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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 역시 이맛이라니까, 이맛을 못잊는다니까... 어쩌구저쩌구 ...”
꽁보리밥 에 열무김치를 얹어 먹는데 막걸리는 벌써 2통째 주문해 놓은상태다. 그러나 옆에 앉은 나의 안식구는 자리값 하느라 마지못해 시켜놓은 장터국수에 겨우 국물만 마시고 앉아있다.
그런데 아까부터 아니 들어와 앉을때부터 맞은편의 두(2)노인네가 나에게 눈길을 주며 아니 자기들끼리
술잔을 기울이며 나를 힐끈거린다.
초여름의 한가한 일요일오후, 정말 아무런 약속, 계획없이 낮잠자고 일어나니 그냥그렇고하여, 옆에서 TV에 한참인 안식구를 꼬득였다. “광장시장” 어떠냐며 세종대왕이 그려진 배추색깔 종이를 꺼내 흔드는데 이할머니 이력이 어떤데 한번에 나서나 조금의 실랑이속에 신사임당이 그려진 종이 두(2)장을 그것도 그녀의 양쪽가슴에 한 장씩 꽂아넣어주고야 동의를 얻을수있었다.(브라쟌지, 브르지아인지 영어단어를 한번도 찾아보지 않아 모르지만 그위로 넣었으니 따라서 이는 성추행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각설하고 다시시작하면 “광장시장” 좌판 꽁보리밥집. 일하는 이모(다들 그렇게 부르니 나도 따라부른다) 2명사이로 건너편에 앉은 초라한 두노인이 나와 눈을 맞추자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그 시추에이션은 금방 깨어졌다. 몰려온 대만관광객에게 자리를 내주어야만하니 그둘은 할수없이 일어서는데 그들의 자리엔 “장수막거리” 빈3병이 남아 그들의 전과를 이야기하고있었다.
그러나 그중 한명이 삐죽삐죽 어정쩡한 자세로 나에게 다가와, 저어 혹시 86* 부대 8인치포 조종수 짱쐬주씨 아니 신지??? ....... ” “그러면 APC 조종수 김아무게 병장님이 아니신지???........ ” 아니 어떻게 이런일이 어쩌구 저쩌구 나와 그는 부둥켜안고 생쇼를 하는데 그옆의 10년은 더들어 보이는 노인네왈 “나 모르겠어???....” “아니 왜 모르겠어요 김명* 병장님 아니십니까?? 맞어 맞아... 세월이 많이 흘렀네 ~~~” 갑자기 광장시장 노점좌판이 KBS 이산가족 상봉장이 되어버렸다.
“자자 이러지말고 이쪽으로 가시죠~~” 우리는 그 자리를 벗어나 “순희네 빈대떡” 노점이 아닌 떳떳한 실내, 그러나 그곳에서 채 다먹지않은 젊은 커플을 아예 쫓아 내다 싶이 앉으며 그옛날, 그시절로 입에 침을 튀기는데 그러나 옆에서 괜히 이상한 표정의 안식구에게 “야!... 이양반들 그옛날에 내 군시절 빤스바람시키고 모기회식 시키던 아주 나쁜사람들이야!! 오늘 잘걸렸어 어쩌구 저쩌구하는데 아니 눈길조차 주지않고 한마디도 안하니 그두노인들과는 너무 어색하다.
