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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최고기록 2:40:16, 달리는 주방장…박상덕
진짜는 요란하지 않다. 시끌벅적 요란스럽고, 화려함을 뽐내며, 잘난 체하는 것은 틀림없이 가짜다. 마라토너도 마찬가지다. 진정한 고수는 자기를 한껏 낮춘다. 이제 달리기에 맛을 들이기 시작한 초보자가 ‘마라톤 예찬론’을 펼치며 온갖 훈련 방법을 들먹여도 조용히 들어준다. 초심자가 풀코스 완주의 고통과 환희를 거론하면 고수는 “전 5km 달리기가 가장 힘들다”며 초급자의 기를 마냥 북돋워 준다.
진정한 고수는 외모도 만만해 보인다. 대체로 눈빛이 선하고, 왜소해 보이며, 악수할 때도 손에서 강한 힘이 전해지기는커녕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는 풀을 잡은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눈과 목 그리고 어깨에 괜스레 힘을 주고 다니며 고수입네 하는 사람들은 십상팔구 가짜로 보면 된다.
내공을 착실히 쌓은 고수는 그러나 운동복으로 갈아입으면 사람이 바뀐다. 갑자기 강렬해진 눈과 바람처럼 유연한 팔과 다리에서 쉽게 다가서기 어려운 기운을 내뿜는다. 달리기를 시작한 지 1년 만에 서브3 주자가 됐고, 마라톤 경력 2년째에 접어든 해에는 2시간40분16초의 풀코스 최고기록을 작성한 박상덕(37)씨. 그에게서도 마라톤 무림(武林)의 고수 풍모가 여실히 엿보인다.
지난 4월 4일 오후 2시,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부근에서 박상덕씨를 만났다. 많은 연습량의 흔적이 배어있는 나이키 카타나 시리즈 운동화를 신고, 같은 브랜드의 트레이닝복을 걸치고 있었다. 러닝 용품 등을 챙겨 넣은 배낭은 작년에 강남 국제평화 마라톤대회에 참가하면서 받은 기념품으로 휠라 제품이었다. 30대 중반이 되며 벗겨지기 시작한 머리칼은 평범한 모자로 가리고 있었다.
영화배우 뺨치게 잘생겼다. 약간 저음인 목소리는 발음이 분명하면서도 조용조용했다. 말이 많지 않았다. 질문에만 대답하면서 요점만 짚어 간단하게 말하고 말았다. 여기에 뭔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 같은 멜랑콜리한 분위기를 풍겼다. 한마디로 여자들이 많이 따를 스타일이었다.
고교 2년 때 현대무용과 만나다
외모만 봐서는 전혀 고수 같지 않았다. 180cm에 67kg이면서도 여윈 인상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날렵해 보이지도 않았다. 볼에 살도 약간 있어서 ‘빨치산처럼 뺨이 홀쭉하게 패인’ 서브3 주자의 전형적인 풍모와도 거리가 멀었다. 자신만의 훈련법을 들려줄 때도 입에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하는 것이 아니라 냇물이 흐르듯 차분했다. 마주앉은 사람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건 10여년 동안 현대무용과 발레라는 여성적이고 유연한 예술을 했기 때문일까.
무용 시작이 늦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예체능 분야에서 빛을 보려면 초등학교 무렵부터 배우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의 경우엔 경기도 하남고등학교 1학년일 때까지는 지극히 평범한 학생이었다. 전기는 2학년 때 찾아왔다.
어느 날 집에서 TV를 볼 때였다. 볼 만한 프로그램이 없어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는데, 그의 눈길을 잡아끄는 프로가 있었다. 바로 뉴욕발레시어터의 내한 공연이었다. 1년 뒤로 닥친 대학입시에서 어느 대학 어떤 과를 택할지, 장래 무엇을 해서 먹고살지 아직 구체적으로 정하지 않았을 때였다. 그런데 TV에서 그 공연을 보며 문득 무용을 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부터 어떻게 하면 무용을 제대로 배울 수 있을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다행히 막내인 여동생이 무용을 하고 있어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었다. 여동생으로부터 남자가 무용을 하기엔 경희대 무용과가 좋을 것이라는 말을 전해듣고 무턱대고 경희대로 전화를 걸어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무용학원을 열고 있던 최성옥이라는 선생님을 소개받았다. 그렇지만 문제가 있었다. 부모를 설득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특히 아버지는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무당이 되려고 하느냐?”며 격렬하게 반대했다. 할 수 없이 부모 몰래 학원을 다닐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회사원이던 작은누나가 그의 생각을 이해해 레슨비를 지원해 주었다.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1980년대 중반인 그때는 무용수, 특히 남자 무용수를 보는 일반인들의 시선이 곱지 못했다. 따라서 남자 무용수는 굉장히 희귀한 존재였다. 음악만 해도 콩쿠르가 적지 않게 개최됐지만 무용의 경우엔 상당히 드물었고, 있다고 해야 여자 무용수를 대상으로 하는 콩쿠르가 대부분이었다.
