망의 법이 가져다주는 정죄함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그 요구가 성취가 되어 성령의 도구가 된 생명의 성령의 법의 인도를 받는다. 여기서 7장의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율법 아래서의 삶과 대조되는 성령 안에서 승리할 수 있는 신자의 삶의 길이 열려진다.
8장 초두에 나타나는 이와 같은 율법의 정죄로부터의 자유는 이미 7:6절 상반절의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에서 암시되어졌었다. 그리고 신자의 새로운 신분과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구속사건과 그 구속 사건의 결과로 주어진 성령의 사역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밝힌다. 바로 이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바울은 의도적으로 율법을 인간의 육과 관련하여서는 “죄와 사망의 법”으로 표현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성령과 관련하여 죽음과 반대되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 율법이 종말론적인 성령을 통하여 신자에게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은 이미 예레미야 31장 31절 이하에 언급된 마음에 기록될 새 언약에 관한 언급, 에스겔 36장 26-27절에 언급된 새 영을 너희에게 주어 내 율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는 말씀에서 암시되었다.310)
(2) 성령을 따르는 삶(성화)(8:5-17)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5)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6)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7)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8)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9)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10)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11)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12)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13)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14)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15)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16)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17).”
본문개관
로마서 8:4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하여 우리(로마의 크리스천)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킨 것은 성령을 좇아 살도록 하기 위함에 있음을 암시하였다. 이제 바울은 8:5-17절에서 본격적으로 성령을 좇는 삶에 관하여 말한다. 즉 크리스천의 삶은 ‘육’311)을 따른 삶이 아닌 ‘성령’을 따른 삶임을 상기시키고, 육을 따른 삶이 아닌 성령을 따른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강조한다. 여기서 바울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킨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에 속하지만, 육이 아닌 성령을 따른 삶을 사느냐, 살지 않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의 영역에 속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성령으로 살 수 있도록 하셨지만, 동시에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한 예수 믿기 이전처럼 육을 따라 살수도 있다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예수 믿기 이전에는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던 육을 따라 살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예수 믿은 이후에는 육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살 수 있는 자격과 자유가 주어졌다는 점이다.
사람은 육을 따라 살든지 성령을 따라 살든지 둘 중에 하나에 속할 수밖에 없다. 성령을 따라 산다는 것은 육을 따라 살지 않는 것을 뜻하고, 성령을 따라 살지 않는다는 것은 육을 따라 산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느 쪽을 선택하여 살 수는 있지만 그 결과는 엄청나다. 육을 따라 사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며, 그 결과는 사망이다. 반면에 성령을 따라 사는 생명과 평안과 영생을 소유하게 된다. 신자는 그 속에 이미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내주하고 계신 자이기 때문에,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킨 그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한다. 성령을 따라 사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유업을 물러 받을 수 있는 후사이다.
‘성령을 따른 삶’과 ‘육을 따른 삶’과 그 결과를 날카롭게 서로 대조시키고, 독자를 향해 육을 따라 살지 말고, 성령을 따라 살 것을 강하게 권면하고 있는 로마서 8:5-17절은 5-8, 9-11, 12-17절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육과 성령, 육을 따라 사는 자와 성령을 따라 사는 자를 날카롭게 서로 대조시키는 5-8절의 부분. 둘째, 독자들(로마의 크리스천들)은 육의 영역에서 성령의 영역으로 이전된 자들이므로, 육을 따라 사는 자가 아닌 성령을 따라 사는 자임을 밝히고 있는 9-11절의 부분. 셋째, 하나님과 가족관계에 들어간 자, 곧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후사임을 강조하는 12-17절의 부분.
본문주해
①‘육’을 좇는 자와 ‘성령’을 좇는 자
4절에서 바울은 이미 크리스천을 가리켜 “육신(육)을 좇지 않고, 그 영(성령)을 좇는 자”임을 지적하였다. 이제 5절에서 “육신을 좇는 자”와 “성령을 좇는 자”가 각각 어떤 자임을 밝힌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점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이미 율법의 정죄로부터 자유 함을 얻었기 때문에, 그리고 율법은 신자를 향해 죄와 사망의 법이 아닌 생명의 성령의 법이 되었기 때문에, 바울은 더 이상 7장에서처럼 율법을 부정적으로 제시하지 않고, 그 대신 ‘육’을 부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 ‘육’과 ‘성령’은 인간 안에 있는 두 품성을 가리키고 있다기보다 오히려 옛 시대와 새 시대를, 그리스도이전과 그리스도이후를 대변하고 있는 두 종말론적인 세력의 대변자로 간주하여야한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께서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 하셨던 새 시대가 이미 옛 시대 가운데 왔으며, 옛 시대와 대립하면서 그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바울에게 있어서 육을 따라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옛 시대의 삶을 사는 것을 뜻하고 있으며, 반면에 성령을 따라 산다는 것은 새 시대의 삶을 따라 산다는 것을 뜻한다.