”아니 김병장님!! 그때 저가 휴가나가 김병장님을 찾으러 마장동 바닥을 헤멨었는데요... “나의 40년은 훨씬 근 50년전 이야기에 ”아아!!! 그런적이 있었나 글쎄 나는 기억못하겠는데...“하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몇마디 더하다가 어색하여 나는 화제를 돌려 옆의 김아무게 병장(어차피 군대다녀오면 다들 병장이다. 다만 우리 말년시절에는 상병제대도 많았다 친구중 꼴통들은 상병제대한적이있다)을 바라보며 어떻게 연락이 되어 지내고 있느냐 하니(1년이상 차이나는 사이, 그러나 그가 더 후배다 ) 그냥 우연히 길에서 만나 지금까지 가끔만나 소주한잔씩 하는 사이이니 나보고도 그렇게 하자고한다. 나야뭐 100% 찬성이다. 그렇지만 뭐 조금은 꺼시기하다. 그둘의 머리위에 내려 앉아있는 흰서리, 그리고 조금전 악수할 때 마주 잡으며 느꼈던 그손마디등이 그둘의 지금까지의 인생역정을 이야기하는것 같아 조금은 씁쓰름하다 그렇지만 그것이 뭐 잘못되었다는것이 아니라, 또 나라고 그들보다 나은 것이 뭐 있을까 반문해본다 나또한 출신성분이 그렇고그래 쇠고기등심++ 보다는 껍대기 돼지부속품이 훨씬 맛있고 나이 70이 넘어도 아직까지 커피맛을 모르며 남들 잘마시는 Wine을 도수가 싱거워서(20도 이상짜리가 없다) 아직도 친해지지않고 있으며 오늘만 봐도 여편네에게 교통비 거금을 들이고 겨우 꽁보리밥 먹으러 오지 않았는가.
”아니!! 여기가 어디야?? “평소와 같이 짧은 전립선에 (이건 100% 나이탓) 자극이 와서 정신없이 일어나보니 평소의 내침대 내자리이고 옆에서는 아내의 코고는 소리도 들린다. 아니 얼마나 마셨으며, 우리 어떻게 헤어졌지? 어쩌고 저쩌고, 또 계산은 어떻게 했고 실수는 안했는지?? 헐레벌떡 일어나 평소습관대로 지갑을 확인하니 얄밉게도 지폐한장 빠져나가지 않고 출발시 그모습 그대로다.. 어떻게 된것인지 도통 알 수 없어 머리를 움켜쥐어봤자 헛수고다 그렇다고 자고있는 아내를 깨울수도 없고 하옇튼 낭패다. 그건 그렇고 그들과는 전화번호하나 주고받은바도 없으니 우리들의 인연은 글쎄.......
한참, 아주 한참 지난후 아내에 들은바로는 다들 인사불성이 되었는데 아내가 겨우겨우 처리하였노라고 지나가는 소리처럼 들렸는데 나조차도 주차 하였던 종묘주차장까지 어떻게 갔는지가 또한 신기하였다. 그렇다고 물어봐봤자 이제그만 술 끊으라는 소리만 들을테니까 슬그머니 꽁지를 내리고 애써 태연한척했다.
”제1내무반 전원 동작그만..... “ 그렇지만 계속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제1내무반 전원 동작그만...“ 일요일 불어터진 라면을 투덜대며 먹고 내무반에서 삼삼오오 잠시 드러눕거나 또 내기장기에 훈수까지 열중이니 뭐들릴 리가 없다 부대 최고참(갈참) 노아무게 병장이 악을 쓰니 이제 겨우 실내가 조용해졌다. ”제1내무반 전원 삼(3)선에 정열....“ ”삼서서선에 저정어열...“ 다들 마지못해 일어나며 복창했다. ”다시한번 삼선에 정렬...“ ”삼선에 정렬...“ 조금전보다는 조금 군기가 들어갔다.. ”아니 x팔, 이x끼들 군기봐라..“ 잠시 뜸을 들인뒤 ”전원 오(5)선에 정열... 아니 끝선에 정렬...“ ”끝선에 정렬...“ 군기가 팍 들어간 소리가 내무반에 쩌렁쩌렁 울렸다. 그럼 이다음 구호가 ”박아! 실시...“ 라는걸 다들 알고있었으니까. 잠시 침묵이 흐르고 다들 진정되니 ”전원 삼선에 정렬..