자신의 무용 실력을 점검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 그는 86 서울 아시안게임 개막식 리허설에 대학의 무용과 학생들 틈에 섞여 참가할 수 있었다. 자신을 가르친 선생님의 소개를 통해서였다. 그리고 이 일을 계기로 1987년 경희대 무용과에 입학했다. 이 일을 두고 그는 “실력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워낙 남자 무용수가 없어서 진학할 수 있었다”며 겸손해했다.
주방 아르바이트에서 주방 매니저까지
현대무용을 전공한 그는 1학년 때부터 꾸준히 교내외 공연에 참가했다. 신체 조건이 좋고, 무용수로서의 실력을 겸비해 꾸준히 주연 아니면 조연을 맡았다. 군복무(1990년부터 92년까지 군예술단에서 복무했는데, 가수 구준엽과 개그맨 홍록기 등이 같은 부대에 있었다)를 하느라 공백기가 있었지만, 1996년 경희대 대학원 무용과를 졸업할 때까지 60여 편의 작품에 출연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1989년 현대무용단이 무대에 올린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이 작품에서 그는 빌라도 역할을 맡았다.
대학원을 마칠 무렵 그는 발레로 방향 전환을 한다. 직업적인 현대무용단이 드물 때여서 안정된 생활을 꾸려가기엔 어렵겠다는 판단이 들어서였다. 1995년, 마침 서울발레시어터라는 발레단이 창단하면서 단원을 모집했다. 이곳에 응시, 오디션을 통과한 그는 창단 단원이 됐다. 현대무용과 발레는 차이가 많다. 발레에서 자유스러움을 추구하며 변형돼 나온 게 현대무용이기 때문에 발레를 하려면 테크닉 자체를 새롭게 익혀야 했다.
그로서는 힘든 시기였다. 공연을 해도 현대무용을 전공한 그에게는 좋은 배역이 돌아오지 않았다. 기껏 맡겨지는 역할은 그쪽 속어로 ‘꼬다’라고 하는, 주요 등장인물 주변을 맴돌며 병풍처럼 받쳐주는 역이었다. 차츰 시간이 흐르며 조연 정도는 맡게 됐지만, 발레 전공자를 중심으로 한 텃세는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사람은 재미로 산다. 일이건, 취미건 흥미로운 일이 있어야 팍팍한 생활을 견디는 것이다. 정신적인 면뿐만이 아니라 체력적인 측면에서도 발레에 한계를 많이 느끼고 있던 시기에 그는 재미있는 일을 하나 발견했다. 바로 요리였다.
당시 서울발레시어터는 서울 강남의 안세병원 건너편 건물 5층에 있었다. 그리고 그 1층에는 패밀리 레스토랑인 토니 로마스(TONY ROMA'S)의 압구정점이 있었다. 오후에 시간 여유가 많이 났던 그는 시간도 보내고 돈도 벌 겸 이 식당 주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야채를 씻고, 칼로 자르는 일이었다. 처음 해보는 서툰 일이어서 손도 베고, 기름에 화상도 자주 입었지만 이상하게 재미있었다.
재미를 느끼니까 당연히 열심히 일했고, 이렇게 7∼8개월 아르바이트를 하자 아예 정식 요리사로 들어오라는 제의가 들어왔다. 며칠 고민하던 그는 10여년 동안 젊음을 바쳐온 무용을 접기로 결심했다. 척박한 우리 현실에선 무용과 생활을 병행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1997년 12월, 그는 토니 로마스에 요리사로 정식 입사했다. 토니 로마스는 미국에서 처음 문을 연 식당으로, 현재 서울에 7개 매장이 있다. 매뉴얼과 레시피(조리법)는 모두 미국 본사로부터 받고 있다. 직원들은 서울의 7개 매장에서 순환 근무를 한다.
주방의 경우 평직원-주임-주방 매니저(주방장)라는 서열이 있다. 그의 경우엔 양식 조리사 자격증을 취득한 2002년에 주방 매니저가 됐다. 현재 그가 일하고 있는 강남역점의 직원은 아르바이트를 포함, 40명이다. 작은 규모의 식당이 아닌 것이다. 주방에서는 매니저인 그를 정점으로 15명이 근무한다.