갈라디아서 5장에서 바울은 육을 따라 사는 자는 실제로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갈 5:19-21) 등 온갖 종류의 성적, 윤리적, 사회적, 종교적 범죄와 타락행위를 가져온다고 말한다. 반면에 성령을 따라 사는 자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성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23)를 가져온다고 말한다. 즉 한 사람이 성령을 따라 사는가, 육을 따라 사는가는 그 사람의 삶의 구체적인 모습에서 들어난다는 것이다.312)
바울에 따르면 신자는 아직도 옛 시대 가운데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 시대의 선물로 주어진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이미 새 시대의 삶을 살아야하는 “새로운 창조물”(고후 5:17; 갈 6:15)이 되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옛 시대 안에서 새 시대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소명을 받고 있다. 바울은 신자가 더 이상 육의 영향을 받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살도록 하기 위해, ‘육을 따라’사는 자의 삶의 결과와 ‘성령을 따라’사는 자의 삶의 결과를 서로 날카롭게 대조시킨다. 바울에 따르면 성령에 따라 사는 사람은 성령에 속한 것, 곧 생명과 평화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법을 따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추구한다. 반면에 육을 따라 사는 자는 육적인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을 통해 7장에서 불가능했던 율법에 대한 순종이 가능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왜냐하면 성령은 율법의 진정한 목적인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앞에서 이미 지적한 바 있지만, 성령을 따라 살든지, 아니면 육을 따라 살든지, 그 중에 하나에게 속할 수밖에 없다. 즉 육에게도 성령에게도 속하지 않는 중립지대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령에 속하지 않는 것 자체가 바로 육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울은 성령 없는 신자의 신분을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또한 성령 없는 신자의 삶도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한다(갈 5:25).
②신자는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 안에 있는 자
9절 상반 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영이 너희 안에 계속해서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현재 시제), 너희는 더 이상 육신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다”고 말하면서, 신자의 존재는 근본적으로 육의 지배 아래가 아닌 성령의 지배 아래 있는 자임을 밝힌다. 즉 신자의 새 존재의 궁극적인 근거는 신자 그 자신에게 있기보다도 오히려 신자 안에 계시는 성령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로 고백하는 일, 새 사람으로 사는 일, 말씀의 깨달음, 죄와의 싸움, 믿음의 성장 등은 근본적으로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2:20절에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말은 사실상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을 통하여 내 안에 사신다는 것을 가리키기 말이다.313) 그래서 바울은 9절 하반 절에서 이 “하나님의 영”을 “그리스도의 영”으로 바꾸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라고 선언한다. 이러한 선언을 통해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람”=“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자”라는 명제를 강화한다(고전 12:3절 참조). 그것은 복음을 믿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것과 복음을 통해 성령을 받는 것이 서로 나누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계속되는 문맥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바울이 거듭 ‘성령’과 ‘그리스도’를 서로 분리시키지 않고, 오히려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점은 9절 하반절의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가지지 않는다면”라는 말과 10절 상반절의 “만일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지 않는다면”라는 말이 서로 병행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10절 하반 절에서는 그리스도 대신 생명을 주는 성령(8:2절 참조)이 사용되고 있는 점에서 분명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성령’이 ‘그리스도’와 동일시되는가? 우리는 11절에서 바울의 사상적 전개과정을 엿볼 수 있다. 11절에서 바울은 예수를 죽음에서 부활하게 하신 동일한 하나님의 영이 신자 안에 거하고 있다. 그리고 그 동일한 영에 의해 하나님께서 신자의 궁극적인 구원을 가리키는 죽을 몸도 부활시킨다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이미 로마서 1:3-4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성결의 영(성령)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다”고 한다. 고린도전서 15:45절에서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가 “살려주는 영(성령)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3:17절에서 “주는 영(성령)이다”라고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을 통하여 성령은 부활하신 그리스도 자신의 삶의 주체가 되셨으며 그리스도의 영이 되셨다고 본다.