“ ”삼선에 정렬...“ 복창후 ”전원쉬어...“ ”쉬어...“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후 ”전원 잠시 주목해주기 바란다. 어쩌구 저쩌구 군기가 어떻고 한참후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전입해온 짱쐬주일병은 나와 모종의 임무(?)를 해야하니 내무사역에서는 잠시 열외시켜주기 바란다. 이상 알겠습니까?“ ”어이야!!...“(복창) 이상 해산
이 무슨 시츄에이션,!! 197x년 서부전선 oo부대, 얼마전 전입해온 짱oo일병, 신병이니 외곽보초는 안세우고 불침번 근무만 한동안 시키는데, 그당시 군부대에서 전역시에 나름대로 기념품으로 ”추억록“이 필수였다. 오색종이 전지를 반을 잘라(A4보다는 조금작다, 지금의 B-5, A-4 등과는 틀리다) 오색펜으로 전역자와의 그동안의 나름대로의 소회를 써서 모아서 책으로 만들어 가지고 나가는데, 당시는 너도나도 안가지고가면 방위근무했다고 매도되었었다 하긴 나도 형님이 두분인데 다들 화려(?)하게 만들어졌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이 추억록에도 사회상이 반영되었었다 사회에 조금은 불만 아니 Loser까지는 아니지만 뭐 하옇던 그렇고 그런분들은 조금은 남들보다 화려하게 만들고 싶어했다. 그런데 군대에서 뭐 개인시간이 없으니까 다들 야간보초 전후에 한 장씩 써서 불침번에게 제출하게 하였는데 피곤하니 마지못해 의무적으로 쓰니 내가 봐도 한심하더라고, 그래서 불침번을 서니 시간도 많고 끼도 있고하여, 그위(개발내발 써놓은)에 꽃그림도 더러 그려놓고 시(김소월시)도 적어넣어 기분좋게 덫칠하여 주었더니 금방 그쪽으로 취직이 되고 또 쏘주도 바라바리 공급되면서 위의일까지 일어났다 또 나의 제대때까지
대외적으론 ”전차병“ 주특기이지만 안으론 ”추억록“ 주특기가 되어버렸다. 그후 추억록 작성도 이력이 나고 하여 이젠 미리 바탕화면에 만화등을 그려놓고 그위에 글 받는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또 나의또래 졸병들은 나를 시기하였지만 고참급들은 하나도 반대하지 않았는데 어차피 그들 또한 오래지 않아 나에게 아쉬운 소리 하여야하니 뭐 그냥 다들 좋고좋은 사이가 되어버렸다.
대한민국 육군 일등병 봉급 일금 2,730원 나의 주식인 소주를 사면 딱 5일치에 해당한다 물론 집안이 아주 어렵지는 않아 고향에서의 향토방위성금도 나름대로 꾸준히 이어져 왔지만 추억록 그림그려 소주동냥으로 다른 많은 부분을 충당할수있어서 큰빚 안지고 무사히 제대할수 있었으니 그또한 행운이라 아니할수없다.
그런데 조금전 APC조종수 김아무게 병장도 추억록을 만들어 주었는데, 남들보다 조금 쏘주 공급량이 적어서 그의 추억록 그림을 그리는 옆에서 그는 미안해 하였었다 그렇지만 그시절 춥고배고프던 시절 그것이 뭐 대수였으리오, 그가 전역 며칠전 나에게 ”야 쐬주! 첮휴가가 언제지? 어쩌구 저쩌구, 설악산 간대며, 어쩌구~~ “예 한달밖에 안 남았읍니다만 그건 그렇고 김병장님 좋으시겠어요 물론 잘사실거고 다음 사회에서 만나면 쏘주한잔 사주세요...” “그래서 말인데 나가면 ‘경기여객’으로 바로 갈거니까 마장동으로 꼭 찾아와, 아참 설악산은 마장동에서 출발하잖아, 그렇네~~” 그는 입대전 ‘경기여객’에 근무하며 마장동-산정호수 간의 버스를 몰았다고 하였었다 “네, 꼭 찾아뵙겠습니다 " 나는 당시의 미안함을 전역후 벌충하려고 흰소리 하고있음을 진작부터 알았다. 물론 당시 휴대폰이 있나 삐삐가 있나 코대면만이 유일의 시절, 그건 그렇고 그뒤 얼마후 나의 첮휴가는 시작되었다