잘 알려진 대로 주방의 군기는 상당히 세다. 칼과 불을 다루다 보니 한번 사고가 나면 대형 사고가 발생할 우려가 있어서 안전사고 방지 차원에서 아랫사람들을 엄격하게 다루는 것이다. 주방 가운데에서도 호텔의 군기가 가장 센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일을 소홀히 하면 바로 칼이 날아간다”는 좀 과장된 얘기까지 전해질 정도다.
그는 이 같은 야만적인(?) 방법을 피하고 있다. 주방 분위기를 자유스러운 쪽으로 유도하려는 편인데, 부득이하게 기합을 줄 일이 있으면 레시피 필기 시험을 본다. 그는 처음 요리를 배울 때 조리법을 외우느라 무척 고생했다. 어떤 면에선 대학입시를 준비할 때보다 공부를 더했던 것 같았다. 그래서 잠깐 딴청을 부린 직원에게는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하는 한편 공부도 시킬 겸해서 레시피 암기 시험을 보는 것이다.
달리기는 체중조절 위해 시작
보통 1주일에 5일 근무한다. 근무 시간은 정오에서부터 밤 9시까지. 서비스업이다 보니 남들 쉬는 휴일에 근무하고, 하루 종일 뜨거운 불 옆에 서서 일해야 한다. 사우나를 방불케 하는 주방 근무는 강한 체력을 요구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요리사가 거의 대부분 남자인 이유다.
자신의 음식점을 차리는 것은 모든 요리사의 꿈이다. 하지만 그는 아직 시기상조라고 생각하고 있다. 무용과 마찬가지로 요리도 창작, 곧 예술이라고 여기는 그는 아직도 현장에서 배워야 할 게 너무 많음을 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용을 그만두고 요리에 빠져있다 보니 날씬하던 몸이 망가졌다. 체중이 75kg까지 불은 것이었다. 무슨 운동을 할까 궁리하고 있던 중에 또 TV가 답을 주었다. 쉬는 날, 텔레비전을 켰더니 마라톤대회를 중계하고 있었다. 아마도 서울마라톤대회였던 것 같다. 눈이 내리는데도 신이 나서 달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무척 부러웠다. ‘바로 저거야!’라는 생각에 그는 즉시 TV를 끄고 달리러 나갔다. 2002년 3월의 일이었다.
당시 경기도 마석에 살고있던 그는 대부분의 초보자들이 그렇듯이 동호회 가입은 생각도 하지 않은 채 혼자서 조깅을 즐겼다. 그러면서 마라톤에 대한 이론과 정보는 인터넷을 통해 구했다. 가장 최근에 열릴 대회를 검색하다 보니 북한산 산악마라톤대회가 눈에 띄었다. 처음 데뷔 무대는 특이한 대회를 통해서 하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10여년 동안 무용으로 단련된 강한 다리에 대한 자신감이 있어서 산악마라톤을 얕잡아보는 마음도 있었다.
그해 봄은 잔인했다. 북한산 산길을 15km 정도 달리는 대회였는데, 그는 3시간 가량 걸려 겨우 완주한 뒤 1주일 동안 다리 근육통으로 고생해야 했다. 이 대회 우승자는 산악 마라톤의 강자인 남궁만영(37)씨였는데, 험난한 산길을 훨훨 날아다니는 그의 모습은 신선한 자극이었다.
그리고 그해 초여름, 처음으로 평지를 달리는 대회에 참가했다. SAKA에서 주최한 하프 마라톤대회였는데, 첫 출전이면서도 1시간40분대라는 좋은 기록으로 결승점을 밟았다. 하지만 히딩크 감독처럼 그는 대회에 참가할수록 배가 고팠다.
처음 참가한 마라톤대회 우승자는 이지원(35)씨였는데, 그가 반환점을 향해 달릴 때 이미 결승점을 향해 돌아오고 있던 이씨의 모습이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대회가 끝난 뒤 챔피언인 이씨가 수원사랑마라톤클럽(약칭 수사마) 소속이라는 것을 알게 됐고, 그 클럽의 훈련 내용을 알아보니 ‘빡세게’ 연습을 하고 있어서 그는 수사마에 가입하기로 결심했다.