그리하여 바울에게 있어서 새 시대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성령은 그 사역에 있어서 서로 분리될 수 없다. 부활한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하여 일하시고,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은 오직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사역을 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성령은 그 존재에 있어서 일치가 아니라, 사실상 그 사역을 통하여 하나가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바로 성령 안에 있는 자이며, 성령 안에 사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 사는 자가 된다(참고 갈 2:20). 마찬가지로 바울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체험은 곧 성령의 체험이며, 성령의 체험은 또한 그리스도의 체험이다.
③‘이미’와 ‘아직’의 종말론적인 삶
12절 이하에서 바울은 신자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고 있으며, 그 거주하는 성령에 의해 그가 이미 새 시대의 사람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 육을 따라 살 수 있는 위험 아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즉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옛 시대와 새 시대가 서로 공존하는 한, 신자는 옛 시대를 대변하는 ‘육’과, 새 시대를 대변하는 ‘성령’의 두 권세 아래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자의 몸은 육과 영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는 일종의 전쟁터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미 6장에서 바울이 언급한 것처럼 육의 세력은 우리의 몸에서 왕 노릇하려고 하는 반면에, 성령의 세력은 죄와 육의 세력이 우리의 몸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한다(역시 갈 5:17). 사실상 신자의 윤리적 책임은 그가 처해 있는 이와 같은 새 시대와 옛 시대, ‘이미’와 ‘아직’의 종말론적인 긴장과 투쟁에 근거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신자가 성령을 소유하는 것, 성령이 신자 안에 거주하는 것, 신자가 능동적으로 그리스도와 성령의 통치를 따라 사는 것은 서로 별개의 사실임을 분명히 한다. 그러기 때문에 신자는 계속해서 성령의 통치 아래에 살 수 있도록 자신의 삶을 늘 성령께 위임하여야 한다. 마치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항상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살아가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성령의 사람으로서 성령이 요구하는 삶을 살도록 부단히 노력하여야만 한다. 그렇게 할 때 신자는 이 세상에서도 성령의 권세를 통해서 육의 권세를 극복하는 승리적 삶을 살 수 있다. 바울이 신자의 삶의 영역과 관련하여 “성령을 따라 살아라”(갈 6:16, 25),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고 권면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바울에 따르면 신자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을 때, 그 성령을 통하여 그의 하나님의 아들 됨이 나타난다. 성령은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무시하고 강제적으로 그를 인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자신을 성령께 맡길 경우 성령께서 그의 자유와 책임을 통하여 그를 인도한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 됨이 정적(靜的)이 아니라 동적(動的)임을 밝힌다. 즉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고 육의 지배를 받고 있는 한, 그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를 수 없다는 사실을 암시하면서, 신자의 삶의 심각성과 윤리적인 책임을 강화한다. 하지만 바울은 즉시 15절 이하에서 신자들은 이미 양자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역시 고전 2:12; 갈 3:2), 그 영을 통해서 하나님을 예수님이 직접 하나님에게 사용하였던 아람어 호칭 “아바 아버지”(막 14:36)로 부르게 한다(참조 갈 4:6)고 말한다. 성령께서 친히 그들의 하나님 자녀 됨을 적극적으로 유지시켜가기 때문에 그들의 하나님 자녀 됨은 결코 상실되지 않는다는 것이다(참조 8:37-39; 고전 6:11; 12:3).314) 여기서 우리는 절망으로 끌고 가는 율법과 대조되는 성령의 능력과 함께 율법적 삶의 좌절과 대조되는 성령 안에서의 삶의 성공을 본다.
율법은 죄를 극복하게 하기보다도 오히려 죄의 도구가 되어 우리를 절망으로 끌고 가지만, 성령은 신자로 하여금 그가 성령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한, 우리로 하여금 죄를 극복하고 승리의 삶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성령을 통한 이 승리의 삶은 특별한 신자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 아니며, 모든 신자에게 열려져 있는 특권이다. 누구든지 자신을 성령께 맡기고 성령께서 자신의 삶을 인도해 주시도록 한다면 그는 성령을 통하여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다.315) 그리하여 슈툴마허의는 그의 로마서 주석에서 신자는 로마서 7장 24절에 나타나 있는 절망적인 아담적인 ‘나’의 탄식과 대조적으로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에 의하여 일어난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에 참여하게 된다(고전 1:30).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명령을 수행하며, 마지막 때 부활할 것을 확실히 믿는다.”316)
(3) 성령 안에서 누리는 영광의 삶(8:18-30)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18)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19)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20)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21)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22)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23)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24)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25)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26)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27)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28)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29)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30).”