“아니 고속버스로 가야지 웬 시외버스야? 지긋지긋 하지도 않아?” 나의 첮휴가중의 설악산행을 마장동에서 시작하고자하니 다들 반대하였다 그땐 이미 영동고속도로도 개통하였고 다들 대세가 고속버스인데 고리타분하게 시외버스를 운운하니 모두다 싫어할 수밖에~~ 그렇지만 옛추억을 생각하여 한번 타봅시다 하며 설득하였다. 다만 그를 만나다는 이야기는 빼놓고~~
그옛날 (꼭 옛날도 아니다 영동고속도로 개통전) 설악산을 가자면 첮차(05:00)를 타야 하였고 또 그를 타자면 다들 짐을 지고나와 전날 마장동 근방 여인숙에서 자고 출발하였었다, 딱히 왜들 그랬는지는 모르겠고 그저 통금 때문에 약속시간 지키려하였을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정시출발하면 대충 7:00 ~8 :00 사이 즉 7 :30 정도면 양평에 도착하는데 거기서 한(1)시간 아침먹으라고 정차한다, 그후 양평부터는 먼지 폴폴나는 비포장도로다. 더덜컹 거리는통에 옆사람과의 대화도 불가능하다 최대 시속 30Km로 달려가면 뭐하나 면단위 소재지 정거장에서 조차도 최하 5분이상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려준다 다시 12:00 ~ 13:00 에 인제에 정차, 다시 점심시간 한(1)시간 그리고 그다음이 압권이다 한계초교를 지나고 나면 약 2Km의 계곡옆이 너무 가팔라 One-way 길이 이어지는데 이길은 헌병의 통제하에있다 어느 정도 차가 모이면 길을 막고 한쪽 방향으로 차를 보내는데 평시에는 잘 유지가 되지만 군작전이 있거나 또 높으신분이 지나가면 그들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데 어느누구하나 불만이 없다 그러니 한여름 하지의 낮이 길면 뭐하나 진부령 넘을때는 해가 서산마루에 걸렸었다, 도로에 우루루 몰려나와 손을들면 정차, 서서 짐챙기고 이별가를 부르는 사람은 여러명인데 정작 승차자는 고작1명, 그러니 세월이 시간 개념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옛날 돼지중에서도 제일 싸고 또 양을많이 주는 허파찌게 (돼지허파에 갖은 양념하여 끓여먹는 제일싼가격이었으며 주변에 식당에서는 죄다팔았다)에 소주한잔하고 내일을 대비 여인숙에 누우면 정말 우스운 이야기지만 누군가 문을 똑똑 “긴밤이 어떻고 숏타임이 뭐라더라 하며 이상한 소리들을 해대는데 다들 귀틀어박고 뭔가를 웅켜쥐고 서둘러 잠들 수밖에~~~
각설하고 버스가 홍천검문소(춘천-원주/ 양평-인제)에 도착하면 헌병인 선배 송oo병장께서 버스를 장시간 세우고 근처 점방에서 소주4홉들이 5병을 올려주니 너무나 고맙다(당시 시골에선 2홉보다 4홉들이가 더흔했다) 그러면서 돌아올날을 기약하니~~