회원이 20여명밖에 안 되는 수사마는 실제로 훈련이 체계적이면서도 혹독했다. 화요일에는 인터벌 훈련, 목요일엔 평균 10km의 지속주 그리고 토요일엔 광교산에서 하프 거리를 달렸다. 요즘은 자신의 집이 있는 서울 수유리에서 수원까지의 거리도 멀고, 직장 일도 많아 수사마 정기 훈련에 자주 참가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고수 마라토너 박상덕’을 키운 것은 8할이 수사마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첫 풀코스는 달리기를 시작한 2002년에 완주했다. 춘천 마라톤에서였다. 다리에 쥐가 나서 누웠다가 뛰는 등 고생을 엄청 했지만 3시간36분46초라는 좋은 기록으로 피니시 라인을 통과했다.
마라톤을 하면서 무용 덕을 톡톡히 보고있다. 우선 보통 사람들보다는 하체가 훨씬 발달해 있다. 종종 “육상선수 출신 아니냐?”는 얘기를 듣는 것도 잘 단련된 하체 근육 때문인 듯하다.
또 하나는 유연한 몸이다. 무용도 연습이나 공연 전후에 스트레칭을 열심히 한다. 몸이 부드러워야 부상을 방지하고, 에너지 소모도 적기 때문이다. 짧은 마라톤 경력에도 그가 고수의 반열에 들어선 데는 꾸준한 훈련과 더불어 이 ‘무용 효과’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한 달에 평균 350∼400km, 1주일에는 보통 90∼100km를 달린다. 주중 훈련 프로그램은 하루는 강하게, 다음 날은 약하게 실시하는 강-약의 리듬을 중시한다(관련자료 <표2> 참조). 훈련 장소는 대체로 집 부근의 야산과 중랑천 둔치 그리고 트랙이 있는 잠실 보조경기장 등이다. 토니 로마스 명동점에 근무할 때는 1주일에 사흘은 수유리 집에서 명동까지 10.5km를 뛰어서 출퇴근하기도 했다.
2시간30분대 진입이 목표였던 금년 동아 마라톤을 앞두곤 한 달에 600km의 훈련량을 소화했다. 그러나 대회 당일 13km 지점부터 발바닥에 통증이 와서 레이스를 포기했다. 부상은 아니었고, 작년에 일본에서 직접 사온 신발을 신었는데 밑창이 너무 얇아 탈이 생긴 것 같았다. 무리하면 진짜 부상으로 진행, 한동안 달리지 못할 것 같아 기권을 결심했다.
근력 운동은 전혀 안 했다. 최근에야 헬스클럽에 등록해 복근 운동과 가벼운 중량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중요한 대회를 앞두곤 식이요법을 한다. 작년까지는 대회 1주일 전 월·화·수요일은 고기로만 식사를 하는 교과서적인 식이요법을 실시했다. 그러나 체중이 3kg이나 빠지면서 몸에 면역력이 떨어지고, 기운이 빠지며, 심하면 구토까지 하는 등 무리가 와서 올 동아 대회를 앞두곤 좀 소프트한 식이요법으로 바꿨다.
체중이 조금만 더 빠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만, 음식량으로 조절할 생각은 없다. 아무거나 잘 먹는 편이다. 단, 식탁에 녹색 채소를 빠뜨리지 않는다. 꾸준히 달리는 사람들은 비타민이 많이 함유된 녹색 채소를 많이 섭취하는 게 좋기 때문이다.
독신주의자는 아니건만 여태 혼자 산다. ‘여자들과 함께 지내는 무용수 생활을 10여년 하다보니 여자 아쉬운 걸 몰랐다’는 아쉬움이 드는 요즘이다. 참한 여자와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2시간30분대 초반의 마라톤 기록을 작성하며, 자신이 만든 음식을 먹고 손님들이 흡족하게 웃는 ‘3가지 목표’를 향해 그는 오늘도 조용히 자신과의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박상덕 약력]
·1968년 서울 출생
·박정원(70)-어윤순(73)씨의 2남3녀 중 넷째(차남)
·신천중-하남고-경희대 무용과(87학번)-경희대 대학원 무용과(94학번) 졸업
·1990∼1992년 군예술대에서 복무
·1995∼1997년 서울발레시어터 단원
·1997년 12월 패밀리 레스토랑 ‘토니 로마스’에 요리사로 입사. 현재 토니 로마스 강남역점 주방 매니저
·2002년부터 다이어트 위해 달리기 시작, 금년 4월 현재 풀코스 8회 완주
·최고기록-10km 34분34초, 하프 마라톤 1시간16분54초, 마라톤 2시간40분16초
·수원사랑마라톤클럽 회원
·180cm, 67kg, 신발 사이즈 280mm