본문개관
로마서 8:18-30절은 크리스천이 이 세상에서 육을 따르는 삶이 아닌 성령을 따르는 삶을 살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말하고 있다. 크리스천의 삶은 영광을 기다리는 삶이며, 그 영광은 고난의 과정을 거쳐 도달하는 영광이라는 것이다. 장차 누리게 될 이 영광은 현재의 고난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지만 영광은 고난 없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크리스천이 이 세상에서 성령을 따르는 삶을 살 때 영광만이 아니라, 고난도 따라 올 수 있다는 것은 이미 17절의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는 말씀을 통해 가르쳐졌다. 크리스천이 이 세상에서 살 때 왜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 왜 영광은 미래에 주어지며 현재는 고난의 과정이 주어지는가? 신자가 육을 따르는 삶이 아닌 성령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는데 왜 고난이 따라 오는가?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죄와 죽음의 세력을 결정적으로 정복하였을지라도, 여전히 이 세상에는 아직도 죄와 악과 죽음의 세력이 존재하기 되기 때문이다. 이 죄와 악과 죽음의 세력은 장차 재림하실 그리스도에 의해 완전하게 정복되고 이 세상에 완전한 영광이 실현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한 완전한 정복 때까지 죄와 악과 죽음의 세력은 여전히 이 세상에서 막강한 세력으로 믿는 자들을 유혹하고 괴롭히고 있다. 그러므로 신자만이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피조물도 고난을 받으며, 그 회복을 위해 탄식하며 기다리고 있다.
신자에게 있어서 고난은, 한편으로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와 악과 죽음이 지배하는 육의 영역에서 의와 생명과 영광이 지배하는 성령의 영역으로 이미 옮겨진 자이기 때문에, 또 다른 한편으로 그가 아직도 죄와 악과 죽음의 세력이 남아 있는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이미’와 ‘아직’의 이중성 때문에 온다. 여기서 우리는 신자가 성령 체험을 한 그 순간 완전한 구원의 상태에 들어가거나 죄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운 천사와 같은 존재로 변화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신자가 성령을 통해서 지금 여기서 미래의 구원을 이미 부분적으로 맛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완전한 구원은 계속적인 성령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는 미래적이다. 바로 이 때문에 신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과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새 시대의 선물인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에 전적으로, 지속적으로 의존해야 한다. 그러나 신자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한다하더라도 낙심할 이유가 없다. 신자에게는 실패와 좌절이 아닌 영광스러운 승리의 소망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가운데 계시는 성령이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도우시고 우리의 승리를 위해 간구하실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를 예지하시고, 예정하시고, 부르신 그 하나님께서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로마서 8:18-30절의 중심 주제는 ‘고난을 넘어 영광’에 이르는 신자의 구원의 과정을 말하고 있다. 이점은 본문을 시작하는 18절이 현재의 고난과 장차 나타날 영광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본문을 마감하는 30절이 영광의 실현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은 고난과 영광을 말하고 있는 18절을 시작으로 고난 가운데서 영광을 기다리는 세 가지 탄식, 곧 피조물의 탄식을 말하고 있는 19-22절, 신자의 탄식을 말하고 있는 23-25절, 성령의 탄식을 말하고 있는 26-28절,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완전한 영광에의 도달을 말하고 있는 28-30절로 나누어진다.