드디어 7박8일 등반후 돌아오는날, "잠시 검문검색이 있겠습니다" 버스에 오른 송병장, 앞자리의 휴가장병 서너(3~4)명이 있음에도 불구, 그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아예 작정을하고 제일 뒤편의 우리에게 다가와 대뜸 소리부터 지른다 ”어디서들 오는거요? 그러면서 머리는 이게뭐야 (아니 언제부터 헌병이 장발까지 단속하나) 어쩌구,저쩌구 다들 주민증 내놔봐.... 우리는 정신없이 쌓여있는 짐속을 뒤적이는데 더는 볼필요도 없다는 자세로 뒤돌아보며 어이 박일병! 이리와 이새끼들 전부 끌고가 신원조회해봐~~ 그리고 이번 삼척에서 도망간놈들과의 연관성도 확인해~~. 끌고가... “ 하며 우리를 전부 차에서 끌어 내렸다. 일순간 차안은 조용하였고 촌로가 대다수인 승객들 모두는 우리를 걱정하고 있다. 하긴 당시는 짐을 지금과같이 차밑에 싣지않고( 공간이 없다) 다 차안에 올렸는데 우리 여섯명의 키스링(옛날베낭의 일종, 짐이 많이들어간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 많고 많던것들이 다어디갔는지 구경조차 할수없고 박물관에서도 찾기어려우며 요즘 젊은 산악인들은 그 존재 자체를 모르는 이가 허다할것이다) 을 뒤좌석에 겹겹이쌓아놓고 중간중간 끼어앉아 있는 몰골이..... 검게타고 깍지못한 수염과 땀냄새나는 복장에 피곤한 얼굴, 그냥 얼굴에 "나 간첩" 이라고 써 놓았다. 또 생뚱맡지만 그당시 지방, 특히 별로 유명하지 않은 산에 등산갔다가 주민들의 신고로 출동한 예비군의 총구에 텐트에서 자다가 한번쯤 끌려나온 경험이 없으면 산악인들의 명단에 족보조차 올릴수 없던 시절이었다
졸지에 끌려내린 우리는 초소안에 들어서자마자 뒷문으로 빼돌려져서 토종닭백숙에 소주가 정성스럽게 차려진상에서 ”야 빨리먹어!! 소주도 한잔하고 어서~~“ 그자리에는 시간을 아끼려고 백숙은 살과 뼈가 분리되어 있었으며 쏘주도 마시기좋게 큰컵에 미리 따라져있었다 정말 선배님의 마음씀에 무한한 존경을 느꼈다 정신없이 한잔들하고 불과 7 ~ 8분만에 정신없이 차에 오르니 옆의 할아버지, 아줌마들이 별일없었느냐고 걱정해주셔서 괜히 미안하였었다 "그래 얻어 맞지는 않았나베~~~" "예!! 신원조회에 시간이 좀 걸렸는데 엎드려 뻐쳐는 좀했읍니다" 당시 초소장은 헌병중사 이었던걸로 기억하고 병으로는 송선배가 선임이었다 그러면서 송선배님이 나에게 건내준 ”미제사지군용모포 1장" 그담요는 아마 등산갈때 요긴하게 쓰라고 준겄 같은데 등산내내 한번도 써먹을 일이 없었지만 50년 넘게 나의 ”고스톱판“으로는 지금까지 임무수행중이다 화투패를 내려치면 ”딱“ 하며 기가막힌 소리와 함께~~
아니 지금 내가 무슨 얘기하던중이었지? 잠간 아~~ APC 김병장 이야기였지, 그때 마장동에서 그를 찾아 헤매어 보았지만, 글쎄 그말이 빈말이었음을 감지하는데 딱히 오랜시간이 필요하진 않았었고 돌아올때는 당연히 고속버스를 이용하여 편하게 귀경하였었다. 물론 우리가 이용한 "강원여객" 시외버스도 그때그시절 같이 느리지는 않더라고~~~
오늘도 또다시 횡설수설하다 이만~~
졸필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2023. 06. .
장 세 규 재배
옛말에 대장장이네 칼이 녹슬고, 중이 제머리 못 깍는다 했던가... 선배전역자들의 추억록은 정성으로 만들었었지만 정작 본인것은 글쎄~~ 100여장의 원고를 제대로 편집조차 못하고 나왔는데 그중에 몇장 여기 올려봅니다
대한남아의 최고절정기에 군문에서 보낸 3년이, 오랜시간이 지난 이시점에서 반추해보니 너무나 그립습니다.
그 당시 더디게 돌아가는 국방부시계를 원망도 해 보았지만 전역의 날 은 어김없이 와서 지나갔으며 지금
황혼의 언덕에서 그 옛날 작성하였던 "추억록" 을 보니 그시절이 세록새록 생각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