본문주해
①고난을 넘어 영광으로
바울은 17절 하반 절에서 “우리가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고 언급하였다. 그리고 18절에서 고난과 영광에 대하여 다시 말하며 고난을 “현재의 고난”으로, 영광을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라고 말한다. “현재의 고난”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고난은 지금 여기서 만나지만 이것은 영구적인 것이 아니고 일시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고난은 일시적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신자는 이것을 극복할 수 있다(벧전 1:6, 5:10; 고후 4:17).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란 말은 영광은 현재가 아닌 미래에 주어질 것이라는 것과, ‘우리에게 나타날’(신적 수동태 부정사)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이 영광을 우리에게 확실하게 실현시킨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리고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는 말은 우리가 고난가운데서도 부분적으로 이미 영광을 소유하고 있지만, 장차 주어질 완성된 영광은 이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고 위대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19절 이하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전체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나타날 그 영광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음을 강조한다.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범위는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세계에도 미친다는 것을 보여준다. 창세기 3장에 따르면 인류의 시조 아담의 범죄와 타락은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의 전 삶의 영역인 피조물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인간의 범죄로 인해 피조물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선함을 잃고 오염되었다. 인간이 사는 땅은 아담의 범죄로 저주를 받았으며,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었다(창 3:17-18). 로마서 1:18절 이하에서 설명된 것처럼, 본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피조물이 인간의 범죄로 인간에 의해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수단으로 전락되었다. 피조물은 인간을 위해서 창조되었다고 말하기 이전에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다. 인간은 피조물이 창조주의 본래 의도대로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가 되도록 잘 관리할 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피조물과 자연을 보호하고 관리하기보다도 자연을 파고하고 오염을 시켰다. 하지만 20절의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의 지적처럼 이것은 피조물의 의도는 아니다. 타락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고 피조물을 잘못 사용하는 인간의 책임이다. 바울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인간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을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골 1:20).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인간의 죄로 타락되고 오염되고 잘못 사용되고 있는 모든 창조세계의 회복과 새 창조를 포함하는 우주적인(고후 5:17)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속받은 신자는 인간의 범죄와 타락으로 오염된 자연과 환경을 창조자의 본래 의도가 잘 나타날 수 있도록 회복시킬 책임이 있다.317)
이처럼 복음은 창조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회복과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회복을 가져온다. 물론 우리의 완전한 구속이 미래적인 것처럼,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이 피조물의 전체 회복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약속된 완전한 영광이 실현될 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피조물도 이 세상에서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과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당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에 참여할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완전한 영광이 나타날 때, 계시록 21:1절에 기록된 대로, 모든 피조세계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꾸어질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목적이 실현될 것이다.
②신자의 고난과 탄식
23-25절에서 바울은 다시 우리들의 현재 상태로 되돌아가서 ‘이미’와 ‘아직’의 긴장 가운데서 사는 우리 신자들의 갈등과 탄식의 문제를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하여 부분적으로 회복된 피조물도 영광스러운 완전한 회복을 기다리는 동안 이 세상에서 탄식하고 있다면,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이 세상에서 신자의 삶은 고난뿐만 아니라, 고난을 극복하고 영광을 기다리는 탄식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크리스천의 삶은 항상 부와 명성과 건강은 물론 오복(五福)의 축복을 필수적으로 동반하는 번영의 삶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신자는 이 세상에서 육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살기 위해 죄와 악과 불의와 더불어 싸워야하고, 그러는 가운데 고통도 당하고, 탄식도 할 수밖에 없는 긴장의 삶이라는 것이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 곧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이미 참여하고 동시에 미래의 완전한 부활을 보장 받은 우리도 이점에서 결코 예외가 아니다. 신자도 이 세상에서 살면서 온갖 종류의 고통과 재난과 질병과 사고를 당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는 우리 몸의 구속, 곧 영광스러운 완성된 구원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끝까지 참고 기다려야 한다.
26-28절은 신자에게 있어서 고난가운데서 어떻게 영광이, 탄식 가운데서 우리의 몸의 구속이 어떻게 보장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 해답은 성령 하나님과 성부 하나님의 도우심이다. 바울은 이미 8:10절에서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신자 안에 성령이 거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한바 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모든 구원의 사역을 우리 안에서 궁극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함에 있다.318) 하나님의 영인 성령은 우리 안에 구원의 역사를 시작할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이루어 가시고 종국적으로 완성하게 하신다. 우리 크리스천은 이 세상에 살면서 때때로 넘어지고 연약해 질 수도 있다. 이때에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우리를 일으키시고, 우리를 승리하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시다. 예수의 고별설교에서 약속하신 것처럼, 보혜사 성령께서는 우리를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요 16:13).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 가운데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성령의 기도를 들으신다. 그 결과 성도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 때문이다. 신자가 이 세상에서 궁극적으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요 16:33). 옛 언약 백성들에게 있어서 율법이 할 수 없었던 것을 새 언약 백성들에게는 성령이 그렇게 하시기 때문이다.
③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
29-30절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는 우리의 구원의 전 과정에 관하여 말한다. 바울은 여기서 예지, 예정, 소명, 칭의, 영화 등 다섯 단계를 말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하나님의 구원의 다섯 과정은 필연적으로 시간적 과정은 아니다. 바울은 여기서 구원의 전 과정을 시간적으로 말하려고 하는 것이 그의 의도가 아니다. 그는 칭의 다음에 따르게 될 성화도 생략하고 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우리의 구원을 시작하시는 분도, 완성하시는 분도,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다섯 단계를 시간적인 단계로만 해석할 경우, 하나님은 결국 우리 인간이 어떻게 행동을 할 것을 미리 내다 보시고, 그에 따라 구원을 시작하신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게 한다. 그럴 경우 한 사람의 궁극적인 구원의 결정권은 하나님이 아닌 인간에게 은혜가 아닌 행위에게 주어지게 된다. 29-30절에서 바울이 구원의 목적을, 우리로 하여금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함”과 “맏아들이신 예수와 더불어 형제자매가 되게 하기 위함”에 있다고 말하는 점에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의 최종적인 목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되게 하는데 있음을 보여준다.
성경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창 1:26). 그러나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타나셨다(고후 4:4).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요(골 3:10),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있다(엡 1:5). 우리가 우리의 진정한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려고 힘쓸 때, 성령께서 바로 이 일을 우리 안에서 이루어 가신다: “우리가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이처럼 신자의 삶의 목표는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다(역시 갈 4:19).
(4)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도의 견인(8:31-39)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31)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32)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33)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34)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35)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36)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37)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38)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9).”
본문개관
로마서 8:31-39절은 로마서 8장의 결론인 동시에, 사실상 로마서 1장에서 8장까지의 결론이기도 하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구원의 전 과정을 되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사역이 얼마나 안전하고 승리가 보장되어 있는 영광스러운 것인가를 말하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의 위대성, 안정성, 그리고 승리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서 찾는다. 하나님의 사랑이 구원의 시작과 과정과 완성을 보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으심과 부활의 구속사건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역사 안에서 역사의 인물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의 오심, 죽으심, 부활의 역사적 사건, 그리고 오순절의 성령의 파송을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그 누구도 우리를 대적할 수도, 송사할 수도, 정죄할 수도 없다. 이 뿐만 아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이처럼 우리의 구원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끊을 수 없는 사랑, 곧 삼위 하나님의 사역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확실하고, 안전하고,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
로마서 8:31-39절은 크게 31-34절, 35-39절의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31-34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주신 이 위대한 사랑의 사역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이 위대한 사랑 때문에 그 누구도 우리를 대적하거나, 송사하거나 정죄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반면에 35-39절에서는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되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이 끊을 수 없는 위대한 사랑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있다.
본문주해
①삼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31절의 서두에 있는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는 로마서 1:18절 이하부터 8장에 이르기까지 바울이 서술한 내용, 곧 인간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1:18-3:20),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3:21-32), 믿음에 의한 칭의(4-5장), 율법이 아닌 성령에 의한 성화(6-8장)에 관하여 우리가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를 묻는 질문이다. 물론 이 질문은 긍정적인 대답을 끌어내기 위한 수사학적인 질문이다. 여기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라는 말은 바울 복음의 핵심적인 메시지, 곧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 믿음에 의한 칭의, 성령에 의한 성화가 모두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역임을 강조한다. 실제로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으며 성령은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셨다. 따라서 그 누구도 하나님을 대적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위하시는 우리를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다. 32절은 먼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역을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심과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요약하고, 그다음 여기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현재, 미래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이 질문 역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강한 긍정적인 대답을 끌어내는 수사학적인 질문이다. 여기서 바울은 다시 한 번 구원의 사역은 우리 인간의 노력의 산물이 아닌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임을 강조한다.
33-34절의 두 질문도 32절의 질문처럼 동일한 긍정적 응답을 끌어내는 수사학적인 질문들이다. 곧 33절의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라는 질문은 아무도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할 수 없다는 긍정적인 대답을 이끌어내고 있다. 여기 “송사하리요”는 말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모든 사탄의 악한 시도들이 직접적이든, 사람들을 통한 간접적인 시도든, 현재의 것이든, 미래의 마지막 심판 때의 것이든,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사탄의 송사가 성공할 수 없는 이유는, 33절 하반 절에 지적되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법정에서 누가 우리를 송사한다하더라도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 없다고 선언하시기 때문이다. 송사뿐만 아니라 정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누가 신자의 과거의 범죄 행위를 열거하면서 왜 죄에 대한 심판을 하지 않느냐고 항의하더라도, 그러한 시도가 성공할 수 없는 이유는, 3:25절에서 언급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우리의 죄에 대한 정죄를 그가 대신 당하심으로 우리의 정죄를 덮으시고 해소하셨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다. 우리의 속죄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의 의를 위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4:25) 친히 하나님 우편에 앉아서 우리를 위해 계속해서 간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울은 성령만이 성도를 위해 간구의 사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도 성도를 위해 하늘에서 계속 간구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요 1, 2:1; 히 7:25; 9:24). 이처럼 신자의 구원을 위해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 하나님께서 관여하고 있기 때문에 신자의 구원은 안전하고 확실하게 보장된다.
②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랑
35-37절은 34절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랑의 위대함을 말한다면, 그 다음에 나오는 38-39절은 32-33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함을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바울은 35절에서 33절에 나타난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에 나타난 사랑, 곧 그의 죽음을 통한 속죄사역, 그의 부활을 통한 의의 사역, 그리고 그의 승천과 간구의 사역을 통해 보여준 그리스도의 사랑은 너무나 크고 위대한 사랑이므로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다고 선언한다. 바울의 선언은 추상적인 이론이나 학설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고린도후서 11:26-27절에 잘 나타나 있는 것처럼, 그의 전 생애와 선교사역을 통해서 만났던 수많은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과 칼의 위험을 통해서 체험한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바울은 확인된 구체적인 체험에 근거하여 확신을 가지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자신이 만난 모든 환난과 시련을 시편 44:22절에 나타나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련과 동일시한다. 그가 당한 시련은 그 자신에게만 주어진 특이한 것이 아니고 지난날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주어졌고, 미래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주어질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을 사랑하는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시련을 극복하고 승리하게 하셨다고 고백한다. 자신의 힘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승리를 가져다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선언은 로마서 7:14-25절에 나타나 있는 그의 좌절과 실패의 고백과는 너무나 대조가 되고 있다. 로마서 7장의 선언이 그리스도와 성령의 도움 없이 율법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모든 사람의 고백이라면, 로마서 8장 35절 이하의 선언은 그리스도와 성령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모든 신자의 고백이다.
③하나님의 위대한 사랑
바울은 8장의 마지막 구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다시 하나님의 사랑에 돌아간다.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도 모두 하나님의 사랑에 근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을 통해 나타난 사랑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분리되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분리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지금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그 무엇도 자신과 자신을 사랑하는 하나님을 단절시킬 수 없다고 선언한다. 자신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만나는 그 어떤 것도, 매일의 일상적인 생활에서 만나는 죽음과 생명의 체험도(빌 1:21), 영적인 생활에서 만나는 천사들과 권세자들의 세력도(엡 1:21; 6:12; 골 1:16; 2:15), 현재 생활이든, 미래 생활이든, 높은 하늘과 깊은 땅의 일도, 피조 세계의 그 무엇도 그와 하나님 사이를 끊을 수 없다고 선언한다. 바울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끊을 수 없는 위대한 사랑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사랑이라고 말하면서 다시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에 돌아간다. 하나님의 이 위대한 사랑은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통하여 나타났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 위대한 사랑을 다메섹 사건을 통해 체험하였다. 왜냐하면 초대교회 신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는데 앞장을 섬으로써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그리스도의 원수가 되었던 자신을 은혜 가운데서 부르시고, 사도가 되게 하셔서 복음전파자로 삼아주셨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은 그리스도와 우리를 연합시키는 말이다. 그리스도가 이루신 모든 사역을 우리를 위한 사역에 되게 하는 말이다. 곧 그의 죽으심과 부활, 하늘과 땅의 모든 정사와 권세자들을 정복하신 그리스도의 사역은 우리의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죽음과 생명, 정사와 권세자들, 현재 일, 장래 일, 하늘의 일과 땅위의 일도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이미 우리와 연합되어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두 정복하시고 승리하셨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6:33절에 나타나 있는 주님의 말씀으로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처럼 우리의 주님이 승리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이처럼 진정한 크리스천의 삶은 실패와 좌절의 삶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과 사랑에 의거 승리를 확신하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